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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5: 3 함께 있는 것 같이 - 고전 5: 5 육신은 멸하고
고전 5: 3 함께 있는 것 같이 -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
고린도 교회가 용납한 악이 용납해서는 안 될 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도 바울은 비록 몸으로는 떠나 있었지만 영으로는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거기에 있어서 그 악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다. 그 악한 자가 그 죄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였다.
교회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단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치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할 것이다.
1]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바울은 비록 몸으로는 떠나있었지만, 영으로는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거기에 있어서 그 악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다.
그 악한 자가 그 죄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그는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였다.
'몸으로 떠나 있다'(*, 아폰)라는 표현은 그 의미가 매우 선명하다. 그는 지금 고린도 지방을 떠나 제3차 전도 여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있다'로 번역된 헬라어 '파론'(*)은 '곁에 있다', '가까이 있다' 또는 '왔다'라는 뜻을 가진 '파레이미'(*)의 현재 분사형이다. '파레이미'는 공관 복음서에서 '왔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눅 11: 6 -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 행 17: 6 -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행 17: 6에서는 '이르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본 절에서는 몸이 떨어져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영은 그들과 '함께 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골 2: 5 -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영'이라는 표현은(*, 토 프뉴마티) 바울에게 있어서 주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롬 8: 9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고후 3: 17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 갈 4: 6 -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서는 바울 자신의 '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마음'(*, 카르디아)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Farrar). 즉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와 영으로, 곧 마음으로 함께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아울러 본 절의 심각성을 생각할 때 바울이 영으로 그들과 함께 하여 문제를 해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심정이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2]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바울이 가증한 범죄자를 처리하면서, 음행한 자들에 대한 바울의 태도는 매우 단호하다.
그는 '에고'(*, '내가')의 강조 용법과 함께 '에데'(*, '이미')라는 부사와 '판단하다', '정죄하다', '심판하다'(*, 크리노)의 완료직설법 능동태인 '케크리카'(*, '판단하였다')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을 향한 심판이 이미 선고되었음을 강조한다.
헬라어 본몬에서 '함께 있어서'(*, 파론)라는 말에 이어 다시 한번 반복된 '호스 파론'(*, '거기 있는 것 같이')이라는 표현은 판결의 순간에 그들과 함께 실제로 있었던 것과 같은 확실성과 자신이 함께 한 심판의 권위가 다시 번복(飜覆)될 수 없다는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1) 주 예수님의 이름(곧, 권위)의 능력으로만 하도록 생각하였다.
(2) 교중(敎衆)과 함께 그 권징(勸懲)을 실시하도록 생각하였다.
이것이 교회의 일반적 권징 원리이다.
고전 5: 4 함께 모여서 -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인다는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잘 나타낸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인간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권징한다는 말은 교회의 권세의 원천을 증거한다. 교회의 권세와 권위, 교회 힘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의 권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위에 근거하여 시행된다. 사람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 자체에는 권징의 권위도 효력도 없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권징 하므로 권위가 있고 효력도 있다.
1]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바울은 자신의 판단이 독단적이거나 편협된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그들이 스스로 모임을 하고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음행한 자들을 징계할 것을 촉구한다.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 속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여야 하며 그곳에서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자 하였다.
여기서 '예수의 이름'과 '예수의 능력'은
(1) 일차적으로 분열된 그들을
하나로 모으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며
(2) 이차적으로는 음행하는 자들을 추방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3) '너희가 함께 모여서'의 헬라어 '쉬나크덴톤'(*)은
부정 과거 분사로서 그 일들의 결정을 위한 단회적 모임을 시사하며, 동사 '쉬나고'(*, '모이다')는 그리스도인의 집회를 나타내는 전문적인 용어로 이 모임이 그리스도인들만의 모임 임을 시사한다.
2]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예수의 이름과 능력(能力)이 함께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판단 기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음행한 자에 대한 징계가 정당하고 합법적임을 증거하며 나아가 교회의 징계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Harris).
따라서 예수 안에서 자신의 영이 그들과 하나가 되어 이미 그가 판단한 것과 같은 판단을 내려줄 것을 바울은 기대하였다.
고전 5: 5 육신은 멸하고 -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
사탄에게 내어줌은 제명 출교의 권징을 가리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세상은 사탄이 어느 정도 지배권을 행사하는 곳이다.
육신이 멸한다는 말은 사탄에게 내어준 바 된 결과 육신의 질병 등으로 죽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한다는 것은 영으로는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은 자로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주 예수의 날'은 1: 8에서도 그러했듯이 주의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 권징의 일차적 목적은 그를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그를 회개시키는 데 있다. 권징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오히려 죄를 회개할 기회가 없겠지만, 권징할 때 죄인은 회개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1]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딤전 1: 20도 그런 표현을 함)은 제명출교를 가리킨다고 본다.
* 딤전 1: 20 -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세상은 사탄이 어느 정도 지배권을 행사하는 곳이다.
* 요일 5: 19 -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사탄에게 내어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질병과 고통에 걸리게 됨을 의미한 듯하다. 이런 권능이 있는 권징은 사도들만이 할 수 있다.
* 행 5: 1-11 – 아나니나와 삽비라 –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 행 13: 9-11 – 9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 고후 10: 8 -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 고후 13: 10 -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딤전 1: 20 -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본 절은 3절의 '판단하였노라'(*, 케크리카)와 연결된 것으로서 연결의 엄숙한 조치를 가리킨다. (Deissmann). 다이스만은 '내어주다' (*, 파라두나이)라는 단어를 이교도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주장하여 사탄에게 내어 주는 행위가 저주의 선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어주다'라는 말을 꼭 이방인의 저주 의식에서 유래된 단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바울은 이 단어를 범죄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으로서 선포하고 있다. (Lenski).
따라서 바울은 교회가 책임있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그러한 자들을 출교시킬 것을 권고하였다(13절). 이러한 표현은 딤전 1: 20에도 나타나는데 그들의 출교는 일차적으로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성도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고린도 교회의 순결한 영혼들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편 우리는 본 절에서 중요한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보호하심 아래 머물러 있는 반면 교회 밖은 그리스도의 지배하심에서 떠난 사탄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였다. (Calvin).
따라서 출교는 사탄에게 내어 주는 멸망의 극단적인 조치로서 그들에게 있어서는 제일 큰 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토록 극단적인 조치가 취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그들 가운데 있는 음행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이었는가 하는 것을 반영해 준다.
2]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해석상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육체의 죽음을, 속죄받지 못한 죄들을 속죄하는 수단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으나 본 절에서 이와 같은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다는 뜻이다. 성경에는 영과 육이 따로 분리되어 구원받거나 멸망 받는 일에 대하여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둘 다 구원받든가 둘 다 멸망하든가 해야 한다. (Lenski).
육신이 멸한다는 말은 사탄에게 내어 준 바 된 결과 사고나 몸의 병 등으로 죽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한다는 말은 영으로는 회개하여 주 예수의 날, 곧 그의 재림의 날에 구원받은 자로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라고 본다. 권징의 일차적 목적은 그를 버리는 데 있지 않고, 그를 회개시키는 데 있다. 권징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오히려 죄를 회개할 기회가 없겠지만, 권징할 때 택함 받은 죄인은 자신을 돌아보고 그 죄를 회개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특히 바울은 다른 모든 구절에서 속죄는 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본 절의 육신의 멸망과 영의 구원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칼뱅(Calvin)은 전반부에 등장하는 '내어 준다'라는 말의 법정적, 선언적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사탄에게 내어 주는 행위는 일시적(一時的)인 것으로서 궁극적인 심판과 구원에 선행하는 임시 조치라는 뜻이다.
음행한 자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는 교회의 심판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기 때문에 궁극적이며 영원한 그리스도의 심판에 의하여 그의 운명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된 사랑의 원리인 징계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 그들에게 미칠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올바른 징계를 행함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야 한다.
따라서 육신은 멸하고란 말씀은, 신체가 망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죄악성과 부패성이 멸하게 됨을 이름이다.
바울은 '주 예수의 날'이라는 구절을 첨가함으로써 그 징계받은 죄인들을 주의 백성들 가운데서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따라서 본 절에서 범죄자에 대한 징계의 목적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징계는 범죄한 영혼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이나 유기가 아니라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일시적 고난이며 구원을 전제로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본 절은 특히
(1) 범죄자를 그대로 방치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라 무관심의 소치로서 그 사람을 멸망에 빠뜨리며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타락케 만드는 범죄라는 사실.
(2) 참된 징계의 정신은 사랑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교훈해 준다.
주 예수의 날"은, 주님의 재림날을 가리킨다. 이 구절을 보면, 교회의 권징은 범과자(犯過者)의 구원을 목적하고 영구(永久)한 유기(遺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것을 예배행위(禮拜行爲)로만 실시한다.
증오(憎惡)와 심판의 동기로 행하는 근대 교회의 권징은 실상 교회에 해독만 끼친다.
* 갈 6: 1-2 –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교회가 주 예수의 능력으로 그런 범죄자를 사탄에게 내어준다는 말은 교회의 권세의 원천을 증거한다.
교회의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다. 권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근거하여 시행된다. 권징의 효력은 단지 교회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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