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성격상 경어체는 생략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외모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살아간다. 유전자 복제를 통해 똑같은 외모의 사람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살아가는 환경과 접하는 시각이 모두 같지 않은 이상 100% 같은 인간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다름의 미학'이 만들어가는 즐거움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이효리처럼 생기고 모든 축구 선수들이 지네딘 지단이라면 그것만큼 끔직한 일이 또 있겠는가 말이다.
축구 선수들의 개개인적 스타일이 모두 틀리듯이 그들을 지휘하는 감독들의 스타일도 천차만별이다. 공격적인 축구를 선호하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마치 "수비는 내 운명" 인듯 뒷문을 튼튼히 하는 성향의 감독도 존재한다. 팀을 지도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갈린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압도하는 성향의 감독들도 있고, 옆집 아저씨나 형처럼 선수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감독들도 적지 않다. "어떠한 스타일이 가장 올바른가?"에 대해서는 축구의 신이 온다 하더라도 뚜렷한 답을 낼 수 없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훌륭한 팀은 역사적으로 선수단과 감독 그리고 구단이 스타일상 좋은 하모니를 냈다는 사실이다.
흔히 감독들의 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지장', '덕장', '용장' 등의 해묵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근래 유럽 축구판에서 성공한 감독들을 보면 한 가지 스타일로 정의하기에는 광범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들도 있다. 귀신도 혀를 내두를 뛰어난 전략가이면서도 데이빗 베컴의 귀하신 대갈빡에 스파이크 자국을 내버리신 알렉스 퍼거슨을 단순히 지장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표현하기에는 그가 가진 선수단 장악력이 아깝다. 또한 타 클럽 감독들과의 신경전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같은 조세 무링요 역시 뛰어난 전략가라는 이면을 가지고 있어 스타일의 정의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부류의 감독들이 좋은 성적을 내온 탓인지, 언제부턴가 선수들을 덕과 인화로 장악하는 - 슬램덩크의 안선생같은 - 감독들은 무르다(?)라는 이유로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것도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적으로 지난 시즌 슈투트가르트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새롭게 조명받은 아어민 페(46, Armin Veh)는 눈여겨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지난 시즌을 돌이켜 봤을 때 페는 오트마 히츠펠트와 토마스 샤프처럼 지략을 바탕으로 '승부사'적 기질을 가진 감독은 아니었다. 또한 전임 지오반니 트라파토니처럼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장악하는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을게다. 페는 선수단에 대한 끈질긴 인내와 이해라는 점에서 어쩌면 크리스토프 다움과 교집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기부여의 방식에서는 역시 다움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종합하자면 그의 스타일은 기존 분데스리가에서 잘 볼 수 없었던 '덕치'의 지도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자신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필요로 하는 연령대의 선수들이 많은 젊은 슈투트가르트의 쾌속 질주를 가능케 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인 페는 현역 시절과 지도자 경력 양면에서 모두 변변치 않은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출신인 페는 78년 FC 아우구스부르크를 통해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그 이후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시절 65경기에서 3골을 기록했던 평범한 선수였다. 감독 생활도 그랬다. 자신의 친정팀인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다지 주목받는 감독은 아니었고 슈투트가르트를 맡기 전 분데스리가 감독 경력이라고 해봐야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하위팀 한자 로스톡의 감독을 맡은 것이 전부였다. 덕분에 트라파토니라는 명장의 바통을 이어받은 페에 대해 많은 팬들이 의구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팬들은 페가 슈투트가르트같은 빅 클럽을 맡을 수 있는 밑천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더군다나 욘 달 토마손, 예스퍼 그론카르 등 팀의 베테랑 선수들을 내치고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팀을 꾸린 페의 방식도 논란의 도마위에 올랐다. 어떤 이들은 과도한 도박이라고도 했고, 때로는 마치 슈투트가르트 유스팀을 보는 것 같다는 조롱도 뒤따랐다. 그러나 온화한 성격으로 인화를 중시하는 페의 지도 방식은 젊은 선수들의 포텐셜을 한껏 살려주었다. 페는 한 번 신임한 선수에 대해서는 좀처럼 입장을 바꾸는 일이 없었고 사기가 올라간 슈바벤의 젊은 사자들은 뛰어난 활약으로 이러한 페의 믿음에 보답한 것이다. 세르다 타스치, 사미 케디라, 로베르토 힐베르트, 마리오 고메즈 등의 영건들이 그 믿음의 산물들이다. 페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적인 유대감으로 뭉친 슈투트가르트는 막판 우승권 레이스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결국 15년만에 마이스터샬레를 품에 안게 된다.
실제로 페는 평소의 행동부터가 굉장히 겸손하고 인간적이다. 그가 한자 로스톡의 감독직에서 물러난 계기는 가족 문제였다. 페는 "어떠한 관점에서 로스톡 감독직을 사임한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이 세계에서 누가 자신을 위해 감독직을 그만둘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랬다"라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실제로 분데스리가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페에 대해서는 그 이후로도 좋지 못한 평판이 따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페는 여유와 겸손을 잃지 않았다.
슈투트가르트가 그를 선택했을 때 페는 빗발치는 여론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한 몇몇 부정적인 입장을 알고 있다. 확실히 나의 경력은 뛰어나지 않다. 나는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라며 팬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후반기 들어 부쩍 힘을 내며 우승 가능성을 높게 평가받을 당시에도 "시즌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리의 힘을 믿으며 최선을 다할 뿐"이라며 자세를 낮췄다. 심지어 리그 우승이 확정된 이후 뉘른베르크와의 DFB 포칼을 앞둔 시점에서도 페는 신중함과 겸손을 잃지 않았다. 도이치 마이스터의 감독으로서 한 번쯤 호기를 부려볼만도 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페는 그라운드 내에서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자신만의 뚝심과 선수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한 화끈한 공격 축구로 상대방을 얼어붙게 했다.
다음 시즌 슈투트가르트의 전망은 사실 그리 밝지 않다. 남독 라이벌 바이에른 뮌헨은 지난 시즌의 삽질을 돈으로라도 만회해야 겠다고 생각했는지 무려 7,000만 유로의 급전을 땡기며 무차별 영입을 완료했다. 슈투트가르트의 기세에 밀려 또 다시 2위에 그친 샬케와 막판 우승 레이스에서 탈락한 3위 브레멘 역시 객관적인 전력상 슈투트가르트에 뒤쳐지진 않는다. 또한 그들의 젊은 선수들이 챔피언스리그와 같은 큰 무대에서 얼마나 제 실력을 발휘할 지에 대해서도 검증된 바는 없다. 하지만 나는 슈투트가르트가 다음 시즌에도 우승권 언저리에서 사투를 벌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 기대의 중심에는, 조금 우습겠지만 페가 있다. 돈으로 만든 스쿼드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지만 인간적인 유대가 중심이 된 팀은 위기 상황에서도 120%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이 있는 탓이다.
페는 바이에른의 스쿼드 올스타화와 다음 시즌 전망에 대해 "바이에른이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임에는 틀림 없지만 우리도 노력할 것"이라는 특유의 겸손한 멘트로 다음 시즌에 대한 전망을 대신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비춰진다면 곤란하다. 팀과의 장기 계약을 마다하고 계약 기간을 1년만 연장한 페는 "팀 성적이 좋으면 또 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며 은근한 자신감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분데스리가에서의 우승 한 번으로 그를 명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페가 앞으로의 감독 커리어에서 명장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주길 기대한다. 돈으로 모든 것이 구분되고 그 돈을 위해 전력질주하는 것보다는, 지난 시즌 슈투트가르트처럼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인간적인 팀을 완성하면서 말이다.
http://blog.naver.com/skullboy
P.S 독일 전차군단 카페 'skullboy'님의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존경하는 분입니다. 한국내 독일축구계에서 상당한 지위(?)에 올라서 계시면서도 타 독일&분데스 축구팬들과 같이 어울려(?) 지내시면서, 많이 겸손하시고, 질문도 잘 받아주시죠..ㅎㅎ 보시다시피 필력도 놀라우리만치 좋으시고요.. 저도 이분을 본받고 싶지만, 아직은 태산앞에 뿌려진 모래 한줌 정도..ㅜㅜ
첫댓글 아쉽지만 07-08은 뮌헨 우승
슈바벤 힘내길! 더불어 고메즈도 챔스서 통한다는걸 보여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