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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한 말씀이 지상적인 것의 형상을 지니는 이유
/ 요한복음 서문
윌리암 브루스 지음/배제형 옮김/스베덴보리 관련서적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디모데후 3:16)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베드로후 1:21)
기원에 있어서 신성한 성경은 본질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다.
그래서 성경은 실제로나 명목상으로나 공히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의 주님께서 높이 계신 지존하신 분을 우러러보며
아버지께 ‘당신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 17:17)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오류 없는 단순히 진실한 것 정도가 아니라
빛이시며 어둠이 전혀 없는 분으로부터 나오는 진리 자체다.
(요한1서 1:5)
그러나 말씀인 진리는
외부에 보이는 진리와는 다르다.
말씀은 가장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계시로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말이나 언어로 표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라는 형태로 옷 입혀진 신성한 마음의 계시다.
그러므로 계시는 신성과 인간이라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계시는 신성 측면에서 절대적 진리이고
인간 측면에서는 상대적 진리이다.
말씀 속의 절대적 진리는 신성한 저자(Author)처럼
영원하고 불변하며 보편적이다.
그러나 말씀의 상대적 진리는 인간 저자들처럼
일시적이고 변할 수 있으며 제한적(local)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적 진리는
성경에서 언급하는 우주의 기원, 과학, 역사,
심지어 교회 제도나 교회 법 등등에 드러나 있지 않다.
이런 것들은 각각의 말씀이 씌어지게 된 시대에 속하는
인간의 사고(thought)의 형태이며
신성한 진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의 거처로 내려왔을 때
그 진리 자체가 옷 입은 인간적 그릇일 뿐이다.
신, 구약 성서는 이에 대한 가장 놀라운 보기(example)들이다.
계시는 히브리 사람들의 마음에 내려오면서
히브리 사람들의 생각의 형태로 옷 입혀졌다.
그런 이유로 성서의 많은 부분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특이한 백성의 역사로 구성되고 있고
대부분의 성서 가르침이 그들의 특수한 정신 발달 상태와
불완전한 영적 식별력에 맞춰져 있다.
히브리 성경은
영혼의 불멸에 관한 직접적인 계시를 담고 있지 않으며
일시적인 보상이나 처벌밖에 더 말하는 게 없다.
이혼에 관한 법과 그 외에 다른 법들이 그들에게 주어졌는데
이는 그들의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희생 제사제도는 현존하던 관례(existing ritual)를
육신적일 뿐인 그들의 상태에 적합하게 한 것이었다.
신약성서는 그들보다 더 높은 마음 상태에 보내지고 있다.
생명과 불멸이 복음에 의해 밝혀지고
영(Spirit)으로서의 하느님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되어야 하며
의식절차(ordinance)에 관한 법이 폐지되었고
도덕적인 법(moral law)이 더 높은 표준으로 들려졌다.
이런 놀라운 차이가
말씀의 글자 안에서 선명해지는 동안
말씀의 신성(Divinity)과 영성(spirituality)은 어디서나 똑 같고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말씀의 어떤 부분들은 다른 부분보다
신성과 영성이 더 깊고 완전하게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모든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
그러나 그분의 영적이며 생명 있는 말씀은
서로 다른 정도의 투명성을 가진
글자적 형태의 표현으로 나타내어진다.
(His spiritual and living words are embodied in literal forms
of expression having different degrees of transparency,)
그렇다고 글자라는 형태만을 떼어 생각한다면
그것은 살아있지 않고 따라서 생명을 주지도 않는다.
글자는 죽이나 영은 생명을 준다.(고후 3:6)
우리가 지금 언급하는 차이점(distinction, 구분)은
성경의 어떤 부분에 대한 권위를
신성에 두느냐 아니면 오직 인간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느냐
라는 일부 주석자들의 구별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되면 그 이론은 말씀을 영감을 받은 부분과 받지 않은
두 부분으로 나누기 때문이다.
사도(시대)의 교리는 이러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모든 말씀은 신적이며 또 인간적이다.
즉 본질 측면에서는 신적이고, 형태 측면에서는 인간적이다.
계시의 한 부분(part)이 아닌, 한 측면이 신적이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인간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정식으로 인간 측면에 해당되는 것도 본질적으로 신성이다.
설사 말씀의 글자적 형태가
인간의 상태라는 틀에 넣어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그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신성이 현존하는 성전을 위한 재료들은
실로 인간에 의해 공급되었으나
그것을 만드시고 건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전을 위한 돌들이
인간 마음의 채석장에서 거칠게 다듬어졌을지 모르나
건축하는 동안 인간의 망치나 정이나 그 어떤 연장을 다루는 소리도
거룩한 성전에서 들리지 않았다.(열왕기상 6:7)
여타 다른 사항들과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
씌어진 말씀(the written)은 육체를 입으신 말씀과 같다.
영원한 말씀이신 하느님이
천국으로부터 인간 사이에 있는 성막으로 내려 오셨을 때
그분이 자신에게 옷 입힌 인성은
‘동정녀 어머니’의 자연성(nature)으로부터는 인성의 바깥 형태를,
그 여자의 심정 상태로부터는 인성의 품질(quality)을 취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여자의 의지에 의해 비롯되거나 형성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독생자(Begotten of God), 따라서 내적으로 신성인 인성은
탄생 후에 인간의 의지나 능력과는 무관한
창조의 신성한 법칙에 의해 기묘하게 가공되어 갔다.
육을 입은 말씀처럼 계시된 말씀도 인성을 옷 입은 신성이다.
신성 측면에서의 말씀은 주님의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모든 것이었고,
인간 측면에서의 말씀은 주님의 사람의 아들로서의 모든 것이었다.
주님의 어머니 쪽에서 받은 인성처럼 말씀의 자연적 의미는
말씀의 인간 쪽 출처에 대한 표시들을 나열하고 있다.
(Like the maternal humanity of the Lord,
the natural sense of the Word exhibits signs of its human parentage.)
육을 입은 말씀에 관해 말해진 것은
계시된 말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이사야 53:2)
“그의 얼굴이 다른 사람보다 더 상하였고
그의 모습은 사람의 아들보다 더 상했다.”(이사야 52:14)
말씀의 글자는 인간의 작문 솜씨로 가늠하면
대단한 칭송을 받을만한 스타일이 결여되어 있다.
게다가 글자가 기록한 사건의 많은 부분이
도덕적 결함까지 생산해놓고 있다.
말씀이 계시된 당시 인류의 상태가 덜 타락했더라면
말씀의 바깥쪽 형태와 모습은 분명히 크게 달랐을 것이다.
인간의 죄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십계명의 돌판에
만들어낸 것과 비슷한, 말씀의 바깥쪽 상태의 변화를 가져왔다.
모세에게 처음 전달된 계명은 하느님의 작품이었던
돌판 위에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씌어졌다.(출 32: 16)
그러나 백성들이 금송아지 주위를 빙빙 돌며 춤추는 것을
목격한 모세는 격분한 나머지 돌판을 내던져 깨뜨렸다.
이 때 모세는 자기가 깨뜨린 것과 같은 두 돌판을
깎아 만들도록 지시받았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이 돌판에 그분 스스로 만드셨던
첫 돌판에 씌어있던 동일한 신성한 말씀들을 적어주셨다.
따라서 인간의 죄가 없었다면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그 위에 새겨진 영적 의미가 하느님의 기록인 것처럼
그것도 하느님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말씀이 인간이라는 수단을 통해 주어진 것이
아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씀 안에는 단지 인간에 속한 것은 적고
신성에 속한 것이 더 많았을 것이며
그 구성에 있어서도 세상적인 것은 적고
천국적인 것이 더 많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랬다면 말씀의 글자는
말씀의 영의 더 완전한 이미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노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어떤 표시도
담고 있지 않았을 것이며,
타 국가나 그 백성을 학살하고 그들의 유산을 차지하라는 명령도,
다첩제에 관한 어떤 언질도, 죽인 짐승의 피를 그분께 바침으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도 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씌어있는 말씀에 흠이 있다거나
불완전한 말씀이라고 상상하려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 반대로, (그런 내용이 담겨있는) 말씀의 글자는
성경의 완전함의 증거로서, 또 유익한 목적을 위한 지혜의
수단으로서 정당하게 여겨져야 한다.
그 자체로 더 완전한, 즉 절대적인 진리에 더 일치하도록
표현된 계시의 형태는
인간의 불완전한 본성과 타락한 상태에 덜 적합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부적절했을 것이다.
신성한 말씀이 지상적인(earthly) 것의 형상을 지니는(bear) 이유는
지상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
그를 신성의 형상과 천국의 상태로 들어올리기 위해서다.
말씀은 그 말씀을 받은 자들처럼
지상적인 형상을 지니고 있는 반면 그 자체 안에는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 가르침을 진심으로 따르는 사람들까지
높이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말씀의 어떤 부분은 난잡하고 세속적으로 보이지만
그것은 계시의 가장 완전한 형태가 담고 있을 만큼 순수하고
거룩한 영에 의해 생명이 불어넣어진 말씀이다.
불타는 덤불 속에서 천사를 통해 말씀하신 분과 동일한 하느님,
또 금 촛대 가운데 계신 사람의 아들로부터 빛을 발하신 분과
동일한 하느님이 마리아의 아들 안에 계셨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돌판 위에 씌어진 것과
동일한 신성한 말씀이 모세가 만든 돌판 위에 씌어졌다.
따라서 우리가 소유한 말씀은
마치 신성한 손에 의해 보다 직접적으로 설계된 것처럼
신성이 현존하시는 그런 성전이다.
위 전체를 요약할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생각해보자.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신성한 역사가
빛의 문자로 그 위에 씌어진 지상의 돌판에 불과하다.
(The history of Israel is but an earthly tablet,
on which are written, in characters of light,
the Divine history of man’s regeneration.)
이스라엘의 속박과 구원, 위험과 탈출, 궁핍과 공급,
고난과 승리, 지친 순례와 영원한 안식 등은
하느님께서 영적 교회의 표징으로 선택된 백성의
글자적 역사 위에 새기신 신성한 계시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외부에 있는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그 안에 존재하는 신성한 본질을 합리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길 수 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대단히 값진 이 진주를,
세상 밭에 감춰진 이 천국의 보물을
확실히 찾아낼 수 있게 인도할까?
영감의 법칙이 없다면 해석의 법칙도 없을 것이나
그러한 법칙은 있고 따라서 그러한 규칙도 있다.
신성한 사고(thought)가 인간 사고의 형태로
그 자신을 옷 입힐 때, 신성한 사고는 오직 그 자신에
상응하는(Correspondence) 것을 취한다.
이런 식으로 신성과 인간,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은
상응에 의해 결합되고
또 상응의 법칙에 의해 신성은 인간 안에서,
영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 안에서 보여질 수 있다.
신성한 진리가 그것에 상응하는
인간의 사고의 형태로 그 자신을 옷 입히는 것은
한 가지를 숙고해봄으로(reflection)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성한 말씀이 계시에서 입고 있는 자연적인 형태들은
영원한 말씀이 창조를 통해 나타내신 것들이다.
이러한 형태들이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끌어내졌다고 해서
자연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The natural forms which the Divine Word has put on in revelation,
are those which the Eternal Word had put forth in creation.
These forms are not less natural,
because they have been taken from the human mind.)
자연은 모든 인간의 사고의 근거다.
자연적 사고는 다양하게 결합되고 변형된 자연적인 사물들의
정신적 이미지에 불과하다.
어떻게 신성한 진리가
인간 사고의 형태로 옷 입고 인간 언어로 표현되었는지
성경의 영감 안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의 완전 영감이라는 것은 축자 영감을 당연히 포함한다.
축자 영감이 함축하는 바는
성스럽게 된 저자들에 의해 사용된 바로 그 단어가
그들의 귀안에서 발음되었다는 것이다.
(Plenary inspiration implies verbal inspiration.
Verbal inspiration implies that the very words used
by the sacred writers were pronounced in their ears.)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영감된 단어들이 성스럽게 된 저자 자신들로부터
제공되었다는 견해와 모순 없이 이해될 수 있을까?
영계의 법칙들은 계시가 어떻게 주어졌는가를 설명한다.
천사와 영들은 인간 언어에 속한 단어를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모든 사람들과 그 사람들 각자의 언어로 말한다.
이런 식으로 천사들은 열조(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와 말했고
오순절 사도들이 군중들에게 말했을 때도
그들 모두 각자 자신의 언어로 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천사들의 말은 자연계의 대기를 통해 전달될 수 없고
따라서 외적인 방법으로 해서 인간에게 올 수 없다.
천사들은 내적인 방법으로 사람들과 말한다.
천사들은 인간의 기억이라는 창고에서 발견하는 언어로
자신들의 생각에 옷을 입히고
그렇게 해서 그들은 각 사람과 그들의 언어로 말한다.
이것은 상응의 법칙에 따른 것인데 이 상응의 법칙에 의해
영계와 자연계가 연결되고 두 세계의 거주민들이 서로 교류한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과 사도들에게 말씀하실 때
천사라는 매개를 통해 그리하셨는데
이때 그분은 천사를 한동안 그분의 임재로 채우셨다.
그리고 그분은 천사들이 인간과 교통하는 것과 같은 법칙에 따라
성스럽게 된 저자들에게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셨다.
이런 사정으로 신성한 진리는
자신이 계시된 시대에 속한 인간 사고의 형태로
옷 입을 뿐 아니라
계시가 주어진 자 개개인의 독특한 스타일이나 표현까지
옷 입고 있다.
이런 점으로 인해 예언자의 저술과 복음서 저자들의 것은 다르고,
이 예언서와 저 예언서, 이 복음서와 저 복음서에
이르기까지도 차이가 있다.
영감된 책들은 제각기
그 자체의 독특한 것과 그 책의 저자의 특징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 각 책의 저자들을
그분의 도구로 선택하신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리고 이 도구의 특징들에는 무언가 그분이 전달하려는 메시지,
또는 그분이 밝히시려는 진리의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들은 저자의 마음에 들어있는,
그 자체와 상응하는 언어로 그들 자신을 옷 입힌다.
(And those truths clothe themselves with the language
which the mind of the writer contains that correspond with itself.)
상응(Correspondence)은
성경의 글자와 영 사이의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또 이 상응을 수단으로 우리는
글자적 의미 안에 있는 영적 의미를 볼 수 있다.
이 상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상응은 이것과 저것의 상호적 관계이다.
이것이 저것에 정확하게 응하는 관계를 가질 때
그 둘은 상응한다.
우리가 선정한 이 단어에는 한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상응이
두 가지 자연적인 대상물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우리는 이것을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런 관계는 무한과 유한, 영계와 자연계, 영과 몸 사이에도 존재한다.
모든 영적 상응에는 그것과 떨어질 수 없는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이것이 영적 상응을 자연적 유사성들로부터 구별해준다.
그 조건은
상응하는 것은 그것에 상응하는 것으로부터
그 존재의 기원을 갖는다는 것이다.
(the thing corresponding derives its existence
from that to which it corresponds,)
그러므로 상응은
영적 원인과 자연적인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이고
상응학(the science of correspondence)은 그 관계에 관한 지식이다.
자연계와 영계 사이에, 그리고 말씀의 자연적 의미와
영적 의미 사이에 상응이 있는 것은
모든 자연적인 것들은 영적 원인을 가지고
자연계는 그 가장 주된(proximate) 원인을 영계에서 가지며
그리고 말씀의 자연적 의미가 영적 의미 안에 있는
이러한 상황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상응에 의해 하나가 된다.
상응의 성격, 그리고 상응이 모든 자연적 유사성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예를 들어 보면 잘 이해될 것이다.
모든 사람은 한 해의 사 계절과 하루의 네 때,
그리고 이런 것들과 인생의 자연적 시기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하루 중 아침은 일 년 중의 봄에, 한낮은 여름에,
저녁은 가을에, 밤은 겨울에 응한다.
다시, 아침과 봄은 유년과 청년기에, 한낮과 여름은 성인기에,
저녁과 가을은 쇠태기, 그리고 밤과 겨울은 노년기에 응한다.
이런 관계가 아무리 정확하고 아름답게 비유될지라도
그것들은 엄격하게 말하면 상응이 아니다.
이 모두가 자연계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도덕적인 요점을 지적하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영적 진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인간의 자연적 존재의 연속적인 시기들이 아닌
거듭남의 과정에서 서로 이어지는 것과 같은
영적 삶의 연속적 상태에 응하는 것으로 이해될 때
그것들은 영적 상응이 되고 영적인 진리를 가르친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아침, 봄, 유년기 이 모두는 상응에 의해
영적인 삶의 그 시기에 응한다.
이 영적인 삶은 자연적인 삶의 어느 시기에서든 시작할 수 있는데
그때 영혼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신실하게 돌아서고
그의 생각과 애정들은 그분의 빛과 사랑을 받도록 열리며
그 결과 이전에 마음에 뿌려져 있던 진리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다.
(Under this view morning, spring, and childhood all
answer by correspondence to that season of the spiritual life,
at whatever period of natural life it may commence,
when the soul is first turned in sincerity to God,
and the thoughts and affections are opened to receive
His light and love, so that the seeds of truth,
previously sown in the mind, begin to germinate.)
여름은, 종교적 지식이 영적 지성으로 무르익고
마음은 진리의 화려함과 그 진리가 자신의 시야에 열어주는
기대감들로 기뻐할 때의 그런 영적 성숙의 상태에 상응한다.
가을은, 진리의 화려함이 거룩함의 아름다움에 진입하고
지성에 첫째 자리를 잡고 있던 종교는 그 주요 거주지를 심정에 두며
그 에너지가 거룩한 삶의 결실을 맺을 때의 그런 상태에 응한다.
이 비유(analogy)는 여기서 끝나는 듯 보일런지 모른다.
그 이유는 기독인의 삶에서는 어떤 겨울도 한 해를 마감할 수 없고
어떤 밤도 낮을 계승할 수 없으며
거듭난 영혼은 빛과 사랑의 더 높고 더 나은 상태로
영원히 나아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비유가 여전히 완전한 것은
비록 영적인 삶에서는
겨울과 밤이 가을과 저녁의 뒤를 잇지는 않겠지만
그들은 거듭난 삶의 봄과 아침에 선행하기(precede) 때문이다.
인간도 그의 첫 상태에서는 영적 사랑의 따스함에 있기 전
자연적 사랑의 차가움 속에 있었고
지식의 빛을 받기 전 무지의 어둠 속에 있었다.
이에 대해 창세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것이 첫째 날이니라.”(창세기 1:5)
그러나 지금의 그의 밤은
무지의 어둠일 뿐 아니라 오류(error)의 총체적인 어둠이고
또 그의 겨울은 영적 사랑의 부재일뿐 아니라
영적 미움이 존재하고 있다.
거듭남의 시작인 새 생명의 봄날과 아침은
하느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고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때다.
그때 신성한 사랑의 영향으로 애정이 처음 움직이고
사고는 신성한 진리의 빛으로 조요되며
그때 하느님의 사랑과 빛이 마음에 받아들여져
영혼(soul)의 재창조가 일단 시작되면
주님과의 확고하고 끊임없는 협력은
완전함과 행복함이 계속 증가하는 상태를 열어줌으로
어떤 상태와 환경에 종착하게 될 것인데,
거기서는 밤과 겨울이 없고,
빛은 점점 더 밝아져 완전한 낮이 되며
가을은 시인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그녀의 보물을 봄의 자락에 쏟아 부을 것이고
봄은 그 신선함과 아름다움이 영원히 증가할 것이다.
(And when the love and light of God are admitted into the mind,
and the re-creation of the soul has once commenced,
a stedfast and persevering co-operation with the Lord
will open up a succession of states increasing in
perfection and happiness, and ending in a state and place,
where there is no night and no winter,
where the light shall increase more and more unto the perfect day,
and where, to reverse the figure of the poet, autumn
shall pour her treasures into the lap of spring,
a spring increasing in freshness and beauty for ever.)
우리는 여기서 밤과 겨울을 영구적인 상태로 말한다.
거듭난 삶의 진행 중에 비록 그들이 일시적인 상태로
낮과 여름의 상태와 교차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신성한 말씀의 확증을 가진다.(창 8:22)
(We here speak of night and winter as permanent states.
As temporary states, alternating with those of day and summer,
in the progress of the regenerate life, we have the assurance
of the Divine Word that they shall never cease.)
참고>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천비 933
..
3 이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육신적, 세상적인 상태에 있을 때
거기에는 신앙도 인애도 없다.
즉 그때는 오직 육신적, 세상적이기 때문에
'추위'만이 있을 뿐이다.
.. 그 사람이 자아에 속한 것에 머무르고 있는 한
그는 신앙과 인애가 결여되었거나
그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는 전혀 천국적, 영적인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천국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이유다.
왜냐하면 사람의 의지는 완전히 몰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육신적 관심과 그의 의지의 관심이
활동하지 않고 잠잠할 때 주님은 그의 속사람을 통해 행동하시고
그 시점에서 신앙과 사랑이 그에게 존재하는데
이것을 여기서 '더위'라고 한다.
만일 그가 다시 육신적인 상태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다시 추위 속에 살고 있는 것이고
그리고 육신에 속한 것들이 고요해져 잠잠한 상태에 있을 때
그는 ‘더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두 상태는 번갈아 오고 간다.
인간의 상태는 천적 및 영적인 것이
그의 육신적 및 세상적 관심과 공존할 수 없고
번갈아 오고 가는 그런 상태다.
이것은 거듭나야 할 모든 사람의 경험이며
그가 거듭나는 상태에 있는 한 계속되는데
이는 사람이 다른 방법으로는 거듭날 수 없기 때문이다. ..
4 .. 태고교회의 마지막 후손들은 거듭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들의 의지와 이해가 한 마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에 속한 것들은
의지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천적, 영적 관심사에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육신적, 세상적 관심사에
번갈아 몰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국적인 것에 대해서는 계속 차가웠고
정욕에 대해서는 계속 뜨거웠기 때문에
번갈음(alternation, 교차, 교번)이 그들에게는 불가능했다.
935
여름과 겨울은
거듭난 사람의 새 의지에 관한 상태를 뜻하고
그 의지의 상태는 여름과 겨울이 그렇듯 번갈아 오고 간다.
이것은 추위와 더위에 대해 언급된 것에서 분명해지는데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는
추위와 더위에 비유되었고,
거듭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는 여름과 겨울에 비유되었다.
전자의 경우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언급되었고
후자의 경우 거듭난 사람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전자가 '추위'를 먼저 언급하고 그 뒤에 '더위'를 언급한 반면
후자는 '여름'이 먼저고 '겨울'이 그 뒤라는 것에서 분명하다.
이는 거듭나고 있는 사람은
'추위', 즉 신앙과 인애가 없는 곳에서 시작하지만,
거듭난 후에는
여름, 즉 인애의 지점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거듭난 사람이 번갈음(교번)을 경험한다는 사실은,
즉 어느 순간에는 그에게 인애가 없고
그 다음에는 어느 정도 인애가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 심지어 거듭난 사람조차 그에게는
악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분명하다.
그에게 있는 모든 선은 오직 주님의 것일 뿐,
그에게는 악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가 그러한 변화를 겪는 것은 불가피하다.
즉 그는 한 때는 인애인 여름에서 살다가
다른 때는 인애가 없는 겨울에서 사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번갈음은
사람이 더욱 더 완전하고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이는 그의 일생 동안뿐 아니라
그가 다음 생에 들어가서도 거듭난 사람에게 일어난다.
왜냐하면 사람의 의지에 관한 여름과 겨울의 번갈음 없이는,
또 사람의 이해에 관한 낮과 밤의 번갈음 없이는
결코 완전하고 행복하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의 사람의 변화는
온대 지방의 여름과 겨울과 같으며 봄철의 낮과 밤의 변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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