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양천로 겸재정선미술관 옆 궁산 땅굴이다.궁산 땅굴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 강점기에 굴착된 곳이다.
무기나 탄약 등 군수물자를 저장하거나 김포 비행장을 감시하고, 공습 때에는 부대 본부로 사용하기 위한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이곳을 건설하기 위해 인근 지역 주민을 보국대로 강제동원하였다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맞이하면서 굴착 공사 또한 중지됐다.이곳은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2008년 인근 주민 다수의 제보로 지하 땅굴을 발견하여 체험 전시관을 조성하기 위해 공사를 진행하던 중,
일부 구간에서 대형 낙석이 발생하여 진입 방지장치를 마련하고,땅굴을 폐쇄한 채로 관리하다가 2018년 출입구에서
땅굴내부를 조감할 수 있는 전시관을 조성하였다
2008년 가양동 235번지 궁산(해발 70m) 기슭 지하 3m지점에서 발견된 궁산 땅굴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에 군사시설 목적으로 굴착한 것이다.궁산은 김포비행장과는 3.1킬로미터 떨어졌다.
궁산 땅굴은 ‘ㄱ자’ 형태의 꺾어지는 지점까지 길게 뻗어있어 땅굴 내부를 상세히 조감할 수 있다.
그 규모가 소형 승용차는 거뜬히 지나갈 것 같다. 또한 철제 안전빔 뒤로 보이는 울퉁불퉁한 화강암석은 당시
강제 동원되어 고통 받던 주민들의 한(恨)서린 얼굴 모습으로 다가온다.
땅굴의 규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땅굴의 규모는 높이 2.7m, 폭 2.2m, 연장길이는 68m다.
전시관은 높이(최고 6.5m, 최저 2.4m), 폭은(최대 5m, 최소 2.5m), 길이 10.55m다.
2008년 4월 어느 날, 가양동 궁산(宮山) 기슭 지하 3m 아래 두터운 화강암 석층에서 거대한 땅굴이 발견되었다.
‘혹시 북에서 파내려온 땅굴 아닐까?’ 주민들의 걱정이 앞섰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에 군사용으로 굴착 중 해방과
더불어 공사가 중단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강서구의 조사결과 발표로 걱정은 사라지고, 마침내 궁산 땅굴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궁산은 강서구 가양1동의 한강변에 위치한 해발 70m의 작은 산이다.
공자(孔子)의 위패를 모시는 양천향교(陽川鄕校)가 동쪽 산자락에 있어 이를 궁(宮)으로 여겨
궁산(宮山)이라 불리며 명명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궁산 산성에 관군과 의병이 진을 치고 한강 건너편
행주산성에 주둔하는 권율(權慄) 장군과 협공으로 왜적을 물리쳤던 곳이다. 이처럼 궁산은 조선의 도성을
방비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궁산에는 백제 때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고성(古城)이 있다.
바로 이곳을 일제는 태평양전쟁의 중요한 군사거점으로 사용하기 위해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인근 지역 주민들을
보국대(保國隊)로 강제 동원하여 땅굴을 굴착했다. 각종 무기와 탄약 등 군수 물자를 저장하고 적의 공습 시에는 지하 부대 본부로
사용하기 위해 큰 규모로 만들었다. 높이 2.7m, 폭 2.2m 갱차가 충분히 지나 갈 정도의 크기로 ‘ㄱ자’ 형태인 길이 68m의 땅굴이다. 계속되던 굴착공사는 일제의 패망으로 중단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부터 궁산 옆에 있던 선유봉을 폭파해 거기서 나온 돌로 김포비행장을 닦았고, 이를 가미카제 특공대의 훈련장으로 사용했다. 김포공항과는 불과 3.1km 정도 떨어져 있어 군사비행장인 김포비행장을 방어하고 감시할 수 있는 중요한
감제고지로서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 35년의 비극적인 역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인원 782만7,355명은
조선총독부 총계연보에서 밝힌 ‘1942년 총 인구가 2,63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숫자이다.
땅굴이 발견된 후 안전문제로 출입을 통제하던 강서구는 2010년 2월부터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정밀안전진단 및 학술조사,
향후 활용 방안에 대한 주민의견 수렴 등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궁산 땅굴을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키로
최종 결정하였다. 최근까지 안전시설을 보강하고 숨겨진 땅굴 이야기와 궁산 일대의 역사를 담은 전시물로 새롭게 단장하여
5월 시민들에게 활짝 개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