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기계공고의 우승으로 제31회 봉황기가 막을 내리면서 올해 고교야구시즌도 사실상 마감되었다. 10월의 전국체전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학교간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시도 대항전의 의미가 더 크기 때문에 지금쯤 올 시즌을 정리한다고 해도 무리가 될 것은 없다고 본다.
올해 3~4월, 3번에 걸쳐 <2001 고교야구 8대 강팀>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 글을 쓰던 무렵은 지역마다 예선이 한참 진행 중이던 때라 제대로 뚜껑을 열기 전이긴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예상 자체에 틀린 부분이 많이 보여 좀 부끄럽기도 하다. 오늘은 올해 8대 강팀으로 예상했던 팀들이 과연 어떤 성적을 냈는가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한다.
애초에 8대 강팀으로 꼽았던 팀은 서울의 성남고, 덕수정보고, 신일고, 부산의 부산, 경남고, 경기 유신고, 광주진흥고와 다크호스를 위해 남겨둔 한 팀이었다.
성남고 (대통령배 4강, 청룡기 4강)
투수-포수-유격수의 중심라인이 특히 강한 막강 전력을 보여줬으나 번번히 우승문턱에서 주저 앉았다. 대통령배 때는 에이스 김광희가 부상 후유증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고, 청룡기 때는 주전 유격수 박경수가 준결승전에서 김진우(진흥)에게 몸에 맞는 볼로 실려나가는 등 여러모로 운도 따라주지 않으면서 무관의 한해를 보냈다. 청룡기 우승을 차지했던 지난 해보다 올해 전력이 나았음에도 우승을 하지 못한걸 보면 역시 우승에는 운이 따라야 하는 것 같다.
덕수정보고 (청룡기 우승)
투수 하나가 팀을 살려놓고 야구사를 바꿔놓은 경우는 수없이 많다. 84년 롯데의 최동원을 비롯해 수많은 에이스들이 자신의 선수생명을 담보로 무리한 혹사를 감수하면서 영웅으로 탄생했다. 올해 덕수의 류제국 또한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주가를 한껏 올려놓았고, 청룡기 우승 직후 시카고 컵스와 계약해 졸업도 하기 전에 이미 루키리그에서 뛰고 있다. 애초에 덕수정보고를 약한 타선에도 불구하고 강팀에 넣었던 전적인 이유는 류제국 때문이었는데, 청룡기에서 보여줬던 류제국의 성취는 아무튼 대단한 것이었다.
신일고
당초 기대에 훨씬 못 미치며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상하위 가릴 것 없이 터지는 타선이 신일고의 트레이드 마크인데, 올해는 전반적인 마운드의 약세, 타선의 집중력 부족과 김현수, 방석호만 피해가면 되는 상하위 타선의 큰 기량차등의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봄에 지적했던 송태일 감독의 지도력은 확실한 검증을 받지 못한 채 한해를 마감하게 되었다.
부산고 (대통령배 4강, 화랑기 준우승)
99, 2000 2년 연속 대통령배 우승팀인 부산고는 올해도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전력을 갖추었으나 주전투수 대부분이 1, 2학년으로 구성된 팀의 특성상 홈그라운드 부산에서 벌어진 화랑기 빼고는 4강 고비를 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해마다 그랬듯 선수들이 기본기와 작전 수행능력이 뛰어나고, 잘 훈련된 수비력으로 프로 못지않은 중계플레이를 선보여 보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주전 중에 1~2학년이 많은 부산고의 실력은 내년부터가 진짜가 아닐까 싶다.
경남고 (화랑기 우승)
쓸만한 투수는 많지만 뚜렷한 에이스가 없다는 약점을 갖고 있던 경남고는 대통령배 성남고와의 경기에서 15: 0, 5회콜드로 지면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올 한 해 농사를 망쳤다. 아, 물론 동향의 라이벌 부산고와 연장 접전 끝에 재경기까지 치르며 우승한 화랑기는 제외한다. 화랑기 우승으로 체면치레는 됐겠지만 2년 연속 전국무대에서 이렇다 할 성적이 없다는 것은 뭔가 변화의 필요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부산지역에선 그동안 과도한 스카우트 분쟁을 막기위해 부산중 출신은 부산고, 경남중 출신은 경남고로 무조건 진학하던 제도가 시행되어 왔는데, 내년부터 그 제도가 끝나 자유경쟁 체제로 바뀜에 따라 두 팀간 전력에 어떤 변동요인으로 작용할 지 관심 있게 지켜볼 만하다.
유신고
조순권, 최일룡의 투수진, 서창만이 지키는 안방 등 전체적으로 탄탄한 전력인데다가 지역안배(?)도 고려해 8대 강팀에 넣었던 팀인데 예상을 크게 벗어나고 말았다. 그것은 현대 1차지명 선수인 에이스 조순권의 기량을 과대평가했던 탓이 아닌가 싶다. 봄철까지만 해도 140대 중반에 이르는 좋은 공을 뿌렸던 조순권은 연투에 피로한 듯 시원스런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팀도 그와 더불어 활기를 찾지 못했다.
그동안 유신고는 경기도 지역의 맹주로서 예선 심판판정에서도 다소 득을 보아온 게 사실이지만, 올해 급부상한 창단 2년째인 인창고와 새로 창단하는 일산 주엽고 등 경기도 지역에 신생팀들이 많아 내년부터 힘겨운 지역예선을 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광주 진흥고(대통령배 우승, 청룡기 준우승)
올 시즌 최강으로 예상했던 진흥고는 역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투타를 통틀어 가장 안정된 전력을 갖췄던 진흥이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에이스 김진우에 대해 심한 의존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대부분 팀들이 마찬가지이긴 하다)김진우의 뒤를 받치는 투수인 조용원은 타자로서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투수로는 지난해보다 오히려 구위가 떨어졌고 김경선이나 2학년 정다운은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진흥의 막강타선은 상하위 구분 없이 터지는 폭발력을 갖고있어 모든 상대팀들의 공포의 대상이었고, 1번 우승은 조금 성에 안 차는 느낌이다. 승패여부를 떠나 청룡기 결승에서 잠깐이나마 벌어졌던 올해 고교랭킹 1-2위를 다퉜던 류제국과 김진우의 맞대결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나머지 한팀
청주기계공고 (봉황기 우승)
봉황기 개막전에 청주기공이 우승을 차지하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16강부터 청소년 대표들이 참가하지 못한 큰 변수가 있었지만 청주기공은 모든 면에서 우승팀으로 손색 없는 전력을 보여주었다.
한화 1차지명 선수인 잠수함 에이스 신주영을 비롯해 좌완의 박정규, 봉황기에서 최고스타로 떠오른 우완의 노병오 등이 지키는 막강한 마운드에 이윤-최동길-연경흠-노병오-박종성으로 이어지는 막강타선은 성남고나 진흥고의 베스트 멤버와 대결했더라도 대등한 경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봉황기에서 절정의 기량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