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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1953류종렬2020M인류진화1
인간이란?
<- 얼마나 우여곡절을 겪었을까? 얼마나 우여곡절을 더 겪어야 자신을 자각하게 될까? 그럼에도 기나긴 생명의 역사에서부터 이제까지 생명체들의 무한정한 삶의 위상들을 알아가는 것도 인간이다. 바이러스라는 복병을 만나도 그 유형을 알아내고 백신을 만들 것이고 또한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인간이다. 그럼에도 미래를 모른다는 것도 인간이다. 지구의 과거 지나온 흔적을, 또한 생명체들의 온갖 주름들을, 세세히 챙겨보면서, 신체의 소멸이 흙으로 돌아가 미생물을 먹여 살리고 또한 살아있는 인간이 그것들과 함께 공감과 공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미래의 인간들 각각이 자율성과 자치성을 갖는 보살이 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내주어서, 다음 세대가 또 다시 아제인간이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실재성이 자신을 부풀려서 스스로가 어제-이제-아제를 연결시켜 간다는 것을, 그것들을 알아가는 보살이 되는 것이 아닐까. (53UKI)>
바빌론 전승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현자가 왕에게 세상의 이야기를 골고루 알아야 세상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하여, 여러 사례(data)에 대한 이야기를 가르쳤다. 왕은 지겨웠다. 좀 간략하게 할 수 없는가? 현자들이 모여서 왕도 읽어야 할 중요한 사례들에 관하여 책들 중에서 골라서 가르치며 익히게 했다. 왕은 너무 많다, 좀 줄여서 한권의 책으로 만들면 좋을 텐데 ..., 그래서 현자들은 머리를 짜내서 왕이 필히 알아야할 것들을 조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왕은 책과 더불어 공부해야 할 것들도 여전히 많다고 생각했다. 좀 더 줄일 수 없겠냐? 한 현자는 곧 바로 이렇게 말했다. 진실은 한 가지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 그리고 그 현자는 떠났다고 한다. / 현자는 구체에서 시작하였는데, 왕은 구체적 사실들을 판단하기에 너무 많았다. 추스려서 간단하게 알고 싶었던 것이다. 왕은 추상으로 향하고 있다. 태어나다, 살다, 죽는다, 이 세 가지 부정형의 개념작업을 펼쳐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럼에도 그 내용들은 특이성으로 다양체들이다.
박홍규는 철학이란 “모든 자료들(data)을 취급한다”고 한다. 자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점검하고 검토하면서 시작한다. 그 자료들 사이에 상충되거나 어긋나는 것을 제외하고 기본으로 남는 것이 ‘무엇이냐(뭣꼬)’에서부터 시작한다. 총체적 자료를 다룬다는 것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는, 즉 아무것도 예외로서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물음을 묻는다는 것은 이제 여기서 ‘이뭣꼬’에 대해 알고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즉 이 대상의 자료들이, 또는 대상의 형성(생성) 과정들이 어떠한지 알고자 한다. 그 과정은 어느 누구도 동일하지 않기에 문제거리이다. 그럼에도 그 과정의 바탕에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엇인가가 있다.
그러면 자료들의 총체적 바탕으로 왜 ‘있다’인가? 있으니까, 그 다음으로 그게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자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있은 것은 아닌가? 또는 알고자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물음을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이 철학적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이라고들 한다.
‘있다’. 산과 들이 그리고 집이 있고, 거기에 사는 나와 타인들이 있다. 그 있다가 있는 장소(공간)가 있다. 이리하여 공간이 무엇이냐고 논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다. 사실 그렇다. 그런데 철학의 시초라는 그리스에서는 공간의 문제를 말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이 세계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이 물음에는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탈레스는 원래 그 바탕(arche)가 물이라고 한다. 공기, 불, 흙이라고도 하는 이들이 있었다. / 중국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 토(土) 5행이 있다.알려진 바에 의하면 오행의 별자리와 연관이 아니라 서양처럼 자연의 근본이나 변화를 나타내는 사물 정도였을 것이다.
‘있다’와 ‘변하고 있다’. 하나는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설정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인간이 추상적으로 공간과 시간이라는 대상(pragma)를 갖는 것은 추론이라는 과정을 생각할 수 있을 경우이고, 이 과정을 이치에 맞게 순서를 정할 때 가능했으리라. 서양철학사에서 이런 추론의 가능성이 기원전 300년 경에 성립이라는 것이 이채롭다. 한쪽은 논리학이고 다른 한 쪽은 기하학이다. 이런 추론의 질서와 분류의 정리는 사유의 체계또는 기호의 체제 정립일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이런 체제의 성립시기를 기원전 587년경으로 잡은 것도 흥미롭다.
있다와 변하고 있다. 이 사이에서 지리상(공간) 상에서 이동(운동)을 먼저 생각했으리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여기 있다가 저 멀리에 있다. 여기 없고 저 멀리에 있다. 공간 상으로 생각하고 그 이동(운동)을 운동자체의 고유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다음이리라. 공간과 시간의 분리된 사유가 운동에 대한 깊이있는 사유에서 출발했으리라.
다시 돌아가서 있다. 여기든 저기든 저 먼 곳이든 있다. 공간의 범위가 점점 넓어질 것이다. 저 먼곳에 있다에서 저 넘어 있다고 계속되는 과정을 생각하면 어디에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될 것이다. 어디에나? 하늘 저 끝에도, 또는 하늘 저넘어도. 이제 공간은 지리상의 표면이 아니라 삼차원과 그 이상의 차원도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멀리 갔다.
있다에서 지리상과 환경상 그리고 창공상과 천국상으로 전개는 당연할 즈음에서, 그래 어디에든 있다는 것은 있다가 먼저이다. 그런데 왜? 있지? 라고 물어보자. 있다는 것은 토지위에 경험에서 있다. 창공에서 있다. 새를 보라. 그러면 천국에서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허구(우화)로서 있는 것인데, 말도 되고 의미도 있다. 왜? 말이 된다는 것은 말과 대상이 일치할 경우이다. 그래 창공을 넘어서도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공상 또는 환상으로 있을 수 있다. 대상화가 아니라 말과 환상의 일치에 대해 있다고 할 것인가? 우선 사람들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상상을 넘어 환상이 인간들에게 가끔식 의미를 가지고 다가온다. 죽은 어느 누가 이렇게 전하더라. 들은 사람은 주장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들은 사람이 들은 대로 행동하고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달리 살면서도 삶의 이롭고 편안을 가져오는 경우들은 허다하다. 그러면 그 들은 사람의 말을 인정하게 될 것인가? 대부분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살아온 과정에 대한 신뢰와 증거일 뿐이다. 있다는 그 사람의 삶이 있다. 그 삶은 과정이다. 과정이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삶은 말로서 문자로서 떠돌아다닌다. 말과 문자, 구전과 문자 전승은 마치 있다는 증거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그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과 여기 있다는 것은 별개이다. 이 정도에서 있다는 것은 사실로서 여기 지금이라는 내용을 담보하는 것이다. 결국 현실로서 대상화와 상응해야 한다. 그 상응의 토대가 공간이다. 시간은 지나갔다. 그래서 현재 현실로서 상응이 아니다. 있다. 공간상이다 그럼에도 왜 ‘있다’에서 과정과 연결이 중요하게 제기되는가. 있다는 것에서 계속해서 있다(나중이지만 영원히 있다)는 점에 의의를 찾게 될 것이다. ‘계속해서’ 그러나 공간상에서 계속해서는 한정되어 있다. 물론 선을 무한히 연결한다고 하는 개념에서 한정되어 있지 않는 것 같지만 현실에서 상응과 연관에서는 그 무한도 한정이다(소실점을 생각해 보면). 계속되는 무엇은, 움직이는 무엇 또는 운동하는 무엇으로 바꾸어보면, 변화하고 변형하는 무엇이 연속되는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 한정된 것에서 한정된 것의 변화와 변형에서도 연속적인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 영혼(이성이든 정신이드)이라는 상상하는 능력을 생각할 수 있다. 상상하는 연속성을 영혼이라는 대상화에 이전에 영속성으로 이어짐을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있다’가 공간상으로 있다. 있다가 시간상으로 있다는 둘은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있다는 마찬가지로 개념상 있다. 공간상에서 있다의 대상화와 시간상(변화와 변형)에서 있다의 대상화가 달라지니까, 공간상에는 동일한 것이 움직여서 이동하고 선운동 하듯이 계속하는 운동이라고 하자. 시간상에서 변화하고 변형하니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그 내용에서는 어떤 동일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가정이 들어간다. 가정이 들어간다는 것은 추론이 능력이 과정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정에서 가정으로 이전(앞)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 앞에서는 이제로 과정에서 왜 변했는데? 라고 물을 수 있다. 공간상에서 대상화가 원형 또는 원질(본질이든 실체이든)에 대한 물음이라면, 시간상에서는 왜, 원인이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공간의 대상화에서 원질과 시간의 변형화에서 원인을 묻는 것은 다르다. 대상화는 사고의 정태적인 측면을 다루는 데 비해, 변형화는 사유의 동태적 측면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있다에서 공간상의 계속과 시간상의 영속은 다르다. 어제와 이제 사이의 추론만이 아니라 이제와 아제 사이에도 추론해 볼 수 있다. 계속은 자를 수 있는 단위들의 집합이라면 영속은 자르면 영속은 끊어진다. 어제 이제 아제의 영속이라는 측면은 공간의 자름과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 즈음에서 영속이란 운동을 지속하고 있는 상태인데 비해 계속이란 잘려진 단위를 계속해서 나열해서 설명하지만 단위들은 사태일 수밖에 없다. 벩송은 과거의 대상화가 추억들이라면 과거의 영속화가 기억이라 한다.
있다와 이다는 왜 구별되는가? 간단히 말하면, 있다는 삶에 직접적이지 않다. 그런데 이다는 삶의 양태에도 직접적이다. 있다는 사고의 대상화에서 있다와 없다로 대비된다. 있다만을 사고 하면 그 반대(모순)에서 없다가 나온다. 그러나 없다는 없다. 없는 것이 없다는 다 있다 이다. 없다는 없다. 그럼에도 사고에서 없다는 개념은 성립한다. 있다와 없다의 대비는 심리적으로는 중요하다. 공간상으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즉 없는 것은 생각가할 필요가 없다. 있는 것은 무엇이다. 이다는 실재적이고 구체적 대상화와 연결되어 현실적이다. 여기서 인식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사람이다는 언표는 사람이 있고 지시할 경우에 맞다고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즉 소나 말일 경우에 틀리다고 한다. 이다는 있다 다음으로 언어적 표현과 더불어 논의 될 것이다. 여기에 의미에 대한 것을 첨가하면 골치가 아프다. 용이다 아니다는 용이 있다 용이 없다로 대상화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용이라 이런 저런 의미를 가지고 지칭하는 것으로 뛰어난 인물을 지칭한다고 하면 의미가 있다. 의미는 이다가 아님에도 ‘용이다’라고 표현 한다. 이런 표현의 방식은 존재와 현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상과 환상에 대한 것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호가 대상화의 코드를 벗어나 환상화로가서 탈코드화 한 것인데 이를 의미 체계 안에 재코드화한 것이다. 있다와 이다와 달리, 있다와 있었다는 그런대로 대상화에 대한 견해로 풀어갈 수 있다. 있었던 것이 지금도 있다고 할 때, 죽 있다와 같다. 그럼에도 시간화와 다르다는 점에서 공간화의 경우이다. ‘있었다’가 지금도 있다에서, 사실로서 있다와 다른 측면이 있다. 즉 그 있었다가 지금도 있는 것이 좋고 나쁨에 있다. 나쁜 것은 없었으면 좋고, 좋은 것은 그대로 있으면 좋다. 그것은 개체(생명체)에서 선호 또는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 상태로서는 호 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함께 가야한다는 것이 더욱 문제다. 문제는 바이러스도 함께 간다 또는 갈 수 밖에 없다.
있다와 있을 것이다의 관계는 복잡하다. 이 관계는 이제와 아제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인데,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어야 하는데, 있을 것이 없으면 어렵고 난처하고, 없을 것이 있으면 곤란하고 나쁘다. 사람은 이제만 살고 아제는 그만인 것은 아니다. 살다에는 과정으로 어제(과거) 이제(현재) 아제(미래)를 포함다. 어제는 개체가 살아온 것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종이 살아온 과정으로 35억년을 포함한다. 이제는 지구와 외계를 포함한다. 이제는 앞으로 살아갈 예상 참여인데 미래가 너무나 비결정이라, 아제는 아직은 감당할 수 있는 다음 시간들을 할당한다. 이 할당으로 인간은 별다른 사고 없으면 평균수명까지 산다는 것을 아제로 삼는다. 종의 차원에서 지구의 퇴화가 50억년 쯤으로 잡으니 30억년은 다른 종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개체는 80세까지 살아가면서 선택해야할 일들이 있다. 이 선택에는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으면 좋다. 좋다는 있다와 이다가 아니라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가치는 맑스의 생산물에 대한 가치도 있고, 니체의 신체의 활동에 따른 도덕학의 가치도 있고 들뢰즈가 말하는 인성화 작업으로 행하는 모든 활동에서 새로운 생성에도 가치가 있다.
있다와 이다, 있었다와 있을 것이다에서, 무엇이 와 누가라는 문제에서 왜 라는 의문은 반드시 도래한다. 그 왜?라는 의문은 공간상의 대상화에서도 극복해야할 문제가 있고, 시간상의 변화 과정 또는 생성 과정에서도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우선 공간상의 문제는 없다에 관한 것인데 대상화가 지구상의 사물과 관계되는 경우는 문제거리가 아닌데, 사고에서 대상화가 사물과 관계 안 되는 것들에 대한 것이 문제거리이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과 연관하여 죽음이후는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죽는다는 것은 타자들이 신체를 치워(분해)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에게서 인성이 죽고 난 뒤에도 다루어진다. 이 문제는 윤리학상 허무의 문제이다. 허무주의 해결은 하나는 과학(인식)으로 다른 하나는 종교로 푼다고 한다. 전자는 실재적으로 후자는 관념적으로 2천5백여년간 다루어 왔다. 우리는 여기서 더 이상 논하지 않고, 박홍규의 「플라톤과 허무주의(1989)」를 참조 할 수 있다.
인간에서 있다는 태어나서 산다는 것이다. 태어나서의 논의는 온생명의 생명사와 인간종의 역사에서 논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여기서는 일생에서 어제 이제 아제의 문제이다. 있었다에서 죽 있으면 좋을 것과 있을 것에서 선택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선택은 이미 가치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으며, 인간의 원함, 의욕, 의지와 연관이 있다. 그러면 있었다 중에서 있으며 있을 것은 판단에 의해서 결정한다면 결정론에 속한다. 그런데 있을 것은 선택이라 비결정론에 속한다. 일단은 과거의 과정에 비추어서 미래에 투영하여 선택하거나 현재에서 미래에 있어야 할 것에 대한 원함과 의욕에 찾거나 이다. 투영이든 탐색이든 의지의 활동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의지는 온생명 즉 온자연의 흐름 지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본 철학자는 스피노자이다. 과정에 관한 것을 알아야 하는 왜?(이유와 원인) 라는 물음이 온자연 온생명의 과정에도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철학이 데이터의 총체를 다룬다고 하는 것은 온자연, 온생명에 대한 자료에 대해 섭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생명체들 중에서 인간의 도래까지를 이제까지 알려진 바에 대해 대상화된 지식을 일별해 볼 필요가 있다.
* 대상을 안다고 하는 것은 안다는 지적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지적능력은 대상이 형성 또는 제작되지 않았을 때도 알았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면 지성은 대상에서부터 나왔을까? 인위적인 대상이 아니라 자연물의 대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는 능력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면 지적능력은 대상 다음이 된다. 그런데 지적 능력이 없는 데 대상은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하기보다 있기는 있는데 내가 그것을 만들 줄 또는 다룰 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상을 규정하는 것에서 안다고 하는 것을 개입시키고, 거꾸로 안다는 것에서 대상을 규정할 수 있다고 하면 순환논법에 빠진다. 그래서 언어 체계를 인정하는 시기쯤(전587년)에서 책의 머리에 말씀이 먼저 있다고 썼을 것이다. 글로 쓴다는 것은 이야기가 오래 전승되었다는 과정을 겪었다는 것이다. 글(문자)이 언어 체계로 쓰인 것은 인류에게는 오랜 추상화의 과정을 겪고 난 뒤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지구 역사에서 그나 체계적인 이야기를 만든 것은 기원전 1200년경이고, 그리고 현자들 사이에서 문자기호체계로서 전승의 역할을 한 것은 기원전 600년경이다. 물론 기원전 2700년경의 길가메쉬 설화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 구전이 문자로 전승보다 훨씬 이전이었을 것이다. 이 구전은 말투로서 소수에 의해 전승되었을 것이며, 이 전승에서 기호(un signe)를 남기면서 문자화하는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또 오랫동안 전승의 과정을 이어가게 되었던 것은 기호를 나름으로 체계화도 해야 하고 또 기호와 말투와 연관이 성립되어야 할 것이다.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말투(la parole)의 체제가 말씀(la langue)의 체계로서 전환될 수 있는 여러 방식들을 조합해야 할 것이다.
말투가 몇몇의 현자들(사제들)의 비전으로 그리고 일반화에서 대중들에게 말씀으로 전수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그리고 그 일반화 과정은 단지 언어(le langag)의 측면에서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리라. 제작에서 수평적으로 모방하여 배우고 익히면서 전수되기도 하고, 또한 세대를 거쳐서 전승되기에는 작업과정과 방법에 대한 체계를 아는 자로부터 다음 세대로 전승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런 전승에는 도구의 발달, 작업과정의 조직화, 그리고 도구의 사용 양태들에서 체제를 달리하는 방식이 도래 할 것이다. 같은 돌이 사냥에 쓰일 때와 움막에서 사녕거리를 나눌 때, 그 쓰는 방식은 당연히 달랐을 것이다.
인간이 우선 삶의 구체적 영역인 지상의 자료들 앞에서 앞 시대 또는 앞 세대와 차이를 갖는다는 점을 우리는 탈영토화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에서 또는 수평적 전수와 달리 수직적 전승에서, 소집단 내에서 위계를 형성하는 차원에서 상징(symbole)과 기호(le signe)의 연관을 표현하는 것을 코드화와 탈코드화라고 할 것이다.
** 생명체의 진화적 과정을 위로 상승한다는 의미에서 지양(aufheben)이라는 변증법적 개념화 작용은 한 인간 또는 역사시대의 인간사에서 그럴듯한 용어이지만,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기 생성(창조)의 길에서는 다발이 여러 가지(가지치기)를 확장한다는 의미에서 탈영토화라는 개념이 더 유효할 것 같다.
# 자연(physis) 대 인간종: 탈영토화 과정(aufheben: 자연변증법) [숲의 탈영토화]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이전에 척추동물 계열 중에서 포유류로 이행과정을 겪었다. 우선 4,500만년 전에 인류와 타마린(원숭이)의 공동조상의 시대 마지막이었다고 한다.그 다음으로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나 1,400만년전까지 인간과 오랑우탄의 조상이 같았던 시기였다고 한다. 900만년전까지는 고릴라 종(Gorillini)과 같은 조상의 시대였다고 한다. 그리고 600만년전 우리와 침팬지 및 보노보의 마지막 공통조상이 살았던 시기이다. 그리고 인간 영장류의 공통조상으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등장한 시기는 400만년으로 추정한다. 변형 또는 진화는 기나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원숭이, 오랑우탄, 고릴라 종에서 인간 영장류의 세분화에서 어떤 탈영토화가 있었을 것인데, 나무위에서 삶에서 지상위로 삶으로 탈영토화의 전환을 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나뭇가지를 잡는 손과 발의 역할에서 손가락의 역할과 발가락의 역할의 분리에서 손가락이 탈영토화 하였다고 한다. 현재도 종을 유지하는 침팬지와 보노보 종의 행동학과 개체 발생과정은 인간종과의 비교에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보노보 공동체에서 암컷의 조화로운 행동은 오랑우탄 고릴라 침팬지의 남성성의 역할 우위와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영장류 인간은 330만년전 쯤에는 나무에서 돌을 사용하는 계기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하여 원구석기(Paléolithique archaïque) 시대라고 칭한다. 20세기 최고의 인류화석의 발견으로 삼는 “루시”화석 발견은 처음 발견에서 350만년전에서 시기적으로 늦추어져 320만년으로 삼는다(몇 십만년을 우습게 여기면 안된다). 대부분의 경우는 두개골이나 신체의 몇 부분의 뼈를 발견하였는데 비해, 이 화석은 온전하게 신체 전체를 발견하였다는 데 큰 의의를 둔다.
이 최초의 석기시대[원구석기(Paléolithique archaïque)]에 인간종이 숲을 떠나서 초원으로 나가는 시기에 필요로 하는 돌을 선택하였다는 점이다. 200만년전에 살았던 호모 에르가스테르(Homo ergaster (« l'homme artisan »)의 발견은 중요하다. 160센티미터 키에 초원을 오래 걷는데 완벽하게 적응했으며, 생활 터전의 이주자이기도 하다. 아프리카를 떠나 아시아와 유럽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달리기 시작하면서 후두 하강했습니다.들뢰즈가 표현하는 동물의 표현인 소리 시대에 언어를 구사하는 목소리의 시대로 바뀌었을 때,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의 시대를 이룬 것이다. 또한 뇌의 용량도 커져서 뇌의 평균 크기는 750세제곱센티미터에서 900세제곱센티미터 이상까지 다양했다.
일정한 장소에서 주거하는 방식을 찾기에는 아직도 자연환경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선 안전한 곳에서 계속 머문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다른 동물에 대해 방어 방식이 이루어질 때이다. 손과 발의 활동영역이 확장되어감에 따라, 다른 동물에 비해 전투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먹거리의 문제가 절후에 따라 수급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그 이후로 영장류 인간 종이 주거지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주거지에는 문제가 있다. 일반적으로 동물들에서 주거지를 옮기는 것은 기생충 때문이라고 한다. 빈대와 벼룩이 기생하면 몸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한다. 세밀하게 이를 잡는 것은 손가락 운동의 발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주거지의 흔적이 180만년전의 것으로 발견되는 시기와 176만년에 전기 구석기 시대와 맞물려 있는 것은 도구의 사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생산관계는 신체의 조건과 그에 맞는 도구와 연관이기도 하다.
이 시기 동안에 200만년전 호모 에르가스테르(Homo ergaster (« l'homme artisan ») 종의 발견이 중요하다. 삐끄 견해의 견해로는 최초의 인류이다. 160센티미터 초원을 오래 걷는데 완벽하게 적응했다. 이 들은 아프리카를 떠나 아시아와 유럽으로 건너간 이주자이다. 흉곽은 원추형에서 술통형이었으며, 달리기 시작하면서 후두 하강했습니다. 삐끄에 의하면 후두의 발달로 짐승의 소리를 내던 목구멍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변하였다.들뢰즈 표현으로 기호체계로 들어서는 탈영토화이다. 뇌의 평균 크기는 750세제곱센티미터에서 900세제곱센티미터 이상까지 다양했다. / 1984년 첫발견 1995년 재발견.. 1991년 우드(Bernard anthony Wood, 1945-)가 명명. / 후두의 발달이 언어 중추의 발달로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드는 1968년 의대생으로 리차드 리키를 따라 고생물학 탐구 원정에 나섰다]
176만년전 전기 구석기(Paléolithique inférieur)시대는 35만년에 이르는 시기까지 이다. [1890 태평양 자바섬에서 인간과 유사한 존재의 화석이 발견, 18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원인(猿人)에게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도 이 시기로 추정한다.] 이 시대에 이르러 돌의 형태가 주어진다. 도구(un biface[주먹도끼], un hachereau[작은 도끼], les épieux[작은 창]). 이 시대의 문화에는 프랑스 아미앙 지방에서 발굴된 아슐(Acheuléen)문화,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타약(Tayacien)문화, 영국 클락톤 지바의 클락톤(Clactonien) 등이 있다. 전기 구석기는 130만년 기간이란 긴 기간 동안에 인간 종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5만년 전에 유럽에서 네안델탈인과 아시아에서 드니소바인 출현 하였다. 그리고 40만년 전 쯤에 초기 화덕과 같은 형식을 고안하여 가정 안으로 불을 옮겨 놓았다고 한다. 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인체구조의 탈영토화와 달리 삶의 영역의 탈영토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주거지의 탈영토화]
35만년 전의 중기 구석기(Paléolithique moyen)는 4만5천년 전까지를 칭한다. 문화적으로는 약간의 가공된 도구(débitage laminaire, éclats Levallois, racloir, pointe retouchée)를 다루었다. 문화적으로는 유럽 중에서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무스테리언(Moustérien), 상대적으로 중기 구석기 후반에 나타난 프랑스 미꼬끄 미꼬끼언(Micoquien), 중동지역에서 시리아에서 야브루디언(Yabroudien), 아프리카에서 우간다의 상고앙(Sangoen), 북아프리카 사하라 지역의 아테리아(Atérien) 등 분포가 넓어진 만큼이나 삶의 힘의 확장이라 여겨진다.
삶의 터전의 확장만큼이나, 먹거리 수집에 활발하여 큰 동물 사냥에 나섰다. 아마도 인간종이 경험적 인식의 전승이 이루어질 때 일 것이다. 무덤이라는 장례의 양식이 등장하고, 10만년 전 쯤에서 감성적 표현물이 등장한다(blocs ou os gravés, coquillages percés). 황토(une ocre) 사용한 흔적이 있다.
4만5천년 전에서 일반적으로 작은 빙하기라 부르는 1만년전까지 후기 구석기(Paléolithique supérieur)라 한다. 인간종이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시기들이라 다양한 문화적 작업들이 있다. 동굴벽화도 발달(grottes Chauvet, Cosquer, d'Altamira, de Lascaux), 3만7천년전 쇼베 동굴(la grotte Chauvet), 2만 7천년 꼬스께 동굴 (La grotte Cosquer), 1만 5천 500년 전(-1만 3천년전) 알타미라 동굴(La grotte d’Altamira) 천정 벽화(유명한 들소들Bisons), 1만8천–1만 7천 라스꼬 동굴(La grotte de Lascaux)(Aurochs 들소들) 벽화 등이 있다. 그리고 이동식 장식물로서 3만년전 뷜렌도르프 비너스(The Venus of Willendorf) 조각상, 2만 9천년 상아로 된 브라상푸이 부인(La Dame de Brassempouy), 2만 6천년 레스쀠그 비너스(La Vénus de Lespugue), 2만 3천년 르낭꾸르 비너스(Les Vénus de Renancourt), 2만 3천년전 사비냐노 비너스(La Vénus de Savignano), 1만 5천년 전, 마스 다질의 비너스(La Vénus du Mas d'Azil) 등이 있다.
벽화 등에 황토(une ocre) 사용으로 다양해진다. 내가 주목하는 예술은 이 시기의 동굴벽화와 여성상의 다양함에 있다.
문화적으로 샤텔페롱(Châtelperronien), 오리냐크(Aurignacien), 그라베트(Gravettien), 솔류트레(Solutréen), 막달렌(Magdalénien), 에피르라베트(Épigravettien), 코자르니키(Kozarnikien), 사냥에 필요한 개의 가축화. 네안델탈인, 드니조바인, 플로레스인, 칼아오인(de l'Homme de Néandertal, de l'Homme de Denisova, de l'Homme de Florès, et de l'Homme de Callao.) 등 출현. [눈살미와 손제작의 대응 시기]
지질학적으로 홀로세(L'Holocène Holocene)기는 약 1만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지질 시대를 말한다. 충적세(沖積世) 또는 현세(現世)라고 한다. 요즘의 날씨와 같은 계절이 있다. 들뢰즈는 빙하기가 풀린 이 시기에 지구의 변화와 생명종들의 변화에 대해 다루면서 1만년 전을 새로운 지구 체제가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다.
9천7백년전 중석기 시대(中石器時代, Le Mésolithique, The Mesolithic Age) 9 700 à 5 000 av. J.-C. en Europe de l'Ouest, 12 500 à 8 500 av. J.-C. au Levant,) / 곡식의 채집, 물고기 잡이 기술 등장, 또한 사냥의 발달로 화살이 발명되었다. 공동묘지 성립. 식물채지, 물고기잡기, 화살.
8천5백/6천5백, 신석기 시대(新石器時代, Le Néolithique)토기, 위계, 암각예술, 국가 출현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와 질그릇(토기)을 도구로 사용하여 식량 생산 단계에 이른 시대를 말한다. 세부적으로 세시기로 나누기도 한다. / 위계(계급), 전쟁, 국가의 출현시기라 한다. / 암면(암각) 예술(art rupestre)의 등장시기 / 구석기와 신석기 구분 명칭은 영국 박물학자 러복(John Lubbock, 1834-1913)의 것이라 한다. [눈살미와 손제작에서 눈살미의 기호제작(암각기호)으로: 이 변화에는 귀동냥(구전)이 들어갈 것 같다. - 기억의 발달로 뇌의 주름이 많이 잡힐 것 같은데 .. (53LMH)]
[일만 년 전이라면 구석기의 아름다운 또는 피튀기는 구석기에 대한 이야기는 도덕론이 아니라 정념론 또는 열망론이 아닐까 한다. 신석기 시대에서 도덕론을 끌어낸다면, 인류가 이미 자연에 대해서는 아닐지라도 다른 동물에 대해서는 우월성을 차지했다는 오만의 표시가 아닐까? 그나마 인간에서 도덕은 금지와 계약이 들어설 때가 아닌가 한다. 전설과 민담에서 잡히지 않는 대상의 개념화가 신화이름으로 추억의 단면을 우리에게 남겨두게 될 것이다. 기억은 총체적 지층인데 추억들은 지층화의 일부 일 것이다. (50MKB)]
[들뢰즈는 일만년 전의 지구를 빗대어서, 지구의 형성에서 분자결합이 있었을 것이다. 이 중에서 많은 입자들과 분자들이 외계에서 왔을 수도 있다고들 한다(칼 세이건도, 스티븐 굴드도). 우연(접촉과 압축)에 의한 결합 또는 조합은 이중구조를 형성한다. 40억년 전에 유기물로 되어 있었을 때 “지구는 하나의 기관 없는 몸체(CsO)이다”(53, 85). 유기물이 단백질을 형성하고, 이런 지구 표면의 층을 수프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연(접촉과 압축)에 의한 RNA를 거쳐서 자기 복제가 가능한 세포의 형성을 39억년으로 잡는다. 접촉과 압축에서 왜 들뢰즈는 이중구속을 다른 의미로 사용하면서 가재라고 했던가?지구상에 생명체의 외적 표현 형태가 이중 구조가 아닌 것이 드물다. 미래에 알게 될 DNA의 나선구도에 대한 것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는 이중나선구조에 정밀한 발생이 이미 접촉에서부터 있었을 것을 가정한 것으로 보인다. 언어에도 이중분절이 있다.
형성체가 단위 즉 통일성(l'unité)과 다양성(la diversité)을 이루는 것은 어떤 과정일 것인가? <조프루아 생틸레르(Etienne Geoffroy Saint-Hilaire 1772-1844)에게 찬사를 바쳐야 하지 않을까? 그는 이미 19세기에 성층작용(la stratification)이라는 웅장한 개념을 세울 줄 알았으니. 물질은 계속해서 나누어질 수 있어서 크기가 작아지는 입자, 공간으로 방사되면서 “자기를 전개하는” 유연한 흐름(flux) 또는 유체(fluides)로 되어 있다고 그는 말한다. (60, 96)> <우리는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재기 어린 임기응변식 문답 속에는 그토록 많은 것들이 걸려 있었다. .. (62-63 99)> <뀌비에는 완고한 전문가였고, 반면 조프르아는 항상 전문분야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 뀌비에는 권력과 땅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것을 조프르와에게 느끼게 하려고 했다. 반면 조프루아는 이미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유목민적 인간을 예고하고 있었다. 퀴비에는 유클리드 공간에서 숙고했지만 주프루아는 위상학적으로 사유했다. .. 조프르와는 이미 비정상적인 소통을 하는 어떤 동물 리좀의 전조를, 즉 ‘괴물들’(les Monstres)을 갖고 있었다. 반면 퀴비에는 불연속적인 사진들과 화석 사본의 견지에서 반응했다.(63, 99-100)>
(초고 9:21, 53MMD) [초고란 것은 파일이 날아가 버려 생각나는 대로 쓰면서 .. 그 다음은 쓰기 싫어져 묵혀 두었는데... 결국 수정 없이 그대로 올려야겠군. (9:33 53UKH)]

첫댓글 벩송의 마지막 작품,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MR)에서 말하는 “신비가”(le mystique)를 보살(菩薩)로 번안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보살(菩薩)이 아라한(阿羅漢) 또는 나한(羅漢)보다 더 가까운 번안어가 아닐까?
사람이란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을 사유(思惟, 사랑)하고, 공동체에 자(慈, maitrī)와 비(悲, karu)를 행하고, 그 삶을 송두리채 아제에게 희(喜, mudit)와 (捨, upeka)하고 소멸하여 열반에 이른다. / 서구에서 크리스토스를 믿는 자들은 말씀을 사고(思考, 추론)하고, 아낌없이 퍼주고(Agape, 사랑하고), [여기까지는 괜찮은 편인데, 이 다음이 문제다], 그 대가로 죽음 후를 부활을 기대하며, 심판을 받는다.
21세기 초반에 10여년을 인민의 가슴 속에 추억들을 남긴 것을,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것은 대중 음악가들이었던가 보다. 독재와 군사의 코드를 넘어서는 탈코드의 징후들을 몸으로 뿜어내다가, 마치 IMF의 파가 퍼지면서 얼어붙게 했던 것 같았다.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고 그러다가 코로나19는 매끈한 공간으로 파고를 높이며 퍼져 나가고, 과학과 기술은 홈 파인 공간을 길을 내는 동안에, 새로운 씨줄과 날줄의 꼬임과 엉킴 제자리걸음만 한다. 좌와 우가 함께 양축을 아우르지 않는 한 짜임과 땋음은 없을 수도 있다. 90%꽁들에게 묶여 있는 인민의 위치에서 소실점의 방향을 또는 공유방향(un recoupement)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 것 같다. 새로운 탄생은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을 지니면서, 탈영토화로, 생태로, 토지로 ... 그래도 인민들은 한글로 다중지성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53VLE,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