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상상력과 겹눈의 미학
김해자 (시인)
진지하고 매사 열심인데 웃음을 자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김수우가 그렇다. 늘 강의중이거나 강독중인 그를 볼 때마다, 듣도 보도 못한 병명, ‘무분별한 독서로 인한 정서장애’가 떠오른다. 버스비 10원을 아껴 책을 빌리고 3시간 거리를 걸어다니느라, IQ는 제법인데 성적은 늘 꼴찌언저리였던 중학생에게 내렸다는 상담교사의 진단명이.
그의 책에 대한 집착과 애정은 초등학교 4,5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집앞에 있는 동사무소
숙직실 창문을 그는 떠나지 못했다. 왜? 책 한권 없는 집과 달리, 그곳엔 수많은 책들이 굴러다니고 있었으므로. 제목도 보이지 않는 빛나는 책들이 ‘나 책이야’ 말을 걸었으므로.
읽고 읽다 결국 쓰게 된 김수우에게 예술은 “심해의 가장 깊은 데서 가장 큰 하늘을 그”리는 일이고, 문학은 “영혼의 실력”이자, “없는 씨방을 터뜨리는 탈출과 비상”이었다. 초록숲과 빗방울과 태풍이 나무와 강물과 바람의 실력이듯, 문학과 혁명과 눈물도 영혼과 역사와 사랑의 실력이라는 것을 그는 내밀한 언어로 입증한다(「실력의 방정식」). “아무 데도 빛이 없어 스스로 초롱을 켜”들고, “그저 무한히 기다림을 켜든” 심해의 초롱아귀가 시인의 새벽과 겹쳐진다. B59층의 막장이나 심해에서도 빛과 사랑과 기다림을 끝낼 수 없다는 생의 의지(「초롱아귀의 새벽」), 그리하여 시집 『길눈』은 전쟁과 살육과 자본의 “속도가 풍경을 지”워가는 시대를 앓는 진혼곡이자, 구원이자 희망의 노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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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햇빛에 내어놓은 대봉이 홍시로 녹아” 바글바글한 구더기 속에서 태어난 초파리를 보며, 시인은 “최선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깔았던 신문을 들어 우주 하나를 통째로 버”리며, “얼마나 많은 정령들이 울”고, “얼마나 착한 천둥벌거숭이 귀신들이 주저앉았을까” 자책하는 「아름다운 적군」을 읽다, 나는 한참동안 말을 잊는다. “묵은 쌀봉지에서 새까맣게 기어나온 무수한 바구미”의 “여섯 개 발목을 가진 점”에서 “발목 많은 팔만대장경”을 읽어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다. 그 작은 점들에서 “우크라이나의 고집이나 팔레스타인 핏자국”과 “난민들의 찢어진 시간표”를“ 연상하고, “치밀한 절망”과 “꼬깃꼬깃한 혁명”을 떠올리다니. 더욱이 바구미가 나온 기점을 알아차린 후에 시인의 “후두염이 시작”되고, “그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상호연관과 몸의 동조가 경이롭기까지 하다(「최전선」).
미물과 귀신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며 온몸이 귀가 된 시인에게서 서로의 구슬에 비친 존재들이 무한히 이어지면서 세계를 이루는 인드라망적 사유와 근대문명이 빼앗아가버린 원형적이고 통합적 감각의 부활을 감지한다. 그물망의 겹침과 이어짐을 포착해 내밀하게 언어화한 그의 시에는 하나의 티끌 속에 우주가 들어있고, 무량원겁의 시간이 찰나에 맞닿아 있으며, 빈자리조차 촘촘하게 차 있다. 대소도 높낮이도 없이 평평하다. “무덤 속에서 전쟁과 평화를 날마다 해부”한다는 「티끌의 행운학」이나, “비눗방울에서 태어난 나는 구원이 없는 봉분을 기억”한다는 「부유하는 안녕」 등, 많은 시편들이 죽음과 삶이 회통되는 화엄세계다.
“최후를 믿는 법은 내 안으로 내려가는 것, 어둠으로 내려가는 법은 막장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발화는 존재와 시의 기원을 유추하게 한다. 꿈속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간 막장, B59층은 가난의 성소이자, “무언가가 부화되고 있는” 무덤이자 추억이자 미래의 약속장
소다. 그곳 혹은 그것이 눈물겨운 무의식이자, “초현실의 부름단추”임을 (「B59층의 초현실주의」) 눈치챈 시인에게서 분리된 자아의 포로가 된 근대적 시선을 벗어난 겹눈의 시학이 탄생했음을 예감한다. 찢겨진 지도와 국경을 잇듯 나와 대상, 주체와 객체, 자연과 인간으로 나뉜 이분법을 가뿐하게 넘어서는 원초적인 상호교감과 겹침, 나는 이것을 식인자본과 광기와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미학이자, 제유적提喩的 시쓰기라 부르고 싶다.
서로 포섭되고 겹치며 전체 우주의 화육에 동등하게 참여함으로써 “쥐새끼 같은 나의 문명” 한복판에서 김수우는 “지구라는 저 오래된 눈물”을 닦아줄 새로운 관계를 꿈꾼다. 에코사이드와 제노사이드가 맞물리며 가속도가 붙는 재앙의 시대에, 겹눈의 감수성은 언어 수사와 은유와 환유에 갇힌 기계적이고 기하학적 미학을 넘어선다. 나아가 모심과 환대와 막막하고 강철 같은 기도가 받쳐주는 겸허한 민중시와 초현실적 생명시의 탄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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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눈』의 시선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매나 공중 폭격기의 눈이 아니라, 폭격당하고 짓밟히고 화염에 구멍난 땅밑에 있다. 듣다 듣다 온몸이 귀가 된 시인은 이제 “귀신들은 언제나 다정하다”며, “수억 년 된 귀신들을 불러” 안부를 물으며 멸종까지 학습한다. 시체가 되어서도 옹알거리는 귀신 혹은 정령들은 모과처럼 썩고 소멸하고 다시 나타난다. 심해의 어둠과 치밀한 절망 속에서도 길눈이 되어주는 그 신들은 앞장서지 않는다. “누군가 지어낸 빛의 추상”이나, 돈처럼 앞지르며 가는 신의 가면이 아니라, “헐벗은 발로 따라오는” 초라하고 헐벗은 신神이기에(「길눈」).
숱한 형상을 입은 헐벗은 신들은 “옆구리에서도 종아리에서도 눈물이 나는/ 수억 간극을 표류 중인, 간이천막에서 부지런히 절망”한다(「눈물화석」). 그 비명을 듣고서도, 이마를 때리는 늙은 귀신의 꾸짖음이나, 존재의 섬광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시를 쓰는 것은 ‘뻔뻔한 강
도’가 되는 일. 지극히 타자적이고 윤리적인 듣기로부터 살아 있는 인간보다 아프고 고독하고 배고픈 귀신들의 소리를 기록하는 희유한 일이 발생한다. 이것은 문학적 사건이라 불릴 만하다.
가없는 바다를 떠돌던/뱃사람들은 먼 숲에서부터 떠내려 왔을 통나무를 염원했다/ 그물을 던지기 전에 표류목을 찾았다//(중략) 원양어선 하급선원이었던 아비는/ 망원경도 없이 대양 속을 맴도는 작은 섬을 고대하곤 했다/ 영도 봉래동에서 태어나 영도초등학교를 나온/ 낡을 대로 낡은 아비는/ 자신이 연녹색 덮어쓴 표류목인 것도 모르고/ 자신이 떠도는 서사인 것도 모르고
-「표류목」 부분
김수우는 자신이 서사인 것도 모르고, 표류목을 기다리던 아버지를 닮았다. 쩐 비린태와 비늘 덕지덕지한 낡은 원양어선을 닮았다. 때문인지 나무물고기 백 마리가 유영하는 작은 장소를 열고 그 창가를 지킨 지 십팔 년째, ‘백년어서원’이라는 글쓰기 공동체를 타고 심연을 건너는 중이다. 혼자서 책을 좋아하던 김수우는 좋아하다 읽고, 읽다 좋아서 쓰고, 쓰다 좋아서 이제 사람들을 찾아간다. 이제 함께 읽고 함께 쓴다. 다시 읽고 다시 쓴다. 그리고 읽은 대로 쓴 대로 행동한다. 배우고 때로 실천하면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가 흐믓하게 이 수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다.
이제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영도에서, “각도가 애매한 이층집/ 역시 각도가 애매한, 시멘트로 발라버린 쪽마당이/ 쫒겨난 도깨비처럼 있는” 풍경 앞에서 그는 “오늘도 창세기를 쓴다”(「신선동 창세기」). 바다를 떠도는 표류목 같은 아버지처럼 “찌든 몸뚱이 아래 두꺼운 창세
기가 흐르”나니. “피란민들이 따개비처럼 걷던, 아슬아슬한 벼랑”엔 “덩굴처럼 휘감긴 저승을 뚫고 흰 발목들이” 분꽃이 되어 돌아오나니. 그 바닷가 벼랑길엔 “정류소마다 시장마다 모퉁이마다 가방을 든 마고들”과 “흰여울 벼랑을 지키는 사람들”이 “뭉턱뭉턱 쏟아지는 태
고를 맞이”하나니(「흰여울 분꽃」).
김수우는 ‘시’라는 꽃에 향수를 뿌리지 않는다. 꽃받침처럼 꽃 아래에 꼬깃꼬깃한 “작업복을 물어뜯던 수천 마리 어둠의 혀”와 “한 소쿠리 물살을 걸치”고, “수천 번 허공을 겹입고서야” “물렁물렁한 말씀”이 되는(「부탁」) 꽃받침의 혁명을 꿈꾼다. “나의 시는 나의 삶”이라던 시인 파울 첼란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중얼거린다. 김수우는 삶이 시고 시가 삶이었구나. “지구라는 눈부신 고통이 추락하”는 순간에도 기다림을 끝낼 수 없으니, 목숨이여, 너는 눈물로 빚은 화석이나 옹이 많은 나무처럼 강건하여라. 표류목들의 떠도는 서사를 알아듣는 길눈에 의지해 벼랑길을 오르내리는 시여, 흰여울 분꽃들이여, 부디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씨앗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