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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스크랩 <1부> 지리산에서의 하룻밤과 이틀 낮 (2007.5.25~27)
베드로 추천 0 조회 35 07.05.30 14:4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1월 1일부터 국립공원의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그동안 공원 입구의 길을 막고

                입장료를 받던 매표소가 <시인마을>로 바뀌어  탐방객들을 맞이한다.

                   바람소리,들꽃향기,솔 내음이 가득한 지리산으로 떠나보자 -

 

 

지리산에서의 하룻밤과 이틀 낮

 

1일차 / 성삼재에서 반야봉 거쳐 세석까지(20007.5.25~26)

2일차 / 세석에서 천왕봉넘어 대원사까지(20007.5.27

 

#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산은 지리산이다.

어머니의 산 지리산.

1915미터라는 지리학적인 고도보다 더 높게 가슴 속에 자리한 산.

풍진 세상을 떠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한번쯤 살아보고

싶은 산이 바로 지리산이다.


산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리의 종주를 꿈꾼다.

산꾼이면 누구나 꿈꾸는 성삼재에서 대원사까지

장장 46.2km의 1백 2십리 산길.

나는 그렇게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싶다.

오늘 난 지리산과 하나가 된다.


2007년 5월 25일 금요일. 저녁을 먹으며 우울한 뉴스를 듣는다.

지리산에서 체험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학생을 태운 관광버스가

낭떠러지로 추락해 학생 5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것.
그것도 성삼재 넘어 시암재에서 구례 천은사로 이어지는 길에서 말이다.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한 학생들의 순결한 영혼이 지리산에 평온하게

자리하기를 마음으로 부터 기원하면서 집을 나선다.


'지리십경’을 주제로 이원규 詩人이 짓고‘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를 부른

안치환이 지리산을 노래한게 있다.  


=>노래를 듣고 싶다면 플레이 버튼을 눌러주세요..

    (노래를 듣기전 카페 맨좌측 상단의 음악상자 플레이 버튼을 정지해야만,

    카페 배경음악과 혼선을 막을 수 있습니다.^o^.)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글...이원규 시인/곡.노래...안치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 거든

불일 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려면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 평전의 철쭉 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 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 처럼 겸허하게 오시라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 프롤로그


삼남에 뿌리를 내린 큰 산 지리산.

남에서 북으로 거슬러 가는 백두대간의 시발점이다.


지리산은 구례군,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남원시와 같은

5개 시·군을 품고 있는 한국 최대의 산이다.둘레는 대략 340km. 850리에 해당한다.

지리산은 넓이가 1억 3.348만평이나 되는 제주도 만한 크기이고 여의도 공원 1,000배 크기의

한국 최대 최초의 국립공원 1호다.

 

왜 지리산(智異山)이라 이름하였을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이조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을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 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는

묘향산(妙香山)을 극찬하였지만 그 산은 가 볼 수 없는 산하라 무어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지리산은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금강산도 산의 웅장함과는 견줄 수 없는 산이다.


지리산은 사철 좋은 산이다.

과일도 제철 과일이 제일 맛있고, 음식도 제철 음식이 있다.

사철 좋은 산이 있고, 철쭉이던 단풍이던지 한철만 보기 좋은 산이 있다.

철을 모르는게 철부지(不知)라고 하던가.

그럼 철을 안다는게 무언가.

조용헌님의 말처럼 철마다 피는 꽃이 어떤 꽃인가를 아는 일도 철이 드는 것

중 하나 일듯 하다.


-‘지리산로드’850리는 한국의 실크로드이기도 하다.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속을 벗어난 수많은 방외지사(方外之士)들이 오가면서 선(仙),

불(佛), 유(儒)의 문화를 꽃피웠다.  이러한 전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현재 지리산에는 약 3000명의 직업 없는 ‘낭인과(浪人科)’들이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 낭인들이 하는 일은 다양하다. 기공(氣功) 하는 사람들, 무속신앙 하는 사람, 그림 그린다,

글 쓴다, 사진쟁이, 녹차 만드는 사람, 사업 부도나서 들어온 사람, 불치병 고치러 들어온 사람,

연염색하는 사람, 떠돌이 승려 등등이다.무엇을 하든지 간에 밥 굶지는 않는다.

이 골짜기 살다가 저 골짜기로 이사를 다니기 때문에 정확하게 통계를 낼 수는 없다.

남쪽의 화개에 살다가 칠선계곡으로 옮기고, 실상사 인근의 뱀사골로 옮기는 식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지리산에 오면 ‘자살하는 사람 없고, 굶어 죽는 사람 없다’는 사실이다.

자살이 없고, 굶어 죽는 사람이 없는 산이 지리산이다.

 지리산에서 생존하는 단계가 있다.

처음에는 지리산에 기대서 먹고산다. 약초를 뜯어서 팔거나 아니면 등산객들 배낭이라도

대신 들어다주면 먹을 양식은 생긴다. 그 다음 단계는 도시에 살던 사람들에게 기대서 먹고산다.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봄에 매실주라도 만들어주면 이 사람들이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돈 봉투도 놓고 가고 먹을 것도 갖다 주고 간다.

다음 단계는 무엇을 만드는 단계이다. 나무공예, 도자기, 작설차, 천연염색 등을 배우게 된다.

대체적으로 3년 정도 지나면 정착에 들어간다는 게 이 분야의 전문가인  이원규詩人의 분석이다.

 

조용헌의 책 方外志士 지리산 詩人 이원규 편/ 지리산 생존법 중에서-

 

 

 

지리산에 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게 있다.

반달가슴곰과 마주친다면 ?

반달곰이 공격을 한다면 당신의 급소를 보호하는 자세를 취하라는데

급소는 어디를 말하는지 궁금하다. 근거는 있는 말인가?

마치 죽은척하라는 어릴적 동화 같은 이야기 같다.


100여리의 지리산 주능은  신라시조의 어머니 선도성모가 모셔져 있는 노고단

에서 시작해 즐비한 태산준령을 거쳐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대장정이다.

천왕봉과 노고단 사이의 100여리 거리를 두고 우뚝 서 있는 두 신(神).

즉 천왕성모와 노고 선도성모(仙桃聖母) 가 갖는 의미는 우리 한민족 민중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늘 이곳 지리산을 신성시하며 의지하고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면면히 대를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이다.


지리산에는 지리산 詩人 이원규(45세)가 있다.

경북 문경 출신인 시인은 서울에서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가 회색빛 도시를

지배하는 욕망의 아수라장에 염증을 느껴 지리산 푸른빛에 오체투지했다.
산이 그리워 단돈 200만원 가지고 지리산으로 뛰어든 인물이다.


 그의 감각과 시심(詩心)에 달린 상상의 날개는 지리산 전체를 덮고 있다.

방 2개짜리 그의 집은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지리산 사랑방’으로 통한다.

이름하여 피아산방(彼我山房).

대문도 없고 자물쇠도 없는 너와 나의 경계가 없는 산방이다. 

소설가 공지영,시인 유용주,판화가 남궁산,영화 감독 김기덕,가수 안치환씨가

단골이다.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찾아오면 ‘지리산 사랑방’에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

▲성삼재 휴게소 자료사진 (2006.1)

 

# 속도를 늦추면 눈앞의 풍경이 달라 보인다.

 

2시가 채 안되어 성삼재에 도착했다.

이제 춥다기 보다는 여름을 알리는 바람이다.

통영고속도로는 전국의 모든 산객에게 지리산을 더 가깝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리산 관통도로, 88도로는 ‘죽음의 도로’라고 한다.

야생동물이 차에 치어죽는 소위 로드 킬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2대의 버스에 가득한 산객들이 하나둘씩 내린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상큼한 공기를 가슴 깊은 곳까지 밀어 넣는다.

산동면 지리산 온천랜드 주변의 야경이 아름답다.


잠깐 쉬는 숨에도 공기 맛이 도시와는 다르다.

산에서 보는 별빛 또한 다르다.

밤하늘에는 별이 총총 그리도 선명하게 빛을 내고 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입산을 통제한다. 입산은 일출 2시간전이다.

대부분 차에서 간식등을 먹으면서 입산을 기다리거나 부족한 잠을 잔다.

 

성삼재는 삼한시절의 전적지로,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요,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2시 50분 입산 허가가 났다. 자 이제 시작이다.

기다렸다는듯이 산객들이 앞다투어 지리산에 든다.

마치 어두운 시절, 한밤에 기동을 하는 빨치산 남부군 같다.

몇몇 산님들은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나는 최대한 천천히 걷는다.

다른 산님과 걸음을 맞출 필요도 없다.

당일 종주가 아니니 급할게 하나도 없다.


중국 속담에 ‘천천히 가는 자가 멀리 간다'는게 있다.

이번 산행에서 내 스스로 한 약속 중에 첫째가 바로 그것이다.

가장 늦게, 가장 유유자적하는 종주 기록을 세워보자는 것이다.


어느 누가 쫓아오나 ? 오라는 이 있더냐?

거북과 토끼처럼 엉금엉금, 쉬엄쉬엄,

놀며 쉬며, 그리고 가고 가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산천유람 주유 천하...지리산 종주 길을 시작한다 .

▲ 성삼재 출입구를 지나면서 (2006.1 개인산행시 자료사진)

 

‘도솔산인’이라는 山客.

지역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사범인 그분은 '泊'  산행 예찬론자다.

대전쟈일클럽 윤대장님(산인)과 산우회를 같이 하기도 한다.

그분은 늘 진정한 산행의 묘미가 “얼마나 빨리 가느냐”하는게 아니라

 “어느 조건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가 관건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그렇다.

삶을 오직 결과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여행이나

운전을 하더라도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가느냐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주변의 풍경을 감상한다는지...그속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따위의 여행의 재미는 대부분 맛보지 못한다.

그래서 풍경학의 대가 강영조님은 “마음의 눈으로 찾아보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오늘은 천천히 지리산의 자연을 감상하리라.

산 길과 나무와 꽃과 풍경을 감상하며,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리라.

늘 당일 종주에 쫓기듯 걷거나, 하산 시간에 맞추어야 했던 지리산 산행.


나름대로 나무도 보고 꽃도 보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깊게 지리산을 음미하고 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급적이면 천천히 천천히...

이름 모를 꽃 하나에게도 인사하며, 온갖 나무에게 그렇게 멋진 풍경으로

서있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그렇게 가는 것도 괜찮겠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것 같다.

앞만 보고 갈 것이 아니라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뒤돌아 보고,

상대방과 발맞추며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연신 뒤돌아보는 풍경이 생경스럽고 소중하다.

 

▲노고단의 운해 (2006.1.16 개인산행시 자료사진)

 

고운해(老姑雲海): 

노고단이 섬진강의 남쪽 끝자락에 걸쳐있기 때문에 섬진강에서 발생하는 수증기가 바람을 타고

올라오다 노고단주위의 차가운 공기에 막혀서 산중턱에 걸린다.

봄이면 심한 일교차로 인해 계곡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산자락을 가득 메워 구름바다를 만들어낸다.

기온이 떨어지는 날은 4~5월에도 순식간에 상고대가 펼쳐졌다 사라지기도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산의 표정에 누구나 탄성을 질러댄다.

노고운해는 천왕봉 일출과 함께 지리산 10경 중에서도 첫손에 꼽힌다.


▶지리 십경 (智異十景) ◀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어느 산인들 해가 뜨지 않으랴만 천왕봉에서의 일출구경은 "삼대가 덕을 쌓

아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기가 어렵다,

 

제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피아골의 단풍. 피아골은 지리산의 울음주머니로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이 계곡에 흘린 피가 많다. 피밭골(직전)에서 유래,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지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게 산허리를 휘두른 구름인데 특히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으뜸으로 칭한다.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해가 떨어지면서 구름 바다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덩어리는 자연이 만든

화려한 잔치다.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은 옛 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드는데 쓰이던 고개다.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제6경: 세석(細石)철쭉

해마다 5월말이면 지리산에서는 고운 분홍색 철쭉이 피어나 지상낙원을 이룬다.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지리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로 인해 지리십경에

들게 되었다. 냉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다.



제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연하봉의 이끼낀 기암 사이에 가득 들어찬  고사목 숲은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 급류를 이루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골이 깊고 수량도 풍부하다. 


제 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한 섬진강. 비록 열번째 경치로

꼽히기는 했지만 지리산자락에서 내려보는 섬진강 풍광은 조물주가 아니고는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 노고단 정상에서 바라본 구례와 섬진강 풍경 (2006.11)

 

 노고단 오르는 새벽 길.

우리 산님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간혹 들리는 새소리와 연한 새벽안개 바람, 저벅저벅 무거운 발소리와

간혹 돌길에 탁탁 튕기는 스틱소리.

그리고 점차 거칠어지는 내 숨소리뿐이었다.


하루에도 12가지 날씨를 보여준다는 지리산이 앞으로 이틀동안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생각한다.

엊그제 부처님오신날 오후에 많은 비가 왔으니, 당분간 청명할 것으로

기대해본다.

 

가랑비처럼 보이는 하얀 새벽 이슬이 랜턴 불빛을 받아 신비로운 모습을

연출한다.

길옆의 산죽은 잎을 부비며 발길에 박자를 맞춘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 수준이다.

정돈길 길 옆 수로엔 제법 물소리도 들린다.

크게 힘들거나 어렵지 않다. 산장까지는 약 40~50분 정도 소요된다.

대피소 직전 첫번째 조망터에서는 구례 부근의 야경이 한층 선명하다.

 

제일 먼저 만나는 노고단산장.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붉은 벽돌로 지은  3층 건물이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현대식 시설로 지어진 노고단 산장은, 돈만 있으면 이 꼭대기에서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문명의 냄새와 이 높은 곳에서

숙(宿)과 식(食)을 해결할 수 있다는 편리함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다.

 

 

노고단산장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한다.

'천왕봉' 이정표를 따라 오르막을 올라선다.

10분 정도 올라서면 멀리 우측으로 노고단이 보이고,  바로 좌측에 노고단을

본딴 돌탑이 보인다.

 

노고단에 오르니 어슴프레 여명이 온다.

엷은 푸르거나 또는 붉으레 하거나.,쉽게 형용하기 어렵다.

새벽 여명이 갖고 있는 색깔이다.


노고단중턱엔 야생화인 금강초롱과 대규모 원추리 서식지가 있다.

봄이면 금강초롱, 원추리는 7월말에서 8월초에 만개하므로 여름 산행시 볼 수

 있다.


우리의 산야에 성숙한 여인 마냥 아름답게 피어있는 백합을 닮은 노란색 꽃

 ‘원추리. 그 꽃말은 知性이다.

 ▲노고단의 원추리군락 (자료사진)


우리가 이 꽃에 대해 잘 모르는 몇가지가 있다.

이 꽃은 하루살이 꽃으로 아침에 피고 저녁에 시들어 다음날 다른 꽃이 핀다고

 한다.  

          원추리는 그 꽃잎을 말려서 가지고 다니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의남화(宜男花)"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 그 향기가 성적감흥을 불러일으켜 부부의 금실을 좋게 한다고 해서

         "금침화(衾枕花)" 또는 합환화(合歡花)"라고도 불린다.

        어린 긴 잎은 나물로 해먹으며 또 그 꽃잎을 말려서 차에 띄워 마시면

        머리를 맑게 하여 근심을 잊게 한다고  "망우초(忘憂草)"라고도 불리운다. 


지리산 3대주봉은 천왕봉(1,915 m), 반야봉(1,734 m),노고단(1,507)m이다.

어차피 오늘은 1박을 하는 넉넉한 산행이다.

그렇지만 이번 기회에 3대 주봉을 오르려해도 시간이 안맞는다


노고단 정상은 자연휴식년제로, 출입을 제한하다가 최근 오전 10시~오후4시

로 개방시간을 한정하고 있다.

   '노고단'의 노고(老姑)는 원래 도교(道敎)에서 온 말. 우리말로는 할미란 뜻.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를 말한다. 서술성모는 선도성모(仙桃聖母)라고

하는데,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뜻하는 말이다.

옛날에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명산이 있어 이를 오악(五嶽)이라 하였다.

신라에도 오악이 있어 동(東)에 토함산, 서(西)에 계룡산, 남(南)에 지리산, 북(北)에 태백산,

중앙(中央)에 부악(父岳 팔공산)이 있어 매년 풍년과 나라 수호를 위한 제사를 올렸다.

이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으로 노고단(老姑壇)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라시대에는 주로 화랑의 연무장으로 쓰이다가, 일제 시대에는 서양선교사 등의 휴양지로,

6.25때는 빨치산의 근거지로 쓰이기도 하던 곳이다.

 

 ▲2005.7월/ 2006.11.12 출입개방시 노고단 정상 오름과 내림길에서 (개인산행 자료사진)


5월은 계절의 여왕 이다. 또 5월은 장미의 계절이다.

그러나 노고단 산 기슭에는 진달래가 새벽 지리산을 찾아 온 길손을  반긴다.

그들의 고운 몸짓에 몸도 마음도 서서히 깨어난다.


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른다.
더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에 주저 앉아
철철 샘 솟는 땀을 씻으면, 거기
내 삶의 무게 받아
능선에 푸르게 걸어 주네, 산

이승의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다.
열두 봉 솟아 있는 서러움에 기대어
제 키 만한 서러움 벗으면, 거기
내 서러움 짐 받아
열두 계곡 맑은 물로 흩어 주네, 산산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에 오르다.
산꽃 들꽃 어지러운 능선과 마주쳐
네 생애만한 쓸쓸함 묻으면, 거기
내 쓸쓸한 짐 받아
부드럽고 융융한 품 만들어 주네, 산산산

저 역사의 물레에 혁명의 길을 잣듯
사람은 손잡아 서로 사랑의 길을 잣는 것일까
다시 넘어가야 할 산길에 서서
뼛속까지 사무치는 그대 생각에 울면, 거기
내 사랑의 눈물 받아

눈부신 철쭉꽃밭 열어 주네, 산,산,산


- 故고정희 시인 연작 시집 지리산의 봄중 '서시'-

 

▲노고단에서 바라본 반야봉.천왕봉까지 조망된다(2006.11) 


노고단 전망대에서 제일 먼저 마주치는 봉이 반야봉이다

노고단 고개에서 바라보는 반야봉은 정말 이원규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싯구처럼 여인의 둔부와도 같은 둥근 모습이다.

노고단 임시 돌탑을 한번 돌아보고, 어둠속의 노고단 정상과 반야봉을 번갈아

바라보며 솜을 고른다.

 

우공이산 (愚公移山)

 

“내 비록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내가 죽으면 아들이 계속하고,

아들이 죽으면 또 손자가 그 일을 잇고, 그리하여 자자손손 (子子孫孫) 계속하면

산은 유한하고 자손은 무한할 터인즉 언젠가는 저 두 산이 평평해질 날이 오겠지요.”


천왕봉 가는 길로 내려선다.

랜턴이 빛이 사그러지는 것과 반비례해서 산길이 제법 잘 보인다.

쉼없이 움직여서인지 잡 생각이 반쯤으로 줄어 든다.

예쁜 들꽃들과 아침 숲의 신선함이 수많은 바람과 일상에 지친 내 영혼을

위로한다. 배낭은 여전히 무겁지만 발걸음은 점차 가벼워진다.


노고단에서 1km를 지나면 너널길이다.

그 다음에 바로 철쭉 터널이 한참 이어진다.

아직 반 정도도 만개하지 않았다. 랜턴빛에 철쭉꽃이 반사된다.

동쪽하늘이 점점 밝아지는 것에 반비례해서 별빛과 어둠은 점점 사그러진다.


이제 주위는 환해서 걷는데는 불편함이 없다.

한참을 걷다가 노고단을 뒤돌아본다.

노고단 고개에는 랜턴이 불빛이 마치 오징어배를 연상하듯 이어진다.

단체 산행객 무리가 빛의 꼬리를 물고 노고단 고개를 넘어오고 있었다.

노고단 허리를 잡고 돌아 노루목으로 향한다.

길은 한동안 내리막 또는 오솔길 수준으로 크게 힘들지 않다.

한 시간쯤 가니 임걸령 샘이 목을 축이고 가라고 졸졸거린다.

 

 

                       ▲ 임걸령 샘터 사진 (2007.5.26 / 2006.1: 겨울에도 얼지않는다)

 

임걸령 샘터에 닿는다.

지리산에서 가장 물맛이 좋다는 곳이다. 여기서 식수를 보충한다.


지리산 종주는 화엄사,또는 노고단에서 시작하여 천왕봉까지 평균 1,300m의

능선 따라 가는 길이다.

1,507m의 노고단, 1,424m의 돼지령, 1,432m의 임걸령, 1,514m의 삼도봉

등으로 이어지는 1,000m 이상의 봉우리만도 13개, 900m 이상의 고원만도

 9개가 넘는다.

이 길을 보통의 경우 2박 3일로 가려면 그 식량만의 무게만도 만만치 않은데,

식수까지 짊어지고 간다고 생각하여 보라, 얼마나 끔찍한가.

더구나 천천히 가면 더욱 많이 준비해야 하는게 식량과 식수다.

그러나 지리산은 산객들을 위하여 그 오아시스 같은 샘터를 목이 마를 만한

거리마다 두었다.

그리고 곳곳마다 아름다운 전설과 함께 물을 열고 있었다.


이곳은 옛날에 녹림호걸 (綠林豪傑) 들의 은거지가 되었던 곳으로

조선때 의적(義賊) 두목인 임걸의 본거지라 하여 임걸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임꺽정이나 임걸이나 같은 林씨 의적임은 우연의 일치일까.

임걸령 샘터를 보니 청솔의 ‘샘터’님이 떠오른다.

그 님은 늘 잔잔한 사진과 글로서 많은 이들을 시원하게, 또 따뜻하게 만든다.

마치 저 임걸령의 샘터처럼.

 

어지러운 꿈을 헹구어 새벽 맑은 정신을 깨우는

맑고 차가운 샘이 있어야 합니다.

가까운 곳에 두고 자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잠재우는 수많은 최면의 문화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신영복 시화집‘처음처럼’샘터 찬물 中에서-


어떤 화랑이 노고단에서 임걸령을 행해 활을 쏘고 말을 타고 임걸령에 갔더니

 말을 탄 자기가 먼저 도착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올만큼 이 코스는 평탄한

코스이다.

요즘들어 어떤 등산객들은 "러브코스"라 부르는데 부르기 나름이지만

어감이 어쩐지 달갑지만은 않다.

노고단에서 임걸령을 가다보면 1424봉을 지나게 되는데 이 우측으로 돼지평전

이라고 불리는 너른 고원이 있다.

 돼지평전이라는 말은 멧돼지가 원추리 뿌리를 파먹기 위해 자주 출몰한다고

해서 불리워진 이름이다.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마지막 회에서 하림(박상원 역)이 보고 있는

가운데 대치(최재성 역)와 여옥(채시라 역) 이 죽어가는 모습을 찍은 곳이

이 바로 돼지평전과 노고단 일원이다.

또 SBS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태수(최민수 역)의 화장재가 뿌려지는 곳

또한 노고단의 석양을 배경으로 찍었다.

영화 "남부군"은 지리산이 배경이지만, 오대산에서 촬영하고 지리산은 몇 컷을

곁들이는 씁쓸함을 남겼다.

 

이제부터는 제법 오르막이 이어진다.

피아골이 오른쪽 발 아래에 펼쳐진다.

피아골은 옛날 부근에 고대 오곡중의 하나인 피밭[직전;稷田]이 많아 피밭골

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바뀌어 피아골이 되었다.

임진왜란•조선말 격동기•여순반란사건•6•25 등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숲속길을 돌고 오르내리기를 몇 번. 1432m고지를 넘자 맞은편에 반야봉(1733m)의 모습이 보인다.

주능선에서 살짝 뒤로 물러나 있어 반야봉을 오르면 다시 돌아와야 하는 상황,

그러나 잠시도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지리산의 3대 주봉이므로 당연히 올랐다 가야지. 


계단길을 올라서면 노루목이다.

이곳에서 반야봉 정상까지의 갈림길을 만난다.

                반야봉 갈림길에 서있는 산객


노루목은 1)암두(巖頭) 모양이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모습

2) 또 노루가 지나다니는 길목이라고 해서 불리기도 하고,

3) 문순태씨의 "철쭉제"라는 소설에 나와 있기로는 산에서의 세 갈림길을

노루목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곳이 반야봉(좌측)과 삼도봉(우측)으로 가는 삼거리 길인 셈이다.

세가지 설 모두 그럴 듯 하다.

노루목에서 '목'이란 말은 종주 길에 장터목, 치밭목에서도 만나게 된다.

 

 

                          * 2006.1월 반야봉 산행사진

 노루목에서 반야봉 오르는 짧은 길이 너무 힘들다.

시간도 약 30분이 걸린다.

오랫만에 걷는 장거리 산 길. 비박장비와 이틀간의 취사도구를 넣은 녹녹치

않은 배낭의 무게로 벌써 어깨가 무거워지고 허벅지가 뻐근하다.

 

동쪽 하늘엔 벌써 새벽의 여명이 시작됐다.

여러 능선과 숲에 가려 조망이 시원치 않다.

서둘러 급히 올라가는 도중 이미 날이 밝고 있다. 

이미 반야봉을 거쳐 내려오는 불새님 일행과 조우한다.

오늘 천왕봉에서는 제대로된 일출을 보았을까 궁금하다.

 

 

 

 

 

 

▲반야봉 에서의  천왕봉을 바라보는 새벽 여명


지리산 주능선 마루금중 오직 이 봉우리만 약간 북쪽으로 치우처져 있다.

그래서일까?

반야낙조(般若落照)라는 진풍경을 빚어내는 곳이다.

해가 떨어지면서 구름바다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불덩어리.

 반야낙조(般若落照)의 아름답고 찬란한 황혼의 축제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감탄을 절로 자아내기에 충분해 어떤 시인은 '자연이 만든 가장 장엄한 잔치'로

 극찬하기도 했다.

 

 반야봉 조망터에서 바라보는 일출시 노고단 풍경. 

     오른쪽 중간 하얀 점 부분이 성삼재이다. 

  

 

 ▲ 반야봉 정상에서 바라본 불무장등 능선

 

반야봉은 불교적 의미로 보면 지리산의 주봉인 셈이다.

반야(般若)란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로 지혜를 뜻한다

분별이나 망상을 떠나 깨달음의 참모습을 환하게 알게 되는 지혜가

반야(般若)의 참뜻이다.

이 지혜를 얻어야 성불한다는 것이 바로 반야(般若)인 거이다.

                 천왕봉 다음으로 손꼽는 1,732m의 반야봉 정상과 내가 메고온 배낭.

                      남들은 반야봉 갈림길에 벗어놓고 올라오는데 그냥 메고왔다.


반야(般若)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옛날 마고할미라고 하는 천신(天神)의 딸이 도사 반야를 만나 결혼하여 천왕봉에서 살았다.

반야는 딸 여덟을 나아 놓고 반야봉으로 도를 닦으러 떠나가서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 할미는 나무 껍질을 벗겨서 정성껏 남편 옷을 짓고 남편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만 화가 나서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는 홧김에 그만 죽고 말았다.

그때 찢겨진 옷이 남편이 있는 반야봉으로 날아가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고, 여덟 딸들은 8도에

내려가 8도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

지금의 반야봉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이고, 반야 봉우리에 안개가 자주 끼는 것은,

마고 할머니와 반야가 저승에서나마 만나고 있는 것이라 한다.


반야봉엔 아무도 없다. 혼자서 실컷 쉬고 내림 길을 잡을려고 할때쯤,  

세 여자회원을 ‘진진’님이 동행해왔다.

이 분들과는 이번 종주 내내 대원사까지 동행하는 인연이 이어졌다.

  

지난해 초까지 볼수 없었던 새로 만들 한글 정상석과 '진진'님

 

지리산 당일 종주 산행일 경우 반야봉을 오르면 당연히 좋지만 만약 체력적

으로 많이 힘들거나 시간이 늦었다면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한다.

반야봉을 다녀오는 시간은 왕복 1시간 30분 정도.

 반야봉에서 삼도봉 가는 길

 

곧이어 삼도봉(1,499m)에 도착한다.

전북, 전남, 경남 이렇게 삼도가 만나는 지점.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삼도봉이라고 명시하기 전 이곳은 낫날처럼 생겼다고

해서 낫날봉 또는 날라리봉, 늴리리봉 등으로 불려졌다.


앞으로 불무장등선 뒤로는 반야봉 우측으로는 피아골 계곡, 좌측으로는

연동골계곡이 시원하게 펼쳐있는 이 곳의 조망은 등산객의 발길을 잡는다.

                         삼도봉 표지


민주지산 삼도봉과는 느낌이 다르다.

삼각형의 조형물 끝이 반질반질 닳은 채 서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메만졌으면 저럴까.

저 삼도봉 조형물을 메만지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우리 민족도 이제

더 나은 미래가 열리리라. 

 ▲ 삼도봉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조망

 

 

화개재와 삼도봉 구간에 1999년 설치한 나무계단 (목재데크). 

  길이는 240 m 이다.2006년 1월 같은 자리 직전 사진과 비교

 

                   ▲화개재 500번째 계단

                          누군가 10 계단마다 계단 모서리에 계단번호를 표시해 놓았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내리는 길은 계단으로 멋지게 놓여있지만 힘은 든다.

 약  595개의 계단을 내려서야 한다.

계단길이 힘들기는 하지만 등산로 보호 차원이니 감수해야한다.

계단을 내려서면 좀 훤한 헬기장을 만난다. 화개재라는 곳이다

 

* 화개재는 지리산 주능선중에서 고도가 가장 낮은 곳(1200여미터)으로 북측으로 뱀사골이

  8.5 kM 펼쳐져 있으며, 남측으로는 연동골(6 Km) 계곡으로 이어져 있는 곳으로 옛날에는

 남쪽 화개지방의 해산물과 북쪽 내륙지방의 특산물을 교역하던 장소이다.

 

진행 방향 좌측이 뱀사골산장으로 내려서는 길이다.

식수가 떨어졌다면 이곳에서 보충해야겠지만, 왕복 400미터의 계단길을

오르내리기가 그리 수월하진 않다.

아침을 해먹기 위해 길을 내려선다. 

 

▲ 뱀사골 산장 전경

  

뱀사골 산장 계단 길 양쪽으로는 피나물 군락이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

햇반을 데우고, 우거지국과 장조림등으로 아침을 한다.

커피까지 챙겨 마시니 완전히 소풍나온 기분이다.

 

            아침 준비하는 동안 잠시 휴식을 취하는 님....

               영화 '델마와 루이스'처럼 천왕봉을 꿈꾸며 집을 나섰다.


한국의 명수(名水)로 통하는 이 물은 반야봉 삼도봉 토끼봉 등에서 발원하여,

계곡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뱀사골 계곡이 되어 흐른다.

왜 하필 이름이 뱀사골이라고 하였을까?

보통 생각하기에는 뱀이 많은 골인가 보다 하는데 그게 아니다.

 

배암사 골 입구에 석실(石室)이 있다. 건너편에 옛날에 '배암사(背岩寺)'란 절이 있었단다.

등 배(背) 바위 암(岩) 절 사(寺), 바위 뒤에 있는 절이라는 말이다.

 말이 줄어 '뱀사'가 되었다든지, '뱀소(沼)'란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있으나,

다음과 같은 전설이 더 유명하다.


옛날 지금의 뱀사골 입구에 송림사란 절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칠석날(7월 7일) 밤이

지나면 주지 스님이 사라지곤 했다.

이것을 마을 사람들은 스님이 부처로 승천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서산대사가 지나다가 이 말은 듣고 이상히 생각하여, 칠석날에 비상[독약]을 넣은 장삼을

주지 스님에게 입고 독경하도록 하였다.

새벽이 되자 요란한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큰 뱀이 송림사 계곡을 황급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서산대사도 뱀을 따라 올라가 보니, 용이 못된 이무기가 뱀소(沼)라는 못에 죽어 있었다.

뱀의 배가 불룩하여서 배를 갈라 보니, 송림사 주지 스님의 시체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뱀'에다가 죽을 '사(死)'를 더하여 뱀사골이라 하였다.

그 송림사의 터가 지금의 반선 '전적기념관'이 있는 자리다.

           뱀사골 산장 200m 내리막길 주변에 피어있는 피나물 군락지


노랑매미꽃, 여름매미 꽃이라고도 함. 양귀비과(楊貴妃科 Papaveraceae)에 속하는 다년생초.

중부지방의 산지나 북부지방의 산간지역 그늘진 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옆으로 기는 굵은 뿌리줄기를 가져 영양번식으로 무리를 지어 집단을 형성하며 뿌리는 길고

가늘다. 뿌리줄기에서 길이가 30~50㎝인 줄기와 잎이 나온다.

노란색의 꽃은 4월말에서 5월초에 걸쳐 원줄기 끝의 잎겨드랑이에서 1~3개씩 핀다.

꽃받침잎 2장, 꽃잎 4장이 십자형으로 배열된다. 암술은 1개이지만 암술머리는 2개로 나누어져

있고, 수술은 매우 많다. 여름이 되면 잎과 줄기는 없어지고 열매를 맺는데 열매는 무 열매처럼

긴 삭과(果)이다. 피나물속(―屬 Hylomecon)에는 한국을 중심으로 일본·중국·만주 등지에 분포

하는  3~4종(種)의 동북아시아 특산식물이 있지만 학자에 따라 이들을 애기똥풀속(Chelidonium)

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피나물과와 비슷한 종류로는 1935년 일본학자 나가이에 의해 한국 특산으로 설정된

매미꽃(H. hylomeconoides)이 있는데 이것은 외형적으로 꽃대가 따로 올라와 있다.

최근 꽃가루의 형태 연구결과로 매미꽃은 피나물속이며 애기똥풀속과는 다른 식물임이 입증되었다.

연한 줄기와 잎을 꺾으면 피[血]와 비슷한 적황색의 유액이 나와 피나물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

식물체 전체에 약한 독성이 있지만 어린 것은 삶아서 나물로 먹고, 한방에서는 뿌리를 하청화근

(荷靑花根)이라 하여 외상을 입은 부위에 붙이거나 환약으로 만들어 복용하여 신경통·관절염 등

을 치료한다. 꽃 모양이 아름다워 이른봄 정원의 화초로 좋으며 번식은 포기나누기로 한다.

다음백과사전... 李相泰 글


다시 화개재로 올라 토끼봉을 향해 출발한다.

오르막이다. 힘을 내어 본다.

토끼봉 정상까지는 약 45분 정도 소요되며 정상엔 헬기장이 있다.

진행 방향 우측으로 길이 이어져 있다. 칠불사로 내려가는 등로이다.

전에는 이 헬기장이 모두 개방되었는데 지금은 목책을 만들어 등산로를

따로 연결해두고 있다.

 

천왕봉에 버금가는 상징성을 갖고 있는 지리산의 제2봉인 반야봉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주능선상의 토끼봉이다. 해발 1,533m의 토끼봉은 가까운

반야봉과 불무장등, 노고단, 촛대봉, 삼신봉을 연결하는 남부능선은 물론 먼발치의 천왕봉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빼어난 장소다.

 토끼봉이란 지명이 토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토끼봉으로 불리는데는 방위 개념에서

비롯됐다. 지리산의 상징적 봉우리인 반야봉 정상에서 정동쪽에 위치해 있다는 뜻으로 24방위의

정동에 해당하는 묘방이라 해 토끼봉, 즉 묘봉으로 이름지어진 것이다.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이름 가운데서 가장 특색있는 유래를 가진 지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어원은 아직도 일반인에게 덜 알려져 토끼봉이란 지명을 토끼와 관련지어

부르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듯하다. 

해마다 수십만명이 찾고 있는 국립공원 지리산의 소중함과 국토의 존귀함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공단측이 간단한 이정표만 세우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요소요소에 이정표와

곁들여 그곳이 갖는 역사성이나 그 유래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안내판을 설치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겠다.

 어쨌든 방위 개념에서 비롯된 토끼봉은 그 표고만 두고 볼 때 수많은 지리산의 봉우리 중

아주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봉우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토끼봉은 앞서 언급했듯이 반야봉과 지리의 묘미를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있어 지리산 탐방객들에겐 늘 즐거움을 안겨주는 곳으로 사랑받고 있다.

- 출처: ‘지리산’/ 한중기 지음-

 

▲ 토끼봉에서 바라본 반야봉

 

토끼봉에서 뒤를 되돌아본다.

거대한 반야봉 아래 서 있는 느낌이다.

토끼봉 정상에선 반야봉 바로 아래의 작은 봉우리를 볼 수 있는데 그 봉우리가

삼도봉이다.

 토끼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계단길이다. 이후 점심 예정지인 연하천까지는

내리막과 평지,오르막이 적절히 섞인 산 길이다.

 

                   ▲ 연하천 가는 길에 핀 백철쭉


연하천에 닿기 전 총각샘이 있지만. 임걸령이나 뱀사골에서 식수를 채웠다면

 굳이 들릴 필요가 없다. 이정표도 없다.

'총각샘'은 토끼봉(1,534m)을 지나 연하천 가는 길에 자칫하면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위치에 있다. 명선봉 이정표에서 30분 정도 못미쳐 등로 남쪽

으로 약간 내려가면 커다란 바위 밑에서 솟아나는 샘이다.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있어 산삼 캐러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하였다는 샘이다. 이런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듣고 1970년 7월에 지리산악회의 노총각 2명이 드디어 찾아냈다고 해서 '총각샘'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장터목대피소에서 20m쯤 내려가서 샘이 있는데 이를 '산희(山姬) 샘"이라 한다. 이름을 지을

당시 지리산악회 회원 안기호(安琦浩) 씨의 사랑하는 딸 이름이 산희(山姬)라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 여성적인 이름과 짝하기 위하여 이 샘을 '총각샘'이라고 명명하였다는 말도 있다.

이 총각샘에 흠이 있다면 지리산 다른 샘터와는 달리 갈수기에는 말라버린다는 것이다.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 나이테가 말해준다.


 연하천산장 직전은 잘 정돈된 계단길이다.

산장이 가까워지면 인조물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둥근 나무로 만든 계단이나 나무 계단 등 잘 다듬어진 길이 그것이다.

 

지리산 종주길에 만나는 산장은 아늑한 안식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산장을 목표하여 길을 걷고 그곳에 가면 쉴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고,

물을 보충할 수 있다.

 

 ▲연하천 산장 전경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점심을 준비한다.

산장앞에서 햇반과 꽁치통조림에 김치를 넣어서 점심을 한다.


연하천 산장은 지리산에서 가장 풍부한 샘물을 자랑한다.

시원한 물에 둥둥 떠있는 음료수가 참을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배낭안에서는 참이슬팩 여러개가 있지만, 오늘 저녁 ‘山上晩餐’을 위해 아껴둔다.

                 연하천산장에 걸려있던 ‘행여 지리산에 오실려거든'  詩碑


연하천산장은 개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분위기가 달라 주능선 등반길의 색다른 쉼터가 되고있다.

산장지기는 詩를 좋아하는 털보아저씨다.

 

흥이 나면 산님들에게 詩를 읊어보라고 한다는 분이다.

다른 곳과는 달리 맥주,소주등 주류를 판매하는 대신에 가격은 시중보다

2~3배 비싸다.

그래도 깊은 산중에서 한잔 술의 맛은 그 값이 있다.
전에는 오묘한 대자연(烟霞)속의 정취어린 샘(泉)'에서 토실토실하게 살찐

삽살개가 길손을 맞아 주었는데 오늘은 안보인다.

다음엔 연하천 산장에서도 하루를 묵어보리라.

 

 

연하천 산장 앞의 방울과 오른쪽 울창한 삼림


연하천 산장 문턱에 걸려 있는 '연하천 추억록'은 각자 사연을 안고

지리산을 찾은 사람들의 사연을 을 담고 있다.

이곳에서 점심을 하고 충분한 휴식을 한다.


노고단 방면에서 출발하든, 대원사 방면에서 산행을 시작하든 주능 가운데

명선봉 아래 위치한 연하천에 이르면 고산지대 특유의 색다른 감흥에 젖게 된다.

늘 옥류가 흐르며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감도는 연하천의 운치는 가히 천상의

 분위기 그것이다. 천왕봉의 일출 광경과 신비한 반야봉의 일몰을 영겁의

세월 동안 간직한 채 대자연의 섭리를 알듯 말듯 연하천은 늘 그렇게 변함없이

 지리산에 자리 잡고있다.

             ▲연하천 샘 줄기의 하나


 연하천은 한자로 연하천(烟霞泉)이라 표기한다. 매우 서정적인 느낌이 든다. 굳이 풀이해 본다면

 안개가 가득한 오묘한 대자연 속의 정취 어린 샘이 있는 곳... 연하천의 위치는 토끼봉과 명선봉,

 삼각고지, 벽소령 사이의 능선상의 가운데 명선봉 아래에 있다.


 토끼봉에서 3.5km 거리. 벽소령에서도 5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해발 1,500m 이상의

 고산지대인데도 맑고 시원한 계류가 흐르며 남,북,서 3면이 아늑하게 감싸여 있는 숲속의 연하천

은 널따란 평지를 이루고 있다.

 

 

                         ▲연하천 부근의 야광나무와 바위에서 자라는 식물


연하천산장에서 20분을 으르면 삼각고지(1462m)다.

삼각고지에는 6.25당시의 벙커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화개면 마천면

산내면의 경계지점이기도 하다.

 

삼각고지를 지나 벽소령으로 가는 가파른 능선길을 가다보면 높이 10m가 넘는

 두개의 바위가 서로 등을 맞대고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옛날 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의 유혹을 경계해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다 굳었다고 해서 형제바위로 불린다.

바위남사면에 구멍이 하나 뚫려있는데 이를 연하굴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형제바위 못미처 연하굴이라는 자그마한 동굴이 있다는데 정확한 위치를 몰라

 찾지 못했다.   

 

 ▲형제 바위 전경 / 아래 임도가 벽소령 작전도로이고 능선 가운데 하얀부분이 벽소령 산장이다.

 

 

연하천을 지나 벽소령까지는 약 2시간 가량 소요된다.

역사의 현장을 뒤로하고 다시 힘을 내서 걷는다.

길은 대부분 바윗길이지만 위험하진 않다.

벽소령(碧宵領)은 화개면과 마천면을 잇는 작전도로(무장공비 토벌을 위해)가

지나는 곳이다.

옛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 드는데 쓰이던 고개다.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고 한다.

 

벽소령 내음 / 이성부 詩人


이 넓은 고개에서는 저절로 퍼질러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부침개 한 장 사먹고

남족 아래 골짜기 내려다본다

그 사람 내음이 뭉클 올라온다

가슴 뜨거운 젊음을 이끌었던

그 사람의 내음

 

쫓기며 부대끼며 외로웠던 사람이

이 등성이를 넘나들어 빗점골

죽음과 맞닥뜨려 쓰러져서

그가 입맞추던 그 풀내음이 올라온다

덕평봉 형제봉 세석고원

벽소령 고개까지

온통 그 사람의 내음 철쭉으로 벙글어

견디고 이울다가

내 이토록 숨막힌 사랑 땅에 떨어짐이여

 

사람은 누구나 다 사라지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씩 떨어어지지만

무엇을 그리워하여 쓰러지는 일 아름답구나!

그 사람 가던 길 내음 맡으며

나 또한 가는 길 힘이 붙는다

 

▲벽소령산장.


최근 지리산국립공원 관리공단에 의해 신축된 벽소령 산장은 지하1층, 지상2층

연 건평 135평 규모의 2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산장이다.

식수는 최근 산장 입구 계단 앞쪽으로 끌어왔다.

그러나 이것도 사람이 많을 경우엔 그렇지 않다. 샘터는 화장실 뒤쪽 쌍계사

방향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다. 수량은 연하천보다 넉넉지 않다. 

산장 앞뒤로 비교적 전망이 좋다.

 

연하천 정문에 붙어 있는 "산 아래에서 갖고 온 쓰레기는 산 아래로 가져가

주십시오"라는 문구는 적어도 벽소령 산장에서는 볼 수 없다.

대신 쓰레기 분리수거 자루가 지상에서 가져온 쓰레기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지리산 능선에는 모두 9 개의 산장이 있다.

노고단, 뱀사골 (관리인 고영국), 연하천 (노시철), 벽소령, 세석, 장터목과

하산길 중간에 있는 산장들인 피아골 (함태식), 로타리 (로타리 클럽),

치밭목 (민병태) 산장들이다.  

이중 노고단, 벽소령, 세석 및 장터목산장은 관리공단에서 직영하고 있다.


하룻밤에 1인 5000원이며 모포 1장당 1000원에 대여 한다. 겉은 아주 아름답지만 내부는 군대

내무반같은 마루바닥.

옆 사람과 다닥다닥 붙어 자야 한다. 예약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에서 한다.

인터넷에서 산장 예약시 만약 남은 자리가 없으면 대기자로 등록한다.

그 사이 취소분이 생기면 대기자 순서대로 자동 예약 된다. 그 결과는 관리공단 홈페이지 운영자

가 예약 신청할 때 입력한 메일 주소로 알려준다.

만약 그것도 안 되면 숙박 예정지인 산장에 미리 도착해, 대기자 명단에 등록한다. 

예약을 하고도 산장에 오지 않는 사람들의 빈 자리를 대기자 순서 혹은 노약자 우선으로 배정

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약을 했을 경우 오후 7시 전에는 해당 산장에 도착해야 하며,

예약이 되어 있지 않을 시엔 복도, 마루 등에서 불편한 잠을 자야 한다.


그러나 산장이 꼭 좋은 점만 있는게 아니다.

산장에서 자본 사람들은 안다.

수많은 발냄새와 땀냄새들, 무엇보다 엄청난 코고는 소리에 고생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게 싫다면 방법이 있다.  

침낭,매트리스,침낭커버(판초우의,텐트프라이,비닐)등을 챙셔서 산장 밖으로

 나온 다음 비박을 할 수도 있다.

원칙적으로 지리산 주능선 전 구간은 텐트 야영이 금지돼 있다.


비박 bivouac (영) (프)

본래는 단순한 노영이었으나 불의의 사태로 예정하지도 않았던 노숙(불시 노영 : 不時露營)

약칭으로 비박. 지금은 좁은 레지 등에서 노숙할 수 있는 간이 텐트가 보급됨에 따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긴급성과 비장감이 없다. 그러나 고소 등산에 있어서의 불의의 비박은

대응책을 잘 강구해야 한다. 독일어는 비박(Biwak),

 

 

벽소령은 지리 십경(智異十景)에 해당하는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는 푸를벽(碧),밤소(宵) 소이다.

따라서 벽소령의 밤은 푸른 밤이요, 푸른 숲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너무나 희고

맑아 오히려 푸르게 보이는 곳이란 의미이다.

달밤이면 고산의 푸른 숲 위로 하얗게 웃으며 떠오르는 달이 너무 고와서,

그 하늘 색깔이 푸르게 보인다 해서 푸를 벽(碧), 밤 소(宵) 벽소령(碧宵嶺)이

아니던가.


깊은 산중에 어둠이 찾아들면 세상은 더없는 적막에 빠져들고 풀벌레의 울음만

고요를 깨칠때 벽소령에는 공산명월이 떠오른다.  


태고처럼 고요하고 흔들림 없는 벽소령의 밤.

울창한 삼림과 고사목 위로 떠오르는 달은 차갑도록 시리고 푸르다.  

시인 고은은 “어둑어둑한 숲 뒤의 봉우리 위에 만월이 떠오르면

그 극한의 달빛이 부스러지는 찬란한 고요는 벽소령이 아니면 볼수가

없다” 고 찬탄하였다.


겨울철 벽소령의 달빛은 차라리 천추의 한을 머금은 듯 차갑고 경외감을

느낄 정도로 푸른 유령빛을 하고 있어 어떤 이들은 벽소한월(碧宵寒月)로까지

부른다.

다음 기회엔 이곳에서도 일박을 하리라 다짐해본다.

휴식도중 우연히 귀연산우회 '산삼해' 고문님을 만난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이내 길이 엇갈린다.

 

예전 처음 지리산에 올때 山友가 “벽소령 산장에 가면 우체통이 있는데 ,

그 산중까지 우체부가 온다. 편지라도 한장 보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말 우체부가 온다고 믿고 싶다.

하늘아래 첫 우체통은 장터목에서 있지만 여기서 엽서라도 한장 보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벽소령산장의 우체통


푸른곰팡이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벽소령 지나서 바라본 벽소령 산장과 대낮에 하늘에 떠있는 달을 촬영했다.

 

세석에서 1박을 할 예정이기에 일정상 넉넉하다.

일출을 보려면 장터목 부근에서 비박을 해야하나 세석에서 산님들과

자리를 같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벽소령 산장을 등지고 우측길로 걷는다.

벽소령을 지나 문득 하늘을 보니 아직 대낮에 해가 떠있다.

약 20분은 오솔길 수준이며 산장에서 1시간 거리인 덕평봉(1522m)

선비샘에서 식수를 보충할 수도 있다.

 

덕평봉(1521m)을 등지고 남쪽 상덕평 능선에 선비샘 샘터가 있다.

  (뫼오름님 사진을 모셔왔다)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는데 수량은 비록 적으나 마르는 일이 없고,

그 주위가 평탄하고 넓어서 야영하기에 적합하다.

 

그 샘터 위에 초라한 고분이 하나 외로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 무덤과 샘에 얽힌 한 화전민의

서글픈 사연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연민의 정과 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옛날 덕평골 아랫마을에 이씨 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화전민의 자손으로서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난에 쪼달릴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박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배우지 못하여 무식한 데다 인상마저 못 생겨서 그 인품이 몹시 초라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천대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노인은 평생에 한번이라도 사람들에게

선비 대접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늙어 세상을 떠나면서 아들 형제에게 유언을 하되, 자신이 죽거든 그 시체를

상덕평 샘터위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효성스런 아들들은 훗일 그 아버지의 유해를 샘터위에 매장했다.

그로부터 매년 지리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이곳을 지날 때는 꼭 샘터에서 물을 마시게 되고

물을 마실 때면 반드시 노인의 무덤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되어 노인은 생전에

그리고 한이 되었던 선비 대접을 무덤속에서 받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으리라.

후일 이 동네 사람들이 이 노인의 불우했던 생전을 위로해주기 위한 소박한 인정으로

이 샘을 선비샘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지금은 무덤도 안 보이고 샘도 파이프로 연결하여 서서 받도록 조처하였기 때문에

이 씁쓸한 전설은 잊혀진 얘기로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시 2시간을 가면 세석산장이다.

세석까지 가는 길은 좀 지루하다.

덕평봉(1521m)에서 계속 동쪽으로 돌아 3km쯤 가면 높고 완만한 능선위에

7개의 암봉이 자리잡고 있다. 또 다른 선경을 연출하니 바로 칠선봉이다.

칠곱선녀가 노닐어 칠선봉이라던가.

 

칠선봉(1576m)을 지나 영신봉(1651m) 닿기전 계단길이 힘들게 느껴진다.

이 이정표에서 칠선봉을 지나 세석고원이 내려다 보이는 영신봉까지의 5Km가

 주능선중 가장 힘든 코스중의 하나이다. 

 

 

 

▲칠선봉의 모습(바로 위 사진) 과  칠선봉 가는 길

 

1997년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고 처음으로 지리산에 산불이 났었다.

한 등산객의 실화로 인한 이 불은 다행히 반나절만에 진화되었으나 영신봉

주변의 50 ha가 불에 탔었다.

당시 불길 진화후 잔불 진화용으로 하늘에서 비가 내려 지리산이 靈山임을

입증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망도 일품이다.

 

성삼재를 출발한지 어느덧 14시간이 지나 영신봉에 닿는다.

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도시에서 지는 단순한 해가 아니다.

1,651m 높이에 선 나무 사이로, 눈 아래 1,000m가 훨씬 넘는 봉우리 너머

구름과 구름 밖에 노을을 이끌고 지는 낙조였다.


유성에 살면서 가끔 우산봉과 갑하선 너머로 떨어지는 황금빛 노을을 볼때가

있다.

그것마저도 감탄하며 살아왔지만, 심심산천 고봉에서 지는 해를, 그것도 천하

의 선경이 펼쳐있는 지리산 봉우리 사이 탁 트인  시야에서 지는 해를 본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나도 기암괴석의 하나가 된다.

맞은편 촛대봉 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 혼자 서있다.

까닭모를 그리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눈으로 올라온다.

이마에 흐르는 땀속과 눈에 맺힌 눈물을 시원하고 서늘한 초저녁 산바람이

식혀 주고 있었다.

 

 

 

 

▲영신봉에서 낙조를 보고 점차 어두워지는 세석으로 향한다.

  맞은편 촛대봉 사면에 철쭉의 향연이 펼쳐 있다.


 

# 당신은 별을 보고 잔 적이 있습니까?


춘삼월까지 설원을 이루던 광활한 세석고원에는 평지의 여름에야 봄이 찾아온다. 

5월말 쯤이면 세석은 온통 붉은 철쭉으로 물들어간다.

언제보아도 꿈같고 그림같은 세석고원이다.

어떤이는 세석고원을 보며 '아름다운 여인네의 꽃무늬 한복 치맛자락처럽

곱게 보인다'라고 표현했다. 참으로 기막힌 표현이다.


세석은 겨우내의 황량함은 사라지고 화려한 모습으로 우릴 반긴다.

봄철 화려한 세석에 2년만에 발을 디딘다.

 * 예전 자료사진


봄이면 난만(爛漫)히 피어나는 철쭉으로 온통 꽃사태를 이루는

해발 1,600m의  세석고원.

이름 그대로 잔돌이 많고 시원한 샘물도 콸콸 쏟아지는 세석고원에는 수 십만

 그루의 철쭉이 한바탕 흐드러진 잔치가 벌어진다.

 

철쭉꽃 만발한 풍경을 요원(燎原)의 불길 같다고 표현한다.

이번 봄에 나는 보성일림산, 제암산, 남원 봉화산, 황매산, 지리산 바래봉 팔랑치

철쭉을 두루 보았다. 그래도 역시 세석 철쭉이 으뜸이다.


피빛처럼 선연하거나, 처녀의 속살처럼 투명한 분홍빛의 철쭉이 바다처럼

드넓게 펼쳐지는 절정기에는 산악인들의 물결로 세석평전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얼마전 찾았던 같은 지리산이지만  바래봉과는 또다른 모습이다.

숲이 울창했던 바래봉은 양들이 철쭉만 남겨놓고 잡목과 풀을 모조리 먹어서

빈 밥그릇 모양의 봉우리를 이루었다.

이제는 사라진 양들의 침묵속에 봄이면 철쭉꽃 무리의 그리움만 활활

타오른다.

 

▲ 세석공원의 연분홍 철쭉

   세석에 늦게 도착해, '뫼오름'님 사진을 대신 모셔왔다.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 아래 산맥들을 굽어보노라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산머리에 어리는

기다림이 푸르러

천벌처럼 적막한 고사목 숲에서

무진벌 들바람이 목메어 울고 있다

나는 다시 구불거리고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막막한 생애를 넘어

용솟는 사랑을 넘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 빙산에

쩍쩍 금가는 소리 들으며

자운영꽃 가득한 고향의 들판에 당도해야 한다


눈물겨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 세석고원을 넘으며 / 故 고정희 시인


세석평전에서 평전(平田)은 일본식 표기라 고원이라 부르기로 한다.

돼지평전도 마찬가지이다.

이 곳은 둘레가 12 Km, 넓이가 30여만평에 이르는 광활한 산상 평원으로

남녘 최대의 고원이다.


일제 강점기때는 헬기장을 개발할려고 했다는 설, 조선시대에는 영호남 동학 잔여세력의 거점이

라는 설, 그리고 신라시대에는 화랑의 심신수련장이었다는 설이 있다. 고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이 곳에 몇채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5월말에서 6월초에 걸쳐 피어나는 철쭉꽃의 향연은 또한 세석의 자랑거리이다.

요즘은 바래봉의 철쭉을 치지만 그것은 인공적인 미이고 세석의 자연적인 미를 따라가지는

못한다. 세석철쭉(細石철쭉)은 지리십경중의 하나다.

소설가 이병주의 지리산에서 보면 한 빨치산의 자살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그 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고 한다.

"지리산아 꽃으로 치장하고 너만 이처럼 호화스러울수 있느냐 !"


세석고원은 촛대봉을 기점으로 해 주능과 다른 또 다른 능선을 만들어

연결해준다. 하동군 방면으로 삼신봉까지 이어지는 남부능선(낙남정맥)이

그것이다.

가을 어느날 갈대숲 우거질 무렵 남부능선 길을 따라 연인과 함께 호젓이

걸어 볼만한 운치가 있다는 곳이다.


해가 떨어질 무렵 세석에 도착한다.

세석고원 주변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내가 지리산 종주를 처음 한 것은 1990년이었다.

그 당시 세석산장을 지금은 취사장으로 쓰고 있다.

현대식으로 새롭게 신축한 세석은 벽소령과 흡사하다.

그래도 역시 산장은 털털한 산장지기가 있는 곳이 정겹다.


우리 나라에서도 가장 큰 이 세석대피소는 23억원을 투입하여 2층 6백53평 규모로 

     3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대피소는 초만원이다. 난민촌을 연상한다.

초저녁인데 벌써 대피소 1층 입구에서 비박에 들어간 산객들이 보인다.

 

 

                      ▲ 비닐로 침낭을 감싼게 냉동인간이 따로없다. 몇백년후 깨어날까?


세석 대피소에서 남부능선(낙남정맥길) 40분 정도 내려 가면 ‘음양수(陰陽水)’샘터가 있다.

예로부터 자식 없는 사람들이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로 국립공원이

지정되기 전에도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이 물을 마시고 기도를 드렸던 곳이다.

이 음양수에는 다음과 같은 슬픈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옛적 산아래 대성골에 호야와 연진이라는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으나,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 곳에 곰과 호랑이가 살았는데 어느 날 남편 호야가 일하러 나간 사이 마음 착한 곰이

부인 연진에게, 세석고원에 자식을 낳게 해주는 신비한 음양수샘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

이 음양수를 찾아와서 실컷 마셨다.

호랑이가 이 사실을 산신령에게 밀고하자 화가 난 지리산 신령이 천기를 인간에게 누설한 곰을

 토굴 속에 가두어 버리고,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의 왕으로 살게 하고,

연진에게는 잔돌[細石]밭에서 평생을 철쭉을 보살펴야 하는 형벌을 내렸다.

연진이는 잔돌에 터져 흐르는 다섯 손가락의 피를 철쭉에 뿌리면서 눈물의 나날을 살았다.


연진은 밤이면 촛대봉 정상에다 촛불을 켜놓고 용서해 달라고 옛날과 같이 남편과 같이 살게

해 달라고 빌고 빌다가 가엽게도 그만 돌이 돼버리고 말았다. 한편 사라진 아내를 찾아 헤매던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달려가다가 제지당하여, 어쩔 수 없이 절벽 위에서 목메어

아내를 불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석고원의 해마다  유난히 붉게 피는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마음이라 하고, 촛대봉의 바위는 연진이 굳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내가 이태의 체험적 수기소설‘남부군’을 읽어본게 1988년이었다.

강원도 화천 최전방 철책에서 군장교로 복무하던 시절이다.

영하20도의 추위가 넘나드는 을씨년스럽고 혹독한 겨울의 백암산 GOP초소는

 마치 지리산과도 같은 무대였다.

휴전선 155마일 철책은 남과 북 이데올로기가 마주치는 극한의 점점이었다.

후방 동기를 통해 책을 구입하곤 몇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그전에도 이병주의‘지리산’조정래의‘태백산맥’과 같은 소설이 있었지만 남부군

만큼 생생한 감동은 없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상상력으로 역사를 구성한 것이라면 '남부군'은 분식

(粉飾)없는 적나라한 사실의 기록이다.

사실이 전달하는 구체성은 섣불리 흉내낼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군 전역을 한 이듬해, 이 수기를 토대로 안성기 주연의 영화‘남부군’이

1990년 여름에 개봉되었다.

그해 가을, 난 그  현장을 찾아 나흘동안 지리산 자락에 있었다.

이태의 남부군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았다.

반야봉 뒤의 빨치싼 사령부를 헤집어 보기도 했다. 마치‘남부군’처럼 인간의

삶이 가지는 한계상황과 절박함, 의지, 고뇌, 절망 그리고 사랑을 모두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이 책의 끝무렵에 나오는 글을 몇자 적어 본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미신'이 있다. 사실은 정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자가 정의로운 것이다.... 절대의 의(義)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절대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리산 산장에서 난생 처음 자본것도 바로 세석이었다.

정취있는 돌벽 산장앞에 앉아 산객들이 쉬어 가는 낮을 보내고 나면, 달과 별과

 함께 잠들게 된다.

도시에서의 하늘보다, 더 가깝고 더 크게 별들은 반짝이며 속삭여 주고 있었다.

동트는 소리를 듣고 깨어나 보면, 해는 천왕봉 같이 허공에 허무하게

그냥 떠오르는 일출이 아니었다. 고산에서 자란 나무와 나무, 산과 산,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떠오르는 해였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절절하다.

지금도 세석의 취사장만 보면 그 시절의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1990년 당시 세석산장과 젊은 시절 내 모습. 청바지와 빨간 양말.ㅎㅎ.

  예전 산장은 지금 취사장으로 쓰고 있다. ㅠㅠㅠ.



무거운 배낭을 벗으니 눌렸던 어깨가 더 아파오는 것 같지만 금새 편해진다.

대피소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사진도 찍고 이곳저곳 여유있게 구경도 한다.


일몰 (日沒)

 

오늘 저녁의 일몰 (日沒) 에서

내일 아침의 일출 (日出) 을 읽는 마음이

지성 (知性) 입니다.

 

- 신영복 서화에세이 ‘처음처럼’


바람부는 산장에 산의 어둠은 짙고 빠르게 덮쳐온다.

저녁을 준비한다. 거림에서 올라온 원추리님이 가져온 삼겹살을 굽고, 

여기까지 힘들게 가져온 소주팩 4개를 꺼낸다.

동행한 산님들과 즉석 삽겹살 파티를 벌인다.

각자 배낭에서 취사도구와 저녁을 위해 먹을 것을 꺼낸다.

산위에서 먹는 밥은 꿀맛이다.


산에서 먹는 삼겹살.

더도 말고, 말 그대로 암소갈비가 저리 가라다.

어느 식당에서 인들 이렇게 맛있게 먹으랴. 술잔이 계속 돌다가 바로 옆의

산님들과는 발렌타인 양주까지 나눈다.


자연과 여행은 사람의 영혼을 가볍게 한다.

누구에게나 마음이 넓어지고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지리산은 모두에게 마음 활짝 열어주는 마술을 걸어 주었다.


별빛이 더욱 빛을 발한다.

헬기장 부근 공터로 나아가 비박색을 설치한다.

여러 잔의 술에 취기가 있어서 그렇지 폴대를 자꾸 놓친다.

비박색을 구경하려온 ‘진진’님이 옆에서 거들어 겨우 폴대 구멍을 채웠다.


침낭을 깔고 비박색 입구를 개봉하면서 밤 하늘을 쳐다본다.

오늘이 음력으로 며칠이던가. 아직 보름이 될려면 멀었다.

밤 하늘에 구름이 휘익휘익 흘러가는게 보인다.

그 사이로 달이 있다. 만월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달이 제법 크다

그렇게 휘영청 밝은 달은 아닐지라도 달이 지리산에 걸려 있다.

대한민국 곳곳을 비추고 있을 달빛은 해맑고 은은하기만 하다.

한 낮의 햇살처럼 눈부시도록 밝지는 않지만, 지척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둡지도 않다.


깊은 밤에는 별이,

더운 여름에는 바람을 거느린 소나기가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위안입니다


 - 신영복/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중


가수원에 사는 두꺼비님.

10년전에 백두대간을 2개월에 걸쳐 단독종주한 사람이다.

부식 조달을 제외하곤 산에서 먹고 잤다. 자녀들도 번듯하다.

사춘기시절 자주 산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집에서 못다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같이 별을 보고 자는게 최상의

자녀교육 이었다는 것이다.


등산이 취미라는 생활기록부를 보고 담임이 어디를 다녀봤냐고 하자,

공룡능선 갔은데 다녀보았다는 아들의 대답에 선생님이 머쓱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한다.

“별을 보고 자봤냐“는 것이다. 그는 진정 멋진 사내다.

일요일 밤. 대전에 돌아오는 날.

그가 단독으로 지리산 태극종주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 1인용 비박색.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을 펼치니 호텔이 안부럽다

                  ▲ 취기에 손이 흔들려서 사진이 흐릿하다.(비박색 전면과 옆면)


비박색은 아늑하다.

매트리스를 깔고 침낭속에 있으니 전혀 추위를 못느낄 정도다.

혼자라도 좋다. 내 눈 위에 바로 밤 하늘이 다가온다.

긴 장대라도 흔들면 '후두둑' 떨어질 만큼 하늘엔 별들이 총총하다.

북두칠성이 또렷하게 보이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밝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이따금 산짐승 소리도 들린다.

지리산 세석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사람은 누구나

어제 저녁에 덮고 잔 이불 속에서

오늘 아침을 맞이하는 법이지만

어제와 오늘 사이에

밤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입니다.


- 신영복 서화에세이 ‘처음처럼’


나는 오늘밤 별을 보고 잠이 든다.

詩人 윤동주처럼 밤하늘의 별을 헤다 죽음 보다 깊은 잠에 빠져든다.

당신은 별을 보고 잔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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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8.27 09:25

    첫댓글 너무 아름답고 좋습니다. 산보다 글이 더 좋은것 같습니다. 회장님의 산에 대한 애정과 그리고 해박한 지식이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한번 언젠가는 도전을 해보고 싶습니다. 이런 감흥은 없겠지만 우리 역사속에서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지리산이기에 오를때마다 마음 한켠이 무겁고 아프답니다. 역사는 지나간 사실이지만 지리산의 역사는 한국사에 있어서 평생 잊지못 할 산이며 잊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산 교육의 장소이기도합니다. 안치환이 부른 '지리산'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넘넘 좋습니다. 잘 읽고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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