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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장동관님이
고려신학대학원 게시판과 부흥과 개혁 카페에서
구약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것은 폐지되었고,
신약의 성도는 그것을 지킬 필요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부흥과 개혁 카페에서
저를 포함하여 바로미님, voice님, 한우리님, holyjoy님 등은
이 구약의 율법은 분명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를 문자적인 의미에서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은 방식으로 지키지는 않지만(단절성),
이는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에 합당한 의미로 변혁되어
신약의 성도들에게 큰 의의를 갖게 된다고 주장해왔습니다(연속성).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문제 중 하나는
단절된 것을 연속된 것처럼 관례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단절만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율법주의가 혼인 잔치의 포도주를 다시 결례의 물로 되돌리려고 하는 어리석음이라면
무율법주의는 이 포도주가 아직도 결례의 물인 줄 알고 땅에 쏟아버리는 파괴 행위입니다.
로마 교회는 포도주 대신 미사라는 결례의 물을 마셨으며,
재침례파는 이 포도주를 땅에 쏟아버렸습니다.
이 설교를 올리는 이유는
이 속에 율법을 보는 저의 입장이 담겨 있고,
또한 이 카페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의 자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해서입니다.
원고가 부실하더라도 용서해주시고,
제 원고보다는
성경 본문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사단은 죄의 사슬로 저를 결박했지만,
율법은 제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었고,
그분의 십자가 밑에서 저를 해방하였으며,
그분께 결박 당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자유임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본문 : 신19:15-21(출21:22-25; 레24:10-23)
제목 : 보복의 원리를 통하여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15)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아무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 말함이 있으면(16) 그 논쟁하는 양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시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17)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18)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19)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후부터는 이런 악을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아니하리라(20)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21)”(신19:15-21)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22)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2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24)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25)”(출21:22-25)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애굽 사람 된 자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나가서 한 이스라엘 사람과 진 중에서 싸우다가(10)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 어미의 이름은 슬로밋이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11) 그들이 그를 가두고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더니(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13) 저주한 사람을 진 밖에 끌어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지니라(14)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15)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16)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17) 짐승을 쳐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18)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19)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손상을 입힌 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20) 짐승을 죽인 자는 그것을 물어줄 것이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일지니(21) 외국인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히 할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22)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니 그들이 저주한 자를 진밖에 끌어내어 돌로 쳤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였더라(23)”(레24:10-23)
<서>
우리들은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며, 성경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게 됨을 고백합니다(딤후3:15-17).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말씀이지만, 구약성경은 그렇지 못하거나 신약과는 모순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심한 경우에는 구약은 오늘날 필요가 없거나 신약을 약간 보충해주는 정도이며, 구약성경이 없이도 신약성경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초대교회사에서도 이런 이단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말시온주의였습니다).
그러나 요5:39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라”(요5:39)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던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아직 없었습니다. 즉,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은 구약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나님이신 그분 자신의 입으로 구약성경은 영생을 주시는 말씀이며, 또 바로 그 구약성경이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본문말씀 역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본문말씀 역시
①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②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영생의 말씀이며,
③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우리를 고민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5:38-39의 말씀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39)”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 예수님께서 구약을 거부하고 계신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구약을 거부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이 말씀은 당시 바리새인 등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잘못 해석되어져 가르쳐지고 있었던 구약의 참된 의미와 정신을 회복시키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이 말씀을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짓밟는 정당성의 근거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약한 자들을 보호함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게 하기 위하여 주신 계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계명을 통하여 그들의 삶 가운데서
①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②장차 오실 구원자 그리스도를 대망할 수 있었고,
③이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요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보복의 원리를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1. 여호와께서는 보복의 원리를 통하여 공의의 나라를 이루신다.
2. 여호와께서는 보복의 원리를 통하여 사랑의 나라를 이루신다.
는 순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는 보복의 원리를 통하여 공의의 나라를 이루신다.
구원받은 공동체로서의 새로운 원리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이 계명을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계명은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개인적으로 그 구원의 체험을 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각 다른 곳에서, 다른 생활을 하며 살도록 구원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악이 침투하여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 세상에 구원받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한 거룩한 공동체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사단의 세력을 뚫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겨낼 나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받은 공동체 이스라엘을 통하여 옛적에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3)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8)
즉,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권세에 짓눌려 있던 천하 만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선교의 거점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세우신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어떠한 모습을 지니는가에 따라서 천하만민은 그 이스라엘을 주목하게 되어지고,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스라엘은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이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전혀 새로운 삶의 원리를 지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원리로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것은 이 세상의 백성들과 구별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의 표징이며, 애굽에서 구원받아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구원받기 위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결과로, 구원받은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징표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율법을 지키는 바로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참다운 시민이므로 이 율법은 오직 구원받은 자만이 지킬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행함과 구원이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8:5)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4:40)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하심이라”(신6:24)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성격이 이 세상의 원리와는 다른 새로운 원리 위에 있음을 다음의 말로써 단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나님 나라의 공의를 드러냄
이 말씀은 오늘 읽은 대로 율법에 3번 등장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아이 밴 여인을 유산(개역성경은 낙태로 번역되어 있으나 실수로 유산된 경우를 의미한다)시킨 경우에 대하여, 레위기에서는 신성모독죄를 범한 경우에 대하여, 신명기에서는 민사재판에서 위증하는 경우에 대하여 각각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경우에 대하여 구원받은 공동체에게 주신 원리에 따라 보복의 원리를 적용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두려운 경고였습니다. 그들은 죄인을 징벌하시고,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을 느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두려운 공의를 느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는 거저 주시는 은혜의 나라이지만, 동시에 죄를 결코 용납지 않는 공의의 나라임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은혜로 구원해주셨다고 해서 죄를 용납하시고 모른 척 해버리는 하나님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과 재판장에게 재판을 받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앞에 그들이 서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논쟁하는 양방이 가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시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신19:17)
이것은 이 세상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죄인들도 어느 정도는 그 죄를 감추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의인으로 가장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교묘하게 징벌을 피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는 결코 죄를 용납하지도, 죄를 숨길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죄인을 심판하는 나라입니다. 죄를 들추어내는 나라입니다. 보복의 원리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죄를 용납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들추어내는 나라, 바로 그러한 공동체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세우신 교회는 바로 이러한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큰 이유 중 하나는 교회 안에서는 죄를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고백해야만 교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자들로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혹시 이 세상의 원리의 지배를 받고 앉아계신 분이 없으신지요? 죄 가운데 거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눈을 속이고, 하나님 앞에 번듯하게 앉아있는 사람은 없는지요? 죄인을 심판하시며, 죄를 들추어내시는 하나님,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하나님을 감히 속이며 앉아있는 사람은 없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들어 그 사람에게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하지 않고 죄를 감추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심판을 내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결코 자신의 죄를 숨기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권징을 통하여 죄를 정복·소멸함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이 스스로 그들 가운데서 죄인들을 징벌하여 악을 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가 그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19) 그리하면 그 남은 자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후부터는 이런 악을 너희 중에서 다시 행하지 아니하리라(20)”(신19:19-20)
즉, 하나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원리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죄를 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죄를 범할 때,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심을 어떻게 알게 됩니까? 그것은 교회가 바른 권징을 수행함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에서 “나아가”라는 말은 성경을 번역하면서 의역한 것입니다. 원어를 그대로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라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서 판결을 받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선 것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는 뜻입니다.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서는 것은 성도 간에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요, 구약 시대의 교회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사장과 재판장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약백성들을 다스리는 직분자들이었습니다. 재판장은 사사와 같은 단어입니다. 즉, 제사장과 재판장의 판결은 교회의 권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권징을 통하여 심판주 하나님의 사역을 대리하게 됩니다.
교회의 권징이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죄의 세력이 교회 속으로 파고 들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가지는 엄청난 특권이요, 이 세상은 결코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나라들은 법을 제정하여 어느 정도는 죄의 세력을 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정복하고, 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죄를 멸할 권세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교회가 천하만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선교의 거점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즉 죄의 권세를 멸할 더 큰 권세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어느 나라도, 어느 누구도 꺾지 못했던 죄의 권세를 꺾을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가진 최고의 영광, 최고의 특권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장로교의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이요, 하나님의 집이요, 권속이다. 이것을 떠나서는 구원의 정상적인 가능성은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25장 2절)
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과자와 다른 경품들로 세상 사람들을 현혹합니까? 교회가 가진 죄를 멸하는 권세, 이 놀라운 특권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그 자체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드러냅니다.
만일 우리들이 교회(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는 악을 제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는 모습을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상실한채 이 세상도 줄 수 있는 것을 그들에게 줄 뿐 죄에서의 해방을 안겨줄 수는 없습니니다. 우리들이 죄를 멀리하고, 우리들 가운데 있는 악을 제거하고,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일 때, 우리들에게는 죄를 멸하는 능력이 되살아나고, 그래서 이 나라에 들어오지 않으면 결단코 죄 가운데서 벗어날 수 없음을 드러내게 되고, 그래서 죄 가운데 있는 천하 만민을 구원할 힘을 갖게 됩니다(벧전3:15). 여러분은 무엇을 그들에게 보여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9)”(갈1:8-9)
오늘날 교회에서 권징이 강해지면 교인들이 떨어져나간다는 말들이 나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악을 제거하는 권징을 갖지 않을 때, 죄에 대하여 강하게 대처하지 않을 때, 교인들이 떨어져나가기에 앞서 죄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떨어져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에게 주신 이 영광, 이 특권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 교회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이 분명한 권징, 죄에 대한 단호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분명히 드러내어야 합니다. 교회가 심판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분명한 권징을 행하여 우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할 때, 이 땅에서 매는 것이 하늘에서 매이게 되며, 이 땅에서 푸는 것이 하늘에서 풀리게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교회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죄에서 떠나는 한 사람을 받아들일 때, 하늘에도 그 사람을 소속시키게 되며, 교회가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끊어버릴 때, 하늘에서도 그 사람을 끊어버리는 참다운 대리자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마18:15-20).
중보자 그리스도를 대망함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이 원리를 지니고 살아갈 때, 과연 어느 누가 이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견딜 수 있겠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죄의 삯은 사망인데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하는 이 원리 앞에서 어느 누가 죽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그들에게 제사제도를 마련해놓으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범죄할 때마다 이 제사제도를 통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대신하여 양과 소, 염소 등의 생명을 취하여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들은 이 제사제도를 통하여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대신하여 생명으로 갚아주실 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이루지 못한 죄의 정복을 대신 이루어주실 분을 기다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마련해놓으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이 공의의 원리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는 죄악을 찾던 우리의 눈, 악을 행하는 우리의 손, 사단을 좇던 우리의 발, 심지어는 사망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의 생명을 대신하여 자신의 몸과 영혼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아울러 죄를 미워하시며, 죄에 대하여 그토록 단호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기억해야 합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이 공의를 지키시기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어 죽이시기까지 하셨던 하나님, 이토록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의 결과가 이토록 비참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자는 결코 함부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죄를 멀리하고, 죄와 싸우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죄의 비참함을 알고, 죄를 멀리하여 죄를 정복하는 뚜렷한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이를 통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게 되고,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결코 죄에서 해방할 수 없음을 알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이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듭니다. 죄를 지니고는 살아갈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인인 우리들이 값없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 아무도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시다.
2. 여호와께서는 보복의 원리를 통하여 사랑의 나라를 이루신다.
공포의 사회가 아닌 사랑의 공동체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만일 교회가 하나님의 공의를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면 그 결과로 너무나도 삭막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정죄하게 되어 미움이 싹트고, 자신에게 해를 끼친 자에게 가차없이 보복을 하는 공포의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이 원리를 이스라엘에게 주신 또 하나의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보복의 원리가 기록된 세 성경구절을 유심히 살펴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모든 경우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 중에 세우신 재판관을 통하여 시행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도를 제정하심으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결코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으로 타인에게 보복을 하지 못하도록 해놓으셨습니다. 즉, 공적으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되 개인적으로는 결코 이웃을 미워하지 못하도록 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이 세상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개인적인 보복이 쉽게 정당화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해를 끼칠 때,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원망한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는 공적인 권징은 있으나, 개인적인 보복과 미움은 금지됩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17)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18)”(레19:17-18; 마18:15-20참고)
이스라엘은 그들 중에 있는 악을 징벌하면서도 그러한 죄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지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러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삭막한 공포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미워하는 마음과 복수하는 마음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성품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오늘 이 가운데 미움과 복수의 마음을 품은채로 앉아계신 분은 없습니까? 예수님은 친히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오셨고(마9:10-11; 11:9; 막2:15-16; 눅5:30; 7:34; 15:1-2), 그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지만, 결코 미워하시지 않으시고 온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원리 가운데 스며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셨습니까?
평균케 하는 원리로 주어지는 약자보호법
우리가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 약한 자들을 보호하시기 위하여 이 법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보복의 원리가 출애굽기에서는 이웃간의 싸움에 아이를 유산당한 여인, 레위기에서는 이스라엘과 애굽인의 혼혈아, 신명기에서는 타인에게 모함당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이 보복의 원리는 약자보호법으로 제정되었습니다. 힘 없고, 돈 없고, 능력 없고, 권력 없고, 빽 없는 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그 권리를 누리지 못하여 힘 있는 자에게 짓밟히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약한 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재판받을 권리를 갖게 하고, 재판하는 자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공평한 저울과 추를 가지고 판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원리를 세워놓으심으로 약한 자들도 공정한 재판청구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강한 자들이 함부로 약한 자를 괴롭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나 강한 자들에게나 이 원리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됨으로써 구원받은 공동체 속에서는 어떠한 특권층도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동일하게 다른 표현으로 선포하였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이것 역시 이 세상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보복의 원리는 언제나 강한 자, 특권층을 중심으로 설정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 위에 군림하기 위한 보복의 원리가 시행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는 대조적으로 가인의 후손, 즉 배교한 거짓 교회의 보복의 원리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창4:23-24에 나오는 “라멕의 노래”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2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24)”(창4:23-24)
이 노래를 쉽게 표현하자면 상대방이 나에게 약간의 해를 입히기만 해도 나는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아버리겠다는 말입니다. 눈을 눈으로 이를 이로 갚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피해를 생명으로 보복해버리겠다는 의지입니다. 바로 이것이 거짓 교회가 필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보복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교회는 죄를 정복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오히려 세상의 원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따라서 교회와 세상의 구별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지배를 받게 되는 이 거짓 교회에서는 세상과 다를 바 없이 강한 자, 특권층이 약한 자를 지배하게 됩니다. 강한 자와 특권층의 행위는 정당화되고, 약한 자들은 언제나 설움과 압박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시 애굽에서 종노릇하며, 압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죄 가운데 있는 이 세상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새 공동체 속에서는 전혀 새로운 원리가 등장합니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상대방이 자신에게 해를 입힌 것보다 더 심한 해를 타인에게 가할 수 없습니다. 눈에는 오직 눈, 이에는 오직 이로만 갚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개인적인 보복은 금지되며, 공적인 재판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라는 이 원리는 약한 자, 억눌린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 그 엄청난 해방과 자유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세우신 이 보복의 원리는 세상과 거짓 교회의 잘못된 보복의 원리 하에서 신음하는 모든 억눌린 백성들로 하여금 삼위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리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결단코 특권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을 자신이 특권을 누리는데 사용하려 합니다. 목사, 장로, 집사의 직분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약한 자들을 보호하며, 섬기도록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이 귀한 직분을 자신의 면죄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1517년 루터가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는 서곡을 울렸을 때, 우리는 바로 이러한 거짓 교회로부터 해방되는 큰 기쁨의 찬가를 함께 합창하였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강한 자, 권력있는 자, 돈 있는 자가 큰 소리를 치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전혀 다른 원리로 큰 자와 작은 자가 정해집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20:16)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9:48)
오직 겸손과 이웃 사랑의 원리로만 지킬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원래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세와 특권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이 땅에 내려와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하늘의 모든 특권을 친히 포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섬기는 몸된 교회는 바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낮아지신 그리스도의 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이 법은 강한 자와 높은 자들조차도 그들 자신을 낮추어 약한 자와 낮은 자들과 같아지는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결코 지켜질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법은 조건 없는 이웃 사랑, 내 몸과 같이 여기는 이웃 사랑이 없이는 결단코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결코 저 사람보다 나은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한 존재라는 인식,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 모두는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이 없이는 결코 이 법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정신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39)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마5:38-39, 44)
<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생명은 생명으로”
결국 구원받은 하나님의 교회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 보복의 원리는 공의로우신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며 우리의 죄를 소멸하는 거룩함과 아울러 약한 자를 보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느끼는 참된 이웃 사랑을 갖게 하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생명으로 갚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힘입어 죄와 싸우며, 약한 자들을 보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는 죄를 정복하는 힘을 교회에게 주시며, 천하 만민이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14)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갈5:14-15)
첫댓글 올려주신 원고는 내일 다시 정독하겠습니다. 이렇게 댓글을 자꾸(?) 다는것이 유익한것인지는 모르겠지만,저는 장동관님의 주장이 단절에만 근거하여 연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단절에만 근거하여 율법의 연속성,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것이라면..제사가 폐지되었으니,예배드릴 필
요 없다,십일조 폐지되었으니 연보도 필요없다,안식일 지킬필요 없으니 일주일 내내 일만하자든가,돈만 벌자든가..주일공예배를 없애자든가..그 정도는 되어야 무율법,율법폐기론자라고 할수있지 않을까요?^^
서로 강조점이 다르기때문인지..충분히 의사소통이 될만한데 안되야만 하는것같은 분위기에..안타깝게 느껴져서 야밤에 몇말씀 드립니다.
꼬리말 감사합니다. 저 역시 주안에 님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보다는 바로미님이 장동관님과의 차이를 좀 설명해주시면 더 좋겠네요. 그분과 계속 토론을 했던 당사자로서 말입니다.
주안에님 말씀을 흘려 듣지 말아야할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지체들이 올려주신 근본적인 내용이 잘 함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의사소통이 될만한데 안되는 이유가 뭘까요 저도 그걸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교회안에 많은 지체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 저는 주안에 님의 관점에 반대편에 서있는
것 같습니다. 진주도 꿰어야 목걸이가 되는데 진주 하나 하나를 목걸이라 하지 않듯이.... 내용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아니라 이해의 관점에서...
장동관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인간의 언어로 된 율법)만을 성경이 말하는 율법으로 한정지어 규정하여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장에 반박하는 저희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과의 인간의 올바른 관계를 위한 율법의 진정한 의미(정신)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동관님은 당연히 예수님 이후 모든 율법은 폐지 되어야 하며 현대 교회에서 옛 이스라엘이 지키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반박하는 저희들은 율법의 진정한 정신과 기원.. 기원의 이유에 대해 말하면서 율법의 성취가 어떻게 지금의 우리에게 적용되어지
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 -; 주안에님... 서로 강조점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근본적 문제가 심각합니다. 성경에서 율법의 근본 존재 이유에 대해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해, 또한 율법의 적용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생겨난 문제입니다.
현재 장동관님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율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율법 폐지에 대해 저렇게 주장하겠습니까?
또한 십일조에 대한 것 역시 주님을 왕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 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십일조 폐지를 외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단지 이것도 율법이라는 미명하에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는 것이건 율법의 정신이 하나님 사랑이건 뭐건 상관없고 단지 "율법"이
이기에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속한 것이기에 현대 교회가 이 율법을 지킬 이유 없다고 폐지하자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것은 율법의 기원과 존재 이유, 그 기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에 불과합니다.
즉 제가 처음에 말한 /장동관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인간의 언어로 된 율법)만을 성경이 말하는 율법으로 한정지어 규정하여 자신의 주장/을 하기에 그러한 주장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미님,설명하여주셔서 감사합니다..장동관님이 쓰시는 율법이란 말이 의문의 증서에만 국한되어있다면,폐지라는 말을 쓸수밖에 없는것 아닐까요? 어떤 하루가 신성했던 안식일이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고 의문의 안식일을 지킬필요가 없다면 폐지라는 말 말고 달리 뭐라고 할수있을까요?
문제가 되고 싸움이 될때는 용어사용이 일치할경우입니다. 만약 장동관님이 바로미님이나,다른 분들처럼 율법이란 말에 율법의 정신까지 포함해서 말을 하고있다면,율법폐지라는 그의 말은 이단사설로 성립되겠지요. 그러나,그의 용어사용이 어떤것인줄 아시면서 용어사용의 한계,또는 차이때문에 마음의 할례를 부정하는
자리까지 정죄하셔도 되는건가요? 저도 율법이란 말이 어떤 선입견을 줄수있는 용어로 국한되거나 잘못이해되어질수있다는것을 압니다..제 자신이 의문의 증서,옳고 그름의 요구로만 알다가 하나님 사랑,이웃사랑..[사랑]이라는 말이 의문의 증서,레위기에 들어있다는것을 안지가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율법
자체이기도 하다는것을요. 장동관님과의 토론,또는 논쟁보다는..율법의 폐지라는 말이 오해를 낳을수도 있음을 설명하여주시고,용어사용의 일치를 보시는것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주안에님 저는 장동관님에게 율법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고 말했지.. 이단이라고 한적이 없는데요? - -? 그리고 마음의 할례를 부정하는 것에 대한 저의 말도 확대 해석을 하셨군요. 나중에는 마음의 할례까지 부정하게 되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저는 말했는데요?
/율법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마음의 할례도 반대하는 입장에 놓여지지요. 2005/08/18 /--> 저의 이 말이 "마음의 할례를 부정하는 자리까지 정죄" 하는 것으로 읽으셨습니까? - -? 입장에 놓여진다는 말이 정죄로 들리다뇨? 문장상으로도 그런말이 아닌데요..?
서로가 다르지 않은 부분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고 어디에서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십일조가 어떠한 뜻이라는 것을 분명히 장동관님에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동관님은 십일조를 계속 구약시대의 소득의 십분의 일.. 로만 고집스럽게 주장을 하십니다. 저로서 더이상 어찌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안식일 문제 역시 안식후 첫날이 일요일이 아니라고 계속적으로 주장하십니
다. 그래서 각 나라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어떠한 시간대에 지키냐는 질문으로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알아보면 안식후 첫날 문제에 대해 해결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오해와 이해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안에님.. 인터넷 상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인터넷의 한계에 공감합니다. 평안하십시요..^^
바로미님과 주안에님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