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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주의 시대의 절대군주
절대주의 시대의 등장
절대주의의 특징
절대군주의 경우
영국 - 엘리자베스 1세
프랑스 - 루이 14세
독일 - 프리드리히 대왕
에스파냐 - 펠리페 2세
러시아 - 표트르 대제
절대주의의 문제점
절대주의 시대의 등장
17, 18세기의 유럽대륙은 성직자, 귀족, 부르주아로 구성되는 신분의회의 힘이 약해지고 대신 국왕의 권력이 강화되는 특징을 나타낸다. 곧 신분국가의 쇠락과 절대주의 국가의 등장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국왕의 권력이 귀족과 부르주아를 압도하는 절대주의 국가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국왕은 화려한 궁정에서 생활하고 통치한다. 궁정과 그 생활의 사치와 화려함과 장엄함을 공공연히 내보임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고양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궁정생활에 봉건귀족들을 편입시켜 그들의 손실을 보상해주고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든다. 하급관리들은 지역적 기반을 갖지 않고 오직 국왕의 의지의 수단이었고 군주에게만 충성했으며 군주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았다. 상비군 장교, 공공사업 감독관, 지방 지사들인 이들 하급관리들은 부르주아나 소수의 귀족 출신이거나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법률가들이 많았다. 이들은 전통적인 봉건적, 지역적 특권을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독자적인 주권을 지닌 국가들은 프랑스의 정부형태인 절대주의를 받아들였다. 유럽의 제후들과 제왕들은 절대군주가 되었다. 당시 중부유럽에서도 독립한 소수국가들이 발생했는데 나중에 프로이센, 작센, 헤센, 뷔르템베르크, 바이에른 등과 같은 독일의 주가 이들로부터 생겨났다. 오늘날에도 독일에서 이러한 주들은 여전히 자기들 고유의 의회와 정부, 문화적 생활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전통은 절대주의 시대와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제후들은 그들의 거주지역을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제후들은 '개화된 절대주의'의 대표자들로서 일정한 범위 내에서 학문과 비판적 사고를 발전시켰다. 중상주의 경제정책은 절대적으로 통치되는 국가들을 경제적으로 강화시켰다. 그래서 바이에른, 브란덴부르크 (후일의 프로이센), 작센, 하노버와 같은 영방 들은 독자적인 세력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30년 전쟁 이후 독일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은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와 호엔쫄레른가의 프로이센으로 압축된다. 30년 전쟁중에 독일제후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즉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로부터 많이 이탈하였으나, 오스트리아는 독일내에서 여전히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1683년 터어키의 침략을 막아내고 헝가리와 터어키의 발칸지역을 획득하여 거대세력임을 과시했다. 한편 프로이센은 17세기 중엽부터 그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어 18세기에는 오스트리아에 맞서 18세기에 최상의 군사력을 지닌 경쟁국으로 부상했다. 황제 선출권이 있는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군주(1640-1688)의 통치하에서 프로이센은 북부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발전하였으며 프리드리히 1세(1688-1713) 때에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와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3국 동맹에 맞서 나라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 부상하였다. 그 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713- 1740)는 교육, 무역, 제조업, 농업 등을 혁신하고 특히 국가의 번영과 확장은 군사력에 달려있다고 확신하고 상비군 양성에 힘썼다. 그를 이어 왕이 된 프리드리히 대제(1740-1786)가 1763년 오스트리아를 물리침으로써 제국은 합스부르크와 프로이센의 양대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프로이센은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서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같은 서열에 오르게 된다.
절대주의는 상비군의 편성과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를 형성함으로써 그들의 지역을 국가영역으로 만들고 현대적인 국가를 준비해갔다. 그러나 아직은 현대적 국가를 완성할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들의 보호 하에 시민층이 강화되어 시민층의 자의식이 강해진 반면 군주들은 권력을 악용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등 이 제도의 결함이 두드러졌다. 국가를 창설하는 것은 신의 의지나 절대군주의 의지가 아니라 주권을 가진 국민의 의지라는 사상이 확대되어감으로써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이 일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789년 대혁명으로 절대주의가 붕괴되었다. 귀족과 성직자들이 그들의 특권을 상실하였고 자유와 평등에 기반을 둔 새로운 국가와 사회 체제가 형성되었다.
절대주의의 특징 세 가지
① 왕권신수설 : 절대주의를 뒷받침 해 준 사상으로 왕권은 신이 부여한 신성한 것이므로 국민은 이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② 관료제와 상비군 제도 : 절대 군주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행정 업무를 담당하고 관료들을 임명하고, 언제나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인 상비군을 설치하였다.
③ 상공 시민층과 제휴 : 상공 시민층의 상공업 활동을 보호해 주고 그들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다.
절대군주의 경우
17세기 후반 18세기 - 절대주의 시대
○ 영국 - 엘리자베스 1세, 동인도 회사 설립, 식민지 개척
○ 프랑스 - 루이 14세
○ 에스파냐 - 펠리페 2세, 무적 함대, 해상권 장악, 식민지 장악
○ 프로이센 - 프리드리히 대왕, 스레지엔 차지
○ 러시아 - 표트르 대제, 서유럽 제도 수용, 북방 전쟁 승리, 폴란드 분할
◈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 라는 유명한 말은 한 엘리자베스 1세
영국의 절대주의는 헨리 8세 때 종교 개혁을 단행하면서 틀이 잡히기 시작하여 엘리자베스 1세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16세기 초반 영국은 누가 봐도 파산 직전에 놓인 유럽의 후진국이었다. 종교분쟁으로 인한 심각한 내분,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프랑스의 위협, 화폐가치 급락, 급격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16세기 영국은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 모든 위기를 딛고 '해가 지지 않는' 세계 최고의 대국을 건설했다. 무엇이 이 같은 역사적 반전을 가능하게 했을까. 후세 사가들은 가장 큰 원인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절대군주로서의 역량으로 볼 수 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똑똑하고 유식했다. 정치나 인문, 종교 등 어느 분야를 놓고 토론을 해도 신하들의 논리를 이길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침착했다. 언니인 메리1세에 의해 런던 탑에 갇히는 신세가 됐을 때도 21살의 그녀는 태연했다. 또한 그녀는 런던 탑으로 향하는 마차 휘장을 올려 자신의 존재를 국민에게 알릴 정도로 담대했다. 그녀는 탁월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처단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던 메리 1세에게 스코트랜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녀는 스코틀랜드 편을 들지 않았다. 언제 체제 내에서 활동을 해야 하고 언제 체제를 부정해야 하는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밖으로는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를 격퇴하고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했으며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인도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치세 중 영국은 한 섬나라에서 대해상국으로 성장할 기초가 이루어졌고 ꡐ명랑한 잉글랜드ꡑ가 이루어졌으며, 문화면에서도 영국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셰익스피어 ․스펜서 ․베이컨 등의 학자 ․문인이 속출하였다. 이리하여 여왕은 ꡐ선녀여왕ꡑ으로서 온갖 영광의 상징이 되었고, 영국의 절대주의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590년 이후부터는 퇴색되어 ꡐ반독점 논쟁ꡑ에서는 하원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녀는 처녀여왕으로서 노쇠하여 죽었고, 처형된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제임스 1세가 후계자로 즉위하였다
◈ ‘짐은 곧 국가다.’의 루이 14세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자신을 태양에 비유한 루이14세 때 크게 번성하여 유럽의 최강국이 되었다. 루이14세(1643~1715)는 콜베르를 등용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펴서 국재 산업을 육성하고 해외 진출을 장려했다. 강한 군대를 양성하여 프랑스를 유럽 최강국으로 만들었고, 파리 근교에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여 화려한 궁정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말년에 루이 14세는 많은 전쟁을 일으켜 국력을 소모하였고, 낭트 칙령을 폐지하여 상공업자와 기술자가 많았던 위그노들이 박해를 피해 해외로 망명함으로써 프랑스 산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루이 14세가 사망할 무렵에는 재정이 궁핍해지고 프랑스의 패권도 기울어졌다.
◈ 군주는 국가 제일의 심부름꾼이다
독일의 사정은 중세이래 신성 로마 제국이라고 불린 독일은 제후들이 다스리는 300여개의 영방 국가로 분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국왕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했으나 그 세력은 오스트리아와 주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 후 프로이센의 성립은17세기 베를린 지방에서 일어나, 유럽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 신성 로마 황제(1215-1250)이며, 하인리히 6세의 아들로 시칠리아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사후 4세에 시칠리아 왕이 되었으며, 1212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하여 오토 4세의 대립 국왕으로 추대되어 독일로 가서, 프랑스 왕의 원조를 얻어 오토를 물리치고 즉위하였다. 당시는 교황권의 전성기로서 황제는 종교상의 권리를 포기하고, 장자 하인리히를 독일 왕으로 앉히기 위해 성속 제후에게 특권을 부여, 영방 체제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1227년 십자군 원정을 중지한 까닭으로 교황 그레그리우스 9세에게 파문당하였으나, 이듬해 원정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고 그 왕이 되었다. 귀국 후에는 자기 영토에 침입한 교황군과 싸웠고, 독일로 가서는 교황의 사주를 받아 배반한 하인리히를 체포, 차남 콘라트(4세)를 왕위에 앉혔다. 후에 겔프 당의 롬바르디아 도시를 정벌하여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를 프랑스로 망명시켰으나, 리용의 종교 회의는 황제의 퇴위를 선언하고, 독일에 대립 국왕을 세움으로써 황제권이 실추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는 절대주의적 정치 기구를 정비하고 문예를 장려하여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이라고 호칭되었다. 오스트리아와 두차례 싸워 슐레지엔 지방을 획득하고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국가제일의 심부름 꾼이라 자처하며, 제도의 정비와 산업의 장려에 힘써 계몽 군주의 모범이 되었으나 전체 정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 펠리페 2세와 무적 함대
에스파냐 국왕(1556-1598)으로 신성 로마 황제인 카알 5세의 아들이다. 포르투갈의 마리아, 영국 여왕 메리 튜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딸 발르와의 엘리자베트,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딸 안나와 모두 합하여 네 차례의 결혼을 함으로써 당시의 유럽을 주름잡았다. 젊어서부터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를 지배하였기 때문에 1556년 왕위에 즉위했을 때는 신세계에 걸치는 광대한 영토을 지배하게 되었다. 실로, 태양이 지는 일이 없는 영토였다. 1557년 프랑스 군을 격파, 프랑스의 종교 전쟁에 개입했으며, 1569년에는 투르크 군을 레판토의 해전에서 격파했다. 1581년에는 포르투갈을 병합했으나 1588년 아르마다 싸움에서 영국 함대에게 패하여 그의 빛나는 전성기는 막을 내렸다. 그의 시대를 정점으로 에스파냐의 절대주의는 소위 신대륙 무역에 의한 거부의 축적과 메스타를 기축으로 하는 국내 모직물 공업의 번영에 그 국가 번영의 기초를 두었지만, 한편 속령 네덜란드에 대한 종교적 간섭과 국내의 중소 생산자인 무어인에 대한 종교적 박해 때문에 스스로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켰다. 그는 전형적인 르네상스적 군주여서 예술의 보호에도 힘썼다. 물론 그의 무적함대는 식민지 개척으로 도래로 각국의 식민지 개척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그들은 막대한 자금과 자원을 얻을 수 있었고 동인도 회사 설립에도 박차를 가한다.
◈ 러시아의 팽창 정책
러시아의 절대주의 시대는 15세기 말 몽고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 표트르 대제
러시아 황제(1682-1725)로 알렉세이 황제와 제2의 황후 나탈리아의 아들이다. 즉위 후 배 다른 누이 소피야가 실권을 쥐고 있었으나, 1689년 그녀의 음모를 꺾고 정권을 되찾았다. 군사에 전념하였으며 1697년에는 사절단과 함께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지를 순회하면서, 조선술, 포술을 배우는 한편, 각국의 풍속, 제도를 연구하고 귀국한 후, 귀족에게 서 유럽식의 풍속 관습을 강요, 율리우스력을 채용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1700년 발트해 진출을 기도하여 북방 전쟁을 벌였고, 1711년 투르크와의 싸움에 패하였다. 그러나 1721년 뉘스타트 조약에서 발트 해 연안을 획득하여 숙원을 풀었다. 1722-1723년 페르시아에 원정하여 카스피해 서안을 병합하였다. 이러한 전쟁은 농민에게 군사, 운수 등 계속적으로 무거운 부담을 지워, 초기에는 농민의 반란을 야기하였으므로, 그는 내외의 곤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강력한 행정 조직의 확립을 목표로 절대주의 국가를 확립하였으며 교육 문화에도 힘을 기울여 러시아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 왕권 강화와 유럽 문물 수용 : 귀족과 교회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서유럽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여 러시아의 근대화에 힘썼다.
○ 영토 확장 : 20년간 계속된 북방 전쟁에서 스웨덴을 격파하여 발트해로 진출 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시베리아를 경영하여 청과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정하였다.
절대주의의 문제점
절대군주제를 옹호하는 가장 단순한 논리는 ' 왕권신수설', 즉 왕은 자신의 권위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사고는 심지어 폭군적인 통치조차도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 지배자가 행하는 신성한 처벌로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왕권신수설의 기원은 중세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신은 로마 가톨릭 교황에게는 정신적 권력을 부여했고 한편 정치적 통치자에게는 세속의 권력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민족국가의 군주들은 모든 사안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웠으며 국가뿐만 아니라 교회의 수장이 되려고 했다. 군주의 권력은 절대적이었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중세 군주에게는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왜냐하면 중세의 군주는 권력의 또 다른 중심이었던 교회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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