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순흥죽산안씨 원문보기 글쓴이: 안주혁
[순흥안씨 22개 파(派) 안내]
Please send comment on the site to ; kkgi@chollian.net |
죽산군파(신죽산 안씨) 의 내력 |
◈ 탐진군파 ◈ (탐진안씨) |
|
◈ 관향의 연혁 ◈ 耽津(탐진) | |
|
우리 순흥안씨가 李朝時代에는 六大姓(李,金,崔,安,鄭,朴)으로 불리어 왔는데 이는 數가 많아서가 아니라 安珦(文成公), 安文凱(文懿公) ,안축(文貞公),安輔(文敬公) 安于器(文純公) 安牧(文淑公) 선조와 같은 훌륭하고 기라성 같은 선조님들이 계셔서 顯閥의 巨姓의 가문으로 부각되었고,특히 우리 안씨는 고려조나 이조조 뿐만 아니라,韓末에도 安昌浩(島山),安重根의사 같은 분을 배출함으로써 더욱 자랑그럽고 빛나는 가문이 되었다.
4世인 安珦(文成公)은 고려조 元宗代의 인물로 1260年문과에 급제,交書郞을 거쳐1270年감찰어사가 되었다. 그는 1288년 元나라에 들어가 朱子學을 연구하였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朱子學者로 지칭된다.
文成公 晦軒先祖 安子廟가 京畿道 儀旺市 月岩洞 425번지에 설립되어 있으며 매년 陰 9月12日에 安子廟 廟廷에서 전국의 후손들이 참여한 가운데 忌辰祭를 奉行한다
順興安氏는 子美 始祖公께서 세 아들을 두셔서 參派로 나위어젔다.첫째 아드님은 樞密院副使를 지내신 永儒이신데 제一派의 파조이시고, 둘째 아드님은 神騎別將을 지내신 永麟이신데 제 二派의 파조이시며, 셋째아드님은 交書郞을 지내신 永和이신데 제三派의 파조이시다.
第一派는 다시 判官公派등 14개 派로 갈리었는데, 나는 一派의 參判公派 9世 從信公 派祖의 21대 孫이며,직계 선조는 다음과 같다.
세(世) |
시호(諡號) |
휘(諱) |
出生年度 |
배위(配位) |
墓 所 位 置 |
坐向 |
時享 |
摘 要 |
始祖 |
上護軍公 |
子美 |
1170 |
|
경북,영주,순흥,읍내.飛鳳山下 |
設壇 |
10,1 |
追遠壇 |
2세 |
樞密公 |
永儒 |
1201 |
|
경북,영주,부석,감곡,知藏山下 |
辛坐 |
10,1 |
永慕菴,一派 派祖 |
3세 |
太師公 |
孚 |
1220 |
剛州禹氏 |
경북,영주,순흥,읍내,飛鳳山下 |
設壇 |
10,1 |
追遠壇 |
4세 |
文成公 |
珦 |
1243 |
漢南金氏 |
경기,장단,진서,늘목,구정동(口井) |
子坐 |
10,4 |
儒像-전국서원에 비치 |
5세 |
文順公 |
于器 |
1264 |
鐵原崔氏 |
" |
子坐 |
" |
현재는 이북지역 |
6세 |
文淑公 |
牧 |
1290 |
化平金氏 |
" |
子坐 |
" |
|
7세 |
文惠公 |
元崇 |
1311 |
原州元氏 |
" |
子坐 |
" |
|
8세 |
景質公 |
瑗 |
1332 |
英陽南氏 |
" |
酉座 |
" |
|
9세 |
參判公 |
從信 |
1353 |
高麗王氏 |
경기,남양주,진건,배양2리,어은동 |
亥坐 |
10,3 |
參判公派 派祖 |
10세 |
敦寧公 |
進 |
1372 |
平壤趙氏 |
" |
亥左 |
" |
|
11세 |
將士郞公 |
犧 |
1432 |
淸州宋氏 |
경기,남양,건천,오룡동,용정2리 |
乾座 |
10,4 |
|
12세 |
司憲府公 |
繼宋 |
1452 |
完山李氏 |
" |
乾座 |
" |
|
13세 |
通禮公 |
光胤 |
1483 |
龍仁李氏 |
충남,청양,화성,기덕리 |
坤座 |
10,6 |
後配寶城吳氏,三合葬 |
14세 |
|
景仁 |
1506 |
竹山朴氏 |
" |
設壇 |
" |
|
15세 |
|
昌道 |
1527 |
文化柳氏 |
전남,나주,봉황,철천,거성동 |
設壇 |
1010 |
|
16세 |
|
世琛 |
1569 |
草溪鄭氏 |
" |
辛座 |
10,10 |
|
17세 |
|
夢男 |
1590 |
|
충북,충주,용탄,작은용골 |
午座 |
10,10 |
배위는 巳座, 永慕齊 |
18세 |
|
應守 |
1615 |
羅州丁氏 |
|
巳座 |
" |
|
19세 |
|
愛琦 |
1657 |
密陽朴끼1 |
충북,충주,용탄,사근현 |
艮座 |
" |
|
20세 |
|
逸復 |
1681 |
南陽洪氏 |
" 작은용골 |
乾座 |
" |
2004,3납골묘원에 |
21세 |
|
尙光 |
1701 |
延日鄭氏 |
" 큰용골 |
午座 |
" |
" |
22세 |
|
厚宗 |
1730 |
達城徐氏 |
" 호암등 |
甲座 |
" |
" |
23세 |
|
得烈 |
1747 |
平山申氏 |
" 장재골 |
甲座 |
" |
" |
24세 |
|
達中 |
1774 |
金海金氏 |
" 종민동 호곡 |
午座 |
" |
雨商,元商",有商,敬商.道商(5) |
25세 |
|
元商 |
1882 |
平澤林氏 |
" 용탄, 호암등 |
丑座 |
" |
" |
26세 |
|
明濬 |
1814 |
金海金氏 |
충북,제천,한수,덕곡 |
丑座 |
|
보식,만식 " (형제) |
27세 |
|
寶植 |
1877 |
旌善全氏 |
충북,충주,살미,공이동,향화 |
亥座 |
|
|
28세 |
|
德熙 |
1911 |
慶州陳氏 |
" |
乾座 |
|
태수,재영,재후,재경,(4형제) |
29세 |
|
泰洙 |
1934 |
達城徐씨 |
|
|
|
|
30세 |
|
元鏞 |
1961 |
慶州金氏 |
|
|
|
|
31세 |
|
準炯 |
1989 |
|
|
|
|
|
|
|
|
|
|
|
|
|
|
◈ 晦軒 文成公 諱 珦(初諱:裕) ◈ 회헌 문성공 휘 향(처음의 이름:유) | |||||||||||||||||||||
◈ 1243년 (고려 고종30년), 경북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탄생하셨다.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 휘 자미(始祖 諱 子美)의 증손(四世)이다. 고려의 명신(名 宰相)이요, 학자이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公의 아버지는 중의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 諱 부(孚)이며, 수태사 문하시중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강주우씨(剛州禹氏)이며, 예빈시동정 우성윤의 딸이다. ◈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동방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성현의 칭호인 子(자)라 불리는 분은 오직 회헌(문성공) 선조 한 분 밖에 없다. ◈ 1306년 9월 12일(고려 충렬왕, 병오년 갑신일)에 별세하니 향년 64세이었다. 조정에서는 시호(諡)를 문성(文成)이라 하고, 장지(葬地)를 장단의 대덕산에 내렸다. ◈ 조선 문종의 어휘(御諱)와 같은 이름(珦)이라서 유(裕)로 바꿔 부르다가 나중에 [향]으로 환원했다. ◈ 충숙왕 무오년(1318년), 문묘에 초상화를 봉안했다.(영정 : 국보제 111호) 충숙왕 기미년(1319년), 문묘에 종사(從祀)되었다.
|
|
안자묘라 함은 순흥안씨의 명조이신 회헌 문성공 휘 향 선조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를 말한다 (부조묘, 또는 불천지위(不遷 之位)라고 한다). 중국의 성현들인 공자, 주자와 같은 子字 즉 성현들에게만 주어지는 [安子]가 되셨기에 문성공이라고도 하고 [안자]라고도 한다..
안자묘의 현판 은 우리 문중이나 우리나라의 유명한 서예가가 쓴 것이 아니라 중국 山東省 衍聖府에서 공자의 후손인 공덕성 선생께서 친필로써서 보내온 것이다. (아래 찬문과 함께) | |
송천리 진산 해방전까지도 전국의 자손과 유림이 한자리에 모여서 음력 9월12일에 기신제를 경건히 봉했으나 지금은 그 현황을 알지 못함 |
|
왼쪽편의 사진은 경기도 의왕시 (남북 통일이 되어야....) |
회헌(晦軒) 안향의 내력과 업적
|
안중근의사는 순흥안씨 제1파의 우리 참판공파로 시조로부터 30세이다.
(1) 안중근의사 생애
|
(2) 안중근의사 유묵
안중근 의사가 남긴 붓글씨(遺墨)는 대부분이 1910년 2월부터 돌아가시기 직전 인 3월 26일까지 쓰여졌으며, 모두 200여 점일 것으로 짐작된다. |
이 중 현재 발견된 것은 40여 점이며,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주변에서 친절하게 대해 준 관동도독부 법원 및 여순 감옥의 교도관등 일본인들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많은 붓글 씨를 써 준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안중근 의사가 남긴 붓글씨는 어려서부터 배운 한학을 밑바탕으로 하여 선현들 로부터 듣고 배운 문장들을 독창적으로 인용하여 간단 한 글 귀로 사람들을 감 동시키는 뛰어난 문장들을 담고 있다. 모두 낙관 대신 1909년 1월에 동지 11 명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고 손가락을 자른 왼쪽 손도장이 찍혀있다. |
안중근 의사가 남긴 붓글씨는 서예적 가치도 뛰어나지만, 글에 담긴 의미와 교 훈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여기에서는 널리 알려져있는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 를 나명순, 조규석 등이 쓴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에서 인용하여 실었다. |
* 그림을 누르시면 해당 유묵의 큰 사진과 자세한 설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 |||||||
3.(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화:02)753-5033 3.26일:순국행사, 9.2일 탄신행사 10.26일 하월대 의거기념행사
|
|
조 부 |
조 모 |
할아버지는 비위 정선(旌善) 전갑석(全甲石)조모님과 결혼하여 한수면 덕곡리에서 사시다가 장녀와 장남을 데리고 1911년 가을에 덕곡리에서 충주시 살미면 공이동 유촌으로 이사를 하여 영농을 하시면서 차녀 복례(福禮)와 삼녀 천금(天今)을 낳으셨다
장녀 복순(福順)은 정선 전대경(全大慶)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두었고,차녀 복례는 전주 이해동(李海東)과 혼인하여 1남 3녀를 두었으며,3녀 천금은 김해 김양진(金良眞)과 혼인하여 3남 5녀를 두어 원근에서 사시고 있다.
장남 휘 덕희(德熙)는 농사일을 도우면서 밤에는 야학으로 한글을 터득하고, 낮에는 농사일을 열심히 하면서 돈이되는 물건을 등짐으로 저서 수안보장과 충주장에 내다 파는 것을 열심히 하여 가사를 맡아 하게 되면서 같은 마을의 딴집으로 이사를 하여 농사를 크게하며 일꾼을 두고 하게된다.
할아버지는 농사일만을 하시며, 전기와 가전제품의 혜택을 보지 못한 어려운 생활에서 고생만 하시다가 1959년 11월 4일에 타게하시고, 할머니는 학교에 다니는 손자들 밥해주느라 청주에 나오셔서 추운방에서 잠도 제대로 못 지무시고 찬물에 설거지를 하는등 고생을 많이 하시고 호강한번 해보지 못한채 1975년 7월 29일 89세를 1기로 타계하시니 20세기 후반기의 애석한 삶이었다. .
|
|
아버님 *휘(諱) 덕희(德熙) |
어머님 *본관 경주
|
아버님은 1911년 5월 21일 제천시 한수면 덕곡리에서 충생하여 집안 형편으로 부모님의 품에 안겨 당년 가을 살미면 공이동 유촌으로 오게 되시었다고 한다
이곳에 성장하면서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가며, 야학으로 한글을 터득하고 돈이 되는 물건을 장에 갓다가 파는 방법으로 집안 살림을 맡아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19세에 배필을 경주 진병출 어머님과 1932년 11월 25일에 결혼하여 부모를 도와 농사를 하는데 송아지를 길러 새끼를 낳으면 계속 길러서 소가 여러마리가 되어 이를 팔아서 하리에 있는 논 세마지기를 사서 1년 농사짓고 팔아 방구배기 밭 하루가리를 사고나니 밤에 비가 많이와 물이크게 나가게 되어 팔은 논은 하루저녁에 유실되므로 이때부터 재물이 일기시작 하여 소를 기르는데 해마다 송아지를 낳아주어서 소가 여러마리가 되고 감을 따서 홍시를 만들어 장에 갓다가 팔고,골연을 말아 여러지방을 다니면서 팔아 돈이 모이자 국수댕이 마람보든 논 밭 4000여평을 사게되고,겨울이면 소장사를 하여 돈이 모이게 되자 남박골 논 4마지기를 사게 되고,곶집거리 논 7마지기와 쫄밭등 밭 두필지등을 몇 년안에 사게 되었다고 하신다.
또한 어머님은 할머님과 함께 농사일을 도우면서 길삼을 하여 팔아 땅을 사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이렇게 마련한 땅이 1만여평이 넘자 일군을 둘식두고 광농을 하게되는데 담배와 누에농사등 경제작물의 재배에 역점을 두어 경제적 기반이 잡히게 된다.
이러는 동안 어느덧 자녀가 칠남매가 성장하게되어 어떻게든 교육을 시켜야 되겠다는 일념으로 큰아들부터 초등하교만 집에서 다니고 중학교 부터는 하숙을 시키면서 공부하게 하고 둘이 학교에 가게되니까 방을 얻어서 할머니가 밥을 해주시면서 공부하게 되고,큰아들이 취직이 되면서 동생들을 데려다가 초등하교부터 중고등학교 및 대학까지 가르키게 되어 아들 3형제를 대학을 졸업시키고 딸 3형제를 고등학교 졸업을 시켜 시집을 보내게 된다.
큰아들 태수는 충북대학을 나와 충북도청에서 공직생활을 하면서 동생들을 청주로 전학시켜 학교에 다니게 하는데 동생 재영이는 청주에서 초 중 고를 나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회사에 다녔고,둘째 동생 재후는 본인의 뜻에 따라 자영업을 하고 있으며,셋재 동생 재경이는 청주에서 초 중 고 와 충북대학교 약학대학을 나와 충주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다..
큰딸 연순(年順)은 김해(金海) 金炳烈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고,둘재 연동(蓮童)은 한양(漢陽) 趙炳俊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고,셋째 연분(蓮粉)은 평산(平山) 申炳植과 혼인하여 부군이 목사가되어 교회를 운영하고 있다.
장남은 달성(達城) 서을선(徐乙仙)과 혼인하여 1남 4녀를 두었고, 둘째는 임천(林川) 조상임(趙商妊)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고,셋째는 김해(金海) 김옥두(金玉斗)와 혼인하여 3남을 두었으며.넷째는 광주(光州)노인숙(盧仁淑)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하던 농사를 정리하고 1981년 가을에 충주시 성서동 막내아들집에 나오셔서 생활하셨으며, 부모님은 아들,딸,손자,손녀,외손자,손녀 모두 50명의 자손을 보고 아버님은 2000년 음 1월 12일 밤 10시에 운명하시니 90세를 일기로 타게하시다.
어머님은 요통과 관절이 있어 고생하시면서 집안살림에 신경을 쓰시고 지금도 아들 손자들 걱정하시면서 생활하신다.
5,순흥안씨 참판공파 행열도
五 行 |
木 |
火 |
土 |
金 |
水 |
木 |
火 |
土 |
金 |
水 |
世代別 |
26世 ○ 植 |
27世 炳 ○ |
28 世 ○ 珪 |
29世 啓 ○ |
30世 ○ 源 |
31世 榮 ○ |
32世 ○ 魯 |
33世 載 ○ |
34世 ○ 鎭 |
35世 濟 ○ |
世代別 |
36世 ○ 穆 |
37世 容 ○ |
38世 ○ 周 |
39世 鉉 ○ |
40世 ○ 淳 |
41世 東 ○ |
42世 ○ 烈 |
43世 基 ○ |
44世 ○ 錫 |
45世 漢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