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허 솔
1. 우리 나라의 시대별로 돈의 발달 과정은 어떠한지에 대해 조사하여 보자.
돈의 발생 과정과 발달
곡식, 옷감보다는 금, 은, 구리 등이 편리하고, 그것보다는 동전이, 동전보다는 지폐, 수표, 신용 카드가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돈의 발생 과정
자급 자족 생활 : 자기의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자기가 직접 구해서 쓰는 생활을 했으므로 돈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물물 교환 생활 : 자기가 쓰고 남은 물건을 다른 사람과 바꾸어 쓰게 되었습니다.
물물 교환의 어려움 : 서로 바꾸려는 물건의 종류가 맞지 않았고 물건의 값어치도 다르기 때문에 불편했습니다.
화폐의 발생 : 누구에게나 필요한 곡식, 옷감, 소금, 털가죽 등으로 다른 물건과 바꾸어 쓰게 되었습니다.
돈의 발달 과정
: 물품 화폐 ⇒ 금속 화폐 ⇒ 동전, 지폐, 수표, 어음, 신용 카드 등으로 발달되어 오고 있습니다.
돈이 발달해 온 까닭
바꾸려는 물건의 종류와 값어치가 맞지 않아 불편하였습니다.
물물 교환의 불편을 덜고, 교환을 쉽게 하기 위하여 돈이 생겨났습니다.
고려시대
고려 성종 15년(996)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원 중보 뒷면 동국 」(乾元重寶 背面 東國)은 우리나라 최 초의 주화로 알려지고 있다.
건원중보는 중국의 당 숙종2년(759)부터 주조된 엽전인 데 이를 모방하 여 만들고 보니 중구의 건원중보와 구별 이 어려원 상, 하부에 동국(東 國)자를 새겨 만들다가 뒷 면의 동국자를 앞면으로 내어 「동국중보 (東國重寶) 」를 만든 것이 우리나라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주화가 되었다.
이로부터 당송대에 이르기까지 동국통보(東國通寶), 삼 한 중보 (三韓重寶), 삼한통보(三韓通寶), 해동중보 (海 東重寶), 해동통보(海東通寶), 해동원보(海東元寶) 등 8 종이 주 조되었으며 읽는 방법이나 서체를 세분 하면 약 100여종에 이른다.
무문전
성종 15년 (996)에는 거란의 침입을 받아 사회가 불안 정했던 시기였지만 겨우 문문철전을 주조할 정도로 문 화 수준이 낮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무문 전은 성종 15년의 철전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것으 로 추정 할 수 있다. 고려 고분에서 출토된 무문철전과 무문동전은 유통 수단으로서 제조된것이 아니라 부작용 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
조선왕조에서는 「조선통보」, 「십전통보」, 「상평통보」를 발행 하였다.
「조선통보」는 세종 5년(1423)에 해서체로, 인조 11년 (1633)에 팔 분 서체로 각각 발행하였으며 「조선통보」는 효종 2년 (1655)에 발 행되었다.
조선시대의 화폐를 대표할 수 있는「상평통보」는 숙종4년(1678) 이 후 고종 25년(1888)까지 200여년동안 주전소(鑄錢所), 전가(錢價), 서체, 기호, 천자문순, 숫자순, 오행순등으로 나뉘어져 약 3000여 종 류가 발 행되므로서 우리나라에서 최장기간 통용된 화폐가 되었다.
조선통보
세종 5년 (1423) 조선시대 최초의 동전인 「조선통보」의 발행을 보게 되었다. 정부는 조선통보의 유통을 촉진하기 위하여 "조선통보 전용령"을 공포하는등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잘 유통되지 않았고 면직물류의 포화(布貨)가 지배적인 국폐로 유통되고 있었으며, 소액 거래에는 미두(米豆)가 사용되었다.
십전통보
효종2년(1651) 7월 우의정 한흥일의 건의에 따라 민간에서의 사주전 (私鑄錢)이 허락되었으며 동년 11월에 화폐유통을 적극 장려할 목적 으로 행정사목을 제정 실시 하였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백성들이 동 전 50 文씩 동전을 지니고 다닐 것을 의무화하였다.
이상의 사주전 허락은 50文씩 동전을 지니고 다녀야 되는 의무수행 에 따른 불편을 덜기 위하여 「십전통보」를 주조하였을 것으로 믿어 진다.
상평통보
숙종(1678~1720)대는 우리나라 화폐의 발전에 있어 획기적인 시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에 「상평통보」가 주조, 발행되어 우리나라 화폐사상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유통돠었다. 이처럼 상 평통보가 조선시대 말기까지 약 2세기에 걸쳐 계속적인 통용력을 가지고 화폐의 일반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사회 경제적 배경하에서 발행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17세기 중엽부터 점차 국내외 교환 경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여 유통부문에 일반적인 교환수단의 재개가 필요하게 되었다.
둘째 인조~효종 연간에 있어서의 인위적인 동전 통용시도와 개성 등지를 비롯한 일부지방에 있어서의 계속적인 화폐유통으로 화폐 의 기능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식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셋째 임진왜란 이후 국토가 황폐화하고 농민이 이탈하여 토지 재정 에 기반을 둔 국가재정이 궁핍해 졌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재정 지 출은 계속 가중되어 갔으므로 이의 보완책이 간절하게 요청되었다.
상평통보의 분류
상평통보는 당1전, 당2전, 당5전, 당100전으로 구분하여 소형과 대 형전으로 분류된다.
당일전
숙종4년(1648.4)「상평통보」의 발행이 개시되자 조정은 호조 상 평청을 비롯한 중앙관서와 각 지방관서에 명하여 상평통보를 주조 발행하게 했다. 이때 발행된 상평통보를 초주단자전이라고 한다.
당이전
숙종 5년(1679.9) 조정은 상평통보의 규격을 달리하여 당이전이라 고하는 대형전을 발행하였다. 당이전은 종래의 초주단자전과 구별 하기 위해 배면하부에 "二"자를 표시라여 발행하였다. 당시에는 초 주단자전과 신종당이전이 동시에 병행 유통되다가 그후로부터 초 주 단자전이 그 자취를 감추게 되어 당이전이 상평통보를 대표하게 되었다.
당오전
우리조정은 개항이래 막대한 개항경비, 외국사건에 대한 보상금 신 식군대의 설치비, 제행정경비등이 새로 부가되어 재정의 궁핍은 가 속도적으로 가중된데가 임오군란까지 발발하게 되어 조정의 재정 은 파탄일보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비상사태에 직면하자 조정은 재정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고종 20년(1883.7) 당오전을 주조 발행하게 되었다.
당백전
19세기중엽 고종 3년 (1866.11) 대원군 집권기에 이르러 중앙 집권 적 쳬제를 재확립함과 동시에 안으로는 왕조위신의 선양을 목적으 로 착수한 경복궁 중건비를 조달하여 궁핍한 국가재정을 보완하며, 밖으로는 선진자본주의 열강의침략을 막는데 필요한 군사비를 마 련하기 위하여 고종3년 (1866) 10월 당백전의 주조발행을 결정하게 되어 1867년 5월까지 6개월 동안 주조 사업이 이루어 졌으며 주조 총액은 1천 6백만냥이라는 거액에 달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당백 전을 대량으로 발행 유통시킴으로써 거액의 임시적 수익을 얻어 시 급한 재정 수요를 충당할 수 있었다고는 하나 점차 화폐가치의 하락 을 인한 물가의 폭등으로 국민은 경제생활에 있어서 심한 타격을 받 게 되었다. 그리하여 악화 당백전 발행을 계기로 조선왕조 말기에는 화폐제도의 혼란이 계속 악순환을 거듭하게 된다. 대원군은 호대 부 백(戶大富百)이라는 자호를 새긴 고액화폐 당백전을 주조하기 시작 하였으나 이듬해인 고종4년 (1867.5) 주조가 중지되었다.
상평통보의 분류
천자문순
천자문은 중국 남조 량(梁)의 주흥사(470~521)가 글 을 짖고 동조의 왕희지의 필적중에서 해당되는 글자 를 모아 만들었으며 사언고시 250구로 천지현황 (天 地玄黃)에서 언재호야(焉哉乎也)까지 1,000자 가 각 각 다른 글자로 되어있다. 상평통보의 당이전 중에는 천자문 순전이 있는데 각 주전소에 따라 분류되며 서 체와 크기에 따라 세분된다. 천자문순 주조가 허가된 중앙 관가는 어영청, 훈련도감, 호조등 6개 관영이 있 으며, 지방관영으로서는 평안감영, 함경감영, 경상감 영, 전라감영, 개성관리영등이 있다. 대개 주전소 마 다 '天'자에서 '往'자까지 20가지 내외였으나 평안감 영에서는 '天'자에서 '水 '자까지 모두 44가지로 가장 많이 발행하였다. 그리고 통영에서 주조된 뒷면 '統' 자는 많은 종류로 구분하여 바행되었음을 볼 수 있 다.
숫자순
당일전과 당오전에는 숫자순이 있다. 배면 상부에는 주조처가 새겨져 있으며 하부나 우, 좌부에는 통상 적으로 "一" 부터 "十"까지 새겨져 있다.
부호순
오사(五事)라고 일컬어 지는 멸, 일(日), 월(月) 성진 (星辰), 당수 가운데 日, 月, 星과 그밖에 지표 목표등 을 부호로 정하고 뒷면에 새겨 넣어 여러 가지 형태로 분류하였다.
오행순
우주간에 운행하는 원기로서 만물을 낳게 하는 木, 火, 土, 金, 水의 5원소를 상평통보 뒷면에 새겨 넣 었다. 오행설이라는 말은 중국 제(齊)나라 사람으로 서 전국시대 사상가 추연(騶衍)에 의해 제창 되었다. 이 5원소는 일 종의 자연철학 내지는 자연과학으로 동양적인 인생관, 세계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별전
우리나라 별전은 조선조 숙종 4년(1678)부터 주조하 기 시작한 상평통보의 발행과 그 역사를 같이 했다고 한다.
즉 상평통보의 주조시 주전관인 호조에서 그 재질과 중량등을 시험할 때 만들어진 일종의 시주화 (試鑄 貨)내지 기념화로서 법화(法貨)인 상평통보처럼 유통 되지 않고 당시의 왕실 또는 지체높은 사대부 계급의 기호품으로 애완 되었다.
열쇠패
우리나라의 열쇠패는 일명 개금패(開金牌) 라고 부르 고 있다. 고종조 전후에 만들어진 열쇠패는 조선왕조 후기에 상류사회에서 신부의 귀중한 혼수품으로서 가보처럼 애완 되었다. 이 열쇠패는 불길(不吉), 부정 (부)을 막아 보려는 의도가 다분히 내포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형태는 각형(角型)과 주머니형, 용형 (龍形) 및 박쥐형등으로 구분하며, 형태와 구도와 문 양등은 왕가경축(王家慶祝) 열쇠패를 비롯하여 10여 개의 형태로 나뉘어 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열쇠 패는 중국과 일본 그밖의 다른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하고 희귀한 대형 기념화 (記念貨)적 성격 을 지니고 있어 우리선대의 얼과 손때가 묻은 실내장 식 문화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10년 한일강제 합방 후 우리나라의 주화는 자취를 감추 었고 일본이 발행한 주화를 사용하였다. 1950년 6.25동란 이후 급등을 계속하던 물가가 1958년에 이르러 크게 안정 되고 산업생산도 안정된 성장을 계속하여 화폐가치에 대 한 신임이 크게 확보되자 한국은행은 화폐체계의 정비와 제조비 절감 및 소액거래의 용이를 도모하기 위하여, 195 9년 10월 미국 필라델피아 조폐국에서 제조 도입된 심환 청동화, 오십환, 백환 백동화를 발행함으로써 실로 반세 기만에 우리의 주화가 재등장하게 되었다.
1966년 한국조폐공사의 기술에 의해 십원, 오원, 일원, 등 3종의 주화가 제조되었으며 1970년 11월에 100원 주화, 1 972년 12월에 오백원 백동화가 발행되었다. 1982년 6월 에 통용주화로서는 최고액면 주화로 오백원 백동화가 발 행되었으며 이어서 1983년 1월 신화폐체계정비에 의한 새 얼굴의 주화 5종이 발행되었다.
초대 대통령 초상
우리나라 최초로 발행된 주화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거북선, 무궁화등이 도안되어 있으며 백환화에 새겨진 우 남 이승만 (雩南 .李承晩)은 한일합방 이전에는 서재필의 영도하에 설립된 協成會, 獨立協會 등에서 독립운동에 참 여하였으며 미국에 머물면서 조지.워싱턴 大學, 하버드 대학등에서 修學, 1910년 프리스턴대학에서 哲學博士 학 위를 받았다. 한.일합방으로 귀국,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 약 1917년 안창호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世界小民 族大會 대표를 파견시켰으며, 1919년 3.1운동후 본국에 서 조직된 한성입시정부와 상하이에서 선포된 임시정부 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國務總理로 추대 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 지 도자로서 獨立成中央協 議會총재, 民主議院 議長, 48년 國會 의장에 이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거북선
1592년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의 고안으로 건조된 세계 최초의 돌격용 甲戰이다. 이충무공 (李忠武公)의 난중일 기에 의하면 거북선에 설치한 砲를 처음 쏘아 본 것이 임 진년 (1592) 3月 27日이며 처음으로 海戰에 참가한 것은 川海戰이라고 한다. 거북선 이 임진왜란때 돌격전선으로 서의 기능을 발휘함에 따라 전란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 (龍頭)는 거북머리로 되고, 치수도 일반적 으로 長大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 되었는데 795 년(정 조 19)에 간행된 <이충무공 전서>에 <전라좌수영거북선 >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 적인 치수가 어느정도 기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동은전
개항이래 우리나라에는 많은 외국상인들이 왕래하게 되 어 개항지에서는 그들이 가지고 온 화폐가 널리 유통 되 고 있었다. 당시 외국화폐로는 일본의 일원은화, 멕시 코의 루우불은화 및 마제은(馬蹄銀)등이었으며 그 소재 는 모두 은인데 반하여 루리나라의 상평통보는 구리로 만들어져 있어 국제거래상 아주 불편할 뿐 아니라, 비합 리적이라는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종 19년(1882)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은화인 대동일전(大 東一錢), 대동이전, 대동삼전이 제조되어 전,근대적인 상평통보와 근대적화폐라 볼 수 있는 대동은전이 나란 히 유통되었다. 이와같이 비금속으로 만들어진 질 나쁜 화폐와 귀금속인 질좋은 화폐가 함께 유통되어 유통계 에서는 곧 그레셤의 법칙이 작용되었다. 그러나 대동은 전은 발행직 후 퇴감되거나 해외로 유출되어 유통계에 서 자취를 감추었고, 더욱이 주원료인 마제은마저 품귀 현상으로 결국 고종20년(1883) 6월에 이르러 주조가 정 지되었다.
마제은(馬蹄銀)
중국에서 사용되던 은중량(銀重量) 통화의 하나로서 말 굽은이라고도 한다. 말굽은은 원나라 말기부터 출현했 던 말굽모양의 은괴로 서양인들은 이를 사이시 (Syse e)라고 불렀다. 말굽은은 은으로 만근 50냥 (1.875g) 중 량통화 중에서도 큰거래나 저축용으로 주조된 것 이며 우리나라에서는 1882년 근대전인 대동은전의 원료로 사용하였으나 곧 품귀현상으로 인한 대동은전 제조에 차질을 빚어 대동은전이 사람지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 도 하였다.
일본 제일은행권 발행
고종 13년(1876), 일본과의 內子修好에 따라 인천, 부 산, 원산항 개항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해관 (海關) 업무 를 취급하여 도던 일본 제일은행은 1901년 해관세를 저 당하는 대가로 은행권 발행권을 획득하고자 하였으나 우리 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같 은해 10월과 海關出을 원활히 하는데 필요하다는 이유 로 일본 大에 發行를 신청하였으며, 이에 일본 정부는 제일은행에 은행권 발행을 허가하는 특별규정을 제정 하였다. 광무 6년 (1902), 제일은행은 일원권, 오원권, 십원권을 발행하였으며 1904년 일원권,오원권, 십원권, 등 구권 3권종을 1908년에는 신권3권종 모두 12권종을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제일은행권의 구권발행과 유통
제일 은행권이 발행되자 일부지역에서는 그 미려함과 유통 편의성이 인정되어 그 유통량이 증가되였으나 우 리나라 정부요인이나 재야 지식인들은 이 은행이 일본 의 조선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고 인식하고 제일은행권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개항과 함께 진출한 일 본은행과 일본화폐의 국내유통으로 이하여 당시 우리 나라 화폐질서는 동요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개항에 따른 행정비의 가중으로 인한 材政과 그에 따른 화폐 남발은 조선 화폐 제도를 더욱 문란하게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또한 근대적 화 폐금융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확립하고자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현재 사용하는 돈의 종류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조사하여 보자.
현재 사용하는 돈의 종류
지폐 : 10,000권, 5,000권, 1,000권 등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동전 : 500원, 100원, 50원, 10원, 5월, 1원 등의 여섯 종류가 있습니다.
기타 : 수표, 어음, 신용 카드 등이 있습니다.
3.
ㄱ.돈을 구기지 않고 낙서하지 않는다.
ㄴ.돈은 항상 지갑에 넣고 다닌다.
ㄷ.돈을 아무렇게나 보관하지 않는다.
그외에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