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박사를 받고 현재는 녹색미래 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글은 2001년 가을 친환경적 지역농업 운동을 펼치고 있는 양평군 관계자들과 함께 필자가 쿠바와 꾸리찌바를 방문하고나서 {녹색평론} 2002년 1·2월호에 발표한 방문기를 옮긴 것이다.
다소 무리한 일정이었다. 겨우 열흘 동안 쿠바와 브라질을 돌아보겠다고 한 것은 아무리 부지런히 돌아다니더라도 버거운 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녹색미래'가 주관하고, 정농회와 양평군, 그리고 다른 시민단체들이 함께 가기로 한 15일간의 견학 기행이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결국 필자와 양평군 관계자 6명만 떠나게 되어 일정이 열흘로 줄어든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쿠바로 가는 길은 멀고 힘들었다. 서울에서 LA, LA에서 멕시코의 유명한 휴양도시 깐꾼으로, 다시 깐꾼에서 1시간 정도 작은 비행기를 타고 드디어 쿠바 아바나에 도착했다. 중국 이외의 사회주의권 국가에는 처음 가보는 필자는 다소 긴장했다. 게다가 비행기에서 내려서도 버스를 타고 어두운 공항을 한참 돌아다니다가 허름해 보이는 건물에 우리를 내려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의외로 입국수속은 간단하게 끝이 났고, 특별히 제재를 받는다는 느낌도 없었다. 우리를 맞이한 안내인은 정확한 조선어를 구사하는 쿠바 여성이었다. 참사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김일성 대학에서 6년이나 유학하였다고 했다. 묘했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 이곳 쿠바에서 남한말과 북한말이 이렇게 한데 어울리다니 약간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슴프레 건물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혁명의 도시 아바나에 도착한 것이다.
쿠바 유기농업의 역사적 배경
쿠바는 인구가 1,100만이고 면적은 114,524㎢로서 남한보다 약간 더 큰 섬이다. 아열대성 해양기후로 연간 평균기온이 25.5℃, 연간 강수량은 1,375㎜이며 사탕수수와 담배잎 같은 경제작물이 주된 농작물이다. 1989년 이전까지 쿠바 농업의 특징은 기계에 의존한 대규모 단작농업이었다. 소련제 트랙터가 농지를 경작하고 다량의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어왔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사회주의권의 분업체계 속에서 쿠바는 대부분의 식량을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수입하였다. 그것은 1959년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미국이 철저히 쿠바를 세계경제로부터 봉쇄시켜왔기 때문이다. 곡류 100%, 가축사료 97%, 콩류 90%, 쌀 43%를 모두 수입에 의존하였던 것이다. 또한 소련에서 원유를 특혜가격으로 수입하고 자국에서 수출하는 설탕을 소련에 국제시세의 다섯배 정도의 가격으로 팔았으니 상당히 기형적인 구조 속에서 농업을 운영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1989년 이후 사회주의권이 무너지면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은 상황이 되었다. 수입되던 원유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농약과 화학비료도 1/5밖에는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다른 무엇보다도 먹을 것이 너무 부족하게 되었다. 우유를 구할 수 없어서 체중미달의 아동이 속출하고,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한 가장들이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결국에 정신이상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에 카스트로 대통령은 1991년 9월 '평화시대의 특별시기'를 선포하게 된다. 그리고 이 특별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쿠바는 특단의 개혁조치를 취하게 된다. 당 정치국에 젊은 층을 대거 영입하고, 달러 사용의 완전자유화를 선포하였다.
무엇보다도 핵심적인 것은 전국적으로 기존의 근대적 농업에서 유기농업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정책의 전환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준비되었던 측면도 있었다. 1백만톤 이상의 화학비료, 2만톤 이상의 농약, 2백만톤의 가축사료를 몽땅 하루아침에 잃어버렸으며, 석유부족으로 7만5천대 가량의 대형 트랙터가 멈춰버렸으니 유기농업으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쿠바의 유기농업은 특별시기가 오기 전부터 준비된 것이었다. 특별시기가 오기 전에 쿠바 유기농협회의 연구자들은 근대적 농업이 초래하는 토양침식이나 염해, 병해충의 농약 저항성 증대 등에 대해서 경고하였고, 농무부나 대학의 젊은 과학자들 역시 이러한 점을 지적하여 대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통합적 해충관리(IPM)와 같은 생물학적 해충관리기법의 경우는 1930년대에 처음 도입되었고, 1985년부터는 해충관리에서 화학적 살충제를 대체하도록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였다. 다만 특별시기가 오기 전에는 유기농업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전체 농업연구자들 가운데서 소수였기 때문에 유기농업이 전반적으로 확산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보통 장기간에 걸쳐 효과가 나는 유기농업의 성과가 쿠바에서는 매우 빠른 시기에 나타났다. 일부의 경우지만 1997년에는 1991년 이전보다 오히려 생산량이 10% 이상 높아진 농장도 생겼다. 이로써 특별시기의 배고픔은 점차 극복되었고, 사람들의 삶에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쿠바 유기농업 현장을 찾아서
쿠바의 아침은 신선했다. 멕시코만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묘한 해방감을 느끼면서 쿠바의 휴양지 바라데로로 향했다. 해안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바라데로는 혁명 이전에 뒤뽕가(家)가 소유한 별장지대였다가 혁명 후에 국가에 귀속된 후 지금은 외국 관광객들에게만 개방되고 있다. 바라데로로 가는 길 곳곳에는 자그마한 유정(油井)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내인에게 물어보니 석유의 질은 그리 좋지 않다고 한다. 길거리에 배어있는 매연 냄새도 아마 그 탓이리라.
바라데로로 가던 도중에 우리는 개인이 운영하는 유기농업 농장을 방문했다. 농장의 규모는 6ha 정도로 그리 크지 않았지만 돼지 두마리와 소 두마리, 그리고 바나나, 고구마 등 여러가지 채소를 키우는 아담한 농장이었다. 잉나시오라는 이름의 주인 아저씨는 다소 갑작스러운 방문에 잠시 주춤했지만 자신의 집을 우리에게 공개하면서 자신은 화학비료나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국가소유 농지가 점차 비국가소유 농지로 전환되고 있는 가운데, 자신도 운이 좋아 개인소유의 농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재배한 작물을 가족들이 일차적으로 소비하고, 남는 부분은 국가가 수매를 해주니 별로 걱정하지 않고 산다고 말했다. 보기에도 무척 인심이 후해 보이는 잉나시오씨는 우리에게 목이 마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아들을 시켜 자기 집 앞마당에 있는 야자나무 열매를 따오라고 한 후에 즉석에서 우리를 대접하였다. 야자열매 물은 찝찔한 맛이 나서 별 맛은 없었지만 순박한 인심 탓에 숭늉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잉나시오씨는 소에게 거는 큰 쟁기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60년대 후반까지 볼 수 있었던 나무쟁기였다. 그걸로 소를 앞세워 흙을 간다고 설명해주었다. 트랙터는 연료부족 탓도 있지만 토양을 굳게 만들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잉나시오씨의 인심에 무척 고마워하며 한국에서 가져간 안동 하회탈을 선물했다.
잉나시오씨의 농장을 떠나 우리는 바라데로 해변으로 향했다. 바라데로에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카리브해(사실은 멕시코해)에는 몸을 꼭 담궈야 하지 않겠냐는 결연한 의지로 몇사람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 그런데 놀랍게도 바닷속은 따뜻하였다. 멕시코 난류의 온기는 마치 어머니 품처럼 푸근하였다. 바닷속의 많은 생명들이 이런 난류로 인해 보금자리를 틀고 새로 태어나고 죽는구나 싶었다. 바라데로를 떠나 아바나로 돌아오는 길은 다소 어두웠다. 그러나 구(舊)아바나와 신(新)아바나를 연결하는 말레꼰 해변도로는 피곤에 지친 여행객의 마음을 좀전의 멕시코 난류처럼 포근하게 감싸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국가가 운영하는 유기농업 농장을 방문하였다. 처음에는 농무부의 허락을 얻지 못해서 국가가 운영하는 농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노심초사했지만 안내인이 어렵사리 기회를 만들어서 농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농장 책임자는 보렐이라는 건장하고 콧수염을 멋있게 기른 남자였다. 농장에서 일하는 인부는 8명이었고 면적은 총 3,800㎡ 정도로 제법 규모가 큰 농장이었다. 바나나, 녹두, 열무, 옥수수, 수단그라스, 토마토 등을 키우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지표면에서 30㎝ 정도 높이로 슬레이트를 이용해서 재배포장지 고랑을 여러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가로 1.5m, 세로 50-70m 정도의 고랑에는 여러가지 작물을 키우고 있었는데, 국가의 연구소에서 제공한 미생물 제제(담배잎을 이용한 병충해 방제 제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고랑 앞에는 거의 예외없이 병해충 방어작물인 허브(박하 종류)를 심어놓았다. 그리고 고랑 밑으로는 스프링클러 시설을 설치하여 급수를 하고 포장지 가운데를 파헤쳐 태양열로 토양살균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매우 정성스럽게 작물을 대하였다. 기계로 짓는 것은 전혀 없고, 괭이, 삽 등을 이용하여 마치 작물들과 대화를 하는 듯이 조심스럽게 농사를 짓고 있었다. 농사짓는 방법도 휴경을 실시하고 연작을 피하는 작부(作付)체계를 갖추어 놓았으며 섞어짓기도 많이 하고 있었다.(옥수수와 녹두, 수단그라스와 토마토 등) 농장에서 재배한 작물의 일부는 농장 앞에서 바로 직거래를 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농산물을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들 모두 정말 느긋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쿠바가 유기농업으로 전환한 데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농업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사심없는 기술지원, 정부의 탄력적인 제도운영,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조용히 대지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농민들의 노력으로 완성되고 있는 듯했다. 아름다운 쿠바의 자연과 사람들이 만들어낼 녹색의 미래는 이처럼 모두 욕심없이 천천히 살아가는 가운데 생명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그런 세상이 아닐까?
생태수도 꾸리찌바의 탄생
인구 160만명, 총면적 432㎢의 꾸리찌바시(市)는 브라질 빠라나주(州)의 주도이다. '생태수도'라고 불리는 꾸리찌바는 도시에서 자연과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어떤 생각과 행동이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브라질의 여러 주도들 가운데서도 가장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 도시는 일찍부터 공업도시로 출발하여 점차 농산품 가공 및 수출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1950년 이후부터는 급속한 인구증가와 환경오염 문제로 고통받았다. 특히 1964년에서 1979년까지의 군사독재 정권은 인프라 구축에 열을 올렸고, 꾸리찌바시 역시 1960년대 초에는 도심의 사적지까지 훼손당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건축가였던 자이메 레르네르와 그 동료들이다. 이들은 군사정권의 소위 '창조적' 파괴에 대항하여 '창조적' 계획과 건설을 시도하였다. 임명제 시장과 민선 시장을 통틀어 세번이나 역임한 레르네르는 도시를 아름답고 푸르게 보전하면서도 시민들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25년이나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물론 그가 주된 역할을 하기는 했어도 오늘날 꾸리찌바시가 있기까지에는 시민들의 삶의 현장으로 직접 내려가서 일일이 귀를 기울였던 헌신적인 공무원들과 시민들의 적극적이고도 활발한 시정참여가 필수적이었다.
1966년에 본격적으로 실시된 꾸리찌바시의 종합적 도시계획은 우리나라의 도시계획과 다른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도시계획은 도시의 외연적 확산을 방치하거나 심지어 신도시 건설을 통해 유도하는 측면이 있으며, 이로 인해 발생하는 교통체증과 같은 도시문제를 다시 단편적으로 수습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러나 꾸리찌바의 경우, 중심도시의 물리적 확장을 제한하는 토지이용계획과 교통계획의 통합, 그리고 상업, 서비스와 주거기능이 중심지로부터 '구조적 교통축'을 따라 선형적으로 확대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즉, 도시의 성장관리가 적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1972년 스톡홀름회의 이후 생태의식에 눈을 뜬 레르네르 시장은 꾸리찌바시를 생태적으로 건전한 도시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철학적 기반 위에 이루어진 도시계획을 '4차원적 혁명'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4차원이란 물리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꾸리찌바시는 단순히 녹지가 많은 ― 물론 브라질 전체 도시 중에서 녹지비율이 가장 높기는 하다 ― 도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살기 좋은 생태수도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꾸리찌바의 철학과 녹색미래
이른 아침에 도착한 꾸리찌바시는 무척 단정해 보였다. 우리 일행을 안내한 분은 개인적인 친분 탓에 수고해주신 강 사범님과 한글학교 오 선생님이었다. 꾸리찌바시에 들어가면서 다른 무엇보다 교통망이 눈에 띄었다. 도로체계는 평행의 3중 구조로 되어있었다. 중심도로는 버스 전용차선으로 확보되어 있고, 중심도로 양편에는 승용차를 위한 도로가 있었다. 이 도로와 한 블록 떨어진 곳에는 일방통행로가 있는데 하나는 도심으로, 다른 하나는 교외로 나가는 일방통행로였다. 자가용차가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교통체계는 철저히 대중교통 위주로 되어있는 것이다. 투명한 원통모양의 버스 정류장은 무척 세련되어 보였다. 입구와 출구가 나눠져 있고 차표를 내는 일이 정류장에서 해결되기 때문에 버스에 오르내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버스는 수시로 정류장에 들어왔는데, 이를테면 버스가 마치 지하철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볼보회사에서 만들었다는 빨간색의 이중굴절 버스도 보았다.
우리는 꾸리찌바 시청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인도는 빠라나주에서 많이 나는 흰색과 검은색 알돌로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었다. 알돌로 만든 길은 유지 및 보수비가 일반 보도블록보다 훨씬 적게 든다고 한다. 특히 보도 위에 그려진 우산처럼 생긴 빠라나 소나무(빠라나주의 상징)의 무늬를 따라 쭉 걸어가면 꾸리찌바시의 역사문화적 유적을 다 돌아볼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시청의 내부 모습은 무척 개방적이었고, 마치 은행처럼 누구나 가서 공무원들과 민원을 상담할 수 있는 구조였다. 시청에서 부시장과 면담을 한 후 우리는 시 청소국으로 이동하였다.
청소국에서 국장으로부터 "쓰레기는 쓰레기가 아니다"라는 것을 모토로 한 쓰레기재활용 정책과, 녹색교환제도(재생/재활용품과 잉여농산물의 교환)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정책의 홍보 캐릭터들이 무척 귀엽고, 재활용품 수거 날짜를 알려주는 달력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산뜻하게 제작되었다. 그후 우리는 쓰레기 매립장을 방문하였다. 매립장은 면적 25.5ha에 높이 74m의 큰 산이었다. 처리기술로만 보면 우리나라의 위생매립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또한 매립지 입지 선정시에, 주민들로부터의 민원과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냄새가 나지 않도록 풍향을 고려하여 입지를 정하되 NGO에서 기술지원을 하고, 시에서 자금지원을 해 큰 갈등 없이 입지를 선정했다는 기사의 설명에 우리나라 춘천의 경우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매립장에서 나와 일행은 버스터미널 근처의 '시민의 길'을 방문했다. 버스터미널 역시 꾸리찌바시의 교통체계가 가진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다. 꾸리찌바시는 '사회적 요금제도'라는 단일요금제도를 운영한다. 즉, 교외의 빈민가나 위성도시에서 장거리 통근을 하는 사람들이 버스요금을 한번만 내면 터미널을 벗어나지 않을 경우 자유롭게 환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중간층 혹은 고소득층을 지원하는 단거리 노선이 장거리 노선 승객을 보조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평등성을 고려한 대중교통정책의 일환이라 하겠다. 버스터미널 곁의 '시민의 길' 역시 이러한 사회철학이 엿보였다. '시민의 길'은 도로가 아니라 행정사무 출장소, 여러가지 편의시설, 체육시설이 쇼핑몰처럼 붙어있는 일종의 행정 복합시설 같은 곳이다. '시민의 길'은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건설되었으며, 시민들이 편리하게 자기 지역에서 행정적인 업무나 기타 사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외곽에 설치된 행정 서비스 센터라고 할 수 있겠다. 시민들을 위하는 시당국의 소박하면서도 슬기로운 마음이 전해지는 듯했다.
저녁이 되어 해가 지려 했지만 발걸음을 재촉해서 식물원과 오페라하우스, 그리고 땅구아 공원을 찾았다. 식물원과 오페라하우스 건물은 레르네르 시장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하는데 모두 재활용 유리와 재활용 철사로 만들어진 구조물이었다. 식물원은 개인이 기증한 버려진 땅을 재활용한 것이고, 오페라하우스 역시 버려진 채석장을 재활용하여 지은 건물이었다. 땅구아 공원 역시 버려진 채석장을 새롭게 단장한 것인데, 까마득한 절벽 위에 만들어진 공원은 새로운 장관을 보여주었다. 꾸리찌바시는 재활용에 있어서 거의 예술적인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땅구아 공원 위로 어두워진 저녁하늘이 곱게 밀려들어왔다.
촉박한 일정이라 아침 일찍 일어나 환경개방대학을 찾았다. 대중 환경교육센터라고 할 수 있는 환경개방대학으로 들어가는 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울창한 숲속에 난 작은 오솔길을 따라 물이 흐르고 그 위에 나무판자로 만든 길이 있는 것이다. 환경개방대학 역시 버려진 채석장을 재활용한 것이다. 건물도 버려진 전신주를 재활용하여 레르네르가 직접 설계하였는데, 세미나실과 사무실이 가운데 있고 그 주변을 전신주 난간이 빙빙 돌아가며 올라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환경개방대학은 주로 어린이들과 교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아이들과 교사의 생각을 생태적인 방향으로 돌려놓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환경개방대학의 재정은 시에서 20%만 지원받고, 나머지 80%는 환경 컨설팅을 해서 충당한다고 한다. 그만큼 전문적인 인력들이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환경개방대학을 떠나 도심으로 들어오면서 '지혜의 등대'를 보았다. 지혜의 등대는 일종의 '지역 도서관'으로서 단순히 책을 보는 곳만이 아니라 지역의 사랑방 구실도 하고 지역사회의 문제를 논의하는 마을회관 역할을 하는 곳이다. 건물의 외관이 등대 형태를 하고 있는데, 마치 미래를 밝히는 지혜로운 등대가 환히 빛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심에 와서는 꽃길을 걸어보았다. 1킬로미터가 되는 보행자 전용도로인 꽃길은 그야말로 꽃처럼 아름다운, 꾸리찌바시의 철학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길이었다. 주변 상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르네르 시장의 지휘 아래 4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차도를 뜯어내고 만든 보행자 전용도로인 꽃길의 입구에는 폐기된 전차를 재활용한 무료 탁아소가 있었으며, 아름다운 가로등과 벤치 등이 군데군데 놓여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이곳에서는 거리미술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리고 성탄절이 되면 꽃길 중앙에 있는 호텔은 거리미술제에 출품된 그림들을 창문에 전시한다고 한다.
꽃길에서 다시 우리는 바리귀 공원으로 향했다. 꾸리찌바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원이라고 한다. 식생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특히 나무를 허가없이 베는 것을 엄하게 다스리는 법률 때문에 바리귀 공원의 숲은 무척 울창해 보였다. 안내하시는 오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공원 숲에는 야생 멧돼지가 산다고 한다. 바리귀 공원 한가운데는 묘하게 생긴 숫자 전광판이 서있었다. 거기에는 "재활용 종이 50㎏이 나무 한그루"라는 글귀와 함께, 현재 꾸리찌바 시에서 종이를 재활용하여 살린 나무 그루수와 브라질 전체에서 살린 나무 그루수가 표시되어 있었다. 공원에서 수시로 시민들에게 종이 재활용을 홍보하고 있는 것이었다.
흔히 제3세계라고 불렀던 브라질의 한 도시 꾸리찌바를 둘러보면서 사람의 모둠살이를 규정하는 도시계획에서 얼마나 철학이 중요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한사람의 생각이 변하고, 그 사람의 열정과 헌신으로 좀더 많은 사람들이 변하고, 이들로 인해 훨씬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바뀐다면 꿈이 곧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닌가? 루쉰이 이야기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이야기하고, 또 행동한다면 그것이 바로 현실이 아닌가? 녹색미래는 결국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에 대해 꿈꾸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꿈을 나눌 때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첫댓글 크헉;;;
내일 인나서 맑은정신으로읽어봐야지^^;
^^; 좀 길지. 내일이나 모레 쯤 지울게요. 필요하신 분들은 복사해 가시고..
지우긴 왜 지워^^;
권태 스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