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상담의 경험에 의하면 상담이 실패하거나 어려운 경우의 대부분은 피상담자가 지나칠만큼 단단한 신념을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도 복음보다 신념이 앞서는 경우는 많습니다. 성인 남성이 상담하기 어려운 이유도 사실 많은 부분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믿음에 대한 강한 신념의 사람이었던 사울을 통해서 우리의 복음에 저항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사흘(행 1:9)
1. 먼저 생각하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차라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건 아닙니다.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눈을 감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조금 전 그 음성을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살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못 박았던 그가 살아서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빛으로 다가왔고, 내 심령을 우렁우렁 거리게 하는 음성으로 다가왔습니다. 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는 얼마 전 돌로 사람을 쳐서 죽였습니다. 마치 동네에 돌아다니는 미친 개 한 마리를 잡는 것처럼 사람들이 손에 손에 돌을 쥐어 주고 그를 천천히 때려 죽였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옳다고 여기는 그 길을 위하여 스데반이라는 반역자를 처단했습니다. 단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유대인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택함 받은 우리들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꿈을 실현시켜 줄 메시야는 칼과 창을 들고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모든 나라와 민족을 물리치고 영광의 역사를 열어가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신념은 마치 바위와 같이 든든하고 거대해 보여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람들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았습니다. “이제 너희가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었다” 저 예수쟁이의 당당한 설교는 유대인들의 양심을 찌르고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누구도 유대인들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단단한 유대주의를 깨뜨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스데반의 설교에 유대인들의 바위 같은 마음이 부숴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나섰습니다. 부숴져 내린 그 바위들을 손에 손에 들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의 설교에 마음이 찔려 어쩔 줄을 몰랐던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돌맹이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 사악한 무리를 응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조그만 의심이나 후회도 없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던지는 돌맹이에 조금씩 무너져가는 스데반을 보면서 더욱 끓어오르는 분노와 알지 못할 불안함을 느꼈습니다. 나는 마음에 남아있던 모든 돌맹이들을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내가 옳아… 내가 옳단 말이야!!!”라고 되내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결국 그 스데반이 옳았습니다. 예수는 살아 있었습니다. 그가 내게 빛을 비췄고 그가 생생한 음성으로 내게 말했습니다. 내가 핍박해 온 그 예수가 내게 다가온 것입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던 바위는 이미 스데반에 의해 뽑혀져 버렸습니다. 나의 바위를 향하여 생명 걸고 도전했던 스데반이 결국 이겼습니다. 그에게 던졌던 바위가 뽑혀져 나간 자리에 빛과 음성으로 다가온 그 예수를 나는 거부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항할 힘이 더 이상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이 지나면 사흘째입니다. 이전의 평생보다 더 긴 사흘을 나는 보내고 있습니다. 무너지고 부숴진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다시 밝은 세상을 보기에는 너무 두렵습니다. 철저하게 부정될 나를 보기는 더 두렵습니다. 아….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2.주의해서 성경읽기
1) 사도행전 7장 54절-8장 1절을 읽읍시다.
-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 그들이 보인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반응을 행 2:37과 비교해 보십시오.
- 그들은 결국 어떤 일을 했습니까?
- 그 모든 일의 책임을 누가 지고 있습니까?
2) 사도행전 9장 1-9절을 읽읍시다.
- 스데반 사건 이후 사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 그는 예수를 어떻게 만났습니까?
- 사울이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3) 또 한 청년에 대한 기사를 읽읍시다.(막 10:17-21)
- 그의 고민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습니까?
- 그에게 있는 확신은 무엇입니까?
- 그는 진리와 자기 확신 가운데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3. 깊이 고민하기
1) 신념의 사람입니까? 신앙의 사람입니까?
성경은 사울이 도대체 얼마나 단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여러 곳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8장 1절에는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고 했고 9장 1-2절에서도 당당한 모습으로 다른 기독교인들을 잡으러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2:3-5에서 바울은 당시 자신이 가진 ‘열심’으로 그 일을 했다고 고백하고 있고, 26:9-12에서도 “그런 일을 해야 할 줄로 스스로 생각하고” 열심히 그런 일을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류의 신앙인이 있습니다. 신념과 신앙이 구별되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자신을 향한 열심이 구별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념과 열심이 교회와 십자가와 사람을 상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흔들림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향한 열심이 신앙 생활의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2) 도전하는 복음
그런데 그 사울에게 시험이 다가왔습니다. 자신의 신념이 통째로 부정되는 사건
을 만난 것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못박아 죽였던 예수, 죽어서 무덤에 넣었던 예수가 자신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빛으로 다가왔고, 한번도 들은 적이 없는 음성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그 예수 앞에 두려움에 떨면서 엎드려서 “주여, 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또렷하고 우렁찬 대답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신념을 지켜야 합니까? 아니면 그 신념을 뿌리 뽑고 자신의 삶에 다가온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까?
우리들에게는 때때로 이런 도전들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믿고 있는 것, 살아가는 방식이나 사고가 완벽하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이런 도전들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사울에게 다가온 큰 시험을 보면서 우리가 가진 삶과 신념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할 것입니다. 복음은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복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모든 심령에 도전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나면 그 복음은 무의미해지 것입니까? 아닙니다. 복음은 원래 도전하는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의 삶을 살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신념과 우리의 생활 습관과 우리의 자존심과 우리의 분노와 우리의 적개심과 우리의 자기 사랑과 우리의 교만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런 방식으로 다가온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전혀 새로운 내용으로 우리의 변화를 촉구하며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복음 앞에 놓인 가장 큰 장애물 – 자기 자신
복음의 도전 앞에 서 있는 사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가치 있게 여기던 것, 자신의 삶, 쌓아 온 명예,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야말로 배설물과 같이 여김 받게 될 자기 자신입니다. 사울은 지금 그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사흘 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사울은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분명한 진리로 다가 온 예수, 분명한 거짓으로 밝혀진 자신의 신념 – 그 둘 사이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의 삶을 지키고 진리로 다가오신 예수를 거부할 것인가? 자신의 과거의 신념과 열심과 가치와 자존심을 버리고 새롭게 다가온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바울은 지금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자기 발견의 시간 속에 있습니다.
4) 아름다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사흘간 치열하고 고민한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결심합니다. 그의 결심은 빌립
보서 3:5-9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자신의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유대주의와 율법에서 찾았습니다. 그 가치에 대한 신념과 열심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가치를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주의와 율법 안에서 발견되는 자신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발견해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이러한 결심이 간단하게 쉽게 이루어 졌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흘 간의 칠흙 같은 어둠은 결코 물리적인 어둠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그 동안 좇았던 진리, 신념, 확신, 열심 – 그 모든 것이 부정되는 과정이었고, 그의 인생에 새로운 빛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과정인 것입니다. 사울이 바울 되어진 것, 그리고 그 바울이 훌륭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철저한 자기 부정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4. 적용하기 - 그 빛과 그 음성 앞에 서서
감리교단의 문을 열었던 요한 웨슬레에 대한 기록을 읽어보면 그의 진정한 회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웨슬레는 선교사로 가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깊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납니다.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웨슬레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옴을 느꼈습니다. “죽음 이후에 내가 어찌 될 것인가?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웨슬레는 지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전하러 가는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위기 가운데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대서양 바다 위에서 몇 시간을 폭풍우와 싸운 다음 그는 비로소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아니 아직도 자기 삶의 문 밖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살아오는 동안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참된 믿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위기 가운데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다시 돌아왔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연단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의 큰 원칙에 동의했지만 그 복음이 구체적으로 나의 인격과 나의 삶과 나의 성품과 나의 가정에, 그리고 나의 교회 생활에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복음이지만 내가 선택하는 것은 비복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걷는 길은 비복음의 길 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관념적으로 원하는 것과 내가 실제적으로 택하는 것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우리 삶의 구체적인 작은 부분까지 새롭게 발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어두운 방 구석에 앉아 울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납니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보고 명확하게 판단하고, 그 판단에 반대하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신념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울고 있습니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흘 간,그는 자신이 살아온 평생보다 긴 사흘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안에 자신의 삶을 두기로 결심했습니다. 작은 습관에서부터 큰 삶의 원칙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예수 안에 두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그 결심에 대해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민과 고통의 과정이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사울을 우리 앞에 두셨습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전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철저한 자기 부정의 순간이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자신의 신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울이 경험했고, 바울로 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이런 어둠의 기간이 있는지, 고민의 기간이 있는지, 자기 부정의 순간이 있는지, 눈물과 한숨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있는지, 그리고 그 시간의 결과 자신을 선택하는지 예수를 선택하는지 묻고 계십니다. 어둠 속에서 사울을 만나셨던 우리 주님은 오늘 여러분과 나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