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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종합교양 [6]
국제정치 용어정리
게바라 [ Guevara (de la Serna), Ernesto , 1928.6.14~1967.10 ]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과테말라와 볼리비아를 거쳐 1955년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F.카스트로와 사귀어 쿠바혁명에 참가하였다.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자 쿠바 시민이 되어 라카바니아요새 사령관,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하여 ‘쿠바의 두뇌’라 불렀다.
그러나 1965년 3월부터 소식이 끊겨 사망설이 파다하였으나, 카스트로에게 작별의 편지를 남기고 새로운 전쟁터로 달려갔다는 사실이 그해 10월 밝혀졌다. 그는 볼리비아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중에서 정부군에게 포위되어 부상을 당하고 사로잡힌 후에 총살당하였다.
저서에 《게릴라 전쟁》 《혁명전쟁 여행》 등이 있다.
☆ 게바라 이론 : 아르헨티나 출생의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의 혁명이론
골든 트라이앵글 : 황금의 삼각지대 [ 黃金-三角地帶 ]
미얀마·태국·라오스의 국경지대에 둘러싸여 있는 메콩강 주변의 비옥한 지역이다. 전통적으로 양귀비를 재배해 왔던 지역으로, 최근까지 전세계 헤로인의 약 60%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마약왕이라고 불리는 마약 대량거래업자가 몇 사람 있었는데, 그 중에서 세력이 가장 큰 조직을 거느리고 있던 것이 '쿤 사'이다. 그는 한때 약 1만 명의 '몽 타이군(軍)'을 거느리고 '샨 국가'의 수립을 내세우고 샨주를 지배해 왔다.
미국정부는 미국 내로 유입되는 헤로인의 절반 이상이 미얀마로부터 들어온다고 보고, 1989년 쿤 사를 미연방 대배심에 마약 밀수 혐의로 기소하였다. 오랫동안 '자치(自治)'를 해왔던 샨주도 1995년 미국정부의 지원을 받은 미얀마 정부군의 공세로 그 대부분이 정부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거기에다 '몽 타이군' 내부에서도 그 전략적 중점을 마약 사업에 둘 것인가, 샨족(族)의 독립에 둘 것인가를 둘러싸고 분열됨으로써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같은 해 11월 쿤 사는 어쩔 수 없이 은퇴 성명을 냈고, 1996년 1월에는 그 휘하에 있던 5,000명의 병사들도 정부군에 투항하였다. 미국정부는 쿤 사의 신병인도를 미얀마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와 쿤 사 사이에는, 그가 지배하던 지역을 정부측에 넘겨주는 대가로 소추를 하지 않겠다는 밀약이 있다는 관측도 있어,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쿤 사의 귀순으로 이 지역에서의 양귀비의 재배는 격감했지만, 이를 대신하여 중국·라오스·캄보디아, 다시 파키스탄에서부터 아프카니스탄·이란에 걸친, 이른바 '황금의 초승달 지역'에서의 생산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한다.
미국국가안전보장국 [ 美國國家安全保障局 , National Security Agency ]
약칭은 NSA이며 1952년 대통령령으로 설치한 미국 국방부 소속 정보기관이다. FBI(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 : 미국연방수사국)·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 : 미국중앙정보국)와는 별개이며, 세계를 무대로 전자첩보활동을 하는 방대한 국가안보기관으로서 육군안전국 및 해군·공군의 통신정보기구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감독권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통신정보활동에서 시작하였으며 비교적 의회의 간섭이 적다.
미국 정보기관 가운데 보안이 가장 철저한 곳으로 장성급 군인을 책임자로 임명한다. 통신위성이나 각종 전자장치를 통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미국 전자첩보활동의 대부분을 집행한다. 본부 지하실에는 초정밀 컴퓨터들이 있어 전세계 정찰첩보기지에서 들어오는 엄청난 정보량을 처리한다. NSA가 보유하고 있는 전자장비들은 지구상에서 교신되는 모든 전화·전보·텔렉스 등을 언제든지 도청할 수 있다.
도청된 내용은 컴퓨터가 암호를 해독할 뿐만 아니라 도청된 통신내용을 재빠르게 판독하여 정보가치 여부를 키워드(key word)로 심사하며, 또한 타국의 군사관계 통신을 수집·분석하여 군사력 배치나 이동상황을 알아내기도 한다. 미국은 NSA의 조직을 통하여 적지에 대한 첩보활동의 대부분을 적절히 수행하고 있으며, 이들의 활동은 미국의 다른 여타 정보기관의 경우보다 더 중요한 비밀로서 보호받는다. 적의 정보조직이 가장 먼저 침투하려는 곳이므로 일반인이나 언론기관과 접촉하는 것을 피한다.
글라스노스티 [ glasnost ]
M.S.고르바초프가 내세운 정보공개(情報公開).
소련에서 종래에는 반소적(反蘇的)이라고 해서 금지된 B.C.파스테르나크, A.I.솔제니친 등의 문학작품이나 영화 ·회화 ·연극 등이 공개되었다. ‘역사의 공백을 메우자’라는 표어 아래 스탈린시대의 진실이 밝혀지고, N.I.부하린과 A.I.루이코프 등의 명예회복 및 L.트로츠키 저작의 부분적인 소개가 이루어졌다. 또 현상황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발언, 미공개의 통계나 원자력잠수함의 사고 등도 보도되었고, 당협의회와 인민대의원대회도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너무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이다’라는 견해도 잡지에 실렸고 여론조사도 활발해졌다. 글라스노스티의 목적은 수동적인 국민을 활성화하고 보수관료와 사회의 정체 ·부패를 비판하는 데 있다. 유럽적인 민주주의를 노린 것은 아니지만 소련의 민주화에 있어서 큰 의의가 있다.
네오마르크시즘 [ Neo-Marxism ]
1920년대 이탈리아의 A.그람시, 헝가리의 G.루카치 등의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의 별파(別派).
특히 1930년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불리는 M.호르크하이머를 중심으로 한 T.아도르노, E.프롬, 폴락, H.마르쿠제 등에 의하여 오늘날 계승된 K.마르크스와 S.프로이트의 이론적 접촉을 주장하는 학파 등의 신좌익(new left)사상을 네오마르크시즘이라고 하며, 신좌익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다람살라 [ Dharamsala ]
인도 북서부 히마찰프라데시주 서쪽에 있는 도시. 면적은 29㎢, 인구는 1만 4522명(1981)이다. 히말라야산맥에 있으며 티베트 망명정부가 들어선 곳이다. 1959년에 티베트에서 추방당한 티베트 불교 겔루크파(派)의 법왕 다라이라마가 이곳에 머물렀다. 1960년 중국이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6,000여 명의 티베트인들이 인도로 넘어왔는데, 당시 인도 수상 판디트 네루(Pandit Nmehru:1889-1964)는 이들을 이 도시에 머물게 하였다. 탄산수 생산과 석판 채굴이 대표적인 산업이다. 평균 해발고도가 1,200m에 이르기 때문에 기후가 서늘하고, 다라이라마사원·티베트박물관·달호수 등의 유적 및 볼거리가 있다.
데사파레시도스 [ desaparecidos ]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 중남미의 군부독재체제하에서 불법으로 납치되어 자취를 감춘 사람들을 말하며, 이와 같은 사람들의 존재로 인하여 그들 정부의 인권침해(人權侵害)가 국제연합총회 ·미주인권옹호위원회(CIDH) ·국제사면위원회(AI) 등에 의하여 고발되고 있다.
데탕트 (Detente)
데탕트는 프랑스말로 완화 ·휴식을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을 양극으로 하는 냉전체제가 수립되었으나 1960년대 말부터 변모의 조짐이 생겨났다. 서독과 일본의 급성장, 제3세계의 대두, 중소분쟁 등으로 국제정치는 이데올로기보다 국가이익을 우선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 ·프랑스 ·중국 등 핵무기 보유국의 증가로 국제질서는 양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이행되기 시작하였다. 1967년 6월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 조인, 1970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교섭 등으로 긴장완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1972년 대통령 R.M.닉슨이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을 방문함으로써 미 ·소 간의 데탕트가 실현되었다.
동티모르사태 [ 東-事態 ]
인도네시아 동쪽 끝 순다 열도의 일부인 티모르섬은 16세기 초 포르투갈에 강점된 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의해 동서로 분할되었다. 17세기 이래 서티모르는 인도네시아를 통치한 네덜란드,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았다. 서티모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인도네시아의 영토로 자동 편입되었고, 동티모르는 1974년 포르투갈이 민주화되면서 식민주의를 포기하자 1975년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선언 직후 인도네시아가 쳐들어와 강제 점령하고 1976년 5월 일방적으로 27번째 주로 편입시켰다. 그 후 동티모르의 독립운동과 유혈탄압이 계속되었는데 1991년 주도 딜리시에서 열린 독립요구 주민집회에서는 인도네시아군이 무차별 발포하여 508명이 사살되었다. 또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된 학생들은 대부분 고문후유증으로 시달렸다. 이 사건 이후 국제사회가 동티모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1994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동티모르문제 아태국제회의'가 열려 인도네시아군의 철수와 국제적 감시기구 설립을 촉구하는 성명서가 채택되었다.
1995년에는 유엔의 중재로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원하는 포르투갈 당국자간 회담이 열리기도 했으나 회담은 성과없이 끝나고 독립투쟁은 계속되어 인도네시아군에 의한 인권 유린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호세 라모스오르타는 1996년 동티모르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끈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결과 1998년 7월 인도네시아의 외무장관이 동티모르의 자치권 부여안을 제시하게 되었고 8월에는 포르투갈이 동티모르의 자치협상 개시에 합의하여 10월에 뉴욕에서 자치협상이 시작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1999년 1월 27일 동티모르의 독립가능성을 시사하였고 주민들에게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허용하여 8월 30일 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 결과 주민의 78.5%가 독립을 찬성했고 21.5%가 반대했다. 이에 불복하는 인도네시아군과 이들이 훈련시킨 민병대는 동티모르 전역에서 학살·방화를 자행, 인구의 3/1이 학살되고 주민들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9월 20일 다국적군 선발대 2500명이 동티모르에 도착, 치안 회복 활동에 들어가면서 학살을 주도했거나 뒤에서 연출한 민병대와 인도네시아군은 동티모르를 떠나고, 산속으로 피신했던 주민들이 돌아와 외면적인 평온을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독립을 반대한 동티모르인(대부분이 민병대)들이 서티모르 국경지대에 밀집해 있고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 다국적군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일고 있어 비정규전을 펼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한국 정부도 유엔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군대 파견안을 국회에 제출, 통과됨으로써 상록수부대를 피견하여 동티모르의 평화 유지 활동을 전개했다.
FSB [ Federalinaya Sluzhba Bezopasnosti ]
러시아연방보안국이라고도 한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공화국으로 출범하면서 소련의 비밀경찰(정치경찰)이었던 KGB가 보안부와 해외정보국으로 분리되었다가 1993년 보안부는 FSK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FSK는 국내업무를, 해외정보국은 해외 정보활동을 하다가 1995년 당시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Boris Nikolaevich Yeltsin)이 정보기관의 강화를 목적으로 FSB로 개편·구성하였다.
국장은 장관급이면서 육군대장의 계급을 겸하는 강력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영장 없이 각종 단체나 기업의 조사는 물론, 해외 정보활동을 위한 간첩침투, 기업이나 단체의 위장설립, 자체 특수부대를 운영하고 있으며 최고의 특수 공작부대로 알려져 있는 알파부대를 예하부대로 배속하였다. 법적으로 다른 기관의 감독을 받지 않는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레드파워 [ Red Power ]
흑인해방운동의 기치가 되었던 블랙파워에서 따온 명칭이다. 인디언이 고유의 문화 ·가치관 ·생활양식을 스스로 부활시켜 재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미국 연방정부와 체결한 조약 및 협정상의 제반 권리(영토권 ·어업권 ·水利權 ·지하자원권 등)의 회복과 옹호를 구체적인 내용으로 하는 민족자결운동이다. 1968년에 결성된 미국 인디언운동(AIM)이 중심이 되어, 1969∼1971년의 알카트라즈섬 점거, 1972년의 ‘파기된 조약의 이행’ 요구(연방정부의 위약에 대한 항의 데모)와 내무성 점거, 1973년의 운디드니 점거 등을 전개하였다. 이같은 직접 행동뿐만 아니라, 1974년 전미국 인디언회의에 의한 주권선언 ·법정투쟁, 국제연합에 대한 작용 등 다양한 방법으로 복권운동을 계속하였다.
레임덕 [ lame duck ]
미국 남북전쟁 때부터 사용된 말로서, 재선에 실패한 현직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마치 뒤뚱거리며 걷는 오리처럼 정책집행(政策執行)에 일관성이 없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 또한 이 말은 대통령을 배출한 집권당이 중간선거에서 다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여 대통령의 정책이 의회에서 잘 관철되지 않는 경우를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한다. 1933년 10월 미국 헌법 제20조 수정조항이 채택되기 이전에는 11월 선거에서 패배한 현직 대통령이 다음해 3월 4일까지 재직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정조항은 대통령과 부통령의 취임일을 1월 20일로 앞당김으로써 대통령의 권력이 이완되는 기간을 단축시켰다.
리크 게이트 [ Leak Gate ]
리크(leak,누설) 게이트란 백악관 핵심 인사(칼 로브 백악관 정치고문)가 미국 행정부의 이라크 관련 정보를 비판한 전직 외교관(조지프 윌슨)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부인(발레리 플레임)인 중앙정보국(CIA) 요원의 신분을 언론에 누설했다는 의혹에 대해 언론이 붙인 이름. 사실로 판명될 경우 부시 행정부는 정치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공직자가 CIA 비밀요원의 신분을 누설하면 10년 징역형에 처할 수 있으며 더욱이 정치적 목적으로 백악관 고위 관리가 누설했다면 부시 대통령에게 직접적인 타격이 된다.
마카오 [ 澳門(오문) , Macao ]
면적은 타이파·쿨로아네의 2개 섬을 포함하여 23.6㎢이며, 인구는 44만 5000명(2001)이다. 중국어로는 아오먼[澳門]이다. 1월 평균기온 14.5℃, 7월 평균기온 28.5℃, 연강우량은 2,000mm이다.
중국에 반환된 뒤 정식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 마카오특별행정구'이다. 주장강 남서안에 있는 마카오반도와 타이파·쿨로아네의 2개 섬을 포함하며, 주도(主都)는 마카오반도의 마카오시(市)로 인구는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 1970년 조사에 따르면, 총인구 약 25만 중 95%가 중국인(대부분이 광둥성 출신)이고, 그 밖에 수천 명의 포르투갈인이 살고 있다. 언어는 광둥어[廣東語]·포르투갈어·중국보통어·영어 등이 통용된다.
1. 역사
원래는 광둥성 샹산현[香山縣]에 속해 있었다. 1553년 포르투갈인들은 물에 젖은 화물을 말린다는 구실을 내세워 처음 마카오에 발을 들여 놓은 후 1557년 중국 관리자들에게 뇌물을 주고 마카오반도의 거주권을 획득하였다. 포르투갈은 1553년 대(對)중국 무역권을 획득하는 것과 동시에 마카오의 실질적인 사용권을 인정받고, 광둥의 중국 관리(官吏)로부터 도시건설허가를 얻었다.
1975년 로마 교황이 포르투갈 정부의 후원으로 그 곳에 마카오 관구(管區)를 설립하였다. 그후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대(對)아시아 진출을 위한 거점이 되는 동시에 1841년 영국이 홍콩에 식민지를 개설하기까지 중국과 서양의 유일한 교류기지가 되었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진 문물은 그리스도교 외에 서양에서 발달한 천문학, 유클리드 기하학, 근대적인 지도투영법, 대포주조기술 등이 있고, 특히 동·서양의 지리적 지식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한 마테오 리치도 마카오를 거쳐서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편전쟁으로 홍콩이 영국 식민지가 된 후, 아시아에서의 세력유지에 혈안이 된 포르투갈은 아오먼[澳門]반도 전역과 타이파·콜론 두 섬을 점령하고, 1987년 청(淸)·포르투갈조약을 맺어 그 지역에서 식민지 건설을 합법화하였다. 이후부터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1951년 포르투갈의 헌법개정에 따라 ‘해외주(海外州)’로 바뀌어 본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본국 정부가 임명하는 총독의 통치하로 들어갔다. 1966년 중국에서 문화혁명이 일어나 마카오 정청(政廳)과 현지의 중국인 간에 분쟁이 일어났다. 1973년 3월 ‘자치령’이 되고, 1979년 중국·포르투갈 간에 국교가 수립되어 1986년 베이징에서 마카오 반환협정을 체결하고, 1999년 12월 20일 중국은 마카오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였다.
1995년 11월에는 홍콩의 카이타크공항과 대체할 수 있는 중국의 관문이 되기 위하여 타이파섬에 신공항을 건설하고 미국·유럽·아시아 각국과 22개의 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한국도 방콕 이원권(以遠權)을 포함한 일괄협정을 체결하였다. 1999년 12월 20일 중국에 정식으로 반환되어 홍콩에 이어 두번째로 중국의 특별행정구가 되었다.
2. 산업·경제
마카오의 4대 경제는 무역·카지노관광·부동산·금융 등이고, 그 밖에 의류제조·신발류가공·담배제조와 성냥·폭죽 제조 등의 경공업, 금(金)의 수입자유화에 의한 거래이윤 등으로 수입을 얻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방직품·전자제품·완구·조화[造花] 등이다.
마카오 전역에 걸쳐 농경지가 될 만한 평지가 매우 적어 식량은 자급도(自給度)가 낮아 홍콩 등지를 중계지로 한 아시아 각국으로부터의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과거에는 어업이 성하였으나, 근래에는 쇠퇴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3. 문화 ·관광
아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포교의 기지였던 마카오에는 오늘날에도 가톨릭교도가 많고, 또 많은 그리스도교의 학교·병원·사회시설 등이 있다.
한편, 마카오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항해의 수호신 천후원군(天后元君)을 모시는 마가오묘[閣廟]를 비롯하여 관음묘(觀音廟)·캉궁묘[康公廟] 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전통적 신앙이나 행사도 그대로 전래되고 있다. 유럽문화와 중국문화의 혼재(混在)는 거리의 모습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돌을 깐 길이나 남유럽풍의 주택과 한자(漢字) 간판을 내건 상점가가 서로 이웃하고 있다.
주요 유적·건조물로는 유서 깊은 세인트폴 교회 유적, 17세기에 건조된 성채(城砦), 16세기의 포르투갈 시인 카모엥시의 체재(滯在)를 기념하는 공원·박물관, 1876년에 세워진 정청 외에 앞에 말한 묘(廟)와 교회 등이 있고, 관음묘 마당의 원형 테이블은 44년 청·미조약이 조인된 테이블로 알려져 있다. 또 90년에 쑨원[孫文]이 의료생활을 한 장소는 쑨원기념관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16세 때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신학교에서 서양문물을 배운 곳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즘 [ Machiavellism ]
정치는 일체의 도덕 ·종교에서 독립된 존재이므로 일정한 정치목적을 위한 수단이 도덕 ·종교에 반(反)하더라도 목적달성이라는 결과에 따라서 수단의 반(反)도덕성 ·반(反)종교성은 정당화된다는 정치적 사고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이 말이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기 때문에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는 어떠한 방책도 허용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그러한 사고방식에 의하여 행동하는 사람을 모두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가 반드시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군주론》에서 군주는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하여 여우와 같은 간사한 지혜(책략)와 사자와 같은 힘(무력)을 사용할 필요가 있으며, 신의가 두텁고 종교심도 많으며 인격도 고결한 사람처럼 보여야 하지만 실제로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로마사론》에서 국가창건이라는 결과를 실현하기 위한 비상수단은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주장한 것은 고대 로마인이 가진 역량과 사려를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소생시키고, 이탈리아에 새로운 정치 ·사회질서를 수립하려는 그의 이상을 실현함에 있어서, 먼저 낡은 전통적인 도덕이나 종교를 타파하고 그에 구속되지 않는 강력한 지배자를 탄생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참뜻이 이해되지 않고, 도덕 ·종교의 부정이라는 일면만이 강조되어 그의 사상 전체가 비난을 받았다. 로마 교황청은 1559년 그의 저서 전부를 금서목록에 넣었고, 프랑스의 신교도는 생바르텔미의 학살이 마키아벨리의 가르침을 실행한 것이라 하여 그를 규탄하였다. 프로이센의 대왕 프리드리히(2세)는 자기 자신이 실제로는 반도덕적 정치행위를 자행하고 있으면서도 《반(反)마키아벨리론》(1740)을 썼는데, 그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정치가에게 악덕을 권하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치가는 도덕을 존중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일방적인 비난을 통하여 마키아벨리는 정치가는 그의 정치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여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처럼 일반인에게 인식되었고, 그러한 생각이 마키아벨리즘을 낳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상의 모든 음흉하고 비열한 행위는 모두가 마키아벨리즘의 실천이라고 간주되었으며, 마키아벨리 자신이 마치 무슨 음모가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였다. 이는 어떤 인간의 사상이 그 인간의 참다운 의도를 떠나서 세상 사람들에게 단편적으로만 이해되고 비난받는 것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그의 사후에 이와 같은 운명에 처해진 것을 빗대어서 “마키아벨리의 인생은 그의 사후에 새로 시작되었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매카시즘 [ McCarthyism ]
미국 위스콘신주(州)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J.R.매카시의 이름에서 나온 말이다.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매카시의 폭탄적인 연설에서 발단한 것이다. 1949년 이래 수년에 걸쳐 매카시가 상원의 비미(非美)활동특별조사위원회를 무대로 하여 행한,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이 심각해지던 상황에서 전통적인 미국자본의 시장이던 중국의 공산화와 잇달아 발생한 한국의 6 ·25전쟁 등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국민으로부터, 그의 주장이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매카시즘이 먼저 공격목표로 삼은 것은 중국정책에 영향력이 컸던 외교관, 국무성 및 중국통 정치학자 오언 래티모어, 국제법학자 제삽 등이었는데, 대통령 H.S.트루먼도 공산주의자에게 약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시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매카시즘의 공포에 떨었고, 그 때문에 미국의 외교정책이 필요 이상으로 경색된 반공노선을 걷게 되었다. 유력한 정치가나 지식인들도 매카시즘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매카시는 육군에 도전한 것이 치명상이 되어서 마침내 1954년 상원의 사문결의(査問決議)에 의하여 실각하였다. 매카시는 히틀러와는 달리 아무런 비전도 가지지 못하였으나, 보기 드문 선동가였다. 그가 미국의 대외적 위신이나 지적(知的) 환경에 끼친 손해는 막대한 것이었다.
모사드 [ Mossad ]
이스라엘의 비밀정보기관. 정식명칭은 중앙공안정보기관(Central Institute for Intelligence and Security)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스의 집단학살에서 살아 남은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 이주시키기 위해서 1951년 총리 직속기관으로 설립되었다.
이세르 하렐(Isser Harel)이 창설하여 초대의장을 맡으면서 전문가 조직으로 발전시켰으며, 외국에서의 첩보활동·정보수집·비밀정치공작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
1960년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잠복지인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했으며, 1972년 9월의 뮌헨올림픽사건에 관여한 아랍게릴라 13명을 7년 동안 추적하여 암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76년에는 공중납치되어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인질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 여객기 승객들을 구출하기도 했다. 그 밖에 유럽과 중동 등에서 일어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암살사건에도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1년 6월 이스라엘 공군기에 의한 이라크 원자로 폭격도 이 기관에 의한 상세한 사전조사가 바탕이 되었다고 하며, 그 해 8월 1일 PLO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유력한 지도자 아브 다우드가 바르샤바에서 저격당한 사건에도 관여설이 나돌았다. 대(對)아랍 정보수집 능력은 미국의 CIA(Central Intelligence Agency : 중앙정보국)을 능가한다는 평을 받는다.
무자헤딘 [ mujahidin ]
아랍어로 '성스러운 이슬람 전사'를 뜻하며, 모자헤딘(Mojahedin)·무자히딘이라고도 한다. 보통 이슬람 국가의 반정부 단체나 무장 게릴라 조직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이란의 이슬람 사회주의 무장 게릴라 조직인 모자헤딘할크(Mojahedin Khalq)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무자헤딘은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후, 산악지방을 근거지로 한 반정부 이슬람 저항 게릴라들의 활동이 두드러지면서 널리 알려졌다. 그뒤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10년간 미국·파키스탄·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소련군에 대항하였고, 소련은 결국 3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내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985년에는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이슬람동맹'을 결성하였고, 1992년 4월에는 친소 괴뢰정권인 나지불라(Najibullah) 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무자헤딘 내부에서도 수니파·시아파 등 종파가 서로 대립하거나 강경파인 근본주의파와 온건파로 갈리는 등 내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집권 4년 만인 1996년에 반군인 탈레반에게 수도 카불을 빼앗김으로써 다시 무장 게릴라 조직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무자헤딘은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 등 반탈레반 동맹에 참가해 북부의 마자르 이 샤리프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후 2001년 9월 11일, 미국대폭발테러사건으로 미국이 탈레반 정권과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자, 북부동맹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같은 해 11월 말 탈레반을 수도 카불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북부동맹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무자헤딘 정권 때 대통령을 지낸 부르하누딘 랍바니(Burhanuddin Rabbani)로, 2001년 12월 22일 출범한 6개월 시한부 과도정부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지만 무자헤딘 자체는 이미 여러 파로 갈라져 있어 한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무자헤딘 가운데 북부동맹에 속하지 않은 조직도 있고, 탈레반에 가담한 조직도 있기 때문이다. 빈 라덴 역시 아프간사태 때에는 무자헤딘의 일원으로 소련에 대항해 싸우기도 하였다.
바트당 (Baath Party)
아랍사회주의부활당(Arab Socialist Renaissance Party)이라고도 하며, 중동지역의 여러 국가들 내에 분파를 가지고 있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집권당이다.
바트당은 1943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M.아플라크와 S.알비타르가 창설하였으며, 1953년 시리아사회당과 통합하여 아랍사회주의부활당이 되었다. 바트당은 비동맹주의를 추종하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반대하였으며, 계급구분을 무시하거나 초월하려고 하였다. 이 정당의 구조는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적이었다.
시리아의 바트당원들은 1958년 초통일아랍공화국(UAR)을 구성하기 위한 시리아-이집 간의 동맹을 지지하였으나, G.A.나세르와의 갈등으로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중심의 바트당원들과 대립하였다. 바트당은 1963년 이라크에서 잠시 집권하였다가 1968년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시리아의 좌익 바트당 정권은 계속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하였으나 무슬림형제단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이라크의 바트당은 이란과의 전쟁때문에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져 1980년대부터는 서방의 원조에 더욱 의존하였다. 1991년 걸프전 패배 이후 이라크에서는 시아파(派)와 쿠르드족이 중심이 된 반바트당 세력이 저항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이것은 바트당의 정치적 탄압과 반이슬람적 경향이 그 원인이었다. 정교분리와 사회주의 민족주의에 근거한 수니파의 바트당노선은 근본적으로 정교일치체제 속에서 무신론적인 사회주의나 종족적 민족주의를 배척하고 있는 정통 이슬람과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바트당의 소요 이후 이라크의 대통령 S.후세인은 집권 바트당과 경쟁할 다른 정당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법안을 선포하였다.
아시아아프리카회의
반둥회의 ·AA 회의라고도 한다. 이 회의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미얀마 ·인도 ·파키스탄 등 5개국의 발기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세계인구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29개국 대표단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목적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간의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고, 냉전의 상황 속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의 중립을 선언하며, 식민주의의 종식을 촉진하는 것이었다.
즉, 몇 세기에 걸친 유럽 지배에 대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반발로서 반둥회의는 이러한 지배를 종식시키려는 노력이었다. 반둥회의에서는 식민주의 문제에 관한 열띤 논쟁의 결과 소련 및 서방 열강을 비난하는 내용의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한편 회의 개최 이후 중국과 여러 국가간의 관계는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온건노선으로 인해 강화되었고, 그는 미국과의 협상에 중국이 기꺼이 나서겠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호응을 얻었다.
반둥회의에서는 국제연합헌장의 제(諸)원칙과 1954년 6월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와 인도 총리 네루와의 회담결과 발표된 ‘평화 5원칙’, 즉 ① 영토주권의 상호존중 ② 상호불가침 ③ 내정불간섭 ④ 평등 ·호혜 ⑤ 평화공존이라는 원칙을 통합한 세계평화 및 협력에 관한 ‘10개항목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또한 회의는 보편적인 국제연합 회원국 자격을 지지하고, 전세계에 군비축소를 주창하였다. 그 밖에 무역 ·원조 및 문화에 관한 협정들이 회의결과 성립되었다. 그 후 여러 해에 걸쳐서 아시아 ·아프리카의 중립주의 및 협력이라는 반둥정신은 회의의 가장 중요한 의의로서 평가되었다.
발트3국 [ Baltic states ]
발트해 남동 해안에 위치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총칭.
예로부터 이민족과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8세기에는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1918년에 독립하여 세 공화국이 되었으며, 1934년에는 발트3국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1940년에 소련에 합병되었으며 그 이후로 독일군의 점령 때(1941∼1944)를 제외하고는 민족 공화국으로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민족 ·언어면에서 에스토니아인은 우랄계에, 라트비아인과 리투아니아인은 슬라브계 소수민족에 속한다.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의 영향으로 독립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더니, 1991년 8월의 보수군부세력(保守軍部勢力)의 쿠데타 실패 후인 9월 4일 러시아연방 최고회의에서 승인됨으로써 51년 만에 독립하였다. 또 러시아연방 정부의 지원 아래 국제연합 및 유럽안보협력회의에 각각 가입하였다. 그러나 연방과의 정치유대 단절에 따른 경제적 혼란과 연방군 철수로 인한 국방문제와 러시아계(系) 소수민족문제 등 난제(難題)가 쌓여 있다. 한국은 그 해 9월 6일 독립을 승인하였다.
백호주의정책 [ 白濠主義政策 , White Australia Policy ]
주로 연방 형성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백인 이외의 인종, 특히 황색인종의 이민을 배척하고 정치·경제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으로도 백인사회의 동질성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주장과 운동이다. 1901년 1월 1일 연방이 결성된 직후의 제1차 연방의회(1901년 5월 9일 개회)에서 처음으로 연방에 공통되는 '통일이민제한법'이 채택됨으로써 종전에 각 주(州)에서 개별적으로 시행되던 이민제한법규가 정비되고 또 철저를 기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죄수의 유형지로서 등장한 식민지 오스트레일리아는 19세기에 들어와 자유이민이 시작되면서 차차 발전되었다. 당초에는 목축을 중심으로 한 산업이 1851년 대량의 금광이 발견되자 갑자기 골드러시(gold rush)를 이루었고, 그때부터 중국인을 중심으로 하는 유색인종이 이민을 시작, 1881년 그 수가 5만에 달하였으며, 형편없이 낮은 임금도 마다하지 않고 또 백인들과는 고립된 취락을 이루고 살았다. 그것이 백인 노동자들을 자극하여 임금저하의 원인이 되는 유색인종의 이민제한을 주장하는 근원이 되었다.
구체적 방법으로서 이민을 희망하는 자에게 교육시험, 특히 어학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백인에 대하여는 사실상 시험이 면제되었고, 또 영어를 해득하는 동양인에 대하여는 그리스어로 대신하는 등의 수단을 사용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노동력 부족으로 제한된 범위 내에서 유색인종의 이주를 인정하고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인종에 따른 제한은 해소되었다.
볼셰비키 (Bolsheviki)
소련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정통파를 가리키는 말로 멘셰비키에 대립된 개념이며, 다수파(多數派)라는 뜻으로 과격한 혁명주의자 또는 과격파의 뜻으로도 쓰인다.
1898년 G.V.플레하노프를 중심으로 민스크에서 조직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1903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2차 당대회에서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여러 명제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당대회에서 당원자격 및 투쟁방식을 둘러싸고, N.레닌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적인 의견과 L.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적인 의견이 대립하여 내적 갈등이 첨예화하였다. 이때 레닌파가 다수였으므로 볼셰비키라 하게 되었다.
그 뒤로 다수파인 볼셰비키의 이념적 입장은 볼셰비즘이란 개념으로 집약 ·표현되었다. 정통적 서구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멘셰비키(소수파)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당면과제로 삼아 민주적 투쟁방식을 강조한 데 반하여 볼셰비키는 민주적 자유주의의 단계를 거치지 않는 무산계급에 의한 폭력적 정권탈취와 체제변혁을 위하여 혁명적 전략전술을 안출(案出)하였다. 볼셰비키는 무엇보다 의식 있는 소수정예의 직업적 혁명가들에 의한 중앙집권화된 당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이들 첨병들로 구성된 혁명당에 의한 폭력혁명과 독재정치의 이론을 펼쳤다. 민주적 중앙집권제라 불리는 당조직 이론은 훗날 공산주의 체제의 관료독재의 이론적 모태가 되었다.
이 볼셰비즘은 러시아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의 적용을 위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레닌주의의 해석을 기초로 한 것이며, 무엇보다 사회주의 이상을 향한 가혹성과 대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비민주적 엘리트주의, 인위적 폭력론 등이 두드러진다. 이것이 후에 그 외연(外延)을 확대하여 세계혁명이론으로 보편화 과정을 밟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레닌은 실제로 마르크스에게서 혁명운동을 정당화하는 신화(神話)를 취하였으나, 혁명의 전략 ·전술은 오히려 그의 활동무대였던 러시아의 암울한 사회와 무정부주의자 M.A.바쿠닌으로부터 습득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르크스사상이 러시아적 상황에 맞추어 급진적으로 변용된 것이다.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와 별개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나, 1912년 프라하 당대회까지 같은 당내에 있었다. 그러다가 1912년 마침내 조직적으로 독립한 정당이 되었다. 볼셰비키가 그들의 혁명원칙을 적용할 수 있었던 최초의 기회는 1904~1905년 러 ·일전쟁에 수반하여 발생한 혼란기였다. 볼셰비키는 이때 최초로 ‘소비에트’라는 노동자평의회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산업도시에 조직하였다. 소비에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혁명사상의 요람으로, 또 그 실천조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볼셰비키는 ‘제국주의 전쟁’을 부르주아적 전제정부에 대한 국내전으로 변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들은 1917년 2월혁명 이후 차르의 퇴위가 몰고온 정치사회적 진공 속에서,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의 주도 하에 역사적인 10월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인류 최초의 소비에트 사회주의국가를 수립하였고, 1918년 3월 당대회에서 당명을 정식으로 러시아공산당이라 고쳤다. 소련의 건국과 더불어 볼셰비키의 주장은 거대한 일당독재체제를 정당화시키는 관제(官製) 이데올로기로 굳혀졌다. 볼셰비키는 특히 혁명 이후 취약한 대중적 지지기반 때문에 그 체제수립과정 속에서 당독재 이론을 더욱 무자비하게 적용시켰다. 세계 최초이자 최강의 사회주의국가인 소련은 그 뒤로 볼셰비즘을 세계혁명이론으로 보편화 ·세계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과 서유럽 등지의 공산당들은, 1950년대 후반 이후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다(多)중심화현상이 나타나 ‘사회주의로의 다양한 길’이 모색될 때까지 볼셰비키의 폭력혁명 및 당독재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폐기함으로써 세계사의 흐름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cf. 멘셰비키 (Mendheviki : 소수파)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 (FSLN)
산디니스타는 1927~1933년 반미 ·반정부 게릴라투쟁을 벌였던 산디노(Augusto Csar Sandino)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체는 1962년 아마도(Carlos Fonseca Amador)를 중심으로 소모사의 독재와 미국독점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소규모 무장조직들이 모여 결성되었으나, 1970년대 초반까지도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간헐적으로 반독재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78년을 계기로 반독재진영의 중심으로 급속히 성장하여 이듬해 소모사정권을 타도하고 혁명정부를 수립하였다.
혁명정부는 설탕분배의 국유화를 포함한 경제계획과 농업협동조합의 국가관리, 산업국유화에 따른 제한정책, 토지개혁정책 등을 실시하였다. 1985년 구성된 국회에서 산디니스타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고, 초대 대통령으로 오르테가(Daniel Ortega Saavedra)를 선출하였다. 그러나 1990년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차모로(Violeta Barrios de Chamorro)에게 패배하였고, 1995년 현재는 당내 온건파들이 탈퇴하여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삼민주의 [ 三民主義 ]
중국 민주혁명 초기의 지도자 쑨원[孫文]이 주창한 정치지도원리.
1911년의 신해혁명은 이 이론에 따라 수행되었다. 전기의 삼민주의, 즉 민족·민권·민생주의의 사상은 1855년 광저우[廣州]에서의 봉기 실패기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으로, 1905년 국민당의 전신인 중국혁명동맹회의 강령에 이 삼민주의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쑨원의 사상도 중국혁명의 발전에 따라 보다 깊어져 갔다.
후기의 삼민주의 사상체계가 완성된 것은 그가 사망하기 바로 전 해인 1924년이라고 보고 있다. 이 해에 쑨원은 국민당을 개편함과 동시에 삼민주의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였다.
즉, 민족주의는 국내 제(諸)민족의 평등과 외국의 침략·불평등조약 등에 대항하는 것, 민권주의는 주권이 인민의 권력과 정부의 권력의 균형으로서 나타나는 것, 민생주의는 인민의 생활안정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주장으로서 최종목적은 대동세계(大同世界)의 실현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1927년 국공 분열 후 장제스[蔣介石]는 삼민주의에서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부분을 배격하고 나아가 반공적 내용을 부여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삼통정책 [ 三通政策 ]
중국과 타이완[臺灣] 사이에 우편과 통신·무역·상호왕래의 3가지를 통하게 하자는 중국의 정책.
중국은 1981년에 조국통일 후 타이완은 특별행정구로서 고도의 자치를 가진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에 대해 타이완측은 접촉하지 않고,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으며, 타협하지 않는다는 '삼불정책'을 지켰다.
그러나 타이완측은 1987년에 들어와서 타이완에 사는 대륙 출신자(약 200만 명)의 비공식 대륙방문을 용인하는 변화를 보였다. 또 10월 현직군인과 공무원을 제외하고는 대륙에 삼친(三親) 이내의 친족이 있는 사람들의 대륙방문을 공식으로 승인하였다. 1988년 교육자·사무원·경찰관의 대륙방문도 인정하였고, 국제적십자사가 중계하는 대륙과의 우편물 왕래를 인정하였다.
1988년 7월 국민당 제13차 대회에서는 대륙의 주민이 직계친족과 배우자의 병문안 및 장례식, 그리고 문화·예술 활동을 위해 타이완을 방문하는 것을 심사를 거쳐 승인하도록 결정하였다.
또 삼불정책은 정부 당국의 방침으로만 한정시킨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급속한 경제발전과 계엄령 해제로 정치적 안정을 이룬 타이완측의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삼불정책 (三不政策)
1949년 대만으로 쫓겨난 이후 국민당의 자유중국(대만)이 중국에 대해 취한 정책. 불담판, 불접촉, 불타협 정책
상트페테르부르크 [ Sankt Peterburg ]
러시아 북서부, 핀란드만(灣) 안쪽에 있는 도시.
인구는 469만 4000명(2000)이다. 러시아 제2의 도시다. 제정(帝政) 러시아 때는 페테르스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1914년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개칭되었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라 불렀다. 그 후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 러시아어(語)의 옛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네바강(江) 하구의 101개의 섬과 함께 강 양안(兩岸)에 계획적으로 건설되었다. 말라야(小)네바강·볼샤야(大)네바강을 비롯한 수십 개의 분류(分流)에 놓인 500여 개의 다리로 연결된 정연한 거리는 ‘북방의 수도(水都)’로 불려왔다. 북위 60°의 고위도 지역이면서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여, 남쪽의 모스크바보다 기온이 높다. 1월 평균기온 -7.6℃, 7월 평균기온 18.4℃이며 6∼7월에는 백야(白夜) 현상이 나타난다. 겨울에 네바강과 해안의 바다가 얼지만, 쇄빙선(碎氷船)에 의해 항로는 거의 연중 유지된다.
1. 역사
1703년 표트르 1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스웨덴으로부터 탈환하였다. 그 뒤 러시아 절대왕정의 새로운 수도, 즉 ‘유럽으로 열린 창(窓)’을 건설하기로 하고,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를 세운 것이 이 도시의 기원이다. 이어 1712년 수도가 모스크바에서 이전해 오면서, 장대한 도시계획에 따라 건설이 진행되었다. 이후부터 ‘유럽으로 열린 창’이라는 말 그대로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가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서 무기·금속·조선·섬유 등 공업의 중심지가 되어, 1851년에는 모스크바와의 사이에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부설되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철도망의 정비 등에 힘입어 인구도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18세기 말에 22만이었던 인구가 1880년에는 84만, 1910년에는 190만, 1917년에는 230만으로 비약적인 증가추세를 보였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심장’이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머리’라고 일컬어진 그대로 러시아 서구주의(西歐主義) 운동의 선두에 있었다. 따라서 학술·문학·음악·연극·발레 등에서도 자국 내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한편, 정치면에서도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래 절대왕정에 대한 혁명운동의 온상이 되었다. 또 20세기에 들어서서는 노동운동 및 공산혁명운동의 무대가 되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사건으로 시작되는 러시아 제1혁명과, 1917년의 2월혁명·10월혁명이 결행됨으로써,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혁명이 성공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8월부터 29개월 동안 독일군의 포위 속에서 40만 명이 아사(餓死)하면서도 시를 지켜냈다. 이로써 ‘영웅도시’라는 칭호를 받았다. 전후 피해를 복구한 후에는 1959년 시 창설 20년 기념 축제를 개최하였으며, 현재 모스크바에 다음 가는 공업·문화·학술의 도시로 서구적 색채가 짙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2. 산업 ·교통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에너지의 기반이 미약하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북방의 보르쿠타·페초라탄전(炭田)의 석탄, 에스토니아의 석유·가스, 모스크바 방면으로부터의 파이프라인에 의한 송유, 볼가 및 우랄 방면으로부터의 장거리 송전 등에 크게 의존한다. 공업지대는 핀란드만 남안(南岸)과 시의 동부에 있으며, 대형기계·중전기(重電氣) 기기·선박용 엔진·조선·합성고무·석유화학 등 다수의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공업선진지대가 되어 왔으므로, 설계·시작(試作)·디자인 등에 유능한 노동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 원자력 쇄빙선 레닌호(號)도 이곳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관문이자 육·해·공 교통의 요지다. 철도는 모스크바·무르만스크·페름 등 자국 내의 여러 도시와, 헬싱키·바르샤바·발트 제국 등지로 12개의 노선이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시내에는 1955년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시 남동부 연안의 항구는 최대의 시설을 갖추고 있는 러시아 제1의 무역항(貿易港)이다. 폴란드·영국 및 스칸디나비아 국가와 정기항로가 열려 있고, 또한 극동(極東)과 극북(極北)을 있는 북방항로의 요지다. 또 네바강의 하항(河港)으로서 백해(白海) 및 볼가강 수로(水路)와 연결되는 러시아의 북서쪽 종점으로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항공로는 런던·파리·베를린 등지 간에 노선이 개설되어, 모스크바에 다음 가는 국제항공의 요지다.
3. 문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200여 년에 걸친 수도로, 러시아 제일의 학술·문화도시가 되어 왔다. 그래서 교육·문화시설이 많은데, 그 건설과정에서 표트르 1세 외 역대 차르(황제)가 심혈을 기울였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이탈리아 등지에서 초빙된 건축·조각의 거장(巨匠)들이 건설에 참여하였다. 1819년에 창립한 국립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을 비롯하여, 파블로프 생리학연구소 및 항해·해양·경제 등 연구·교육기관이 있다.
문화시설로는 키로프 기념극장·푸슈킨 기념극장·고리키 문화궁전·러시아 민족박물관(옛날 미하일로프 궁전)·자연사(自然史) 박물관, 에르미타슈 미술관 등이 있다. 도심부의 네바강 우안(右岸)에 시(市) 건설의 효시가 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가 있고, 그 대안(對岸)에 동궁(冬宮:현재의 에르미타슈 미술관)이 있다. 동궁 광장에서 동쪽으로 뻗은 전장 약 4.5km의 네프스키 대로(大路)는 시 건설 초기 이래 상트페테르부르크 제1의 중심가가 되어 온 거리다. 그 말단부의 네바강 강변에 알렉산드르네프스키 수도원, 그 가로변에 스트로가노프 궁전·카잔 수도원·아니치코프 궁전 등을 비롯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많다.
그 밖에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성당·하궁(夏宮)·성(聖)이사크성당 및 10월혁명 때 혁명본부가 설치된 스몰리니 궁전, 제정(帝政) 말기의 국회의사당인 타우리데 궁전 등이 있다. 또 작은 기념물도 많은데, 푸슈킨의 시(詩) 《청동의 기사》로 알려진 데카브리스트 광장에 있는 표트르 1세 기마상(騎馬像)이 유명하다. 10월혁명 때 동궁 진격 신호의 포성을 울린 순양함(巡洋艦) 오로라호(號)는 네바강 연안에 계류되어 10월혁명의 기념관으로 쓰여 왔다. 한편, 시내의 서쪽에 있는 표트르 궁전은 1709년에 표트르 1세에 의하여 기획·건설된 이궁(離宮)이다. 이것은 광대한 부지에 대궁전을 중심으로 20개의 궁전과, 크고작은 대리석 석상(石像)·분수(噴水) 등이 수목 사이에 안배된 7개의 공원이 있다.
파르티잔스크 [ Partizansk )
인구는 약 4만 5800명(2003)이다. 1972년까지 수찬이라 불렀다. 나홋카 북쪽 40km, 수찬강(江) 연안에 있으며, 시베리아 철도의 지선이 통과한다. 역청탄 탄전지대 주변에 형성되어 있던 탄광촌들이 합병되어 1932년 도시가 되었다.
1901년 부근의 구릉에서 규모는 작지만 석탄이 산출되기 시작했는데, 연해지방에서는 중요한 탄전이다. 섬유·식품 공업이 활발하며, 광산기술학교가 있다. 우글레카멘스크 북부 교외에 있는 화력발전소에서 전력을 공급받는다.
☆ 수찬 = 연해주의 한인촌
스케이프고트 [ scapegoat ]
속죄양·희생양으로 번역된다. 이에 유래하여 욕구불만으로 발생하는 파괴적인 충동의 발산을 직접 그 원인이 되는 것으로 향하지 않고, 방향을 돌려 다른 대상으로 전가(轉嫁)하여 불만의 해소를 도모할 때의 바로 그 대상을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희생물(희생양)로 사회적 약자가 선택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나치스 정권하의 유대인이나 미국의 흑인 등이 좋은 예이다. 대중조작(大衆操作)의 한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 스케이프고트 현상
국민의 지지를 받아내지 못한 정부는 흔히 가상의 적을 설정하여 국민의 모든 불만을 그쪽으로 관심이 쏟게 함으로써 대중을 비합리적으로 인도하여 정치에 동원케 하는 것을 지칭
시오니즘 [ Zionism ]
19세기 후반 동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시작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것은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과 유대 종교의 민족주의적인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앞서 16∼17세기에는 수많은 ‘메시아’들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지원하였다. 한편 18세기 말의 하스칼라(계몽)운동은 유대인들이 서양의 세속문화에 동화되도록 유도하였으나, 동유럽의 유대인들은 동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발로서 ‘호베베 시온(시온을 사랑하는 자들)’을 결성하여 유대 농민들 및 기술자들의 팔레스타인 이주운동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시오니즘에 대해 정치적 성향을 부여한 인물은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인 T.헤르츨이었다. 그의 유토피아적인 정치소설 《유대인 국가》(1896)와 《오래 된 새로운 땅》(1903)은 시오니즘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897년 헤르츨은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를 소집하여 바젤계획안을 작성하였다. 이 시오니스트회의는 1901년까지 5차례 개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시오니즘이 단지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소수파만을 대표하였으나, 그 이후 오스트리아 및 독일의 유대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시오니즘은 전세계에 걸쳐서 자발적으로 규합된 유대인 조직으로서 연설 및 안내책자, 여러 언어로 발행되는 신문들을 통해서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실패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억압이 뒤따르자 러시아의 젊은 유대인들은 선구적인 이주자들로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에는 팔레스타인에 9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이 가운데 1만 3000명에 이르는 이주자들은 43개의 유대인 정착촌에서 생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정치적인 시오니즘이 재주창되었고, 그 주도 역할은 영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맡게 되었다. 이러한 시온주의자들로서 C.A.바이츠만과 N.소콜로는 1917년 11월 2일, 영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 민족국가 건설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약속하는 밸푸어선언을 얻어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뒤이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도시 및 농촌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 자치조직을 완성하였고, 그들의 문화생활과 헤브라이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1925년 3월 당시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수는 공식적으로 10만 8000명에 달하였고, 1933년에는 23만 8000명으로 증가하였다.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이 결국 유대인 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따라서 시오니즘과 이를 지원하는 영국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1929년과 1936~1939년에는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영국은 아랍의 요구와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조정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히틀러주의가 대두되고 그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자 유대인들도 도피처로서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지역, 특히 시오니즘을 옹호하는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처음에는 미국과 협의하였으나, 후에는 국제연합에 일임하였다. 1947년 10월 27일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을 아랍 국가 및 유대 국가로 각각 분할할 것과 예루살렘을 국제화할 것을 제안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정식으로 성립하자 1948~1949년에는 아랍-이스라엘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제공받은 땅보다 많은 부분을 아랍으로부터 획득하였다. 결국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 이후 50년이 지난 후, 또한 밸푸어선언 이후 30년 만에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 후 20여 년에 걸쳐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시오니즘 조직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재정적 지원을 계속하였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게 되었다.
신 네오콘 [ Neo-neocon ]
이라크전 이후 등장한 새로운 보수주의를 지칭. 신보수주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이라크전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면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해 주목받은 지적 사조. 신 네오콘도 신보수주의처럼 이라크전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반전 운동이 사담 후세인 정권과 같은 불법 독재정권의 생존을 도왔다는 것. 이는 베트남전 당시 반전운동이 공산주의의 확산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며 신보수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 네오콘은 후세인 정권의 교체는 찬성하지만 결코 부시 행정부를 지지하지는 않는다. 신 네오콘은 전쟁을 지지한다는 측면에서는 보수주의와 일치하지만 진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신보수주의와 같다. 스스로 진보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보수주의와 일치한다.
아말 [ Amal ]
1970년, 레바논의 시아파 이슬람교도가 조직한 정치군사조직으로, 아말은 희망을 뜻한다.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치조직화는 1970년대 이맘 무사 사도르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으며, 1978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이란혁명의 영향으로 레바논 인구의 30%를 점하는 시아파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80년 이후 나비 베리(Nabih Berri)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점령군과 팔레스타인에 대항하여 시아파의 안전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하였다. 베리는 1939년 출생으로 레바논대학교를 졸업하고 파리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베이루트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1970년대 전반에 시아파 해방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78년 아말의 지도자가 되었다. 1985년 6월의 미국의 트랜스월드항공(TWA)의 항공기 납치사건에서 미국인 승객의 석방을 실현하였으며, 1989년 11월 수자원·전력상을 지냈고, 1992년 10월 국회의장에 취임하였다.
아말은 헤즈볼라와 같은 급진파가 시아파 공동체 안에서 확산되는 것에 반대한다. 레바논의 최대 정치집단인 마론파 그리스도교도와 협력관계에 있으며, 체제 내에서 정치적 변혁을 꿈꾸는 온건파이다. 그러나 2000년 이스라엘군이 레바논에서 22년 만에 철수하여 과격파인 헤즈볼라의 입지가 강화되어 아말과의 긴장관계가 고조되었다.
영세중립 [ 永世中立 , permanent neutrality ]
국제법상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타국으로부터 영토보전과 정치적 독립에 대한 보장을 받고 있는 나라를 영세중립국이라 하고, 이 조약을 영세중립조약이라 한다. 이와 같은 조약에 의하여 성립된 권리 ·의무 관계를 영세중립이라고 한다.
영세중립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것은 조약의 산물이다. 따라서 일방적 선언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다. 여기에서 조약이라 함은 국가간의 명시적(明示的) 합의를 말하며, 조약체결에 관한 형식적 절차를 거쳐 체결된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자위를 위한 무력행사는 영세중립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세중립국은 무장이 가능하며, 군대도 보유할 수 있다. 영세중립국이라고 해서 전쟁능력이 박탈되는 것은 아니며, 그 국제법상의 능력에 제한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다. 셋째, 자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구히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야 한다. 여기에서 ‘영구히’라 함은 영세중립조약의 유효기간 전체를 말하는 것이며, 그 중 특정한 기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영세중립국은 전쟁에 참가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어떤 관계를 맺어서도 안된다. 이를테면 동맹조약 ·안전보장조약의 체결이나 자국 내에서의 외국군의 주류(駐留) 또는 외국기지의 설치 등을 허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넷째, 영세중립국은 타국으로부터 그 영토보전과 정치적 독립에 대한 보장을 받는다. 이 경우 타국을 중립보장국이라 한다. 다섯째, 영세중립은 중립과 구별된다. 전자는 평시(平時) 국제법상의 개념인데, 후자는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국가의 일반적 지위를 일컫는 전시(戰時) 국제법상의 개념이다.
영세중립제도는 평화유지방식으로서의 세력균형제도와 그 궤도를 같이한다. 즉, 강대국들 사이에 약소국이 있어 그 약소국의 자의적 또는 타의적 향배에 따라 세력균형이 깨어질 우려가 있는 경우의 평화유지의 한 방식으로 출현한 것이 바로 이 제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강대국간의 세력균형유지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 자신의 안전보장 및 이들 국가를 포함한 지역 내의 평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것이다. 영세중립제도는 세력균형과 궤도를 같이하는 것이기에 집단적 안전보장체제하에서는 그 빛이 퇴색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집단적 안전보장체제란 대립관계에 있는 국가를 포함하는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서로 불가침을 약속하고, 이 약속에 위반해서 침략을 자행하는 국가가 있을 때에는 전체의 힘으로 이를 응징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엔의 평화유지기능이 약화됨으로써 영세중립제도에 대한 가치가 재인식되고 있다.
현재 영세중립국으로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라오스의 3개국이 있다. 이 밖에 로마교황을 원수로 하는 국제법상 특수한 국가인 바티칸도 1929년 이탈리아와의 라테란협정에 의하여 영세중립국이 되었으나, 이것은 정치적 목적이 없는 특수한 경우이다. 스위스는 1815년 빈회의에서 영세중립국이 되었고, 그 후 파리회의에서 재확인되었다. 중립보장국은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독일) ·러시아(소련) ·에스파냐 ·포르투갈 ·스웨덴 등 8개국이다.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은 1955년 오스트리아가 자국의 연방헌법규정을 통하여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세계 각국에 이를 통지하여 승인을 얻음으로써 성립되었지만 이 경우 각국의 승인은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선언에 대한 존중의 의사표시에 머물 뿐, 이를 보장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따라서 성립형식이나 제국의 의무상에 있어서는 스위스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라오스의 경우는 1962년 제네바회의에서 라오스가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중국 등을 포함하는 13개국이 이를 환영하며 라오스의 중립에 관한 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이 선언에 의하면 13개국은 라오스의 독립 및 중립을 존중하고, 또 그것이 침범될 경우에는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라오스 정부와도 협의하고, 또 당사국 상호간에도 협의해야 한다고 하고 있으나, 그 때 취해야 할 의무의 내용에 대해서는 확정된 것이 없다.
오스트리아 및 라오스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영세중립국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영세중립과 유엔가맹국으로서의 지위가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유엔은 집단적 안전보장기구이고, 집단적 안전보장이란 대립관계에 있는 국가를 포함하는 모든 국가가 상호 불가침을 약속한 후, 약속에 위반해서 침략을 자행하는 국가가 있을 때에는 이에 집단적 제재를 가하겠다는 체제이다. 따라서 영세중립국이 유엔에 가입하면 집단적 제재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유엔 창립 초기에 양자의 지위가 양립할 수 없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어서 스위스는 유엔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유엔헌장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시도되어 오스트리아는 1955년 영세중립국이 됨과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이미 유엔가맹국이었던 라오스도 1962년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여기서 새로운 해석이라 함은 유엔의 군사적 제재조치에는 반드시 모든 가맹국이 참여해야 하는 것은 아니므로 안전보장이사회에 의하여 영세중립국은 그 의무가 면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엔헌장상 군사적 제재조치에 참가할 구체적 의무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가맹국이 안전보장이사회와 특별협정을 체결해야 하는데, 이 특별협정은 각국의 헌법절차에 따라 비준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유엔가맹국일지라도 영세중립국은 영세중립국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를 비준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안전보장이사회의 양해만 있으면 특별협정을 체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특별협정은 하나도 체결된 바가 없으며, 그 이유는 기본골격에 대한 강대국간의 의견차이 때문이다.
직선기선 [ 直線基線 , straight base line ]
영해의 폭은 자연적인 연안의 저조선(低潮線)으로부터 측정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를 ‘통상기선(normal base line)’이라 한다. 연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연안근거리에 연하여 섬이 있는 곳에서는 적당한 제점을 직선으로 연결한 선으로부터 영해의 폭을 측정할 수 있는데 이것을 ‘직선기선’이라 한다. 직선기선을 그을 때에는 연안이 일반적 방향으로부터 너무 떨어져서는 안 되며, 또 그 내측에서는 수역이 내수(內水)로서 영토와 충분히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1951년 12월 18일자 국제사법재판소가 ‘영국과 노르웨이 간의 어업분쟁사건’에서 내린 판결은 이 직선기선의 방법을 인정하였고, 58년 제네바 국제연합해양법회의에서 채택된 ‘영해 및 접속수역에 관한 조약’도 이 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직선기선은 간출지(干出地:lowtide elevation)로부터 그을 수 없다. 그러나 항상 해면상에 있는 등대 또는 유사한 시설이 간출지상에 있을 때는 예외이다. 연안국은 직선기선을 해도(海圖)에 명백하게 표시하고 적당히 공개해야 한다. 제3차 국제연합해양법회에서도 직선기선을 인정하고 있다.
오데르-나이세 라인
오데르강과 나이세강에 따른 선인 데서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 정확히는 발트해(海) 쪽에서 시비노우이시치에 서부에서 슈체친(슈테틴) 및 괴를리츠를 거쳐 체코 국경으로 남하(南下)하는 선이다.
소련은 독일과 1939년 8월 23일의 불가침조약 부속 비밀의정서 및 9월 28일의 경계우호조약(境界友好條約)에 의해 폴란드를 분할하고 커즌선(Curzon line) 이동(以東)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그것을 반환할 뜻이 없어 폴란드에게는 대상(代償)으로 서쪽에서 오데르-나이세선까지의 독일령을 가지게 함으로써 이를 달래었다.
소련은 1943년의 테헤란 회담 및 1945년의 얄타 회담에서, 1921년의 리가 조약에 의한 실지회복(失地回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오데르-나이세선을 독일과 폴란드의 잠정적 경계로 해야한다고 영미(英美) 측을 설득하였다. 그리고는 독일 항복 후 포츠담 회담에 앞서 오데르-나이세 이동의 시정권(施政權)을 폴란드에게 주고 단치히를 폴란드에게 병합시켰으며, 그 지역에 살던 독일인들을 축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포츠담 협정에서는, 동(東)프로이센 북부를 소련에게 할양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앞으로 있을 평화조약 교섭 때 영미도 소련의 주장을 뒷받침하겠다고 하였으나 오데르-나이세 이동의 동부 지역에 대해서는 폴란드의 잠정적 시정(施政)을 인정하였을 뿐, 폴란드의 서쪽 국경의 획정은 독일과의 평화조약 체결시까지 유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련과 폴란드는 1945년 8월 17일의 모스크바 협정에서 이를 기정사실화하여 영토편입을 단행하였다. 이어 동독은 1949년 10월 12일의 선언, 1950년 6월 6일의 바르샤바 선언을 통해 이 선이 폴란드와의 경계임을 인정하였고 7월 6일의 폴란드와의 국경획정조약에서 정식으로 그것을 승인하였다.
그 후 폴란드는 1955년 2월 18일의 전쟁종결 선언의 전문(前文)에서 이 선을 ‘평화경계선’이라고 불렀고, 동유럽 국가도 이것을 폴란드의 서쪽 국경으로 인정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서독은 서방국가와 더불어 반대하였다. 서독에서는 동부 지역에서 축출된 피난민들로 구성된 전독난민당(全獨難民黨) 등이 실지회복을 부르짖었으며 역대 정부는 대동방(對東方) 강경책을 취하였다. 그러던 것이 1969년의 브란트 정권 발족 후 오데르-나이세선을 인정하는 방향의 정책전환을 보이다가, 1970년 12월 7일 서독과 폴란드 간에 국교정상화의 기초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어 이 가운데서 서독은 이 선이 폴란드의 서부 국경임을 인정하고 영토 불가침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1일 체결된 양독관계의 기초에 관한 조약(기본조약)은, 양독의 주권은 각자의 영역내에 한정되며 대내 ·대외 관례에 대해서는 상호 독립과 자주를 존중한다고 규정함으로써 다시 이를 뒷받침하였다.
워터게이트사건 [ Watergate Affair ]
1972년 6월 대통령 R.M.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체포된 미국의 정치적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닉슨정권의 선거방해, 정치헌금의 부정·수뢰·탈세 등이 드러났으며 1974년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당초 닉슨은 도청사건과 백악관과의 관계를 부인하였으나 진상이 규명됨에 따라 대통령보좌관 등이 관계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대통령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폭로되어 국민 사이에 불신의 여론이 높아져 갔다. 1974년 8월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대통령탄핵결의가 가결됨에 따라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임기 도중 대통령이 사임한 것은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으며,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기는 하였으나, 의회와 최고재판소가 그 직책을 완수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전통은 수호되었다. 그리고 닉슨 사임 후에도 그의 형사책임을 추궁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남아 있었으나 대통령 G.포드가 9월 8일 닉슨의 재임기간 중의 모든 죄에 대하여 특사를 발표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 全國人民代表大會 ]
중국의 최고국가권력기관.
약칭 전인대(全人代). 국가의사(國家意思)의 결정기관이며, 집행기관인 국무원(행정) ·법원(사법)이 전인대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점에서 3권분립제에서의 국회와는 차이가 있다. 성(省) ·자치구 ·직할시 ·군(軍)이 선출하는 대표로 구성되며, 각 소수민족도 대표를 가진다. 임기는 5년이며, l년에 적어도 l회 개회한다.
전인대의 직권으로서는 헌법개정, 법률제정, 국가주석 ·부주석의 선출, 국무원 총리와 국무원 구성원의 임명,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선출, 최고인민법원장과 최고인민검찰원장의 선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계획 및 국가예산 ·결산의 심사와 비준, 특별행정구의 설치와 그 제도에 관한 결정, 전쟁과 평화에 대한 결정 등으로 되어 있다. 전인대의 상설기관으로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설치되어 있는데, 전인대에서 선출된 위원장 ·부위원장 ·위원 약간 명과 비서장으로 구성되며, 전인대 폐회 중 그 직권의 일부를 대행한다. 그리고 상무위원회의 구성은 적당수의 소수민족대표를 포함시키도록 규정되어 있다.
1975년에 채택된 중국 헌법 제16조에는 전인대를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있는 국가의 최고권력기관’이라 규정, 중국공산당의 예속하에 있음을 명시하였는데, 그 후 1978년에 통과된 헌법과 1982년 제5기 전인대 제5차 회의에서 채택된 신헌법에는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있는’이라는 조항은 삭제되었다. 그러나 신헌법의 전문(前文)에서 ‘당의 영도’를 포함하는 ‘사항원칙(四項原則)’이 강조됨으로써 당우위(黨優位)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제4세계 [ 第四世界 ]
개발도상국 중에서 석유 등의 유력한 자원을 갖지 못하고 식량의 자급도 어려운 여러 국가들.
미 ·러의 초강대국을 제1세계, 중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을 제3세계, 그 중간의 일본과 유럽을 제2세계라고 할 때 이들과 구별하여 사용한다. 1973년 석유위기에 직면하여 석유자원을 갖지 못한 개발도상국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면서부터 이들 국가들을 산유국과 함께 제3세계로 파악한다는 것이 어렵게 되자 74년 4월 국제연합 자원특별총회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개발도상국 중에서 자원은 없으나 사회개발이 어느 정도 앞선 나라들을 제4세계 또는 후발개발도상국(Least Developed among Developing Countries)이라 하고, 그보다도 더 빈곤한 국가들을 제5세계 또는 최빈국(Most Seriously Affected Countries)이라 한다. 국제연합은 이들 제5세계 국가들에 대하여 특별한 원조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종속이론 [ 從屬理論 , dependency theory ]
제2차 세계대전 후 주로 남아메리카 당시의 구체적 현실에 입각하여 남아메리카 학자들이 제기하였다. 1929년 세계공황과 30년대의 세계적 대불황으로 인하여 수출경제에 타격을 입은 남아메리카는 외국자본 계열기업의 국유화 ·민족화와 함께 수입대체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남아메리카의 고립성이 해제되는 한편, 수출주도형 성장론의 부활, 수입대체 공업화의 부진, 국제적·국내적 소득격차의 확대, 다국적 기업의 세력팽창, 관료적 권위주의가 대두하게 되었다. 그때 남아메리카의 사회과학자들은 “저발전이란 무엇인가? 왜 저발전이 지속되고 있는가?”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기에 이르렀고, 저발전에 대한 문제의식이 종속이론으로 대두되었다. 그들은 서유럽 사회의 발전이론이 남아메리카사회의 분석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 남아메리카에 적합한 이론적인 틀을 구축하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종속이론의 연원은 유엔 산하 라틴아메리카경제위원회(ECLA), R.프레비시, P.A.바란, P.M.스위지, A.G.프랑크 등의 마르크스 또는 신마르크스 사조(思潮)에서 찾을 수 있다. ECLA는 1948년 설립되어 제2차 세계대전 후 수출주도형 성장론의 부활에 대항하여 수입대체 공업화의 필연성 및 이론적 정당성을 옹호하는 이론을 펼쳤고, 이들 학자들은 바로 ECLA 이론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여 60년대 후반 이래의 라틴아메리카 종속이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종속이론 속에는 각기 다른 분석방법을 가진 구조주의와 신마르크스주의의 양대 계보가 혼재되어 있는데, 종속이론으로 분류되는 연구 범위와 내용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종속이론이 전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① 종속이론 속에는 어떤 지역이 세계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면 그곳에 자본주의적인 요소가 도입되고 전자본주의적 부문이 재편성된다는 점은 인식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이에 대항하는 민족주체를 낳는 내적 발전의 동태적(動態的) 과정의 해명이 결여되어 있다. ② 의존(dependence)은 통일국가 사이에서 외부적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인 데 반하여, 종속(dependency)은 후진적이고 동질성이 덜한 사회에 병합하여 노동을 세계적으로 분화하는 데 중점을 두는, 보다 복잡한 일련의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구별하는 데서 종속개념은 출발하지만, 그 개념은 아직도 애매모호한 입장이다. ③ 저개발세계가 해방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민족국가 형성이 지니는 의의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④ 종속성 탈피의 방향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 등이다.
톈안먼사건 [ 天安門事件(천안문사건) ]
⑴ 중국 문화대혁명 이래의 마오쩌둥 사상 절대화의 풍조와 마오쩌둥 가부장 체제에 대한 중국 민중의 저항을 나타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에서는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간 實權派)’비판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따라서, 오랜 기간 중국의 혁명과 건설 및 국제적 무대에서의 중국의 위신증대에 기여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도하려던 중국 민중의 의지는 꺾이고, 다시 극좌적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1976년 4월 4일 청명절(淸明節)에, 베이징[北京]의 민중은 손에 손에 화환과 플래카드를 들고 톈안먼 광장에 있는 인민 영웅기념비를 향해 시위행진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자필 비문이 새겨져 있는 기념비는 민중의 화환에 의해 제단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시 당국과 관헌은 이 기념비에 바친 화환을 모두 철거하였고, 다음날인 5일 격노한 대중은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자동차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야기되었다. 플래카드에는, 후에 ‘4인방’이라 하여 체포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과 측근인 야오원위안[姚文元] 등을 비판하는 시가 많이 게재되어 분명하게 마오쩌둥 체제에 대한 반역의 의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압되였으며, 덩샤오핑[鄧小平:당시 중국공산당 부주석 ·부총리]에게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실각시켰다. 반면, 이 사건으로 해서 화궈펑[華國鋒]은 정식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은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0월에는 ‘베이징정변’으로 4인방이 체포되는 등의 격동의 시기를 체험하였으나, 이러한 와중에서 비마오쩌둥화(化)가 진행되어, 1978년 11월에는 톈안먼 사건이 혁명적 행동이었다는 대역전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이 사건은 1919년의 역사적인 5 ·4운동을 본떠서 ‘4 ·5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⑵ 당시 베이징에서는, 그해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이 사망한 후, 팡리즈[方勵之]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학생들은 노동자 ·지식인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층을 대표하여 5월 13일 이래,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과 함께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연좌시위를 계속했다. 5월 15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17일 발생한 100만 명이 넘는 대규모시위로 일정을 변경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당국은 학생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 베이징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한편, 학생들의 요구에 유연한 대응을 보이던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그의 해임설이 떠도는 가운데,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알려진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국무원 부총리 등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6월 3일 밤 인민해방군 27군을 동원, 무차별 발포로 톈안먼 광장의 시위군중을 살상 끝에 해산시켰으며, 시내 곳곳에서도 수천 명의 시민 ·학생 ·군인들이 시위 진압과정에서 죽거나 부상했다. 이 사건은 당시 중 ·소 수뇌회담 취재차 입국했던 외국 기자들에 의해 즉각 전세계로 보도되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는 이와 같은 비인도적 처사에 항의, 강력한 비난성명을 냈다. 이 사건 이후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는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중국 지도부는 반혁명분자에 대한 숙청, 개인숭배 조장, 인민들에 대한 각종 학습 등 체제굳히기와 함께 개방정책 고수를 천명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확립을 내세우는 등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여왔으며, 특히 동유럽의 민주화 물결을 극복하는 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체첸 [ Chechen ]
면적은 1만 9300㎢, 인구는 약 80만 명(2002)이다. 체치냐라고도 한다. 수도는 그로즈니이다. 북(北)카프카스산맥의 남동부에 있다. 남부 국경을 따라 보코보이산맥과 그 북쪽으로 서너 개의 평행으로 산맥이 뻗어 있고, 그 사이에 체첸평야가 펼쳐져 있다. 체첸평야 북쪽에는 순자·테레크의 두 산맥이 있고, 그 북쪽으로 테레크마저지(低地)가 펼쳐진다. 석유·가스를 비롯하여 석회암·이회암(泥灰岩)·석고(石膏) 등이 풍부하다. 주민은 체첸족(族)과 잉구슈족이 60%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러시아인과 기타 카프카스족이다. 언어는 대부분 체첸어를 사용하며,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도들이다.
1859년 러시아제국(帝國)에 의해 강제·합병되었고, 1920년에는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다. 그해 고르나야(Gornaya:山이라는 뜻) 자치공화국이 설립되었으나, 1922~1924년 체치냐(Chechnya:체첸인이 사는 지방)와 몇 개 지역이 자치주가 되어 분리되었다. 1934년 체치냐와 잉구슈인의 잉구셰티야 두 자치주가 합병되었고, 1936년에는 체치냐-잉구셰티야 자치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체첸족과 잉구슈족이 독일군을 도와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는 혐의로 1943~1944년에 약 40만 명이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으며 체치냐-잉구셰티야 자치공화국도 해체되었다.
이들은 1957년 흐루시초프의 복권조치로 대부분 귀환하여 다시 자치공화국을 설립하였다. 1991년 소련 붕괴의 혼란기를 틈타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뒤, 1992년 3월에는 신연방조약에 따라 체첸과 잉구슈의 두 지방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그 후 내부사정으로 정면 대응하지 못하던 러시아는 1994년 12월 체첸에 대한 전면공격을 가하여 수도 그로즈니를 함락했다. 1917·1944·1991년 러시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독립의 깃발을 든 체첸인들은 카프카스산지(山地)로 후퇴하여 집요하게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1994년 체첸의 분리 독립 운동이 본격화하자, 그 해 12월 러시아는 체첸에 진압군을 투입해 대대적인 반군 소탕작전을 감행해 그로즈니를 점령하면서 제1차 체첸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1996년 8월 체첸의 게릴라군이 그로즈니를 공격해 러시아군을 물리침에 따라 휴전이 성립되고, 같은 해 12월 러시아군은 철수하였다. 그러다 1999년부터 체첸 반군들의 폭탄 테러가 거듭되면서 다시 전쟁에 돌입해 같은 해 10월 러시아군이 체첸에 재진입함으로써 제2차 체첸사태가 발생하였다. 2002년 2월 러시아군이 그로즈니를 다시 점령한 데 이어, 6월에는 체첸 반군의 총수인 바샤예프가 러시아군에 사살되면서 체첸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급기야 그 해 10월 23일 체첸 분리주의자들로 구성된 무장 괴한 40여 명이 모스크바 남쪽 멜르니코프 거리에 있는 '돔 쿨트르이(문화의 집)' 극장에 기관총을 난사하며 난입해 700여 명의 관객을 인질로 잡고 '체첸전쟁을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대규모 인질극까지 벌어졌다. 사건 발생 3일 만에 러시아가 특수부대를 투입해 진압에 성공하기는 하였지만, 특수부대가 극장에 진입하면서 분사한 마취가스로 인해 반군 40여 명뿐 아니라 120여 명의 민간인 희생자까지 발생함으로써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에도 체첸과 러시아의 분쟁은 계속되고 있는데, 1994년 체첸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120만 명에 달하던 체첸의 인구는 제1차 체첸사태를 거치면서 86만 명(1996)으로 줄어들었고, 제2차 체첸전쟁을 겪으면서 다시 8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체첸족과 잉구슈족은 모두 이슬람교도이며 잉구슈공화국은 옛 체치냐-잉구셰티야의 1/4인 북서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주요 산업은 석유·가스 채취인데 산지(産地)는 그로즈니·말고베크·카파불라크 주변에 모여 있다. 정유업(精油業)은 그로즈니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며 카스피해(海)의 마하치칼라, 흑해의 투압세, 도네츠 분지까지 송유관이 뻗어 있어 이것이 체첸사태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식품공업은 포도주와 과일통조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농업은 주로 테레크강(江)·순자강·알한추르트강 유역에서 이루어지며, 주민의 약 57%가 도시에서 살고 있다. 철도는 아스트라한과 바쿠, 투압세와 로스토프 등지로 이어지며 자동차 도로의 총연장은 1,200㎞이다. 그러나 제1·2차 체첸사태를 겪으면서 도시는 거의 황폐해 2002년 11월 현재 수도 그로즈니의 건물은 90% 이상이 파괴되었다.
카슈미르분쟁
카슈미르 분쟁은 대표적인 종교적 갈등으로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할 때 생긴 3개 토후국(土侯國:영국 보호 아래 있을 때 인도제국을 형성하던 작은 전제왕국)의 귀속문제를 둘러싼 분쟁이다.
한 나라였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18세기 영국식민지로 전락한 뒤 힌두족과 이슬람족이 각기 분열된 독립운동을 벌였고, 1945년 종전과 함께 임시정부 구성을 둘러싼 종교갈등으로 1947년 힌두교의 인도와 이슬람교의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하였다.
분리독립 이후 자신의 종교를 찾아 국경을 넘다 희생당한 국민이 많아지자 이슬람 주민이 대다수인 인도 북부, 파키스탄 북동부 국경의 카슈미르는 분쟁지역이 되었다. 분리독립시 종족구성상 파키스탄에 귀속되어야 했지만 이 지역의 힌두지도자가 인도에 통치권을 넘김으로써 1948년 제1차 인파전쟁이 일어났다.
1948년 전쟁은 1947년 말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카슈미르 무장부족집단이 수도인 스리나가(Srinagar)의 점령을 시도하고, 이에 대항하여 인도군이
뉴델리로부터 공수되면서 발생하였다. 인도측 자료에 의하면 당시 무장부족집단의 규모는 약 5만명으로, 이외에도 10만 명이 파키스탄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파키스탄은 전쟁 초기 자국의 연루 주장을 부인하였으나, 1948년 5월 정규군을 투입하여 양측간 전면전으로 확산되었다.
1948년 8월 유엔은 양측간 휴전을 중재하여 1949년 1월 휴전협정의 효력이 발생하였으나, 파키스탄은 전쟁 후에도 자국점령 카슈미르가 독립정부임을 주장하였고, 인도는 1963년 자국점령 카슈미르 지역을 자국의 1개 주로 편입하였다. 1949년 휴전으로 서부 아자드 카슈미르는 파키스탄령으로, 나머지 잠무카슈미르는 인도령으로 분할되고 유엔이 통치권을 주민투표에 붙여 중재에 나섰지만 영토 다툼은 계속되었다.
1965년 4월에는 쿠츠(Rann of Kutch)지역에서 양측간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는데, 1964년 네루의 사망 후 인도의 정국혼란을 기화로 파키스탄은 인도 점령 카슈미르에서 비정규전을 실시하여 카슈미르를 국제적 문제로 비화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양측은 3개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수행하여 상대방의 통신·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 인도는 파키스탄 점령지역인 라호르(Lahore)까지 진격하였다. 이 전쟁은 강대국의 압력으로 종결되었고, 소련의 중재로 1966년 1월 타시켄트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1971년 전쟁으로 방글라데시가 독립한 후 영국 및 세계 각국이 방글라데시를 인정하자, 파키스탄은 영연방회의에서 탈퇴하였는데, 1989년 부토(Benazir Butto) 총리 집권시 재가입하였다. 1987년 2월에는 인도측 카슈미르 국경지역에 파키스탄이 포격을 실시하여 약 100개의 마을주민들이 대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후 양측이 합의하여 이 지역에서 철수한 병력은 각 5만명으로 분쟁의 강도 및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990년 4월 양측간 교전이 빈발할 당시 카슈미르 주둔 인도군의 병력은 약 20만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1990년대에도 카슈미르에서는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무장부족집단이 힌두교도에 대해 폭동·테러·게릴라전을 수행하거나 카슈미르의 독립을 주장하여, 인도군 또는 인도측 부족집단이 이에 대해 보복하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1999년 7개월 간 카슈미르 지역의 양측 사망자는 1,300명으로 추정된다.
카슈미르는 면적 22만여 ㎢, 인구 500여만 명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인구의 60% 이상이 이슬람교도이다. 이곳은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중국 등이 국경을 함께 맞대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두 나라 사이에 치열한 영유권 다툼은 앞다투어 핵무기개발에 진력해왔고 현재 잠재적 핵대결의 위험을 안고 있다.
분쟁은 근본적으로 종교집단간 투쟁으로서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힌두교와 범이슬람교간 세력경쟁의 양상을 보인다. 냉전기간 중에는 인도, 파키스탄의 우방인 소련, 중국이 경제·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여 분쟁을 심화시켰으나, 냉전 후에는 대체로 인도, 파키스탄간의 지원에 의해 전투비용이 조달되고 있다. 1996년 한국과 인도와의 교역액은 22억불이나 이 분쟁은 펀잡지역에 국한되어 있고, 인도대륙의 방대함으로 인해 큰 영향은 미치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 50여 년간 계속된 갈등의 근본원인인 종교적 문제는 양측간 이미 합의된 정치적 협정 또는 주요국의 압력을 무효화시켰으며, 이 문제가 존재하는 한 카슈미르의 분쟁은 향후 지속될 전망이다.
양측간 카슈시미르 국경충돌은 대부분 정규군간의 교전이기 때문에 교전수위 및 범위가 조절되는 편이나, 양측이 지원하는 무장집단 또는정규군에 의한 폭동·테러나 게릴라전이 빈발하게 발생하고 있고, 이로 인한 보복전이 자행되고 있어 평화적 해결전망은 매우 어둡다.
중국과 러시아는 과거와 같은 직접적 개입·지원을 자제하고 있으나, 각각 파키스탄과 인도에 무기 및 군사기술을 제공하여 양측간 체제경쟁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켈리 게이트 [ Kelly Gate ]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와 관련된 정보를 왜곡했다는 BBC방송 보도의 제보자로 지목된 데이비드 켈리(59) 박사가 7월 자살하면서 영국 정계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 영국 국방부 자문관이자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전문가인 켈리 박사는 지난 5월 22일 BBC방송의 국방전문기자인 앤드루 길리건과 만났고, 이어 29일 BBC방송은 영국 총리실이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정보를 부풀렸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의회가 이와 관련된 청문회를 소집하자 영국 국방부측은 켈리 박사를 BBC방송의 제보자로 지목했고 켈리 박사는 의회에 출석해 신문을 받은 지 사흘 만인 7월 18일 왼손 동맥을 스스로 잘라 숨진 채 발견됐다. 이에 따라 대법관인 브라이언 허튼경을 위원장으로 그의 자살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한 위원회가 열리게 됐다.
코소보사태
코소보는 알바니아계 주민이 전인구의 80% 가까이를 차지하지만 영토는 신유고연방에 속해 있는 자치주이다. 그래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바라고 있었다. 1998년 3월 초 코소보의 알바니아 분리주의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코소보사태가 시작되었다.
보스니아내전의 종식으로 한 동안 잠잠하던 발칸반도가 다시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세르비아 경찰은 즉각 반격에 나서 반군은 물론, 반군 거점지역의 주민들을 대량학살하였다. 이에 맞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코소보해방군(UCK)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1998년 3월 31일 국제연합(UN)은 유고연방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내렸으며, 1998년 4월 세르비아의 탄압에 대한 알바니아계 주민의 시위가 확산되었다. 세르비아는 1998년 5월 3일 대규모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수십 명의 알바니아계 반군을 사살하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인종청소작전을 펼쳤다.
이를 피해 코소보로부터 탈출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러시를 이루었고, 난민수는 1999년 1월 현재 30만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1998년 6월 코소보사태에 대한 개입을 선언한 미국과 유럽연합은 나토(NATO) 병력을 코소보 주변에 배치하고 코소보로부터의 세르비아 병력의 철수, 잔혹한 인종청소의 중단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이를 무시하고 1998년 8월 코소보해방군의 주요거점을 함락시켰다. 1998년 10월 나토는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 사용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1999년 2월부터 3월 말까지 몇 차례에 걸쳐 서방측과 코소보 평화협상을 가졌다.
그러나 협상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3월 24일 나토는 유고연방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였다. 6월 3일 마침내 세르비아 의회가 유엔(UN)의 평화계획를 승인하였다. 6월 5일부터 나토와 유고연방간에 군사회담이 열렸고, 9일에는 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나토의 유고공습이 시작된 이래 11주간 계속된 코소보사태는 수습되고 평화안 이행에 들어갔다.
크메르루주 [ Khmer Rouge ]
캄보디아의 급진적인 좌익(左翼) 무장단체. ‘붉은 크메르’라는 뜻이다. 1967년에 결성된 크메르루주는 시아누크가 1970년 론놀의 우익(右翼) 군사쿠데타로 전복되자 농촌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세력확장을 통해 마침내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을 장악함으로써 정권장악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폴포트가 이끈 크메르루주정권의 4년간에 걸친 통치기간은 20세기 어느 좌파정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함과 무자비한 보복으로 얼룩졌다. 150만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되었고, 전문지식인층과 기술자층이 기회주의라는 죄명으로 죽어갔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야만(野蠻)과 살상(殺傷)은 서방에서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전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1979년 베트남군대와 이를 지지하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의 공격으로 크메르루주는 전복되었고 이후 캄보디아에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헹삼린정부가 들어섰다. 크메르루주는 이후 타이 국경 근처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중국의 지원하에 무장 게릴라전을 전개했으며, 이로 인해 캄보디아내전은 계속되었다. 그후 유엔의 중재로 캄보디아내전 당사자들이 휴전에 동의하고, 1993년 5월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으나 크메르루주는 1993년 4월 선거불참을 선언하였다. 총선의 결과로 1993년 9월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하여, 제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그리고 프놈펜정권의 총리였던 훈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1994년 7월 그들의 지도자인 키우삼판을 총리로 하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캄보디아의 평화정착을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루주는 과거의 악명과 계속되는 좌경(左傾) 모험주의의 채택으로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탈레반 [ Taleban ]
1994년 10월, 2만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 칸다하르에서 결성한 수니파(派) 무장 이슬람 정치조직을 가리킨다. 결성 당시부터 군정세력으로 출발해 1994년에 이미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80% 정도를 장악한 뒤 이듬해 수도 카불(Kabul)을 점령, 14년간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내전과 4년 동안의 모자헤딘(Mojahedin:무장 게릴라 조직) 권력투쟁을 종식시켰다.
이어 과도정부인 이슬람공화국을 선포하면서 결속력 있는 세력으로 등장, 아프가니스탄 내 반군 조직을 무장해제시킨 뒤 약탈과 강도, 부정 부패를 없애는 데 힘을 쏟는 한편, 일상 상업 활동을 재개함으로써 전통적인 아프가니스탄 가문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내전이 계속되면서 국가 접수(接收)가 어려워지자 지역 지휘관들과 전략적 협정을 체결, 지역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위법 사항과 이에 따른 각종 인권침해를 도외시함으로써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더욱이 이슬람교에 대한 엄격한 해석으로 인해 갈수록 사회 차별이 심해지고, 여학교 폐쇄, 텔레비전 금지, 가혹한 이슬람식 처벌제도 부활, 아동 학대 등 많은 부작용을 낳음으로써 국제사회의 비난을 샀다. 또 2001년 3월에는 군대를 동원해 로켓과 탱크 등으로 아프가니스탄 내 불교 유적과 불상들을 부수는 등 유례 없는 유적 파괴 행위를 공개적으로 일삼기도 하였다.
더욱이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대폭발테러사건의 배후자인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과 그의 추종 조직인 알 카에다(Al-Queda)를 숨겨둔 채 미국에 인도하지 않음으로써 미국과 동맹국들의 반발을 산 끝에 결국 아프가니스탄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같은 해 10월 7일부터 시작된 미군과 영국군의 합동 공격으로 인해 대부분의 공군기지와 지휘본부, 방공망과 방송시설이 파괴되었음에도 여전히 빈 라덴을 인도하지 않고, 계속 항쟁 의지를 밝히면서 성전(聖戰: 지하드)을 촉구하였다. 2001년 10월 말 현재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고,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미국과 동맹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북부동맹의 반격도 치열해 탈레반이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가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태자당 [ 太子黨 ]
1997년에 사망한 덩샤오핑[鄧小平]의 자녀 및 사위를 비롯해 당(黨)·정(政)·군(軍)·재(財)계 실력자들의 자녀 약 4,000명이 중국의 핵심적인 요직에 포진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의 조직으로 모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혈연관계에다 결혼, 학교, 직장 등을 통해 그물망처럼 촘촘한 ‘관시[關係]’를 맺으며 중국의 정·관계와 경제계를 주름잡고 있다.
태자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태자당의 황제로 군림하며 ‘중국제일태자’로 불리던 덩샤오핑의 큰 아들로, 현재 전국장애자협회 회장인 덩푸팡[鄧樸方]을 꼽을 수 있다. 덩푸팡은 1987년 태자당을 대거 취합해 캉화[康華]개발공사를 창립했는데, 겉으로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 상업기관이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권부(權府)로 통했다. 특히, 국내 생산물자들의 구입권을 독점으로 인정받아 홍콩 등에 내다팔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1988년 캉화그룹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덩푸팡이 금융비리를 저지른 것이 밝혀져 그룹 전체가 공중분해되기도 했다.
덩샤오핑의 장녀 덩린[鄧林]의 정식직업은 화가로 그녀의 작품은 작품성과 관계없이 중국 최고실력자에게 줄을 대려는 홍콩, 타이완 기업인에게 엄청난 고가에 팔렸다. 덩린의 남편 우젠창[吳建常]은 하급노동자 출신으로 출세를 거듭해 중국 유색(有色) 금속총공사 사장이 되면서 재계의 실력자로 통하고 있다. 부친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3녀 덩룽[鄧榕]은 한때 지나치게 정치에 개입하면서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또한 덩룽은 인민해방군 현역 소장이면서 대외 무기거래를 관장하는 남편 허핑[賀平]을 통해 막대한 재력을 쌓았다. 장남 덩푸팡이 1980년대의 태자당을 대표했다면 1990년대는 단연 막내 덩즈팡[鄧質方]의 시대였다. 비교적 대외적인 활동에 소극적이었던 덩즈팡은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87년 이후 중국국제투자신탁공사에서 일반 사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결국 태자당 특유의 인맥인 ‘관시’를 최대한 이용해 부동산과 주식투자 등에서 막대한 부를 구축하였고, 현재 쓰팡[四方]공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죽음으로 이들 남매들이 태자당을 대표하던 시절은 끝나고 새로운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 중 경제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태자당 출신으로는 최근 사망한 보수파의 거두 천윈[陳雲]의 아들인 천위안[陳元], 양상쿤[楊尙昆] 전 국가주석의 아들인 양샤오밍[楊紹明], 보이보[簿一波]의 아들인 보시라이[簿熙來], 1993년 사망한 왕전[王震] 전 국가부주석의 아들인 왕군(王軍), 주관오(周冠五) 전 수도철강공사 회장의 아들인 주북방(周北方) 등이 있다.
정치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태자당 출신으로는 혁명열사의 아들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자인 리펑[李鵬],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예젠잉[葉劍英]의 아들인 예시엔핑[葉選平], 국가부주석을 지낸 우란푸[烏蘭夫]의 아들 우부허[烏布赫],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을 지낸 장중루[張仲魯]의 아들인 장하오루오[張皓若] 등이 있다.
이처럼 태자당은 중국의 정·관·재계 곳곳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다. 그러나 1989년 6월 4일 톈안먼사건을 야기한 중국민주화운동의 핵심요구 중 하나가 ‘태자당의 비리척결’이었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중국민의 여론은 부정적이다.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중국 지도부는 1997년 8월 공산당 내부 태자당 출신들의 승진을 늦추도록 결정했는데, 중국이 ‘열린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혈연을 등에 업고 출세가도를 달린 태자당의 역할이 당연히 제한받아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티토이즘 [ Titoism ]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지도자이며, 초대 대통령을 지낸 티토의 정치이념과 그에 의해 대표되는 유고슬라비아의 정책과 체제를 통칭하는 것이다. 즉 다민족국가인 유고의 통합을 고수하면서 반소, 비동맹 공산주의를 표방한 독자노선을 뜻한다.
1948년 6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개최된 코민포름 대회는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코민포름에서 제명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원인은 스탈린이 이끌던 소련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그후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의 정치적·경제적 교류가 중단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모든 면에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 의존하고 있던 상황에서 모든 원조와 교류의 중단은 엄청난 타격이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교류를 서방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유고슬라비아는 독자적 사회주의, 적극적 중립주의, 비동맹주의를 기본원칙으로 하는 새로운 노선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50년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노동자 자주관리에 중점을 둔 신경제정책이 실시되었고, 이를 위해 경제조직이 개편되었다. 1952년 11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제6차 전당대회에서 당의 명칭이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변경되었고, 1953년 1월에는 새로운 헌법이 공표되어 자주관리체제가 본격화되었다. 스탈린 사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나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많은 견해 차가 있었다.
1958년 4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제7차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새로운 강령은 유고슬라비아의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인데, 코민포름에 의해 수정주의라고 신랄하게 비판받았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그후에도 꾸준히 독자노선을 견지하였다. 1961년 9월 베오그라드에서 제1차 비동맹국회의를 개최하였으며, 1963년 4월에는 독자노선을 굳히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 바꾸었다. 1964년 제7차 전당대회를 통해 티토를 서기장에 재선시키고, 경제자유화와 당조직의 민주화·자유화 등의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엄격하고 경직된 관료조직 중심의 스탈린식 사회주의 체제를 거부한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인 노선은 서유럽의 많은 지식인들과 여론으로부터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페레스트로이카 [ perestroyka ]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련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분야에서의 스탈린주의의 병폐로부터 시작된다.
스탈린주의의 문제점은 우선,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국내에서 사회주의 체제의 완성 이후에도 의례적인 정치적 적의 설정, 따라서 모든 정치적 반대가 불가능했고, 비판적 지위의 박탈에 의한 개인의 창의성이 소멸하였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극도의 통제, 계획경제 체제로서 광범위한 관료조직의 출현을 가져왔다.
모든 경제 목표의 설정과 집행이 중앙에서 행해져 지역이나 기업의 특성과 자주성은 무시되었고, 양적 목표 달성의 중시는 질적 개선을 억제하였다. 또한 중공업 위주의 불균형 성장전략은 소비재 공업과 농업의 낙후를 가져와 소비재 물자의 질적 저하와 만성적 부족을 구조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가장 중요한 부정적 현상으로 집단주의에 기초한 유인제도로 인하여 개인의 창의성과 작업에 대한 열의를 약화시켰다. 국가에 의한 직업 ·의료 ·주택 등의 보장은 개인의 창의성의 결여와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제고시켰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이러한 스탈린주의의 문제점에서 시작하여, 소련이 정치과정상 사회주의 원칙인 참여와 분배적 사회주의 원칙을 채택하지 않는 한 생산적 사회주의 체제 자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사회주의의 본질적 내용의 재규정을 위해 제기하는 중요한 이론적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인과 국가 및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재규정에 관한 문제이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개인의 자유의 확대와 이에 따른 경제적 효율성의 확대와 국가의 개인에 대한 보호를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려는 시도이다. 이 경우 개인의 사회적 보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개인의 자유로운 영역과 경쟁을 조화시키는 과제가 중요하게 된다.
둘째, 사회주의 체제하의 소유권의 문제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국가소유만을 인정했던 과거의 정책에서 개인에게 다양한 생산수단을 허용하는 제도로의 전환이다. 이는 사회주의 체제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국가소유, 협동조합 소유, 개인소유 등으로 소유 형태를 세분화하는 것이다. 이 경우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면서 어떻게 다양한 소유형태를 인정하는가의 기준설정이 주요과제이다.
셋째, 사회주의하의 사회적 정의의 재규정이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과거 체제하에서 일하지 않고 분배를 받던 기생적 형태의 제거에서 적극적으로 개인과 그룹의 생산성의 극대화를 도모하는 분배체제의 정비를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사고로 일컬어지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외교정책은 외교정책상 탈이데올로기와 탈군사화, 경제, 외교의 중시 등으로 나타난다. 탈이데올로기란 소련의 국가이익우선주의를 의미하며, 계급의식에 기초한 외교노선의 상대적 약화를 말한다. 탈군사화는 국내 경제개혁에 발맞추어 해외군사개입과 국내군비와 군사력의 삭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는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사실상 사회주의 체제의 포기 및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추구하고 있는 현재 사회주의의 개혁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주의의 붕괴를 촉발시킨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호르무즈해협 [ Hormuz Str. ]
페르시아만(灣)과 오만만을 연결하는 해협.
너비 약 50km. 최대수심 190m. 해협 북부에 케심 ·라라크 ·호르무즈 등의 섬이 있다. 교통 ·전략상의 요해처로, 특히 세계적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쿠웨이트 등에서 생산되는 석유가 호르무즈해협을 경유하여 탱커로 전세계에 공급된다.
77그룹 [ 七七- , Group of 77 ]
국제연합(UN) 내 개발도상국들의 연합체.
1964년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CTAD) 제1회 총회가 끝날 무렵 개발도상국가 77개국이 선진국에 대한 협상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결성하였다. 원래 75개 개발도상국들의 비공식 모임이었으나 1964년 제1차 UNCTAD(유엔무역개발회의) 총회 때 한국과 베트남이 참가함으로써 77그룹이 되었다. 1967년 알제리에서 첫번째 각료회의가 있었고, 1991년 7차 각료회의는 북한(1973년 가입) 평양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2002년 현재 가입국은 133개국이다.
그룹 결성 후 무역개발회의를 통해 남북문제(南北問題) 해결에 힘썼고, 신해양법(新海洋法)·국제인권규약(國際人權規約) 제정 등 새로운 세계질서 확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개발도상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많고 적음에 따라 구분되지만, 77그룹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나 되는 산유국(産油國)에서부터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 정도인 최빈국(最貧國)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2000년 4월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는 아바나선언을 채택, 지역차원의 남남협력 증진, 국제인간질서 창설, 국제정책문제에 개도국 참여허용, 남북 동반자관계 형성, 세계연대기금 창설, 다자간 무역체제의 대책, 개도국 특별대우, 외채 탕감, UN 역할 강화 등을 촉구하였다. 2001년에는 77그룹이 후원하는 개발도상국 경제회의가 이란의 테헤란에서 열려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적 독립 강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64년에 가입한 한국은 1970년 아시아지역 대표 의장국에 선출되기도 하였고, 1992년에는 의장에 공식추대되기도 하였다. 1996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함으로써 이듬해 공식 탈퇴하였다. 본부는 미국 뉴욕에 있다.
독립국가연합 [ 獨立國家聯合 ,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
1991년 12월 31일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소멸되면서 구성공화국 중 11개국이 결성한 정치공동체.
11개국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인데, 93년 10월 그루지야가 가입함으로써 95년 현재는 12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92년 10월 연합을 탈퇴하였다가 93년 9월 복귀하였다.
독립국가연합은 91년 12월 21일 알마아타에서 출범식을 갖고, 92년 2월 14일 민스크에서 제3차 정상회담을 개최,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제르바이잔을 제외한 8개국이 통합군을 편성하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10월 9일 키르기스스탄 정상회담에서는 루블화공동은행 창설과 공동 텔레비전 ·라디오 설립 등에 합의하였다. 러시아를 비롯한 7개 가맹국은 93년 1월 22일 민스크 정상회담에서 경제유대를 강화하는 대신 군사적 ·정치적 관계는 보다 느슨한 형태를 띠도록 하는 독립국가연합 헌법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몰도바 ·투르크메니스탄 3개국은 서명을 거부하였다. 우크라이나는 연합의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연합내 주도권을 놓고 러시아와 계속 대립관계에 있었다. 12월 아슈하바트 정상회담에서는 독립국가연합 창설 2주년을 맞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본떠 가맹국간의 ‘협력 및 신뢰구축에 관한 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95년 2월 10일 알마아타 정상회담에서는 집단안보체제의 구축에 합의하는 한편, 평화 ·안정증진협정을 포함한 일련의 상호협력협정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들과 공동국경방위체제를 수립하는 문제 등에 관해서는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독립국가연합의 조직은 최고협의기구인 국가원수평의회(정상회담)와 그 산하에 총리협의체 그리고 가맹국의 해당 장관들로 구성되어 실무를 담당하는 각료위원회로 구성되어 있다. 정상회담은 연 2회 이상 개최하고, 협력체제의 효율적 확립을 위하여 6개월 임기의 순회의장제를 도입하였다. 총리협의체는 연 2회, 각료위원회는 연 4회 이상 열도록 되어 있다.
신흥공업국 [ 新興工業國 , 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 ]
중진국이라고도 한다. 한국·대만·홍콩·브라질·싱가포르·멕시코 등이 이에 속한다. 이들 국가들은 수출지향적 공업화정책 또는 수입대체 공업화정책 등을 통해 세계의 공업생산과 공산품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의 급속한 확대, 국내 공업부문의 생산·고용 비율의 증대, 1인당 국민총생산(GNP)의 높은 성장률과 대(對)선진국과의 격차를 축소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브라질과 멕시코 등은 채무위기·엄청난 인플레이션 등으로 성장이 둔화되면서 급기야는 자본축적의 동력이 쇠잔하여, 이 대열에서 탈락하였다.
니스 [ NIES ]
공업경제국 또는 그 지역.
당초에는 NICS(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닉스)라고 하였는데, 1988년 중요선진국 수뇌회의(summit meeting) 때부터 중국과 타이완 ·홍콩에 대한 배려에서 NIES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 나라는 70년대 GNP(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공업의 비율을 25∼40 %, 즉 거의 선진국에 가까운 비율로 끌어 올린 나라 또는 지역들이다. 아시아의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중남미의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이 해당된다. 이들 나라의 1인당 평균소득은 2,700 ~1만 3천 달러로, 개발도상국 평균을 훨씬 웃돌고 있다. 아시아의 경우, 저생산비로 인한 미 ·일 시장에의 수출, 중남미에서는 국내 ·인근시장을 위한 생산이 고도성장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80년대 중남미 NIES가 채무문제로 거의 정체상태였음에 비하여, 아시아 NIES는 미 ·일 다국적기업 등에 의한 기술이전, 일본의 엔고[円高], 미국의 수입경제화로 수출이 크게 신장되어, ‘태평양 트라이앵글’이라고 하는 일본―NIES―미국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의 고리를 확대하면서 고도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 NIES도 선진국의 보호주의, 미국의 시장개방요구, 국내임금의 상승, 국내기술기반의 강화 등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덧붙여 미국과 ECC(유럽공동체)는 88년 1월부터 아시아 NIES에 대한 일반특혜를 폐지하여 이들 국가에 대한 경제성장에 어려움을 더해 주고 있다. 이에 따라 아시아 NIES는 구 소련권, 동구, 중국 등으로의 투자 ·무역 등 경제 다각화 움직임을 강화하고 아시아 지역에 여러 국지적 경제권 형성에 힘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