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상반기 시에티카18호 양효숙 수필>
꿈꾸는 조랑말
인디언 이름을 듣는 순간 요즘 말로 심쿵했다. 가슴 뛰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때에 잠재된 반응이 감지됐다. 인디언식 이름이 불러들이는 낯섦이 미묘한 감정을 자극했다. 구체적이면서도 상상의 여지가 있는 이름이다. 뭔가를 추구하며 종종걸음 걷는 내 모습이 한 마리 조랑말로 보인다니 재밌다. 그냥 조랑말이 아닌 꿈꾸는 조랑말이다.
한 집에 사는 남자 둘도 그냥 조랑말이 아닌 꿈꾸는 조랑말이다. 20년 다니던 직장에 무급임에도 휴직을 하고 사춘기 아들은 바둑만 둔다. 노량진을 거쳐 공무원이 됐어도 자기가 원하던 삶이 따로 있다고 집 앞 도서관으로 향한다. 급식이 나오지 않는 방학에도 학교도서관으로 출근하는 아내와 공부하러 가는 남편의 모습이 하나로 보인다.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하도록 남편의 배려가 있었으니 1년쯤 남편의 보호자 겸 가장으로 살아도 좋겠다.
낯선 사람이나 새로운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즐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면서 결정 장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8년 가까이 근무한 곳에서 전보를 가야하는데 올 것이 왔구나 받아들인다. 익숙한 곳을 좋아하거나 안주하는 걸 선호하면 나이 들었다는 신호라고 도전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비춰주는 게 어디 거울 뿐일까. 서로의 거울이 돼 주는 관계도 나쁘지 않다. 단순히 외모와 외피를 보여주는 거울 속 모습보다는 꿈꾸는 모습이 보고 싶다. 사람만 꿈꾸는 존재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사물과 대상을 접하고 접근하니 새롭다. 사물에 대한 은유와 대상에 대한 의인화가 불러오는 경이로움은 선물과도 같다.
사람은 본능처럼 응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고 보내주는 사람이나 꿈꾸던 어떤 공간에서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내려간 자존감을 회복하려 애쓰던 흔적들이 내 몸 어딘가에 남아 층을 이뤘으리라 생각하면서 몸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도 한다.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스무 살의 나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했다고 소리치며 첫 상경했다. 큰 소리쳤어도 막상 서울역에 내려선 겁먹었던 내 모습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늘 어떻게 살까로 고민한다. 때론 발목 잡고 잡히면서 자유를 갈망하는 나날이다.
쉰 살의 내가 지난여름, 전국에서 올라온 학교비정규직들과 뙤약볕에 나앉아 처우개선을 위한 대규모 집회로 서울역에 모였다. 내 몫의 투쟁 목소리가 아직도 공중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스무 살의 나와 쉰 살의 내가 치고 빠지며 밀착된다. 막막한 현실이 겁나고 불안해서 떨었던 스무 살의 나를 쉰 살의 내가 위로한다. 막연하게라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던 오십대가 생각보다 행복하냐고 물었다. 아직도 소심한 면이 있지만 주저앉지 않고 나아가는 근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속삭이며 웃는다.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서울역이라는 곳을 찾기보다는 생계와 생활을 찾아가기 위한 공간으로 서울역은 거듭났다. 이정표와 목적지도 없이 헤매는 이들도 있고 방향감각을 잃지 않고 제 시간에 떠나는 이들도 있다. 이따금씩 경기 남부와 북부 학교사서들이 중간 지점인 서울역에 모여 회의를 한다. 서울역은 종로나 대학로와 함께 치고 빠지기 좋은 장소다.
대학진학을 바로 하지 않고 돌아가길 잘했다. 필요에 의해 대학을 선택한 게 유익이다. 개인치과의원에서 간호조무사로 십 오년을 지내며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잘 하는 일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출산예정일 전날까지 이가는 소리를 들으며 치열하게 보냈던 그 치과도 간판을 내리고 권투장으로 바뀌었다. 명문대 나와 여자치과의사로 팔십까지 일했던 원장님 안부를 가끔 듣는데 예쁜 치매란다. 잘 살던 한 시절로 돌아가 환하게 웃으며 같은 얘기를 반복하며 사는 노년이다. 핸드피스 들고 환자들 입안 들여다보기가 끝나면 호미 자루 들고 텃밭 일구길 즐겼던 분이다. 치과의사가 아닌 수학자의 길을 가고 싶었는데 치과가 밥을 먹여줬다고 허허롭게 웃고 있을 것이다. 정작 당신 입 안엔 그 흔한 의치를 해 넣지도 않았다.
사람마다 다르게 찾아오는 전성기가 어느 순간 정성기로 들린다. 전성기는 정성기를 품어야 가능하다. 정성들이는 시간이 있어야 뭔가 이뤄진다. 우연히 찾아오는 좋은 일들이 결코 우연 아닌 필연이란 걸 안다. 온갖 정성이 누적돼 어느 시기에 터져 나온다. 괴테는 팔십이 넘어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칠순인 엄마와 팔순인 아버지 모습 안에서 비춰지는 내 모습도 발견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듯이 뭔가 다르게 살고 싶다.
이세돌 사진으로 자기 방을 도배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사춘기 아들이다. 바둑에 문외한인데도 아들이 좋아하는 일을 보니 바둑알과 바둑판이 다르게 보인다. 보도블록도 바둑판으로 보이냐고 가끔 되물으며 말 걸기 할 뿐이다.
또다시 꿈꾸라는 주문에 아낌없이 걸려든다. 이제는 팔순이 된 나를 만나러간다. 이십 대처럼 삼십 년 후가 그렇게 막연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구체적인 꿈꾸기가 가능해진 탓이다. 세계적인 대가들의 전성기가 노년에 있는 경우를 보며 전성기 3기에 다다를 내 자신을 만난다는 자체가 설렌다.
가슴이 떨릴 때 놀아야지 다리가 떨리면 아무리 시간과 돈, 친구가 많아도 소용없다는 국제구호전문가 한비야 말처럼 가슴 떨리는 순간에 정성을 들인다. 사람의 뇌가 전혀 새로운 일을 할 때 가장 잘 돌아간다는 말에 씨익 웃음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