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북정맥 제 12 구간 산행기
(하고개 ~ 한티고개)
1. 산행일자 : 2007년 11월 4일(일요일)
2. 산 행 지 : 덕숭산(495m) - 충남 예산
3. 날 씨 : 맑음
4. 참 석 자 : 강영재, 김미환, 박봉하, 박상호외, 안상경, 이용준, 이정연,장현옥(8명)
5. 산행계획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총산행 약 13.2km, 7시간 20분 정도
[2] 구간별 거리
하고개(90m)--1.4km--살포쟁이재(170m)--1.3km--일월산(393.6m)--1.7km--까치고개(280m)--3.4km--홍동산(308.9m)--2.5km--수덕고개(120m)--1.3km--덕숭산(485m)--1.6km--나본들고개(160m)--1.0km--뒷산(447.6)--0.7km--한티고개
[3] 소요시간
① 수원(04:00) ∼ 서해안고속 ∼ 서산휴게소(05:20/아침/05:50) ∼ 홍성IC ∼ 하고개 (06:20)
② 하고개/해태상(06:30) → 131.7봉 삼각점(06:55) → 살포쟁이고개(07:20) → 헬기 장(08:00) → 일월산(08:15) → 까치고개(09:00) → 쓰레기매립장(09:05) → 낙상 리안부(09:43) → 홍동산(10:15/점심/10:55) → 용봉산분기점(11:20) → 수덕고개/ 육괴정(12:05) → 덕숭산(13:00) → 나본들고개(13:50)
③ 나본들고개, 45번국도(14:30) ∼ 홍성IC ∼ 서해안고속도로 ∼ 수원(17:00)
■ 탈출로 :
6. 산행의 실제(산악대장 제공)
① 일정 및 소요시간 : 총산행 약 14.9km, 7시간 46분 정도
② 수원(04:25) ∼ 서해안고속 ∼ 홍성IC(05:45) ∼ 홍성(06:10/아침/06:45) ∼ 하고개(06:55)
③ 하고개(07:00)→살포쟁이고개(07:25)→헬기장(07:45)→백월산(일월산, 07:56/08:15)→까치고개(08:49/08:55)→쓰레기매립장(08:57)→홍동산(10:04/10:23) → 수덕고개/육괴정(11:02/점심/11:50)→덕숭산(12:32/12:57)→나분들고개(13:34)→뒷산(14:17) → 한티고개(14:38) → 대일석산(14:46)
④ 대곡리 대일석산(15:00) ∼ 덕산 ∼ 합덕 ∼ 삽교 ∼ 향남(16:30/저녁/17:55) → 수원(19:00)
■ 탈출로 및 편의사항 : 택시(041-634-7562), 수덕고개식당(041-337-5592)
7. 산 행 기
[1] 산 행 전
10월 29일 금북정맥 12구간 산행 계획이 한배산악회 카페에 올랐다. 晩秋가 바로 문턱을 넘어가는 때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가로수가 온통 오색 천으로 휘장을 둘러놓은 듯 했는데 가로수 아래로 낙엽이 수북이 쌓이고 상단부로 나뭇가지가 앙상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도 11월 초순이라 금북정맥 12구간을 산행하는 동안 가을의 색 잔치를 흠뻑 누려볼 수 있을 것이고 산악회 회원들의 모습도 오랜만에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빨리 산행일이 오기를 기다린다.
금요일 카페를 방문해 보니 빠짐없이 참여하던 윤사장, 아직 감기가 완쾌되지 않았는지 참여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김명자, 노승애 부장도 소식이 없다. 대신 강영재부장과 김미환 사장이 산행을 하겠다하고 안상경교장선생님은 가장 늦게 이름을 올렸다. 이번에도 결국 7, 8명 수준을 넘지 못한 산행이 되는 것 같다. 이번 구간도 지난 산행 때와 같이 7시간 전후 산행인데도 생활의 짬을 내기 어려운 모양이다.
[2] 『하고개』 가는 길
03 : 00시 기상, 준비해 둔 물품을 배낭에 챙겨 넣고 있는데 박사장 전화(03 : 30분경), 집 앞으로 차를 운행하여 오겠다고 한다. 매 산행 때마다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했지만 그래도 반갑고 고맙다.
03 : 40분, 승차. 윤사장은 끝내 가지 못하는지 보이 않는다. 한일아파트 아주머니(이정연)도 함께 간다하여 한일 아파트로 이동하여 동승하고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으로 이동했다.
04 : 00시, 장부장만 보이지 않는다. 좀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04 : 20분경, 장부장 도착. 바로 출발이다.
05 : 40분경, 잠시 눈을 붙였다 했는데 산악대장이 어디론가 열심히 전화를 하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급히 떠 보니 사방이 어둡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물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잠시 후 큰 산을 절개한 채석장에 도착, 모두 내리라고 한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 『한티고개』에 도착을 한 모양이다.
곧 이어 택시 두 대 도착, 네 명씩 분승하여 약 1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이 『洪州城 朝陽門』 앞이다.
『朝陽門』洪州城의 東門이며 홍성군의 관문으로 고종조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는데 대원군이 친필로 하사 하였으며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이었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하였는데 동학운동(1894)때는 수백 명의 동학군이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고종 광무 10년(1906)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모습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홍성NGT, 내포 녹색체험 홍성
조양문 바로 앞에 있는 「원 광명식당(☎ 632-4320)」에 들려 ‘우거지 갈비탕’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택시로 홍성군청과 홍주성을 지나 오늘 산행의 출발지『하고개』로 이동을 했다.
[3] 『하고개』에 있는 『홍성 민속테마박물관』
06 : 50, 『하고개』에 있는 『홍성 민속테마박물관』앞에 도착했다.
홍성 민속박물관(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85-2번지, ☎ 041)632-4660 , 633-4660, 박물관장 : 소정식)은 「충절의 고장 홍성에 많은 선열들의 유적과 잊혀져 사는 선조들의 슬기롭던 생활 풍습의 전통문화를 깨우쳐 우리 문화의 원형을 후손들에게 전승 시키고자 박물관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998년 소정식(51세, 관광버스를 운전)씨가 수십 년간 취미로 수집한 지레, 물레, 절구, 농기 두 등 400종 1,600여 점을 지상 2층 80여 평 민속 박물관에 전시를 해 놓고 있다. 제 1전시실은 민속관, 제 2전시실은 농경유물관, 제 3전시실은 의식주생활유물관, 제 4전시실은 삼베, 모시 체험공방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밖에 야외전시장은 장승과 솟대 민속놀이 마당과 노을 전통음식점이 준비되어 있는데 「KBS1 TV 6시내고향」방영이 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마당에 왔으면서도 너무 이른 시간이라 전시실 내부를 둘러볼 念을 내지 못하고 산행 길을 재촉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 산행 들머리 「홍주병오위병주둔유지비(洪州丙午義兵駐屯遺址碑)」
06 : 55, 민속박물관에서 출발하여 옛 국도를 따라 약 10여m를 내려가니 오늘 산행의 들머리가 나타난다. 초입에는 「홍주병오위병주둔유지비(洪州丙午義兵駐屯遺址碑)」가 있다.
이 기념비(소재지 :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는 홍성 보훈지청에서 홍주 의병들이 홍주성 공격을 앞두고 집결하여 주둔했던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1986년 11월 14일 홍성군에서 건립을 했다.
홍주 의병은 1906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 된 다음해에 일어났으며 의병들은 홍산, 서천, 남포, 보령을 거쳐 광천에 이르러 대부대가 되었고 이 본진 부대는 구항 마온리를 지나 신당골을 거쳐 하우고개에 당도하였으며 또 다른 부대는 천북, 걸성, 서부에서 궐기하여 서산도로로 우회해서 역시 하우고개에서 본진 부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홍주성 공격을 알리는 진군나팔이 울려 퍼지자 丙午 義兵의 거사가 시작되었으며 이곳은 서호지방 의병들의 첫 주둔지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다.
[5] 살포쟁이 고개
들머리 산길로 올라붙어 약 7분여 진행, 갈림길을 지나고 다시 5분여를 가니 작은봉(136.2봉)이 나타난다. 집을 떠날 때 온 산이 紅과 黃이 어우러져 가을 산색을 滿喫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미 길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발에 밟혀 아삭아삭 바스라-지는 낙엽이 장단을 맞추며 가락을 만들어 낸다.
68번 송전탑, 밤나무 단지를 지나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니(07 : 35분경) 자갈길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길 건너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당산나무)가 있고 그 아래로 돌무더기도 있다. 『살포쟁이 고개』에 도착한 것 같다.
『살포쟁이 고개』는 홍성읍 월산리(홍성군 구항면 황곡리)에 있는 고개로 옛날에는 이 고개에서 죄인 또는 가축을 죽였던 고개라 『살포쟁이고개 또는 살포티』라 부른다고 한다. 숲도 우거지고 인적도 드물었을 당시를 생각하니 어쩐지 고개를 지나는 것이 으스스해 진다.
[6] 운무에 덮인 홍성시가
쉼 없이 도로를 가로질러 2분여를 진행(07 : 37분)하니 安東張氏 묘나 나오고 급한 오름 길로 이어진다. 싸늘한 늦가을 아침인데도 이마에 땀도 맺히기 시작한다. 모처럼 산다운 산에 오르는 것 같다.
07 : 40, 능선마루로 잠시 올라붙었다 안부로 내려서고 다시 급한 오름 길로 이어지며 작고 큰 바위가 연이어 나타난다. 돌아보니 雲霧에 덮인 홍성 시가지도 한눈에 보인다. 마치「마법의 성」같다. 우뚝우뚝 솟은 건물들 사이로 운무가 서서히 피어오르다 가라앉고 다시 피어오르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현상이 영화에서 마법사가 큰 가마솥에 마법의 약재를 넣고 서서히 끓일 때 올라오는 수증기 같다. 어쩌면 도시 전체를 덮고 있는 운무 속에 알 수 없는 마법이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7-1] 백월산(白月山) 정상
모처럼 대하는 오름 길이라 숨도 차고 이마의 땀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07 : 46, 바위지대를 힘들게 올랐다. 지도상에 표기된 『주암?』인가? 운무에 덮인 홍성시가지가 더욱 뚜렷이 보인다.
07 : 53, 「구항면사무소 2.2km<---○--->정상 0.4km』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서 백월산 정상(우측)으로 진행하니 바로 헬기장이 나오고 3분여를 더 진행하지 시멘트 포장 도로(백월산정상 가는 길)가 나오는데 이곳에도 「구항면사무소 2.1km <---○---> 정상0.3km」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시멘트 포장길을 잠시 따르다 포장길을 벗어나 우측으로 계단 급경사를 약 5분여 오르니 『白月山』 정상이다.
08 : 03, 백월산 정상에 올랐다. 먼저 오른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정상에는 烽火臺 같은 돌탑이 세워져 있고 塔 상단부에는 산불 감시 카메라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으며 塔 둘레로 철망을 쳐 일반인들이 출입을 할 수 없도록 막아 놓았다. 그리고 塔 앞에는 일월산 정상석을 설치해 두었는데 해발 394.3m라 표시되 있다.
힘들게 오른 봉이라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펴보니 사방이 툭 터져 원근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월산 중간 바위 봉에서 본 운무로 덮인 홍성 시가지며 산 아래로 들 가운데 파란 하늘이 비친 저수지, 가을걷이가 진행 중인 들판, 더 멀리로 바다 물길이 보이고 몸을 조금 돌려 진행 방향을 보니 아침에 차를 주차해 둔 한티고개 채석장, 그 뒤로 우뚝 솟은 가야산 정상의 통신 시설물도 확연히 보인다. 다시 몸을 돌려 우측(홍성시 방향)을 보니 용봉산 岩峰이 건너뛰면 닿을 듯 지척에 있다. 해발 400m 남짓한 산봉에서 주변 경관을 이토록 선명히 즐길 수 있는 곳도 그리 흔하지 않을 것 같다.
『白月山, 394.3m』은 일명 『월산, 일월산』이라고 하는데 홍성읍에서 서쪽으로 약 4㎞떨어진 곳에 위치(충남 홍성군 홍성읍 구항면 오봉리, 홍북면 중계리)한 홍성의 진산이다. 산정에 오르면 서해가 눈앞에 펼쳐지고 동편으로는 멀리 합덕평야와 봉수산을 지척에서 보는 듯 바라볼 수 있으며 홍성읍을 품안에 품듯이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백월산이라는 이름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산혜암」과 유래가 깊은데, 「산혜암」의 원래 이름은 「월산사」였다. 이 「산혜암」은 천백여년전인 신라 문성왕 때 무염선사가 창건 했다고 전해진다. 무염선사의 법호가 백월보광이었는데 이 호를 따서 백월사라 칭했다고 하며 이와 함께 산 이름도 「월산, 백월산, 일월산」 등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월산』 정상은 祭天 文化의 중심지로 天祭와 山祭를 지내는 祈禱의 道場(도량 : 보리도량의 준말, 佛道를 닦는 곳)이다. 특히 백월산은 神의 靈氣가 영험하다 하여 國泰民安과 安家太平, 所願成就를 구하는 인파들이 제주도, 강원도, 경기도, 부산, 서울 등지에서 몰려든다고 하며 전국에서 제일로 높은 기도터라고 한다.
[7-2] 白月山 山神閣
백월산 정상에서 10여 분 眺望과 休息을 취하고 계단을 따라 내려와 보니 계단 바로 앞에 집채같이 큰 바위 하나가 버티고 있는데 「코끼리 바위」라고 한다. 코끼리 바위를 지나니 넓은 공터가 나오고 산림 단속 순찰대 초소도 세워져 있다.
08 : 16, 공터를 지나 잠깐 오르니 「백월산 산신각」이 있다.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출입문(푸른색 아크릴 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내부를 살펴보니 산신령 영정이 벽에 붙여 있고 그 앞에 5기의 목각 신령을 모셔져 있으며 몇 개의 위패도 단 위에 놓여 있다. 이 산신각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운「홍가신」등의 위패를 모신 산신각이라고 한다.
이몽학(李夢鶴)이란 자는 서울의 천한 서얼인데, 몹시 방자하고 건방져서 그의 아비에게 내쫓기었다. 호서와 호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한현(韓絢)이 선봉장이 되자 그의 군대에 예속되어 한현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선조 29년 7월에 이몽학이 먼저 홍산(鴻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고을의 수령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 또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진국(朴振國)을 사로잡으니, 인심이 무너지고 흩어져서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잇따라 6ㆍ7개의 고을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한현은 일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호응하지 않았다.
이몽학이 진군하여 홍주(洪州)를 핍박하니, 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일이 뜻밖에 일어났으므로 손을 써볼 계책이 없이 다만 성문을 닫을 뿐이었다. 도원수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이 마침 왔다가 격문(檄文)을 보내어 수사 최호(崔湖)를 불렀다. 최호가 군대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오니,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무장 박명현(朴命賢)은 날래고 꾀가 있는 사람인데, 상주노릇을 하느라고 고을 안에 있었다. 홍가신이 부르자, 박명현은 즉시 융복(戎服)을 갖추고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성의 수비는 더욱 견고하게 되었다.
이몽학이 처음 군사를 일으킬 때에 그의 무리들에게 속여 말하기를,
“김덕령(金德齡)이 나와 약속이 있고, 도원수ㆍ병사ㆍ수사도 다 내통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호응할 것이다.” 하여, 여러 무리들이 그렇게 여겼는데, 홍주에 군사를 내어 주둔하게 되었을 때, 여러 무리들은 수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속였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군사의 사기가 떨어져서 밤중도 안 되어 반군(叛軍)은 무너지고 말았다.
윤영현이 뛰어나와 성 아래에 이르러 부르짖기를, “적병이 무너져 흩어졌으니 나와서 뒤쫓아 치소서.” 하였으나, 성중에서는 믿지 않고 명하여 윤영현을 묶어서 잡아 오게 하였다. 그러나 새벽이 되어서 살펴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중은 비로소 후회하고 군사를 내보내어 추격해서 많은 포로와 수급(首級)을 얻었다. 그의 부하 임억명(林億明)이란 자가 이몽학의 머리를 베어 바치었다. 한현도 일이 발각되어 베임을 당하였다.
<출처> 대동야승/자해필담] 아하! 사회문화 미디어
http://blog.naver.com/lemon_wangza/20020765975
08 : 20, 白月山 告天 祭壇과 팔각정을 지나니 또 하나의 이정표(백월산 정상, 0.3km<---○--->월산리 1.3km)가 세워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이라 곳곳에 이정표를 세워둔 것 같다.
[8] 까치고개
08 : 37, 백월산 내림 길, 백월산 정상을 오를 때 가파른 오름 길이었는데 내림 길도 만만치 않다. 발끝에 힘을 주며 내려오다 보니 삼거리가 나타난다. 산악대장은 앞서 멀리 갔고 마루금 표시기도 눈에 띄지 않아 잠시 길을 잃고 헤매다 간신히 길을 찾아 좀 더 아래로 내려서니 소나무 숲 속으로 완만한 능선 길이 이어진다.
08 : 50, 폐 교회, 기우러진 종탑 앞을 지나가니 개 짓는 소리가 요란하다.
08 : 54, 2차선 포장도로가 나타나고 고개 마루에 「고개 쉼터」음식점 간판과 홍성군 환경 사업소(쓰레기 위생 매립장) 표지판, 홍성군 홍북면 표지판, 홍천마을 표지석 등이 있는 『까치고개』에 도착했다.
까치고개는 예산군 덕산면, 홍성 구항면과 홍북면 樂上里에서 홍주로 통한 고개로 작현(鵲峴)이라고도 한다.
까치고개 포장길을 가로질러 직진으로 100여 m를 진행하니 쓰레기 매립장이 나오고 매립장 철망 길을 따라 진행하다보니 앞서가던 강영재부장, 가지버섯을 채취했다면서 비닐봉지를 들어 보인다. 구릉 습한 곳이다. 낙엽에 묻힌 가지버섯이 여기저기 보인다. 見物生心이라 그냥 두고 가기 아까워 가던 길을 멈추고 버섯을 따 모으니 금방 한 봉지다. 산행 후 뒤풀이 때 안주는 장만한 샘이다.
[9] 산불 지역
매립장 철망 울타리를 지나면서 숲속 평지 길로 이어진다. 걸음도 빨라진다. 09 : 38, 안부 4거리를 지나면서 울창하던 송림은 사라지고 枯死木과 싸리나무가 온 산을 차지하고 있는 산불지역이 나타난다. 쓰러진 나무는 수시로 길을 막고 말뚝을 박아 놓은 것처럼 검게 탄 나무들의 산 전체를 덮고 있는 것이 너무 황량해 보인다. 불탄 나무를 빨리 잘라내고 조림을 했으면 싶다. 아니면 산불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를 교육시키는 산불 예방 체험 장으로 활용해도 좋겠고 ---. 백월산 정상에 산불 감시 카메라와 초소를 설치한 이유가 이해가 된다.
[10] 홍동산(弘東山)
09 : 57, 무겁고 씁쓸한 마음으로 능선 마루에 올라서니 소나무 숲길이 나타난다. 무겁던 마음을 달래며 가파른 오름길을 쉬엄쉬엄 올라가니 산마루 능선 정상(10 : 05분경)이 나타난다. 작은 아크릴 판에 『홍동산』라 쓴 팻말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
홍성 홍북면과 예산 덕산면의 경계에 있는 홍동산(弘東山, 308.9m)은 내포권 금북정맥의 기준이 되는데 이는 보령과 홍성 일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야트막한 丘陵地帶가 끝나는 지점이자 덕숭산(495m), 가야산(698m), 일락산(521m) 등의 웅장한 산줄기가 시작되는 지점에 솟아 있기 때문이다. 동쪽의 넓은 산이란 뜻의 홍동산도 개발의 손길에선 온전하지 못해 동쪽 산자락으로 석산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동쪽으로는 용봉산(381)이, 북쪽으로 덕숭산이 보인다.
<출처> 대전 충남 생명의 숲, 「언론 보도」중에서
백월산에 이어 또 한 번 힘든 오름이라 팽개치듯 배낭을 내리고 휴식을 취한다. 휴식도 잠시, 홍동산 정상 출발, 급한 내림 길로 이어진다.
10 : 50, 능선 마루 도착, 직진하다보니 마루금 표시기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되돌아 나와 보니 우측으로 희미한 길이 나 있고 표시기도 달려 있다. 『용봉산』분기지점이 되는 것 같다. 우측으로 가닥을 잡아 약 5분여를 진행하니 묘 2기가 나타난다.
11 : 00, 임도 ---> 墓地群 ---> 묘 ---> 내림 길 ---> 포장도로
[11] 육괴정(六槐亭)
11 : 05, 『六槐亭』이라 命名 되는 食堂街에 도착했다. 『六槐亭』이란, 40번 도로변 고개에 자라고 있는 6그루의 큰 느티나무를 말한다. 4그루는 1-2m 거리를 두고 4각을 이루고 서 있고, 두 그루는 10여m를 두고 식당 바로 앞에 서 있다.
이곳을 『수덕고개』라고도 하는데 『수덕사』로 넘어가는 고개라 붙여진 이름이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을 이고 선선한 바람을 쏘이며 오전 산행을 마친 것이 너무 가분하다.
점심 식사는 『수덕고개 식당』에 마려해 두었다고 한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 보니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점심상이 차려져 있다. 더덕정식으로 10가지 이상의 찬(더덕구이, 도토리묵 무침, 도토리 전, 버섯볶음, 게장, 된장찌개, 조기 구이, 나물 무침 등) 상위에 즐비하게 차려져 있다. 이른 아침부터 산행을 했기 때문에 시장기를 느끼던 참이라 하나같이 입맛이 당긴다. 반주 한잔이 그리웠지만 오후 산행 때문에 마음을 접고 --- 반 공기 먹던 밥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 공기를 먹어 치웠다. 더하여 주인장의 서비스와 친절도 그저 그만이고 --- 이정도 점심상이 마련되면 매일이라도 산행에 참여할 것 같다.
<수덕고개식당>
○ 산채정식 전문 식당
○ MBC / SBS 방영
○ 충남 예산군 덕산면 둔리 545번지(수덕고개) / ☎ 041-337-5592, HP 016-898-5592 / WWW.수덕고개.com
○ 대표 : 이 정 자
배가 고프던 참에 급하게 많이 먹었는지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지 않는다. 자판기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식당문을 나서니 그새 오후 산행을 위해 신발 끈을 졸라매고 있다. 참 급하기도 하다.
[12] 덕숭산(德崇山)
오후 산행의 첫 고비이자 오늘 산행 중 가장 힘들게 올라야할 산인 『덕숭산』이 바로 앞에 있다. 식사 후 바로 올라야할 큰 산이라 제대로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차령산맥이 서해로 달려가다가 마지막쯤에 기운을 모아 힘껏 솟구친 산이 『덕숭산(德崇山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이다. 해발 495m로 작고 아담하지만 두리뭉실한 인근 산과는 달리 힘찬 산세를 지니고 있다. 울창한 숲 뒤로 사람 두개골이나 노적가리, 사나운 짐승의 입 벌린 형상 등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줄지어 서 있고, 정상에 오르면 안면도와 서해가 한 폭의 그림처럼 한 눈에 쏘옥 들어온다. 이렇듯 경관이 빼어나 예로부터 호서의 금강산으로 불린다.
이 산의 자랑거리는 산의 남쪽에 자리 잡은 수덕사이다. 1308년(고려 충렬왕 34년)에 창건된 사찰로, 경내의 대웅전(국보 49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손꼽힌다. 마치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기와지붕과 불룩한 배흘림기둥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이 절 뒤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보면 정혜사와 견성암 등의 암자를 만나는데, 옛날 경허와 만공 등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덕을 숭상한다는 산의 의미가 느껴진다. 산의 북쪽 능선은 가야산(678m)으로 이어진다. 두 산은 주변에 많은 문화유적과 아름다운 경치를 담고 있어 1973년 3월 6일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德崇山』을 중심으로 덕산온천과 윤봉길 의사 사당 충의사, 천주교인들의 성지 해미읍성, 추사 김정희 고택 등이 가까이 자리하고 있어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출처:엔싸이버 한국산>
12 : 00, 출발, 식사 후 바로 오르는 산이라 최대한 걸음걸이를 더디 하며 산비탈로 올라붙는다. 6, 7분 후 바위지대가 나온다. 산행다운 산행을 하는 것 같다. 이마에도 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12 : 20, 두 번째 능선 마루에 올라 가쁜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시 휴식을 가졌다. 산 아래로 저수지(우)도 보이고 용봉산도 지척에 있다.
12 : 38, 119 신고처(덕숭 01-108 지점) 표지목을 세워 둔 삼거리에 도착했다. 좌측은 수덕사로 내려가는 가는 길이고 우측이 덕숭산 오름 길이다. 삼거리를 지나 1분여를 올라가니 타조 알 같이 생긴 큰 바위가 나오고 산 정상쯤에서 여러 사람의 함성소리가 들린다.
12 : 45, 덕숭산 정상에 올랐다. 많은 인파가 정상을 차지하고 한 사람의 지시에 따라 손을 높이 들고 함성을 지르고 그 모습을 촬영을 하고 있다. 촬영이 끝나자 우리 대원도 덕숭산 정상석(495.2m)을 중심으로 기념 촬영을 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는데 카메라를 드밀며 덕숭산에 오른 소감을 한마디씩 해 달라며 인터뷰를 요청한다. 대전 MBC 방송국에서 가을 산의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 나왔다고 한다. 오늘 같은 날 윤사장님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다. 강영재, 김미환, 산악대장만 인터뷰에 응하고 나머지는 자리로 되돌아 와 휴식을 가졌다. 목요일(11월 8일) 5시 30분에 방영이 된다고 한다.
[13] 나분들 고개
13 : 00, 촬영으로 덕숭산에서의 조망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븐돌 고개로 출발했다. 다른 산들과 마찬가지로 급경사 내림 길이다.
13 : 30, 45번 국도가 지나가는 『나분들 고개』에 도착했다. 『나분들』은 예산군 덕산면 廣川里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넓은 들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14] 뒷산 오름 길
13 : 33, 45번국도 굴다리를 통과하여 「고려 한식 뷰페」 좌측 절계지로 능선으로 올라붙었다. 宅地 造成地를 지나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타난다. 고려 한식 뷰폐 쪽에서 마을로 오르는 길이다. 농로 삼거리, 좌측으로 진행하다보니 멋진 한옥 전원주택이 있고 대나무 밭이 나온다. 다시 묘 1기를 지나고(13 : 55분경)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면서 급한 오름길로 이어진다.
14 : 00, 산 중턱, 경주 李씨 묘 3기, 급경사 오름 길이 계속 이어지는데 산 끝자락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14 : 20, 산 정상 직전 휴식을 취하며 가쁜 숨을 가다듬고 다시 출발
14 : 20분, 힘들게 산 정상 능선에 도착했다. 『갈산』지맥 표찰이 있어 『갈산』으로 알았는데 산악대장, 『뒷산(449m)』이라고 일러준다. 이제부터는 계속 내림 길로 약 20여분만 내려가면 아침에 차를 주차시켜 둔 『한티고개』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15] 순교자들의 압송로 『한티고개』
14 : 35, 넓은 공터에 간이 정자와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는 『한티고개』에 도착했다.
공터 주변에는
○ 해미성지 제 1 처 표지석 :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합시다.
○ 해미성지 제 2 처 표지석 :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합시다.」
라는 기도문과 순교자들의 모습을 그린 원반 형태의 표지석이 있고 해미성지 표지판도 세워져 있다.
『한티고개』는 덕산면 대치리. 한티골 서쪽에 있는 큰 고개로 『대티』라고도 하며, 가야산과 삼준산 사이가 된다.
「한국의 성지」에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군 해미면을 가르는 가야산의 끝자락에 자라잡은 한티고개는 교우들이 무리지어 살던 면천의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 집단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이다. 한티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개 마루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 보던 곳에는 주막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이름 없는 수많은 신자들이 포졸들에 이끌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순교의 마지막 길을 떠났을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 진다.”라며 『한티 고개』를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라 명명 했다.
그리고 1999. 10. 24 천주교 대전교구 서산 석림교회 장년회 일동이 세운 『순교자 압송 길 십자가의 길 안내문』에도 「이곳 한티고개는 1970년부터 1880년까지 내포지방에서 주님을 배교하기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택한 3,000여 무명 순교자들이 매질과 압박 속에서도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넘던 고개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분들의 순교정신을 기억하고 한티고개의 성지화를 기원하면서 이 십자가의 길을 만들고 세웠습니다.」라고 안내를 해 놓았다.
불교가 이 땅에 들어 올 때(신라 법흥왕)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듯이 3,000여 무명 순교자이 있어 이 땅에 천주교가 전파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어쩌면 이 『한티고개』는 우리나라 서양의 문물이 유입되던 당시의 단면을 보여주는 곳(近代史의 震源地)가 아닌가 싶다.
14 : 40, 『한티고개』 마루 채석장(대일석산) 앞에 도착을 했다. 산이 절벽 같이 뚝 잘려 속살을 드러낸 흉물스런 채석장 절개지를 대하는 안타까움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했다.
2008. 11. 11
****** <참고자료> **********************************
<참고자료 1> 홍주성
위 치 :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98번지 일원
문화재 정보 : 사적 231호
충청남도 서북부에 자리한 홍성군의 해안선에 연접한 서해의 관문이요, 도성(都城)의 인후(咽喉)로, 예부터 국방의 요새일 뿐 아니라, 태안반도에 있는 안흥항(安興港)의 해로를 통하여 멀리 중국을 왕래하던 요지로, 서부 일대의 교통중심지이다. 백제가 웅주(熊州)와 부여에 정도하였을 때는 물론이고, 신라, 고려 및 조선에 이르는 동안 홍주성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산성들이 있었고, 인접한 해미에 지각성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처음 홍주성곽을 쌓은 기록은 없고, 다만 최초로 성의 주위가 1,300척의 토성으로 성첩이 400에 불과하였다는 기록만 존재하며.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백월산 중복에 해풍현 고을이 있었는데, 현재의 위치로 고을을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에 성을 축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그후, 순조(純祖:1800~1834)때에 한계수가 수성하였다는데, 그 당시 홍주목사였던 이헌규와 영장 김계묵이 방백들과 의논하고 순조 23년(1822) 8월에 성을 2,350척으로 확장ㆍ보수하였다. 고종 7년 경오(庚午, 1870)에 홍주목사 한응필이 연봉금 3천냥, 원납금 및 지세부과금을 합쳐, 석성으로 개축하기 위하여, 남포에서 30명, 보령에서 20명, 온양에서 15명, 서산, 태안, 해미, 결성, 덕산, 청양, 비인 등지에서 각각 석공 10명씩을 동원하여 기존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하여 석축하는 동시에 650개의 첩(堞), 130개의 치(雉), 2개의 곡성, 천(泉) 4개소, 지(池)등을 설치했다.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서편 수문에서 동편 수문을 걸쳐 금마천으로 흘러가게 하고, 동서북 세 곳에 문을 다시 세원사. 남문은 홍예문으로 세웠고 경오(庚午, 1870)년 2월27일 준공한 다음 조정에 보고하였다. 동년 10월 15일에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門額)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 이라고 각각 명명하였다. 그런데, 남문은 문루(門樓)가 없고, 그 외에는 모두 문루가 있으며 조양문의 문비(門扉)는 철판이었고, 서북 남문의 문비는 판목(板木)이었다.
○ 홍주아문
문화재 정보 : 사적 231호
외삼문이라고도 하며 아해건물로서 안회당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조 목조건물이다. 한식 와가(瓦家)로 12평 9홉의 아담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870년 한응필 목사가 5칸을 수리 보수했다. 대원군이 사액한 홍주아문의 글씨는 6ㆍ25 전후해서 망실되었다. 현존한 홍주아문 글씨는 누구의 글씨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홍주아문은 그동안 여러 차례 보수한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문화재관리국이 문화재 231호 홍주성지와 같이 지정하였다. 그후, 이상선 군수에 의해 보수되고 출입을 개방하고 있다.
○ 여하정
여하정은 안회당 뒤뜰과 연접한 소당(小塘) 뒤에 있는 목조와즙의 6각형으로 된 수상정(水上亭)이다. 규모는 3평5합5작에 불과하나, 옛 못을 연련하여 누운 고목은 고색이 창연하고, 수면을 장식한 연화는 청홍이 색색인데, 수천의 금잉어들은 정동을 겸비한 동동화의 화폭이다. 옛 청수정자리에 1896년(고종33년) 이승우 목사가 여하정을 신축한 이래 역대 목사들이 하루의 청유를 즐겼던 곳이다. 이승우 목사가 정자를 짓고 ‘여하정‘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이 글씨는 필서가 김병수가 썼다. 결성현이 폐현되자 현청에 있던 ’빙심헌‘이란 편액을 옮겨다가 이곳에 걸었었는데 망실되었다. 여하정의 6각기둥에는 시액(詩額) 12현판이 부착되어 있다. 시는 작자 미상이나, 시의 내용으로 보아 여하정을 지은 이승우의 작시로 추정되고 있다. 余方宥公事(여방유공사) / 내 바야흐로 목사로서 공사를 보게 되어 作小樓二間(작소루이간) / 조그마한 누 두칸을 지었도다 懷伊水中央(회이수중앙) / 연못의 물은 중앙으로 맴돌고 樹環焉泉縣(수환언천현) / 등나무가지는 샘가에 달렸도다 開方塘半畝(개방당반무) / 반이랑 정도 물문을 열으니 九日湖之湄(구일호지미) / 호수의 물살에 햇빛이 아름답구나 一人斗以南(일인두이남) / 남쪽은 한 사람의 도량으로 가하건만 捨北官何求(사북관하구) / 싫다하면 관직을 어찌 구하랴하나 環除也皆山(환제야개산) / 환제는 다 산인데 於北豈無隹(어북기무추) / 그 북쪽엔들 어찌 새가 없을소냐? 賓主東南美(빈주동남미) / 손님과 주인이 동남에서 만나 좋아하니 其必宥所樂(기필유소락) / 반드시 즐거움이 있을것이다
○ 안회당
안회당은 홍주군의 동헌으로 22칸의 목조 와가이다. 옛 정사당이 해체될 때의 상량문에 의하면 상량시기는 숙종 4년(1678) 4월 10일 이었고 좌향은 유좌묘향을 이어 지었다. 홍성군에 신청사가 건축되기 이전에는 18인의 홍주목사와 여러 홍주 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사무실이었다. 대원군이 안회당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그 후로 안회당이라고 하였는데 편액은 전란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전국에서 원형대로 보존된 4개(태인동헌:전북 정읍, 무장동헌:전북고창, 청안동헌:충북괴산, 안회당)중의 하나이지만 다른 동헌은 그 지역명에 동헌을 붙여 불리었으나 홍주동헌 만은 안회당이라 한 점이 특이하다. 안회란 문구는 논어의 공야장편의 "老子安之 朋友信之"에서 유래된 것으로 "노인을 평안이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하며 연소자를 사랑하여야 한다" 라는 뜻이다.
○ 홍주성 수성비
문화재 정보 : 충남문화재자료 제166호
순조 때 홍주성(洪州城)을 보수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로 오관리 남산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1824년(순조 24) 진장(鎭將) 김계묵과 목사(牧使) 이현규가 홍주성을 돌아보고 그 황폐함을 개탄하여 보수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2> 홍성민속테마박물관
○ 위 치 :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57-12 홍성민속박물관
○ 대표자 : 소정식
○ 연락처 : 041-632-4660/011-432-4660
○ 추천사유 : 조상님들의 옛 슬기를 모아 놓은곳! 가족과 함께 하는 민속테마박물관! 구수한 옛 이이야기를 들려 주시는 관장님의 눈빛에서 고향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답니다.
시원하게 뚫린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홍성IC를 지난 후 29번 국도를 타고 홍성 방면으로 2KM정도를 가면 좌측 하고개 정상에 홍성민속박물관이 보인다. 이 곳의 관장은 관광버스를 운전하는 소정식(51)씨이다. 박물관은 소정식 관장이 평생 동안 하나둘씩 모든 민속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매우 뜻깊은 곳이다. 1970년대로부터 수 백년 된 것까지 2천 점이 넘는 생활 용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30대 이상이라면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향수에 잠길 수 있으며, 어린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는 호기심의 세계 그 자체이다. 1998년 사설 민속박물관으로는 충청남도에서는 첫 번째로, 민속박물관으로는 온양, 연기에 이어 세번째로 충청남도 인가를 받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갖가지 전시품을 더 모았다고 한다. 게다가 더 알차게 꾸며 부족함이 없는 면모를 갖추느라 소정식 관장은 그 간 별달리 홍보에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이젠 홍성에서 제일 유명한 곳 중의 하나로 통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전시관 앞에 가지런히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길쭉한 물건이 발걸음을 멈춘다. 이것은 바로 솟대라 불리는 공예품이다. 하늘과 연결하는 안테나라고 하는 이 솟대는 소정식 관장이 소장한 최고의 민속공예품이라고 한다. 전시관은 하나의 공간에 코너를 돌며 관람할 수 있게 하면서 전시관을 구분해 놓았다. 염전의 모든 것, 길쌈 도구들, 홍성 어촌의 각종 어구들, 생활용품, 놋쇠 요강, 수동 타자기 등 하나 하나 신기하고 새롭기만 하다. 전시관의 관람을 마치면 전시관 뒤 쪽에 마련된 체험장에서 솟대나 연, 썰매 등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고, 널뛰기나 윷놀이, 제기차기 등의 민속놀이도 경험할 수 있다. 체험비는 재료비만 받는다. 소정식 관장은 솟대 만들기 등의 체험프로그램과 민속놀이를 연계한 체험패키지를 구상 중이라고 한다. 이 곳에 가면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하며 토속음식을 맛 볼 수 있는 '노을민속촌'이란 음식점이 있어, 민속놀이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도 있다.
<출처> 녹색체험 홍성(naepo.go.kr/recommend_vill/proc/reVill_view.jsp?vill_cd=vl0...)
<참고자료 3> 백월산(白月山)
백월산을 지형도에는 일월산으로 오기를 해서 혼선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이 산은 홍성의 진산이다. 홍성읍 월산리와 구항면 오봉리, 홍복면 중계리 사이에 위치한 이 산에 오르면, 뚜렷한 서해바다와 함께 동쪽의 홍성읍과 합덕평야가 발치아래로 깔리고 금북정맥의 남과 북이 오롯이 드러난다.
천수만의 서쪽을 제외하곤 삼면이 대부분 구릉지대로 둘러쳐진 정상에선 서북쪽의 삼준산(490m), 동북쪽의 용봉산(381m), 동쪽의 봉수산(484m), 동남쪽의 초롱산(340m), 남쪽의 아차산(424m)과 오서산(791m)이 조망되는데 정작 현지민들은 백월산 보담은 바로 이웃한 용봉산을 더 쳐주고 있다. 용봉산은 홍북면에 위치한 돌산으로 큰봉우리가 8개 있어 팔봉산으로도 불리워지고 제2의 금강산으로도 불리울 만큼 기암괴석이 많아서, 용의 형상을 한 산세에 정수리는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한다.
<참고자료 4>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樂上里)
백제때는 마시산군에 속했다가 신라때는 이산군에 속했으며 고려때는 덕풍현에 속했었다. 이조 초엽에는 덕산현에 속했다가 이조 말엽에는 덕산군 나박소면의 지역인데 서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탄리, 낙천리와 홍주군 고남하도면의 갈오리, 원성리의 각 일부와 홍천면 중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낙천과 상천의 이름을 따서 낙상리라 하여 예산군 억산면에 편입했다. 행정구역은 1,2리로 되어있으며 78세대 177명이 거주하고 있다.
<참고자료 5-①> 용봉산(충남 홍성군)
○ 위 치 : 충남 홍성군 홍북면 상하리 , 신경리
○ 개 요 :
높이 381m로 큰 산은 아니며 험하지도 않으나 산 전체가 기묘한 바위와 봉우리로 이루어져 충남의 금강산이라 불릴만큼 아름답다. 정상까지 산행하는 동안 수백장의 한국화를 보듯이시각각으로 풍경이 바뀌는 것이 용봉산의 특징이다.
이 산의 이름은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듯한 형상인데서 유래했다. 남방향 중턱과 서편산록에 완만한 경사가 길게 펼쳐져 있고 요소요소에 소나무 군락이 자연발생적으로 있으며, 장군바위 등 절경과 백제 때 고찰인 용봉사와 보물 제355호인 마애석불을 비롯한 문화재가 곳곳마다 산재한다.
용봉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예산의 덕숭산(수덕사), 서산의 가야산, 예당 평야의 시원한 경치도 일품이다.
<참고자료 5-②> 전설 : 용과 봉이 싸운 용봉산
저 용봉산은 원래 용과 봉황이 살았던 산이라는구먼. 그래서 용봉산이라는 이름이 생긴 유래가 재미있게 전해지고 있어.용봉산에는 원래 산꼭대기 대나무 숲에 봉황새가 살았었대. 그리고 용봉산 아래 연못에는 커다란 용이 한 마리 살었었고 말여. 하느님은 봉황에게는 육지를 다스리도록 했었대. 그리고 용에게는 물 속을 다스리도록 했었고 말여. 땅위에서는 들짐승과 날짐승들이 봉황의 다스림을 받아서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다는 거여. 물론 물 속에서도 많은 물고기들이 용의 다스림을 받으며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고 말여.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시절도 오래가지 못했어. 오래도록 가뭄이 들면서 평화가 깨어지기 시작했어. 어느 해부턴가 갑자기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거여. 산천초목이 말라붙고 연못까지도 물이 없어서 심한 고통을 겪게 된 거지. 육지에 사는 동물들은 물론이고 연못에 사는 물고기들도 걱정이 태산같이 쌓이게 된 거여. 요즘에 비가 안 와서 걱정이 많듯이 말여. "안되겠다. 내가 비를 몰아와야겠구나."드디어 용봉산 아래 연못에 사는 용이 용기를 내었어. 내가 비를 몰고 오겠다고 말이지.용이 뛰쳐나와서 하늘로 올라갔어. 그리고 하느님께 사정사정 해서 비를 몰고 온 거여. 비가 오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좋겠어? "와아. 우리 용왕님이 제일이다."모두들 용을 위해서 만세를 불렀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어. 한 번 내리기 시작한 비는 몇 달이 되도록 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 거여. 더군다나 육지에 있는 들짐승과 날짐승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물 때문에 어디 가서 제대로 쉴 수가 없단 말여. 하지만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이야 무슨 걱정이 있겠어? 아무리 홍수가 나도 걱정이 없는 거지. 태평가를 부르며 물 속을 헤엄치고 다니는 거여.육지에 사는 짐승들이 물고기들을 보니까 괘씸하기 짝이 없거든. 자기들은 물 때문에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좋아서 날뛰는 모습이 한없이 괘씸하단 말여.
"우리들은 이렇게 고생하는 줄도 모르고 좋아서 날뛰다니."짐승들은 용봉산 꼭대기에 있는 봉황에게 괘씸한 얘기를 일러바쳤단 말여. 이 말을 들은 봉황도 괘씸하거든. 물고기들의 소행이 말여."에이 괘씸한 것들 같으니라고. 내가 이것들을 그냥 두지 않을 테다."봉황이 화가 잔뜩 나서 소리쳤어."여봐라. 지금부터 육지에 있는 모든 새들을 불러모아라."봉황은 힘이 세고 부리가 날카로운 새들을 불러모았단 말여. 그리고는 짐승들을 시켜서 물고기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오도록 했어.육지의 새들이 물고기들을 잡아간다는 소식은 곧바로 연못에 사는 용에게 전해졌어."뭐라고? 새들이 물고기들을 모두 잡아간다고? 봉황이 시킨 일이란 말이지?"소식을 들은 용이 몸을 부르르 떨었어. 자연히 용과 봉황이 서로 감정이 격해졌단 말여. 그러다가 싸움이 벌어졌어. 이 싸움은 치열하기가 이를 데 없었어. 용봉산 꼭대기와 아래를 오르내리며 싸움을 했어.이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푸르고 아름답던 산은 포탄을 맞은 것처럼 변해가기 시작했어. 뾰족뾰족한 돌들만 앙상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거여. 산 위에서 흘러내린 흙더미로 산 아래 연못도 점점 묻혀갔고 말여.얼마 후에 하느님은 봉황과 용이 싸운다는 소식을 들었어. 화가 난 하느님은 당장 봉황과 용을 이곳에서 내쫓았다는구먼. 그 뒤로 봉황이 살았다는 용봉산은 대숲만 덩그라니 남게 되었다는구먼. 용봉산 아래 하산 마을에 용이 살았다는 연못도 텅 비고 말여. 지금은 조그맣고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사람들은 이 연못을 용못이라도 부르고 있어.
○ 채록일시 : 1999. 2. 24○ 구연자 : 한상숙(남. 55세. 대졸. 초등학교 교사)
<참고자료 6> 덕숭산(580m)
○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덕숭산은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위치하여 행정구역상으로는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에 인접하고 있다, 이 산의 높이는 해발 580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나 호서의 금강산이라고 불리울 만큼 그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산이다. 울창한 수목과 기암괴석이 풍부하고 계곡을 따라서 올라가면 수덕사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사찰, 임자들이 정상에 이르기까지 자리 잡고 있어서 유적, 유물은 물론 예부터 예산의 상징적인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보호되어 왔고 현재는 덕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주변의 문화유적은 어느 지방보다도 특색이 있다. 예산 신성리 무한산 꼭대기에는 최연소 화랑으로 알려진 원술랑이 축성한 높이 2.4m, 길이 655m로 남아있는 무한산성(無限山城)과 대흥의 봉수산 산정에 높이 2.5m, 길이 4km, 폭이 3.5m의 큰 규모로 머리띠를 두른 듯 둘러 처진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었던 임존성(任存城)등이 있다. 그래서 이 산의 기백도 강하다고 전해온다. (예산군지)
임야의 총면적은 7,113,989m²로서 예당평야의 중심을 이루고 삽교천 상류의 수원(水源)이기도 한 이 산은 남쪽 끝에서는 가야산의 지맥과 이어져 있다, 원래 가야산과 덕숭산은 거리로 보더라도 한 줄기였다고 한다. 예산쪽 삽교를 거쳐 시량에서 서산의 해미로 넘어가는 대치리 길 때문에 꺽여 있을 뿐 본디는 ‘한치’라는 우리말 이름의 고개로서 두 산이 서로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 동쪽 덕산저수지 족으로 ㄷ자 모양의 입안에 가야사지가 앉고 외각둘레에 수덕사, 북쪽으로는 보원사, 서쪽으로는 개심사가 있으니 이 두산의 구도는 하나가 되는 셈이다.
<참고자료 7-①> 수덕사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德山面) 덕숭산(德崇山)에 있는 사찰.
사기(寺記)에 따르면 백제 말 숭제(崇濟)가 창건하고, 제30대 왕 무왕(武王) 때 혜현(惠顯)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설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 때 나옹(懶翁:혜근)이 중수하였다. 일설에는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지명(智命)이 창건하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한다. 조선시대 제26대 왕 고종(高宗) 2년(1865)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문화재로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18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과 함께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이 밖에 대웅전 양 옆에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이 있고, 앞에는 조인정사(祖印精舍)와 3층석탑이 있다. 그리고 1,020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만공탑·금선대(金仙臺)·진영각(眞影閣)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출처> 엔싸이버 한국의 산
<참고자료 7-②> 수덕사
○ 위 치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 홈페이지 : 수덕사 www.sudeoksa.com
○ 관 리 자 : 덕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 / ☎ 041-330-2557
○ 안내 및 문의 : 수덕사(041-337-6565 / FAX 041-337-0072)
○ 개 요 :
서해를 향한 차령산맥의 낙맥(落脈)이 만들어 낸 덕숭산(德崇山)은 북으로는 가야산(伽倻山), 서로는 오서산, 동남간에는 용봉산(龍鳳山)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중심부에 서 있다.
이 덕숭산 자락에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한국불교의 선지종찰(禪之宗刹)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다.
"백제는 승려와 절과 탑이 많다"라고 중국사서(史書)인 '북사(北史)' , '수서(隨書)', '주서(周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 정사(帝釋精寺) 등 12개가 전하지만 현재까지 큰 규모를 유지하고 있는 사찰은 수덕사 뿐이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수덕사의 고려시대 유물로는 충렬왕 34년(1308)에 건축된 대웅전과 통일신라 말기 양식을 모방한 삼층석탑, 수덕사 출토 고려자기, 수덕사 출토 와당 등 있다.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가람이 소실되었으나 수덕사 대웅전은 다행히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37~40년 보수 당시 발견된 대웅전 동측 내부 전면에 기록된 단청개칠기 (丹靑改漆記)에 의하면 중종 23년(1528)에 대웅전 색채보수,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에 대웅전 보수, 순조 3년(1803)에 대웅전 후면의 부연보수와 풍판의 개수 등 4차례 대웅전 보수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1673년 조성된 수덕사 괘불과 18세기 제작된 수덕사 소종은 조선후기 수덕사의 꾸준한 불사활동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 주요문화재 : 수덕사대웅전(국보 제49호) / 수덕사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103호) / 수덕사7층석탑 육괴정, 황하루, 근역성보관, 사리탑 외
<참고자료 7-③> 수덕사 창건 설화
수덕사엔 해마다 버선꽃이 핀다고 한다. 옛날 이 마을에 수덕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수덕은 어느 양반집 자제였다. 하루는 하인들을 데리고 사냥을 떠났다. 여기저기 살피고 돌아다니던중 한 마리의 노루를 발견하였다. 그것을 본 하인들은 수덕에게 빨리 활을 쏘으라고 재촉 하였다. 그러나 수덕은 묵묵부답일 뿐 하인들에게 답답함을 더해주었다. "저길 보아라 사람이 있지 않느냐!" 그랬다 거기엔 한 묘령의 여인이 있었다. 달아난 노루와 갑자기 나타난 여인을 뒤로 하고 수덕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런데 수덕의 가슴에 어느샌가 그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책을 읽어도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로지 그 여인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견디다 못한 그는 한 하인에게 그 여인에 대해 조사 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곳 그 여인의 이름이 덕숭이라는 것과 부모를 여의고 홀로 있다는 것을 알아 냈다. 또한 덕망과 예의를 고루 갖추었다는 것도 들었다. 수덕은 사냥을 구실로 그 여인의 집을 자주 맴돌았다. 아주 짧은 순간 그것도 가끔 그녀 모습을 아주 멀리서 볼 수 있을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한 그가 하루는 체통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여인의 집으로 불쑥 들어 갔다. 놀란 그녀 앞에서 그는 그만 모든 감정을 말하고 사랑을 고백 하였다. 그러나 덕숭낭자는 사랑을 받지 않았다. 이에 수덕은 한층 더 열렬히 자신의 입장을 표하였다. "그러시다면 저의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주십시오." 덕숭낭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로하기 위해 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수덕은 곧 승낙 하고 공사에 착수 하였다. 그는 어서 빨리 절을 지어 덕숭낭자와 혼인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절을 지으면서도 덕숭낭자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드디어 한 달뒤 절은 완성 되었고 그는 기쁜 마음으로 덕숭낭자를 찾아 갔다. 그런데 왠지 그녀는 기쁘지 않는 듯한 표정 이었다. "부처님을 모시는 절을 짓는데 부처님을 생각 하며 정성 을 기울이시지 않고 한 여인의 생각으로만 가득 차시다니요. 저 뒤를 보시옵소서." 절은 불타고 있었다. 수덕은 다시 시작 하였다. 그런데 두번째에도 이상히 절이 불타버렸다. 인간으로 그것도 남자 의 몸으로 여인의 생각을 버린다는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세번째 수덕은 오로지 부처님만을 염하며 절을 지었다. 그리고 완성이 되자 덕숭낭자를 찾았다. 그녀도 이번엔 기쁨의 눈빛으로 그를 맞았다. "낭자 어서 혼례를 올립시다." 덕숭낭자는 시간을 좀 더 가지자는 제안을 했으나 수덕은 반대 하며 성화였다. 그리하여 그 다음날 바로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덕숭낭자는 부부지간 이지만 잠자리를 따로 하자고 하였다. 이 말을 수덕은 수긍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첫날밤 바로 관계를 가지려 하는데 그때 갑자기 뇌성이 울리고 심하게 비바람이 치기 시작 하였는데 덕숭낭자가 일어나더니 밖으로 사라졌다. 수덕의 손엔 그녀의 버선 한 짝만이 쥐여져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에 낭자와 있던 방은 온데 간데 없고 넓은 벌판의 한 바위 위에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버선은 한 송이 하얀 꽃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곧 깨달았다. 그녀는 보살의 화신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도 함께 깨달았다. 그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절을 수덕사라 하고 산 이름을 여인의 이름을 따 덕숭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수덕사엔 지금도 버선꽃이 피어 난다고 한다.
<수덕사 전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출처> 엠파스 지식, 테마로 즐기는 지식 커뮤니티
<참고자료 7-④>수덕사의 연혁
덕숭산(德崇山, 495m)에 자리잡은 수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창건 기록은 확실치 않으나 백제 법왕 원년(599)에 지명법사(智命法師)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말 경허 스님이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제자 만공 스님이 많은 후학을 배출하여 현재도 4대 총림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다. 현존하는 건물은 국보 제49호인 대웅전과 명부전·백련당·청련당·조인정사 등이며, 특히 대웅전은 1308년에 건립한 건물로 창건 연대가 확실하고 아름다워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또한 이 절의 암자로는 항상 100여 명의 여승이 수도하는 견성암(見性庵)과 김일엽(金一葉)스님이 기거하다 입적한 환희대(歡喜臺), 만공 스님의 친필인 '佛乳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정혜사 그리고 만공 스님의 영정과 유물을 보관한 진영각(眞影閣) 등이 있다. 일주문에는 '德崇山修德寺'라는 편액이 손재형(孫在馨)씨의 글씨로 걸려 있고, 그 안쪽에는 상형문자와 같은 글씨로 '東方第一禪院'이라 쓴 또 다른 편액이 걸려 있어 이 절이 충청도 일대에서 가장 큰 절임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7-⑤>대웅전
수덕사 대웅전은 1937년 건물을 수리할 때 묵화명(墨書銘)이 발견되어 1308년에 지은 것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 대웅전은 건립 연대가 알려진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인 동시에 건축 양식의 특성으로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의 무량수전보다 오래된 건물임이 밝혀졌다. 조선시대와 해방후에도 여러차례 보수된 이 건물은 형태의 변함없이 700년을 버티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이 3간, 측면이 4간이며 소박하고 단촐한 맞배지붕에 주심포 건물이다. 사찰 내 가장 높은 대지에 남향으로 자리 잡았고, 전면은 네모난 화강암으로 6단(높이 10척)으로 쌓았다. 후면은 2단인데, 앞쪽에는 두 곳에 올라가는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앞쪽 3간에는 간마다 빗살문을 3매씩 달고 측면은 4간 중 첫간에만 출입문을 달았다. 건물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아름다운 지붕 구조가 잘 노출되도록 연등천장을 하였다. 기둥을 받치는 초석은 흔한 막돌을 사용하되 일부는 주좌(株座:초석과 기둥 사이에 끼우는 길이 30cm되는 나무)를 사용하여 균형을 잡았다. 기둥은 위와 아래보다 가운데가 불룩한 배흘림을 두었는데, 이는 강릉 객사문에도 나타나는 고려의 건축 양식이다. 이런 형태의 기둥은 탄력성이 있어 보여 무거운 지붕을 가볍게 받치고 있는 느낌을 준다. 불단에 모신 삼존불은 법당 크기에 비해 조금 왜소해 보이는데 이는 l938년 무인에 만공 대선사가 전북 남원군 산동면 귀정사(歸政寺)에서 이안(移安)해 온 석가(釋迦), 약사(藥師), 미타(彌陀)의 삼계 여래이다. 대웅전 측면의 가구(架構)구성에서 창방 위쪽 박공 부분의 형태 구성은 참으로 일품이다. 창방 위쪽 기둥 머리에 파연(波蓮) 모양의 받침을 놓아서 항아리 모양의 단면으로 된 충량(衝梁)을 받았으며, 그 위에 다시 파연대공(波蓮臺工)을 얹어 고주 윗몸으로부터 나온 부재를 받쳤다. 이 위에 지붕의 무게를 전달하는 쇠꼬리 들보가 얹혀져 있는데, 지붕의 무게는 마루보 밑의 쇠꼬리 들보로 부터 대들보 위에 얹힌 쇠꼬리 들보로 전달되고, 다시 파련대공이 받치고 있는 쇠꼬리 들보로 전달된다. 이 쇠꼬리 들보들의 율동적인 구성은 마루보 윗쪽에서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는 소슬합장의 곡선미 및 2중량의 양감 있는 곡면과 더불어 뛰어난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노란색만 칠한 빈벽으로 있지만, 옛날에는 구성 부재들 사이의 작은 벽면에 '수생화도(水生畵圖)'·'나한도(羅漢圖)'·'극락조도(極樂鳥圖)' 등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고 하니, 고려 후기 가람의 건물로는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였을 것이다. 이 외에도 1937년 수리 때 벽화가 40점 발견되었는데, 실물은 6.25동란 때 없어지고 임천(林泉)이 그린 모사도 일부가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전하고 있다. 이 그림 중에는 수반에 백·홍련을 비롯한 야생화를 풍성히 꽂은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참고자료 7-⑥>경허와 만공 스님
수덕사는 만공(1946 졸) 선사의 주석처(住錫處)로 그는 근대 한국 선종의 중흥조인 경허(l849~l9l2) 선사의 제자이다.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수행과 실천으로 이를 꽃피워 낸 대선지식(大善知識)이다. 경허 선사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암울한 기운이 전아시아 대륙을 뒤덮어 가는 조선 말기에 나서 우리와 정반대의 가치 체계를 가진 서구 문화가 기계 문명을 앞세워 반드시 밀려 들어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일체의 전통적인 사고와 관행의 속박으로부터 탈피하여 가치관의 폭을 무한대로 늘려 놓는 것만이 그 정반대의 문화충격을 감내해 내어 전통 문화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확고한 신념이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맹렬한 수행 과정을 거치게 하고 갖은 암시적 기행을 일삼게 하였던 것이다.경허 선사의 이런 기이한 무애행은 범상한 눈으로 보면 한낱 광태(狂態) 괴기(怪奇)에 불과했지만 제대로 갖춘 눈으로 보면 세상을 깨우치는 풍유(諷諭)요 암시이었던 것이다. 만공 선사는 l905년 봄 정혜사 밑에 금선대(金仙臺)라는 초가 암자를 지어 살면서 제자들을 길러내기 시작하고 인근의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을 은유로 격동시켜 항일 구국의 전열에 서게 하니 갈미 김문의 김좌진(金佐鎭, l889~l930) 장군을 비롯하여 시량리 윤봉길(尹奉吉 l908~l932년) 의사 등 많은 독립지사들이 배출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참고자료 7-⑦> 수덕사와 풍수
수덕사의 대웅전은 높은 산 중턱에 자리잡아 멀리 갈산쪽의 평야가 훤히 내려다 보여 전망이 상쾌한 터이다. 덕숭산(수덕산)에 남진한 용맥이 몸을 남서진과 남진을 거듭하며 힘차게 내려뻗더니, 잘게잘게 좌우로 요동치며 계축룡(癸丑龍)으로 가파르게 입수되는 혈처에 자리잡았다. 이곳은 좌측의 계곡에서 계측수(癸丑水)와 간인수(艮寅水)가 도래하여 우측인 정방(丁方)으로 소수하니, 목국(木局)으로 이 때에 계축룡은 관대룡(冠帶龍) 해당되어 진룡에 해당된다. 또 대웅전의 좌향을 정남향인 자좌오향(子坐午向)을 놓았으니, 양균송의 진신수법에 합당하고, 나아가 향상으로 화국(火局)의 양수(養水)와 장생수(長生水)가 도래하여 쇠방(衰方)인 정방(丁方)으로 빠지는 천하의 명당이다. 『지리오결』에 이르길, 〈火局의 艮寅 長生水가 上堂한 뒤에 衰方인 丁未方으로 消水하니, 生來會旺하여 發富發貴하고 오래 살고 人丁이 興旺한다. 巽巳 臨官方에 文筆峰이 있으면 眞爲切地라 한다. 午方에 天馬가 있으면 催官最速하고 丁峰이 있으면 長壽하며 문과급제가 끊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웅전은 주산으로부터 멀리 내려와 현무(玄武)가 발달하고, 좌우측으로 쳥룡과 백호가 3∼4겹으로 환포하여 혈장의 생기를 응집시키고, 나아가 내외당이 좌선수(左旋水)로 순행하니 장풍이 잘 된 곳이다. 하지만 주산은 암석이 많은 석산으로 그곳에서 내려뻗은 내룡은 흙심이 두텁지 못해 생기까지는 왕성치 못하다. 하지만 입수룡이 이기적으로 생왕을 품고, 내외당이 순행하여 장풍이 양호하고, 목국의 자왕향(自旺向)인 오향(午向)을 놓았으니, 이곳은 땅의 기운보다는 양기의 흐름이 좋은 향명당(向明堂)이다. 따라서 고려 때의 대웅전이 현재까지 전해질 수 잇는 근거는 땅 속의 지질이 단단하여 지층이 안정되고, 양기가 제대로 순환하는 향을 놓아 길한 방위에사 바람이 불어온 결과로 보인다. <출처> :고재희의 풍수 강의--->이야기로 풀어보는 내고장 풍수
www.21fengshui.com/content5/view2.html?id=3-7-15
<참고자료 8-①> 한티고개
덕산면 대치리. 한티골 서쪽에 있는 큰 고개로 대티라고도 하며, 가야산과 삼준산 사이가 됨.
<참고자료 8-②> 대치리 (大峙里)
본래 덕산군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큰 고개 밑이 되므로 한티, 한티골 또는 대티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중티리, 삼증리, 낙동, 신티리, 소시촌 일부를 병합하여 대티리라 해서 예산군 덕산면에 편입되었다.
<출처 : Home >예산군소개 >예산의역사 >지명유래>
<참고자료 8-③>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 한티 고개
○ 소재지 : 충남 서산시 해미면 대곡리와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치리와 경계(가야산 끝자락)
○ 연락처 : 해미 성지(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312-8) (041) 688-3183 FAX (041) 688-9039
○ 홈페이지 : 해미 성지 http://www.haemi.or.kr/
해미 성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한티 고개이다.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군 해미면을 가르는 가야산의 끝자락에 자라잡은 한티고개는 교우들이 무리지어 살던 면천의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 집단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이다. 한티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개 마루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 보던 곳에는 주막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이름없는 수 많은 신자들이 포졸들에 이끌려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순교의 마지막 길을 떠났을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 진다.
해미는 일찍이 천주교가 전파된 내포 지방의 여러 고을 가운데서 유일하게 진영이 있던 군사 요충지였다. 1418년에 병영이 설치되었고, 1491년에 석성이 완공된 해미 진영(사적 116호)은 1790년대로부터 백 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무려 3천 명이나 국사범으로 처결한 곳이다. 이곳 한티고개는 1790년부터 1880까지 내포지방에서 주님을 배교하기보다는 기꺼이 죽음을 택한 수 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매질과 압박속에서도 해미로 끌려가면서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넘던 고개이다.1790년대에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을 비롯한 순교자들은 1870년대에까지 수십 명이 이름을 남겨놓고 있지만 그 외의 수천 명의 이름은 그들의 목숨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해미의 땅은 이렇게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쓰러져 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1799년에 이보현과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14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10년 옥고 후 옥사하였으며, 충청도 지방의 대대적 박해 시기였던 1815(을해)년과 1827(정해)년 기간 동안에는 손여옥 등 수많은 신자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마을을 해미 진영 군졸들이 수시로 급습하고 재산을 약탈한 후 신자들을 체포하여 한티고개를 끌려 넘어가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에 신분을 고려하여야 할 사람들(양반층)은 상급 치소인 홍주, 공주, 서울로 이송되었으며, 대부분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심리 절차(기록) 없이 해미에서 처형되어, 글자 그대로 무명 신자들이 수천 명 순교한 곳이 해미 땅이다. 1866(병인)년 이후 몇 년 간의 대박해 동안에만 순교한 숫자를 1천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90년대부터 희생된 순교자가 3천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는 박취득(라우렌시오)등 수십 명 뿐이다.
한티고개를 올라가는 길은 두 곳이 있다. 해미 성지를 돌아보고 덕산 방향으로 갈 때는 서해안고속도로 밑을 지나 산수저수지와 한서대학교 입구를 지나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대곡리 마을이 있고 이를 지나 조금 오르면 오른쪽에 유성주유소가 보이고 이를 지나 약 100m 오르면 왼쪽에 대왕석재가 있다. 여기가 한티고개 입구이다. 입구에 「한티고개 - 순교자 압송로, 1km」푯말이 있다. 다소 가파르긴 하지만 약 30분 오르면 고개 정상이다. 덕산쪽에서 오르는 길은 덕산읍내에서 해미 방면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계곡장 2층 건물이 보이고 이를 막 지나면 오른쪽 입구에 「한티고개 - 순교자 압송로, 2km」푯말이 보인다. 푯말 옆에는 남원양씨 효행비가 길가에 보인다. 고갯길에 설치되어 있는 십자가의 길은 고개 정상에 1처가 시작되어 해미 방면으로 14처가 설치되어 있다.
<출처> 한국의 성지, http://www.paxkorea.co.kr/bbs/zboard.php?id=1000&no=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