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은 7월 18일 월요일입니다.
주말 잘 보내셨습니까?
오늘 날씨가 무척 덥네요. 덥죠?
오늘 부산에서는 부산 불교 음악 작곡가의 창작 발표가 있었는데,
첫 모임에 방금 갔다 왔습니다.
작곡가 5분인데 권상무교수님 이순이 작곡가님 이찬우 교수님
작곡가 강영화님 김수진님 이렇게 5분인데 이 가운데
이찬우씨는 부산 분이신데,지금으로부터 40여년가까이 되네요.
40여년전에 삼귀의를 작곡하셨습니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부산에서 작곡가들이 이렇게 불교 작곡을 좋은 노래로 만들어서
즉 불교다운 불교적인 곡을 많이 작곡하고 노래를 통해서
부처님 말씀을 전한다는 아주 굳은 의지를 가진 분들입니다.
이렇게 앞으로 불교에 새로운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옛날 40~50년 전에는 스님들이 찬불가를 부른다든가
노래를 부른다든가 하는 일은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인데,
이와같이 많이 변한것은 모두 다 다른 종교들의 영향도 많지만
세월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금강경 318쪽을 하겠습니다.
오늘하고 내일하면 금강경 상권을 마칩니다.
엊그제 전체 메일을 한번 보냈습니다만,
이달말까지 수요일부터 반야사상과 그 의식에 대해서
식에 대해서 8일간 정도를 강의할까 합니다. 특강인데요,
이 강의를 중간에 하는것은 금강경을 강의하다 어떤 생각을 했는고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한 부분을 특별히 공부해야 되겠다.
마음에 대해서 식에 대해서 공부를 하시면 금강경을 이해하는데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들어 상권을 마치고 하권 들어가기 전에
특강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번 특강에는 한 분도 빠지지 마시고 꼭 참여하셨으면
하는 저의 바램입니다.
318쪽 부처님 말씀을 보겠습니다.
須菩提야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하야
應如是布施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중생을 이익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느니
이 보시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보시하면은 바라밀 생각이 나죠?
보시바라밀.이 육바라밀은 바라밀이라는 자체도 대승불교에서
쓰는 용어화 되었지만,이 육바라밀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대승 불교에서 만들어 낸 바라밀 사상입니다.
이 바라밀을 통해서 성불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육바라밀을 살펴보면 바라밀다, 금강바라밀다경 또는
반야심경라고 할 때도 역시 반야라고하는 반야바라밀다 심경이고
그래서 바라밀이라는 것이 뭐냐.
파라밀타인데 도피안 이라고 합니다.
저쪽 언덕에 이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쪽 언덕은 말 할 것없이 부처님 세상입니다.
대승 불교에서는 제일 첫번째가 보시입니다.
시아나불교 소승불교 남방불교에서는 지계가 제일 첫째이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보시가 첫째입니다.
보시하므로써 피안에 이른다는 사상입니다.
살펴보면 보시라는 것은 이웃과의 나눔입니다.
이웃과 나눔이 4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법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설법하면 법을 편다고 하고 법을 전한다고도 하죠
전법. 저는 여기서 나눈다고 표현 해 보았습니다.
부처님 법을 서로 나누는 것.
두번째는 물질을 나누는 것.
물질이라는 것은 절대로 자기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오직 빈 몸으로 왔었고, 또 갈 때도 빈 몸으로 갑니다.
그러니 물질에 탐할게 없겠죠? 나에게 물질이 많이 오면 많이 온 만큼
다른사람에게는 물질이 그만큼 적게 가게 되어있습니다.
이 부산 오늘 뉴스를 보니 부산 전체 인구를 100으로 봤을 때 1%가 부산 시민이
가지고 있는 땅의 51%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부가 대단히 편중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부가 나눠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도 됩니다.
저는 경제학자가 아니라서 모르겠습니다만은 안정된 사회는 적어도 땅이라든가
재화가 상위층이 아무리 못되도 10%~20%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정도면은 상당히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물질을 나누는 것 이것이 곧 보시입니다.
세번째는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 이것도 보시입니다.
네번째는 애어를 나누는 것. 사랑스런 말이라고 표현할수 있는데
이웃에게 그야말로 덕담을 하는 것. 이웃에게 이익되게 하는 말.
애어를 나누는 말.이것이야 말로 좋은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지계바라밀인데 계율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로 불계를 지키는것 부처님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부처님 계율을 널리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기만 계율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가르치는 것.
이 계율에 대해서 재미난 말씀을 드리면
85년도에 호주 시드니에서 몇년 산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신도분께서 시드니 타임지를 가지고 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인 즉
백인 한 청년이 1달러를 길에서 주운것을 경찰서에 갔다 주었다는 겁니다.
경찰서에서 의아해서 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이까짓 1달러를 주었으면 너가 갖지 주인을 찾아주라고 경찰서까지 왔느냐.
주인을 찾을 수 있겠느냐 라고 웃으며 이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싶어
하며 말하니까 당신은 부처님 계율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내 것이 아닌것을 취하지 않는 것이 부처님 계율이다.
나는 부처님께 귀의했기 때문에 1달러가 되었던 10센트가 되었던
내 것이 아닌 것은 절대 내가 취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경찰서에 갔다주는 것이다. 당신이 모아서
주인을 찾아 줄 수 없으면 모아서 다른 곳에 쓰던가 알아서 해라.
이것이 재미난 뉴스로 난 것을 보았습니다.
이 자체가 사회에 부천님 계율을 가르치는 것이 되죠.
계율에서 개차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개차법이 무엇이냐 하면 이 개자는 열개자이고,
차자는 막을 차자인데 열고 막는 것입니다.
어떤것이 여는 것이고 어떤 것이 막는 것이냐면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율이 있습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 비관하지 말라. 오계의 네번째 계율인데요,
어떤 사냥꾼이 노루를 잡기 위해서 사슴을 몰이하다가 사슴을 놓쳤습니다.
마침 사냥꾼이 나뭇꾼한테 물어보니 노루를 봤다고 해서 어디로 갔느냐라고
묻자 동쪽으로 갔다며 산골짜기를 가르킵니다.
그런데 실은 그 반대쪽인 서쪽 골짜기로 갔는데 사냥꾼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거짓말한 이유는 산 목숨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 설사 내가 거짓말을 하여
지옥에 가더라도 불쌍한 노루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부처님이
짖지말라는 계율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것을 개차법이라고 합니다.
세번째는 인욕인데요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번째는 자신의 고통을 참는것이고,
두번째는 남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죠.
특히 요즘 세상에 자살을 많이 하는데,
저는 그렇게 많은지 몰랐는데 1년에 자살하는 사람이 그야말로
약 만명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만약 전쟁이 나서 많이 죽는다면,
엄청난 사회의 소용돌이에 들 것인데 그래도 조용히 넘어가니...
이런 것도 괴로움을 참지 못해서 인욕하지 못해서 일어난 일들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감래하고 참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금강경을 공부하다보면 그런 부분이 있고,
보현행자의 서원인 보현행원에 보면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 내가 고통을 받는것은 과거전생에 지은 고통 하나가 사라졌으므로
죄업(업장)이 사라졌으므로 참으로 축하하고 좋아 할 일입니다.
좋아해야 하는데 우리들은 괴로워합니다.
그래서 두번째는 남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인데
예를들어 저 사람이 참 고통을 앓고 있다하면 위로 해 줘야 하는데
어떤 친구는 그러죠 싸다 싸~, 잘됐다~ 라고 한다든가 비웃는다던가
그러면 복이 감하는 것입니다.
덕담을 해서 그 사람에게 좋은 생각을 갖도록 해야합니다.
네번째는 정진바라밀입니다.
이것은 노력 수행인데요, 노력하고 수행하는 노력 수행인데
첫 번째는 힘써 일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쉼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 힘 쓰고 내일쯤에서 그만 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고, 모레도 하고, 열심히 하는 일을
꾸준히 하면(정진바라밀)부처님 세계에 이룰 수 있다.
성불 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다섯번째는 선정바라밀인데 정신을 집주(집중)하는 것을 말하는데
쳇째는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색성향미촉법 없음을 닦는 수도를 말 할 수 있습니다.
내일 모레부터 우리가 공부할 것, 반야사상을 특강한다는 것은
이와같이 색성향미촉법이라든가 의식이라든가 말나식 아뢰야식...
이 도대체 뭔지 어떻게 활동하는 것인지,
내 마음이 왜 일어났다 없어지는 것인지 이런 것을 공부 할 것입니다.
여섯번째 지혜바라밀인데, 반야라고도 하죠? 지혜바라밀. 반야바라밀
.
첫번째는 바른 이해를 위해서 노력하는것.
이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바른 이해를 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두번째는 근원적 이성으로 본성을 직관하는 것을 말 할 수 있습니다.
근원적 이성이라는 것은 내 근본적으로 근본 자체를 바로 직관하는 것.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지혜가 난다는 말입니다.
지혜바라밀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든 일체 중생들이 이익하는 것은
응당히 이와같이 보시하는 것이다.
이 육바라밀 가운데 보시바라밀만 말씀하셨지만
이와같이 모두 바라밀을 닦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설의에 함허득도선사의 말씀을 보면,
識의 물결이 안으로 용솟음치면 境界의 바람이 일어나서
항상 動하게 된다.(마음속에서 妄想과 煩惱가 일면
모든 境界도 바로 시끄러워지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망상 번뇌가 일어나면 경계도 시끄러워진다.
그런 일도 일어나고 그러겠죠?
智慧의 물이 안으로 엉키면
지혜의 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은 즉
다시말해 지혜를 물이라고 한다면 그 물이 안으로 엉키면
육진 경계가 쉬게 되어서 안이비설식의라고 하는 것으로 생겨나는 경계
그런 것들이 모두 다 항상 고요 할 것이요.
風塵(六塵境界)이 쉬게되어 항상 고요할 것이요,
고요하되 고요하다는 相이 없어야 참되고 밝은 것이 스스로 비추는 것이
이것을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낸다고 이르는 것이라.
마음이 주함이 없이 낸다는 것은 어떤 상을 내지 않고
곧 고요한 지혜에서 내는 것을 말한다 볼 수 있습니다.
육조스님 말씀을 보겠습니다.
320쪽입니다.
菩薩이란 法과 財物 等을 똑같이 베풀어서 利益을 끝없이 하는 것이니,
만일 利益케 한다는 마음을 지으면 곧 法이 아님이요
능히 이익케 한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것을 無住라 하니,
이 無住가 곧 佛心이니라.
무주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것을 얘기한 것입니다.
중요한 말이니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법과 재물등을 똑같이 베풀어 이익을 끝없게 하는 것이다.
보살이라는 것은 누구를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냐
이익을 서로 나누는 것을 끝없이한다는 것이다.
만약 능히 이와같이 이익게 한다는 것을 생각해 내면
이것은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게 부처님 불심이라는 것입니다.
부대사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菩薩이 깊은 智慧를 품고 있음이여.
어느 때인들 慈悲를 띠지 않겠는가
몸을 던져서 주린 호랑이를 염려하고 살을 베어서 굶주린 매를 구제하도다.
매 얘기가 나오네요, 엊그제 매 얘기 말씀드렸죠? 바로 그 얘기 입니다.
精勤을 三아승지겁 동안하였으되
아승지겁이 있는데 이 아승지겁은 과거, 현재, 미래 전체를
통틀어서 이런 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찌기 한 순간도 고달픔이 없었으니
만약 能히 이 行과 같으면 다 人天의 스승이 되리라.
누가 인천의 스승이 되었느냐 하면,
이와같이 호랑이에게 몸을 던져주고 매에게 살을 떼어 주고
이와같이 중생들을 구제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인천의 스승입니다.
야부선사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부처님 계신데도 머물지 말고, 부처님 없는데서는 급히 지나갈지니
삼십年 후에 (너에게)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선사들이나 큰 스님들이 법문 속에 가끔하시는 말씀입니다.
부처님 계신데도 머물지 말고 부처님 없는데서는 급히 지나갈지니
그래서 삼십년 후에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부처님이 계신곳이 있고 안계신곳이 있다고 생각을 낸다면은
이미 그릇된 것이겠죠? 이미 부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삼십년이고 오십년이고 이런 사람에게는 부처님이 오셨다 가셨다
해도 그 사람은 못 봅니다.
다시말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연하셨을 때도 그 당시에도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육성의 바른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야부선사 말씀에 대한 설의입니다.
부처님 계신 곳에서는 가르침에 있어서 가히 좇을 만 하고
부처님 없는 곳에서는 가히 본 받을 만한 가르침이 없도다.
그러나 가르침이 있고 없는 것은 다 사람으로 하여금 ??落落(깨끗한 상태)하게
하지 못함이니 이미 兩邊에 앉지 아니하였으면 또한 中道에도 머물지 말고
三 가지 關門(有敎, 無敎, 中道)을 뚫고 지나서는
또한 다시 자취에도 머물지 말지니라.
이것을 제가 다시 설명을 드리면 부처님 있는 곳에서 가르침에 있어서
가히 좇을 만 하고 부처님 없는 곳에서는 가히 본 받을 만한 가르침이 없도다.
이 말씀은 제가 설명한 것과 조금 다르죠? 이 말씀은 제가 어떻다고 말씀은
다시 드릴 수는 없겠고.
다만 부처님이 이 세계에 오셨을 때는 참가르침이 받을 수 있겠지만,
시공간의 엄청난 장벽이 있습니다. 공간의 장벽과 시간의 장벽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을 뵙지 못합니다. 만약 시간의 장벽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금도 부처님을 뵐 수 있고 공간의 장벽이 없다해도
지금 역시 부처님을 마음대로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야부선사 말씀을 보겠습니다. 321쪽입니다.
아침엔 南嶽山에서 놀고
저물면 天台山에 간다.
쫓으려 해도 미치지 못하더니
홀연히 저절로 오네
홀로 行하고 홀로 앉아 매인 것 없으니
너그러운 생각이 있음에 또한 너그러워짐이로다.
이 말씀은 뭐냐하면 이와같이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아침에 남산에서 놀고 저녁 때 삼각산에서 놀도다.
쫓으려 해도 미치지 못하더니 홀연히 저절로 오도다.
억지로 배울려고 해서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 시절인연이 인연이 되고 그러면은 홀연히 깨달음의 경지에 이룰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홀로 행하고 홀로 앉아 걸림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여기 걸림이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도 걸림이 없습니다.
제 말을 마음대로 듣고 세상의 공기를 마음대로 마실수 있고
세상의 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이런 대 자유가 누구한테나 다 주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자유는 없다 해탈한다고 그러죠?
부처님 말씀을 보겠습니다.
321쪽입니다.
如來가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이며 又說一切衆生이 卽非衆生이니라
여래가 설한 일체의 모든 상은 곧 이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의 중생이라고 설함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상이라는 것도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이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 드린 말의 저 뒷편의 소리를 들을 줄 아셔야 하고
부처님 말씀에 써 놓은 본 뜻을 알아야 겠죠? 그러니깐 여래가 설한
일체 모든 상(아상,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이 상이 아니며 일체히
중생이라고 설한 것도 곧 중생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은 모두다 불성이 있다.
근본적으로 다 부처님 씨앗을 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한장넘겨 322쪽입니다.
육조스님 말씀을 보겠습니다.
如란 不生이요 來란 不滅이다.
멸하지 않는 것이다. 여래라고 했을 때 설명이네요. 여래는 부처님이죠.
부처님은 불생 불멸이죠. 누가 부처냐 불생 불멸입니다.
반야심경에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배우는 사람은 바로 불생 불멸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 살면서도 생각하기를
아~ 나는 불생 불멸이 아니야. 나는 중생이야. 무슨 뜻인지 몰라.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지금 내가 불생 불멸입니다.
불생 불멸은 뭡니까? 부처라고 그랬죠. 여래라고 했죠?
그러니까 내 자신이 바로 여래다. 여래인 것을 알아야 되겠죠?
不生이란 我相 人相을 내지 않는 것이고,
어떤것이 불생이냐? 아상도 내지 않고 인상도 내지 않고
중생상도 내지 않고 수자상도 내지 말아야 되겠죠.
不滅이란 깨달음의 光明이 항상 비추어 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멸이라는 것은 깨달아 가지고 환히 비추는 것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下文에 말씀하시기를, 如來라는 말은 쫓아 온 바도 없으며
가는 바도 없으므로 如來라 하시니,
如來라는 것은 쫓아 온 바도 없다는 것은 어디에서 부터 누구를 여래라고 하고
또 어디에서 부터 누구를 여래가 아니라고 하는것은 ?i아오는 바도 없고
마치는 바도 없다.
如來가 說하신 我人 等 네 가지 相은 마침내 다 무너지는 것이라서
참다운 覺의 體가 아니며, 一切 衆生은 모두 다 거짓 이름이어서,
만일 망령된 마음을 여의면 곧 衆生은 가히 얻을 것이 없으므로
衆生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정말로 이런 부분들은 우리들이 한번 잘 음미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짧은 시간에 설명드려봐야 이 글의 진실한 뜻을 금방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 시간 이후라도 이런 부분들을 잘 한번 더 깊이 참고하면 알수 있겠습니다.
야부선사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別有長處하니 不妨拈出이로다
따로 長處(좋은 곳)가 있으니 잡아내는데 방해롭지 않도다.
내가 있는 자리가 곧 부처의 자리고 극락 세계지 따로 없다.
내가 사는데 전혀 방해롭지 않다. 그런 말씀도 되겠습니다.
323쪽을 보겠습니다. 야부선사의 말씀입니다.
衆生도 아니고 相도 아님이여,
따뜻한 봄날 노란 꾀꼬리 버들 위에서 우누나.
山雲과 海月의 情을 다 說했거늘
예전처럼 알지 못하고 空然히 쓸쓸해 하도다.
서글퍼하지 말라.
만 리에 구름 한 점 없으니 하늘이 한 모양뿐이더라.
참 좋은 시입니다. 이 시도 가능한한 외우시기 바랍니다.
중생도 아니고 상도 아니다. 어떤 것을 중생이라고 하고 어떤 것을 상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따뜻한 봄날이 되니 꾀꼬리는 저절로 와서 울게 되있는 거지요.
산에 구름이 딱~ 걸쳐 있으니 아름답고 바다에 두둥실 달이 떠 있는 것이
그 자체가 설법이라는 얘기 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설법이지 설법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예전처럼 알지 못하고 공연히 쓸쓸해 하도다.
이렇게 설법을 했는데 괜히 쓸쓸해 하고 슬퍼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만리에 구름 한 점 없으니 하늘이 한 모양이라.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하늘에 구름이 딱~ 끼면은 하늘에
구름이 끼어 있는 것이지 구름만 없으면 항상 하늘이 밝죠?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올라 가면 하늘은 여전히 푸름니다.
밑에서 보나 위에서 보나 하늘은 항상 푸르죠.
그런데 다만 우리들이 구름이 끼였을 때 하늘이 퍼렇기도 하고 검기도 하고
희기도 하고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죠. 마치 이와같아서 우리 마음에
구름이 끼면 마음에 번뇌가 끼면 이와같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한장 더 넘겨 보겠습니다. 324쪽입니다. 부처님 말씀입니다.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사실과 같이 말하는 자며 거짓이 아닌 말을 하는 자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니라.
부처님께서는 진하자고 실하자고 여하자고 불광하자며 불리여자죠?
부처님께서는 항상 참 말씀만 하신다. 그런 얘기입니다.
실다운 말씀만 하시고
여기 육조스님을 한번 더 공부해볼까요?
325쪽입니다.
眞語란 一切의 有情 無情이 다 佛性이 있음을 설한 것이요,
정말 이 세상에 참다운 철학자 철인 참다운 성인 이런 분들만
진어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이런 말을 했는데 어느 스님이 좀 과하지 않을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모든 종교 교주들이 전부 내 말이 옳다고 한다.
그러면 분명히 교리가 틀리면은 어느 한 가지는 맞고
어느 한 가지는 거짓이다.
그러니깐 불경이 다 맞고 성경이 다 틀리던가
불경이 다 맞고 성경 내지 회교경전 모든 경전이 다 틀리던가
아님 그들이 맞고 불교 경전이 안맞던가 이럴거란 말입니다.
서로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참으로 진실 된 말, 참 된 말, 진어라는 것은
깨닫지 않고서는 진리를 말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만이 진리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實語란 衆生이 惡業을 지으면 결정코 苦의 報를 받게 되는 것이요,
실다운 말 중생들에게 가르치기를 듣기좋게 하기 위해서 잘못했는데도
꾸짖지 않고 잘했어라고 한다면 실다운 말이 못되죠.
그래서 나쁜 일을 하면 고위과부를 받는다고 가르키는 것입니다.
如語란 衆生이 善法을 닦으면 반드시 樂의 報를 받음이요.
정말 좋은 일을 하면 너는 정말 극락 업보를 받는다.
극락 세계에 가서 태어날 것이다. 라고 가르키는 것입니다.
不?語란 般若波羅蜜法이 三世諸佛을 出生하되 결정코 헛되지 않음이니라.
정말 미치광이 말이 아닌것을 말하는 것.
그래서 이것이 반야바라밀법입니다.그렇게 아시면 되겠습니다.
不異語란 如來께서 하신 言說이 처음도 좋고 中間도 좋으며
결론도 좋음을 說하시니,
부처님이 처음 깨달아서 말씀하실 때나,
중간에 말씀하신거나, 열반에 드실 때 말씀하신 것이 그야말로 한결같습니다.
앞에 한 말이 다르고 뒤에 한 말이 틀리고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깨달은 분의 소반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326쪽에 마지막으로 부대사 말씀을 보겠습니다.
중생과 오온계가 이름은 다르되 채는 다르지 않으니
마음이 幻과 같음을 了達하여 알지라도
迷한 情으로 보면 남음이 있느니라.
眞語는 말이 망령되지 않음이고
實語는 말이 헛되지 않으니
시작과 끝이 변하거나 다르지 않음이라.
法相이 本來 如如함이로다.
다시 설명드리면,
중생과 오온계가 이름은 다르되 채는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오온이라는 세계나 중생의 세계가 이름은 다른데
그 자체가 중생이라고 부른다든가 오온의 세계에 떨어져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중생이죠.
마음이 幻과 같음을 了達하여 알지라도 마음이 다 환과 같다.
거짓이야. 아지랑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迷한 情으로 보면 남음이 있느니라.
미(미혹)한 생각으로 보면 남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眞語(진어)는 말이 망령되지 않음이요 말이 헛되거나 실답지 못한 말을 한다든가
그런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이 변하거나 다르지 않는 것을 본래의 성상 근본상이 다 여여하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장산 합장
첫댓글 다경님 수고했습니다. 항상 여러불자님들의 수고가 있어서 대불법회의 도량이 성장합니다. 부처님 가피를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