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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석정 - 시모음 (별난언어 별난논술) |작성자 바람처럼
" );| [작품감상] | 신석정 - 시모음 | | | 현대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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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7.03 03:14 |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운모(雲母)처럼 투명한 바람에 이끌려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푸른 하늘의 대낮을 흰 달이 소리 없이 오고가며
밤이면 물결에 스쳐나려가는 바둑돌처럼
흰구름 엷은 사이사이로 푸른 별이 흘러갑데다
남국의 노란 은행잎새들이
푸른 하늘을 순례한다 먼 길을 떠나기 비롯하면
산새의 노래 짙은 숲엔 밤알이 쌓인 잎새들을 조심히 밟고
묵은 산장 붉은 감이 조용히 석양 하늘을 바라볼 때
가마귀 맑은 소리 산을 넘어 들려옵데다
어머니
오늘은 고양이 졸음 조는
저 후원의 따뜻한 볕 아래서
흰 토끼의 눈동자같이 붉은 석류알을 쪼개어먹으며
그리고 내일은 들장미 붉은 저 숲길을 거닐며
가을이 남기는 이 현란한 풍경들을 이야기하지 않으렵니까
가을이 지금은 먼 길을 떠나려 하나니……
별도
하늘도
밤도
치웁다
얼어붙은 심장 밑으로 흐르던
한 줄기 가는 어느 난류가 멈추고
지치도록 고요한 하늘에 별도 얼어붙어
하늘이 무너지고
지구가 정지하고
푸른 별이 모조리 떨어질지라도
그래도 서러울 리 없다는 너는
오 너는 아직 고운 심장을 지녔거니
밤이 이대로 억만 년이야 갈리라구……
그 가난한 뜨락에 네 어린놈들처럼 나날이 자라나는 나무와 푸성귀들이 철철이 그들의 죄없는 표정을 아끼지 않는 한, 우리는 욕되지 않는 가난을 웃으며 이야기할 날을 기다려도 좋다.
우리 ‘난(蘭)’이와 나이가 거의 맞서는 이천 년이 훨씬 넘었을 벽오동(碧梧桐)남기나 은행(銀杏)남기나 멀구슬남기들이 인젠 고개와 어깨를 서로 맞대고 어우러져 그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을 뾰조롬히 자랑하고, 시나대숲에서는 고 작은 비비새들이 새끼를 부르고 있고나.
후박남기와 라일락을 잘 가꾸어 머지 않은 뒷날에는 탐스러운 꽃들이 피어, 푸르고 연연한 향기를 좁은 뜨락에 가득 채우도록 하고, 뒤란에 심은 찔레꽃도 잘 보살펴서 울타리를 삼고, 석류남기와 대추남기도 올들어 꽃이 무척 피었으니, 가을엔 어린놈들의 군입정이 그리 모자라지는 않겠구나.
매실남기와 산수유남기 사이 빈자리에는 파초를 한 그루만 심어 두어 철따라 그 뜰을 지나가는 빗소리를 머물게 하고, 적적한 밤에는‘당시(唐詩)’라도 읽으면서 조용히 그 빗소리를 듣도록 하렴.
가을에는 은행남기를 스무 남은 개 구해 보내리니 모두 제자리 잡아 심어라.
은행남기들이 가을에 그 황금같이 노오란 잎새들을 휘날리는 것은 다시없는 ‘멋’이니라.
인제 네 어린놈들이 장성한 뒤, 내가 너의 할아버지처럼 길솟는 지팽이에 의지하고, 그 좁은 뜨락을 거닐 때, ‘가난’이 욕되지 않는 세월 속에서 흐드러지게 웃어 볼 날을 이 남기들과 푸성귀 속에 마련해 두자.
어머니
산새는 저 숲에서 살지요?
해 저문 하늘에 날아가는 새는
저 숲을 어떻게 찾아간답디까?
구름도 고요한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헤매이는데……
어머니 석양에 내 홀로 강가에서
모래성 쌓고 놀 때
은행나무 밑에서 어머니가 나를 부르듯이
안개 끼어 자욱한 강 건너 숲에서는
스며드는 달빛에 빈 보금자리가
늦게 오는 산새를 기다릴까요?
어머니
먼 하늘 붉은 놀에 비낀 숲길에는
돌아가는 사람들의
꿈 같은 그림자 어지럽고
흰 모래 언덕에 속삭이던 물결도
소몰이 피리에 귀기울여 고요한데
저녁바람은 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언덕의 풀잎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어머니 무릎에 잠이 들 때
저 바람이 숲을 찾아가서
작은 산새의 한없이 깊은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薇)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즈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나리면
꿩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가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따지 않으시렵니까?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 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뜯지 않았느냐?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나갔다.
다시 우러러보는 이 하늘에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내가 타고 있는 백마의 갈기도
바람에 몹시 날리고 있었다.
출발 직전
백마는 길게 목놓아 울었다.
잠시
지구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내가 탄 백마는
무작정 달리고만 있었다.
동백꽃이 붉게 타는
어느 해안선을 돌고 있었다.
이윽고
로마궁전의 원주(圓柱)가 멀리 바라보였다.
그 뒤 나는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메콩강(江) 언덕을 달릴 때였다.
문득 총소리에 내가 깬 것은……
비낀 햇빛 아래
문득 바라보는 나무
나무 옆에 서보면
나무가 되고,
꽃 옆에 서보면
꽃이 되어도,
두루미 흘러가는
저 하늘을 이고 보면,
너희들의 가슴 언저리에
그 뜨거운 가슴 언저리에 있고 싶어라.
흐드러진 웃음,
그 웃음소리에도
꽃은 피고
마냥 꽃은 피어나고,
빛나는 너희 눈망울이야
그대로 한 개 별빛이거늘,
흘러간 지난날이사
돌아볼 겨를도 없다.
너희들 내다보는 앞날을
나랑 함께 걷게 하여라.
요요한
산이로다.
겹겹이 쌓인 풀 길 없는 우리 가슴같이
깊은 산이로다.
아아라한 오월 하늘 짙푸른 속에
종달새
종달새
종달새는 미치게 울고
산은
첩첩
청대숲보다 더 밋밋하고 무성한데
아기자기한 우리 두 가슴엔
오늘사 태양 따라 환히 트인 길이 있어
이 나무 등걸에 널 껴안은 채
이토록 즐거운 눈물이 자꾸만 쏟아지는 것은
진정 죽고 싶도록 살고 싶은
사랑보다도 뜨겁고 더 존엄한 꽃이
가슴 깊이 피어난 까닭이리라.
햇볕이 유달리 맑은 하늘의 푸른 길을 밟고
아스라한 산너머 그 나라에 나를 담쑥 안고 가시겠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구름이 된다면……
바람 잔 밤하늘의 고요한 은하수를 저어서 저어서
별나라를 속속들이 구경시켜주실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가 만일 초승달이 된다면……
내가 만일 산새가 되어 보금자리에 잠이 든다면
어머니는 별이 되어 달도 없는 고요한 밤에
그 푸른 눈동자로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까?
나의 노래는
라일락꽃과 그 꽃잎에 사운대는
바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너의 타는 눈망울과
그 뜨거운 가슴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저어 빨간 장미의 산호빛 웃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항상 별같이 살고파 하는 네 마음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흰 나리꽃이 가쁘도록 내쉬는 짙은 향기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꽃잎이 서로 부딪치며 이뤄지는 죄없는 입맞춤 속에 있다.
나의 노래는
소쩍새 미치게 우는 어둔 밤엘랑 아예 찾지 말라.
나의 노래는
태양의 꽃가루 쏟아지는 칠월 바다의 푸르른 수평선에 있다.
난초는
얌전하게 뽑아올린 듯 갸륵한 입새가 어여쁘다
난초는
건드러지게 처진 청수한 잎새가 더 어여쁘다
난초는
바위틈에서 자랐는지 그윽한 돌냄새가 난다
난초는
산에서 살던 놈이라 아무래도 산냄새가 난다
난초는
예운림(倪雲林)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난초는
도연명(陶淵明)보다도 청담한 풍모를 갖추었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를 보고 살고 싶다
그러기에
사철 난초와 같이 살고 싶다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산새새끼 포르르 포르르 멀리 날아가듯
찬란히 피는 밤하늘의 별밭을 찾아가서
나는 원정(園丁)이 되오리다 별밭을 지키는……
그리하여 적적한 밤하늘에 유성이 뵈이거든
동산에 피는 별을 따 던지는 나의 장난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어머니
만일 나에게 날개가 돋쳤다면
석양에 능금같이 붉은 하늘을 날아서
똥그란 지구를 멀리 바라보며
옥토끼 기르는 목동이 되오리다 달나라에 가서……
그리하여 푸른 달밤 피리소리 들려오거든
석양에 토끼 몰고 돌아가며 달나라에서 부는 나의 옥퉁소인 줄 아시오
그런데 어머니
어찌하여 나에게는 날개가 없을까요?
내 가슴 속에는
파르르 날아가는 나비가 있다. 나비의 그 가녀린 나랫소리가 있다.
내 가슴 속에는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이 있다. 강물에 조약돌처럼 던져 버린 첫사랑이 있다.
내 가슴 속에는
하늘로 발돋움한 짙푸른 산이 있다.
산에 사는 나무와 나무에 지줄대는 산새가 있다.
내 마음 속에는
‘산같이! 산같이!’ 하던 ‘내’가 있다.
오늘도 산같이 산같이 늙어 가는 ‘내’가 있다.
바람은 연신 불고 있었다.
안개 같은 비 사이로
비 같은 안개 사이로
엷은 햇볕이 내다보는 동안
문득
떠난 지 오랜 ‘생활’을 찾던 나의 눈은
아내의 눈을 붙잡았다.
아내의 눈도 나의 눈을 붙잡고 있었다.
불현듯 마주친
아내와 나의 눈맞춤 속에
어쩜 그토록 긴 세월이 흘러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몰랐다.
치열(齒列) 한 모서리가 무너진 아내는
이내 원뢰(遠雷)처럼 조용히 웃고 있었다.
조용한 우리들의 눈맞춤 속에
우
루
루
루
원뢰(遠雷)가 아스라이 또 들려오고 있었다.
추워 지친 하늘
서럽도록 짙푸르다.
물소리 잦아 시린 속에
해 지고
너는 가고,
종소리
노을에 젖어
목메어 은은한데,
원수도 없는 날을
살고파 타는 가슴
빈 주먹 쥐고 펴다
하루 해를 또 보냈다.
대바람소리
들리더니
소소한 대바람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런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거릴지언정
―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소리……
대숲으로 간다
대숲으로 간다
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
자욱한 밤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
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
대숲은 좋더라
성글어 좋더라
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더라
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
기억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꺼나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거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은 핏줄을 타고 오기에
호흡은 가뻐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 모란 순이
새끼손가락만치 자랐습데다.
― 너는 그렇게도
봄을 기두렸고나.
― 산수유(山茱萸)꽃이
벌써 시나브로 지던데요.
― 글쎄
봄은 오자 또 떠나는 게지……
그러기에 우린 아직도
경칩(驚蟄)이 먼 지역의 주민인가 봅니다.
산(山) 같은 침묵(沈黙)이 흐른다.
푸른 산이 흰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림처럼 두 팔을 드러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거니―
한 이파리
또 한 이파리
시나브로 지는
지치도록 흰 복사꽃을
꽃잎마다
지는 꽃잎마다
곱다랗게 자꾸만
감기는 서러운 서러운 연륜(年輪)을
늙으신 아버지의
기침소리랑
곤때 가신 지 오랜 아내랑
어리디어린 손주랑 사는 곳
버리고 온 ‘생활(生活)’이며
나의 벅차던 청춘이
아직도 되살아 있는
고향인 성만 싶어 밤을 새운다.
바다여
날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海岸線)의 바위는
‘베―토벤’처럼 귀가 먹었다.
지구(地球)도 나같이 네가 성가시면
참다못해
너를 벌써 엎질렀을 게다.
저 언덕에서
동백꽃은 네가 하 우스워
파란 이파리 속에 숨어서
너를 웃고 있지 않니?
동백꽃이
자꾸만 웃어 대는
고 빨간 입술이
예뻐 죽겠다.
살아보니
지구(地球)는
몹시도 좁은 고장이더군요.
아무리
한 억만년(億萬年)쯤
태양을 따라다녔기로서니
이렇게도 호흡(呼吸)이 가쁠 수야 있습니까?
그래도 낡은 청춘을
숨가빠하는 지구(地球)에게 매달려 가면서
오늘은 가슴 속으로 리듬이 없는
눈물을 흘려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여보!
안심하십시요,
오는 봄엔
나도 저 나무랑 풀과 더불어
지줄대는 새같이
발음하겠습니다.
어둠이 범람하는 지역에
도도히 범람하는 처참한 지역에,
자꾸만 짐승들은 울고
목놓고 짐승들은 자꾸만 울고,
찌눌린 가슴이라 숨결도 영영 동결되어 가는가?
‘그렇지만 설마 그래서야 될리라구!’
시궁창 같은 세월을 꽃도 머물어,
그대로 멈출 수 없는 작은 핏줄에
핏줄 속에 수떨이는 가느다란 소리 있어,
아직은 뜨거운 가슴을 서로서로
꽃으로 문지르는가?
‘아예 그대로 잦아들 순 없는 것이여!’
몸서리나는 어둔 밤을 비바람 미치게 몰려드는데,
번갯불 사이사이 천둥소리 들려오고,
머언 먼 천둥소리 산을 넘어 들려오고,
새벽을 잉태하는 뼈저린 신음소리,
우리 가슴에 밀려드는 파도소리……
‘그대들의 귀에 젖은 노래소리 아닌가?’
해저와 같이 깊은
밤―
침실은 더욱 조용허이……
어두운 영창에는 별빛 어리고
아라사 원시림을 거쳐온 밤바람
침실에는 삼림의 그윽한 내음새가 돈다
성당처럼 조용한 침실에 앉아
깨어진 살림의 내일을 또 생각하노니
밤이여―
그것은 단조한 비극이 아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토록 뜨거운가?
손에 손을 쥐고
볼에 볼을 문지르고
의지한 채 체온을 길이 간직하고픈 것은
꽃피는 봄을 기다리는 탓이리라.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봄의 유혹
파란 하늘에 흰 구름 가벼이 떠가고
가뜬한 남풍이 무엇을 찾어내일 듯이
강 너머 푸른 언덕을 더듬어 갑니다
언뜻언뜻 숲새로 먼 못물이 희고
푸른 빛 연기처럼 떠도는 저 들에서는
종달새가 오늘도 푸른 하늘의 먼 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시내물이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아지랑이 영창 건너 먼 산이 고요합니다
오늘은 왜 이 풍경들이 나를 그리워하는 것 같애요
산새는 오늘 어데서 그들의 소박한 궁전을 생각하며
청아한 목소리로 대화를 하겠읍니까?
나는 지금 산새를 생각하는 '빛나는 외로움'이 있읍니다.
임이여 무척 명랑한 봄날이외다
이런 날 당신은 따뜻한 햇볕이 되어
저 푸른 하늘에 고요히 잠들어 보고 싶지 않습니까?
‘루오’의 그림처럼
어둡게 살아가지만,
눈부신 햇볕을 원하는 건 아니다.
꾀꼬리
옥을 굴리듯 우는 소리보다는
차라리 가슴을 에어내는
귀,
촉,
도,
소리로 멍든 가슴을 채워 달라.
저 검은
까마귀떼가 지구 밖에서
하늘을 뒤덮는 건
차라리 견딜 수 있는 일이지만
안쓰러운 것들이
눈에 걸리는데
자꾸만 자꾸만
눈에 걸리는데,
그저
소라껍질을
스쳐가는 바람결처럼
차마 눈감을 수도 없거늘,
아아
하늘이여
피가 돌 양이면,
저어
야물딱진
민들레꽃을 피워내듯이
어서 숨을 돌리게 하라.
길이 넘는 유리창에 기대어
그 여인은 자꾸만 흐느껴 울었다.
유리창 밖에서는 놋낱 같은 비가 좌악 좍 쏟아지고
쏟아지는 비는 자꾸만 유리창에 들이치는데
여인의 흐느껴 우는 소리는
빗소리에 영영 묻혀 버렸다.
그때 나는 벗과 같이 극장을 나오면서
그 여배우를 아무래도 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생활의 창문에 들이치는 비가 치워
들이치는 비에 가슴이 더욱 치워
나는 다시 그 여인을 생각한다.
글쎄 여보!
우리는 이 어설픈 극장에서 언제까지
서투른 배우 노릇을 하오리까?
동백꽃이 떨어진다
빗속에 동백꽃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수(水)
평(平)
선(線)
너머로 꿈 많은 내 소년을 몰아가던
파도소리
파도소리 부서지는 해안에
동백꽃이 떨어진다
억만 년 지구와 주고받던
회화에도 태양은 지쳐
엷은 구름의 면사포(面紗布)를 썼는데
떠나자는 머언 뱃고동소리와
뚝뚝 지는 동백꽃에도
뜨거운 눈물지우던 나의 벅찬 청춘을
귀대어 몇 번이고 소근거려도
가고오는 빛날 역사란
모두 다 우리 상처 입은 옷자락을
갈가리 스쳐갈 바람결이여
생활이 주고 간 화상(火傷)쯤이야
아예 서럽진 않아도
치밀어오는 뜨거운 가슴도 식고
한 가닥 남은 청춘마저 떠난다면
동백꽃 지듯 소리 없이 떠난다면
차라리 심장(心臟)도 빙하(氷河) 되어
남은 피 한 천 년 녹아
철 철 철 흘리고 싶다.
산은 어찌 보면 운무와 더불어 항상 저 아득한 하늘을 연모하는 것 같지만 오래오래 겪어 온 피묻은 역사의 그 생생한 기록을 잘 알고 있다.
산은 알고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리고 그 기나긴 세월에 묻어간 모든 서럽고 빛나는 이야기를 너그러운 가슴에서 철철이 피고 지는 꽃들의 가냘픈 이야기보다도 더 역력히 알고 있다.
산은 가슴 언저리에 그 어깨 언저리에 스며들던 더운 피와 그 피가 남기고 간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마련하는 역사와 그 역사가 이룩할 줄기찬 합창소리도 알고 있다. 산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이슬 젖은 하얀 촉루가 딩구는 저 능선과 골짜구니에는 그리도 숱한 풀과 나무와 산새와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흘러가는 시냇물과 시냇물이 모여서 부르는 노랫소리와 철쭉꽃 나리꽃과 나리꽃에 내려앉은 나비의 날개에 사운대는 바람과 바람결에 묻혀가는 꿈과 생시를 산은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산은 우리들이 내일을 믿고 살아가듯 언제나 머언 하늘을 바라보고 가슴을 벌린 채 피묻은 역사의 기록을 외우면서 손을 들어 우리들을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이여!
나도 알고 있다.
네가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을
나도 역력히 알고 있는 것이다.
봉우리 넘어오는 구름
추녀를 스쳐가고
골엔
꾀꼬리 화답(和答)하는 소리
산이 울린다.
방을 둘러가는
산나비 지친 나랫소리―
그저
해만 설핏하면
소쩍새 울고,
산도 을씨년스러워
하늘만 바라보는데,
밤 들기 전
풀벌레 사운대는 속에
나긋나긋 잠이 온다.
지구(地球)엔
돋아난
산(山)이 아름다웁다.
산(山)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산(山)에는
아무 죄없는 짐승과
에레나보다 어여쁜 꽃들이
모여서 살기에 더 아름다웁다.
언제나
나도 산(山)이 되어보나 하고
기린(麒麟)같이 목을 길게 늘이고 서서
멀리 바라보는
산(山)
산(山)
산(山)
숲길 짙어 이끼 푸르고
나무 사이사이 강물이 희어……
햇볕 어린 가지 끝에 산새 쉬고
흰구름 한가히 하늘을 거닌다.
산가마귀 소리 골짝에 잦은데
등 너머 바람이 넘어 닥쳐와……
굽어든 숲길을 돌아서 돌아서
시냇물 여음이 옥인듯 맑아라.
푸른 산 푸른 산이 천 년만 가리
강물이 흘러흘러 만 년만 가리
밋밋한 오리나무 숲을
성낸 짐승처럼 함부로 헤쳐나오면
성근 소나무 소나무 사이로
아스므라한 바라 푸른 언덕에 솟아오르고
꾀꼬리 호반새 울어예는 산협에
홈초로니 푸른 오월이 지르르 흘러……
시냇물 졸졸졸 사뭇 지즐대는 기슭에
전나무 상나무 대수풀 우거지고
간지람나무 바람풍나무 제자리 잡아 서고
언덕을 돌아드는 오월 바람이 간지러워 간지러워
나뭇잎새들은 푸른 손을 자꾸만 뒤흔들며 몸부림친다
나는
짐승도 아니란다
나무도 아니란다
얇은 모시두루마기에 덮인 채
백로처럼 날아볼 수도 없고나
태화처럼 흔들릴 수도 없고나
잔인한 촛불에게 추방을 당하면서도
나의 침실을 잊지 않는 충실한 어둠이여
오늘밤 나는 너를 위하여 촛불을 끄고
재 작은 침실의 전면적을 제공하노니
어둠이여 너는 오늘밤에도 나를 안고
새벽이 온다는 단조한 이야기를 계속하겠지?
그러나 나는 밤마다 네가 속삭이는
그 새벽을 한 번도 맞아본 일은 없다
(대체 네가 새벽이 온다는 이야기를 한 것도 오래되건만……)
체온(體溫)도 스며들지 않는
서글픈 악수에 지친 주민(住民)이기에
나는 문득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숨이 가빠
그래도 숨이 가빠
어항도곤 좁은 지구를
뛰어나가고 싶었다.
개미새끼 흙탑을 쌓아올리듯
작은 서가에 틈 없이 책을 쌓아놓고
마음이 호수처럼 가라앉는 날……
한권 두권 내들고 읽는 한가한 날……
때로는 서가가 드높은 산같이 보이기도 하고
나는 그 산을 천천히 오르기도 하고
곤륜산보다 더 깊숙한 내 서가에
오늘은 난초 향기가 그윽이 흐르는 듯하이…….
흰 복사꽃이 진다기로서니
빗날같이 뚜욱 뚝 진다기로서니
아예 눈물짓지 마라 눈물짓지 마라……
너와 나의 푸른 봄도
강물로 흘렀거니
그지없이 강물로 흘러갔거니
흰 복사꽃이 날린다기로서니
낙엽처럼 취날린다 하기로서니
서러울 리 없다 서러울 리 없어……
너와 나는 봄도 없는 흰 복사꽃이여
빗날같이 지다가 낙엽처럼 날려서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버리는……
삼월보다 따스한
네 손을 달라.
백목련보다 하이얀
네 가슴을 달라.
불보다 불보다 뜨거운
네 심장을 달라.
시방 거리에는
음악 같은 실비 내리고,
실비 내리는 속에
동백꽃 뚜욱 뚝 지는 소리 들려오고,
돌멩이의 체온도 그리운
죽음보다 외로운 오후.
음악같이 내리는 실비 속에
나는 산처럼 서서 널 생각한다.
별빛 비마냥 쏟아지던 밤에도
수련(水蓮)꽃은 뚝뚝 떨어집데다.
태양(太陽)의 눈부신 분수(噴水) 속에서도
수련(水蓮)꽃 이파리는 날립데다.
바람도 없이 낮달이 흐르는데
수련(水蓮)꽃은 자꾸만 지던데요.
슬픈 역사(歷史)가 마련하는 이야기
낡은 청춘에도 젖어듭네다.
하늘가에 붉은 빛 말없이 퍼지고
물결이 자개처럼 반짝이는 날
저녁해 보내는 이도 없이
초라히 바다를 넘어갑니다
어슷어슷 하면서도
그림자조차 뵈이지 않는 어둠이
부르는 이 없이 찾아와선
아득한 섬을 싸고돕니다
주검같이 말없는 바다에는
지금도 물살이 웃음처럼 남실거리는 흔적이 뵈입니다
그 언제 해가 넘어갔는지 그도 모른 체하고―
무심히 살고 또 지내는
해― 바다― 섬― 하고 나는 부르짖으면서
내 몸도 거기에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산이여
그 무슨 그리움이 복받쳐
지구와 더불어 탄생한 이후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느뇨
산이여
나 또한 진정 그리운 것 있어
발돋움하고 우러러보아도
나의 하늘은 너무 아득하고나!
소년을 위한 목가(牧歌)
소년아,
인제 너는 백마를 타도 좋다.
백마를 타고 그 황막한 우리 목장을 내달려도 좋다.
한때
우리 양들을 노리던 승냥이 떼도 가고,
시방 우리 목장과 산과 하늘은
태고보다 곱고 조용하구나.
소년아,
너는 백마를 타고
너는 구름같이 흰 양 떼를 더불고
이 언덕길에 서서 웃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웃으며,
황막한 그 우리 목장을 찾아 다시 오는 봄을 기다리자.
수선화는
어린 연잎처럼 오므라진 흰 수반에 있다
수선화는
암탉 모양하고 흰 수반이 안고 있다
수선화는
솜병아리 주둥이같이 연약한 움이 자라난다
수선화는
아직 햇볕과 은하수를 구경한 적이 없다
수선화는
돌과 물에서 자라도 그렇게 냉정한 식물이 아니다
수선화는
그러기에 파아란 혀끝으로 봄을 핥으려고 애쓴다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 송이 피워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줄 지구도 없고
노루 새끼 한 마리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요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
나무 사이로
가시 사이로
잎 사이로
엽맥이 드러나게 햇볕이 흘러들고
젊은 산맥 멀리 푸른 하늘이 넘어갑니다
어머니
한때는 하늘을 잃어버리고
한때는 햇볕을 잃어버리고
슬픈 전설을 가슴에 지닌 채
죄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죄없는 짐승처럼 살아왔지만……
하늘이 너무 푸르지 않습니까?
햇볕이 너무 빛나지 않습니까?
어머니
당신은 아예 슬픈 전설을 빚어내지 마십시오
너그러운 햇볕을 안고
저 푸른 하늘을 우러러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무성한 나무처럼 세차게 서서
슬픈 전설은 심장에 지니고
정정한 나무처럼 살아가오리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볕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우에는 인제야 저녁안개가 자욱히 나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발길에 스치는 발자욱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뚝을 거쳐서 들려오던 물결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을부터 우리 전원(田園)을 방문하는 가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습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지구래도 변방 몹쓸 땅이었다
거센 태풍이 지나간 뒤
자작나무가 쓰러지더라
물푸레나무가 쓰러지더라
하늘이 못 견디게 푸르고
못 견디게 푸른 하늘로 태양이 왕래하고
은하수가 산을 넘어 흐르고
산을 넘어 흐르는 은하수에 별이 빠지고
한때는 이렇게 너그러운 세월이 있었느니라
한때는 이렇게 말썽 많은 세월이 있었느니라
태풍이 지나간다
지구가 풍선처럼 몰려가나부다
오동나무가 쓰러진다
은행나무도 쓰러진다
너도 쓰러지고
나도 쓰러져야 하는 날
인젠 태양도 별도 믿을 수 없다
차라리 어두운 밤에서
한 백년 더 살아보리라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1
저 허잘것없는 한 송이의 달래꽃을 두고 보더라도, 다사롭게 타오르는 햇볕이라거나, 보드라운 바람이라거나, 거기 모여드는 벌나비라거나, 그보다도 이 하늘과 땅 사이를 아렴풋이 이끌고 가는 크나큰 그 어느 알 수 없는 ‘마음’이 있어, 저리도 조촐하게 한 송이의 달래꽃은 피어나는 것이요, 길이 멸(滅)하지 않을 것이다.
2
바윗돌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大地)를 뚫고 솟아오른, 저 애잔한 달래꽃의 긴긴 역사(歷史)라거나, 그 막아낼 수 없는 위대(偉大)한 힘이라거나, 이것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내가 찬양하는 것도, 오래오래 우리 마음에 걸친 거추장스러운 푸른 수의(囚衣)를 자작나무 허울 벗듯 훌훌 벗고 싶은 달래꽃같이 위대(偉大)한 역사(歷史)와 힘을 가졌기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요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3
한 송이의 달래꽃을 두고 보더라도, 햇볕과 바람과 벌나비와, 그리고 또 무한(無限)한 ‘마음’과 입맞추고 살아가듯, 너의 뜨거운 심장(心臟)과 아름다운 모든 것이 샘처럼 온통 괴어 있는, 그 눈망울과 그리고 항상 내가 꼬옥 쥘 수 있는 그 뜨거운 핏줄이 나뭇가지처럼 타고 오는 뱅어같이 예쁘디예쁜 손과, 네 고운 청춘(靑春)이 나와 더불어 가야 할 저 환히 트인 길이 있어 늘 이렇게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아주 오랜 옛날
할아버지의 긴 장죽(長竹)에
부싯돌을 그어 대면
푸시시 푸시시 잎담배 타는 것이
퍽은 신기로웠다.
그것은
호랑이가 새낄 쳐 나간다는
‘변산(邊山)’이란 두메서
밀경(密耕)하는 담배가
가만가만 들어오던 때의 일이었다.
아직
소년이었던 나는
담배에 입맛을 붙여
숨어 피우던 그 쌉쏘름한 담배 맛을
시방도 아예 잊을 길이 없다.
인젠
할아버지의 부싯돌은
필연상(筆硯床)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지
모르지만,
할아버지 산소엘
성묘 가는 팔월이면
길 솟는
담배밭이 연이은 너머로
푸른 바다가 남실거리고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가 아스라이
보이는 곳.
사뭇
십 리를 가도
이십 리를 가도
삼십 리를 가도
그 너붓너붓한 담배 이파리가
해풍에 흔들리는
풍경 속을 걷다가
문득
할아버지의 그 부싯돌이 생각나서
돌아오는 성묘길에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앉아서
그 쌉쌀한 풋담배를
피워 물고 보는 하늘은
유달리 푸르렀다.
오는 팔월에도
담배밭 너머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그 산지기 영감님의 쌈지에서
잎담밸 한 대만
꼬옥 얻어 피우리라.
나는
그때 외롭게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나뭇가지를 옮아앉으며
‘동박새’가 울고 있었다.
어쩜
혼자 우는 ‘동박새’는
나도곤 더 외로웠는지 모른다.
숲길에선
은방울꽃 내음이 솔곳이
바람결에 풍겨오고 있었다.
너희들의
그 맑은 눈망울을
은방울꽃 속에서 난 역력히 보았다.
그것은
나의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너희 가슴속에 핀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젊고 늙은 산맥들을
또
푸른 바다의 거만한 가슴을 벗어나
우리들의 태양이
지금은 어느 나라 국경을 넘고 있겠습니까?
어머니
바로 그 뒤
우리는 우리들의 화려한 꿈과
금시 떠나간 태양의 빛나는 이야기를
한참 소근대고 있을 때
당신의 성스러운 유방같이 부드러운 황혼이
저 숲길을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어머니
황혼마저 어느 성좌로 떠나고
밤―
밤이 왔습니다
그 검고 무서운 밤이 또 왔습니다
태양이 가고
빛나는 모든 것이 가고
어둠은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까지도 먹칠하였습니다
어머니
옛이야기나 하나 들려주세요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철철이 꽃을 가꾸시고, 또 그 씨앗을 받으시는 당신의 모습이 어쩌면 성근 잎 사이에 꽃대를 올리는 한 그루의 난초가 아니면 허울 다 벗어 버리고 한두 송이 꽃으로 능히 그 향기를 전하는 고담(枯淡)한 매화나무와도 같사옵니다.
때때로 망연히 하늘과 하늘 사이에 뻗어나간 산을 바라보시는 의젓한 눈자위에는 영롱한 정기가 아직도 청춘에 뒤지지 않는 것은 꽃 같은 당신의 어진 마음의 표상인가 보옵니다.
다시금 꽃을 매만지시고, 쓰다듬고 하시는 양이 어쩌면 어린 손주 다루시듯 사념(邪念)이 없사오시니, 당신의 숨결이 또한 꽃 속에 스며 열매와 같이 성숙하는 것을 당신은 무심히 아시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꽃가루와 꽃가루가 부딪쳐, 고 까아만 씨앗이 영그는 속에 간직한 어린 나비의 나랫소리와 꿀벌들의 실내악 같은 음악소리와 간간이 꽃이파리 옆에 사운대다 떠나는 가는 바람소리에 뒤섞인 당신의 가벼운 기침소리와, 그 맑은 음성 또한 씨앗 속에 간직된 이것들과 무엇이 다르오리까?
우리들의 깊은 마음 아래 내려가 미칠 수 없는 머언 계단에서 참하고 에쁘고 아름다운 일이 이루어지고 열리어 가듯 꽃이파리 하나와 까아만 씨앗 속에서 비롯하고 이어가고 끝내는 삶과 죽음이 담담하게 계승되는 것을 당신은 오늘도 꽃 보듯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시옵나이까?
상나무가 둘러 잇는 마을 샘에서는 ‘숲안댁’이랑 ‘양년이’네 언니랑 그 지긋지긋한 감저순과 봄내 먹어내던 쑥을 헹구면서 ‘돌쇠’엄마가 가엾다고들 이야기하였다.
옥같은 서리쌀밤에 절이지를 감아 한 사발만 먹고프다던 ‘돌쇠’엄마는 해산한 뒤 여드렐 꼬빡 감저순만 먹다가 그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감저순은 속을 몹시 깎아낸다는 이야기, 그러기에 흉년(凶年) 너무새론 쑥을 덮어 먹을 게 없다는 이야기, 소같이 마냥 먹어내던 쌀겨도곤 차라리 패를 훑어 죽을 끓여 먹는 게 낫나는 이야기……
샘을 둘러 서 있는 상나무에서도 감저순과 쑥내음새가 구수하고 마을 아낙네의 새로운 생존철학(生存哲學) 강의(講義)에서도 너무새 내음새가 자꾸만 풍겨온다.
하늘이여
피가 돌기에 마련이면
어찌 독새기를 먹어야 하는 가뭄과 농토를 앗아가고 쌀겨을 먹이는 물난리와 자맥을 먹는 벼이삭에 몹쓸 바람을 보내야 하는가.
가을도곤 오는 봄을 근심하는 마을 아낙네의 서글픈 이야기가 오늘도 내일도 퍼져가는 한 지구(地球)는 영원히 아름다운 별일 수 없다.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가벼운
기침에도
허리가 울리더니
엊그제
마파람엔
능금도 바람이 들겠다.
저
노곤한 햇볕에
등이 근지러운 곤충처럼
나도
맨발로 토방 아랠
살그머니 내려가고 싶다.
‘남풍이 ×m의 속도로 불고
곳에 따라서는 한때 눈 또는 비가 내리겠습니다’
자작나무 숲을 가던 소년을 위한 시
자작나무 숲길을 한동안 걸어가면 자작나무 숲 사이로 자작나무 이파리보다 더 파아란 강물이 넘쳐 왔다.
자작나무숲 아래 조약돌이 가즈런히 깔려있는 강변을 한참 내려다보던 少年은 자작나무 숲 너머 또 구름 밖에 두고 온 머언 먼 고향을 생각해 보았다.
자작나무는 자작나무대로 눈부신 太陽의 噴水 속에 하이얀 피부를 드러낸 채 강바람에 숨가쁘게 흔들리는 것을 少年은 제 심장의 고동으로 착각했다. 그때 少年의 心臟도 자작나무보다 더 혼란스럽게 뛰는 것을 少年은 알았다.
이윽고 少年은 강변으로 내려왔다. 자작나무 숲을 빠져 강변으로 내려온 少年의 발길은 어찌 그렇게도 무거웠는지 少年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기에 少年은 강물줄기를 타고 그 아리잠직한 제 꿈과 생시가 도도히 실려가는 강물을 보는 것이 더 서러웠다.
해가 설핏했다.
노을은 연꽃빛으로 곱게 타다간 또 사위어 갔다. 구름들이 모두 저희들의 고향을 찾아가노라고 분주한데 벌써 하늘에는 별들이 죽순처럼 촉촉 솟아 나오는 것을 少年은 강변을 걸어가면서 바라보았다.
별을 바라보던 少年은 문득 어머니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이 없다. 어머니를 부르며 바라보는 하늘과 별은 한결 아스므라했다.
少年의 가슴속에 어머니가 살 듯 어머니의 마음속에 少年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아득한 별 속에 少年은 있었다. 少年의 마음속에 별들은 있었다.
자작나무를 스쳐오는 푸른 강바람은 少年의 머리칼을 자꾸만 흩날리고 있다. 마치 눈같이 하이얀 白馬의 갈기가 五月바람에 자꾸만 날리듯이-.
란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란이와 나는
작음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란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즈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란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란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거센 바람에 따르는 바다의 함성이라거나, 밀림을 포효하는 짓궂은 짐승들의 몸짓이라거나, 너와 나의 가슴을 두고두고 왕래하는 불덩어리 같은 것이라거나, 생각하면 짐짓 생각하고 볼 양이면,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바람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췰 감출 수 없는 바람결이다’
터지는 양광(陽光)의 그 다사로운 품안에서, 너를 달래고, 나를 달래고, 또 이웃을 달래고, 몇 번이나 눈짓하고, 끝내는 바스러지게 포옹을 할지언정,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포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영 스러질 수 없는 포말이다’
할닥이는 숨결로 이 치사스런 생명과 시를 다스리며, 더러는 슬기로운 전쟁으로 불장난을 하고, 더러는 삶과 죽음의 건널목에서 독을 머금은 혓바닥으로 꿈과 생시를 의논하며, 녹이 슬었을 극락을 의욕하지만, ‘지구’라는 지옥에서 허덕이는 한, 그것은 지구가 회전하는 대로 누적되는 검은 역사의 한 자락을 스쳐가는 꽃가루였다.
‘그러나 그것은 뜨거운 필 머금은 꽃가루다’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아
대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는 젖어 온 몸이 젖어……
란아
태양의 푸른 분수가 숨막히게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만 하늘 아래로만
흰 나리꽃이 핀 숱하게 핀 굽어진 길이 놓여 있다
너도 어서 그 길로 돌아오라 흰나비처럼 곱게 돌아오라
엽맥이 드러나게 찬란한 이 대숲을 향하고……
하늘 아래 새로 비롯할 슬픈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또 먼 세월이 가져올 즐거운 이야기가 대숲에 있고
꿀벌처럼 이 이야기들을 물어나르고 또 물어내는
바람이 있고 태양의 분수가 있는 대숲
대숲이 좋지 않으냐
란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놓아 울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竹]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새새끼 포르르 날아가버리듯
오늘밤 하늘에는 별도 숨었네
풀려서 틈 가는 요즈음 땅에는
오늘밤 비도 스며들겠다
어두운 하늘을 제쳐보고 싶듯
나는 오늘밤 먼 세계가 그리워……
비 나리는 촐촐한 이 밤에는
왜감[蜜柑] 껍질이라도 지근거리고 싶고나!
나는 이런 밤에 새끼꿩 소리가 그립고
흰 물새 떠다니는 먼 호수를 꿈꾸고 싶다
1. 밤
명랑한 이 가을 고요한 석양에
저 밤나무숲으로 나아가지 않으렵니까?
숲속엔 낙엽의 구으는 여운(餘韻)이 맑고
투욱 툭 여문 밤알이 무심히 떨어지노니
언덕에 밤알이 고이 져 안기우듯이
저 숲에 우리의 조그만 이야기도 간직하고
때가 먼 항해를 하여오는 날 속삭이기 위한
아름다운 과거를 남기지 않으려니?
2. 감
하―얀 감꽃 뀌미뀌미 뀌이던 것은
오월이란 시절이 남기고 간 빛나는 이야기거니
물밀듯 다가오는 따뜻한 이 가을에
붉은 감빛 유달리 짙어만지네
오늘은 저 감을 또옥 똑 따며 푸른 하늘 밑에서 살고 싶어라
감은 푸른 하늘 밑에서 사는 붉은 열매이어니
3. 석류
후원에 따뜻한 햇볕 굽어보면
장꽝에 맨드라미 고웁게 빛나고
마슬간 집 양지 끝에 고양이 졸음 졸 때
울밑에 석류알이 소리 없이 벌어졌네
투명한 석류알은 가을을 장식하는 홍보석이어니
누구와 저것을 쪼개어먹으며 시월 상달의 이야기를 남기리……
오동(梧桐)에
비낀 달
가을은 치워라.
고매(古梅)
성근 가지
영창에 거지었고,
철새 나는
하늘을
무서리 나려
풀벌레 사운대는
밤은
정작 고요도 한저이고
어디서
대피리소리
마디마디 가슴이 시리다.
시나대숲에
바람이 머물어
촛불도 눈물짓는 기인 긴
이 밤
나는
당시(唐詩)를 펴들고
아득한 아득한 잠을 부른다.
산정(山頂)에는 찢어진 하늘의 펄럭이는 푸른 깃폭 속에, 우리들의 가쁜 숨결이 숨어 있고,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 전쟁이 뿌리고 간 고운 피를 머금은 파란 도라지꽃들의 회화(會話)가 잦은데, 파도처럼 달려드는 바람소리 말을 달려 간 골짜구니마다 하얀 촉루가 동굴 같은 눈 언저리에 눈부신 태양을 받아들이곤 이슬같이 수떨이고 있다.
축제도 끝났다.
가면무도회도 끝났다.
인젠 모두 우리들의 때묻은 검은 야회복(夜會服)을 벗어던져도 좋다.
이렇게 촉루와 도라지꽃이 난만한 산을 데불고 꽃잎 같은 시간을 맞이하고 지우고 지우고 맞이하 는 동안 슬픈 강물엔 우리들의 역사도 띄워보냈다.
탕자(蕩子)처럼 돌아올 줄 모르는 인공위성이 몇천 바퀴를 돌아가도, 하늘은 하늘대로, 땅은 땅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짐승은 짐승대로, 의연히 그들의 무도회와 촉루와 도라지꽃을 구상(構想)하는 욕된 세월 속에
다시금
가져야 할 축제를 마련하면
그것이 ‘내일’이라는 희망 속에서,
무수한 절망과 자살과 투옥은 계산되는 것이다.
산이여!
너는 그러기에 오늘도
통곡을 생각하는 슬픔 속에 서 있는가?
통곡하라!
목놓아 어서 통곡하라.
‘내일’!
‘내일’의 축제를 위하여!
갈대에 숨어드는
소슬한 사람
구월도 깊었다.
철 그른
뻐꾸기 목멘 소리
애가 잦아 타는 노을
안쓰럽도록
어진 것과
어질지 않은 것을 남겨 놓고
이대로
차마 이대로
눈감을 수도 없거늘
산을 닮아
입을 다물어도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오는 날은
소나무 성근 숲너머
파도소리가
유달리 달려드는 속을
부르르 떨리는 손은
주먹으로 달래 놓고
파도 밖에 트여올 한 줄기 빛을 본다.
파초잎을 밟고 가는
저 바람 뒤에 겨울은 서 있겠지……
― 벌써 골 붉은 감잎이 휘날린다.
파초잎을 밟고 가는
저 빗발 뒤에 겨울은 서 있겠지……
― 사철 발 벗은 네가 보고파라.
파초잎을 밟고 가는
저 달빛 뒤에 겨울은 서 있겠지……
― 어디서 귀또리가 안쓰럽게 운다.
파초잎을 밟고 가는
내 어린 꿈 속에 겨울은 서서
― 저렇게 하이얀 눈을 날리는고나.
파초는 나와 이웃하고 산다.
나도 파초와 이웃하고 산다.
파초는 가끔 그 넓은 손으로 나의 창문을 흔든다.
휘영청 달밤에도 파초는 혼자 밤을 새우는 게 멋적은지 일쑤 나를 불러내곤 한다.
어쩐지 나도 외로워서 뛰쳐나가선
파초와 나란히 서서 달을 본다.
파초에 동부새가 온다.
하늬바람도 찾아온다.
허지만 비를 몰고 오는 마파람을 파초는 더 좋아한다.
후두둑
후두둑
파초잎을 밟고 가는 빗발에 영창이 어룽지고,
어룽진 영창가에 나는 붙어서서 파초를 지켜보며 산다.
파초를 이웃하고 살다 보니
인젠 정이 들었다.
그 아기자기한 정에 겨워 오늘도 우리 안사람이랑 함께 파초 옆에 서서
떠나간 ‘지훈(芝薰)’의 이야길 하다가 문득,
접때
광주 손주놈을 보고 돌아오던 날
비행기 창 옆으로 구름 밖으로 물러가던 무등산을 생각하면서,
고 ‘상락(尙樂)’이 놈이 퍽은 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 둘이는 뜨거운 눈맞춤을 하는 것이었다.
따뜻한 햇볕 물 우에 미끄러지고
흰 물새 동당동당 물에 뜨듯 놀고 싶은 날이네
언덕에는 누런 잔디 헤치는 바람이 있고
흰 염소 그림자 물 속에 어지러워
묵은 밭에 가마귀 그 소리 한가하고
오늘도 춤이 잦았다…하늘에 해오리…
이렇게 나른한 봄날 언덕에 누워
나는 푸른 하늘 바라보는 행복이 있다
하도 햇볕이 다냥해서
뱀이 부시시 눈을 떠보았다.
― 그러나 아직 겨울이었다.
하도 땅속이 훈훈해서
개구리도 뒷발을 쭈욱 펴보았다.
― 그러나 봄은 아니었다.
어디서 살얼음 풀린 물소리가 나서
나무움들도 살포시
밖을 내다보았다.
― 그러나 머언 산엔 눈이 하얗다.
핸 멀찌막히 ‘경칩(驚蟄)’을 세워 놓고
이렇게 따뜻하게 비췰 건 뭐람?
― 그러나 봄 머금은 햇볕이어서 좋다.
미치고 싶도록 햇볕이 다냥해서
나도 발을 쭈욱 펴고 눈을 떠본다.
― 그러나 ‘입춘(立春)’은 칼렌다 속에
숨어 하품을 하고 있었다.
푸른 계절이 모조리 휩쓸려가고
건강한 산맥들이 아주 물러앉은 뒤
세월은 오로지 슬픈 이야기만 싣고
장미처럼 받들던 네 심장을 사뭇 지나갔다
한사코 태양을 따라다니던 대낮도 인젠 싫다
푸른 하늘까지도 단숨에 삼키는 거룩한 밤을 가졌노라
한때 곤곤히 흐르던 난류가 멈춘 이후
네 심장에는 나날이 자라가는 한대식물이 무성하고나
네가 떠난 항구(港口)에
오월 바람이 설렌다.
머리칼을 날리는 젊은 아낙네들은
베피떡이랑 뎀뿌라랑 소주병을 늘어놓고
뱃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꼬박꼬박 기두리고 있는 항구(港口).
가대기의 뒤를 따라다니는 발 벗은 아이들은
구호양곡(救護糧穀)의 가마니에서 쑤시알갱이가 빠지면
병아리처럼 주워서는 차대기에 넣는 항구(港口).
Singoara같이 사랑하는 이의
성한 피가 몹시는 먹고프다는 그 백랍 같은 여인도곤
아낙네와 발 벗은 어린 것이 더 안쓰러운 항구(港口).
오월 바람 설레는 항구(港口)에
멀리 떠난 너를 생각하는 눈시울이 뜨겁다.
갓 핀
청해(靑海)
성근 가지
일렁이는
향기에도
자칫
혈압(血壓)이
오른다.
어디서
찾아든
볼이 하이얀
멧새
그 목청
서럽도록
고아라.
봄 오자
산자락
흔들리는
아지랑이,
아지랑이 속에
청해(靑海)에
멧새 오가듯
살고 싶어라.
댓이파리
댓이파리
댓이파리에
바람이 왔다.
바람은
댓이파리보다
더 짙푸르다.
난 밋밋한 대와
나란히 서서
쏟아지는 태양(太陽)의 파란 분수(噴水)를
어린 금붕어 새끼처럼 뻐끔뻐끔
마시는 것이
좋다.
나는
갑자기 대가 되어버린다.
파란 대가 섞인
나는 나를 잊어버린 채
대
대랑 산다.
흑석고개는 어느 두메 산골인가
서울서도 한강
한강 건너 산을 넘어가야 한다던고
좀착한 키에
얼굴에 까무잡잡하여
유달리 희게 드러나는 네 이빨이
오늘은 선연히 뵈이는구나
눈 오는 겨울밤
피비린내 나는 네 시를 읽으며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는 청년
그 청년이 바로 우리 고을에 있다
정주여
나 또한 흰 복사꽃 지듯 곱게 죽어갈 수도 없거늘
이 어둔 하늘을 무릅쓴 채
너와 같이 살으리라
나 또한 징글징글하게 살아보리라
[출처] 신석정 - 시모음 (별난언어 별난논술) |작성자 바람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