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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은 영 정 영 상 보 기
- 지정번호;보물 제 1215호
- 문화재명;이색영정 (李穡影幀)
- 분 류;초상화
- 수 량;3폭
- 지 정 일;1995.03.10
- 소 재 지;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463
- 시 대;영조31년(1755)
- 소유및관리;한산이씨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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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보기는 서울육백년사 홈피에서 발취한것 입니다. *http://sca.visitseoul.net/korean/painting/i_painting10017.htm
여말삼은(麗末三隱) 가운데 1인이었던 목은(牧隱)이색<李穡>(1328~1396)의 영정<影幀> 허목<許穆>의 "목은화상기<牧隱畵像記>"에 의하면, 원래 관복과 평상복의 초상화 2본<本>이 있었는데 원본은 전하지 않고 동형동규<同形同規>의 초상화가 서천 영모영당<永慕影堂>과 예산 문정공영당<文靖公影堂> (누산영당<樓山影堂>)에 모셔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기간 보관과정에서 초<초>가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이 심해 효종<孝宗> 5년<年>(1654) 후손들이 2본<本>을 모사하여 영당에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예산<禮山> 누산영당소장본<樓山影堂所藏本> 은 1654년 사대부화가였던 허의<許懿>(1601~?)와 유명한 화사<畵士> 김명국<金明國>이 그렸다고 전해지며 사모<紗帽>를 쓴 우안구분면<右顔九分面>의 자세에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공신도상형식<功臣圖像形式> 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목은영당소장<牧隱影堂所藏>의 소본<小本>은 비록 사방이 잘려나가 본래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반신상 <半身像>이지만 필세<筆勢>에 골격<骨格>이 감지되고 안면처리<顔面處理> 역시 섬세하여 누산영당본<樓山影堂本>과 같은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며 전체적으로 고격<古格>을 견지하고 있다. 대본<大本>은 누산영당본<樓山影堂本> 동형동규<同形同規>의 것으로 화폭<畵幅> 우측상단< 右側上端>에 추근<椎近>의 찬문<讚文>이 적혀 있는데 1526년 김희수<金希壽>(1475~1527)가 제기< 題記>를 썼던 영정을 1711년에 다시 개형<改模>하여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봉안<奉安>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며 고식<古式>을 충분히 따르되 약간씩 내비치는 선양기<渲梁氣>가 이 초상화의 이모년대<移模年代> 를 말해준다. 영모영당<永慕影堂>의 영정<影幀> 역시 동일<同一>한 상용형식<相容形式>인데 화폭 우측상단에 권근<權近>의 목은선생화상찬<牧隱先生畵像讚>과 제기<題記>가 적혀있어 이 초상화가 1755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본<本>은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에 비해 수염처리나 창의<창衣>의 묘사 등 표현 기법면에서 뒤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이는 이모<移模>을 거듭한 이유 외에 화사<畵師>의 기량이 못미친 때문으로 보인다.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화기<畵記>에 의해 조선 헌종 10년(1844)에 이모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예산 누산영당본과 동형동규<同形同規>의 본<本>으로 서대<犀帶> 및 족좌대<足座臺> 위의 문양표현이나 연폭<聯幅>를 사용하지 않은 점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 양식적으로 고식을 띠고 있으며 공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뛰어난 화사에 의해 이모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상에서와 같이 이색영정은 재세시<在世時>의 본<本>은 전하지 않지만 조선중기<朝鮮中期> 일류화가의 솜씨가 노정<露呈>된 원본<原本>에 충실한 반신상<半身像>과 전신상<全身像> 역시 여말선초< 麗末鮮初>의 초상화 양식을 갖추고 있고 연대<年代>가 올라가는 원본에는 거듭 중모<重模>한 것으로 3본<本> 모두 작품의 수준이 높고 비교적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피사인물<被寫人物>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므로 회화사연구 <繪畵史硏究>에 귀중한 자료<資料>로 평가<評價>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