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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란 7주갑이라하여 안동에서 여러 차례 학술 대회를 개최하면서 그 당위성에 대하여 안동이 우리나라 정신문화
수도인 점을 강조 하였습니다.
소위 임란9공신(송상현 조헌 고경명 이순신 윤두수 권율 유성룡 이항복 정곤수)의 단제사(壇祭祀:도백을 헌관) 사제사(賜祭祀: 중앙부처 공무원을 헌관)를 봉행하고 안동 담양 부산 안동 등의 순서로 학술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대 주최측에서 가상 설정한 학술 발표의 주제에 임란 발발의 철저한 원인분석은 뒷전으로 하고 전후 사회상에 치중하여
당시에 부패 무능한 집권세력을 비호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공신의 선정 경위나 제사의 봉행 유무 제사 절차 등을 문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딩시 위정자의 잘못이 붕당이나 다수의 비호아레 정당시 되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황이 현재도 계속되기에 참담한 심정으로 최소한 김삿갓 정신이라도 있어야 우리 사회의 정론을 논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항변 것입니다.
주최하는 사람들의 발표물 (임진전쟁.420년의 기억과 공존의 미래)에서
1. 거대한 통일 국가가 된 일본이 전력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침략하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아야 (5쪽 12줄)
그것은 율곡이나 중봉 황윤길등을 제외한 우연의 평화를 믿는 무능한 정치세력에 해당하는 말이다.
2. 일본군이 조선의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하였고.(5쪽 20줄).
그것은 호남과 동래부사 송상현을 모독하는 말이며. 길을 비켜주고 남바위쓰고 안내하였던 지역에 해당하는 말이다.
과거의 철저한 분석과 반성, 이해를 통하여 용서와 화합이 필요함에도 자아류의 사고에 젖어 우리 사회가 갈수록 마테복음 효과에
짓눌리는 것입니다.
작년 7월 우리 학회지에 실었던 졸고 " 은봉선생의 진주서사 소고" 근 100쪽 분량을 싣습니다.
뜻이 있다면 거창한 독후감 보다 댓글 한 줄이라도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첨부 진주서사 소고
1. 은봉선생은 어떤 사람인가.
은봉 안방준선생(1573-1654)은 조선후기 호남지역을 대표할 만한 史家요 성리학자로 우계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율곡 이이의 학문과 더불어 이기일원론의 畿湖學派를 형성하여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고 특히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에 호남과 관련된 저술 즉 이대원전(15세) 진주서사(24세) 호남의록, 임정충절사적, 삼원기사(43세)등 의 기록과 이율곡의 십만양병론, 조중봉의 절왜론,김건재의 방어책등을 채택 시행하지 못하여 화란을 부른 내막을 기록한 임진기사 등은 국란에 대처한 호남민중의 실상을 정리하여 알리는 不朽의 업적임에도 다른 지역에서보다 은봉선생에 대하여 알려지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학문의 성취과정에서 죽천 박광전 - 퇴계 이황의 연원과 우계 성혼 -휴암 백인걸 등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연원을 바탕으로 폭넓은 안목과 식견으로 동서 분당 간 공정한 의론을 주도하고자 1575 - 1650까지 약 70여년에 걸친 조야의 시시비비를 취합하여 混定編錄을 저술하여 조선후기의 당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 받고 있지만 1636년 인조 14년에 “辯栗牛兩先生被誣訴”등에 나타나듯이 율곡의 도학과 스승 우계의 임진년 大駕 서행시 왕을 마중하지 아니하였다는 誣陷을 변명하는 과정에서 노론의 주요인사로 지목되고 특히 호남지역에서는 기축옥사의 여파로 남인과 노론의 극심한 반목으로 시시비비 이전에 무조건 배척하는 풍토가 은봉선생의 학문적 업적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고 하겠다.
1587년 15세의 나이에 당시 고흥녹도 만호 이대원이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절의에 감동하여 李大原傳을 지어 조정에 알려지니 세상에서 두 분을 칭송하였고 약관에 임진왜란을 맞아 죽천선생을 따라 擧義하였으며 체찰사 송강 정철의 막료로 활동하였고 1596년 24세에 의병 군부에 출입하여 얻은 계사년(1593년 6월)진주성 혈전의 정보를 서술하여 鰲城日記와 참호고증을 거쳐 晉州敍事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니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여 순절한 대부분의 호남의사 정충장절이 민멸되지 않고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깊은 뜻이 있으며 이후에도 왜란의 시말을 釜山記事(1592년)로 정유재란시 해전을 露梁記事로 저술하였고 병자호란에는 老齡에 불구하고 직접 倡義한 시말을 丙子倡義錄으로 남겼으니, 이러한 기록물이 없다면 우리의 소중한 역사가 神話나 說話의 수준에 머물러 국란에 소홀한 부끄러운 과거를 감내해야 할 것이다.
은봉선생의 死後 1821년 순조21년에 예조판서 金羲淳의 諡狀에 의하여 文康公 이라는 시호가 내렸는데 그 의미는 도덕이 널리 들렸고 연원이 두루 통하였다(道德博聞曰文 淵源流通曰康)는 내용이며 이에 앞서 1814년 호남유생 노희원(盧希遠)등이 선생의 업적을 들어 시호를 내려줄 것을 상소하니임금이 예조에서 품처할 것을 명하자 1816년 당시 예조판서 趙德潤이 품의한 내용에 의하면,
“ 故 儒臣 贈 判書 安邦俊은 과거공부를 버리고 오로지 성리에 마음을 솓았으며 어린나이에 보성에서 천리나 되는 파주로 책궤를 짊어지고 성혼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싸움에 임하니 약관 의 나이에 그 타고난 자품이 탁월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대학의 뜻을 부연하여 책을 만들어 주자의 章句를 발휘하였고 理氣四七을 변별하고 설명하고 이율곡의 立論을 절충하였으며 古今典禮의 得失을 고증하자 사계 김장생이 精博함을 인정하였으니 그의 학문이 깊고 정밀함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승로 섬겼던 문간공 성우계로부터 정통 제자로 인정하여 衣書의 부탁을 받았고 함께 종유한 사람이 김장생이니 연원이 올바릅니다.
광해군이 기강을 어지럽힐 때는 冠을 벗어 걸고 전원으로 돌아갔다가 인조가 반정하였을 때 암행어사의 천거로 왕명을 받으니 그의 출처가 분명합니다. 이율곡과 성우계가 모함을 받았을 때 상소하여 극력 변론하니 선정을 추악하게 비방한 무리들이 잠잠하였고 이율곡의 석담일기를 월사 이정구가 실록을 편찬하는 곳에 보내 실록에 반영하여 善을 드러내고 惡을 억누르는 필봉을 드러냈습니다.
스승의 위치에서 강학하여 후진을 가르치자 사방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드니 우암 송시열은 “호남의 선비가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였으니 이로 보면 안방준은 훌륭한 시호 (文字諡號)를 받을 만 합니다. .
이이첨이 좋은 벼슬을 주겠다는 유혹을 끊었고 한찬남韓纘男의 잇다른 방문을 피하였으니 절의와 근본이 이미 초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오랑케 난은 임진 정묘 병자의 세 해처럼 심할 때가 없었는데 그는 매번 곧 의병을 일으켜 앞장서 나갔습니다. 임금이 의주로 피난하였을 때는 鄭松江의 체찰부에서 전략을 도왔으며 강홍립이 패전하였을 때는 오리 이원익의 撫軍司 에서 계책을 꾀하였고 , 남한산성이 포위되었을 때에는 천리길을 근왕하다가 화친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귀향하였고 경진년 1640년에 犯順居逆하여 쇠잔한 명나라를 치려할 때는 심혈을 쏟은 상소를 올려 천하의 대의를 밝히니 실로 金尙憲과 우열을 가릴 수 없으니 그 절의도 훌륭한 시호를 받을 만 합니다.
더욱이 그가 고심하였던 것은 .충의를 숭상하고 강상을 부지하여 정과 사를 분별하고 시와 비를 밝히는 데 있었으니 그가 저술한 문자나 조치한 일들의 대강을 들춰보면 抗義新編을 저술하여 중봉 조헌의 절의가 드러났고 노랄수사 (老辣瀡辭)가 이루어져 李貴의 忠情이 나타났으며 삼원기사를 기록하여
김덕령을 비롯한 세사람의 원통함를 씻게 되엇고, 혼정편록이 출판되어 金悌男의 억울함이 펴지고 선조 수정실록이 이루어 졌습니다. 김상헌이 사악한 무리들의 헐뜯음을 받자 상소하여 강력히 변론하였고 鄭松江이 옥사를 처리하다 모함을 받자 글을 지어 사리를 밝혔으니 그의 의리정신이 일의 공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당시 세상의 어진이들 이 안방준의 행적을 조정에 알렸으니 윤황은 그의 절의와 기상을 들었고 , 포저 조익은 그의 학문을 천거하였으며 秋灘 吳允謙은 그의 염퇴恬退를 천거하였고 李敬輿는 그의 행의를 천거 하였으며 민정중은 優禮를 청하였고 동춘당 송준길은 벼슬을 높여 주길 청하였으며 인조임금은 “내가 들어서 이미 안다”는 전교를 남겼으며 효종임금은 儒賢으로 대우하라는 영을 내렸으니 聖上의 知遇를 받음이 융숭하였다고 이를 만합니다.“하였다.
2. 임진왜란에 대하여.
임진왜란은 선조 25년 1592년과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소위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의役)을 일으켜 조선의 강토를 유린한 침략 전쟁으로
그 원인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조선조 개국 이후 2백 년간을 文弱에 빠져 정치와 사회기강이 해이 되었고 왜란 전 남해안 손죽도의 왜병침입과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론 등에 불구하고 우연의 평화만을 믿고 국토 수호 대책을 게을리 한 주류 정치세력의 무능과,
일본에서 풍신수길이 일본 내 지방 세력을 통합한 후에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조절하고 신흥 상업세력을 억제하려는 계책으로 對馬島主 宗義調 에 명하여 조선이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조선과 일본이 동맹하여 명나라를 치자는 목적으로 수호요구를 해왔고 조선에서는 支離한 논의 끝에 통신사 를 파견하여 1591년 3월에 왜인 平調信, 倭僧 玄蘇와 함께 귀국하였을 때 도요도미의 답서에 “ 征明假道”의 문구가 있었고 또 통신정사 황윤길의 침략 징후 귀국보고가 있었음에도 ,다른 의견을 보고한 김성일의 의견에 편당하여, 일본의 제후 간 전쟁을 통한 병법과 축성술 ,해운술, 조총의 정비 등을 통한 침략의 눈길에 소경놀이를 하였다.
“그 결과 1592년 4. 14일 왜병 소서행장을 선봉으로 한 제1군이 350여척의 배로 부산에 상륙하여 상주, 문경, 충주를 향하고, 가등청정이 이끈 제2군은 을산, 영주, 충주를 향하는 등 대단한 기세로 북진하여 5. 2일에는 서울 함락에 이어 6,18일 평양을 함락하고 함경도에서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추격하여 잡아가고 선조 임금은 드디어 6.22일 의주 관아에 좌정하기에 이르렀다. 명나라의 화의 주선에 응할 듯 말 듯 시간을 끌다가 화의를 주관한 명나라 심유경이 일본의 화의조건 네가지 즉
1. 명의 황녀를 일황의 후비로, 2.朝日간 무역을 복구하기 위한 감합인의 부활, 3. 조선의 4도를 일본에 할양, 4.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낼 것 등을 일본국에 거짓 수용하고 본국에 허위 보고한 것이 발단이 되어 왜적이 다시 공격하여 왜적들이 1597. 7. 15일 칠천량 전투에서 원균의 수군을 대파하고 육로에 서는 남원성을 함락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우리의 관군과 의병이 반격하여 경기도 소사에서 크게 이기고 수로에선 왜의 첩자 요시라의 계책에 말려들어 파직시켰던 이순신 장군을 다시 기용하여 명량해전에서 크게 이겨 7년 전쟁의 막을 내렸다, 이 전쟁에 우리 관군과 의병은 물론 왜병 20만. 명군 22만이 수륙에서 격돌하였으니 강토를 유린 당한 전쟁의 참화를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
3. 은봉 야사별록과 晉州敍事에 대하여,
o 진주서사는 임진란이 일어났던 이듬 해 1593. 4월에 왜군이 철병할 듯 울주의 서생포에 집결하여 화의의 진행상황을 지켜본 듯하다가 전년 1592.10.6 일에 진주성에서 김시민 목사 등 조선군에 당한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여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하자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황진 등이 힘써 싸웠으나 성 밖에서 지원이 없자 6. 28일 무민공 황진 장군이 전사하고 때마침 장마비가 내려 성이 무너져6.29일 함락 당하는 과정에서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 많은 호남의병이 남강에 투신 순절하는 등 죽은 자가 6만 여명으로 왜란 중 가장 치열한 전투로 나타났으며 성안에서 참전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生還한 광양사람 생원 임우화의 목격담 등을 1596년 12월에 은봉선생께서 저술하여 전란 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이항복의 “鰲城日記“ 와 校勘을 거쳐 1622년에 “진주서사”라는 책으로 완성하고 후에 은봉선생의 행장(시남 유계 찬) 과 신도비(우암송시열 찬)가 이루어 지던 1663년에 “야사별록” 합본으로 편찬 하였는데,
임진왜란 전 이율곡의 십만양병론, 통신정사 황윤길의 왜적의 침략준비 징후보고의 처리과정, 전란 초기 대응과정 금산의 칠백의사 순의사실 등을 기록한 임진기사.
이충무공이 12척의 배로 정유재란에 다시 기용되어 왜적을 물리치고 1598년 관음포에 장렬히 최후를 마치자 부장 송희립 장군이 대신 수군을 이끌어 큰 승리를 거두었던 수군의 활약상을 기록한 노량기사 ,
이충무공과 녹도만호 정운 장군등 수군의 활약상을 일기체로 기록한 부산기사와 함께 은봉선생께서 남기신 매우 중요한 기록문으로 후일에 택당 이식 선생이 춘추관사를 맡았을 때 선조실록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자 宣祖 修正實錄을 편찬하는 史料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663년 12월에 보성 인근 고을인 흥양향교에서 간행한 은봉집의 야사별록이 어떠한 과정으로 일본으로 전파된 경위는 정확히 고증할 수 없지만 嘉永 己酉 1849.11월에 일본에서 “ 은봉야사별록”이라는 책으로 간행되어 우리나라까지 다시 전파 되었는데,
그 책의 서문을 쓴 일본학자 동재조천진(同齋朝川震)이 적기를 “나라의 폐단이 안에서 쌓이지 않는다면 어지러움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우환이 밖으로부터 편승하지 않는다면 망하는 것이 빨리 오지 않는다. 조선은 선조 이전에는 국가가 한가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임금과 신하의 위아래 모두가 편안하제 지내면서 위험에 대비하는 것을 잊었다. 그리하여 점차 음란 사치해지고 기강이 해이하여 안으로는 休養의 정치를 폐하고 밖으로 海關의 방어를 소홀히 하였으며 그 폐단이 축적되어 재앙을 잉태한 것이 오래되었다. 오랑케가 하루아침에 출동하자 변방의 관리가 위급함을 보고하였는데도 오히려 두 얼굴을 가진 자들이 간사한 아첨을 밑고 착한 사람들의 忠恕와 계교를 막았다 “ 라고 평하였으며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나라는 반드시 스스로 해친 이후에 다른 사람이 해치는 것이며 화와 복은 자기로부터 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며 조선의 잘못을 지적하였고 일본에서는 詩經의 ” 타산지석 가이위착(他山之石 可以爲錯)으로 삼고자 책을 간행한다: 고 밝혔다. 조선조 유학의 폐단이 유학자체의 잘못이 아니고 당면한 사회생활의 문제 제기를 한 소수 비주류와 변경의 목소리를 배척한 주류 유학의 죄라고 할 수 있으며 참으로 이 안타가운 현실 앞에서 우리들이 우리의 과거사를 어떻게 반성하여야 할지 고민하면서 이에 대하여 필자는 서양의 역사철학자 조지안탸아나의 말 “역사는 반복한다” 로 대신하고자 한다.
o 본문을 살펴보면 크게 세 단원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초기 전쟁 전개 과정으로 왜적이 전년도 진주성 싸움 패전의 설욕과 명나라 심유경의 비협조 로 명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고 진주목사 서예원의 무능으로 관군의 방어태세가 미비하여 여러 장수들이 호응하지 않자 창의사 김천일 장군을 비롯한 대다수 호남출신 의병과 관군이 성에 들어가 방어 태세를 갖추게 된 상황을 말하였고 ,
다음 6.18일 부터 6.29일 성이 함락 당할 때까지를 일기형식으로 서술하였고 마지막으로 진주성 싸움 후 왜적이 하동과 구례 석주관 으로 이동하고 이 때 전에 포로 되었다가 귀환한 임우화의 略傳을 싣고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진주성 싸움이 창의사 김천일의 실책이라고 주장한데 대한 반론을 실었다.
o 진주서사 역문
만력(명나라 신종 연호) 21년 계사년(선조26년 1593년)6월에 왜적이
진주를 함락하니 성을 지키던 여러 장수들도 모두 죽었다 . 이에 앞서 임진년(선조25년 1592년) 여름에 왜적은 바다와 육지로 길을 나누어 호남을 침략하려고 꽤했으나 한 길(수군)은 한산도에 이르러 수사 이순신에게 격파되었고 한 길(육군)은 진주성에 이르러 판관 김시민의 저항을 받아 모두 뜻을 이울 수 없었다 . 이로 말미암아 왜적들은 항상 분하고 한스러워 하였다
이해 봄에 명나라 장수들과 잇달아 강화를 맺고자 하니. 서울밖의 왜적들이 모두 영남에 모여 병세(兵勢)를 크게 떨쳤다. 왜장 가등청정은 풍신수길에게 보고하여 다시 진주를 공격하고 이어 호남을 치겠다고 청하였는데 수길이 이를 허락하였다.
6월 14일에 가등청정은 여러 장수들의 병졸 수십만명을 규합하여 동래를 출발하여 곧바로 진주로 향하였다. 당시에 총병 유정과 유격 오유충은 대구에, 참장 낙상지와 유격 송대빈은 남원에 , 유격 왕필적은 상주에 있었고, 유격 심유경은 왜적의 우두머리 소서행장의 처소에 있었으며 경략 송응창은 서울에 있었다.
유정이 가등청정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일본이 우리 속국(조선을 말함)을 해치고 병사들이 연달아 화를 입으니 황상(명나라 황제)께서 크게 노하여 특별히 절월(節鉞)을 내리고 용맹스러운 신하를 나누어 보내 長鯨을 모조리 없애버려 동해를 영원히 맑게 하과 하였다.최근에는 심유경이 오가며 강화를 직접 논하니 일본이 마음을 기울여 싸움을 그친 뒤 정성스런 예를 바쳐 강화하기를 청하고 모두 물러나 무리를 이끌고 자기나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또 부산으로부터 소사비탄수구대부小西飛彈守久大夫를 보내 머리를 조아려 天朝(명나라 조정)의 명을 기다리니 한결 같은 마음과 지극한 정성을 깊이 칭찬할 만하였다. 따라서 천조에서 보낸 백만대군이 모두 압록강가에 이르러 멈추었고 대장 李아무개는 2만을 이끌고 서울에 주둔하였고 총병 郭아무개와 李아무개는 20만을 이끌고 遼東 에 주둔하였으며 부총병 吳아무개와 기타 여러 장수들은 병사를 거느려 평양과 개성에 나누어 포진한 것이 또 10여만 명인데, 모두 출병을 누루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약속된 논의를 어기게 되고 당당한 천조의 하늘과 땅 같은 도량을 잃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너희들은 돌아갈 뜻을 결정하지 않고 다시 晉州를 공격하여 갑자기 이전의 약조를 어기려 하고 있다. 너희들은 옛날의 분통함을 씻겠다고 말하지만 저 조선 팔도의 남녀는 씀바귀 독같은 전란을 만나 나뒹구는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창 끝에 는 머리가 메달려 있으니 또한 처참함이 극에이르렀다 힐 것이다. 그런데도 다시 또 무슨 원수가 남아 있단 말인가? 더구나 진양(진주)의 좁은 성에 대해 하필 조그만 증오를 마음에 두어 중국에 대한 커다란 맏음을 기꺼히 잃으려 하는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서 병사를 거두어 너희나라로 돌아간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함으로써 외국에 대한 신용을 잃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다시 어리석음에 사로 잡혀 끝네 전쟁을 그치지 않는다면 조미복선 누선백조 용조 사선 등 동교소소 해도 팔라호 팔장등의 배에 백만의 무장한 병사를 싣고서 바다 가에서 요격하여 너희들의 귀로를 끊고 너희들의 군량보급을 차단하면 결전을 기다리지 않아도 장차 너희들은 섬 가운데서 저절로 죽게 되어 한 조각의 갑옷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또 관백(풍신수길)과 너는 원래 서로 어께를 견줄 만하였는데 너희들은 새장 속에 갇혀 부림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관백은 이미 천조를 흠모하여 貢物을 바쳤는데 너희들은 왜 진주를 향하여 다시 포위하려하는가? 오늘 진격할 것이지 퇴각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사이에 관련되는 이해가 적지 않으니 여러 번 생각하고 스스로 살펴보아 서제(噬臍)의 후회를 면하도록 하라. ” 하였으나 왜적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심유경이 소서행장에게 역설하여 진주공격을 그만두게 하자 소서행장이 말하기를 “ 오늘의 일은 나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직 가등청정이 이일을 힘써 주관하였소. 온갖 방법으로 타이르는 것 보다 먼저 성을 비워서 그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는 것이 나을 것이오” 하였다.
심유경이 돌아오자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한효순이 말하기를 “ 진주의 일이 급하니 노야(심유경을 존칭하는 말)께서 힘써 구해주기 바라오”하였다 . 이에 심유경이 말하기를
“저들은 지난해에 이곳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분통과 한을 품고 마음을 단단히 하여 쳐들어 온 것이니, 이제 다른 계책이 있을 수 없오, 다만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소서행장이 말한 대로 한 것이 좋을것이오 ” 하였다.
이때 관군과 의병은 모두 함안 등지에 있었다. 창의사 김천일이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왜적의 계책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진주한 곳만 공격한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대저 진주는 호남과 매우 가까워 입술과 치아와 같다 하겠소. 만일 이곳을 버리고 가서 왜적들을 승승장구하게 만든다면 화가 반드시 호남에 까지 미칠 것이니 , 힘을 합쳐 견고하게 지켜서 왜적의 세력을 막는 것이 나을 것이오 ” 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巡邊使 이빈(이빈) 紅衣義兵將 곽재우는 丹城에서 지름길로 山邑으로 들어가고 좌의병장 任啓英은 사천에서 곧장 호남으로 돌아갔으며 , 수령과 여러 장수들 역시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다. 다만 倡義使 김천일, 右義兵將 慶尙右兵使 최경회 , 충청병사 黃進, 거제현령 金俊民 해미현감,鄭名世, 좌의병 부장 사천현감 張潤, 복수의병장 高從厚 및 그 부장 吳宥, 熊義兵將 이계연, 飛義兵將 민여운 彪의병장 강희보 등은 각각 병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성에 들어갔을 때 여러 장수의 막하 병사 중 쓸 만 한 자가 없는데 그들의 성을 나갈 것을 허락하니 모두 수십 명이나 떠나갔다. 오직 김천일 막하에 아들 象乾과 좌랑 梁山璹 , 최경회 막하의 진사 文弘獻, 고종후 막하에 정자 吳玭 내금위 金麟渾 참봉 高敬元등 대여섯 사람만 가지 않았다. 이때 김해부사 李宗仁이 먼저 입성하여 방어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 목사 서례원은 기꺼이 따르지 않았다. 이종인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여러 의병장이 지금 모여들고 있으니 가볍게 성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리라” 하자 서례원은 겁이 많은 사람이라 마침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6월 18일에 전라병사 宣居怡와 조방장 洪季男 등이 와서 말하기를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맞서는 것은 참으로 옳지 못하오”하고 곧 바로 되돌아가 운봉에다 진을 쳤다. 이때 奮義將 강희열은 元帥의 명으로 助防將을 겸하여 여러 고을의 군병을 거느리고 구례 석주관(石柱關)의 棧道를 지키다가 이 말을 듣고 분발하여 말하기를 “ 관군이 피할 것을 꽤함도 오히려 옳지 않은데 하물며 의병이랴?
하고 마침내 달려 찾아왔다. 적개의병장 邊士貞도 사정이 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부장 李潛을 보내니 모든 부장들이 말하기를
“많은 왜적들이 쳐들어오려고 해서 도망가기를 꽤하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들만 무슨 이유로 死地에 나갑니까? ” 하였다. 이잠은 그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병사들을 재촉하여 나아갔다. 당시 선거이와 홍계남이 나가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확고한 의지가 없었으나 강희열등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좋아 뛰면서 분전할 것을 다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때 김천일의 군이 500, 최경회의 군이600, 황진의 군이 700, 고종후의 군이 400, 장윤 이잠의 군이 각 각 300, 민여운 강희보 강희열등의 군이 각 각 200여명이었고 여러 수령의 병사 및 본주의 민병과 피난 온 남녀를 포함하여 6-7만 여명이 되었다. 이빈이 영릉 전하기를
“ 고종후는 성밖으로 나가 선거이,홍계남 등과 합세하여 밖에서 도우라” 하였다. 성안에 있는 장병들도 대분 그렇게 하라고 권하였으나 고종후는 모두 듣지 않았다.(지난해 금산전투에서 父兄이 同殉하여 몸이 초췌하였다.)
이에 성을 나누어 지키기로 하였다. 성의 남쪽 촉석은 가장 험하여 적이 범할 수 없었으나 동 서 북 三面은 왜적과 맞서기에 걱정스러웠으므로 의병으로 하요금 지키게 하였다.
황진 이종인 장윤은 각 각 수십 명을 이끌고 왜적이 접근한 곳을 따라 가면서 구원히기로 했고 , 막하의 많은 유생들도 몸소 술과 밥을 가지고 성을 돌면서 병사들을 먹이기로 하었다.
약속이 이미 정해지자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으로써 지킬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19일에 명나라 장수가 상주목사 鄭起龍 과 함께 와서 성지(城池)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 남으로는 큰강이 있고 북으로는 깊은 연못이 있으니 실로 하늘이 만든 땅이오, 또한 총병 유정이 밖에서 돕고자 대구로부터 병사를 움직여 선봉이 이미 함양에 도착했는데 우리를 보내면서 먼저 알려주는 것이오 ” 하였다.
20일 아침에 심유경이 帖文(첩문: 위에서 아래로 보내는 공문)을 보내왔는데 그 대강의 내용은 지난번에 말한 대로 성을 비워주고 싸움을 피하라는 뜻이었다. 이날 오유,이잠 및 이 고을의 무사 鄭國祥 등이 성 밖에 나가 왜적을 였보았다, 왜적의 선봉이 이미 고을의 경계에 들어섰는데 두 장수가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자 정국상 등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 두 장수가 왜적을 만나 쫓아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필시 도망했을 것입니다, ” 하였다. 조금 뒤에 두 장수가 각 각 여러 명의 왜적을 베어 가지고 돌아오자 성안에서는 북을 치며 떠들썩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칼을 뽑아들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성안에 있는 사람이 모두 의사로다. 내가 급함을 알려 도우러 오도록 하리라.“하고 즉시 정기룡과 함께 돌아갔다.
처음에 김천일이 함안으로부터 와서 양산숙 홍함(洪涵)등을 보내어 유정에게 원병을 청하는 편지를 전달하였다, 그 글은 고종후가 지은 것으로 말의 뜻이 격렬하였으며 이어서 양산숙도 말하는 기운이 강개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유정은 다 읽기도 전에 자기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얼굴빛을 고쳤으나 끝내 군사를 출정시킬 뜻은 없었다. 홍함이 돌아오는 길에 양산숙을 버리고 달아나니 산숙이 울먹이며 말하기를 ” 위급함을 만나 구차하게 도망하여 主將 만을 홀로 사지에 빠지게 하는 것은 義가 아니다.“ 하였다.
마침내 혼자서 말을 타고 성으로 돌아오니 모든 군사가 놀랬다.
21일 진시(오전 7-9시사이) 왜적의 騎兵 수십이 동북쪽 산위에 출몰해서 아래를 살펴보고 돌아갔다. 사시(오전 9-11시 사이)에 또 기병 수백여 명이 북쪽 산에 올라가 진을 치고 兵勢를 뽑냈다, 조금 뒤에 많는 군사가 계속이르러 성을 세겹으로 포위하고서는 탄알 한방도 쏘지 않았다, 성안에서도 역시 병사들을 머무르게 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이내 왜적이 물러갔다. 개경원(開慶院:진주 동쪽 2리에 있는 院)으로부터 마현(馬峴에 이르기까지 큰 진영이 세 곳이나 있었고 그 나머지의 조그만 진영도 밤하늘의 별이나 바둑돌처럼 헤아릴 수 없었다.
22일에 왜적이 성 밑에까지 바짝 다가왔다. 이침부터 포시(哺時: 오후 3 -5시 사이)까지 철환이 비 오듯 쏟아졌으나 성안에서도 있는 힘을 다해 막아내니 왜적이 이내 물러갔다. 강희보가 말하기를
“ 적의 기세가 이와 같으니 관군에게 죽음을 각오한 용사를 보내어 구원을 청하지 않을 수 없오 ”하고 자기 막하의 임우화(林遇華:광양 출신으로 박식하고 담력과 지략이 있는자로 석주관 잔도를 지키다 강희보 강희열과 함께 진주성에 합류함 )로 하여금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 나가도록 하였으나 5리도 못가서 왜적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후로 적이 올 때마다 임우화를 묶어서 맨 앞줄에다 놓아두고 보여 주었다. 이날 밤에 왜적은 또 동문을 공격하여 큰 소리를 지르며 성벽을 오르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황진 등이 혈전을 벌리니 왜적은 이내 물러갔다. 서예원이 당황하여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 김천일과 최경회가 상의하여 장윤으로 하여금 임시로 주의 일을 맡도록 하니 성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의기가 저절로 배가되었다. 하루는 왜적이 서북쪽 모퉁이로부터 큰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자 성가퀴(陴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를 지키던 자들이 모두 도망가서 성이 거의 함몰 될 뻔 하였다. 황진이 칼을 휘두르면서 크게 소리쳐 말하기를 “오늘에야 내가 죽을 곳을 얻었도다.” 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돌아와 모여서 마구 화를 쏘아대니 왜적이 다시 물러갔다. 왜적은 또 동문밖에 몇 길(仞 )높이의 산을 만들어 놓고 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하였다. 이에 황진도 또한 대항해서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몸소 돌을 짊어지고 가니, 남녀가 모두 감동허여 흐느끼면서 일을 도와 하루 밤 만에 이룩하였다. 마침내 큰 대포로 왜적의 소굴을 깨부수니 왜적이 물러갔다. 왜적은 또 나무 궤(木櫃)를 만들어서 짐승 가죽을 씌운 뒤 그것을 짊어지고 와 성을 헐려고 하였다. 이에 황진이 큰 돌덩이를 아래로 굴리고 어지러이 활과 포를 쏘아대니 왜적이 물러갔다. 왜적이 또 동문 밖에 두 개의 큰 나무를 세운 뒤 그 위에 판잣집을 짓고는 성안에다 불화살을 쏘니 집들이 즐비하게 불에 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황진도 역시 반 나절 만에 판잣집을 완성하고 마침내 큰 대포로 왜적의 소굴을 맞춰 깨부수자 왜적이 일단 물러갔다. 이때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성의 한 모퉁이가 무너지니 왜적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마구 뛰어들었다. 김준민은 힘껏 싸우다 죽었고 왜적들은 물러갔다. 왜적이 성안으로 글을 보냈는데 대략 말하기를 “ 온 백성이 성안에 들어가 일시에 모조리 죽음을 당하는 것은 처참한 일이다. 장수 한 사람을 붙잡아 우리에게 보내면, 그 나머지는 성안에 안전하게 있을 수 있다. 만일 강화를 원한다면 쓰고 있는 삿갓을 벗어 세 번 흔들어라.” 하고 글의 끝에다 “ 6월 27일 羽柴備前宰相豊臣秀家 再拜(우시비 전재상 풍신수가 재배)”라고 적었다. 성안에서 답장을 보내 말하기를, “ 우리들은 변함없이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 더욱이 명나라 군사 30만이 곧 추격할 것이니 , 너희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여 살아 돌아 가는자가 없으리라 .” 하였다. 왜적은 팔뚝을 걷어붙이고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 명나라 군사는 이미 물러갔다.“하고 마침내 동문과 서문밖에 다섯 개의 언덕을 쌓고 대나무를 역어 성채(柵)를 만들어 총을 쏘니 姜希輔가 힘껐 싸우다 죽었다. 또 황진등이 불화살을 쏘아 성채를 무너뜨리니 왜적이 곧 물러 갔다. 왜적은 또 커다란 궤를 만들어 사륜거(四輪車)위에 올려 놓고 견고한 갑옷을 입은 날센 병졸 수십 명으로 하여금 수레를 끌고 전진하여 철추(鐵錐)로 성문을 뚫게 하였다. 황진등이 나무를 묶어 불을 붙이고 거기에 기름을 끼얹어서 던지니 궤에 있던 왜적들이 모두 죽어 왜적들이 모두 죽어 이애 물러갔다.
28일에 서예원이 천경(踐更: 시간마다 보행순찰 하는 것)을 소홀히 하여 왜적들이 몰래 다가와 성을 뚫으려고 하였다. 황진 등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죽기로 싸우니 왜적의 우두머리 한 사람이 탄환에 맞아 죽었고 죽은 사람이 또한 천여 명이나 되었다. 황진이 성에서 내려다 보며 말하기를 “ 오늘의 싸움에서 왜적의 시체가 해자(垓字: 성 주위를 둘러 판 못)에 가득차니 대첩(大捷)이라 할 수 있겠다” 하였는데 갑자기 왜적 한 명이 올려다 보면서 총을 쏘아 황진은 왼쪽이마에 탄환을 맞고 죽었다. 이종인이 시체를 거두어 삼밭에 묻었다. 이때 황진 장윤 이종인 김준민 오유 이잠 강희보 강희열 등이 모두 열심히 싸웠는데 黃進의 충렬과 지혜와 용맹이 여러 장수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깊이 의지 하였는데 그가 죽자 떠들썩하면서 두려워하였다.
29일에 서예원이 황진을 대신하여 巡城將이 되었는데 예원은 갓을 벗고 마레 올라 눈물을 흘리며 순행하였다. 이에 최경회가 격분하여 베어 버리려고 하였으나 그만 두고 즉시 장윤으로 대체하였는데 장윤 역시 총에 맞아 죽었다.
이에 동문의 성이 비로 인해 무너지니 많은 적들이 개미때처럼 달라 붙어 올라 왔다. 이종인 등이 친히 거느리던 병사와 함께 활과 화살을 버리고 짧은 무기를 들고 육박전을 벌려 왜적은 거의 죽고 물러갔다.
왜적의 정예군이 또 서문과 북문으로부터 칼을 휘두르면서 뛰어 올라
다가오자 서예원이 먼저 달아나고 여러 군대는 크게 무너져 모두 촉석에 모였다. 왜적이 마침내 마구 들어오자 이에 창의사의 아들 象乾과 양산숙이 창의사 김천일을 부축하고 진사 문홍헌은 경상우병사 최경회를 부축하고 김인혼과 고경원은 복수장 고종후를 부축하여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남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양산숙은 평소에 수영을 잘 하였으므로 김천일이 말하기를 “ 너는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 힘을 다해 빠져나가 다시 도모하여 이 왜적을 섬멸하라 ” 하였으나 양산숙은 의리상 혼자만 살아 남을 수 없어 마침내 함께 죽었다.
이종인 강희열 오유 이잠 등 십여 명은 칼을 휘둘러 왜적을 무찌르다가 죽음에 이르러 그쳤다. 최후에 이종인은 싸움을 계속하다가 남강에 이르러 양쪽 겨드랑이에 각 각 왜적 한 사람씩을 끼고 물에 뛰어 들며 큰소리로 외치기를 “김해부사 이종인이 여기에서 죽노라” 하였다.
7월 2일 왜적은 호남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선봉장 육모리六毛里 와 녹가미 鹿加未등의 한 부대는 하동에 이르렀고 한 부대는 석주관(石柱關: 구례군 토지면 소재)에 이르렀다 왜적의 우두머리가 가등청정에게 계책을 말하기를
“성을 공격한 10여일 동안에 정예군이 심히 손상을 입었으니 이들로 호남에 대한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병졸들을 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하였다. 가등청정이 이를 옳게 여겨 즉시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날 밤에 임우화(林遇華: 관군에게 원병을 청하러 갔다가 왜군에게 체포된 사람) 가 하동에서 도망쳐 돌아왔다. 임우화는 書籍에 널리 통했고 담력과 지략을 겸하여 , 그가 군중에 있을 때 여러 장수들이 그를 중히 여기며 일마다 그를 찾았다.
을미년(선조 28년 1595)겨울에 나는 광양현에서 임우화를 만나 당시의 일에 대하여 물었는데 하나도 틀리지 않게 진술한 뒤 눈물을 흘리더니 마침내 목이 메이도록 울었다. 나는 그를 매우 의롭게 여겨 훗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였으나 몇 년이 못 가서 병으로 죽었다 한다.
창의사 김천일의 둘째 아들 象坤 이 상을 치르기 위해 멀리 진주로 달려갔다. 적이 물러간 이튿날 성에 들어가 공의 시신을 찾으려고 10여 일 동안을 헤맸으나 찾을 수 없었다, 이불보가 촉석의 계단 돌 사이에 눌려 있는 것을 보고 돌을 들어내어 꺼내보니 안에 칠언(七言)으로 된 긴 시 17韻이 싸여져 있었다. 이는 공이 심유경에게 화의를 배척하고자 지어준 것이었다. 이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주상께서 심히 애통해 하였다. 承政院에서 아뢰기를 ,
“ 김천일은 앞장서 의병을 일으켜 2년 동안 애써 노력하였으니 그 공이 매우 큽니다. 그런데 이제 또 절의로 죽으니 먼저 포증(褒贈)하여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분발토록 하십시오.”하니 임금께서 “옳다”고 傳敎하여 마침내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崇政大夫 議政府 左贊成 兼 判義禁府事)를 추증하였다.
아! 정해년(선조 20년 1587) 봄에 녹도(鹿島: 전남 고흥) 만호 이대원(李大源)이 죽으니 공은 선조대왕에게 소장을 올렸고 이듬해인 무자년 여름에 평추(平酋:왜장 평수길 곧 풍신수길을 말함) 가 화친을 구헤오자 공은 西厓 柳相(유성룡을 말함)에게 글을 보내 방어의 책략과 화친을 허락한 잘못을 극언하였다. 임진년에 이르러서는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다 결국 절의에 죽었으니 화친을 주장하다 왜구를 불러들여 나라를 망하게 하고 집안을 무너뜨린 죄인과 견주어 볼 때 결코 같은 차원에서 말할 수 없다. 서애는 징비록(懲毖錄)에서 말하기를
“ 진주성의 함락은 전적으로 김창의사(金倡義使)의 실책에서 비롯되었다. ” 하고 또 말하기를 “ 죽음에 임하여 통곡함으로써 마치 죽음을 두려워 한듯 하였다. ” 하니 서애의 의도가 무었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점을 간략하게 변론하려고 한다.
(은봉의 말) 지난 2백여 년 동안 백성들은 전쟁을 격지 않았으므로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자 상하가 다급하여 왜적을 사납고 악독한 승냥이나 범 알유(猰貐: 큰 짐승으로 달리기를 잘하여 사람을 잡아 먹음)처럼 보았다. 공이 의병을 일으켜 적과 죽기로 싸우면서부터 의로운 소리가 퍼져 이를 들은 자들이 다투어 떨쳐 일어났다. 집에 있던 벼슬아치들이 소리를 듣고 치달아 왔고, 서책을 끼고 있던 선비들이 옷을 찢어져라 (裂裳)달려 왔으며, 관군은 의병들이 자기보다 앞설까 겁냈고 무인은 문사가 그 공을 빼앗아 갈까 두려워하여 먼저 용기를 뽐내어 곳곳에서 벌때처럼 일어났다. 역적의 재앙이 넘쳐나 인심이 무너지고 사유(四維: 예의염치)를 펴지 못하여 선비의 기운이 움츠러들었다,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자 모든 사람의 눈이 뒤틀려 士卒된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 장수들이 여전히 우리를 구속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하인들은 모두 말하기를 “ 士族들이 여전히 우리를 천히 여길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종들은 말하기를 “ 주인들이 여전히 우리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 하였다. 자식이 되어 그 부모를 구하지 않는 자가 있고 아우가 되어 그 형을 돌보지 않는 자가 생겨나 系統없이 풀리고 흩어 졌으니 어찌 왜인과 서로 다름이 있다 하겠는가? 창의사공이 윤리와 기강을 밝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면서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父子 君臣 上下의 職分은 하루라도 잊를 수 없고 또한 난리에도 페할 수 없음을 알았다. 無賴한 도당들이 서로 경계하며 살피고 불량한 사람들이 점점 금지한 바를 알게 되니, 여러 장수들이 이들을 장보에 올려 부대를 편성하였고 여러 고을들은 이러한 윤리의 중함을 빌려 아전과 백성을 다스렸다. 大駕가 서쪽으로 옮겨가고 나라의 맥이 중앙에서 끊어져 영.호남의 소식이 막혀 행조(行朝 : 대가가 머무른 임시 조정) 에 알려지지 않고 행조의 명령이 막혀 영.호남에 전해지지 않았다. 이는 마치 사람이 뱃속이 결리면서 아프면 호흡이 자유롭지 못하고 초격(焦鬲 :육부의 하나인 삼초와 가슴과 배 사이) 이 통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공이 강화도에 주둔하면서 水陸을 연결하여 이어 놓으면서부터 下三道와 州縣이 비로소 임금이 계신 곳을 알게 되었고, 해로를 통해 소식들이 행재소에 도달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며 , 명령이 하삼도에 통하게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삼보(三輔:하삼도를 지칭함)의 유민들을 역심을 버리고 순종하게 하 것도 공이었고 , 두 서울(한양과 의주)에서 굶어죽는 자를 입을 열어 먹을 수 있게 한 것도 공이었으며 ,10世 의 園陵이 파해침을 면하게 한 것도 공이었다. 마지막에는 흩어져 도망했던 병졸로 교만한 오랑케를 추격하여 영남 해안으로 내려 왔다.
홀몸으로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켜 적의 길을 맊아 호남응 보전하였는데 , 서로 8일 밤낮을 버티니, 적의 시체가 산과 같이 쌓이고 적의 피가 도랑을 이루었다. 비록 불행하게도 지키지 못하였으나 올빼미나 되지처럼 돌진하는 선봉을 꺽어 위축시킴으로 써 , 호남 쪽으로 몇 걸음도 넘지 못하게 하였으니 中興의 일등공신을 말할 때 김공을 빼면 누가 있는가?
옛날 송나라 때 사마공(司馬公: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을 말함)이 당의 현종 때 안록산이 난을 일으키니 睢陽城에서 태수 허원의 관군과 합류하여 여러 달을 싸우다가 구원병이 오지 않아 끝내 성이 함락되고 죽음을 맞이한 장순(張巡)을 논평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내려 준 것을 이르러 才라하고, 사람이 이것을 따라 이룬 것을 義라하며 이것을 발휘하여 크게 사업을 이룬 것을 功이라 한다. 사리에 정통하며 학식이 해박하며 힘으로 이기고 용기가 날쌘 것이 재가 아니라 , 저자거리의 수천 명을 끌고 가서 오랑캐 백만의 군사를 꺽어 .싸우면 이길 수 없게 하고 지키면 함락할 수 없게 하는 것을 才 라고 말할 수 있다. 같은 당의 벗을 위해 죽고 고아를 살려 두는 것이 義가 아니라 군신의 큰 직분을 밝히고 천하의 대의를 알게 하여 죽기로 지켜서 변하지 않는 것을 義라고 말할 수 있다. 성을 공략하여 고을을 빼앗음이 많고 머리를 베어 포획함이 많은 것이 功이 아니라 천하의 목구멍을 눌러 천하의 대사에 만전을 기하여 이미 기울어진 국가를 바로 세우고 이미 망한 국가를 살리는 것을 功이라 말할 수 있다.”
하였으니 공의 재주와 의리와 공훈은 사마공의 말에 딱 들어 맞았다.
그런데도 이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공을 논의할 때 공께서 강화도를 지키는 것을 두고 난을 피하러 갔다고 말하니 아! 슬프다. 공이 의병을 일으킨 초기에 호남 한 도는 바야흐르 싸움에서 비껴난 아주 조용한 곳이었다. 공이 난을 피하는 계책을 세웠다면 도리어 이곳을 찾아 스스로 느긋하게 지냈을 터인데 하필 붉은 해를 무릅쓰고 고단한 군사를 이끌어 화살과 돌 사이를 뚫고서 외로운 섬에서 2년 동안 비바람을 맞은 뒤에 난을 피할 수 있었을까?.
공이 진주성에서 죽은 것을 두고 헛되이 사람 목숨을 죽였다 하니 아! 슬프다 이 성을 쌓고 연못을 파서 장차 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떠나려 한 것인가.? 더구나 공이 진주를 지키지 않아 적의 예봉을 꺽지 못했다면 호남의 50여성이 어육을 당함은 진주성 보다 훨씬 심하였을 것이다. 한 도의 인명의 수효가 어찌 한 성의 백성의 목숨과 같겠는가? 요즘 세상에는 사람의 아름다움 즐겁게 이루어주려 하지 않고 일마다 이처럼 헐 뜯으니 그 나머지는 또한 말해 무었하겠는가? 멍나라 장수 제독 이여송과 제독 이여백은 공을 처음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 참으로 충의로운 선비로다.” 라고 극진히 접대하였다. 邢軍門의 鎬 (명나라 경략 邢玠의 경리 楊鎬를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 牌文을 본국에 올려 말하기를 “ 김천일 조헌의 충혼과 의백이 늠름히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하였으니 공의 이름과 충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러러 추앙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사람도 부러워하며 흠모하였다. 내가 또 등으니 진주성의 포위는 거의 열흘이나 계속되었는데 안에서의 지킴은 비록 견고하였으나 바깥의 지원이 이르지 않아 서 힘이 다한 뒤에 함락되었으며 아무도 굴하지 않았다. 또 이 싸움에서 왜적은 너무나 많이 죽었기 때문에 강을 건너서 서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으니 왜적이 호남으로 가지 못하도록 차단한 공은 어찌 張巡과 許遠의 짝이 아니겠는가? 아! 여러 將士로서 명백히 절의에 죽은 사람이 한둘에 그치지 않건만 충신의 列傳과 公들의 기사에 빠진 것이 많았고 또한 피리를 불어 참된 것을 섞이게 한다.(吹竽混眞:합주를 할 때 서툰 자가 섞이어 잘 분 듯함)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나는 이때 나이 약관을 넘어 의병의 진영에 출입해서 자세하게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병신년 (선조29년 1596)무렵에 극 전말을 대강 서술하여 기리 없어지지 않기를 도모하였으나 ,말이 졸렬하고 문장이 거칠어 뜻이 통하지 못하였다. 근래 임진란 때 병조판서를 지낸 백사 이항복의 오성일기(鰲城日記)를 얻어 참고하여 고증하여 보니 내가 기록한 것과 대략 서로 부합하였다. 삼가 그 글을 토대로 다시 빼기도 하고 윤색하기도 하여 진주서사(晉州敍事)라 이름을 붙였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모든 이들은 나의 사람됨됨이 만 보고 내 말을 폐하지 말고 , 만약 들은바가 있거든 이어서 첨가하고 증보하여 “정충장절” 즉 순수한 충의와 장렬한 절개 가 없어져 전해지지 않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구구한 바람이다. (이상 은봉전서에 실린 진주서사)
4. 진주서사와 징비록과 관계
o 징비록은 조선 선조 때의 재상 유성룡(1542-1607)이 1592- 1598까지 임진 정유왜란의 사실을 사건 중심으로 정리하고 그 이전의 일도 전란과 관계된 것은 함께 수록하여 저술한 귀중한 문헌이다. 일종의 회고록격인 문헌을 1633년 인조 11년에 아들 유진에 의하여 초간본이 간행되었는데,
西厓 柳成龍 선생의 自序에 의하면
“ 징비록이란 무었인가? 임진왜란 뒤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전의 것도 가끔 기록하여 놓기도 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이 시발된 근본을 밝히려는 것이다. 슬프다. 임진왜란의 전화는 참혹하였다. 십일 동안에 삼도(서울,개성,평양)를 지켜내지 못하고 팔도강산이 부서져 떨어졌으며 임금님께서 피란길에 올라 고초를 격으셨다, 그러고도 오늘처럼 부지하게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이오 또한 祖宗의 어질고 후한 은택이 백성에게 굳게 맺어져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으며 성상의 事大之誠이 명나라 신종황제를 감동시켜 구원병을 자주 보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라가 위태로 웠을 것이다. 시경에 말하기를” 予其懲 以毖後患“ 즉 내가 지난날을 징계하여 후환을 삼간다. 하니 이것이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나라의 중요한 책임을 어려운 때 (流離板蕩之際)에 맡아가지고 위태로움을 바로 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려는 것 부여잡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죽는다하여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인데 오히려 전원에 살면서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고 있으니 어찌 임금님의 너그러운 은전이 아니겠는가? 이하 략 ” 하였다.
이렇듯 훌륭한 목적아래 쓰여 진 징비록에 후세 역사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어려운 몇 몇 대목이 있어 살펴보니 그러한 부분이 곧 당사자 간에 쟁점이 되고 추종하는 후배들이 아첨으로 호도하여 다툼거리를 이어 만들어 쟁점을 키워 나가고 있으니 가급적 진실을 규명하고 화해와 이해의 길을 모색코자 한다. 징비록 가운데 은봉선생의 야사별록 또는 健齋集과 상충되어 쟁점이 되는 부분은 징비록 제1권
1. 제 3항 통신사 황윤길 등이 일본에서 돌아옴.
2. 제11항 김성일의 논죄 문제.
3. 제49항 외적들이 바닷가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침
4. 제68항. 진주성 砲樓의 役事문제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임진기사와, 뒤의 두 가지는 진주서사와 관계하는바 언급하여 주장하는 바가 은봉의 기록과 서로 다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좀 더 근원적으로 고찰하려면 사실을 호도하거나 억울함을 변론하려는 所以를 규명하여야 할 것인바 징비록에서 서애 유성룡선생이 퇴계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학봉 김성일 선생을 옹호하려고 학봉이 추천한 서예원을 두둔하고 인근 김해부사는 순절하였고, 또 명군과 관군의 外援이 全無하였음에도 이에 대하여 논급하지 않고,
창의사 김천일 선생(일재 이항선생의 문인)은 부자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는데 호남을 방어하기 위한 진주성 싸움이 전적으로 창의사의 책임이라고 단정하고 또 말하기를 “ 죽음에 임하여 통곡함으로써 마치 죽음을 두려워 한듯 하였다. ” 고 징비록에서 언급하였으니 “ 서애의 의도가 무었인지 모르겠다” 고 하면서 은봉선생은 이점을 간략하게 변론하려고 한다.“ 는 은봉선생의 말처럼 서애의 議論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진실을 선조수정실록, 학봉집, 서애집 , 은봉전서 등의 자료를 살펴 밝히고자 한다.
먼저 1. 통신사 황윤길 등이 일본에서 돌아옴.
o 황윤길이 부산으로 돌아오자 급히 장계를 올려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다 하였고 김성일은 사신의 품위를 지켰고 황윤길은 사신의 답서도 받지 않고 귀국하였다. 또 김성일이 선조의 어전에서 “ 신은 그곳에서 그러한 징조를 보지 못하였습니다.”이어 “ 황윤길이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하였고 임금이 “만일 병화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는가?”하니 “ 나도 역시 어찌 왜가 끝내 움직이지 안을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中外가 놀라고 당황할 것 같기 때문에 이를 해명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고 적고 있다. 학봉집에서도 그의 연원인 李栽가 편집한 년보 54세 편에 서애의 징비록 글을 인용하여 똑같이 적었다.
○西厓柳文忠公手記曰。允吉還泊釜山。馳啓情形。以爲必有兵禍。旣復命。上引見而問之。允吉對如前。誠一曰。臣不見其有是。因言允吉動搖人心。非宜。余問誠一曰。君言與黃使不同。萬一有兵。將柰何。誠一曰。吾亦豈能必倭終不動。但黃言太重。中外驚惑。故解之耳。
위 글에 이어 1590년 이후 백여 년에 걸쳐 일본에 사신 갔다가 돌아온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학봉이 통신사로 위엄을 지킨 것을 왜노들이 존숭함이 그치지 않았는데 橫議가 있었고 안방준의 임진록에 이르러는 극심하다. 몇줄 변증하는 글을 아래에 부친다. 하였다.
自萬曆庚寅至今百有餘年。前後奉使日本還者。皆言倭奴愈益尊先生不衰。嗟乎。先生專對之節。爲異類所敬服如此。而間有爲橫議者。侵斥不少假。至於安邦俊壬辰錄而極矣。可勝痛哉。今以辨證數段。附于下
그 다음 이어진 글은 이렇다.
후에 이재(李栽)가 편찬한 학봉집 년보 54세 편.
○金尙書時讓涪溪記聞中。論先生奉使日本時事。중략( 중국고사를 들어 사신 임무 수행기간중 왜노에게 엄격하게 대하였다는 요지)
況先生之與倭奴辨者。惟折之以理。以創其頑而已。初無激發召怒之事。則所謂悻悻字。亦下不得矣。至於前使十輩之云。又甚迫切。恐不宜以此施之於先生也。嘗觀先生復命時書啓。只曰臣則未見其必來。退與我先人言。亦曰吾豈必倭之必不來。但黃言太重。有若倭踵使臣而來。故解之耳。此果硬定堅執。以爲必不來者耶。且黃使之謂倭必來者。亦豈眞知賊情而然也。不過欲文在彼時巽愞恇怯之失而云然耳。況朝廷初不以此。懈於防倭。則又烏可以先生爲誤事。而歸罪於先生乎。記聞中此一款。似當刪去也。
○安邦俊者。湖南長興人也。爲人陰險能文。侵誣前輩。無所不至。指無爲有。指虛爲實。騰諸文字者。不勝其狼藉。其詆先生奉使日本時事。卽其一也。今以有文字可徵信者。逐條辨證如左。邦俊之言曰。黃允吉等。與倭使偕來。玄蘇, 平義智由鳥嶺。平調信由竹嶺。分路上來云云。而先生使還。平義智元不偕來。又無分路上來事。又曰。黃允吉, 許筬以下。皆言賊必大擧。獨某謂賊萬無來理云云。而先生書啓及與柳文忠公言者。只出鎭定之計。初未嘗有萬無來理之語。
又曰。書啓中有云。平酋亦是庸常底人物云云。而書啓中元無是語。又曰。廟堂以某爲善使。悉罷防備諸事云云。而先生玉堂箚子有曰。修軍政。以固邊圉。又曰。關防古有之地。歲修金湯。以爲之固。則朝廷初不以此。懈於防倭。
又曰。允吉所帶軍官黃進。憤忿揚臂曰。以黃, 許愚劣。尙知賊情。以某慧黠。豈不知乎。不過書契中。多有犯上國不道語。而無一言受來。故某恐得罪。寧陷不知之地。其心罔測。欲上疏請斬。爲人所止云云。書契中。旣已力爭改閣下方物領納六字。而犯上國不道之語。左牽右掣。終不得改。其曰。無一言受來者。又豈非構捏之甚者乎。或謂壬辰西巡時。史官焚史草而逃。政院日記。亦爲亂民凶燹所燒燼。故反正後。李澤堂植。承命修宣祖實錄。取中外諸臣行狀及閭巷間文字以成之。邦俊知其如此。恣意所欲。謂可以塗一世之耳目。然不知是非之在人心。終有不可得以泯者。小人之無忌憚。一至此哉。
또 김시양의 하담파적록을 인용하여 학봉집 년보에 싣기를
○金尙書時讓。荷潭破寂錄曰。東陽尉申翊聖。辛未年間。印布其父象村集。其東征錄。有壬辰。倭賊從竹嶺上來之語。余謂東陽曰。壬辰倭賊。從鳥嶺,秋風嶺上來。竹嶺一路。賊蹤不到。而錄云然者。何也。東陽色變而去。丙子年間。又刊象村集以行。東征錄削賊從竹嶺之語。更添賊兵初至。右巡察使金某以爲。賊艘不滿四百。一艘不過載數十人。摠之不滿萬人。某之論。聞于朝廷朝廷。亦以爲然等語。壬辰夏。宣廟以某倡賊不來之說。特除嶺南右兵使。未及到鎭。而賊已至。宣廟命拿鞫。及西幸。更以某爲招諭使。某到稷山聞命。更就嶺南。秋間。監司金睟罪罷。以某爲右監司。以此推之。象村集中雜錄。非其所錄者多矣云云。夫以一己之好惡。撰出無根之語。塗改先集。隨意增減者。非但白沙集晉州本己丑錄爲然也。如安邦俊鬼蜮輩。又何足言哉。尙幸金公覰破其贋。有此記錄。獨恨有闕者。賊艘多少之說。元無出處。而不幷爲之辨破也。象村集東征錄。今作諸將士難初陷敗志。
이와 관련된 은봉의 글(은봉전서 임진기사 중)
- 전략 -
己丑春。平酋又遣使請通信使。我國以年年入寇責之。平酋卽執沙火同及賊倭信三甫羅,緊時要羅,望古時羅等遣僧玄蘇,平義智等。押來獻之曰。前日侵犯。皆此輩所爲。非我所知。且刷還舊歲被虜人孔大元等百餘人。誑誘我國。於是朝廷動色相賀。以爲南邊自此無憂。議遣通信使。上命二品以上。議可否。惟韓興,李公山甫。以爲不可。海原尹公斗壽。以爲奏聞然後可遣。西崖主論以黃允吉爲上使。金誠一爲副使。許筬爲書狀官。回謝。越明年庚寅春。黃允吉,金誠一,許筬等。自釜山越海三月。而入日本國都。入國都五月。而始見平酋。傳國書。留四日而出都。出都二十日而答書至。其書曰。將一超直入大明國。易吾朝風俗於四百餘州。施帝都政化於億萬斯年者。在吾方寸中。貴國先驅而入朝。有遠慮無近憂者乎。遠方小島。在海中。後進輩不可作許容也。予入大明之日。將士卒望軍營。則彌可修隣盟也云云。此書。初有閤下方物入朝等語。允吉等貽書玄蘇。請改六字。則蘇卽馳啓。改閤下方物四字。入朝二字則不許曰。此朝字。非指貴國也。乃指大明也。允吉,筬。以其書爲信。
惟誠一。不以爲然。與玄蘇往復論難。蘇猶不聽。明年辛卯。黃允吉等。與倭使玄蘇,平義智,平調信等皆來。玄蘇,義智。由鳥嶺。調信。由竹嶺。分二路入京。允吉,筬及一行上下大小人。皆以爲賊必大擧。
獨誠一謂賊萬無來理。平酋亦是庸常底人物。廟堂以誠一爲善使。陞堂上。悉罷防備諸事。
允吉所帶軍官黃進。不勝憤忿。於衆中揚臂大言曰。以黃許之愚劣。賊情尙能知之。況以誠一之慧黠。豈有不知之理乎。此不過書契中。多有犯上國不道之語。而無一言受來。故誠一恐其得罪。巧爲如是之言。寧陷於不知之地。其心罔測矣。欲上疏請斬。而爲人所止抑。蓋誠一之留日本也。與黃允吉,許筬論國分寺被辱。答客難。論觀光。論拜庭下堂上。副官請樂。入都出都。倭人禮單志等七書。往復論難。其答玄蘇前後書。力爭閤下方物入朝六字。答宣慰使,對馬島主兩書。極言大明之不可犯。辭語痛切。誠一之得名善使。其以此也 . 후략
역문은 생략한다. 그 이유는 역문을 올릴 지면도 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역문을 곡해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들 즉 학봉의 연원 후학이 되는 李栽 등이 말한
“如安邦俊鬼蜮輩 ”라는 것은 왜적이 침입할 징후 여부 보고의 전말과, 그에 대한 조정의 대책 수립 여부에 대한 쟁점은 슬그머니 접어두고 왜적이 쳐들어 왔을 때 당사자의 난중 動靜을 논제로 부각하여 , 실제 임진년 4월 14일 왜선 상륙시 도망간 경상좌수사 박홍과 수수방관한 우수사 원균은 물론 관아를 비우고 달아난 남해현의 관리들과 김해부사 서예원 등 비슷한 사례가 만연하여 왜적들을 一路 北上케 한 원인을 제공한데 대한 뉘우침과 반성은커녕 적반하장의 기막힌 현실이다. 교산자 허균의 말처럼 우연의 평화를 믿다가 강산을 유린한 책임을 피하려는 술수다.
헤아려 보면 그들의 말대로 물여우처럼 끝까지 추적하여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면, 은봉의 야사별록이 없었다면, 아니 택당 이식에게 동,서인의 의견을 정확히 듣고 선조 수정실록을 편수할 사료를 제공하지 않았다면 黃正使는 민중을 혼란에 빠뜨린 만고의 역적이 되고 金副使는 반사 이익이 있었을 텐데 春秋大義를 존숭하는 은봉선생에게 이 정도 험구는 九原傾聽이리라.
2. 제11항 김성일의 논죄 문제.
o 징비록에 왈 :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체포하여 하옥시키려 하다가 서울에 이르기도 전에 도리어 招諭使로 삼고 함안군수 柳崇仁을 경상병마사로 삼았다, 이보다 먼저 김성일이 상주에 이르러 외적이 이미 국경을 침범하였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말을 달려 本營으로 향하였는데 曺大坤
을 도중에서 만나서 印節을 교환하였다. 이 때 왜적은 이미 김해를 함락시키고 경상우도의 여러 고을을 노략질 하는 것이었다. 김성일이 나아가서 왜적과 만났는데 부하 장병들이 달아나려고 하였다. 김성일은
말에서 내려 의자에 걸터 앉아서 움직이지 않으며 군관 이종인을 불러 말하기를 “너는 용감한 군사이니 적을 보고서 먼저 물러서서는 않된다.”
하였다. 이때 적 한 명이 金假面(쇠로만든 탈)을 쓰고서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여 왔다. 이를 본 이종인은 말을 달려 뛰어가서 그를 한 화살로 쏘아 죽이니 여러 적들이 물러나 도망하고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김성일은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거두어 모으면서 여러 군현에 격문을 보내어 수습할 계교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께서는 김성일이 먼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왜적이 쉽사리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풀어지고 나라 일을 그르쳤다고 해서 의금부도사에게 명하여 잡아오게 하여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 없었다. 경상감사 金睟는 김성일이 체포를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그를 길가에서 송별하였는데, 김성일은 말이나 얼굴빛이 강개하여 한 마듸 말도 자기의 관한 일에 미치는 것이 없고 오직 김수에게 “힘을 다하여 적을 치라”고 권면 하기만 하였다. 이것을 본 늙은 아전 河自溶은 감탄하여 말하기를 “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는 걱정하지 않고 오직 나라 일 만을 근심하니 정말 충신이다” 라고 하였다. 김성일이 떠나서 직산에 이르렀을 때 임금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 또 김성일이 경상도 사민의 인심을 얻은 것을 알고 그의 죄를 용서하고 경상우도 초유사로 삼아 도내의 백성들을 타일러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라고 명하였다.(선조가 그의 죄를 용서하였다고 서술)
o 이에 대하여 선조 수정실록의 글을 다음과 같다.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12번째기사 경상 우병사 김성일을 초유사로 삼다
경상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였다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석방시켜 도로 본도의 초유사(招諭使)로 삼고, 함안 군수 유숭인(柳崇仁)을 대신 병사로 삼았다. 이에 앞서 상은 전에 성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적이 틀림없이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국사를 그르쳤다는 이유로 의금부 도사를 보내어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일이 장차 측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얼마 있다가 성일이 적을 만나 교전한 상황을 아뢰었는데, 유성룡이 성일의 충절은 믿을 수 있다고 말하였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풀려 이와 같은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처음에 성일이 상주(尙州)에 이르러 적변(賊變)을 듣고는 본영(本營)으로 달려가 전 병사 조대곤(曺大坤)을 머물게 하여 함께 군사를 다스렸었다. 이때 적이 김해(金海)에서 벌써 우도(右道)에 들어왔는데 성일이 갑자기 적의 척후와 마주치게 되었다. 좌우에서 물러나 피하려 하였으나 성일이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동요되지 않고 군관 이종인(李宗仁)으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려가 한 명의 적을 쏘아 죽이게 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는데,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이로 인해 조금 안정되었다. 잡아오라는 명을 듣고 말을 달려 직산(稷山)에 이르렀다가 또 초유(招諭)하라는 명을 듣고는 도로 본도로 달려가 의병을 불러 모아 점점 형세를 이루어 한 도道)가 그를 믿게 되었다. 라고 실었다.
(구차하게 따진다면 학봉선생의 논죄는 전쟁으로 미제사건인 상태에서 1593년 3 월29 일에 졸하였기에 종결된 것으로 보아야 옳다.)
3. 제49항 외적들이 바닷가에 진을 치고 진주성을 침( 역문)
왜적들이 물러가서 바닷가에 나누어 진을 쳤다.그들은 울산의 서생포로부터 동래 김해 웅천 거제 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 졌는데 무릇 十六屯陳이나 되었고 이들은 다 산과 바다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참호를 파고는 오래도록 머무를 계획을 마련하여 바다를 건너 돌아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또 사천 총병 劉挺으로 하여금 복건 사천 남만 등지에서 모집한 군사 오천명을 거느리고 계속나와서 星州 八莒에서 주둔하게하고 南將 吳惟忠은 善山 鳳溪에 주둔하게하고 이령 조승훈 강봉하는 거창에 주둔하게하고 낙상지 왕필적 은 경주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사면으로 둘러싸고 서로 버티기만 하며 진격하지 않았다.
그들의 군량은 호서지방과 호남지방에서 가져 왔는데 험준한 산길을 넘어와서 여러 진둔으로 나눠 공급하게되니 백성들의 힘이 더욱 곤궁하여졌다.이여송제독은 심유경으로 하여금 가서 왜적을 타일러 바다를 건너가게 하라고 하였다. 그는 徐一貫 謝用梓로 하여금 나고야로 돌아가서 관백(풍신수길)을 만나보게 하였다.
六月에 왜적은 비로소 두 왕자님 臨海君 順和君과 宰臣 黃廷彧 黃赫등을 돌려 보내고 심유경으로 하여금 돌아가서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왜적이 진주성을 포위하고 “ 지난해 싸움에 패하였던 원수를 갚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원문: 가.聲言報前年戰敗之怨. 蓋賊於壬辰 圍晉州 牧使金時敏御之 不克而退 故云也 八日而城陷 牧使 徐禮元 判官 成守璟 倡義使 金千鎰 本道 兵使 崔慶會 忠淸兵使 黃進 義兵復讐將高從厚 等 皆死 軍民死者六萬餘人鷄犬不遺 賊皆夷城塡壕 堙井刊木 以快前憤 時六月二十八日也
역문 가. 이는 대개 왜적이 1592년 임짐 년에 진주성을 포위하였으나 목사 김시민이 이를 잘 막아내어 패배하고 물러났던 까닭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진주성은 왜적이 포위한지 8일 만에 함락되었는데 목사 서예원 판관 성수경 창의사 김천일 경상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의병복수장이 다 전사하고 군인과 백성 육만여 명이 죽고 닭 개 짐승들까지도 남지 않았다. 왜적들은 성을 무너뜨리고 참호를 메우고 우물을 묻고 나무를 베어 버리는 등의 만행으로 지난해 패전했던 분풀이를 제멋대로 하였는데 이때가 6월 28일이었다.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는 왜적이 남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연달아 왕명을 내리고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왜적을 추격하게 하였다.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권율이하 관군과 의병은 모두 의령에 모였다.
이에 권율은 행주싸움에 이긴데 자신을 가지고 기강岐江을 건너 앞으로 나가 치려하였다. 곽재우 고언백이 말하기를
“왜적의 세력은 바야흐로 강성한데 우리 군사들은 오합지졸이라서 싸움을 감당해 낼 만한 사람이 적으며 앞길에는 또 군량도 없으니 경솔하게 진격하여서는 않됩니다”. 하자 다른 사람들도 머뭇거릴 따름이었다. 이빈의 종사관 성호선은 어리석어 사세를 똑똑히 판단하지도 못하면서 팔을 휘두르면서 여러 장수들이 머뭇거리는 것을 책망하였다. 그는 권율과 의논이 맞아 드디어는 군사를 거느리고 기강을 건너가 나아가 함안에 이르렀는데 성은 텅비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다,그래서 모든 군사들은 식사를 못하고 익지도 않은 푸른 감을 따서 먹었으니 다시 싸울 마음조차 없었다.
그 다음날 첩자가 “왜적들이 김해로부터 들어 오고 있다.”고 알려 왔다. 이때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마땅히 함안을 지켜야 한다“고도 하고 ” 물러가서 鼎津을 지켜야 한다“ 는 등으로 의론이 분분해서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왜적의 포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앞을 다투어 성밖으로 나가다가 적교(성이나 참호에 오르거나 내리는 줄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하며 돌아와 정진을 건너 바라보니 왜적들은 강물과 유지로부터 몰려오는데 들판을 덮고 강물을 매워 덤벼들므로 여러 장수들은 그만 저마다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권율 김명원 이빈 최원 등은 먼저 전라도를 향하여 가고 오직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은 진주로 들어 갔는데 왜적들은 뒤따라와서 성을 포위하였다.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은 명나라 장수 支待差使員(식사나 용품을 공급하는 소임을 맡은 임시직)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상주에 있다가 왜적들이 진주로 향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낭패하여 돌아 왔는데 겨우 2일 지나자 왜적이 처들어 온 것이다.
진주성은 본래 사면이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있었는데 임진년에 동쪽읋 내려다 평지에 옮겨 놓았다. 이 왜적들은 飛樓(성을 공격하기 위한 구조물)8개를 설치해놓고 그 위로 올라가 성안을 내려다 보고 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성밖의 대밭에서 대를 베어다가 큰 다발을 만들어 둘러쳐 가려서 화살과 돌을 막게 하였고 그 안에서 조총을 빗발치듯 쏘았으므로 성 안의 사람들은 감히 밖으로 머리를 내놓지도 못하였다.
원문: 나. 又千鎰所率 皆京城市政召募之徒 千鎰又不知兵事 而自用太甚 且素惡禮元 主客相猜 號令乖違 是以甚敗 惟黃進 守東城戰數日 爲飛丸所中死 軍人奪氣 外援不至 適天雨城壞 賊蟻附而入 城內人方束荊投石 極力御之 賊幾卻 千鎰軍守北門 意城已陷先潰 賊在山上 望見軍潰 一擁而登 諸軍大亂 千鎰在矗石樓 與崔慶會攜手痛哭 赴江死 軍民得脫者 數人而已自有倭變以來 人死未有如此戰之甚者..
역문 :나. 또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들은 다 서울의 市井에서 불러 모아온 무리들이고 김천일 또한 전쟁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기의 고집이 너무 심하였다. 또 그는 평소 서례원을 미워하여 주인과 나그네 사이에 서로 시기를 하는 터였으므로 호령이 어긋나니 이로 해서 더욱 패하였던 것이다.
오직 黃進은 동쪽 성을 지켜 며칠 동안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서 전사하였다. 이때 군인들은 기운이 빠지고 그리고 밖에서 돕는 군사도 오지 않았는데 마침 비가 와서 성이 무너지니 왜적들이 개미처럼 기어들어 왔다. 성안 사람들은 가시나무를 묶어 세우고 돌을 던지며 힘을 다하여 막아내어 왜적이 거의 물러갔는데 , 이때 김천일이 거느리는 군사는 북쪽 문을 지키기다가 성이 이미 함락된 것으로 생각하고 먼저 무너져 버렸다. 왜적은 산위에 있다가 우리 군사들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고 일제히 성으로 기어오르니 여러 군사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때 김천일은 촉석루에 있다가 최경회와 함께 손을 붙들고 통곡하면서 강물로 뛰어들어 죽었는데 군사나 백성들로써 성안에서 빠져나와 살아난 사람은 몇 사람 뿐 이었다.왜적의 변란이 일어난 이래 사람이 죽은 것이 이 싸움처럼 심한 것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이 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해서 벼슬을 높혀 議政府 左贊成응 追贈하였다. 그리고 또 권율이 용감하게 싸우며 왜적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고 해서 김명원을 대신하여 도원수로 삼았다. 명나라 장수인 總兵 劉綎은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팔거로부터 합천으로 달려가고 吳惟忠은
봉계로부터 초계에 이르러 경상우도를 수호하였다. 한편 왜적들도 진주를 쳐부수고 난 뒤에는 부산으로 돌아가서 명나라 조정에서 강화를 허락하는 것을 기다려 바다를 건너 돌아가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o 윗글 “가”에서 서애는 김성일이 추천한 서예원 목사가 순절한 것처럼 목사 서예원 판관 성수경 창의사 김천일 ...... 皆死 운운하였고, 진주성을 지켜야 할 주인인 목사가 판관과 함께 명나라 장수의 지대차사원(식사나 용품을 공급하기 위한 소임을 맡은 임시직) 으로 오랫동안 상주에 있었다는 해괴한 말을 함.
나. 에서 서애가 지칭하는 주인과 나그네가 관군과 의병을 말한다면 국난을 당하여 진주성 싸움 이전에 창의한 호남의병, 특히 금산에서 순절한 고경명 부자와 부장들, 복수의 깃발을 들고 繼援義兵으로 성주성을 회복한 전라좌의병, 僧義兵, 주인과 함께 몸바친 寺奴들과 영남 우도의 남명선생 문하에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의 절의정신을 외면하는 것으로 중요한 판단의 오류를 범한 것이고, 진주성과 진주성이외 지역을 기준으로 主客을 설정한 것이라면 더욱 치졸한 사고방식이다.
또 이미 전란 중 강화도를 거점으로 행재소와 하삼도의 소통거점을 확보한 김천일의 공적을 인정하여 선조가 이미 창의사로 號名하였는데, 서애는 김천일을 전쟁에 관한 일을 알지도 못하고 고집도 세며, 그 휘하 의병은 서울 시정배로 폄하하였다.
진주성 싸움에 참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에 대하여 언급 없이 유성룡이 김천일 만을 비하고 헐뜯은 이유는,
첫째 진주목사 김시민이 죽은 뒤 후임으로 임진년 4월 18일 김해부사 재임 중 도망간 무능하고 소심한 서예원을 추천한 김성일을 비호하려는 것이나 , 당시 서예원 진주목사는 도망사하여 진주의 창렬사 39위 ,충민사 25위의 配享 諸公에 서예원은 없는 것으로 보아도 행적이 입증된다..
둘째. 김성일은 계미년 1583. 7월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갑신년 정개청의 제자 나사침과 대곡서원을 창설하고 당시 전라지역에는 정암 조광조 이외에 특별한 후학이 없고 . 당해 지역의 평택, 나주임씨 들은 금호, 하서, 송재. 사암 등을 배향하지 못한 불만인 상태에서 대곡서원을 창건하여 자기 연원을 부식코자 한원당 일두 회재 퇴계를 배향하고 초대원장에 정개청을 추천하였고 기축옥사 등을 격으면서 정개청 다음으로 원장을 맡은 김천일에 대한 당파적감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四大士禍 이후 1560 -90년대에 산림에 은거한 선비들이 스승을 존숭하고 연원의 취합을 도모하려고 서원 창건이 급속하게 많았는데. 실례를 들면 1575 안동 호계서원 (퇴계). 1573 대구 고산서원(퇴계). 1574년 안동도산서원(퇴계). 1573영풍 이산서원(퇴계) 1580. 제천 남당서원(퇴계). 1570 선산금오서원(점필재). 1583 함양 용문서원(일두). 1572 경주 옥산서원(회재). 1576산청 덕천서원 (남명) . 1577 정읍 남고서원 (일재) . 1570 청주 화항서원(율곡) 등으로 미루어 헤아릴 만 하다.
셋째 김천일은 왜적들이 진주 한 곳만 공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근 김해,사천과 하동을 거쳐 호남에 진격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방어하였는데
진주를 함락한 왜적이 과연 하동으로 진격하여 구례 석주관에서 방어하자 병력이 쇠한 이유로 철수하였고 그 후 정유재란 때는 진격하여 남원성까지 함락 하였으며 호남이 국가지보장인 구체적인 증거로는 학봉 문집 연보에 보면 학봉께서 선조 임금께 아뢰어 호남에서 2만석의 벼를 영남에 제공한 것을 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란 중에 모곡하여 행재소에 운송하고 의령의 곽재우장군 부대에도 보낸 것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양곡 지원을 호남에서 담당하였던 것을 체찰사를 지낸 서애선생께서 모를 리 없다.
구체적으로 학봉집 연보 55세 조에 실린 내용을 보면.
○1593. 3월 4일에 또 군교(軍校)를 보내서 전공(戰功)을 갚고 곡식을 옮겨오는 데 대한 사의(事宜)를 계청하였다. - 논상(論賞)하는 것이 미덥지 못하다는 것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유망(流亡)하는 상황에 대해 극력 진달하면서 속히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과 허통첩(許通帖), 면천첩(免賤帖) 등을 내려보내어 상전(賞典)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호남에 있는 곡식 수만 섬을 일찌감치 옮겨와 굶주린 사람들을 진휼하고 군사들을 먹이고 제때에 파종함으로써 호남의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을 보전해 나라를 회복하는 기반을 마련하기를 청하였다.
○ 유지(有旨)를 내려 특별히 호남에 있는 곡식 2만 섬을 제급(題給)하게 하였다. - 이노가 직산(稷山)에 이르러서 문충공(文忠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체부(體府)의 정승으로서 임진(臨津)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길이 막혀서 가지 못하고는 다른 사람 편을 통해 선생의 글을 보냈는데, 유 문충공이 선생이 보낸 글과 첩문을 보고는 즉시 계사(啓辭)를 작성해서 계청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가엾게 여겨 특별히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해 2만 섬을 제급하게 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종사관(從事官)을 나누어 보내 수로와 육로로 아울러 운반해 온 다음 여러 고을에 나누어 주어 제때에 씨를 뿌리게 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
넷째 창의사 김천일의 전후 행적으로 징비록 제49항의 허구를 밝힌다.
1893년 5월에 간행된 창의사 김천일 선생의 문집인 健齋集의 발문을 송사 기우만 선생이 찬하였는데 이에 앞서 1867년에 노사 기정진 선생의 서문을 받아두고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간행이 지연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문집
권5에 晉州 三忠祠의 請額啓, 1593년 晉州의 격전 사실이 기록된 李恒福의 〈白沙記事〉, 은봉선생의〈晉州敍事〉 등이 실려 있다.
권6에는 諸賢題詠이 실려 있다. 克念堂(건재의 다른 호)에 題한 일재 李恒과 사암 朴淳, 제봉 高敬命 등의 詩와 하서 金麟厚, 등이 건재에게 지어 준 시가 있고 권7은 摭錄으로 「宣廟寶鑑」, 「重峯集」, 「牛溪集」, 柳希春과 李珥의 「經筵日記」 등에 나오는 건재와 관련된 주요기사를 모아 놓은 것이 실려 있다. 이외 보다 상세한 내용은 별지 2,3.을 참조 바란다.
4. 제68항. 진주성 砲樓의 役事문제 .
징비록에 왈 “ 내가 안주에 있을 때 내 友人 金士純(학봉의 字) 이 경상우감사가 되었는데 서신을 보내어 이르기를 “ 진주성을 잘 수리하여 죽기를 기약하고 지킬 계교를 마련하려고 합니다.“이 보다 먼저 왜적은 일찍이 한 번 진주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김시민에게)패하여 물러 갔었다. 나는 김사순에게 답서를 보내 이르기를 ”왜적은 조만간에 쳐들어 올 것입니다. 왜적이 지난해의 원한을 갚으려고 처들어 온다면 반드시 많은 군사를 사용할 것이니 성을 지키는 일이 옛날과 비교하여 좀 어려울 것입니다. 마땅히 포루를 세워 이에 대비하여야만 가히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드디어는 서신 속에 그 제도를 상세하게 말하였다.
1593년 6월에 나는 왜적이 다시 진주성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종사관 辛慶晉에게 일러 말하기를 “진주의 일이 매우 위태로운데 다행이 포루가 있으면 그래도 지탱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키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합천으로 내려갔다가 진주성이 벌써 함락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단성현감 趙宗道 君 또한 김사순의 벗인데 나에게 말하기를 <“ 지난해 김사순과 함께 진주성에 머물러 있을 때 김사순이 내서신을 보고 좋아 날뛰면서 기이한 계교라고 칭찬하면서 즉시 그 막하에 있는 벗 몇사람과 성을 돌아보고, 그 형세에 따라 꼭 여덟곳에 포루를 설치할 것을 생각하고는 나무를 베어 강물에 띄어 내려 보내게 하였더니 고을 백성들이 그 역사를 꺼리며 말하기를 ” 전에는 포루가 없어도 오히려 성을 지키고 왜적을 물리쳤는데, 지금은 애써 사람을 수고롭게 들볶습니까? “ 하였으나 김사순은 듣지 않고 포루를 만들 재목을 이미 갖추고 역사를 시작한지 얼마 지냈는데
마침 김사순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였으므로 그 일은 드디어 중지되고 말았습니다. >하므로 서로 함께 이것을 아주 애석하게 여기며 헤어졌다.
아아 김사순의 불행은 곧 일개 성(진주성)천만 사람의 불행이었다. 이것은 진실로 운수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용납될 것이 아니었다. 라고 썻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해하기 곤란한 부분이 많다. 포루의 필요성 때문에 나무를 베어 내고 재목을 준비하여 역사를 시작한 후 학봉이 졸하였으면 목사 서예원이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해 판관과 함께 지대차사원으로 장기간 자리를 비웠다는 것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서애집 연보에 의하면 1592년 6월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풍원부원군에 봉하여 같은 달에 군수보급과 명나라 장수 접대의 명을 받았다고 하였고 1593년 2월에는 충청 전라 경상 삼도의 체찰사에 임명되었으니 백성을 설득하여 포루를 설치토록
독려하고 전쟁이 나면 밖에서 지원하여야 할 책무는 언급하지 않고 합천에 내려 갔을 때 진주성함락소식을 들었다고 가볍게 적고 있다.
5, 맺는 말
古語에 “ 집이 가난할 때 어진 아내를 그리워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어진 재상을 생각케 한다” 는 말이 있다. 왜란 7년간의 병화가 바로 그러한 때다. 이충무공께서 왜의 수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한산도로 진영을 옮기면서 인척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글에서 “ 湖南은 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라 하였고 실제로 임진왜란 5년 前期에 군량의 지원은 물론 영남에 종자 곡식까지 지원하였으니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그러나 정유재란까지 이어지자 호남민중의 참상도 형언할 수 없게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니
실록에 실린 백사 이항복과 宣祖의 논의에 잘 나타나 있다.
선조의 재위 기간 중 32명의 재상이 모두 어질지 못하다고 평한다면 어불성설이며 戰亂 발생 전, 후 약 2년간에 주류 정치 세력과 領袖에게 수많은 戰爭孤魂과 전란으로 야기된 鰥寡孤獨의 원한이 비난의 화살을 겨누어 우둔함을 탓하였으리라.
書經의 周書 泰誓 편에 “同力커든 탁덕(度德)하고 同德커든 탁의(度義)한다”
하였으니 대개 선비가 학문의 功 則 學, 問 ,思, 辨을 篤行하여 仁義禮智의 四德을 갖추고 忠과 信으로 進德修業하여 格致의 공을 이루었을 때, 그 보다 상위 평가기준은 節義가 된다는 논리다. 은봉선생께서 우산답문(牛山答問)에 이르기를 眞儒와 名賢을 구분하는 사례로 포은 정몽주 선생과 양촌 권근 선생을 비유하여 학문은 권 양촌이 앞선다고 할 수 있으나 절의에 있어서는 포은에 비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임진왜란처럼 국가의 위기에서는 인물 평가에 더욱 절실한 기준이라 생각된다.
맹자께서 말한 “수오지심 의지단(羞惡之心 義之端)” 즉 자기의 옳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남의 착하지 못한 점을 미워할 줄 아는 정의로운 마음과 행동하는 양심이 義의 단초이기에 인물평가의 상위개념으로 다루고, 실제로 文章과 道學 節義 세 가지 요소를 들어 합당한 평가를 이루려 하는 것이 儒家의 통론이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선비라도 이러한 기준을 벗어 난弟子나 후손들의 지나친 존숭은 도리어 비난의 실마리가 되니 실례로 퇴계선생에 대하여도 동고 이준경의 釣名이나 山禽시비 정인홍의 不義者 陞廡不可 시비가 그런 사례가 될 것이며 차라리 김삿갓의 겸손한 용기가 때로는 필요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환경이 급속하게 퇴락하여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호남사회에서 우리의 정신적 맥락의 본류는 우리들의 가슴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 구체적 흐름은 己卯士禍로부터 대다수 피화자의 중앙정계활동이나 귀향하여 학문으로 자적하는 선현들의 행적에서 느낄 수 있다.
士禍期에 피해를 입거나 유배 등으로 연고를 갖게 된 많은 先賢의 행적이 우리 호남을 인물의 府庫로 알렸고, 이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국난을 당하여 의리와 충절로서 호남사상과 인맥의 큰 줄기를 이루어 도도히 흐르니, 이러한 호남사상의 맥락 속에 경세제민의 실학 ,구폭제민의 동학, 그리고 위정척사의 한말의병 활동으로 이어지고 학생독립운동을 비롯한 오월 광주정신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부인 할 수 없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 이전 중앙 정계의 동서분당 영향으로 士林의 淵源 間 갈등이 증폭되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桎梏속에 많은 弊害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사실을 歪曲하고 理解보다 先入見의 오해가 각자의 先祖를 받들고 학문을 이어 오는 과정에서 농경사회의 열악한 정보환경으로 진실과 허위가 交錯한 실정이다.
은봉선생은 이러한 사상적 시기에 진실을 추구하고 이를 후세에 남기려는 春秋大義 정신의 실천가다. 일부 이해를 달리한 士林들의 곡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소통과 화합의 시대정신에 걸맞게 이해와 화해의 길로 가야한다.
그 길은 과거사의 철저한 규명을 통하여 이해와 용서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지 일방적 침묵 강요와 화해는 또 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에 우리는 미진한 과거사의 규명에도 관심을 기우려 정의로운 사회가 도덕사회의 기반으로 성장하도록 힘써야 한다.
인간의 본성에 낀 때를 벗기는데 心學(儒學)이면 어떻고 佛學이면 어떤가?
본성의 회복 즉 求放心이 급선무이며 황폐하여 가는 자연을 보호하고
되살리기 위하여 老莊의 無爲 思想(禪學)이면 어떤가?
이 지구촌에서 인간답게 사는 길에 동참하는 길은, 배운 대로 살아가려는 학문적 실천의지(篤行)에 있다고 하겠디. 끝
별지 1. 진주서사 원문(우산 안방준)
萬曆二十一年癸巳六月。倭賊陷晉州。守城諸將皆死之。先是壬辰夏。賊分路水陸。謀寇湖南。一路至閒山島。爲水使李舜臣所敗。一路至晉州。爲判官金時敏所拒。皆不得志。由是。賊常憤恨。是年春。天將與賊連和。京外諸賊。俱集嶺南。於是。兵勢大熾。賊酋淸正。問于秀吉。請復攻晉州。因擊湖南。六月十四日。合諸酋兵數十萬。發自東萊。直向晉州。時劉總兵綎, 吳遊擊惟忠在大邱。駱參將尙志, 宋遊擊大斌在南原。王遊擊必迪在尙州。沈游擊惟敬在賊酋平行長所。宋經略應昌在京城劉綎移書淸正曰。"日本侵犯朝鮮。毁我屬國。兵連禍結。比歲無休。皇上聞之。赫然震怒。特命節鉞。分遣虎臣。擬圖盡戮長鯨。永淸東海。邇日沈惟敬往回面講。日本遂能傾心解甲。納款乞盟。盡行退還朝鮮地方。引類歸國。又從釜山。遣小西飛 彈守久大夫。叩天朝俟命。一念至誠。深可嘉尙。故天朝所遣數百萬兵。盡止鴨綠江頭。大將軍李提督統兵二十萬駐王京。郭摠兵, 李摠兵領兵二十萬駐遼東。吳副摠及他諸將領兵分布平安, 開城者。又十餘萬。俱按兵不動。恐一交鋒。便喪約議。失我堂堂天朝覆載度量。不意汝等歸意不決。復攻晉州。頓背前約。云洩舊憤。夫朝鮮八道地方。已破其七。士女橫罹荼毒者。枕骸遍野。懸首盈竿。亦云慘極。更復何讐。矧晉陽黑子之城。何必以小嫌介意。而甘失大信於中國哉。及今尙且易慮改心。撤兵東返。則我輩必不擧兵相加。失信外國。務令汝等。不遭鋒鏑。航海生還。若復執迷。兵難遂寢。必發鳥尾福船, 柏槽龍槽, 沙船艙船, 銅蛟小艄, 海舠, 八喇唬, 八漿等船。裝載水軍百萬。邀截海涯。斷汝歸路。絶汝糧餉。不待決戰。爾將自斃。片甲不還矣。且關伯與汝。原是比肩。爾等被彼牢籠。俱聽驅使。關伯旣慕天朝而納貢。汝等何向晉州而攻圍。今日進退之間。利害所關非細。三思自審。免悔噬臍。賊不聽。沈惟敬力說行長使止之。行長曰。今日之擧。吾無所預。惟淸正力主此議。開喩百端。而猶不回。不如先自空城。以快其情而已。及惟敬還都元帥金命元巡察使韓孝純謂曰。晉州事急。願老爺力救之。惟敬曰。彼因去歲失志於此。是以憤恨。銳意再擧。今無他策。只令諸將。一如行長所言也。時官軍義兵。俱在咸安等地。倡義使金公千鎰謂諸將曰。賊謀難測。只攻晉州之說。庸可信乎。晉州密邇湖南。迭爲脣齒。若棄之去。縱賊長驅。則禍必中於湖南。莫若竝力堅守。以遏賊勢。諸將不應。巡邊使李薲, 紅衣義兵將郭再祐自丹城徑入山邑。左義兵將任啓英自泗川直還湖南。守令諸將。亦多散去。獨倡義使金千鎰, 右義兵將慶尙右兵使崔慶會, 忠淸兵使黃進, 巨濟縣令金俊民, 海美縣令鄭命世, 左義兵副將泗川縣監張潤, 復讐義兵將高從厚及其副將吳宥熊, 義兵將李繼璉, 飛義兵將閔汝雲, 彪義兵副將姜希輔等。各領兵來會。及入城。諸將幕下士無可用者。聽其出去。凡數十人。惟金千鎰幕下。子象乾及梁佐郞山璹, 崔慶會幕下。文進士弘獻。高從厚幕下。吳正字玭, 金內禁麟渾, 高參奉敬兄等五六人不去。時金海府使李宗仁先已入城。議守禦。牧使徐禮元不肯。宗仁張目叱之曰。義兵諸將。今方來會。輕易棄城者斬。禮元。恇怯人也。遂不敢違。十八日。全羅兵使宜居怡, 助防將洪季男等來謂曰。寡固不可以敵衆。卽還出陣于雲峯。時奮義兵將姜希悅。以元帥令兼助防將。帶數邑軍兵。守求禮石柱棧道。聞之奮然曰。官軍謀避尙不可。況義兵乎。遂疾馳而來。敵愾義兵將邊士貞聞事急。遣其副將李潛行。褊裨皆曰。大賊將至。規避者衆。我等何故獨就死地乎。潛不聽。遂促兵進。方居怡,季男之出也。城中之人。無有固志。及聞希悅等至。莫不踊躍思奮。時金公千鎰軍五百。慶會軍六百。黃進軍七百。從厚軍四百。張潤, 李潛軍各三百。繼璉, 汝雲, 希輔, 希悅等軍各二百餘。合諸守令兵及本州兵民。避亂士女。凡六七萬人。李薲傳令從厚。出與居怡, 季男等。合勢爲外援。城中士女亦多勸之。從厚皆不從。於是。分城而守。以城南矗石樓最爲險絶。賊不敢犯。惟東西北三面受賊可虞。令義兵守之。黃進, 李宗仁, 張潤各率數十人。隨賊所薄。往來相救。幕下諸生親持酒食。巡城餉士。約束旣定。城中之人。皆以死自誓。十九日。天將與尙州牧使鄭起龍來審城池曰。南有大江。北有深池。實天作之地。且劉摠兵欲爲外援。自大邱動兵。前鋒已到咸陽。遣我輩先諭云。二十日朝。沈惟敬移帖來。其略。卽向來所諭空城避兵之意也。是日。吳宥, 李潛與本州武士鄭國祥等。出城覘賊。賊前鋒已入州境。二將策馬而走。國祥等還報曰。二將遇賊去。不復還。必是亡走。俄而。二將各斬數賊而來。城中鼓噪。或有拔劍起舞者。天將歎曰。一城之人。皆義士也。吾當告急赴援。卽與鄭起龍還。始金公千鎰自咸安來也。遣梁山璹, 洪涵等。賚書乞師於劉綎。書乃從厚所撰。詞旨激烈。繼以山璹。辭氣慷慨。感動於人。綎讀未訖。不覺歛衽改容。然終無出師意。涵於歸路。棄山璹走。山璹泣曰。臨危苟免。使主將獨陷死地。非義也。遂單車入城。一軍皆驚。二十一日辰時。賊騎數十。出沒於東北山上。俯瞰而去。巳時。又數百餘騎登北山。列陣耀兵。俄而。大軍繼至。圍城三帀。不放一丸。城中亦按兵不動。賊乃退。自開慶院至馬峴。大陣凡三處。其餘小陣。星羅棋布。不可勝數。二十二日。賊進薄城下。自朝至晡。鐵丸如雨。城中拒之甚力。賊乃退。姜希輔曰。賊勢如此。不可不遣死士求救於官軍。令其幕下林遇華縋城而出。行未及五里。爲賊所擒。自後賊來。輒縛遇華。置於前列以示之。是夜。賊又逼東門。大喊登城。聲震天地。進等血戰。賊乃退。禮元顚倒。處事失措。金千鎰, 崔慶會議以張潤權攝州事。城中歡喜。義氣自倍。一日。賊自西北隅大喊而進。守陴者皆走。城幾陷。進奮劍大呼曰。今日吾得死所矣。於是。諸軍環集亂射。賊乃退。賊又於東門外。造山數仞。俯而攻之。進亦對築高阜。身自負石。男女皆感泣助役。一夜而畢。遂用大砲。中破賊窟。賊乃退。賊又於東門外。建二大木。上設板屋。放火城中。屋比連燒。煙焰漲空。進亦設板屋。半餉而成。遂用大砲。中破賊窟。賊乃退。時天大雨。城一隅頹圮。賊大喊闌入。金俊民力戰。賊乃退。賊投書城中。其略曰。萬民入城。一時屠殺。可慘。將帥一人送其邦。其餘安在城中可也。如欲講和。則脫笠三揮。書尾曰。六月二十七日。羽柴備前宰相豐臣秀家再拜云。金公千鎰答曰。我固死戰而已。而況天兵三十萬。今方追擊。汝等盡勦無遺。賊露臀叩之曰。唐兵已盡退去矣。遂築五阜於東西兩門外。結竹爲柵而放丸。姜希輔力戰死之。金千鎰, 黃進等放火箭燬柵。賊乃退。賊又作大櫃。置四輪車上。銳卒數十。各穿堅甲。推挽而進。以鐵錐鑿城。進等束火灌油而投之。櫃賊盡死。賊乃退。二十八日。禮元不謹踐更。致賊潛來鑿城。進等覺之。殊死戰。賊酋一人。中丸死。殺死者亦千餘人。進臨城俯視曰。今日之戰。賊屍盈塹。可謂大捷。忽有一賊仰而放丸。中進左額而死。宗仁歛瘞于麻田中。時黃進, 張潤, 李宗仁, 金俊民, 吳宥, 李潛, 姜希輔, 姜希悅等。皆稱力戰。而進之忠烈勇智。爲諸將最。一城甚倚重焉。及其死也。莫不恟懼。二十九日。以禮元代進爲巡城將。禮元脫笠而騎。垂涕而行。慶會怒。將斬之而止。卽以張潤代之。未幾。潤亦中丸而死。時東門城子因雨頹圮。羣賊蟻附而上。宗仁等與其親兵。舍弓矢持短兵搏戰。賊死殆盡。賊乃退。賊之精銳。又自西北門。揮劍踊躍而至。禮元先走。諸軍大潰。咸集於矗石樓。賊遂闌入。於是。金象乾, 梁山璹。扶金千鎰。文弘獻。扶崔慶會。吳玭金麟渾, 高敬兄。扶高從厚。北向再拜。赴南江而死。山璹素善泅。金千鎰曰。汝可以勉。努力更圖。滅此仇賊。山璹曰。義不獨生。遂與同死。宗仁希悅宥潛等十餘人。奮劍斫賊。抵死乃已。最後宗仁轉鬪至南江。左右腋各挾一賊。大呼赴水曰。金海府使李宗仁死於此云。七月初二日。賊發向湖南。前鋒將六毛里, 鹿加末等一軍至河東。一軍至石柱。有一賊酋爲淸正謀曰。攻城十日。精銳挫甚。不可以此。得志湖南。休兵爲善。淸正然之。卽令撤回。是夜。林遇華從河東遁還。遇華博通書籍。兼有膽略。其在軍中。諸將皆重之。每事輒訪焉。乙未冬。余見遇華於光陽縣。問當時事。遇華陳述。不差一二。繼之以涕。至於嗚咽。余甚義之。約以他日相遇。未數年。病逝云。
倡義使金公千鎰次子象坤。奔喪赴晉州。賊退翌日。入城中求公屍。十餘日不得。見寢帽壓在矗石階石間。擧石抽出。則內裹十七韻。乃先生贈沈惟敬排和議之作也。事聞。上震悼。政院啓曰。金千鎰倡義首擧。二戰勤勞。其功甚鉅。而今又以節死。爲先褒贈。以聳觀聽。敎曰可。遂贈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萬曆四十六年戊午。又贈領議政。
嗚呼。丁亥春。鹿島萬戶李大源之死。先生抗疏。宣廟戊子夏。平酋求和。先生貽書柳相西厓。極言防禦之策。許和之非。至于壬辰。倡義討賊。竟致死節。其視主和招寇。亡國敗家之類。則不可同日而語矣。西厓懲毖錄。以爲晉州之陷。全由於金倡義失策。又以爲臨死痛哭。若畏死然。西厓之意。未知其何故。愚請略辨之。歷年二百。民不知兵。變起倉卒。上下劻勷。視倭賊如豺虎猰㺄。自公之倡率義旅。向賊爭死也。而義聲張皇。聞者爭奮。縉紳之家居者。藉響而騖。章甫之挾策者。裂裳而趨。官軍恐義兵之居己先。武夫恐文士之奪其功。賈勇先登者。在在蜂起焉。逆禍多濫。人心潰散。四維不張。士氣委靡。變起倉卒。萬目睽睽。爲士卒者皆曰。將帥猶能鈐束我乎。爲皁隸者皆曰。士族猶能尊卑我乎。爲奴僕者皆曰。主家猶能驅使我乎。子而不救其父者有之。弟而不顧其兄者有之。渙散無統。幾何其不胥而爲倭也。自公之倡明倫紀。殉國忘身也。而人始知父子君臣上下之分。不可以一日無。亦不可以亂離廢。無賴之徒。互相規戒。不良之人。稍知禁戢。諸將藉口。以威部曲。列邑借重。以令吏民。大駕西遷。國脈中絶。嶺湖消息。壅閼於行朝。行朝命令。隔塞於嶺湖。如人之病痞。呼吸不利。焦鬲不通。自公之進屯江都。控引水陸也。而下三道州縣。始知君父之所在。漕輓之達于行在者由此焉。使命之通于下道者由此焉。三輔遺民。去逆就順者公也。兩京餓殍。開口得哺者公也。十世園陵。免於發掘者公也。卒之以散亡餘卒。追驕虜。下嶺海。以一身嬰孤墉。蔽遮全湖。相持八晝夜。使賊屍如山。賊血成溝。雖不幸不守。而鴟張豕突之鋒。摧沮消縮。不能越湖南數步。則中興第一之功。捨公其誰哉。昔宋朝司馬公之論張巡曰。天授之謂才。人從而成之之謂義。發而著之事業之謂功。精敏辨博。拳捷蹻勇。非才也。驅市井數千之衆。摧胡虜百萬之師。戰則不可勝。守則不可拔。斯可謂之才矣。死黨友存孤兒。非義也。明君臣之大分。識天下之大義。守死而不變。斯可謂之義矣。攻城拔邑之衆。斬首捕虜之多。非功也。控扼天下之咽喉。蔽全天下之太半。使其國家。定於已傾。存於旣亡。斯可謂之功矣。公之才之義之功。正符司馬公之言。而不知者之議夫公者。以公之守江都爲避亂。噫。屬公起義之初。湖南一道。方爲乾淨地。使公爲避亂計。則反以求之。自有餘地。豈必有冒赤日。引單軍。衝犯矢石。暴露二年於孤島中。然後乃可避亂乎。以公之死於晉州。爲徒殺人命。噫。築斯城。鑿斯池。將使委而去之耶。況公不守晉州。賊鋒不挫。則湖南五十城之魚肉。必有甚於晉城者。一道人命之多少。孰如一城之人命哉。今世之不樂成人之美者。每每如是。其他又何說焉。天將李提督如松都督如柏初見公歎曰。眞忠義之士也。接待盡敬。邢軍門玠。移牌本國曰。金千鎰趙憲之忠魂義魄。凜然猶在。先生之名節。不惟一國所瞻仰。而爲華人之艶慕者如是夫。余又聞晉陽之圍殆將一旬。內守雖固。外援不至。力盡然後見陷不屈。而是役也。賊死過當。不得渡江而西。則其蔽遮湖南之功。豈非巡還之匹也。噫。諸將士明白死義者。不止一二。而忠臣列傳及諸公記事。闕遺者多。又未免吹竽混眞之譏焉。余於是時。年踰弱冠。得出入義旅。聞知備詳。故丙申年間。粗敍首末。以圖不朽。而顧拙語荒詞。意不通暢。比得鰲城日記參互考證。則與余所錄。大略相符。謹因其文。更加刪潤。名之曰晉州敍事。凡我同志。勿以人廢言。如有所聞。續爲添補。使精忠壯節。不至於泯泯無傳。此余區區之願也。
별지 2, 건재집의 진주서사에 부기된 여러 글
(이하는 건재집에 진주서사에 부기하여 추기된 것임.)
健齋先生文集附錄卷之五
癸巳六月。賊酋淸正合諸酋兵數十萬。水陸竝進。聲言先拔晉州。直搗湖南。金倡義移兵晉州。定城守計。元帥以下諸官軍。皆托以外援。各自散走。惟金倡義, 高從厚, 崔慶會等諸義將。忠淸兵使黃進, 金海府使李宗仁等同入晉州。竭力拒守。幾至一旬。城陷之日。七萬義士。屠戮無餘。賊遂分兵西。一路至河東。一路至石柱。未渡蟾津。撤兵退還。蓋賊之精銳。太半被傷於是戰也。於是。湖南又得全。嗚呼。使壬癸兵火。先及於湖南。則權元帥幸州之役。李統制閒山之戰。其資糧器械。將何所辦。而能成奏捷之功乎。世徒知兩將之有殊勳。而不知金倡義, 高霽峯父子之爲張本。可勝歎哉。(이 부분은 은봉전서 (“與 延平 李相公貴” - 1632년11월)별지에 실림)
晉州之陷。西厓懲毖錄。以爲全由於金倡義失策云者。晉州之城東南。有矗石大江。賊不敢犯。惟西北一面受賊。故金倡義以爲令諸將禦守。則慮有不謹之患。與黃進, 張潤等獨當之。其餘諸將。分守東南。及城陷。賊自西北闌入。所謂失策者。其謂此耶。西厓之言可怪(이 부분은은봉전서 “ 答 李汝固 問目 ”에 실림, 여고는 澤堂 李植의 字)
。後庚子正月。李提督如松牌文。有曰。壬辰十二月二十五日。渡江而來。體察使朝鮮國首臣柳成龍, 尹斗壽等。不以臥薪嘗膽爲心。雪恥除兇注念。宴安私家。恣酒自樂。非惟藐慢天朝。抑且欺負其君。悖禮蔑敎。殆有甚焉云。蓋國之不亡。皆是天朝大臣及我國諸義將戮力之功也。及其大駕還都。誤事諸臣。所當闔門辭避。以辭亡國之罪。而未聞有一人爲此擧者。自以爲有恢復扈從之功。揚揚自得。廉恥都喪。至於諸將士宣武錄勳之際。專用請托愛憎。有功者不錄。無功者錄之。雖以金倡義, 趙重峯, 高霽峯, 崔兵使, 黃進, 鄭運, 金大仁之功。皆不得與焉。則至于今數十年。人情莫不憤鬱。( 이 부분은 은봉전서 ‘ 白沙論壬辰諸將士辨“ 즉 백사 이항복의 문집인 白沙集 別集 論亂後諸將功蹟 가운데 일부 오류를 논변하는 글임)
역문“
- (이전 글 : 명나라 군사중 하급장교가 의주 별관에다 적기를 “ 망국의 대부는 아침 다섯 시에 먹는데 동쪽으로 정벌하러온 장사는 정오까지 굶는다” 하였으니 대개 희롱한 글이다.-
그후 경자(선조33년 1600)년 정월에 제독 이여송의 본국 牌文에 이르기를 ” 임진년 12월 25일 에 강을 건너온 이래 조선국의 체찰사로 으뜸가는 신하 유성룡 윤두수 등은 와신상담하는 마음으로 치욕을 씻고 흉악한 왜적을 없애는데 생각을 쏟지 않고 ,사가에서 편안히 거쳐하며 방자하게 술을 마시고 스스로 즐겼습니다. 이는 명나라 조정을 없신여겻을 뿐 아니라 또 스스로 국왕을 속인 일이니, 예를 어그러뜨리고 가르침을 무시함이 너무 심합니다.“ 하였다.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은 모두 이 명나라 조정의 대신 및 아국의 여러 의병장들이 죽기로 싸운 공 때문이다. 대가가 서울로 돌아옴에 이르러 국사를 그르친 여러 신하들은 마땅히 문을 닫고 辭避하여 나라를 망하게 한 죄를 빌어야 했는데도 , 이와 같이 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도리어 스스로 나라를 회복하고 임금을 호종한 공이 있다고 말하며 의기양양하여 염치를 모두 잃었다. 심지어 여러 장사들의 공을 기록하여 포상할 때에도 오로지 청탁에 의지하여 사랑하고 미워하니 , 공이 있는 자가 기록되지 모하고 공이 없는 자가 기록되었다.
비록 창의사 김천일 ,중봉 조헌 ,제봉 고경명, 병사 최경회, 병사 황진, 녹도만호 정운, 김대인 등의 功이라 할지라도 모두 기록될 수 없었으니 ,오늘에 이르기 까지 수십 년 동안 인정이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이 뒷글: 백사의 정론이 어찌하여 여기에는 미치지 못하였는가? 애석하고 통탄 할 일이다, 1633년 11월 보름에 우산 노인이 씀.) 포저 조익의 발문으로 대함)
별지 3, 김천일(金千鎰)에 대하여
1537년(중종 32)∼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언양.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나주 출신.
아버지는 진사 언침(彦琛)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이다.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처음으로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된 뒤 용안현감(龍安縣監)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지평(持平)때에 상소를 올려 시폐를 극론하다가 좌천되어 임실현감이 되었다. 그뒤 담양부사·한성부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서행(西幸)하였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하였다.
그뒤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양산숙(梁山璹)·박환(朴懽) 등과 함께 의병의 기치를 들고 의병 3백명을 모아 북으로 출병하였다.
한편, 공주에서 조헌(趙憲)과 호서지방 의병에 관하여 협의하고는 곧 수원에 도착하였다. 북상할 때 수원의 연도에서 스스로 의병에 참가한 자와 또 호서방면에서 모집한 숫자가 크게 늘어나자 군세는 사기를 떨쳤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본격적인 군사활동을 전개, 유격전으로 개가를 올렸다.
특히,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일시에 적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8월 전라병사 최원(崔遠)의 관군과 함께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
이 무렵 조정으로부터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제수되고
선조 28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20일에
비변사의 회계에 따라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았다. 강화도에 진을 옮긴 뒤 강화부사·전라병사와 협력하여 연안에 방책(防栅)을 쌓고 병선을 수리하여 전투태세를 재정비하였다. 강화도는 당시 조정의 명령을 호남·호서에 전달할 수 있는 전략상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9월에는 통천(通川)·양천(陽川)지구의 의병까지 지휘하게 되고 매일같이 강화연안의 적군을 공격하였으며, 양천·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다.한편, 전라병사·경기수사·충청병사, 추의병장(秋義兵將) 우성전(禹性傳) 등의 관군 및 의병과 합세하여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또한, 적군의 원릉(圓陵) 도굴행위도 막아 이를 봉위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 정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 개성으로 진격할 때 이들의 작전을 도왔으며, 명·일간에 강화가 제기되자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어 굶주리는 자가 속출하자 선편으로 쌀 1천석을 공급하여 구휼하였다.
전투에 있어서도 경기수사·충청수사와 함께 선유봉(仙遊峯) 및 사현전투(沙峴戰鬪)에서 다수의 적을 참살, 생포하고 2월에는 권율(權慄)의 행주산성전투에 강화도로부터 출진하여 참가하였다. 이들 의병은 강화도를 중심으로 장기간의 전투에서 4백여명의 적을 참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때 明·日강화가 추진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하한 적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하여 1차 진주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진주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6월 14일 3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이들 합세한 관군·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임에도 분전하였으나 끝내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이 가증(加贈)되었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건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o 관련 행적
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 7번째기사
上이 유생 양산숙을 공조 좌랑에 임명하고 호남·영남에 유시하는 교서 2통을 내리다 (양산숙은 학포 양팽손의 손자이며 송천 양응정의 아들임.)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이 유생 곽현(郭玄)·양산숙(梁山璹)을 보내어 바닷길을 따라 관서(關西)에 들어가 행조(行朝)에 일을 아뢰었다. 양산숙이 또 상소하여 계책을 올리니, 상이 자주 인견(引見)하여 위유하며 공조 좌랑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호민(李好閔)으로 하여금 교서(敎書) 2통(通)을 짓게 하여 양산숙에게 부쳐 보냈다. 하나는 호남에 유시하는 것으로 그 대략에,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다시 남쪽을 바라보며 구원을 기대하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절도사 최원(崔遠)과 함께 수원(水原)으로 진주(進駐)했다 한다. 부덕(不德)한 내가 어떻게 이토록까지 사람들이 사력을 다하게 할 수 있었는가. 이제 양산숙 등을 보내어 돌아가서 알리게 하니 그대들은 내가 알리는 뜻을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비록 인애(仁愛)가 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정치에 실수한 것이 많았다 하더라도 본래의 마음은 언제나 백성을 사랑하고 어여삐 여기는 것으로 뜻을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 게다가 궁중이 엄밀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조그마한 이익까지도 거둬들이고 형옥(刑獄)이 중도를 상실하여 원통한 기운이 화기를 손상케 하였으며, 왕자(王子)가 이익을 독점하여 소민(小民)들이 생업을 잃게 하였으니, 백성들이 나를 허물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이제 유사(有司)로 하여금 모두 혁파하여 돌려주게 하였다. 무릇 이러한 유(類)를 내가 어찌 역시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겠는가. 그러나 내가 몰랐던 것도 나의 잘못이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아무리 뉘우친들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 사민(士民)들은 내가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다스리려는 것을 허락하기 바란다.”하고, 또 이르기를, “하늘이 이성(李晟: 당나라 덕종때 충신)) 을 탄생시키니 성궐(城闕)을 회복할 기약이 있었고, 날마다 장소(張所: 송나라 고종때 인물) 를 기다리니 원릉(園陵)에 흠이 없음을 아뢰었다.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하는 마음에 속히 부응하여 그리고 호남에도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崔遠) 등과 수원(水原)으로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바야흐로 경기(京畿)를 회복하려고 도모하면서 그의 무리인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륙(水陸)의 험한 길을 달려와 행재(行在)에 아뢰게 하였다. 내가 아뢴 내용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고 한편으로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양산숙 등이 돌아가는데 이 글을 부쳐서 그로 하여금 상세히 전하게 하였으니, 내가 알리는 뜻을 잘 헤아리라.
요즈음 맑은 가을철에 태백(太白)이 바야흐로 높아 군사의 위용이 갖추어진 곳에 살기(殺氣)마저 따르니, 충성과 의리가 향하는 곳에 무슨 적인들 무찌르지 못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요해처를 제어하여 구적(寇賊)들을 초멸하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연도에 복병을 설치하고 좌우에서 협공하여 적이 마음대로 말을 달릴 수 없게 하라. 그리하여 한 지방을 안정시켜 노약자들을 불러 모은 연후에 힘을 합하여 경성(京城)을 수복하고 와서 승여(乘輿)를 영접하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대들은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게 될 것이며, 혜택이 자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니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정인홍을 제용감 정으로, 김면을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박성을 공조 좌랑으로, 곽재우를 유곡 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여 표창하고 면려한다.”
하였다.【교서(敎書)가 길이 막혀 몇 개월 만에야 도착하였는데, 사민(士民)들이 임금의 교서 내용을 듣고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태백산사고본】
별지 4. 왜란 직후 전라도의 정치,경제상황
선조 33년(1600 경자 / 명 만력(萬曆) 28년) 6월 15일2번째기사
四道 도체찰사로 남방을 순찰한 이항복과 농황·요역·관방·수령·적정·전세 등에 대해 논의하다
사도 도체찰사 겸 도원수 의정부 좌의정(四道都體察使兼都元帥議政府左議政) 이항복(李恒福)이 남방에서 올라왔다. 상이 별전(別殿)에서 인견(引見)했는데 동부승지 민중남(閔中男), 가주서(假注書) 변응벽(邊應壁), 기사관(記事官) 2인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남방의 일은 어떠한가?”하니, 답하기를,
“신이 전라·충청 두 도를 순심(巡審)하였으나 경상도는 소명(召命)이 계셨으므로 미처 순심하지 못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주사(舟師)를 보았는가?”하니, 답하기를,
“신이 전에 이순신에게 있을 적에 보았는데, 그때엔 배의 수효는 많았으나 병사의 수가 부족하여 격군(格軍)을 충정한 배가 많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누어 배치된 것이 일정한 수효가 있고 격군의 충정도 잘 정제되어 있는 듯하였습니다만, 원수(元數)가 단약한 것이 우려됩니다. 조정을 떠나던 날 전교하신 봉수(烽燧)에 관한 것을 말씀드리면, 양남(兩南) 연해 지방의 봉수가 간격이 너무 먼 것 같아서 지금 두 곳을 더 설치하게 하고 잘 거행하도록 신명(申明)하였으니, 설령 사변(事變)이 있더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성(京城) 근처는 어렵습니다. 또 금년의 삼도(三道) 농사는, 밭곡식은 충실치 못하였습니다만 흉년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논농사는 앞으로 7∼8월 사이에 풍재(風災)만 없다면 결실이 잘 될 듯한데 성패(成敗)는 바로 여기에 달렸습니다. 혹 풍년이 든다면 백성들이 그래도 의지할 바가 있게 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금년에 비가 많지 않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폭우가 내린 적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올라오면서 본 것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냇물이 넘치거나 논밭이 무너져 떨어져 나간 것은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개간(開墾) 상태는 어떠했는가?” 하니, 답하기를,
“작년은 재작년보다 나았고 금년은 작년보다 낫습니다. 다만 남방의 물력(物力)이 매우 모자라는 형편임을 지난번에 이미 차자를 올려 아뢰었는데 이번에 소미(小米)를 포(布)로 바꾼 것이 8백 동(同)이나 되니, 판탕이 극심한 이런 때 징수(徵收)가 이러하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심과 방비에 대한 일은 어떠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방비는 시원치 않았으나 이미 마친 일은 그래도 두서(頭緖)가 있었습니다. 충청도의 인심은 전라도 같지는 않았습니다. 전라도 사람은 본디 성질이 강한(强悍)하고 쉽게 동요될 뿐 아니라 물력(物力)을 쓰는 것이 심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남만이 요역(徭役)이 갑절인가?”하니, 답하기를,
“하삼도(下三道)는 평시에도 부담이 많았지만 임진년 난리에 전라도만 무사했던 까닭에 서로(西路)의 모든 요역이 오로지 이 전라도 지방에 부담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세가 대족(世家大族)이 이 지방에 많기 때문에 군량미 등을 거둘 때도 있는 힘을 다 기울였는데 정유년 이후 변란이 끝난 뒤에도 차역(差役)이 여전하므로 물력(物力)이 고갈된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흉적이 온다면 어떻게 방어하겠는가?”하니, 답하기를,
“소규모로 온다면 방어할 수 있겠지만 대규모로 온다면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왜적은 천하에 대적하기 어려운 적이다. 임진 왜란 때 천하의 힘을 동원하였지만 어디 당하겠던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정유년에 울도(蔚島)와 명량도(明梁島)에 왜선(倭船)이 바다를 뒤덮어 올 때 안위(安衛)가 하나의 판옥선(板屋船)을 띄워 해전(海戰)에 임했지만 적들이 이 배를 깨뜨리지 못했는데, 아마도 적선이 작았기 때문에 쉽게 대적할 수 있었던 탓인가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전선(戰船)은 어찌해서 패몰한 적이 있었는가?”
하니, 답하기를,
“배 위에서 무력을 쓸 수 없기 때문에 패한 것입니다. 신은 용맹한 장수를 수군의 장수로 삼았으면 합니다. 오로지 익숙한 사람이라야 그 용맹을 시험해볼 수 있는데, 각진(各鎭)의 첨사(僉使)나 만호(萬戶)가 타는 배에는 숙련된 뱃사공을 돌려가며 교체시키기 때문에 이내 서툴게 됩니다. 아무리 병선(兵船)이 있더라도 진실로 뱃사공이 없다면 소용없는 것으로 성패는 여기에 달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제사(統制使)는 어떤 사람이던가?”하니, 답하기를,
“신이 본디 그 사람을 알고 있는데 영민하고 비범하며 날카로운 기상이 있습니다. 다만 처음엔 사졸들이 물에 익숙하지 못하여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그곳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자못 진정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 장수는 수군 장수로서의 재능과 육군 장수로서의 재능이 각기 달랐는데, 이시언(李時言)은 수전(水戰)에도 능한가?”
하니, 답하기를, “이시언은 육전(陸戰)을 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는 용맹을 믿기 때문이다. 지난번 사직을 청하였는데, 지금은 병이 없는가?”하니, 답하기를,
“심하게 아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개 바닷가에 오래 있게 되면 반드시 상독(傷毒)을 받기 마련입니다. 신이 경도(鯨島)·노량(露梁) 등지에 며칠 동안 있어 보았는데 바다 안개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으며 옷이 다 젖었습니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을 얻게 됩니다. 또 양남(兩南)의 해안은 거리가 매우 멀어 동래(東萊)에서 해남(海南)까지 거의 1천여 리가 되는데 그 사이의 진소(陣所)가 개의 어금니처럼 서로 엇물려 있으므로 부산(釜山)·경도·고금도(古今島)가 아득하여 서로 접속되지 않음은 물론 적이 오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비하지 않는 곳이 없고 분치(分置)하지 않는 곳이 없게 하라. 부산에서 진도(珍島)·비인(庇仁)·남포(藍浦) 등지에 이르기까지는 대부분 적이 쳐들어 올 만한 곳이니 모두 요해처(要害處)를 골라서 방어하라. 또 대마도에서는 부산이 매우 가까우므로 밤에 바다를 건너와 몰래 습격한다는 말이 전부터 있어 왔다. 공갈하는 말이지만 대마도는 뱃길로 한나절 거리라고 하니, 순풍(順風)을 만난다면 기습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지금 수종(水宗)을 정탐하는 사람이 연락 부절이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도 정탐(偵探)할 수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대담한 자가 없으면 어렵습니다. 강항(姜沆)이 나왔으니 틀림없이 적의 실정을 알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항이 어떻게 알겠으며 그의 말을 어떻게 다 믿을 수 있겠는가.”
하니, 항복이 답하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은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 하문하였으나 동병(動兵)의 여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정원이 들은 바는 어떠하였는가?” 하니, 승지 민중남(閔中男)이 아뢰기를,
“형편으로 보아 동병하지 않을 듯하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민중남이 답하기를, “왜적 중 가강(家康)이란 자가 있는데 청정(淸正)과는 다르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항이 잘 모른 것이다. 왜적의 간사한 꾀는 그 부하 졸개도 오히려 모르는데 강항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왜적들은 은밀하게 맹세하면 부자 형제 사이라도 누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대를 훈련하는 일은 반드시 없을 것이지만 그 백성들은 명령이 내려지기만 하면 군사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다할 것이요, 적의 움직임 따위는 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의 형편으로 말하건대, 그들이 이것으로 그칠 것이라는 말은 기필코 그럴 리가 없다. 내년에 나온다는 것은 알 수 없지만 어찌 끝내 결말(結末)이 없겠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지난날 많은 무리를 동원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많은 사망자를 냈고 수길(秀吉)도 이미 죽었으며 나라의 물력(物力)도 많이 고갈되었으므로 스스로 중지할 계획이거나 아니면 자체에서 서로 틈이 생겨 스스로 도모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이어서 당장 군대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마도의 왜적은 자구 침구하여 올 것이니 남쪽 국경이 반드시 시끄러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왜적들이 기를 쓰고 있다니 매우 큰 걱정이다. 그러나 스스로 굳건하게 지키기만 한다면 그래도 믿을 수 있겠다.”
하니, 답하기를,“백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배는 80척에 지나지 않고 육군은 겨우 6천 명인데 경상도는 육전(陸戰)의 계획이 전혀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군이 원수(元數)도 매우 적은데 산성(山城)의 요새에 의지할 계획은 아예 하지도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답하기를,“적이 해안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도 기필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적이 대규모로 온다면 접전(接戰)하면서도 병력을 나누어 해안으로 상륙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80척의 전선(戰船)을 믿고 육전(陸戰)에 쓰이는 기계들을 준비하지 않으니, 적이 마구 휘몰아쳐 공격해 온다면 어찌하겠는가?”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마치 분을 바르듯이 가까스로 군량을 공급하는 형편이어서 약간의 군대가 있다 하더라도 군량을 계속 댈 길이 없습니다. 안위(安衛)도 지금 두어 달 먹을 군량도 없어 장차 버티어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우리 나라는 반드시 한 곳에 힘쓸 필요가 있다. 전자에 산성은 지킬 수 없다고 하여 모두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지킬 만한 곳을 굳게 지키는 것이 옳다. 단지 산성을 싫어할 줄만 알뿐 그것에 의지해서 지킬 줄을 모른다면 이는 구토 때문에 식사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매우 불가한 일이다.”
하니, 답하기를,
“전라 병사 안위는 금성(金城)을 지키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듣기로 금성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지금 병사의 장계를 보건대 좋지 않다고 하였다.”하니, 답하기를,
“담양 산성(潭陽山城)은 크고도 튼튼하여 평양성(平壤城)보다 낫습니다. 힘 들이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곳이 5분의 2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안위는 어찌하여 좋지 않다고 하였는가?”하니, 답하기를,
“성은 큰데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태조(太祖)께서 운봉(雲峯) 싸움에 승리하셨을 때 변안랼(邊安烈)에게 정병 5천 명을 주면서 ‘만일 차질이 생기거든 물러나서 금성(金城)을 지키라.’고 하셨고, 아기발도(阿只拔都)는 일찍이 ‘말은 금성에서 길러야 한다.’고 했고 주(註)에 ‘금성은 광주(光州)에 있는데 광주와 남원(南原)두 곳으로 나뉘어졌다.’고 하였는데, 생각건대 바로 이곳인 것 같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기발도가 금성에 갔었는가?”하니, 답하기를,
“운봉을 넘지 못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남방의 수령(守令)과 변장(邊將)들은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
“변장 가운데 송희립(宋希立)·소계남(蘇繼男) 등은 다 쓸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하여 수령에 적격자를 얻지 못하는가?”하니, 답하기를,
“신이 처음 지방에 도착했을 적에 매우 잘못 다스린 자는 이미 6∼7인을 아뢰어 파직시켰습니다만, 그 뒤에 역시 적격자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혹 장벌(杖罰)을 가하여 견책하기도 했습니다. 그들 모두를 체차시킬 수는 없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고 전조(銓曹)가 잘 가리지 않은 탓이고 또 수령이 되기를 원하는 자가 남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상길(李尙吉)은 어떻게 정사를 다스리기에 봉명 사신(奉命使臣)들이 한결같이 그의 선정(善政)을 일컫는가?”
하니, 답하기를,
“상길은 처사가 상세하고 부역(賦役)이 균평합니다. 또 홍주 목사(洪州牧使) 우복룡(禹伏龍)도 참으로 잘 다스리는 수령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옛사람 가운데 작은 것에는 능하지만 큰 것에는 능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직 상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감사(監司)에 적합한 사람인가?”
하니, 답하기를,
“그 사람을 살펴보면 말은 안하지만 일을 당하면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대개 수령을 포장(褒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처음엔 잘 다스리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예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치적이 제일 좋은 자를 골라서 포상하고 그 나머지는 포상할 필요가 없습니다.”하자, 상이 이르기를,“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항복이 아뢰기를,“금년의 급무는 전결(田結)을 상정(詳定)하는 일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령들이 마음을 쓰지 않은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난리 뒤에 원정수(元定數)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하자, 답하기를,
“수령들이 상정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요역(徭役)들을 반드시 전결(田結)에 의거하여 분정(分定)하기 때문에 사실대로 하는 고을은 부역이 매우 무겁게 되어 민원(民怨)이 한이 없게 되므로 수령들이 백성을 위하여 전결의 상정을 간략하게 합니다. 팔도(八道)가 다 똑같이 된 뒤에야 부역이 고르게 되고 백성들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노고가 매우 많다. 전에 있던 병세는 어떠한가?”
하니, 답하기를,“신은 본시 담증(痰症)을 앓았는데 노상(路上)에서 더위를 먹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안색을 보니 전보다 매우 좋지 않다. 이는 필시 국사 때문에 노심 초사한 탓일 것이다.”
하니, 항복이 일어나 배사(拜謝)하고 아뢰기를,
“신이 올라오는 도중에 들었는데, 지난날 홍여순(洪汝諄)이 탄핵받을 때 장관(將官) 최한(崔漢) 등이 상소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지금 옥에 갇혀 형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곡절을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형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죄범이 가볍지 않다. 경은 어찌하여 이 일을 말하는가? 장관들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상소하는 일이 있을 터이니 지금 경계하여 다스리지 않으면 발호할 조짐이 있게 될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발호할까 의심하시는데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무지(無知)해서 저지른 망령된 행동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어찌 대단한 일이겠습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단한 일이건 대단치 않은 일이건 간섭해서는 안 될 일을 저들이 간섭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터이므로 통렬히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하니, 답하기를,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찌 한두 사람이 집집마다 찾아다닌다고 하여 그 말을 따르겠습니까. 각사(各司)가 다투어 서계(書啓)하는 것을 보고 망령되이 사람들을 따라서 하려 한 일인데 형장을 맞다가 죽는다면 성대(聖代)의 누가 될지 모릅니다. 설령 탈루(脫漏)되는 폐단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이르기를,
“남쪽 지방에서는 무사(武事)를 단련하고 있는가?”하니, 답하기를,
“전라도엔 훌륭한 인재가 많은데 경상도엔 전혀 무사(武事)를 단련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또 우리나라엔 말이 없는데 무사(武士)는 반드시 말을 탄 뒤에야 그 용맹을 시험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두 준비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이것이 진실로 우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에도 포수(砲手)와 살수(殺手)가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수령이 간혹 단련하려고 하지만 충총(衝銃)과 염초(焰硝) 등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살수는 백성들이 기예(技藝)에 서툴기 때문에 숙달된 사람이 없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의 유생들은 독서를 업으로 삼고 있는가?”하니, 답하기를,
“남방의 폐습이 논의(論議)는 좋아하지만 학업에는 힘쓰지 아니합니다.”하였다. 민중남(閔中男)이 아뢰기를,
“신이 전에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을 적에 이웃한 몇몇 고을이 해도(海島)에서 대나무를 많이 베어 왔는데 가을이 되면 더 많이 벨 수 있습니다. 전결(田結)에 대한 일은 수령들이 상정(詳定)하려고 하더라도 세입(稅入) 외에 쌀을 거두는 등의 일을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결이 많으면 사람들이 원수처럼 보므로 양전(量田)을 쉽사리 할 수 없습니다. 상명(詳明)한 수령을 가려뽑아 5∼6 고을을 전담시켜 결부(結負)를 자세히 살피게 한 뒤에 경차관(敬差官)을 보내어 간심(看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죽(箭竹)은 충청도에도 있다고 하니 베어서 써도 된다. 또 선왕조(先王朝) 때부터 전죽을 북도(北道)에 옮겨 심은 것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경기와 황해도 등지에 옮겨 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o백사집에서 관련 기록
백사집 제5권 차자(箚子)
경자년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전라도에서 올린 차자
의정부우의정 제도도체찰사(議政府右議政諸道都體察使) 겸 도원수(都元帥) 신 이항복(李恒福)은 삼가 말씀드립니다. 신이 여러 해를 병들어 누웠다가 폐인(廢人)이 다시 기용되어 종군(從軍)하게 되었으므로, 천은(天恩)에 감격하여 애써 사명 길에 올라서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내려와 동분서주한 지가 벌써 두 달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4월 초경에 순찰을 마치고 영(營)으로 돌아오자, 옛 질병이 이에 심해져서 자리에 누워 신음하다 보니, 정신이 어질어질하고 기력이 쇠약해져서, 모든 연도(沿道)에서 물어 보고 귀와 눈으로 직접 듣고 보아 마음 속으로 요량한 것들을 만분의 일이나마 열거하여 성상께 아뢰려고 하였으나, 붓을 들자 정신이 아득하여 이윽고 다시 자리에 누워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날을 보내서 어느덧 20일을 경과하고 보니, 포만(逋慢)의 죄를 더욱 도피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연 소왕(燕昭王)은 연(燕) 나라가 격파된 뒤에 죽은 자를 조문하고 고아(孤兒)들을 위문하면서 현자(賢者)를 초빙하였습니다. 그리고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사람과 친하여 베풀기를 힘써서 혜택을 베풀어 사람을 잃지 않았고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으며, 10년 동안 백성을 모아 길러 잘 살게 하고 10년 동안 백성들을 교훈시켰습니다. 또 하후(夏后)는 덕을 펴고 계책을 창조하여 하(夏) 나라의 민중을 수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 임금은 모두 계책은 한때에 행해지고 지혜는 백왕(百王) 중에 뛰어나서 약한 나라를 강하게 바꾸어 능히 대업을 달성하였으니, 그들의 헤아림은 반드시 남보다 두어 등급이 더 높은 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라가 크게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 극복하는 데에 뜻을 두었을 경우에는 의당 성(城)을 쌓고 못[池]을 파고 갑옷을 손보고 군대를 훈련시키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책을 힘쓰지 않고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일을 먼저 한 것은 그 계책이 오완(迂緩)한 데에 빠져서 급선무를 빠뜨린 것이 아니라, 이는 바로 그 뜻에 반드시 연월(燕越)의 패잔한 나머지를 가지고는 제오(齊吳)의 전성(全盛)한 강함을 당해 내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우선 날개를 늘어뜨리고 백성을 보호하다가 최후에 날개를 떨치는 데서 공(功)을 거두려고 했던 것일 뿐입니다. 신이 남방에 와서 몸소 이곳 저곳을 친히 이력(履歷)해 본 다음에야 비로소 옛날 흥왕(興王)들의 한 일이 보통보다 만만 배나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이 삼가 헤아려 보건대, 남방의 형세는 지금의 물력(物力)과 지금의 인심(人心)으로는 아무리 일 년 내내 분분하게 손발에 못이 박히고 갈라지도록 힘써 일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작 백성을 몰아 흩뜨림으로써 나라가 날로 더욱 깎임과 동시에 구적(寇賊)이 이르면 창을 싸 들고 도주하게 하는 데에 불과할 뿐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강한 구적이 지경(地境)을 누르고 있은 지가 벌써 8년이 넘었으므로, 남도(南道)의 백성들이 모두 봉인(鋒刃)에 죽고 기근에 죽었으며, 지금 그 남은 사람들은 또한 적에게 죽은 사람의 유고(遺孤)들로서 가쁜 숨도 아직 안정되지 못했고 노고의 땀도 아직 씻지 못했으며, 집에 있자니 먹을 것이 없고 나가자니 갖고 나갈 것도 없어서, 한 군데에 발을 굳게 붙이지 못하고 마치 물에 떠다니는 허수아비처럼 곳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어 토착하는 자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한번 관령(官令)이 내렸다 하면 마치 물고기들처럼 놀라 흩어져 버립니다. 게다가 또 평시(平時)에 비하면 열에 아홉은 없어져서, 추첨(抽籤)하여 대오(隊伍)를 편성한 것이 만여 명도 채 안 되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일본(日本)과는 토성(土性)이 서로 다르고 강약(强弱)의 차이가 현격하여 여러 장사(將士)들에게서 들으니, 그들이 말하기를, “조선 사람 수만 명이라야 겨우 왜인(倭人) 수천 명을 당해 낼 수 있으니, 지금 겨우 창잔(創殘)한 군졸 수천을 가지고 한창 치성한 10만의 왜적과 맞선다면 겨루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은 말하기를, “아무리 일 년 내내 분분하게 손발에 못이 박히고 갈라지도록 힘써 일한다 하더라도 백성을 몰아서 흩뜨리는 데에 불과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바닷가 사람들에게 묻기를, “거함(巨艦) 70척을 가지면 이 왜적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하니, 모두들 가엾게 여기는 표정으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왜적이 적게 오면 쉽게 그들을 격파할 수 있고, 많이 오면 우열을 겨루기가 어려우며, 오지 않으면 그것이 크게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또 이것을 가지고 내지(內地) 사람에게 묻기를, “본도(“本道)의 군사 6천으로 이 왜적을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니, 내지 사람들 또한 바닷가 사람의 말과 똑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신이 여기에 의거하여 헤아려 본 결과, 만일 적게 오면 다만 수군(數郡)의 해(害)만 될 뿐, 나라의 존망에는 관계될 수 없으나, 지금 수도(數道)의 물력(物力)을 다해야만 겨우 수군의 해를 구할 수 있고, 다행히 적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으로 우리의 성패(成敗)를 점칠 수 있겠지만, 적이 많이 몰려오게 되면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이 존망의 대계(大計)에 대해서는 우선 차치하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이 때문에 신이 명을 받은 이후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계책을 낼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윽이 보건대, 변란을 겪은 이후로 유리(流離)되었다가 다시 모여든 거가 세족(巨家世族)으로서 노복(奴僕)을 불러모으고 반우(盤盂)를 수습하고 구전(舊田)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처음에는 비록 가난하지만 끝내는 생업을 복구해 냅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정립하지 못하고 먼저 의식(衣食)이나 빈객(賓客)에 대한 공수(供需)부터 다스리어 일시적인 형식만을 힘쓰는 자는 마음은 더욱 수고로우나 일은 더욱 졸렬하여 집이 날로 점차 패해 가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지금 체면(體面)은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가국(家國)은 본디 두 가지 법도가 있는 것이 아닌데, 모이지도 않은 사람들을 부리다거나 경작하지도 않은 토지에서 세금을 받아 가지고 능히 대업을 이룬다는 것은 고금 천하에 이런 이치가 없는 것입니다.
대체로 의원이 병을 진찰할 때는 맥을 살피어 증상을 잡아서 병이 생긴 원인을 알아 낸 다음, 여기에 합당한 약을 쓰면 백발백중 효험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병은 양명(陽明)에 있는데 음경(陰經)에 침을 놓는다든가, 비민(痞悶)의 증상을 앓고 있는데 조약(燥藥)을 함부로 쓰는 등, 당초 진찰이 분명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병과 약이 서로 어긋나게 되면 약을 많이 쓸수록 원기(元氣)는 더욱 손상되어 병이 더욱 낫지 않아서 끝내는 치유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지금의 국사(國事)도 마치 병과 약이 서로 어긋나서 끝내 병을 치유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것과 같이 될까 염려스럽기 때문에 한결같이 성상을 위하여 그 실상을 진술하는 바입니다.
지금 일국(一國)의 형세로 말하자면 남방이 가장 긴급하고, 남방의 형세로 말하자면 전라도가 가장 걱정스럽습니다. 그 부역(賦役)의 번거로움으로 인하여 시름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타도(他道)의 열 배나 되는데, 그 근원을 추구해 보면 역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듯합니다. 옛날에 양남(兩南) 지방은 인재(人材)의 많음과 민물(民物)의 번창함과 부고(府庫)의 은성(殷盛)함과 여사(閭舍)의 풍부함이 국내(國內)에 으뜸이었기 때문에, 국가가 여기에서 취판(取辦)하는 것 또한 타도보다 갑절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전부터 이후로는 문관(文官)이나 무관(武官)이나 음관(蔭官)으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이 호남(湖南)에서는 드물게 나오기 때문에 호남 지방 사부(士夫)들의 뜻이 대체로 이미 쓸쓸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임진년 초기에 영남(嶺南)은 적의 소굴이 되고 호남은 완전한 지역이 되었으므로, 영남에서 내야 할 모든 공부(貢賦)를 점차 호남으로 옮겨 징수하였고, 심지어는 천장(天將)의 요구에 응하는 것과 조정(朝廷)에 공급하는 것과 영남의 군량과 경사(京師)에 실어 보내는 물품까지도 모두 호남에 의존하였으니, 호남에서 국가에 치력(致力)한 것은 참으로 남김없이 다했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정유년의 변란에는 호남이 또 버려진 땅이 되었으니, 모든 공부(貢賦)의 감면을 의당 영남과 똑같은 비례로 해 주어야 할 터인데, 질질 끌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구처(區處)도 하지 않아서, 정유년의 패망으로써 그 백성들을 위무(慰撫)해 주지는 않고 항상 임진년의 완전하던 때와 같이 그 공부를 징책(徵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의 사자(士者)들은 사기가 억눌려 펴지 못하여 절로 폐고(廢錮) 처분을 받은 것처럼 되어서 벼슬길을 마치 천상(天上)의 일처럼 여기고 있고, 그 백성들은 질시(疾視)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임진년 무렵에 죽을 힘을 다하여 관가(官家)에 제공했는데, 정유년 이후로 관가에서는 옛 노고를 생각해 주지 않고 독징(督徵)만 더욱 엄격하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정사가 실로 균평하지 못하니, 백성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사부(士夫)들은 묵묵히 말이 없는 가운데 답답해하고, 백성들은 강포(强暴)하게 원망하며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하게 된 근원이 대략 이러하니, 지금의 계책으로 말하자면, 급하게 몰아칠 경우에는 백성들이 더욱 심하게 흩어져서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는 적에게 대처할 수 없게 될 것이고, 우선 늦추어 주면 민력(民力)이 조금 펴이어서 혹 3년 묵은 약쑥이라도 기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육맥(六脈)도 살피지 않고 병명(病名)도 확정하지 못하여, 조(燥)와 습(濕)에 적의함을 잃어 병과 약이 서로 어긋나게 하고서, 진초(秦楚)의 부강(富强)한 정사를 연월(燕越)의 패잔(敗殘)한 나머지에 시행한다면 연 소왕(燕昭王)과 월 구천(越勾踐)의 비웃음을 받지 않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불행하여 후일에 변란이 밖에 있지 않아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터질 경우에, 만일 소신(小臣)이 오늘날 그 실상을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중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말씀드리건대, 남방을 경리(經理)함에는 의당 호남을 먼저 해야 하겠고, 경리하는 요령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먼저 민력(民力)을 펴이게 하여 되도록 민심을 기쁘게 해 주고, 점차로 고통 입은 사람들이 재기(再起)하고 떠돌아 흩어진 사람들이 다시 돌아온 다음에야 바야흐로 수어(守禦)와 제승(制勝)에 대한 일을 차례로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남변(南邊)의 전쟁 수단은 수군(水軍)을 능가할 것이 없는데, 호서(湖西)에서는 다만 전함(戰艦) 10척을 마련하였고, 영남에서는 또 20여 척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호남에서만 유독 40여 척을 마련하였고, 1년 동안 징발된 군정(軍丁)의 숫자를 통틀어 계산해 보면 이미 1만 4천여 명을 넘었습니다. 호남 일도(一道)의 전성하던 때에도 수졸(水卒)이 겨우 1만 1800여 명에 불과했는데, 지금 파잔(破殘)한 나머지에 미쳐서 군정을 징발한 숫자가 평상시보다 훨씬 많으니, 아무리 십분 요리(料理)를 잘 하고 십분 타당하게 처리를 한다 하더라도 백성을 징발한 숫자가 이렇게 많고서는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을 품지 않게 할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하자면, 마치 가난한 집에 손님이 많아서 배반(杯盤)을 대단히 걸게 차려 내놓고 보면 술 단지와 창고가 바닥나 어진 부인도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모르게 되며, 약한 힘으로 거대한 공사(工事)를 하면서 일의 과정을 너무 급히 서둘다 보면 손가락에 피가 나고 얼굴에 땀이 나서 훌륭한 장인(匠人)도 두려워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격이니, 아무리 슬기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오늘날의 계책에 대해서는 어찌할 줄을 모를 것입니다.
이런 방도로 이런 욕구를 이루려고 하여 항상 예전의 방식만을 고집해서 오래도록 시행하다 보면, 그 형세가 장차 오늘은 한 사람이 도망가고 내일은 한 집이 망하여 달이 지나고 해가 지날수록 날로 흩어져 도망가서 징발할 군사가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니, 그렇게 되면 끝내는 해안이 적막하게 전선(戰船) 한 척도 없게 되고 뜻밖의 걱정 또한 반드시 없으리라는 보장을 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의당 성상께서 유념하시어 소의 간식(宵衣旰食)하면서 불 속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는 데에 힘써야 할 바로서, 일을 담당한 제신(諸臣)들이 의당 시급히 먼저 강구해야 할 바입니다.
그 다음 문제로 논하자면, 먼저 도내(道內)의 대단한 차역(差役)들을 면제해 주어 특별히 우휼(優恤)의 은혜를 보여 준다면 생민(生民)의 기대에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사의(事宜)를 조목별로 나누어 별도로 기록해서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이 앞에서 진술한 것을 수시로 한가한 때에 반복하여 신중히 생각해 보시고, 이 아래에 기록한 것들을 속히 유사(有司)에게 내리어 조목조목 검토해서 격식에 구애되지 말고 복의(覆議)하도록 하여, 분명하게 유지(諭旨)를 내려 시행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함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훌륭하신 처분을 바랍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