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혁
ο 지석묘가 관동리·와룡리·장산리 등지에 남아 있으며 백제시대 고시이현에 속하였다. ο 660년 신라의 영역이 되어 갑성군에 속하였으며 892년 후백제 영역이 되어 45년간 지속되었다. ο 936년 고려의 영영이 되어 장성군에 속했다가 1018년 영광군에 예속되었는데 이때 장성읍 영천리 일대에 설치된 마량부곡(馬良部曲)에 황룡면 월평리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ο 1600년 정유재란의 피해로 인하여 장성현과 진원현의 각기 존립이 불가능하므로 두 현을 합병하였다. ο 여지도서(1759년)에 의하면 장성도호부에 15개 면이 있었는데 그중 현재의 황룡면 지역에는 서일면(28호 637명)·서이면(282호 927명)·남삼면(197호 886명)이 있었다. ο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ο 서일면(6마을 262호 780명) : 다산리·수산리·신촌리·장자리·중등리·필암리 ο 서이면(21마을 375호 1,409명) : 맥동·하등산·관정·매곡·사기점·용암리·용적·생철점·소곤리·우라·우라사기·분매동·상통·하통·금동·초지곡·북문·소곡리·하남 ο 남산면(16마을 193호 742명) : 통정리·신기리·월암리·봉황리·대해리·맥정리·와곡리·방곡리·조포막·건동리·신촌리·동림리·덕산리·주막리·외황룡리·내황룡리 이때 월평리는 읍동면에 속하였다. ο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서일면·서이면·남삼면을 통합하여 황룡면이라 하고 13개 리 42개 마을을 관할하게 되었다. 면사무소는 내장산에 있다가 1923년경 현 위치로 옮겼다. ο 1992년 와우리에 상무대 군사 훈련장이 들어서 마을이 완전히 없어졌다. 와우리(臥牛里)는 탑정이·우라리·분매동 3개 마을이었으며 당시 탑정이 6호·우라리 19호·분매동 8호 총 33호 92명이 살고 있었다.
(2) 월평리(月坪里)
월평리는 황룡면 소재지이며 신시장·월산동·교동·원월평·신기촌·일산동으로 이루어졌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남삼면에 신촌리(新村里)·동림리(東林里)·덕산리(德山里)가 나오고 읍동면에 월평리가 나오는데 신촌리는 신기촌, 동림리와 덕산리는 이미 폐촌된 둥두리와 덕울암인 것으로 추정된다.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남삼면 신기리·장기리(場基里) 읍동면에 월평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장기리는 현 월산동 일대로 추정된다. 1914년 신기리·장기리·건동리 일부와 월평리를 합하여 월평리라 하였다. 1926년 신시장이 생기고 1960년경 교동이 월산동에서 분리되고 1980년 일산동이 새로 생겼다. 이상의 기록 등으로 볼 때 월평리에는 월산봉 기슭에 원월평과 신기촌이 있었는데 시장이 옮겨오면서 오늘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ㅇ 신시장(新市場) 원래 하천 강변이었는데 1926년 시장이 옮겨오면서 상가가 형성되었으며 인구 이동이 심하여 일제때부터 거주해 온 성씨는 장흥고씨와 전씨 등이며 해방후 울산김씨·진주강씨·밀양박씨 등이 들어왔다. 일제때는 일본인 7∼8명이 잡화상·지물·고리대금업·야채상을 하면서 상권을 잡았으며 정미소·병원·약국·약방·음식점 등이 있었다. 현재 182호 595명이 주로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 인물 : 고윤경(황룡시장 발전에 공헌)·김기중(광주대성학원장)·강대영(유창어페럴대표)·이정수(의사)·정정호(면장)·김형중(성지포장 사장)·조복래(군의회 의장).
ㅇ 월산동(月山洞) 원황룡 마을에 있던 황룡시장이 옮겨오면서 성촌된 마을이다. 그 시기는 고종때로 추정되며 1894년 4월 동학농민군의 황룡전투가 이곳 시장터에서 발발하였다. 1923년경 내장산에 있던 면사무소가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26년 장터가 좁아 신시장으로 옮겨갔다. 일제때는 120호 정도였으며 한때 140여호가 살다가 지금은 115여호로 줄었는데 거주 성씨는 나주임씨 5·강릉유씨 4·회진임씨 3·해주최씨 3·여양진씨·남원양씨·밀양박씨·김해김씨·광산김씨·무안김씨·하동정씨·진주정씨·평산신씨·울산김씨·충주박씨·동래정씨·전주이씨 기타 등이다. 동명유래 :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장기리(場基里)로 나온다. 원래 [장터]라 부르다가 장이 옮겨간 후는 [구장터]라 불렀는데 해방 후 마을 앞 월산봉을 본따 월산동이라 했다. 인물 : 변진명(과학기술연구원 교수, 박사)·변진장(판사)·박정봉(중등교장)·김정수(전남대 교수)·박종권(교수 박사)·박종국(여수시장)·최상호(준장, 사단장).
ㅇ 교동(校洞) 원래 원월평에 속한 마을 같으며 월산동과도 한 마을이었다. 점거리라 불렀는데 옹기를 만들던 곳인가는 확인할 수 없다. 1920년대 월평초등학교가 설립되면서 교동이라 불렀으며 이때 20여호가 없어졌다고 한다. 일제때 울산김씨·한양조씨·밀양박씨·김해김씨·광산김씨·제주양씨·인동장씨·최씨·이씨 등 60여호가 거주하다가 6·25때 2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으나 많은 인구의 이동이 있었다. 철도 너머 동쪽에 20여호가 있었는데 고려시멘트 공장 건립을 계기로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최근 아파트가 들어서 현재는 115호가 살고 있다. 인물 : 김영윤(금융조합장, 면장)·최석중(한국병원원장)·양대빈(면장)·장용운(육군소령).
ㅇ 원월평(月坪) 이마을은 읍동면이었는데 1914년 황룡면으로 편입되었다. 300여년전 울산김씨가 입향하여 세거해 왔는데 그전에 기씨가 살았다는 설도 있다. 후에 인동장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남원양씨·광산김씨·평강채씨·파평윤씨·회진임씨, 해방후에 경주최씨 그리고 6·25후에 행주기씨·전주이씨·능주구씨가 들어왔다. 현재 12호가 살고 있다. 1907. 11. 5 의병이 기숙했으며 이듬해 4·18 의병 60여명이 일군과 1시간 동안 교전하여 의병 3명이 죽고 화승총 2정을 빼앗겼다. 이틀후 월평주둔 일본 순사대가 김태원 부대 후군장 김옥현 외 2명을 생포하고 의병을 추격하던 중 의병 50여명이 역습하여 포로를 감시하던 김경시 외 1명이 민가로 도망하는 틈에 포로 3명을 구출하였으며 김경시는 좌측 대퇴부에 중상을 입었다. 동명유래 : 옛날에는 [안두룩·산정]이라 불렀는데 월산봉을 본따 월평으로 변했다. 인물 : 김시중(월평초등학교 설립자)·양병희(농촌지도소장)
ㅇ 신기촌(新基村) 구전에 의하면 현 신기촌 동남쪽 1.5km에 인동장씨가 터를 잡은 덕울암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폐촌되었으며(시기 미상) 남쪽 낙산봉 기슭에 둥두리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1989년 8호가 살다가 성지포장 공장이 들어 서면서 없어졌다. 그후에 신기촌이 생겨 신촌(새터)이라 부르다 동명이 바뀌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 신촌리·동림리·덕산리가 나오는데 동림리는 둥두리이고 덕산리는 덕울암인 것 같다. 그러나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신기리(신촌리)만 기록되어 있고 동림리·덕산리는 보이지 않는다. 신기촌은 약 380년전 인동장씨가 들어온 후 울산김씨·회진임씨·의성김씨·광산김씨·경주김씨·김해김씨·경주이씨·밀양박씨·광산노씨·파평윤씨·행주기씨가 들어오고 6·25후에 의령남씨·남원양씨·밀양손씨·하음봉씨 등이 들어와 현재 73호가 살고 있다. 인물 : 김일중(황룡면장)·기노훈(북이면장) 신기촌 남쪽에 1920년대로 행주기씨가 입향하여 성촌된 일평(日坪)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곡부공씨·탐진최씨·황주변씨·의성김씨·인동장씨·광산김씨 등이 들어와 살면서 [새터]라 불렀는데 1960년 월평과 대조되는 [일평]으로 바꿨으나 1989년 공장이 들어와 없어졌다. 인물 : 기우증(장성초대교육장)·기우양(교장)·기수도(장성여고교장)·기항도(독립운동)·기홍도(부군수)·이일현(군의원)·김영안(국민은행천안연수원장)·이종현(광주교육청중등장학관)·기서(광주시교육청장학사).
ㅇ 일산동(日山洞) 일본인 오까모도가 아카시아 밭에 뽕나무를 조성하여 종방을 세웠는데 해방후 밀양박씨·강화최씨·김해김씨·울산김씨·함양박씨·전주최씨·진주정씨 등이 들어왔다. 처음은 종방 건물에서 살다가 새마을 쪽에 마을이 조성되었으며 이때는 월산동에 속해 있었다. 1978년 건동마을이 고려시멘트 채석장으로 되면서 이곳에 마을을 조성하여 24호가 들어왔으며 1980년 일산동으로 독립하여 89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월산동에 대칭대는 동명을 붙였다. 인물 : 최종삼(유도 국가대표 감독)
(3) 臥龍里(와룡리)
와룡리는 방곡·와곡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 진원현 지역으로 1600년 장성현과 합병되어 남삼면에 속하였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와곡리(臥谷里)·방곡리(方谷里)·조포막(造泡幕)·건동리(建洞里)가 기록되어 있고 1912년 <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건동리·방곡리·삼룡리(三龍里)·와곡리가 나온다. 조포막 : 와룡리와 옥정리 경계 현 정미소 부근에 있었던 주막으로 이곳에 황룡강을 건너는 배가 있어 영광쪽으로 왕래하는 많은 행인들이 붐볐는데 일제때 황룡시장 옆에 다리가 놓이면서 배도 주막도 없어졌다. 삼룡 : 방곡동 남쪽 1Km 들가운데에 있었는데 일제초기 7∼8호 말기 3호 해방후 1호가 있다가 6·25때 없어졌다. 건동 : 건고봉 아래 산속에 있었다. 평전에 먼저 사람이 살았던 것 같으며 6·25때 18호였으며 1978년 15호가 살다가 고려시멘트 원료채취장이 되어 없어졌다.
ㅇ 방곡(芳谷) <호구총수> 등의 기록에는 방곡(方谷)으로 나오며 지금은 방곡(芳谷)으로 쓰는데 이유는 알 수 없다. 먼 옛날 고을이 있었다는 텃골(고을터)에서 기와편과 그을린 돌이 출토되는데 옛일은 알 수 없다. 김해김씨가 110여년간 살고 있으며, 100여년전 남원양씨·곡부공씨·순창설씨가 들어오고 그뒤 울산김씨·하동정씨·상산김씨·금성나씨·진원박씨·광산김씨가 들어와 일제때 24호 정도 살았는데 현재 21호이다. 1930년대에 김문수 외 11명이 농촌진흥회를 결성, 돼지사육등 농촌진흥 운동을 하였으며 1935년 농산물 품평회를 열었다. 그 공로로 김문수 공적비를 세웠다.
ㅇ 와곡(臥谷) 죽림동 앞 들가운데에 지석묘 2기가 있다. 죽림동과 와곡 2개 마을로 되어 있으며 520년전 봉산이씨가 입향하여 세거했다는 기록이 있다. 170년전 진주강씨, 120년전 의성김씨·연안차씨, 그뒤 김해김씨·울산김씨·밀양박씨가 들어와 일제때 와곡 21호·죽림동 8호·재각고랑 5호가 살았다. 6·25때 별피해는 없었으나 이농현상으로 현재 15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와곡은 와우형국에서 죽림동은 죽림사(竹林寺)에서 비롯 인물 : 강백희(1893 무과, 진사)·김은주(삼강산업대표), 강두석(남강상사 대표). 유물유적 : 지석묘, 봉산이씨 재각, 의성김씨 제각, 탐진최씨 재각, 죽림사지.
(4) 옥정리(玉井里)
옥정리는 대해·맥정·구대해·월암 4마을로 이루어 졌으며 옛날에는 진원현 이었는데 1600년 진원·장성 두 현의 합병되고 남삼면에 속하였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는 통정리(桶井里)·신기리(新基里)·월암리(月岩里)·대해리(大海里)·맥정리(麥井里)가 나오는데 신기리는 위치를 알 수 없고 통정리는 1914년 광산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맥정리·월암리·대동리(대해)·소동리(구대해)·함평군 오산면 우평리 일부를 옥정리라 하여 황룡면에 속하게 되었다.
ㅇ 대해(大海) 원래 구대해와 한 마을이었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분리되었다. 맥정의 의성김씨가 옮겨왔으며 그후 진주강씨·황주변씨·인제민씨·광산김씨·청송심씨·창녕성씨·서흥김씨가 들어와 일제때 40여호가 살았다. 6·25때는 별피해가 없었으며 김해김씨·연일정씨·상산김씨·풍천임씨 등이 들어왔으나 현재 3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새우형국이라 대화(대하)라 했다. 구대해에서 분리된 후 이 마을이 더 큰 마을이라 한때 대동으로 부른 것 같다. 유물유적 : 맹암(孟岩)영당(옥산사玉山祠) -태종때 정난공신 양소공 맹암 김영열의 영당.
ㅇ 맥정(麥井) 원맥정과 퇴전메로 이루어졌다. 약 450년전 의성김씨가 들어왔으며 130여년전 광산김씨, 조금후 김해김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남평문씨·여산송씨, 6·25후에 진주강씨가 들어왔다. 일제때부터 33∼4호가 살았으며 6·25때도 별피해가 없었으나 현재는 19호(원맥정 15, 퇴전메 4)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물이 귀한 곳이라 맥정이라 했다고 하며 <호구총수 : 1789년>에는 맥정(麥井) 1912년 기록에는 맥정(麥亭)으로 나와 있다. 인물 : 김긍현(승훈랑, 장성군수)·김영윤(황룡면장)·김태수(군수)·김병수(교육청 서기관)·김원일(전남도의회 전문위원).
ㅇ 구대해(舊大海) 맥정의 의성김씨가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고 전하며 호구총수(1789년)에는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대동리(大洞里)로 나오는데 대해마을이 점차 커지자 두 마을로 갈라지면서 소동리와 대동리라 불렀는데 1927년 장성읍지에 소해와 대해로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이전에 이름이 바뀐 것 같으며 소해가 다시 구대해로 변했다. 현재 울산김씨가 가장 오래 살고 있으며 광산김씨·상산김씨 등 16개 성씨 34호가 거주하고 있다. 인물 : 김일수(장성교육장)·김재수(광주교대 교수)·김승호(순천대 교수)·김상원(사무관)·김종욱(면장). 기타 : 마을 뒤 물통골에 옥정약수라고 부르는 유명한 약수샘이 있다.
ㅇ 월암(月岩)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 남삼면 조에 통정리(通井里)·신기리(新基里)·월암리(月岩里)가 나오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통정리는 1914년 광산군으로 편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광주시 오룡동 토말(통정)과 새터(신기)가 아닌가 추측된다. 월암에는 조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의성김씨가 가장 오래 살고 있다. 함평이씨가 약 200년전 들어온 후 남평반씨·울산김씨·경주김씨·한양조씨·제주양씨 등이 들어왔다. 일제때 23호가 거주했는데 1908년 3월 20일 김태원 의병 60여명이 일본군과 5시간 동안 접전하였다. 6·25때 별피해는 없었으며 현재 12호가 살고 있다. 1960년대에 옥정간이역이 생겼는데 1980년 정식역이 되었으나 지금은 폐쇄되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달 형국이며 뒷산에 바위가 많아 월암이라고 하였다. 인물 : 김동성(목포세관장)·김병갑(육군대령)·이만행(의사)·양장권(의사)·양차권(변호사).
(5) 황룡리(黃龍里)
황룡리는 황룡·회사촌·봉덕·부흥 4마을로 이루어졌으며 옛날 남삼면 지역으로 장성·영광·함평 3개 군의 경계지역이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 봉황리·주막리·외황룡리가 나오며,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북촌리·외황리·봉덕리·부흥리가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때 외황리·북촌리·봉덕리·부흥리와 함평군 대화면 월전리(月田里), 영광군 외동면 황룡리·왕산리(旺山里) 일부를 황룡리로 통합하여 황룡면 관할이 되었다.
ㅇ 황룡(黃龍)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보면 장성 남삼면에 외황룡리·내황룡리가 영광 외동면에 황룡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외황룡리가 현재의 원황룡으로 양지편은 장성이고 음지편은 영광이었는데 1914년에 합해졌다. 그러나 지금도 음지편의 5호가 동화면에 속한다. 그리고 북촌과 회사촌도 황룡에서 갈라져 나온 마을이다. 원래 여양진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광산김씨 황룡파의 입향조 숭조(1461∼)가 들어온 마을이다. 100여년전에 청송심씨가 일제 때 밀양박씨·강릉유씨·풍산홍씨·진주강씨 등이 들어와 약 80호가 살다가 6·25때 1명이 죽었을 뿐 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 후 신평송씨·이천서씨·이씨·정씨 등이 들어왔으며 이농현상으로 현재 6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용바위 전설이 있으며 중앙룡이라 황룡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김숭조(나주목사)·김기(홍문관 전한)·김경우(공조좌랑)·김우급(진사)·김여옥(형조참판)·김여흠(부사)·김성대(증가선대부이조참관)·김문기(가선대부)·김천흥(통훈대부)·김천상(부사)·김후광(곡성현감)·김경찬(유학자)·김긍현(장성군수)·김흥현(수리조합장)·김영하(목포시장)·김정호(황룡면장)·김철수(순천시장)·김영덕(장성군 농협장, 전교)·김길수(나주부군수)·김문수(여수시장)·김원익(전교)·김원만(전교)·김경식(서강대 이사장)·김인식(초등교장)·김광식(의학박사)·김흥식(민선 1, 2, 3대 장성군수)·김강식(농촌진흥청차장)·김동수(초등교장)·김대수(조대교수)·김형수(연대교수)·김홍수 (교육장)·김정대(고등교장)·김효식(초등교장)·김용준(도청국장)·김오식(육군중령)·김근식(육군중령)·김황식(판사)·김인현(초등교장)·김정수(경제학박사)·김용선(교수)·김용대(서강대교수)·김용근(동신대교수)·김영주(초등교장)·김완식(전북대교수)·김해두(공학박사)·김용우(전대교수)·김용철(정치학박사)·김효석(국회의원)·김항식(판사)·김용준 (전남도농정국장)·김용채(사무관)·김강수(사무관)·김형수(사무관)·김형수(서울대교수)·김영주(전대교수)·김용건(동신대교수)·김병주(고등교장)·김택(중등교장)·김용득(중등교장)·김홍수(장학사)·김원조(초등교장)·김순걸(초등교장)·김용열(초등교장)·김인식(초등교장)·김용역·김군수·송일곤·김용채·김용욱(의사)·김용선·김창수(기업체사장). 유물유적 : 요월정(원림)- 전남기념물 70호, 용바위- 용이 승천한 곳, 낙화암 -임난 때 여양진씨 부녀자 8명이 투신했다.
ㅇ 회사촌(會社村) 황룡강변의 황무지를 1897년 장성군수로 부임한 김성규가 포전으로 개간하여 관리인을 두면서 성촌된 마을이다. 일제때 10여호가 살았으나 1963년 수해 이후 황룡강 제방을 쌓은 뒤부터 마을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어 현재 광산김씨 12호·전주이씨 5호·기계유씨 2호·남평문씨 2호·진주강씨 2호·제주양씨 2호·밀양박씨 2호 등 약 5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김성규가 세운 상성(詳星)합명회사에서 유래,
ㅇ 봉덕(鳳德) 원래 남삼면 지역으로 금성나씨가 240여년간 살고 있다. 그 후 풍천임씨·광산김씨·밀양박씨·전주이씨·장흥고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반남박씨·경주정씨 등이 들어와 13개 성씨 50∼60호가 살다가 6·25때 4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다. 인동장씨·김해김씨·문화유씨 등이 새로 들어왔으나 현재 30여호가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호구총수 : 1789년>에는 봉황리, 1912년 기록에는 봉덕(奉德)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봉황산 아래있는 마을이라 봉덕이라 한다. 인물 : 김병관(육군대령)·신현철(육군중령)·정해조(초등교장)·신현구(조합장)·정희근(서울중구의회부의장).
ㅇ 부흥(扶興) 원래 남삼면 지역으로 수원백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약 130년전에 광산김씨와 함평이씨가 들어오고 이어서 나주정씨·공주이씨 그리고 해방 후 전주최씨, 6·25후 진주강씨·방매양씨·행주기씨·청송심씨·전주이씨·밀양박씨·장흥고씨·인동장씨 등이 들어왔다. 해방 후 34호가 거주하다가 6·25때 3명이 죽었으며 재산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이농현상으로 호수가 줄어 20여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봉황산에 부엉이가 살고 있어 부흥이라 했다고 한다.
(6) 신호리(莘湖里)
신호리는 다산·신촌·내황·북촌 4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에는 내황과 북촌은 남삼면이었고 다산과 신촌은 서일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황룡면 신호리로 통합되었다.
ㅇ 다산(茶山) 원래 서일면(西一面) 지역으로 처음 배씨가 터를 잡고 후에 광산김씨와 한양조씨가 살다 모두 떠났다고 한다. 300여년전 금녕김씨가 들어오고 선산김씨·밀양손씨가 150년전, 김해김씨가 130년전, 진주강씨가 120년전 탐진최씨, 최진임씨·천안전씨가 100년전에 그리고 동래정씨·하씨 등이 들어와 일제때 80여호가 살았는데 일본인 삼포가 농사와 양잠을 했었다고 한다. 6·25때 5명이 죽었으며 가옥피해는 없었다. 그후로도 10여개 성씨가 들어왔으나 지금은 아랫뜸 31호·웃뜸 2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지금도 [소례]라고 부르며 옛날 배씨 효녀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는데 <호구총수 : 1789년>에도 [다산(茶山)]으로 나온다. 유물유적 : 죽절봉에 절터가 있으며 일제때 교회가 있었는데 해방후 장성백이로 옮겼다. 인물 : 이정인(면장)·김병진(면장).
ㅇ 신촌(莘村) 1789년 <호구총수>에는 서일면에 新村으로 나오는데 상고할 수 있는 것은 약 200년전 밀양박씨가 들어오고 울산김씨가 5대째 살다가 떠났다. 100여년전 달성서씨·일제때 영월엄씨·창녕조씨·장수황씨·김해김씨·경주최씨 등이 해방 후 전주이씨 등이 들어와 15호가 살다가 6·25 직후 3명이 공비에게 죽었다. 그 후 10여개 성씨가 들어와 한때 30여호까지 살았으나 현재 17호가 살고 있다. 구신등에도 4호가 있었는데 도로확장때 철거되었다. 동명유래 : [신촌(新村)]을 [신촌(莘村)]으로 바꿨는데 면내에 새터(신촌, 新村)가 또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인물 : 김녹휴(고산서원 배향)·김요중(황룡면장). 유물유적 : 수산(水山)사박연생·김개·박수량·박상의·박상지·배향.
ㅇ 내황(內黃)] 내황은 원래 남삼면 지역으로 내황·장성백이·안골로 이루어졌다. 내황은 원황룡의 광산김씨가 옮겨와 살기 시작한 것 같으며 그 외 성씨는 150년 이후에 들어왔다. 일제때 60여호가 살았는데 6·25때 일가족 10여명이 죽고 2호가 소각되었다. 마을 주변의 야산에 일제때부터 과수가 발달하여 70년대 중반 83호였는데 지금은 광산김씨 10·장흥고씨 10·밀양박씨 10·동래정씨 8·한양조씨 7·영산신씨 4·행주기씨 3·전주이씨 2·철원주씨 2·김해김씨 2 등 70여호(내황 56·안골 7·장성백이 7)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옛날부터 [이압정]이라 부르며 샘 또는 정자와 관련된 듯 하다 <호구총수 : 1789년>에도 내황리로 나오는데 원황룡(외황룡)의 안쪽에 있기 때문이다. 또 장성백이는 옛날 장성과 영광의 경계로서 장승이 서 있었으며 술집 등 상가가 있었다. 인물 : 고재풍(남삼면장). 유물유적 : 황파정 고정주가 1927년 건립·미 군정때 사무소로 사용, 석불 : 내황수구맥이었는데 1992년 장성백이로 옮김.
ㅇ 북촌(北村) 북촌은 원래 원황룡과 한 마을이었는데 마을이 커지자 북쪽 뜸으로 분리되었으며 1912년<행정구역명칭>에 나온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는 황룡리에 속했는데 그 후 신호리로 편입되었다. 옛날 진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원황룡의 광산김씨가 옮겨와 자자일촌한다. 6·25때 30여호가 살았는데 인명피해나 재산피해가 없었다. 지금은 광산김씨 12호 등 16호가 살고 있다. 인물 : 김정호(황룡면장)·김법수(황룡면장)·김동수(초등교장)·김종석(노동부 사무관).
(7) 장산리(長山里)
장산리는 옛날 서일면 지역으로 하사·외장산·내장산·수산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서일면조에 수산리(水山里)·장자리(莊子里)가 기록되어 있고 1912년 <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상사리·하사리·동촌리·수산리·외장산리·내장산리·장양리가 나오는데 장양리는 알 수 없다. 1914년 황룡면사무소를 황룡면에 설치했었는데 1929년 월산동으로 옮겼다.
ㅇ 하사(下沙) 원래 하사에는 조승지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행주기씨가 120년전 아치실에서 들어왔다. 한때 38호까지 되었으며 1912년 기록에 상사리와 하사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웃뜸과 아래뜸(뱃나드리 부근)이 있었는데 1925년 15호 정도의 상사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하사는 일제때까지 현 지서 부근의 까마굿등과 강변쪽의 뱃나들이에 모두 6호정도 살았고 정비공장 위쪽 치아지에 5호정도 살았는데 뱃나들이에는 일본인 4명이, 치아지에는 종방관리인 일본인 2명과 채소를 제배한 중국인 2명이 살았다. 6·25 직후 피난민들의 구호주택이 건립되면서 현재의 마을이 조성되어 1963년 70세대·1975년 120세대·아파트가 생겨 현재 216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거주성씨는 김해김씨 10호·밀양박씨 10·광산김씨 5·울산김씨 3·천안전씨 3·한양조씨 3·해주오씨 3·양천허씨 3·진주정씨 3·전주이씨 3·보성선씨 2·황주변씨 2·전주최씨 2·화순최씨 2 외 26개 성씨이다. 1952년 황룡지서 1980년 농촌지도소가 설치되었다. 동명유래 : 원래 [뱃나드리]라고 불렀으며 강변의 모래밭에서 유래된 것 같다. 인물 : 기양연(옥구현감)·기동연(일제때판사)·기우황(한국전파연구소장)·기우창(읍의원)·김태일(육군대령)·유두석(건교부서기관)·노사기정진 선생이 28년간 거주.
ㅇ 외장산(外長山) 외장산은 옛날 서일면 지역으로 내장산에서 분리된 마을이다. 약 200년전 밀성박씨가 들어온후 100년전에 김해김씨와 달성서씨가 들어오고 그후 의령남씨·동래정씨·봉화정씨·남원양씨·전주이씨 등이 들어와 40여호가 살다가 6·25때 10여명이 죽고 7∼8호가 불탔다. 그후 장흥고씨·무송유씨 등이 들어와 35호 정도 살다가 현재 30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내장산과 한 마을로 [장지메]라고 불렀는데 [안장지메]가 노주형국이기 때문이라 한다. <호구총수 : 1789년>에는 [장산리(莊山里)]로 1912년 기록에는 [외장산리(外莊山里)]로 나오는데 지금은 외장산(外長山)으로 쓴다. 인물 : 박일균(명치대 졸업, 항일운동)·박증구(교수)·박인수(중등교장)·박균억(경감). 유물유적 : 이학승순의비 1894년 동학 황룡전투때 전사, 송영순 등 유림이 건립, 사적 406호 동학 황룡전투 전적지(98년 지정).
ㅇ 내장산(內長山) 오래된 마을로 처음 전주이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하나 상고해 볼 수 없다. 그 후 200여년전 밀성박씨가 130여년전 행주기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의령남씨·김해김씨·광산김씨·풍산홍씨·상산김씨·금성나씨·전주최씨·창녕조씨·경주정씨가 들어와 6·25때 27호가 거주하다가 한양조씨·파평윤씨·전주이씨·창원황씨·장흥고씨 등이 들어와 90년도 37호가 거주했으나 아파트가 들어서 200여 세대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노루형국이라 장지뫼(장산, 獐山)라 불렀는데 장산(莊山)→장산(長山)으로 바꿨으며 외장산이 분리되면서 내장산이라 했다. 인물 : 박균상(서일면장)·박균철(황룡면장)·박내열(황룡면장)·기건도(황룡면장)·박내춘(도의원)·정창옥(도의원)·양상훈(이건(주)사장).
ㅇ 수산(水山) 마을 고샅을 경계로 웃뜸·아랫뜸, 동촌·서촌으로 부르기도 한다. 연산군때의 김개선생이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박씨들이 살았다는 구전이 있고 주씨가 살다가 떠났다. 탐진최씨가 12대째·영광김씨 영광파가 6대째·장흥파가 4대째 살고 있다. 그후 김해김씨·밀양박씨·한양조씨·광산김씨·제주양씨·평산신씨·영광정씨·울산김씨·나주임씨가 들어와 40여호가 살다가 6·25때는 2명이 죽고 별피해는 없었으나 1974년 장성호 수로가 나면서 11호가 철거되어 현재 51여호가 거주한다. 1836년 수산사가 창건되었다가 1868년 훼철되고 1894년 동학황룡 전투가 끝난날 밤 동학군이 하룻밤 자고 갔다. 1975년 동강사가 건립되어 김준식 선생을 향사하고 있다. 동명유래 : 원래 [물뫼]라고 부르는데 뒷산이 수산(추산)이다. 인물 : 김개(홍문관 교리)·김준식(한학자)·김녹영(국회부의장)·김철환(동광개발대표)·최석호(초등교장)·김영환(삼서중교장)·김재찬(장성군총무과장).
(8) 필암리(筆岩里)
필암리는 중동·선촌·필암·구석·증산 5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서일면 지역으로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 중등리(中登里)·필암리(筆岩里)가 기록되어 있고 1912년의 기록도 동일한데 1914년 기록에 구석(九岩)이 나온다.
ㅇ 중동(中洞) 옛날 오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울산김씨 각재공이 320년전에 분가해오고 100여년전 영광김씨가 들어왔다. 일제때 나주임씨·나주나씨·은진송씨·장흥장씨·김해김씨·광산김씨·한양조씨·천안전씨·경주최씨·밀양박씨·순흥안씨·나주오씨·전주이씨 등이 들어와 57호가 살다가 해방후 좌익들이 13호를 소각시켰으며 6·25때는 3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다. 그후 3∼4호가 들어왔으나 큰 변동없이 지내오다가 이농현상으로 3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각재공이 꿈에 선몽했다하여 몽등(夢嶝)이라 하다가 [중등]으로 고쳤는데 다시 [중동]으로 쓰고 있다. 인물 : 김기하(각재·하서 4세손·학자)·김수중(한말의병)·나광찬(대전공업진흥청사무관). 유물유적 : 추산서원지(1677년 건립·1868년 훼철).
ㅇ 필암(筆岩)·선촌(船村) 필암과 선촌은 한 마을이었는데 1976년 분리하였으나 지금도 한 마을로 부르고 있다. 1672년 필암서원이 들어서기 전에 오씨와 최씨가 살았다고 하며 6·25 후에도 필암 38호·선촌 15호였는데 지금은 필암 26호·선촌 36호이다. 6·25때 13명이 죽고 가옥피해는 없었으며 여순반란사건때 구석태에 지서가 설치되었다가 6·25직후에는 3년간 필암서원에 설치되었다. 필암에는 탐진최씨 11대·울산김씨 8대·평산신씨 5대·달성서씨 5대·광산김씨 4대·김해김씨 3대째 살고 있으며, 일제때 천안전씨·금성오씨·죽산안씨, 6·25후 이천서씨가 들어왔다. 선촌은 필암에서 탐진최씨가 분가해 왔으며 약 100년전 울산김씨·광산김씨·이천서씨·함평이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평택임씨·흥성장씨·동래정씨·파평윤씨 등이 들어왔다. 동명유래 : 필암은 [해탈사] 라는 절이 있어 [해타리] 또는 [해정리]로 부르다가 필암서원이 들어선 후 [필암]이 되었는데 [안뜸], [서원뜸]으로도 불렀으며 선촌은 [갱말], [갱변뜸]이라 하다가 분리되면서 마을이 배형국이라 선촌이라 하였다. 인물 : 김홍중(서일면장)·김노수(세창철강사장). 김상집(의사: 광주서구의회 의원). 유물유적 : 필암서원(사적제 242호·보물제587호 필암서원 고문서를 보관)
ㅇ 구석(龜石) 옛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1917년 기록에 구암(九岩)으로 나온다. 120여년전에 동래정씨가 100여년전에 김해김씨·창원황씨·청주한씨·전주이씨 등이 들어오고 그후 광산김씨·밀양박씨·연안차씨·고령신씨 등이 들어왔다. 1930년대에 7호가 30호로 늘어나 6·25를 만났는데 여순반란사건 직후 설치되었던 지서만 불탔을 뿐 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뒤 10여 성씨가 들어와 45호가 되었으나 현재 37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 뒤 삼봉의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에서 유래되었다. 인물 : 이기신(광주시청 이사관). 김동수 황룡면장
ㅇ 증산(甑山) 기산리의 필암서원이 1597년 정유재란때 불에 타 1624년 이 마을에 복설되었다가 수해 때문에 1672년에 필암으로 옮겨갔다. 그후 기록으로는 1917년 <조선면리동일람>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남원양씨가 130년 전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때는 필암에 속해 있었던 것 같다. 해방후 순창설씨 3·울산김씨 3·황씨 3·남원양씨 2·조씨 등 17호가 살다가 6·25때 1호가 소각된 후 15호였는데 현재는 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이 시루봉(증산)이다.
(9) 아곡리(阿谷里)
아곡리는 아곡과 사호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서이면 지역으로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 북문(北門)·소곡리(小谷里)·하남(河南)이 나오는데 모두 아곡마을이다.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아곡리·하남리·거산리·석교리·한사리(閑沙里)가 나오며 1914년 아곡리로 묶어 황룡면 관할이 되었다.
ㅇ 아곡(阿谷) 원래 아치실(소곡, 小谷)·북너매(북문, 北門)·하남(하남, 河南)이 각기 다른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한 마을로 합해졌다. 아치실에는 옛날 배씨와 홍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인제이씨가 1450년 5년 후에 밀성박씨가 입향하고 1520년경 행주기씨가 들어왔으며 그 외 성씨는 1900년 이후에 들어왔다. 북너매는 인제이씨가 아치실에서 옮겨갔으며 상하남은 행주기씨가 일제때 5호정도 살았으며, 중하남은 밀성박씨가 처음 터를 잡아 15호까지 살았는데 지금은 7호가 살며, 하남은 밀성박씨 재실이 있고 2호가 살고 있다. 아치실 전체에 약 65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약 25명이 죽고 2호 외에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다시 65호 정도 살았는데 현재 52호가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아치실이라 부르며 아곡(莪谷)→아곡(鵝谷)→아곡(阿谷)으로 표기한다. 상잘은 상절의 변음. 북너매는 명종대왕이 박수량 선생에게 하사한 청백당의 북문이 있었던 곳이라 하며 하남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치실은 꿩과 관계있다고도 하나 작은 골짜기란 뜻인 것 같다. 인물 : 박연생(충무시위사 대호군)·박전(통정대부)·박평(봉사)·박문아(어모장군)·박수량(호조판서)·박은우(진안현감)·기효간(남문창의)·박상근(거창현감)·박상의(주부,국지사)·기양연(교리)·기우만(의병장)·기삼연(의병장)·기산도(항일의사)·기승도(세무사)·기춘도(그랑프리참사랑대표)·박학구(효자)·박래옥(검찰사무관)·김극수(면장)·김창규(박사)·박종현(체신부 공무원, 녹조근정훈장)·박경열(경영학박사, 교수)·김인규(장성내무과장, 삼양제사사장)·김상갑(초등교장)·김상현(전대교수)·김상남(육군중령)·조복래(장성군의회의장). 유물유적 : 박수량 유적 : 명종이 하사한 99간 청백당터와 부조묘가 있다. 행주기씨 제실, 홍길동생가터 홍길동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구전이 있다.
ㅇ 사호(沙湖) 원래 서이면 지역으로 한새골·싸오랭이·대판이·거르매 마을을 합하여 사호라 한다. 옛날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 거산리(巨山里, 거르매)·석교리(石橋里, 대판이)·한사리(閑沙里, 한사골)가 나온다. 해방 후 56호(한새골 15·싸오랭이 10·대판이 12·거르매 19)가 살았는데 6·25때 인명피해는 없이 가옥이 전소되었다. 이듬해부터 대부분 다시 들어왔으나 40호(한새골 13·싸오랭이 8·대판이 8·거르매 11)가 살다가 현재 56호로 늘었다. 한새골에는 울산김씨가 120년전에 들어온 후 인동장씨·장흥고씨·전주이씨 등이 들어왔으며 사오랭이는 밀양박씨·함평이씨가 살다가 떠나고 이천서씨(70년간) 광산김씨·밀양박씨·김녕김씨·전주이씨·문화유씨가 살고 있으며, 대판이에는 100년전 남원양씨가 들어온 후 김녕김씨·밀양박씨·울산김씨·전주이씨·선산김씨 등이 들어오고, 거르매는 행주기씨 등이 살다가 떠나고 광산김씨(70년간) 인제이씨·행주기씨·연안차씨·김해김씨·금성나씨·풍천임씨 등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사호 -한사의 사(沙)와 호사의 호(狐)에서 따왔는데 호(瑚)로 변했다고 한다. 한새골- 황새골, 싸오랭이 -사나운 호랑이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있다. 대판이(대평이) -석교를 놓기 전에 판자를 걸쳐 놓았던지 또는 들 가운데란 뜻인 것 같다. 거르매 -거쳐가는 곳, 쉬어가는 곳, 일명 걸맹이. 인물 : 김행훈(농협장)·김진오(대한주택공사과장)·김영철(광주북구의원). 기타 : 황룡 초등학교(1934 개교). 황룡 초등학교(2006 폐교)
(10) 금호리(金狐里)
금호리는 금동·초지·호사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서이면 지역으로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금동(金洞)·초지곡(草枝谷)이 기록되어 있고 1912년의 <행정구역명칭>에 초지리·금동리·사점리·호사리·대수리·학동리가 나오는데 1914년에 이 마을들을 금호리로 묶어 황룡면에 통합하였다.
ㅇ 금동(金洞) 금동은 내금동·외금동·탑정이로 이루어졌다. 일제때 금동 전체에 83호 400여명이 거주하였는데 지방(종이공장)이 3개소가 있어 인구 유입이 많았다. 6·25때 53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으며 현재 43호 232명이 살고 있다. 외금동은 원금동·새터·송강골 3뜸이 있었는데 송강골은 일제때 4호가 살다가 6·25때 없어졌으며 새터에는 현재 6호가 살고 있다. 270여년전 인제이씨가 250여년전에 김해김씨가 들어온 후 일제때 진주강씨·밀양박씨·덕수이씨·한양조씨·울산김씨·창녕조씨·광산이씨·문화유씨·황주변씨·해주오씨가 들어왔으며 6·25후에 광산김씨가 들어왔다. 내금동(안쇳골)에는 100년전에 온양방씨, 일제때 인재이씨·인동장씨·밀양박씨·행주기씨·한양조씨가 들어와 7호가 살았으나 현재 인동장씨와 밀양박씨 2호가 살고 있다. 탑정이는 110년전 수원백씨가 들어온 후 옥천옥씨가 들어오고 일제 때 울산김씨·김해김씨·회진임씨·문화유씨가 들어와 7호가 살았는데 현재도 그대로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이 와우혈이라 [쇳골]로 부르다가 金洞으로 표기했으며 탑정이는 마을 앞 논에 일제말까지 5층탑이 있어서 생긴 이름인데 와우리의 탑정과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대수(大水)리로 표기한 것 같다. 인물 : 이기창(한말의병)·백효인(한말의병)·김용중(광동제약(주) 도소매사업부회장)·김진수(서울가락동시장 중앙청과이사)·김영환(진도군수)·장홍기(군의원). 유물유적 : 절터(보림사지)·도요지(철점)·행주기씨 제각.
ㅇ 초지(草枝) 초지는 원초지·쇠바탕·점등·외얏등·감남쟁이 5뜸으로 이루어졌다. 원초지에는 옛날 이씨가 살았다는 구전이 있으며 그뒤 평산신씨가 살다가 모두 떠났다. 밀양박씨가 5대째 살고 일제때 전주이씨와 김해김씨가 들어와 모두 25호가 살았는데 6·25때 15명이 죽고 전 호가 소각되었다. 현재 밀양박씨 5호를 비롯 9호가 살고 있다. 감남쟁이는 주막이 성한 곳으로 일제때 6호가 살았는데 현재 행주기씨·조양임씨·울산김씨·파평윤씨 4호가 살고 있다. 점등은 16세기경의 도요편이 출토되며 일제때 김해김씨 4호가 살다가 인동장씨가 들어왔다. 6·25로 폐촌되면서 그릇굽는 일도 중단되었는데 1985년경 전주이씨가 들어와 살고 있다. 외얏 등은 일제 때 밀양박씨가 살다가 떠나고 윤씨·오씨·손씨가 살다가 6·25때 모두 떠났다. 그 후 1호가 살다가 PVC공장이 들어섰다. 쇠바탕은 일제때 밀양박씨와 김해김씨가 살다가 6·25때 모두 떠나 폐촌 되었다. 동명유래 : 초지 -풋가실이 변했다. 감남쟁이 -감나무가 있었다. 점등 -그릇을 굽던곳, 외얏등 -초지의 왼쪽, 쇠바탕- 소를 매던 곳. 인물 : 신현성(신라방대표).
ㅇ 호사(狐寺) 밀양박씨가 4대째 살고 있으며 100여년전 울산김씨, 일제때 연안차씨·창녕조씨·광산김씨·문화유씨·경주최씨가 들어와 해방 후 25호 150여명이 살다가 6·25때 25명이 죽고 가옥이 전소되었다. 그후 20여호가 다시 들어왔는데 현재는 밀양박씨 5·광산김씨 3·울산김씨 3·창녕조씨·옥천조씨·공·차·오·이·정씨 등 모두 17호 34명이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이 여우형국이고 산정골에 여절이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유물유적 : 박수량의 묘와 재실이 있으며 특히 묘비는 백비로 널리 알려졌다.
(11) 통안리(通安里)
통안리는 옛날 서이면 지역으로 1914년 황룡으로 통합되었다. 원래 상통·중통·하통 3마을이 있었는데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상통과 하통이 나오고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상통리(上通里)·적복리(積福里, 중통)·송림리(하통)가 나온다. 하통 앞을 지나 축령산 서단을 넘는 사리재는 옛날 많은 행인과 장사꾼들이 붐볐다.
ㅇ 통안(通安) 상통은 폐촌되었다가 1호가 다시 들어왔으며 중통은 폐촌되어 골재채취장이 되었고 벌통골에 8호가 살고 하통에는 울산김씨가 임진왜란 때 피난와서 13대째 살고있으며 100여년전 황주변씨가 일제말 전주이씨가 들어오고 그 외는 6·25후에 들어왔다. 일제 때 통안리 전체 75호중 하통에 40여호가 거주했는데 6·25때 40여명이 죽고 가옥이 전소되었다. 그후 32호가 살았는데 현재 10여호가 살고 있다. 중통은 늦게 생긴 마을인데 상산김씨가 7대째 살고 있으며 일제때 상산김씨 5호·장흥고씨·광산김씨·순천박씨·여흥민씨 등 10여호가 살다가 6·25때 5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5호가 다시 들어와 살다가 모두 타지로 떠났는데 1990년 골재채취장이 되었다. 벌통골은 중통의 한 뜸이었는데 옛날 전주이씨가 터를 잡아 70여호가 살았는데 임진왜란때 모두 떠났다는 구전이 있으며 150년전 청송심씨가 들어온 후 풍천임씨·상산김씨가 들어오고 일제때 함평이씨·광산김씨·여흥민씨가 들어와 10여호(상산김씨 4호)가 살다가 6·25때 10명이 죽고 전가옥이 소각되었으나 일부가 다시 들어와 살고 있다. 상통은 <호구총수 : 1789년>에도 나오는데 풍천임씨가 200여년전부터 살았다고 하며 일제 때 10여호(풍천임씨 5·밀양박씨 2·광산김씨 2·죽산안씨·경주이씨)가 살다가 6·25때 4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어 3년후 풍천임씨 4호·죽산안씨·광산김씨가 들어와 6호가 살다가 차츰 타지로 떠나 폐촌이 되었는데 풍천임씨가 다시 들어와 염소를 키우고 있다. 현재 총 1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통안 산골 속이라 통과 같다는 설과 종이 공장이 있어서 통안(종이 만드는 통)이라 했다는 설이있다. 하통 가장 아래쪽에 있으며 송림(松林)이라고도 했다. 중통 중간에 있으며 벌통골과 한 마을로 계동(桂洞)이라 부르기도 했다. 상통 가장 위쪽에 위치하며 적복(積福) 또는 서우재(살우재, 사리재)라고도 부른다. 인물 : 임경호(고종때 사헌부감찰)·김영식(한말의병)·김봉식(일제때 중앙청토목국장)·김형식(서울건설과장). 유물유적 : 지방터 -3개의 지방터가 있다. 황룡초등학교 통안분교 1963년 설립, 1990년 폐교.
(12) 맥호리(麥湖里)
맥호리는 맥동·매곡·동정 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서이면 지역으로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 맥동(麥洞)·하등산(下登山)·관정(冠井)·원당(院堂)·매곡(梅谷)이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 맥동리·난산리·매곡리가 나온다. 1914년 맥동리·매곡리·난산리를 맥호리라 하여 황룡면 관할이 되었다.
ㅇ 맥동(麥洞) 맥동은 원맥동과 난산정으로 이루어졌다. <호구총수>에 나오는 원당은 원당봉아래 있었는데 맥동으로 합친 것 같으며 하등산과 관정은 알 수 없다. 원맥동은 1410년경 울산김씨의 장성 입향지로써 하서 김인후 선생의 태생지이다. 150년 전에 광산정씨가 들어온 후 거창신씨·광산김씨·밀양박씨가 들어와 47호가 살다가 6·25때 7∼8명이 죽고 4호 외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그후 마을을 복구하고 장흥고씨·흥덕장씨·죽산안씨 등이 들어왔다. 난산정은 맥동의 울산김씨가 옮겨왔으며 광산정씨가 130년전에 들어와 일제때는 울산김씨 5·광산정씨 2·유씨 2·문화유씨 1 등 10여호가 살았다. 현재 40호(맥동 30·난상정 6등)가 거주하고 있다. 동명유래 : 맥동 보리사라는 절이 있어 보리동이라 부르다가 맥동이 되었다. 卵山亭 알모양의 산기슭에 있으며 [난산정]이 있었다. 인물 : 김인후(선정·증영의정)·김동수(교리)·김경수(전남비상대책담당관)·김병욱(군과장)·김진수(교수)·김호수(회계사)·정용술(교육부이사관). 유물유적 : 김하서묘와 제각·백화정·난산망곡단·2열부정려비각·열려유씨정려·일비장.
ㅇ 매곡(梅谷) 매곡은 <호구총수 : 1789>에도 나오는데 옛 일은 알 수 없고 밀성박씨가 가장 오래 살고 있으며 100여년전 광산김씨가 들어왔다. 해방 후 25호(밀성박씨 7·광산김씨 5·행주기씨 5·울산김씨 4·영월신씨·능성구씨 등)가 거주했으며 6·25때 1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3년후 마을이 복구되고 신평송씨·청주한씨·경주김씨·진주강씨 등이 들어와 20여호가 살았으나 현재 16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뒷산에 있는 [매화낙지]혈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인물 : 김병욱(국회사무처 이사관)·김병관(용인종합목재차장).
ㅇ 동정(銅鼎) 동정은 맥동의 울산김씨가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호구총수나 1917년의 <면리동 일람>에도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 일제때 들어온 성씨들이며 해방 후 12호(울산김씨 6·영산신씨 3·청주한씨 2·진원박씨 1·창녕조씨 1)가 거주하였으며 6·25때 2명이 죽고 피난나갔다가 10여호가 다시 들어왔으나 현재 8호가 살고 있다. 동명유래 : 마을이 솥형국이라 동정이라 했다고 한다.
(13) 관동리(冠東里)
옛날에는 관동리 지역에 6∼7개의 마을이 있었으나 관동마을 1개로 통합되었으며 현재 55호 154명이 살고 있다. 상무대 군사훈련장으로 예정되어 있어 2005년 모두 없어진다.
ㅇ 관동(冠東) 관동리는 원관동과 산동·제청이·새터·감남쟁이·소곤이 등으로 이루어졌다. 옛날 서이면 지역으로 <호구총수 : 1789년>에 관정·사기점·용암리·용적·생철점·소곤리가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 <행정구역명칭>에는 용동리·용암리·산동리·관동리, 1917년 <면리동일람>에는 용암리·산동리·용두리·관두리·가적리가 나온다. 사기점은 외박골과 감남쟁이에 지명이 남아있고 제청 동남쪽에 생철점 감남쟁이 뒤에 용적골이 있다. 관동이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밀성박씨가 400여년전에 들어와 자자일촌 하다가 일제때 진주강씨가 들어와 30여호가 거주하다가 마을이 전소되었으며 현재 12호(밀성박씨 8·진주강씨·전주최씨·김해김씨·백씨)가 살고 있다. 산동에는 일제 때 15호 정도 살다가 6·25후에 3호 였는데 70년대 모두 타지로 떠났다. 제청은 기효간이 시묘살이를 한 제청산 아래있는 마을로 행주기씨가 터를 잡아 일제때 19호가 살았으며 6·25때 1명이 죽고 전가옥이 소각되었는데 15호가 다시 살다가 지금은 10호로 줄었다. 새터는 100여년전 울산김씨가 입향하여 6호까지 되었는데 6·25후 3호가 살다가 지금은 회진임씨·행주기씨 2호가 남아 있다. 감남쟁이는 처음 울산김씨가 살았다고 하며 전주최씨·행주기씨·영광김씨 등이 들어와 일제초에(김해김씨 4·울산김씨 3·행주기씨 2·밀양박씨 2 등)가 살고 있다. 소곤이(용암)는 오래된 마을이나 상고할 수 없다. 남양홍씨가 일제초에 들어오고 대부분 해방 후에 들어왔다. 13호가 살다가 6·25때 6명이 죽고 가옥이 전소되어 10호가 다시 들어왔으나 현재 7호(장수황씨 2·광산김씨 2·의성김씨·남양홍씨·김해김씨 등)가 살고 있다. 가적골과 덕적골에도 사람이 살다가 6·25때 없어졌다. 동명유래 : 수련산이 관처럼 생겼다 하여 관산·관동(洞)·관정이라 하다가 관정과 산동을 합하여 관동이라 했다고 한다. 인물 : 박윤감(병자호란때 입암산성 유진장)·박의순(성균진사)·박만순(한말의병)·기승준(공학박사) 유물유적 : 지석묘·의사 김권현·김기순 사적비(한말 의병활동)·기삼연 묘·석수암·도요지·야철지·절터.
<표 8-7> 황룡면 마을·인구현황 (2001. 4. 30 현재)
행 정 |
자연부락 |
세대수 |
인구수 |
남 |
여 |
월평 1 월평 2 월평 3 월평 4 월평 5 와룡 옥정 1 옥정 2 황룡 1 황룡 2 신호 1 신호 2 장산 1 장산 2 장산 3 필암 1 필암 2 필암 3 아곡 1 아곡 2 금호 통안 맥호 1 맥호 2 관동
|
신시장 월산동 교동 월평, 신기촌 일산동 방곡, 와룡 맥정, 대해 구대해, 월암 원황룡, 회사촌 봉덕, 부흥 다산, 신촌 내황, 북촌 하사 외장산, 내장산 수산 중동 필암, 선촌 구석, 증산 아곡 사호 금호, 호사, 초지 통안, 중동 맥동 매곡, 동정 관동
|
182 115 115 95 89 44 44 48 110 52 86 108 216 228 51 52 67 56 59 56 78 18 40 29 55
|
595 321 356 295 281 117 99 130 327 139 233 316 664 721 145 157 175 147 143 156 188 36 114 67 154
|
297 166 176 145 142 54 52 70 158 68 121 174 349 383 67 82 91 69 73 82 83 18 60 33 75
|
298 155 180 150 139 63 47 60 169 71 112 142 315 338 78 75 84 78 70 74 105 18 54 34 79
|
계 |
2,095 |
6,081 |
3,092 |
2,989 | |
첫댓글 햐~~~ 살았던 곳 유래도 잘 몰랐는데 은규덕분에 자세히 알게 됐네.고맙고 고생 많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