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에 접어들면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길한 조짐은 여러 군데에서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 첫 사건은 1월 말 헝가리와 접경한 크로아티아의 비로비티차에서 발생했다. 연방군은 크로아티아 주둔군을 이 도시에 투입, 민병대를 조직 중이던 시장과 보좌관 등 많은 크로아티아 관리들을 불법 테러 단체 조직 혐의로 전격 체포했다.
크로아티아의 행정구역은 20개의 주(županija)와 1개의 시(grad)로 구성되어 있다 . 비로비티차포드비나 주의 중심도시가 비로비티차이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이 사태를 연방군이 두 공화국을 침공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인식하고 즉각 자국의 무장 경찰을 요소에 배치했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이 사태와 관련한 대국민 특별 성명을 통해 “우리는 이제 (연방군과의) 전면전에 돌입할 기로에 서 있다.”면서 “연방군과의 일전도 불사할 것임을 분명히 한다”고 선언했다.
프라뇨 투지만
3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갔다. 3월의 첫날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는 세르비아 민간 단체가 돌연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역공을 가했다. 세르비아 공화국과 연방군은 암묵적 지지를 보냈고 크로아티아측은 즉각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세르비아 인의 계획적인 행동은 크로아티아 인과 세르비아 인이 섞여 살고 있는 지역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지방 조직 차원에서 본격적인 갈등 양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크로아티아 북부의 파르츠크(헝가리 국경에서 남서쪽으로 100㎞에 위치)에서는 3월 2일 드디어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총성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조짐을 뚜렷이 보여 주었다.
파르츠크의 인구 분포를 보면 전체 인구 1만 명 가운데 세르비아 인이 38.3%로, 크로아티아 인(30%)보다 많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헝가리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헝가리 인도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곳은 물론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치안 역시 크로아티아 경찰 예비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인이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하겠다고 발표한 바로 다음날 일단의 무장한 세르비아 인이 크로아티아 경찰서를 장악하려고 하면서 양측 간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크로아티아 경찰은 세르비아 인을 전원 무장 해제시키고 체포하는 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만약 연방군이 개입했더라면, 사태는 바로 내전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파르츠크 시의 충돌은 소규모였지만 그 파급 효과는 대규모였다. 이날 밤 연방 수도이자 세르비아 수도인 베오그라드에서 보리사프 요비치 연방 대통령이 주재한 비상 각료 회의가 열렸고, 다음날 새벽(3일, 일요일) 24시간 내 파르츠크 사태를 수습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와 함께 2명의 연방 고위 관리가 현지에 급파되었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논평을 통해 “이번 사태 배후에 연방군 고위 장교들이 개입했으며 그 증거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보리사프 요비치
연방 정부의 최후 통첩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야 양측은 가까스로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양측은 우선 파르츠크 시내에 배치되어 있던 크로아티아 경찰 예비대 병력을 시 외곽지로 철수하고 체포된 세르비아 민병대측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태 발생 4일째인 3월 5일 파르츠크 시는 표면적으로는 정상을 회복한 듯 보였다. 휴교 상태이긴 했지만 상점들은 문은 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길고 긴 전쟁의 예고였다. 그 조짐은 파르츠크 사태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크로아티아 공화국 내 세르비아 인의 탈주 사태로 가시화되었다. 파르츠크 사태 4일 만에 무려 2만여 명의 세르비아 인이 크로아티아를 버리고 스스로 난민의 길을 선택했다. 바야흐로 전쟁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시사였다.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쟁 도발의 유혹에 빠지게 한 또다른 요인이 베오그라드에서 발생했다. 파르츠크 사태가 어느 정도 평온을 되찾은 3월 9일 베오그라드에서는 베오그라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강경 보수파가 권좌에 앉아 있던 세르비아측은 강경 진압으로 학생들을 몰아붙였다. 9일 하루만에 사망 2명, 부상 80명 등 세르비아에서 발생한 최대 규모의 시위로 기록될 정도였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산발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학생들로부터 연방군 개입설이 유포되기 시작했다. 사태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세르비아 정부는 일단 시위 진압 책임자인 라드밀로 보그다노비치 내무 장관을 경질하기로 하는 등 회유책을 쓰는 한편, 연방군을 주체로 한 전 연방 비상 계엄령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군의 개입과 전쟁은 국내적으로 거세지고 있는 세르비아 민주 세력의 목소리를 충분히 잠재울 수 있으리라는 것이 밀로셰비치의 계산이었다.
라드밀로 보그다노비치
3월 15일 세르비아측과 사전 교감을 충분히 가진 연방군 지도부는 연방 대통령 위원회에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건의했다. 이날 저녁 늦게까지 격론을 벌인 보리사프 요비치 연방 대통령(세르비아 인)을 비롯한 대통령 위원회는 결국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다른 공화국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 대신 군부의 계엄령 선포를 지지하던 요비치 대통령과 2명의 다른 위원이 사퇴하고 말았다.(대통령 위원회는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에서 선임된 8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매년 이들이 돌아가면서 윤번제로 연방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3월 16일 연방 대통령 위원회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해버렸다. 또한 군부에게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질서를 회복해야 할 것임을 공공연히 강조하고 나섰다. 밀로셰비치의 발언이 있은 직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두 공화국은 즉각 자체 방위 병력에 대해 최고 경계령을 시달하는 한편 전쟁을 회피하기 위한 대화 노력도 재개했다. 밀란 쿠찬 슬로베니아 대통령은 18일 현 사태는 대화와 타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대통령 위원회를 재개하여 이 사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밀란 쿠찬
이에 따라 이미 연방 위원직을 사임한 3명을 제외한 5명의 위원이 21일 베오그라드에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물론 뾰족한 대책이 나올 리 만무했다. 요비치 연방 대통령은 일주일 만에 사퇴를 번복하긴 했지만 연방 정부가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한 채 몰락해 간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때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서방 언론들도 연방군 개입 가능성을 기정 사실로 보도하고 있었다. 연방군은 3월 18일 성명을 통해 군의 개입 가능성을 간접적으로 부인했지만 아무도 연방군 성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연방 대통령 위원회가 결정적 전기를 맞이하게 된 때는 이로부터 두 달 뒤였다. 5월 15일 세르비아 출신의 보리사프 요비치 연방 대통령의 1년 임기가 끝나면서 후임 대통령에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스티프 메시치(Stipe Mesic) 위원을 선출토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 직할 자치주 출신 등 4명이 위원들은 크로아티아 출신의 연방 대통령 선출을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스티프 메시치
이 때문에 사실상 연방 대통령 위원회는 유명 무실한 기관이 되어 갔고, 연방 정부의 역할도 완전히 무너졌다. 게다가 역시 크로아티아 출신인 안테 마르코비치 연방 총리가 주도한 경제 개혁은 공화국 간의 민족주의 때문에 사실상 퇴보를 거듭하고 있었다.
안테 마르코비치
마르코비치 내각은 가격 및 수입 자유화를 실시하고 디나르 화폐를 독일 마르크 화폐에 고정시키기는 했으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측에서 특히 많은 불만이 제기되었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세르비아 정부는 호혜의 원칙을 완전히 무시한 채 베오그라드에 지사를 설치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계 상사(商社)에 대해서 중과세를 부과하고 있었다. 게다가 1991년 들어 통화 공급량의 절반 가량이 세르비아 세르비아 공화국에만 배분되는 바람에 각 공화국의 불만이 가중되고 있었다. 즉 통화 팽창은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디나르의 평가 절상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더욱이 다른 공화국들은 세르비아가 이 돈의 상당 부분을 군비로 전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모든 공화국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자 연방 정부와 세르비아측은 공화국들이 자의적으로 통화를 남발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이 때문에 총을 멘 연방군이 각 공화국 중앙 은행에 들어와 감시를 펴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를 전후해 세르비아 인은 전쟁 목적과 관련해 크게 세 그룹으로 구분되었다. 제1그룹은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민족주의자들(대부분이 공산주의자)로 이른바 대세르비아주의를 전쟁의 가장 큰 목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대세르비아주의는 세르비아 인이 거주하는 지역까지 합병해 이른바 세르비아 인의 생활 영역을 확립하는 것으로, 이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이며 그 대표적인 것이 블랙 핸드였다. 따라서 밀로셰비치는 가능한 한 전면전을 피하면서 연방군과 각 공화국 내에 있는 세르비아 인들로 구성된 세르비아 민병대를 활용하는 국지전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제2그룹인 군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군부는 오직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존속해야만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집단이며 결국 연방 해체는 연방군의 양적, 질적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군부는 연방을 유지하는 것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했다.
군부가 첫 전쟁 대상으로 크로아티아가 아닌 슬로베니아를 선택하고 국경 초소부터 접수한 이유는 바로 연방 유지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 준 것이었다. 그러나 슬로베니아의 강력한 반격에 발목이 잡힌 연방군은 1991년 9월 전선을 크로아티아로 이동하면서 차츰차츰 전쟁의 목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슬로베니아는 사실상 전쟁 초기에 독립을 성취한 상태였고, 크로아티아에서는 전투가 날로 치열해져 가고 있었으며, 그 불똥이 결국 인종의 전시장이라 불릴 만큼 복잡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옮아간 것은 바로 연방군의 전쟁 목적이 연방의 유지가 아니라 대세르비의 실현으로 바뀌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제3그룹인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 민병대는 사실상 세르비아 공화국과 연방군의 지원을 받아 무장을 했지만 민병대 특성상 독자적인 작전을 많이 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들 민병대는 크로아티아 인이나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에 대해 과거의 우스타샤 학살 사건 때부터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전쟁을 복수의 기회로 여기고 있었다. 이들은 정규군인 연방군보다 더 잔악한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했고 일단 한 지역을 점령하면 그들의 생활권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과감하게 인종 청소를 실시했다. 그것이 바로 잔악한 학살 사건과 대규모 난민 발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