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전 참봉 휘 순 조님의 묘비가 풍상에 깎이고 닳히어 글씨가 없어지어 해석하기가 어려워 다시 정리하고 비문을 정비하였습니다.
箕子殿參奉河東鄭公 諱洵 之墓
기자전참봉하동정공 휘순 지묘
呼 比錦波 鄭公 三尺之歲也 公諱洵河東人河東
호 비금파 정공 삼척지세야 공휘순하동인하동
鄭曼自河洞君諱淑瞻 綿綿延延至 進士公諱國僑 宴?
정만자하동군휘숙첨 면면연연지 진사공휘국교 연?
五世祖也 高祖諱良孫生員 曾祖諱允仕郞 祖諱孝孚
오세조야 고조휘량손생원 증조휘윤사랑 조휘효부
諱以誾進士 000焉公於 文宗 辛未九月七日生 天資料0
휘이은진사 000언공어 문종 신미구월칠일생 천자료0
又至孝 成宗庚寅以孝薦 中宗甲寅除箕子殿 參奉
우지효 성종경인이효천 중종갑인제기자전 참봉
0拳?旣至興慕齊金公安 國黙齊洪公0000
0권?기지흥모제김공안 국묵제홍공0000
000000000000000000000
焉 中宗十九年 壬申卒 距其生六十有二墓在晉州道洞面後洞
언 중종십구년 임신졸 거기생육십유이묘재진주도동면후동
坐亥之原配無傳 擧二男長 諱夢祥官至舍人000
좌해지원배무전 거이남장 휘몽상관지사인000
齊興南宣曺先生友善 次希祥皆旡嗣0女0
제흥남선조선생우선 차희상개기사0녀0
餘慶長房出河厚0次房出鳴呼哲人厚念0也河
여경장방출하후0차방출명호철인후념0야하
友之及余令00孝焉0 則可知0行之00000
우지급여령00효언0 칙가지0행지00000
0信造道之深宣?可展布 於富世而位不000
0신조도지심선?가전포 어부세이위불000
0終辭謹按宗來0治行0卒月日墓所配0有00
0종사근안종래0치행0졸월일묘소배0유00
0撮其所載之大績而叔之又銘曰
0촬기소재지대적이숙지우명왈
晋州後洞是公眞宅有孝單薦 煌煌聖課有道
진주후동시공진택유효단천 황황성과유도
交濟濟賢碩所古傷今不覺敬捷踖文獻多泯只
교제제현석소고상금불각경첩적문헌다민지
大績日孝日道可證束百
대적일효일도가증속백
戊午菊月上澣傍孫煌植謹 弼赫 立
무오국월상한방손황식근 필혁 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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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전 참봉(箕子殿 參奉)을 지내신 하동 정공(휘 순) 할아버지의 비문을 복원
원문은 오랜 세월 풍상에 깎여 글자를 잘못 판독했거나 누락된 부분(000, ?)이 많습니다. 하지만 묘갈명의 전통적인 문장 양식, 역사적 사실, 앞뒤 문맥을 바탕으로 지워진 글자들을 추론하고 잘못 읽힌 글자(오독)를 바로잡아 문맥을 매끄럽게 완성했습니다.
1. 비문 원문 복원 (교정 및 채워 넣기)
괄호 [ ]안의 글자는 문맥과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복원하거나 교정한 한자입니다.
箕子殿參奉河東鄭公 諱洵 之墓(기자전참봉하동정공 휘순 지묘)
[嗚]呼 [此]錦波 鄭公 三尺之[碑]也
([오]호 [차]금파 정공 삼척지[비]야)
公諱洵河東人河東 鄭**[氏]自河[東]**君諱淑瞻 綿綿延延至 進士公諱國僑 **[寔]**
五世祖也 高祖諱良孫生員 曾祖諱允仕郞 祖諱孝孚 **[考]**諱以誾進士 [是生公]焉公於
文宗 辛未九月七日生 天資[純厚]又至孝 成宗庚寅以孝薦 中宗甲寅除箕子殿 參奉
**[交遊]**旣至 **[與]慕齋金公安國 黙齋洪公[彦弼] [相交]焉中宗[七]**年
壬申卒 距其生六十有二 墓在晉州道洞面後洞 坐亥之原 配無傳擧二男 長諱夢祥官至舍人
[與南冥曹]先生友善 次希祥 皆無嗣 一女適 崔餘慶 長房出 河厚禮 次房出鳴呼哲人厚念[O]也
觀[其]及余令[聞]孝焉 則可知[其]行之[高潔也]**[誠]**信造道之深
[宜其]可展布於[當]世而位不[滿德][是以]謹按宗[乘 錄其]治行
[與]卒月日墓所配[位]有[如右]**[乃]撮其所載之大績而[系]**之又銘曰
晋州後洞 是公眞宅 有孝單薦 煌煌聖課有道**[相]交 濟濟賢碩 [稽]古傷今 不覺敬[惕]文獻多泯
只[此]大績 曰孝曰道 可證[百世]**
戊午菊月上澣 傍孫煌植謹**[撰]** 弼赫 立
2. 현대어 번역
기자전 참봉 하동 정공(휘 순)의 묘
아아! 이것은 금파(錦波) 정공의 삼척 비석(묘갈)이다.
공의 휘는 순(洵)이요, 하동 사람이다.
하동 정씨는 하동군 휘 숙첨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진사공 휘 국교에 이르렀으니,
이 분이 바로 공의 5대조이시다. 고조부의 휘는 양손으로 생원이요, 증조부의 휘는 윤으로 사랑이며, 조부의 휘는 효부요, 아버지의 휘는 이은으로 진사이시니, 이 분이 공을 낳으셨다.
공은 문종 신미년(1451년) 9월 7일에 태어나셨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후덕하였으며, 또한 지극히 효성스러워 성종 경인년(1470년)에 효행으로 천거되었고,
중종 갑인년(1514년)에 기자전 참봉(箕子殿 參奉)에 제수되셨다.
학문과 교유함이 지극하여 모재(慕齋) 김안국 공, 묵재(默齋) 홍언필 공과 서로 사귀셨다.
중종 7년 임신년(1512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62세였다. 묘소는 진주 도동면 후동의 해좌(북북서 방향) 언덕에 있으며, 부인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의 휘는 몽상으로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고 남명 조식선생과 친하게 지냈다. 차남은 희상으로 모두 후사가 없었다. 한딸은 최여경에게 시집갔고, 여경이 장방으로 출계(양자로 감)하고, 하후례가 차방 둘째 아들의 딸로 출계(양자)하였다.
아아! 어지신 분은 참으로 마음 씀이 두터운 분이셨도다. 그 훌륭한 효행의 명성이 나에게까지 미친 것을 보면, 그 행실의 고결함을 가히 알 수 있노라.
진실로 도에 나아감이 깊어 마땅히 당세에 뜻을 펼칠 만하였으나 지위가 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벼슬이 덕망에 비해 낮았다는 뜻의 칭송) 이에 삼가 족보를 살펴 그 행적과 졸월일, 묘소, 배위를 위와 같이 기록하고, 마침내 실린 바 큰 업적을 모아 이어서 명(銘)을 짓는다.
진주 후동은 공의 참된 집(유택)이네.
효행이 있어 특별히 천거되니,
빛나고 빛나는 임금의 시험이로다.
도학이 있어 서로 사귀니,
많고 많은 어진 선비들이라.
옛일을 상고하며 지금을 슬퍼하니,
나도 모르게 경건해지고 두려워지네.
문헌은 많이 사라졌으나 오직 이 큰 업적,
효와 도는 백세토록 증명되리라.
무오년(1918년) 9월 상순, 방손 황식 삼가 [짓고], (후손) 필혁 세움.
3. 복원 및 교정 해설 (참고사항)
당대 최고 명사들과의 교류 복원: 원문에 慕齊金公安 國黙齊洪公으로 적힌 부분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과 묵재 홍언필(默齋 洪彦弼)을 뜻합니다. 당대의 최고 명망가들과 학문을 교류했다는 중요한 대목이므로 [與]慕齋金公安國 黙齋洪公[彦弼] [相交]焉으로 복원했습니다.
남명 조식 선생 복원: 원문의 齊興南宣曺先生友善는 글자가 많이 훼손되어 오독된 것입니다. 아들 몽상(夢祥)이 당대의 큰 선비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과 교유했다는 문장이므로, [與南冥曺]先生友善이 정확한 문맥입니다.
연도 표기 모순의 교정: 원문에는 중종 19년(中宗十九年) 임신년(壬申卒)에 62세로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으나, 역사적 간지로 임신년은 중종 7년(1512년)입니다. 문종 신미년(1451년)에 태어나 62세가 되는 해도 1512년이므로, 비석에 새겨질 때 '7년(七年)'을 '19년(十九年)'으로 잘못 새겼거나 후대가 글자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보입니다. 번역에서는 정확한 연도인 '중종 7년'으로 바로잡았습니다.
상투적 비문 표현의 복원:富世而位不000은 묘갈명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위가 자신의 훌륭한 덕에 미치지 못하여 아쉽다"는 뜻의 於當世而位不滿德으로 복원하였고, 마지막 시구의 可證束百역시 "백세토록 이어지리라"는 뜻의 可證百世의 오독으로 보아 교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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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보기술내용
諱 洵의 長男 諱 夢祥의 딸은 和順人 縣監 崔餘慶에게 시집갔고 次男 諱 希祥의 딸은 晉陽人 河厚禮에게 시집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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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殿參奉河東鄭公 諱洵 之墓
기자전참봉하동정공 휘순 지묘
嗚呼 此錦波 鄭公 三尺之碑也
오호 차금파 정공 삼척지비야
公諱洵河東人河東 鄭氏自河東君諱淑瞻 綿綿延延至 進士公諱國僑 寔五世祖也
공휘순하동인하동 정씨자하동군휘숙첨 면면연연지 진사공휘국교 식오세조야
高祖諱良孫生員 曾祖諱允仕郞 祖諱孝孚 考諱以誾進士 是生公焉
고조휘양손생원 증조휘윤사랑 조휘효부 고휘이은진사 시생공언
公於 文宗 辛未九月七日生 天資純厚
공어 문종 신미구월칠일생 천자순후
又至孝 成宗庚寅以孝薦 中宗甲寅除箕子殿 參奉
우지효 성종경인이효천 중종갑인제기자전 참봉
交遊旣至 與慕齋金公安國 黙齋洪公彦弼 相交焉
교유기지 여모재김공안국 묵재홍공언필 상교언
中宗七年 壬申卒 距其生六十有二 墓在晉州道洞面後洞 坐亥之原 配無傳
중종칠년 임신졸 거기생육십유이 묘재진주도동면후동 좌해지원 배무전
擧二男 長諱夢祥官至舍人 與南冥曹先生友善 次希祥 皆無嗣 二女 崔餘慶長房出 河厚禮次房出
거이남 장휘몽상관지사인 여남명조선생우선 차희상 개무사 이녀 최여경장방출 하후례차방출
鳴呼哲人厚念者也 觀其及余令聞孝焉 則可知其行之高潔也
오호철인후념자야 관기급여령문효언 즉가지기행지고결야
誠信造道之深 宜其可展布於當世而位不滿德 是以謹按宗乘 錄其治行 與卒月日墓所配位 有如右
성신조도지심 의기가전포어당세이위불만덕 시이근안종승 녹기치행 여졸월일묘소배위 유여우
乃撮其所載之大績而系之又銘曰
내촬기소재지대적이계지우명왈
晋州後洞 是公眞宅 有孝單薦 煌煌聖課
진주후동 시공진택 유효단천 황황성과
有道相交 濟濟賢碩 稽古傷今 不覺敬惕
유도상교 제제현석 계고상금 불각경척
文獻多泯 只此大績 曰孝曰道 可證百世
문헌다민 지차대적 왈효왈도 가증백세
戊午菊月上澣 傍孫煌植謹撰 弼赫 立
무오국월상한 방손황식근찬 필혁 립
시조님을 언급한부분은 고려평장사 도정을 시조로 하여야하는데 하동군 숙첨으로 잘못 표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