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한국은 사회주의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일이 있었고, 국내 한편에는 노무현정부를 좌파라고 인식하는 시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8·15 시민행사장에서 일어난 북측 국기 소각사건에 이의를 제기하는 전파가 북에서 날아오자 청와대가 기다렸다는 듯 잘못을 시인하고 재발방지 지시까지 내렸습니다. 한국을 찾는 외국 식자들이 이데올로기 양극화현상에 놀라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불행하게도 반공만 배운 한국시민은 사회주의가 어떤 모습으로 파고드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제 시민 스스로 사회주의 실체를 식별하는 안목을 제대로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 글을 씁니다. 소련의 사회주의 이론가 트로츠키는 영국에 첫 노동당정부가 섰을 때 “영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책을 내어 영국노동계를 선동했습니다. 사회주의 선동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그의 논리는 한국에서 좌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Leon Trotsky, Where Is Britain Going?, Socialist Labour League, London, 1960, 초판 1925. 이 책이 나온 다음 해에 사상 첫 총파업이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입증되었다. 트로츠키 자신은 스탈린의 혁명도착(倒錯)에 반발하여 볼셰비키 내부에서 좌파세력을 규합했으나 실패하고 1929년 망명하여 1940년 암살당했다].
L. 트로츠키의 저술 배경
1925년 자본주의 선진국이던 영국에 사상 최초로 노동당정부가 성립되었습니다. 노동계급의 힘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사실에 고무된 트로츠키는 영국노동계를 향하여 사회주의국가의 주인이 되라고 선동했습니다. 소련의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트로츠키 글에는 비중이 실려 있었고, 실제로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국제화전략이 소련식 볼셰비즘으로 규격화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저술은 사회주의운동의 표준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트로츠키는 이 책에서 영국노동계가 갈 길은 사회주의 혁명투쟁뿐임을 강조하면서, 역사적 기대 속에서 등장한 영국노동당정부(R. 맥도날드수상)에 기대와 경고를 겸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트로츠키가 영국노동자들을 선동한 내용의 요점을 정리한 것입니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서는 트로츠키선동 내용과 닮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으며, 왜 한국이 사회주의라는 의심을 받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1. 적을 만들어라.
트로츠키 선동을 일관하고 있는 특성은 사회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양분하여 적을 만들고 끊임없이 적개심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노동자계급은 산업사회에서 중심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부르주아계급의 박해 속에 살았기 때문에 평등사회를 건설하는 투쟁의 선봉에서 적을 물리쳐야 한다고 격려합니다. 트로츠키가 적으로 모는 집단은 부르주아로 통칭되지만 자본가, 지주계급, 기업가, 은행가, 왕실, 귀족, 성직자 등 출신성분이나 직업을 기준으로 구체화됩니다. 트로츠키가 사회구성원을 적과 동지로 양분하는 이유는, 노동자계급이 (혁명열정과 계급충성심으로) 단결하여 적개심에 불타고 있어야 죽느냐 사느냐의 투쟁에서 승리한다는 전략에서 나온 것입니다.
노무현정부에서 유행시킨 코드라는 신어(新語)는 묘하게도 트로츠키가 사회구성원을 적과 동지로 양분하여 대립시킨 것과 유사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코드가 틀리는 사람은 배제되고 코드만 일치하면 능력이나 행적은 물론 여론에도 관계없이 포용되고 있음을 보아 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변이 분열과 대립으로 파열되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적과 동지로 대립시키고 있는지 한국 신지식인의 글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2. 적과 동지를 식별하라.
트로츠키가 적과 동지를 식별하는 기준은 출신성분이나 직업이 기본이지만 그 밖에도 사고방식이나 과거행적이 동원됩니다. 예를 들면 지식인, 준법주의자, 점진주의자, 의회주의자, 민주주의 주창자, 평화주의자, 수정주의자, 기회주의자, 기독교 신봉자 등은 용납해서는 안 될 적에 속합니다. 말하자면 노동자계급과 하나가 될 수 없는 사고나 행적을 보인 사람은 적으로 분류됩니다.
노무현정부 출범 이후 신지식인 칼럼이 일간지에 자주 실리고 있습니다. 이들 글 속에 나타난 공통성은 냉전적 사고를 개탄하고 수구기득권세력과 보수언론을 공격하는 내용이 포함된다는 점입니다[수구(守舊)를 혐오하는 특성을 압축표현하면 신(新)지식인이 됩니다]. 반핵과 한미연대를 말하거나 이데올로기를 언급하면 냉전적 사고 또는 반통일세력으로 단죄하고, 정부의 개혁정책이나 언행에 토를 달면 수구기득권세력이라고 낙인찍힙니다. 냉전적 사고와 탈냉전적 사고, 통일과 반통일, 수구와 진보, 개혁과 보수가 사회구성원을 적과 동지로 양분하고, 촛불시위가 국민을 갈라 놓고, NEIS가 교육계를 적과 동지로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3. 보수언론을 경계하라.
트로츠키는 노동당 기관지 데일리 헤럴드(Daily Herald) 기사를 자주 인용하면서 간접적으로 자기주장이 옳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보수언론에 대하여는 일관되게 증오심을 표출합니다. 보수언론이 노동의 혁명열정을 억압하고 최면술에 걸어 속이려 한다며 “나에게 런던 신문계를 지배하는 독재권을 한 달만 달라. 그러면 최면술을 깨겠다”라는 사회주의자 말을 인용하여 본심을 들어냅니다. 영국노동자들을 계급혁명의 전사로 정신무장시키기 위하여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공적(公敵)이 필요했으나, 보수언론이 이것을 방해하므로 규탄한 것입니다.
노무현정부가 출범하면서 보수언론과의 긴장관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범정부차원의 언론대책이 강구되고 전담기구가 신설되는가 하면 이제는 국책과업 토론장의 주제로 오를 만큼 정부측 관심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트로츠키가 보수언론을 증오한 이유와 노무현정부가 보수언론을 견제하는 이유는 서로 다를지 모르지만 공교롭게 보수언론이 대상이라는 공통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4. 법과 원칙은 탁상공론이다.
한국 노사관계에서 공통된 불안은 노동현장에 집단의 힘만 있고 국가의 법과 원칙이 맥을 추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정부당국 스스로 불법집회를 하더라도 주장이 정당하면 위법부분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점을 공언하여, 거대한 노동집단의 힘이 법과 원칙을 압도하는 사회불안이 연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국내의 불만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 투자한 외국기업까지 법과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철도파업을 계기로 정부의 태도변화가 있었지만 아직 심리적 불안이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트로츠키는 영국노동계급의 궐기를 선동하면서 폭력과 법질서 관계를 역사적 사례를 들어가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요약하면 첫째, 파업을 법으로 금한 시기가 있었지만 노동이 단결하여 파업금지법에 반복적으로 도전한 결과 합법화 된 것을 상기시키며, 노동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힘으로 투쟁할 것을 독려합니다. 법이 파업을 허용했다 하더라도 그 법질서를 준수하는 것은 도덕적 가치문제가 아니라 전략적 편의성 문제라며 총파업이 가장 결정적 투쟁방법이라고 권장합니다.
둘째, 법을 강조하고, 혁명적 폭력행사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인도주의자도 집안에 도둑이 들면 힘으로 격퇴한다며, 일상적으로 자본에 권리를 침해당하면서 살아가는 노동이 자본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혁명적 폭력 사용을 부인하며 합법적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위선이고 기회주의라며 노예를 노예소유자 손에 맡기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16세기 종교혁명, 17세기 영국 크롬웰혁명, 18세기 프랑스 혁명,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모두가 기존 법질서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한 것처럼 노동자계급은 실정법의 제약에 구애받지 말고 단결하여 새로운 노동자지배사회를 창설하라고 선동합니다.
넷째, 트로츠키는 영국법의 성립과정을 문제 삼고 그 효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영국을 지배한 왕실과 귀족, 지주 및 자본가 집단이 노동계급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노동계급 입장에서 볼 때 원천적으로 구속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법질서는 부르주아가 가르친 사기극에 불과하며 이것을 깨야 사회구원이 가능하다며, 추상적 원칙론이나 민주주의 법치론은 탁상공론이라고 일축합니다.
다섯째, 트로츠키는 영국노동계급에 혁명적 봉기를 선동하면서 폭력 사용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곤충의 탈바꿈을 예로 듭니다. 부르주아계급의 억압 속에서 형성된 영국노동계급이 억압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번데기가 껍질을 벗는 것과 같은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마치 병아리가 부리로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이, 진통 없이는 새 세상을 만들 수 없다고 설득합니다. 지배계급은 힘으로 노동을 억압하면서 노동이 집단의 힘을 쓴다고 비난하는 것은 무기소매상이 무기도매상을 반대하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트로츠키의 복잡한 폭력예찬 논리를 정리하면 바탕에 단순한 그림이 그려집니다. 한 쪽에 법과 원칙을 주장하는 자본주의 시장논리가 있고, 다른 편에 트로츠키 혁명논리가 대치하는 상황도가 나옵니다. 2003년 한국노동환경을 정리하면 바탕에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요? 한 편에 법과 원칙을 주장하는 자본주의 시장논리가 있고, 다른 쪽에 사회적 힘의 균형과 평등을 강조하는 어떤 논리가 대치하는 상황이 그려지지 않을까요?
5. 요원양성과 정신개조가 시급하다.
트로츠키는 자본주의 틀 안에서 산업조직을 사회주의 형태로 재편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국가관료를 정신적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미 계급의식에 투철한 노동조합이 정신개조요원을 공급할 수 있으며, 산업을 국유화해도 노동조합이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영국노조가 교육기관이 되어 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대비하고, 의식화교육과 지도력 있는 요원양성을 서둘러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정부는 개혁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공무원조직에 개혁주체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극히 이례적으로 취임 후 바쁜 일정에서도 공무원을 상대로 하는 특강을 계속했습니다. 처음에는 기업이 경영효율을 개선하기 위하여 조직개발을 추진할 때 변화요원(change agent)을 훈련하여 배치하는 경영기법을 정부가 벤치마킹한다는 호기심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노조원을 체인지 에이전트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트로츠키 구상을 보면 경영학이 트로츠키 논리를 벤치마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6. 결사투쟁이 사는 길이다.
노동은 산업내에서 자본과 동반자관계에 있으므로 협력과 상호양보로 이해관계를 조정해 나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배자의 위선이며 감상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트로츠키는 고용주와 피용자간의 협력은 물론, 엔지니어· 경영관리자· 행정관료· 숙련기능인 등 산업을 이해하는 중간집단의 존재도 부인하며 오직 계급투쟁만 강조합니다. 그는 혁명을 방해하는 반동세력과 맞서 죽느냐 사느냐(to be or not to be)의 각오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며(life and death fight) 타협의 환상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칩니다. 트로츠키는 이밖에도 저서 여러 곳에서 부르주아와 노동계급간 투쟁에는 목숨과 주검이 걸려 있다는 자극적인 표현-struggle to the death, fight to the death, struggle for life or death, question of life or death-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국노동조합이 단체교섭장에 들어갈 때 ‘결사(決死)’ ‘투쟁(鬪爭)’ 구호를 새겨 넣은 붉은 머리띠와 어깨걸이를 합니다. 시장경제 기업 안에서 타협과 양보를 원천적으로 부인하는 ‘결사투쟁’ 구호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트로츠키가 영국노동계급을 향하여 사용한 선동구호를 오늘날 한국노동계에서 발견하면서, 기업측 양보를 촉구하는 의지표현에 불과할 것이라고 넘기고 싶을 뿐입니다.
7. 총파업이 최상의 방법이다.
파탄에 빠진 영국을 구하는 길은 사회주의혁명뿐이며 그 첫 단계가 총파업이라고 트로츠키는 영국노동계에 훈수합니다. 실제로 트로츠키가 영국노동계급을 선동하는 저서가 나온 다음 해에 역사상 가장 위력적인 총파업이 일어났습니다. 트로츠키 시각에서 볼 때 1926년 총파업은 영국노동계급이 피해 갈 수 없는 필수과정이었습니다.
당시 총파업을 지휘한 노조지도부는 트로츠키의 계급투쟁선동을 의식하고 ‘이번의 총파업에 정치적 목적이 없으며’ 국가권력· 은행가· 기업가· 지주· 의회제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트로츠키가 이런 노조지도부 행동을 나약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한 것은 물론입니다.
1926년 영국총파업은 노조내부분열로 일단계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했지만 트로츠키 추종자들은 이후 영국노동운동을 전투적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노동의 총파업 선언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트로츠키가 정의하는 ‘총파업’과 한국노동계가 선언하는 ‘총파업’이 외관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8. 평화적 사회주의 전환
한국을 사회주의라고 의심하는 외신을 보고 국민이 동요하지 않는 이유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혁명과정을 거쳐야 자유민주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공식을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혁명을 거치지 않고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전환이 가능한지 트로츠키의 정치훈수를 음미해 보지요.
트로츠키는 영국 의회정치사상 처음 집권한 맥도날드(R. MacDonald) 노동당정부가 과감하게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수정주의 옆길로 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평화적으로 사회주의개혁이 가능하다는 정치훈수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집권노동당 맥도날드수상이 재임중 시행가능한 사회주의 전환전략이고, 다른 하나는 차기 선거에서 노동당이 의회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쓸 수 있는 개혁전략입니다.
집권노동당정부의 사회주의전환 기회
노동당정부는 집권후 당대회에서 온건파와 급진파가 정책대결을 벌인 끝에 398 : 139로 맥도날드수상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 정책노선을 채택했습니다. 첨예한 정책차이는 국유화방법에서 나타났습니다. 온건파는 산업시설과 토지·재산을 의회절차를 거쳐 상환하는 방법을 선호했고 급진파는 몰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맥도날드수상은 영국 재정형편상 상환자금 조달이 불가능했고, 한편으로는 부르주아의 결사저항과 내란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지켜 본 트로츠키는 내란과 같은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사회주의로 전환할 기회가 맥도날드 정부에도 있었다며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 비록 가상에 불과하지만 수상이 마음먹으면 사회주의전환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관심이 갑니다.
노동당정부 구성 직후 전격적으로 중대한 정치적 개혁 발표 : 산업과 재산 국유화·자본에 중과세·왕실과 귀족원 해체, 의회를 해산하고 국민을 상대로 혁명적 결심 천명, 노동계급이 궐기하여 정부를 지지하며 반동세력에 압력작용, 보수진영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정부기관을 장악하여 쇄신 진행, 의회를 딛고 합법적으로 사회주의전환 완성.
트로츠키 자신도 이것은 이론일 뿐 실제상황은 아니라고 후퇴하면서 이론적 가능성을 제기하므로써 미래의 불확실성이 더 선명해진다고 했습니다. 결국 트로츠키는 의회주의 밑에서 평화적 사회주의전환이 불가능하므로 노동계급의 혁명역량이 필요불가결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특히 점진주의와 같은 기회주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도록 오염된 사상과 철저한 투쟁을 전개하라고 주문했습니다.
선거를 통한 개혁 전략
당시 영국노동운동이 점차 과격하게 진행되는 현상을 계급의식이 발달하는 징후라고 해석한 트로츠키는 노동당이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하여 집권했을 경우 과연 산업시설을 평화적으로 국유화하고 의회체제 틀 안에서 사회주의구조로 전환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상황 1 : 의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노동당정부를 과격좌파가 이끌 경우
집권하자마자 심층적인 세제개혁·국유화·행정민주화를 단행하면 노동계급의 개혁열정을 가열시켜 보다 철저한 개혁이 추진되고 보수주의 틀이 청산될 것이다. 그러면 부르주아계급은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의회를 통한 사회혁명이 시작되었음을 눈치 채게 될 것이다.
그동안 국가기구는 위에서 아래까지 부르주아계급이 지배해 왔으므로 의석수와 관계없이 입법·행정·국가운영 모든 면에서 반격할 수 있는 수단이 부르주아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보수언론을 포함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노동당정부에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국가기관의 질서가 흔들리면 반동세력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제거하고 그 자리에 노동당원을 충원해도 국가기능이 마비되는 것이며 결국 내란상태로 발전될 것이다.
상황 2 : 의회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한 노동당정부를 온건파-맥도날드가 다시 이끌 경우
개혁정책을 과학적이며 기술적으로 진행하여 내란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온건파정부는 계획대로 개혁정책을 추진하겠지만 노동계급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폭발할 것이며, 부르주아진영의 불평은 힘을 얻어 가고, 보수언론은 공격을 계속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당정부가 아무리 최선을 다 하더라도 노동대중의 개혁욕구는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온건파정부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변화압력과, 목숨을 걸고 반격하는 부르주아의 공세 사이에서 좌왕우왕하게 될 것이다. 한 쪽을 만족시키지도 못하면서 다른 쪽을 자극하여 보수진영에서는 애매한 정부태도에 불만이 고조되고, 노동자는 혁명적 변화가 실현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지 못하여 내란상태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트로츠키 기대와 달리 영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소련에서 성공한 볼셰비키혁명도 70세를 넘기지 못하고 21세기 길목에서 소멸되었습니다. 트로츠키가 혁명에 앞장 서라고 충동한 영국노동계는 오늘날 그가 제일 혐오한 수정주의 옷을 입고 노·사·정이 공존적 관계증진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트로츠키의 사회주의선동이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역사가 증명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외롭게 매달린 북한식 사회주의를 동정하는 감상주의가 중성어(中性語) '통일' 속에 숨어들어 사회를 혼미시키고 있습니다. 민족은 하나라면서 이산가족을 가둔 채 쇼에만 출연시키고, 핵폭탄 위험을 민족공조 이름으로 호도하는 냉전기의 망령이 한반도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휴지통에 버려진 트로츠키의 사회주의 환상을 반추하면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선명하게 식별하는 혜안이 열리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