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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제 6강 (이 근호목사, 2008년 02월 15일(b), 서울의존교회)
시커멓게 소나기구름이 우리 머리위에 왔을 때, 그래서 빗방울이 마구 우리 머리 위에 후두둑, 떨어질 때 사람들은 어디를 쳐다보지요? 하늘을 쳐다보지요. 성도는 말씀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성도를 하늘에 앉혔다고 하니까,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남들 보기에는 “그런 소나기가 어디 오는데?” 하겠지만 사도바울이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앉히게 했다”는 겁니다. 하늘에 앉혔으니까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늘의 소나기를 온몸에 다 부딪혀 맞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개인적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자꾸 누구를 보느냐 하면 내편, 내 사람, 나한테 이익이 되는 사람, 내 친구, 내 가족 자꾸 두리번두리번 살핍니다. 누구 나한테 도움 줄 사람이 없는가, 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는가, 내 동지일까 아니면 원수일까, 자꾸 이런 것을 생각하는데 이미 사도바울은 어디를 쳐다본다고 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가, 그것을 쳐다보기 때문에 무엇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주위 사람들을 내가 이용하려고 애를 안 쓰지요.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실망했어. 저 사람이 아니면 내가 성공했을 텐데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두고 보겠다. 내가 너를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다.’ 이 사람 특징이 뭐냐 하면 자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봐요.
‘저 사람은 내가 십년동안 믿었는데 나를 배반하다니! 아, 내가 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이런 식으로 자꾸 주위를 봐요. ‘저 사람은 10년 동안 나를 외면하더니 이제는 내편이 되었구나. 고맙구나!’ 맨 날 사람들만 쳐다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뭘 쳐다봅니까? ‘저 멀리서 소나기가 오는구나. 주의 말씀이 몰려오네.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다 떨어지네, 빗방울 떨어지듯이 다 떨어지네.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나기 바라보고 살련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하늘에 앉힌 사람이고 그 사람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 반대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두리번두리번,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바로 어린애 같아서 맨 날 옆에 사람만 쳐다보는 겁니다. 이번에 숭례문 화재 일으킨 그 사람이 말씀에 순종했습니까? 그 사람 말씀과 관계없지요. 자신의 억울함을 사회가 안 알아주니까 복수하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까?
나이 든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옆만 쳐다보면 죽을 때까지 옆만 쳐다봅니다. 하늘을 쳐다볼 줄을 몰라요. 사람이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낚아 채서 빼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 품에 안아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를 낚아채는 주님이 안보이면 허전하니까 나만 보이니까 살기 위해서 이 사람 저 사람 이용하고, 사기치고, 복수하게 되는 겁니다. “제발 좀 날 알아줘. 안 알아줘? 그럼 불 질러 버린다.” 이렇게 됩니다.
맨 날 나만 쳐다봐 주고, 나를 위로해 주고, 나에게 도움을 주고 ‘나 너 없이는 못 살겠다’하고 붙드는데 귀찮다고 하면 복수하고. 아침 드라마 내용이 순 그겁니다. 아침 드라마에 “주께서 재림 하십니다” 이런 것이 나오든가요? 전부 다 복수요, 원한이요, 한 맺힘이요. 고부갈등, 가정불화, 가정풍지박산, 이혼문제, 자식이 말 안 듣는것, 도박, 도벽, 전부 다 뭐냐? 너무나 사람들에게 기대를 해서 그래요.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래요.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여러분!” 가수 윤 복희가 이 노래를 불렀잖아요. “네가 뭔데 누가 너를 위로하나? 마귀 자식이고 진노의 자식 주제에.” 무슨 위로 받기를 바랍니다. 주님 없이는 살아도 사람 없이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 사람 속에 말씀 백독해서 집어넣고, 철야하고, 언약, 십자가복음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이 보자기가 찢어져야 하는데, 그 보자기를 튼튼히 하는데서 성경공부 참석하니 … , 이 자아라는 보자기가 찢어져야 됩니다.
제가 주일 설교 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아의 밑바닥을 보라고요. 자아의 밑바닥이 있습니까? 없어요. ‘나’라는 것은 밑바닥조차 없는 거예요. 없는데도 불구하고 밑바닥 만들고 뚜껑 만들어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자아다’ 하고 나서니까 ‘누가 나를 알아주지’라고 나서게 되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선악과 따먹은 것을 우리는 잊어버리지만 주께서는 잊지 않습니다. 끝까지 따라갑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었지? 선악과 따먹은 본성상 그 본질은 평생을 통해서 나올 거야. 너밖에 모르는 그 성질 계속 나올 거야.” 계속 나오잖아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악과를 훼손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제가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하고 자기만 생각해요.
전부 다 자기 생각만 해요. 혼자 산다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하나님, 하나님 해도 귀에 들어오지를 않아요. 하나님은 잠시 이용물로 생각할 뿐 남는 것은 결국 나 밖에 남지 않아요. 내가 눈물 흘릴 때 누가 눈물 닦아 줍니까? 내 손수건 밖에 더 있습니까? 내 손수건이 내 눈물을 닦아 주는 겁니다. 지옥 가는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괜찮아’라고 누가 위로해요? 나밖에 더 있어요?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그 성질, 그 값을 하는 겁니다. 아담이 어디 갑니까? 맨 우리가 제 2 제 3의 아담인데 어디 가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악과를 따먹어서 말씀이 자리할 수 없는 그 상태, 그 상태를 뭐라고 했습니까? 죄와 허물로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죽어 있는 겁니다. 죽어 있다는 말은 생명이 나올 것이 없다는 겁니다. 생명이 안 나오니까 죽어 있는 것이고 영원히 못사니까 죽어 있는 거예요.
100년을 살아도 죽어 있는 겁니다. 아담의 계통이 900년 이상씩 살았아도 다 죽었어요.(창 5장)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문제는 인간차원에서 우리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왜 자꾸 우리가 해결하려고 하느냐? 이미 그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계시다. 예수님이 바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어야 되고 의지해야 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에베소서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자비하심”이 나오는데 이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4절에 보세요. 3절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되어 있고 그 다음에 4절에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그 다음에 뭡니까, “사랑” 나오고, 그 다음에 “큰 사랑”이 나오죠.
긍휼이란 불쌍히 여김입니다. 그 불쌍히 여김이 어떠하다고요? 풍성하죠. 시골장터에서 밤이나 대추 담아 줄때에 딱 맞게 담아 줍니까, 아니면 풍성하게 담아줍니까? 풍성하게 넘치게 담아주죠. “어어, 그만 담으소. 왜 이렇게 많이 줍니까?” 풍성하죠. 넘치도록 주지요. 넘치도록 준다는 말이 뭡니까? 우리가 죄지은 것 분량 이상으로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죄지은 것이 요만큼이라면, 하나님의 긍휼은 이만큼 크게 넘치는 거예요.
옷 큰 것 입은 것 보고 뭐라고 합니까? “와 이리 풍덩하나?”라고 이야기하지요. 풍성하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내가 나를 걱정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차후에 근심하거나 고민하거나 염려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긍휼 받아 놓고서 죄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지으면 멸망하느냐?”고 이렇게 이야기들 하는데 죄지어놓고 긍휼을 입어도 그 긍휼이 어떤 긍휼이냐 하면, 차고도 넘치고 또 넘치는 풍성한 긍휼, 불쌍히 여김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지은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자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그냥 사랑이 아니고 어떤 사랑입니까? “큰 사랑” 아닙니까? 우리가 예상도 못할 정도로 큰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 정도까지 인줄 몰랐다’라고 할 정도로 큰 사랑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알 때마다 앞에 한자, 그게 무슨 자입니까? ‘크다’는 생각을 자꾸 갖게 만들어요. “와, 크네! 앗따, 넘치네! 아, 풍성하네! 아이고, 왠 큰 사랑이야!” 그냥 “사랑 받았습니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랑을 떼어 버리고 “큰 것 받았습니다”라고 되어야 합니다. “풍성한 것 받았습니다”라고 되어야 한다고요.
그것도 모르고 어떤 분은 “야야, 어젯밤 꿈자리가 이상타. 조심하거래이.” 세상에, 어떤 행동을 조심하면 그때에야 구원이 되는 줄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꿈자리가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라 360도가 돌아가도 큰 게 있는데!! 주시고 더 크게 주십니다.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십니다. 왜 그렇게 주시느냐 하면, 네 구원이 네 행함이나 영적인 수준이나 종교적인 기도나 열성, 그런 문제를 떠나 있다는 겁니다.
네가 구원되는 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대로 그대로 실시하다 보니까 구원되었지 새삼스럽게 조바심을 느끼고 초조해 하면서 ‘아, 죄지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 조심스럽게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여기도 그런 어린아이가 있는데 조심스럽게가 아니고 망나니처럼, 엎어지고 자빠지고 헌금함 뒤집어엎고 자기 맘대로 합니다. 그렇게 자기 맘대로 해도 의존교회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지는 않잖아요.
놀아도 이 안에서 논다고요. 저 아이는 백날 놀아도 이 안에서 놀잖아요. 이 안에는 뭐가 통합니까? 큰 게 통합니다. 주시되 크게 주십니다. 크게 주시는 것을 모르고 항상 ‘내가 회개 이만큼 하면 이만큼 주시고’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아직도 내 행함, 나를 못 잊어서 그럽니다. 여러분, 잊읍시다. 누구를 잊나? 나를 잊읍시다.
더 어렵게 이야기 해 볼까요? ‘나’라는 것은 없고요. ‘나’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조립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조립해서 ‘나’가 생긴 겁니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 그림은 이 자리에서 최초로 그리는 겁니다. 여기 있는 이 세숫대야에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선물, 약속의 선물이 떨어지면, 그걸 기름방울이라고 해 봅시다.
기름방울은 물에 섞이지 않잖아요. 위에 둥둥 뜨지요. 뜬 것이 뭉쳐진 것이 바로 내 모습입니다. 뭉쳐진 것이 기분이 나쁘면, 따로 떨어져서 동쪽 편으로 가서 ‘나’, 동쪽 편으로 갔던 것이 서쪽 편으로 가서 ‘나’, 서쪽에 있는 것이 남쪽으로 가서 ‘나’, 이런 식으로 아프리카에 가서 ‘나’, 미국에 가서 ‘나’, 열두 살 때 ‘나’, 스물 살 때 ‘나’, 다 달라요.
열두 살 먹은 애 보고 “너 뭐 할래?” 그러면 뭐라고 답할까요? 저는 열두 살 때 중국집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마음껏 자장면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중국집하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그 사람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고, 이것만(면 빼는 일) 하면 되잖아요. 얼마나 편합니까? 택시 운전사도 그렇게 부러웠어요. 왜? 이것만(핸들 잡는 일) 되잖아요.
“어디까지 모실까요?”
“화곡동이요.”
“알겠습니다. 화곡동, 모시겠습니다.”
얼마나 편해요. 국가와 민족 생각할 것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뭔가 안정되어 있는 직업이 굉장히 부러웠어요. 나중에 커서는 돈이 안 될때 남에게 비웃음 당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중국집도 좋고 택시 기사도 좋은데, 돈이 안 되면 아무 이유도 없이 돈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대접 못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여기에 복수심이 첨가되면 뭐가 나옵니까? ‘역시 나도 출세해서 돈 벌어야지.’
이것은 열두 살 때 자아가 아닙니다. 열두 살 때 자아는 평화로운 자아입니다. 왜? 어린 저에게는 그저 자장면 면발 끊어서 애들에게 먹여 주면서 “야, 나중에 엄마하고 자장면 먹으로 와라!” 하던 그렇게 푸근하고 인심 좋던 아저씨로만 보였습니다. 물론 실상은 모르죠. 밤이 되면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추고 노는지 그런 것 까지는 알 수 없죠.
제가 어릴 때는 주위에 있는 어른들이 다 인정 많고 좋았어요. 그러나 나중에 커서 보니까 이미 열두 살 때의 그 자아가 아닙니다. 스무 살 때, 40살 때, 50살 때의 자아가 또 달라요. 아버지 나이가 40인데 17살 먹은 형과 15살 먹은 동생형제가 있을 때 아버지가 “얘들아, 너희들은 내가 마음껏 다 줄게”했던 그 자비로우신 아버지.
나중에 아버지는 70이 되고, 그 자식들이 40이 넘어서 자기 자식들을 거느리고 살아갈 때, “아버지, 지금 사업자금이 필요한데 융자 좀 그냥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라고? 내가 너희들을 소송 걸어서 고소해 버리겠다”고 나오죠. 그 때 그렇게 자비롭던 아버지가 노망이 들었는지, 치매가 걸렸는지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일 년에 세 번(설날, 추석, 생일) 찾아오면 다가?” 세 번도 나중에 버거워서 두 번밖에 안 찾아오지만. 그런 식으로 철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고 말지요. 이게 기름 덩이처럼 어떤 자아가 형성될지 ‘나’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며느리도 모르고 시아버지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자아에 대해서 꼭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몰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몰라도 됩니다. 그것을 알아서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마귀는 자꾸 그 자아를 챙겨서 그 자아를 계속 유지하고 가져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선물(그림에서 세숫대야에 담기는 기름)은, 나를 어떤 인간으로 만들지에 대해서 그 믿음주신 주님의 소관이지 내 소관이 아닙니다. 앞으로 내가 어디 가서, 아프리카든 미국이든 뉴질랜드든 어디 가서 어떤 인간이 되고 어떻게 살고, 무슨 사기를 칠지 무슨 사고를 당할지 그것은 주님이 아시지 나는 몰라요. 나도 나를 모르니까요.
다만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는 것은 이 성경 말씀을 믿는 거예요. 오직 선물로 온 믿음으로만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구원되는 것은 윗동네, 마귀와 예수님관계지, 내가 어떻게 최선을 다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이 성경말씀 복음대로 된다는 이것, 이 말씀의 소낙비는 우리가 어디를 가든, 미국가든 영국가든 아프리카를 가도 거기에도 여전히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를 보시고 말씀을 보셔야 되는 겁니다. 그걸 보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의지해서 살꼬? 내가 누구를 기대서 살꼬? 내가 누구와 사귀는 재미로 살꼬? 나는 남편 없이는 못살겠다. 나는 남편 없이는 못 살겠다.’ “죽을 때 같이 죽자. 당신 없이 내가 우예 사노.” 처음 한 두 번은 듣기 좋지만 나중에는 부담됩니다. 보통 남자 나이 50이 넘으면 자꾸 아내를 붙드는데 이제는 여자 쪽에서 귀찮아합니다.
자꾸 위에서 내려오는 말씀을 생각 안하고, 지금 하늘의 지형도가 어떻게 짜여져 움직이는지는 생각 안하고, 맨 날 교회 와서 위로받으려고 하고 교회 와서 칭찬 받으려고 하니 칭찬받을 때는 천사지만 누가 욕하면 악마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가 누가 쓴 글에 나오잖아요(십자가마을자유게시판 753번 이미아성도의 글, 성화는 없다).
제가 기절초풍할 글이라고 했습니다. 저한테는 그렇게 보였어요. 이 미아 성도님도 지금은 그렇게 좋은 글을 썼다가도 한 2년 뒤쯤에 혹시,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하면 “돌았나?” 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를 단속하자, 혹은 주의하자는 말이 아니고, 지금의 나를 ‘나’이게 한 주도권이 어쨌거나 ‘나’에게 있지 않다는 거예요. 믿음이 선물이라는 것이 뭐냐? 8절에 봅시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날 목사님들이 꼭 해 주셔야 됩니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말을 꼭 해야 됩니다. 물론 이 말을 하면 교회 안 나오고 튀어나갈 사람 한둘이 아닙니다. 많이 튀어나가 버립니다. 나가든 말든 간에 사도바울은 지금 영적으로 하늘나라차원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목사님들도 하늘나라 차원에서 설명해 줘야 합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반드시 앞에 뭐가 붙어야 돼요.
“목사님,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누구한테서 났는데요?”
“나한테서 나왔는데요. 내가 믿으니까 믿는 주체자가 ‘나’ 아닙니까? 내가 믿는 것이니까 나한테서 나왔지 누구한테서 나왔겠습니까? 저 사람이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믿으니까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까?
“땡! 틀렸습니다. 주님에게서 난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그럼 나는요?‘
“당신에게서는 믿음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애비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주님 사랑하는 것 봤습니까? 결국은 주님이 뭔가 심어놓은 것이 있고 집어 넣는 것이 있어서 당신이 예수님덕분에 구원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삐져서 안 나오는 사람은 자기가 가짜인 것을 들통냈고, “맞습니다 맞고요”하면 고개 끄덕이고 인정하는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가 그 사람 속에 있고 그 사람이 하늘나라 속에 있는 사람이 맞습니다. 왜? 그것이 성경대로 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의 목적이 뭡니까?
에베소서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자랑하지 말고 누구 자랑하라고요?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 모르지만 앞으로 오는 세대에,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기 위해서 난데없이 진노의 자식한테 그런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소낙비 같은 말씀을 쳐다보면서 말씀에 의해서 내가 되었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에베소서2:1-9의 에서 이야기한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강의를 들어본 느낌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이런 답변이 나와야지요. “사도바울 그 사람은 세상일은 모르고 그저 주님께서 하신 그 일밖에 모르네요”라는 평이 나와야 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하늘에서 이 지상을 향하여 어떤 폭탄을 터뜨리느냐, 어떤 변화를 주었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겁니다.
제 말은 연연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초조해 하거나 불안에 떨지 말자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내가 어떻게 최선을 다하면 될까, 그런 말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해도 매일같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떤 최선? 자기 죄는 가리고 자기 잘난 것은 뽐내는 그런 진노의 자식노릇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그런데 계속 튀어나오는 그 죄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긍휼이 어떠하다고요? 일시적 긍휼이 아니고 긍휼이 풍성하고 사랑은 어떤 사랑? 보통 사랑이 아닙니다. 아주 큰 덩어리, 큰 사랑입니다. 풍성한 긍휼과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고 그 은혜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기에, 그 은혜가 우리에게 선물이 되어서 우리가 더 이상 내 자랑하지 않고, 주님의 긍휼의 풍성함과 큰 사랑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어서 오는 세대에 계속 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것이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실 된 내용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3:2,3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할 때 어떤 점이 염려가 되느냐 하면, 과연 이 말을 알아 듣는 사람이 몇 명쯤이나 될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목사님들이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아예 없다고 봐야 합니다. 말 잘 들어서 구원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없는데 만약 그런 사람이 생기거든 기절초풍 해야합니다. 진짜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사람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을 믿는 사람은 없지요?” 잠잠하고 조용한데 갑자기 “여기 있는데요. 저 믿거든요.” 그럴 때 우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안 되는 것이니까. 여러분이 지팡이를 들고 홍해바다 앞에서 갈라지게 해 보세요. 찰싹, 찰싹, 지팡이에 물만 적십니다. 여러분이 홍해를 갈라 보시죠. 이중에서 홍해를 갈라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되는데요”, 하고 뭐가 등장한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되는데요? 옛날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우리가 못한다, 안된다를 철저하게 밑에 배경으로 환경으로 깔고, 그 위에 너희들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현 위치를 확인하는 차원이지 새삼스럽게 이것을 실천에 옮기라고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너는 지금 이런 혜택을 입고 있다”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해 보는 거예요. 어제가 발렌타인데이래요. 저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는데 아내가 직장에서 퇴근하면서 “자 받으세요” 하고 주는데 보니까 맛있는 케익입니다. 초콜릿은 이가 썩으니까 안 된다고. 이것은 제가 예상 못한 거예요.
이것은 제가 예상 못한 것이라 무지 기뻤는데 아침부터 제가 ‘오늘은 발렌타인데이인데 아내가 케익을 사와야 할텐데…’ 하고 있었으면 마침 케익을 사와도 ‘역시 내 예상력이 대단해’라고 하면서 초점이 자기에게로 몰리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긍휼의 풍성함과 큰 사랑이 큰 사랑으로만 드러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도저히 예상못한 사랑만 준비해 놓고 있고 우리가 기대하지 못한 긍휼만 풍성하게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기대한 것은 다 비켜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 큰 사랑을 크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 정말 무릎을 치면서 “고맙습니다”하고 항상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상 못한 것만 주시면서 자꾸 우리의 예상을 비켜가게 하지요. 예를 들면 우리 애는 서울대학에 들어가야 된다고 예상을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애는 공부를 잘하니까 서울대학에 들어가게 해주세요”라고 했는데, 어느 날 그 애가 서울대학이고 뭐고 가출을 해 버렸어요. 가출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그래서 지구대에 실종신고 했는데 일주일 만에 돌아왔을 때 서울대학에 합격했을 때보다 더 큰 기쁨이 뭐냐, 그 아들을 잃었을 때의 그 처절함,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애가 살아서 돌아올 때, 이것은 서울대학에 수석합격 했을 때 보다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런 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큰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자꾸 우리의 살을 깎아 내는 작업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꺼야, 그러면 깎아 버리고, 이것도 내꺼야, 그러면 깎아 버려요. 너는 내 아들이니까 이 정도는 돼야지, 하면 실망시키게 만들고.
젊은 어머니들이 애를 처음 낳았을 때의 착각이 뭐냐 하면 전부 다 자기애는 천재랍니다. 천재 내지는 천재 될 가능성이 있대요. 천재 아닌 애가 없어요. 그러다가 애 몸이 아프면, 부탁인니 제발 몸만 아프지 말라고 하게 됩니다. 아토피가 생겼다, 그러면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무 공부를 무리하게 하라고 해서 미안하다. 제발 아토피만 생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아토피만 없어지면 “공부해라! 아토피는 옛날일이다. 이제 공부해라.” 그러면서 쥐어박습니다. 옛날에는 몰랐던, 20대에는 몰랐던 엄마의 자아가 30대에 새롭게 형성 된 겁니다. 그렇게 죄밖에 모르는 자아가 생겨줘야 큰 긍휼, 큰 사랑의 값을 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예화를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낭떠러지에 떨어지도록 밀쳐 버립니다. 설마 낭떠러지에 밀치시지는 않겠지, 하고 있는데 진짜 밀쳐서 떨어지게 만들어 버려요.
하나님이 우리의 어깨를 밀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되면, 중력에 의해서 자유낙하 하는 순간에 뭐가 날라 가느냐 하면, 내가 절벽 위에 서 있을 때 생각했던 공상과 비전, 꿈, 이런 것들이 다 날라 가버립니다. 지금 떨어져 죽는 판에, 나는 아파트 45평짜리 사서 베란다 예쁘게 꾸며야지, 이게 다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나중에 남편한테 잘해줘야지, 이런 것은 다 소용없고 필요도 없어요. 죽는 순간이기에. 그런 것들이 다 날라 가면서 첨벙, 하고 떨어지고 나니까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값없는 생명수. 아, 생명수는 값없이 주어지며 이것이 이렇게 고귀하다는 것을, 자기 기준이 몽땅 날라 가고서야 비로소 값없이 생명수를 마음껏 마시게 한 그 준비된 사랑, 준비된 그 큰 긍휼이 온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런 준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금도 죽음의 세력으로서 끌어가고 죽이시는 겁니다. 늘 죽이십니다. 안 아픈 데가 없어요. 연세 많으신 분들을 보면 참 안됐어요. 왜? 안 아픈 데가 없어요. 날씨만 좀 흐리면 온 몸이 다 아픕니다. 류머티스, 관절염, 편두통…. 마음은 100미터에 15초쯤 달리고 싶은데, 일어서는 데만 15초가 더 걸립니다. 그러면 며느리가 짜증을 내죠.
“뭐합니까? 지금 시간이 없는데.”
“얘야, 지금 후들거린다. 늙으면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이런 욕을 얻어먹으면서 살아야 되는 이유가 뭐냐? 떨어져야 됩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것보다 더 큰 욕을 얻어먹어도 마땅합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나 자기 잘난체를 하다 보니까 그래도 내가 얼마나 착한데, 내가 제대로 살려고 얼마나 애쓰는데, 이러면서 맨 날 자기업적과 자기실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수를 가리는 훼방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독하는 겁니다.
제일 듣기 좋은 소리가 뭐냐? 첨벙, 이것보다 더 듣기 좋은 소리는 없어요. 첨벙! 그런데 천당 가는 사람이나 첨벙이지 지옥 가는 사람은 억! 물(생명수)이 없어요. 거기는 그냥 콘크리트 맨 땅입니다. 그냥 맨 땅이 아니고 실제는 “앗! 뜨거워”입니다. 지옥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귀한 생명수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꽉 쥐고 있는 것을 자꾸 잘라내는 방법으로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약한데서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9,10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사도바울이 몸이 아파서 기도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하나님, 몸이 아파서 못합니다. 여기가 아파서 못합니다. 여기도 아파서 못 합니다 … 당뇨가 있고요. 이가 아픈데 임플란트도 해야겠고 ….” 이런 식으로 했겠지요. 그때 하나님이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다시 말하면 “자아를 만드는 주도권은 만들어진 네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너는 아파야 돼’라는 설계도대로 너는 아파야 된다”는 그 주도권은 주님이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미리 아파줘야 사도바울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가하면, “내가 약한데서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은혜는 오히려 더 강함이라”가 나옵니다. 내가 못난 인간이 됨으로써 주님은 더욱 잘난 분이 된다는 그 말씀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를 그런 식으로, 아예 기계를 그런 식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제멋대로 “저애가 쌍 커플 수술을 했으니까 나도 상커플 수술을 해 주세요”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내가 예상한 것이기 때문에 값없는 생명수가 나오지 않습니다. ‘역시 내 기도한대로(예상한대로) 되는구먼’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왕 죄와 허물로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가, 잃어버린 자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새삼스럽게 나의 가치를 주장하면 안돼요! 이왕 죽었잖아요. 죽었으면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면 그만이지 새삼스럽게 나를 이런 인간되게 해 달라든지, 나를 가치 있게 만들어달라는 것은 안 됩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가치 없습니다.
가치 없어도 괜찮아요. 가치 없는데서 하나님만, 예수님만 가치가 높아지는 이것이 예수님만 존귀하게 되고 예수님만 영화롭게 되고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도바울의 성경대로의 모습이 나오는 겁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할 말이 없습니다. 하리수가 교회를 다녔으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왜 저를 남자로 태어나게 했습니까?” 그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뭐겠습니까? “그것은 네가 관여할 소관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만드는 분이 따로 있어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우리는 만들어진 것입니다. 생산물입니다. 토기장이가 만든 토기에 불과한 거예요. 그 토기를 가지고 어디에 쓸까, 하는 그런 문제는 우리가 신경 쓸 문제도 아니고 우리가 고민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잘하는 것 있잖아요.”
“잘하는 것 뭐요?”
“죄 짓는 거.”
그거 하시면 되는 거예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아닙니까? 우리는 죄짓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잖아요. 그 죄짓는 것 잘 하시데. 그것을 하시면 되는 거예요. 일부러 죄를 지을까요? 일부러 죄 안지어도 됩니다. 그냥 살아가는 것이 전부다 죄이니까요. 일부러 살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죄라는 것은 뭐냐? 우리관점에서 따지는 윤리나 도덕이 죄가 아니고요, 선악과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선악과 관점에서 볼 때에, 선악과와 생명나무 이 두 나무가 왜 있느냐 하면, 이 나무의 뒤편에는 하나님나라이고 앞에는 인간나라(아담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극복해서 하나님나라를 침범하면 안돼요.
“인간아! 너는 지금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에 살고 있다. 이 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인 너는 이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하나님의 원리의 혜택을 입고 있다. 만약에 선악과와 생명나무, 이 지붕이 깨져버리면 그 혜택도 없고 너는 쫓겨나야 한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산다는 말은 생명나무와 선악과, 하나님의 이 법칙이 우리 속에 있으면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고, 이 법칙이 없으면 죽은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전체구조를 생각안하고 뭐만 생각하게 됩니까? 마귀가 약을 올려가지고 “이거 디게 맛있데이. 니 따먹으면 신이 된대이”라고 했습니다. 따먹는 날에는 누가 신이 됩니까? “네가 신이 된다”고 하죠.
갑자기 여기 뭐가 들어옵니까? 갑자기 관심이 ‘나’가 관심이 되는 거예요. 죄가 뭐냐? ‘나’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내가 얼마나 착해질까, 내가 얼마나 나빠질까, 나는 어떻게 하면 더 착한 사람 될까? 어떻게 하면 내가 못난데서 벗어날까? 그런 것이 자기보기에는 아주 순수한 믿음같이 여겨지지만 아닙니다. 그것은 뒤통수 얻어맞을 짓입니다.
“네가 어디에 있다고 너를 생각하느냐, 모든 것이 은혜지 어디에 네가 있어?!!” “오늘도 신호위반을 했습니까?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오늘 안 죽은 것만 해도 천만 다행인줄 알아라. 뭐 신호위반한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네가 그것까지 신경 쓸 것 없다.” 자기가 신호위반 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죄고, 그러니까 신호위반 또 재차 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죄 아닙니까?
내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내 생각부터 하잖아요. 그러니까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잘 때까지 죄만 생각해요. 그 죄만 생각해줘야 죄와 허물을 이기신 풍성한 긍휼과 큰 사랑이 빛이 납니다. 그래서 부모님 여러분들, 옆에 애들이 같이 있는데, 애들은 자아가 크면서 크는 만큼 자기 세계관, 자기구조를 만들어요. 이것은 심리학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까 그런 예화를 들었지요? 열두 살 먹었을 때 뭐가 하고 싶었다고요? 이것만 때리고(중국집 면발 뽑는) 돈만 벌면 되는 아주 편하게 보이는 그 일이 하고 싶었어요. 어떤 분은 돈가스 집 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애들이 보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돈가스 집 경영하는 것 보면 돈가스 배달이나 하면서 살면 얼마나 쉽고 편하게 보이냐는 말이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세상 구조를 만들어요. 그 구조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그 구조를 내가 만드는 구조이기 때문에 엄마 아빠는 무조건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만들어 내야 돼요. 그런데 그 안에 애의 자아가 들어 있거든요. 그럴 때 부모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세상은 네 중심이 아니고 너만 챙기는 세상이 아니다. 너만 좋으라고 있는 세상이 아니다” 하는 것을 일러줘야 합니다.
부모가 그 이야기를 애한테 해주잖아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나님이 지금 우리보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나이가 80이 되고 90이 되어도 또 그 나름대로 우리가 만든 세상구조가 또 있어요. 60쯤 먹은 노인들이 이럴 거예요. “아이고, 너나 나나 같은 노인네이지만 나이 그만큼 먹어서 그러는 것 보니 젊은 애들 보기에 내가 참 부끄럽다” 할 겁니다. 그러나 나이 70먹으면 또 자기밖에 모르는 그 세계관이 있습니다.
나이 80되면 교회가도 어른대접도 안 해주고, 자식들이 찾아오지도 않고, 또 자기밖에 모르게 되는 그런 구조가 있다는 말이죠. 그럴 때 우리가 할 말은 뭐냐? 사도바울의 에베소서를 보세요.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하늘에서 보자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하늘에서 소낙비처럼 내려오는 말씀의 세계를 봐야지, 부모님은 아직도 나, 나, 나밖에 모르냐”는 그 말을 해주는 그것이 진정한 주안에서의 부모에 대한 효도입니다.
그렇게 하려니까 본인부터 이 사도바울의 세계를 인정해줘야 합니다.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애들도 동생은 동생밖에 모르고, 형은 형밖에 몰라요. 그래서 동생하고 형하고 싸우는 것을 보면 전부다 남을 배려한다는 것이 없잖아요. “형, 이 갈치 가운데 있는 살점, 형이 다 먹어. 나는 가시 있는 쪽을 먹을게.” 이런 동생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형, 다 먹으면 안 돼. 내가 먹을 것 남겨둬야 돼.” 이런 동생은 많지만 “형이 다 먹어. 나는 형만 맛있게 먹으면 그걸로 기뻐.” 이런 진짜 형 같은 동생은 없습니다. 그런데 형은 있어요. “동생아! 갈치 맛있는 것 먹어라. 나는 끄트머리에 먹을게.” 형은 그럴 수가 있어요. 왜? 형은 동생이 갖고 있는 세상 구조와 다른, 그보다 넓은 세상구조를 알기 때문에. 그게 뭐냐? 동생한테 잘해주면 엄마가 용돈을 많이 줄 것이라는 새로운 세상 구조를 내다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한국교회 썩었습니다.” 그래놓고는 뭐라고 합니까? “세상에, 한국교회가 썩은 것을 아는 우리교회는 얼마나 복을 받을까!” 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자기 딴에는 구조를 넓혔다고 하는데 맨 그 구조의 중심이 누구중심? 자기중심을 못 벗어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내 중심인지를 몰랐던 그것을 까발리고 들추어내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말씀과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과 가까이 해 보면 내가 미처 몰랐던 죄를 알고, 그 죄를 아는 순간 그 죄마저 크게 용서하시고, “죄 지어도 네가 너를 죄인이라고 안 부를게. 걱정하지 마라. 내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 고민하지 마”라고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위로는 우리가 죄를 알 때 비로소 아는 거예요. ‘아, 내 행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행한 것이 왔기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구나!’ “왜? 나는 내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열여덟 살 먹은 고등학교 3학년생한테 에베소서 2:10의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 라고 하면 백발백중 오해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너보다 더 가치 있어.’ 이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그가 열여덟 살밖에 먹지 않아서가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어떤 것을 해도 이미 너의 운명은 이미 구원받기로 확정되어 있는 상태에 있다”라는 것, 행함이 아니고 선물로 그렇게 왔다는 것을, 온 우주를 가진 것보다 더 기뻐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겁니다.
사도바울이 고생을 덜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재벌 되었습니까? 사도바울이 총회장이 되었습니까? 사도바울이 2000명교인 모아서 벤츠 굴리면서 살았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냥 설교하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그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뭘 받는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 1:9)고 했습니다.
비록 그 사람이 재벌도 아니고, 그룹총수도 아니었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이, 그 복음이 저주와 영생을 결정짓는 그 사람으로 주께서 그를 들어서 사용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남들 앞에 섰을 때 주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만 제가 원합니다. 여러분보고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남에게 새삼스럽게 내놓을 것은 없지만, 이미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어떤 사람이 성도로 밝혀지고 어떤 사람은 불순종의 사람으로 밝혀지기를 바라는 그런 일에 여러분이 나서시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목사 되라는 말이 아니고, 어떤 자리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다만 제 이야기는 우리들이 하는 이 일이 천사도 흠모할 만한, 너무나 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 자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았다고 하지만 우리가 죽었고, 맞습니다, 우리가 죽었습니다 할 그때에 그게 바로 산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살았사오니, 이제는 산 사람이 되었사오니,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남한테 증거 하면서 남들도 예수님 덕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가 도구로 쓰여지는 그런 귀중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