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 버스 속 사람사는 이야기
나주 남평과 광주 남구는 광주시와 전라남도의 경계를 이루며 서로 맞대고 있습니다. 그래서 왠만한 일이면 남평 사람들은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광주로 가서 해결합니다. 찜질방도, 물건을 사기 위해서도 광주로 갑니다. 그래서 광주 백운동에서부터 올라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평사람들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다음은 오전 11시 경 광주에서 남평으로 오는 버스(180번) 속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두세 명의 할머니들이 버스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아 있습니다. 이분들은 광주 남구청의 수영장에 다녀오는 분들입니다. 중간 지점에는 광주의 어느 시장에서 물건을 받아 시내버스를 두세 번 갈아타고 온 할머니와 그분을 아는 다른 할머니입니다. 그 옆 자리에는 말없이 창밖만 내다보는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남구청 수영장에 다녀오는 할머니들의 대화 내용입니다. 한 분이 가을에도 얼굴이 타니까 선크림을 발라야 한다면서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더니 곧바로 얼굴에 바릅니다. 다른 분들은 그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춥니다. 이분들의 옷매무새나 폼잡는 모습이 풍요로운 티를 냅니다.
광주에서 물건을 받아다가 마을에서 장사하는 할머니가 자리잡은 가운데 지점의 할머니들의 대화내용은 이렇습니다.
- 새끼들은 자주 오요?
- 뭘, 새끼들 안오는 것이 더 편해라우.
- 그럼 며느리는 오요?
- 야, 가끔 오는디, 고생헌 티가 전혀 안 나드만. 자식은 바쁘게 산다고 하는디 뭣하고 사는지 그놈들 속을 도통 모르겄오.
- 언쩌녁 텔레비 뉴스에서 그런디, 뭐시냐, 거, 다단계 사기로 몇 조원을 날렸다고 하는디. 행여라도 자식들이 땅 팔아서 돈 달라고 하더라도 절대 주면 안되라우. 그 땅 꼭 가지고 있어야 허요이.
- 하이고 그러게 말이요. 영감이 살아 있을 때는 자식들이 땅 팔아서라도 돈 좀 달라고 해도, 영감이 삽이라도 들고 가서 큰 소리 지르면서 안된다고 했는디, 영감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낭께 아쉬운 것이 많어라이. 병들어 누워있더라도 영감의 그늘이 좋은 것인 줄 인자 알겄소.
- 그렁께, 독한 맘 먹고 자식들이 죽는소리 허더라도 절대로 땅 내주면 안되요이.
- 하이고, 그래야 쓴디, 또 자식들 보면 그렇게 안됩디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옆에 계신 할아버지가 지구가 구멍 나도록 깊은 한숨을 쉬셨습니다. 그러자 장사하는 할머니가 그 할아버지에게 무슨 걱정이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도 자식들로 인해 말 못할 어려움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촌에서 땅이나 파먹고 사는 우리가 뭘 알겄소. 도시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이것 하라 하면 하고 저 땅 팔아라 하면 저 땅 팔아 돈 대주고, 어쨋든 우리보다야 더 많이 아니까 자식들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하고 자식들 하자는 대로 했는디, . . .
하며 말끝을 흐리십니다.
- 그런디 그렇게 힘들게 물건 받아다 장사 하면 얼마나 돈이 된다요.
- 아, 노는 것보다는 낫지라우. 광주에서 물건 싸게 받아다가 동네 사람들한테 싸게 팔면 서로 좋은 일 아니요. 나라도 고생해서 동네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얼마나 좋소.
- 집이는 힘들게 고생허믄서도 좋은 일 하시요이. 복 많이 받것소.
어느 분이 들려준 남평 오는 버스 속 사람들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이야기를 그냥 흘려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 곧바로 기억을 되살려 정리했습니다.
부모 떠나 도시에서 객지에서 살고 있는 자식들이 어찌 부모에게 불효하고자 하겠습니까?
효도하고 싶어도 효도하지 못하는 자식들의 마음은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 목요일 다도면 효막 마을의 윤엘리사벳(69세) 할머니 집에서 반모임 미사를 했습니다. 할머니 방에는 손주들 사진과 액자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감사장이라고 제목이 적힌 액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둘째 아들 내외가 어머니에게 드리는 감사장이었습니다. 광주에서 살고 있는 둘째 아들이 자식을 낳고 보니 비로소 부모님의 수고와 사랑을 온 몸으로 느끼고,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와 아이 낳고 얼마 안되어 혼자 계신 어머님에게 감사장을 만들어 드린 것입니다.
그 감사장을 보면서 괜히 제가 행복했습니다.
하여 “엘리사벳씨는 참 좋겄소이. 이렇게 아들한테 감사장을 받아서.” 하고 칭찬했더니 엘리사벳씨가 말했습니다. “큰 아들도 그렇게 감사장 맹글어서 줬어라우.”
아들 자랑 며느리 자랑 끝이 없습니다.
이런 자랑이야 많을수록 좋겠습니다.
2008년 11월 22일 토요일
첫댓글 시골 버스 안에서의 대화와 부모님께 보내는 감사장 정말 좋은 아이디어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