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국아, 너는
이재훈
수국아! 너는 왜 그리도 무심하냐. 네 꽃을 보려고 몇 해 동안 온갖 정성을 들여 가꾸었건만 무슨 심사가 나서 나를 그렇게 애태우게 하느냐. 내 나름대로 너한테 할 만큼 했건만 답이 없구나. 짝사랑이 다 그렇듯이 너도 나를 그렇게 대한다면 달게 받으련다. 너 때문에 세상 살아가는 이치가 자기 맘과 뜻대로 되지 않는 걸 배웠다. 석 달만 지나면 너를 더 이상 돌볼 수가 없단다. 섭섭한 마음에 글을 쓴다.
너를 처음 만난 때가 4년 전 늦여름이었지. 그러니까 미국을 떠나 서울 용산에 위치한 대사관 숙소로 이사 온 후에 집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뜰 처마 밑 구석에서 초라하게 쭈그리고 있는 너를 봤지. 처마와 이어지는 담 모퉁이 바로 옆에 있어 하루 종일 햇볕도 별로 들지 않고 바람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죽기를 망설이고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지. 아마 먼저 주인이 아무 생각 없이 화분에서 살던 너를 거기에 옮겨 심었겠지. 그리고 까맣게 너를 잊었을 거야. 그러기에 겨우 두 줄기만이 해가 드는 방향으로 고개를 가냘프게 들고 있었지. 너는 영양실조가 걸렸는지 줄기에 이파리도 몇 개 달리지 않았고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지.
다음 날 잔디밭 옆 화단 가운데 너를 옮겨 심고 물을 주고 거름도 사다 주었지. 며칠 후부터 잎사귀에 생기가 나면서 새순도 돋아나고 날이 갈수록 성실하게 크더구나. 기대가 부풀었지. 가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마른 잎을 주렁주렁 달고 있기에 다 따서 예쁘게 다듬어 주었지. 혹시 겨울에 얼어 죽을까봐 짚을 구해 너를 감싸줬지. 다음 해 봄에는 묵은 대에서 새 순을 내밀고 가지를 치면서 아주 잘 자라더구나. 기뻤지. 네 꽃을 볼 줄 알고.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네가 더 잘 자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구나. 한낮의 볕이 쨍쨍 내려 쬐면 시들시들해지는 너를 보고 당황했지. 알고 본즉 너는 강한 햇볕에 오래 있으면 힘들어 한다고. 하는 수 없이 해가 조금 덜 드는 곳으로 다시 옮겨 심었지. 그러니 너도 몸살 앓았겠지. 모든 게 내 탓이었어. 너를 너무 쉽게 봤던 게. 그냥 양지 바른 곳에 심고 물을 주면 그게 단 줄 알고. 네 성미가 강한 햇볕에 약하고 가뭄을 잘 탄다는 사실을 미처 몰라 미안하더구나. 꽃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접었지. 다음 해를 약속하고.
가을에 너를 보니 이사를 두 번이나 다녔는데도 건실하게 잘 자랐더구나. 한 그루에 줄기가 너무 많은 듯하여 넷으로 나누어 분가를 했지. 가느다랗던 두 줄기가 네 식구로 불어났으니 내 마음이 뿌듯하더구나. 또 봄이 오고 모두 잘 자라기에 이제는 멋진 모습을 보려고 기다렸는데 어인 일인지 잎사귀만 무성하고 꽃을 피울 생각을 아니하더구나. 그래 물어물어 알아봤더니 너는 옮겨 심은 뒤로는 한 해를 건너서 핀다더구나. 한숨이 나왔지만 참았지. 너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내가 한심하더라. 별 다른 방법이 없어서 기다려보기로 했지.
내 화단에 많은 꽃 중에서 너만 가지고 집착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른다. 널 좋아하는 이유는 네 꽃의 색깔이란다. 미국에서 살 때 짝사랑하던 꽃이란다. 옅은 파란빛이면서도 보랏빛을 보일락 말락 하게 숨겨놓고 있어 어딘지 모르게 슬픔과 향수가 담겨져 있지.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수수하게 피는 꽃. 제 몫을 다하고 땅에 떨어지지 않는 모습도. 그게 내 그림자인지도 몰라. 그리고 수국이란 네 이름이 좋아서 그런다. 네 이름 자체가 물국화란 뜻이지만 감히 어디 국화에 비교하겠느냐. 국화에서 풍겨 나오는 은은한 향기를 네가 알 리 없지. 하지만 국화와 견줄 만한 큼직한 꽃이 있으니.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게 이상하지. 다음 해 여름에 네가 잘 자라기에 이번엔 꽃을 꼭 볼 수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네가 한창 꽃을 피우려고 준비할 때 미국에 갈 일이 생겨서 3주 동안 갔다 왔지. 이웃에게 너한테 물을 충분히 주라고 신신 당부하고 갔건만 내가 돌아왔을 때는 너는 꽃도 피우지 못하고 말라서 다 죽어가고 있었지. 이웃에게 물어 봤더니 3주 동안 겨우 한 번만 물을 주었다는구나. 그 해 따라 무척 더웠고 비도 한 번 안 왔는데 그런 불볕을 네가 이겨낼 수가 없었지. 정말 미안하더구나. 또 이태를 기다려야 되니. 네 참 모습을 보기가 그렇게 힘든지.
올 겨울은 눈도 많이 내리고 매우 추워서 너를 돌볼 수 없었는데 며칠 전부터 날씨가 푹해지면서 눈이 녹았기에 너를 보러 갔지. 신기하게도 앙상한 줄기에서 볼품없는 갈잎 사이로 아주 여린 잎이 머리를 내밀고 있더구나. 봄이 멀지 않다고 손짓을 하면서. 시린 손을 마다하지 않고 대 사이를 말끔히 손질했지. 부디 이번 여름에는 멋진 네 진짜 모습을 보이라고.
허나 이 일을 어찌하느냐. 나는 여름이 오기 전에 너를 두고 멀리 떠나야하니. 만나고 헤어지는 게 세상일이지만 마음이 허전하다. 너는 지지리 못난 사람을 만나 꽃도 제대로 피워보지 못했구나. 나도 너와 같은 인생인지도 모른다. 고향을 두 번씩이나 바꾸어 가면서 타향살이를 하는 나나 먼 나라에서 여기까지 와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리려는 너나 무엇이 다르겠냐. 너나 나나 실패는 하지 않았지만 성공하지도 못한 삶을 살았으니 말이다. 너를 생각하면서 피식하고 웃는다. 넌 해가 바뀌면 새 삶의 주기를 시작하지만 사람이란 그렇지 못하니 어찌 하겠느냐.
내가 떠나면 너는 어쩌지. 너는 아마 내가 떠나는 것도 모를 거야. 하지만 나보다 너에게 관심이 더 많은 사람을 만날지 아니. 그렇지 않으면 성질 까다로운 너를 귀찮다고 아예 패다가 버릴지 알 수 없구나. 그게 세상살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도 여기에서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면 다른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해야겠지. 앞으로 네가 갈 길과 비슷하구나. 산다는 게 다 그렇지 않을까.
수국아! 너도 꽃을 피우려고 노력을 많이 했겠지. 한 번쯤은 멋지게 피우고 싶었겠지. 나를 일부러 실망시키려고 꽃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잘 안다. 내 잘못이 더 많았지만 서운한 마음을 거둘 수는 없구나. 너를 키우면서 값진 자연의 이치를 다시 배웠다. 서로 슬프더라도 참자. 고맙다. 내가 떠나는 날까지 너를 열심히 도울 터이니 올 여름에는 내가 없더라고 한 번쯤 멋있게 피워보렴. 그러면 새 주인이 너를 더 보살펴 주지 않을까. (2010. 2)
첫댓글 李作家님의 '수국'속에서 진솔하신 마음을 읽습니다. 「옅은 파란빛이면서도 보랏빛을 보일락 말락 하게 숨겨놓고 있어 어딘지 모르게 슬픔과 향수가 담겨져 있지.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수수하게 피는 꽃」문장도 마음도 닮고 싶습니다. 作家님 마음만큼이나 고운분께 분양하고 떠나야 하실터인데 홀로 남은 '수국'이 걱정됩니다.
홀로 남을 수국 때문에 걱정입니다. 어제도 가서 살며시 가서 들여다보니 잎새가 많이 나왔더군요. 식물에 정을 붙이는 것도 소유욕인 듯하여 걱정입니다. 법정 스님이 이야기를 들으셨더라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궁금하네요.
식물에 정을 붙이고 보듬기를 4년 여, 마음을 뺏어간 그를 동정하고 보살피다가 짝사랑하게 되었네요. 안타깝게도 이별의 날은 다가오고 서로 주고 받은 정을 잊을 수 없으니... . 선생님의 글은 늘 새롭고 신선해서 좋습니다. 이 글도 그렇네요. 나무는 두고 가지만 그 사랑 마음에 담고 가시오소서
사랑이란 말이 나오니 걱정이 앞섭니다.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굳게 다짐하건만 쉽질 않네요. 파리에 가면 가장 생각이 많이 날 사람이 엄지바우일 것 같네요.
저도 파리를 좋아합니다. 여러 번 갔지만 아쉬워서 유럽에 가면 꼭 파리를 들렸거든요. 선생님이 계시는 동안에도 파리에 몇 번은 들릴 것 같습니다. 꼭 연락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