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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윤형주 팬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애델바이스
내 나라 내 겨레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작품배경 이 노래는 70년대 초, 경음악 평론가 이백천씨가 주도했던 'Campus Crusador(※통기타 그룹들의 대학 순회 공연)'의 Team Song으로 불리웠던 노래이다. 본래 이 노랫말 가사에는 1,2절 사이 간주 부분에 낭송이 들어있었다 한다. 송창식이 이 노래를 처음 발표했던 앨범. [송창식 애창곡 모음 2집/사진]에서는 이 부분이 누락되지만 (※이 음반에서의 노래 제목은 '내나라 내조국') [윤지영(74)] 음반에서는 이 나레이션 부분이 김민기의 목소리로 실려있다. 93년도에 발표된 음반, [김민기]에서 김민기 역시 이 낭송부분을 되살려 넣었다. 윤지영 음반에서의 낭송과는 또 다르다. 71년도에 만들어진 작품. ※윤지영 '내나라 내겨레' 낭송 부분. '나의 조국은, 나의 조국은...저 뜨거운 모래 바람 속 메마른 땅은 아니다. ※김민기 '내나라 내겨레' 낭송 부분. '나의 조국은 허공에 맴도는 아우성만 가득한 이 척박한 땅 동해의 태양 (내 나라 내 겨레) 김민기와 양희은이 등장하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난다. 둘 다 대학교 재학 때였다. 김민기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양희은은 서강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 60∼70년대에는 시민회관이었고, 대강당 북측에 소강당이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공원처럼 되어 있는 곳에 소강당이 있었는데 객석이 한 200여석쯤 되는 작은 홀이었고 결혼식을 많이 하던 그런 곳이었다. 그날도 나는 누군가의 결혼식에 축하객으로 가 있는데 가요평론가 이백천씨가 "깜짝 놀랄 만한 젊은 애들을 꼭 소개시켜 주고 싶다"면서 김민기와 양희은을 데리고 그 시민회관 소강당으로 왔다. 김민기는 서울대 교복을 깔끔하게 입고 있었고 ,양희은은 그때 교복을 입었었는지 아닌지는 지금 기억이 잘 안나는데, 아마 교복을 입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커피를 마실래, 술을 마실래"하고 물었더니, "술 사주십시오"하고 김민기가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 네 사람은 시민회관 바로 뒷골목에 있는 경회루라는 술집에 가서 막걸리를 마셨다. 하오 3시쯤 되었을 게다, 그 자리에서 이백천씨는 김민기를 가리키면서, "이 친구는 천재소리를 듣는 답니다"라고 말했다. "천재란 말 자꾸 들으면 부담이 갈 텐테?" 내가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제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곧 아시게 될 테니까요." 김민기는 말을 떠듬떠듬했지만, 할 말은 다하는 젊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날 이백천씨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싱잉 크루 세이드(Singing Crusade)를 만들어 노래로 사회개혁운동을 해보자는 것이다. "오늘 만난 두 사람하고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 등등 10여명으로 구성해서 전국을 다니며 한바탕 벌여보는 게 어떨까요? 정형."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내가 말했고, 두 젊은이들도 오케이를 해서 팀을 짜기로 했다. 나는 신문에 예고기사를 썼다. 그때는 송창식이고 윤형주,조영남이고 간에 그렇게 유명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나니까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전부 통기타를 연주하기 때문에 노래를 반주할 악단도 필요 없고, 그냥 각자가 기타 하나씩만 들고 나서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충무로에 있는 라이온스호텔 3층에 방 두개를 잡고 일차 모임을 가졌다. "자,우선 뭔가 좀 먹기로 하자. 뭘 먹으면 좋을까?"하고 내가 물었더니, 10여명의 젊은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자장면!"이라고 하는 바람에 바로 앞에 있는 중국음식점에다 자장면 배달을 시켰다. "미국노래 "공화국 전승가"에다 가사만 붙여서 "조국찬가"라고 해 노래 부르지 말고 우리나라 조국찬가를 만들기로 하자. 그게 여러분들의 첫번째 임무다. 기한은 내일 이 시간까지 24시간 준다." 자장면 한 그릇씩 사주고 내가 큰소리쳤다. 이튿날 호텔방에 갔더니 호텔측에서 나가달라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10여명이 동시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댔으니 시끄러웠던 것이다. 이날 만든 것이 김민기 작사, 송창식 작곡의 "동해의 태양"이었고, 이 노래는 지금 "내 나라 내 겨레"로 제목이 바뀌어서 불린다. 정홍택(한국영상자료원이사장) 송창식, 1947. 2. 2 ~ 인천광역시 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그는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 윤형주와 함께 트윈폴리오를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1970년 솔로가수로 전향했다. 기타를 치며 유행가를 부르는 대중 가수 중에도 ‘순수 음악예술인’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송창식은 대중가요의 순수성을 창의적으로 발산하며 평생 좋은 노래를 불러온 청아한 가요무대의 아티스트다. 대표적인 싱어 송 라이터로 발표한 100여 곡중 <왜 불러> <고래사냥> <딩동댕 지난여름> <애인> <한번쯤> <비의 나그네> <피리부는 사나이> <가나다라> <토함산> <푸르른 날> <진정 난 몰랐네> <우리는> <선운사> <가위바위보> 등이 모두 그의 창작곡들이고 히트곡들이다. 그는 사는 방식도 순수하다. 알고 있고,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음악뿐이고 다른 데는 흥미도 없어 보이고 세상물정도 어둡다. 특히 슈퍼스타 시절에도 송창식과 인터뷰 하는 기자가 많지 않았다. 흡사 자신이 부른 <왜 불러>의 노래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 불러’ 가사처럼 기자들이 불러도 제 할 일만 하고, 제 갈 길만 가는 사람이 송창식이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 남한강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집을 짓고 가족과 평화롭게 살며 간혹 공연무대에 서 왔다. 찬바람이 불던 세상에 한줄기 따뜻한 바람같이 노래로 갑갑함을 달래주던 젊은 송창식의 진솔한 고백이 알알이 박혀 있다. 지나간 시절의 향수를 자극한다. 회갑 줄을 넘어 섰으니 늘 젊은 가수 같았던 그도 이제 노년기로 접어들었다.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란 이름의 포크듀오로 1968년 <나는 너>를 부르며 가요계에 나타났으나 2년 뒤부터 솔로로 활동하면서 197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가수 송창식이 인기의 피리를 불며 등장한 신호탄이었다. 그의 노래가 들어 간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과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이 대박 영화로 떠오르기도 했다. <왜 불러> <고래사냥> 등은 운동권 대학가의 주제 음악이 되면서 한때 검열창구가 공연금지가요로 고랑을 채워두기도 했다. 송창식의 노래는 창법부터 차별성이 있다. 그 자신의 말대로 성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언제나 편안하게 이어지고 넘어간다. 그의 음악성도 포크 트로트 국악적인 요소들이 고루 가락의 숨결이 되고 있다. 그는 곧잘 개량 한복을 입고 마이크 앞에 서기도 한다. 언제나 머리 속에 음악으로 빼꼭한 그의 삶이 동요하지 않고 편안하게 한 가정에서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부인의 내조 덕분이었다. 그는 인터뷰 당시 2살짜리 아들을 두고 있었다. 송창식이 자신의 예명으로 지어 둔 송결이라는 이름을 아들에게 주었다. 김민기, 1951. 3. 31 ~ 가수, 작곡가이며 뮤지컬 기획자이다. 그가 작곡하고 부른 노래는 힘들고 지친 빈민층을 사랑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곡들이 많다. 1951년 3월 31일 - 전라북도 이리(현 익산시)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의사였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어머니는 조산원이었다. 1963년 - 경기중학교 입학,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술실에 틀어 박혀 그림을 그리는 등 미술반 활동을 열심히했음. 이 때 이미 우클렐레를 연주할 수 있었음. 1966년 - 경기고등학교 입학, 미술반 활동을 계속하였고, 기타를 독학한다. 1969년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입학. 1971년 《김민기 1집 - 아하 누가 그렇게/길 (김민기 노래모음)》을 시작으로 가수 겸 작곡가의 삶을 시작한다. 1971년 데뷔앨범을 내며 등장한 김민기의 음악을 민중가요라고 분류하는 것은 어쩌면 김민기 음악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축소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1975년 - 당국에 의해 그의 노래《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된다.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되었지만 이 노래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무기로 사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문화운동의 조직적 흐름속에 일관되게 자신을 위치짓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자신의 음악을 했을뿐이었지만 그 음악들은 빼어난 감수성과 시대정신을 꿰뚫어보는 작가정신의 결합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한 개의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의 데뷔앨범은 당시 일본과 미국의 대중음악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한국 대중음악씬에 우리 말로 우리의 삶과 꿈을 노래하는 문제의식을 던짐으로써 그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경향이 출발하는 씨앗이 되었다. 김민기의 노래들로 인해 한국 대중음악은 허위와 가식의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이땅의 진실함이 가장 아름다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놀라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결국 1970년대 말 대학가의 노래운동으로 이어져 1980년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위시로 한 일군의 노래운동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1971년의 데뷔앨범에서뿐만 아니라 그 이후 [공장의 불빛]과 [아빠 얼굴 예쁘네요], [노래극 개똥이] 등에서도 가장 선구적이며 뛰어난 창작물들을 내놓음으로써 그의 작가적 역량을 확인시켰고, 진보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가 도달할 수 있는 미학적 정점을 가장 먼저 성취해냈다. 이후,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현실의 척박함과 궁핍에 온몸으로 맞서며 이를 담담히 노래한 그의 치열한 작가정신은 통기타를 메고 자신이 쓴 노래말로 세상을 노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법칙이 되었다. 아직도 그를 넘어선 노래가 민중가요 진영에서 나오고 있지 못하다는 평가가 많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크다. 현재는 뮤지컬 작업에 몰두하여 새로운 노래들을 내놓지는 않고 있지만 뮤지컬 작업에서 이룩한 성취 역시 <아침이슬>이 한국 대중음악에 끼친 영향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의 노래들은 진보진영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들에게도 널리 불리움으로써 한국 대중음악 전체를 아우르지만 현재 민중가요 진영의 음악적 뿌리가 되는 작품들을 내놓고 작가정신의 모델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그의 음악은 한국 민중가요의 출발이라고 규정해도 어색함이 없다. 현재 소극장 학전과 극단 학전의 대표로 있으며, 1991년부터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연출과 기획을 하고 있다. 이것으로 2007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 메달을 받았다. 《지하철 1호선》은 2009년 2월 현재 공연중이지 않으며, 시대배경을 2000년대에 맞추는 등의 보완작업 후 새롭게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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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노래보다 그이전에 키타로치면서부른노래가 훨씬 호소력이있고 좋다
전 사실 이노래는 김민기씨 묵직한 저음이 젤 잘어울린다 생각합니다 실제 노랫말도 김민기가 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