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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생활을 하면서 두 차례 전직을 고민한 적이 있었어요. 김태경 씨의 선배로 안산 반월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이가, 그곳에 들어와 변호사 하면서 노동운동을 도와주는 게 어떠냐고 이야기했어요. 저는 그쪽으로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래서 반월공단에 내려가 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 선배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서 반월 현장을 떠나는 바람에 제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지요. 또 부산법원에 있을 때는 창원에 가서 노동운동 지원하면서 변호사를 할까, 그런 맘을 먹기도 했어요. 그래서 마창공단에 가서 문성현 씨 부인까지 만났었는데, 결국은 어머니가 편찮아지는 바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지요. 그러다가 결국은 전혀 뜻하지 않은 계기로, 그야말로 등 떠밀려서 변호사 개업을 하게 되었어요. 1994년, 고등법원 판사가 되었고 거의 매일 야근을 하면서 이제 중견 법관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어요. 법관으로서의 자세, 그러니까 판결을 통해 사회변화에 기여하고 사법민주화에 기여하고, 그렇게 자세를 다잡아가던 때였어요. 그런데 그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음해에 남편 출판사가 부도를 냈어요. 저는 1996년 1월 29일에 변호사 개업했어요. 빚을 갚아야 했으니까, 그야말로 빚에 떠밀려서 변호사로 나선 거지요. 그렇게 등 떠밀리다시피 개업을 하게 되니까 갈등이 컸지요. 사법연수원 졸업하고 13년을 줄곧 판사로서만 살아왔는데 나의 정체성이 변호사를 하면서 유지될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했고요. 이제 모든 일을 내 힘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니까, 허허벌판으로 내던져진 듯한 막막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개인사무실을 할 때 몹시 고생스러웠어요. 출판사가 부도 사태를 맞으니, 남편뿐만 아니라 저도 그리고 언니까지도 어음 발행하고 보증서고, 사채까지 끌어다 쓰고…. 하루는 어음을 막아야 하는데 가진 돈도 없고 이젠 더 이상 돈 구할 데도 없고, 그야말로 사면초가인데, 오후에 어떤 사람이 사건을 맡긴다면서 현금을 들고 오는 거에요. 그래서 그 돈으로 간신히 어음을 막은 적도 있었어요. 변호사 개업한 지 6개월도 안 되었을 때였어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쪽에서 백승헌, 박주현 변호사가 자기네 모임에 들어오라고 전화하는 거예요. 고민, 또 고민. 민변이 나와 잘 맞을까. 더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해야 하는 것인데. 아직 경제 문제도 안정이 안 되었는데. 매일 어음 막아야 되는 처지인데. 또, 나는 판사로만 살아왔는데. 그리고 하려고 해서 시작한 변호사 일도 아닌데…. 그러다 딱 결심해버리고 민변에 들어갔지요. 들어가서는 민변 변호사들하고 어울리면서 친해지고, 그렇게 해서 변호사 사회에 빠르게 동화될 수 있었어요. 회원위원장을 하면서 네트워크 만들고, 그러면서 본격적인 민변 활동을 하게 된 것이지요. 민변에서 알게 된 양영태, 임성택 변호사가 어느날 로펌 만든다면서 찾아왔어요. 그렇게 해서 ‘법무법인 지평’이 태어나게 되는데, 여기서 제 역할은 대표이자 선배의 자리였어요. 안으로는 리더십을 가지고 포용하고 바깥으로는 대외활동을 하는 거지요. 지평도 초창기라 모든 일이 쉽지가 않았고 개인적으로 제 빚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죠. 빚은 빚대로 있고 이혼도 하고. 결국 그 빚을 끌고 법무부 장관까지 가게 된 거지요. 2001년 1월에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엘 다녀왔어요. 9개 도시를 다녔고 거기서 평화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했지요. 이 여행에서 한반도 평화와 남북문제 해결이 얼마나 시급하고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지요. 그런 문제로 제 시야가 넓어진 것이 아마 참여정부의 제안에 응한 이유의 하나가 됐을 거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