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리파하면 보통 스케치하는 조각상의 인물을 연상한다. 누구나 학교 다닐 때 지겨운 미술시간에 선생님은 어느 얼굴조각상을 들고 와서 그리라고 한다. 그들은 시저나 칼리굴라 그리고 비너스 아님 아그리파이다. 이 아그리파는 대체 누굴 길래 이리 조각상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일까? 시저나 비너스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나 칼리굴라랑 아그리파는?
그들은 바로 로마의 인물들이다. 칼리굴라는 초기 정통 율리우스 가문의 로마황제였고 아그리파의 손자였으며 아그리파는 이 로마 황제의 할아버지였기 때문.... 조각상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나란히 남아 학생들의 손에서 스케치 되고 있다는 사실... 가문의 영광이 아닐까?
로마는 공화정시대부터 귀족과 평민 가문이 분리되어 있었다. 즉 집정관을 많이 배출할 수록 유명한 귀족가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가문이라도 씨족이 구분되는데 이 구분을 설명해 보면, 로마엔 이름난 귀족가문들이 많은데 그 중 제정(帝政)이 들어서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인 율리우스(Julius)가문이 왕조가 되는 것이다. 즉 황제를 배출했으니....
로마인의 이름을 분석해보자. 우리가 잘 아는 시저의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즉 가이우스가 이름이고 율리우스는 성이고 카이사르는 씨족 명이다. 즉 율리우스 가문에서 카이사르란 씨족이 분리되어 나왔다는 걸 뜻하는데 우리네 말로 본관의 성씨에서 파가 갈라져 나온 것과 같다고 보면 된다. 본관은 로마고 성은 율리우스이고 파는 카이사르 파라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관명은 가이우스인 것이다. 시저는 영어식 발음이고 원래는 카이사르라고 해야 하는데 각 나라말로 변하면 이탈리아어로는 케사르 정도로.... 러시아로 가서 차르란 단어가 되었고...
어딜 가나 황제란 뜻이 되었으니 무관(無冠)의 제왕다운 이름이다.
아그리파(Agrippa, Marcus Vipsanius, B.C. 62~B.C. 12)는 빕사니우스 가문 출신으로 뒷날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의 가계에 대해선 잘 알려지지 않는데 그건 출신가문이 그다지 내세울게 없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 즉 시저가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그의 유능한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보고 붙여준 친구였는데, 군인으로서 자질이 부족했던 옥타비아누스의 결점을 보완해주기 위해 아그리파를 붙여준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래 평민출신으로 옥타비아누스 가문의 가이우스 즉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였으나, 양자(養子)가 되면서, 이름 가운데 ‘율리우스’가 붙게 되었고, 황제가 되어서 이른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 출생은 율리우스 가문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어머니 아티아(Atia)가 시저 누이의 손녀였던 이유로 양자가 된 덕에 율리우스 가문에 속하게 된 것이다. 이 평민출신 인물은 출세해서 로마황제로 이름난(물론 惡名이다) 칼리굴라와 네로황제의 할아버지가 되는데 어떻게 황제들의 할아버지가 될 수 있었을까?
먼저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가 되자 율리우스 왕조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황제에겐 혈육이란 딸 하나뿐이었고 이 딸 이름은 율리아(Julia, B.C.39~A.D.14)로 이리저리 친척들에게 시집보내려 하는데 가장 먼저 황제가 택한 사윗감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누스라고 하는 공화정 때부터 유명한 귀족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청년에게 보내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재혼상대였던 리비아의 친척이기도 했다. 공주보다 3살 위였으나 14살의 딸이 시집가자마자 17세로 죽고 만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자신의 제국의 안전과 제위 그리고 딸의 보호자로서 나이 많은 사람을 골라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물론 재취한 부인 리비아는 자신이 전 남편에게서 낳은 두 아들이 후계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들 보다는 제국을 방어할 인물을 찾아야했기 때문에 ‘위대한 장군’이라 칭송받으며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나이가 무려 23살이나 차이 나는 아그리파에게 공주를 시집보낸다. 물론 아그리파는 아내가 있었으나 황제의 명으로 이혼하고 새장가를 든 것이다.
이 아버지와 같은 남자와 결혼한 공주는 아마 멋모르고 같이 잘 살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노련한 아그리파는 공주와 살면서 황제가 그리도 원하는 외손자들을 5명(2남3녀)이나 낳아주었으나, 50세의 나이로 어린 자식들을 남겨놓고 사망해버리고 만다. 물론 아직 꽃다운 나이 27세를 유지하는 공주를 남겨 놓은 채....
남겨진 이 공주는 무지 남자를 좋아했던 것 같다. 무절제한 사생활이 황제의 귀에 들어왔고 이런 공주를 무지 싫어했던 황제는 공주의 다섯 자녀 중 아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시우스 카이사르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딸이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지만 이 외손자들은 기원후 4년에 모두 사망하고 만다. 즉 후계자로서 얻은 외손자 2명이 모두 요절해버리는 것이다. 형은 24세로, 아우는 20세로 죽었고 자식은 남기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황제는 조급해졌다. 총애하던 아그리파가 낳아준 자식이 벌써 두 명이나 가버렸고 제대로 크는 아이는 손녀딸 ‘빕사비나 아그리파(大아그리피나:B.C.14~A.D.33)' 뿐이었다. 결국 황제는 황후 리비아가 소원하던 결혼을 해주게되는데 리비아의 전 남편 소생인 의붓아들 티베리우스와 결혼시켜 제위의 후계자로 만들어주나, 이 두 사람은 자식을 얻지 못하여 결국 후계자로 아그리파의 하나 남은 딸 빕사비나 아그리파를 티베리우스 황제의 동생인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네로란 이름은 바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본가인 ‘클라우디우스 네로’란 성에서 유래한 것이다)의 아들로 티베리우스의 양자가 된 ‘가이우스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Gaius Germanicus Caesar, BC 15~AD 19)’와 결혼시켜 억지로 후계자를 생산하도록 했다.
이들 모든 결혼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열망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황제는 어떻게든 자신의 혈통이 흐르는 손자들로 하여금 제위가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 별별 혼인법을 다 강구해냈다. 결국 티베리우스의 친조카가 선택되었고 이들 사이에서 낳은 9자녀 중 5명의 자녀(3남2녀)가 태어 살아 남았나 위의 두 아들은 젊어서 요절하고, 기발하고도 어이없는 재주를 가지고 있던 3남 게르마니쿠스(일명 칼리굴라, 이 사람도 조각의 주인공)가 제위 후계자로 지명된다.
게르마니쿠스는 유일한 아우구스투스의 남자 혈통이었고 아그리파의 외손자였다. 결국 황제의 바램으로 손자가 제위를 차지하는데 이 황제가 바로 칼리굴라 (Caligula, 12.8.31~41.1.24)이다. 본 이름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Gaius Caesar Germanicus)로 물론 아버지랑 할아버지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된 덕에 율리우스 가문의 황제이다.
칼리굴라란 이름은 평생 전쟁터에서 살았던 부친이 군막에서 그를 키워, 병사들이 유아용 구두의 명칭에서 따온 별명을 붙여 준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아그리파처럼 로마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군대에서 한 평생을 보내야했다. 그것은 로마황제가 될 사람의 숙명이었고 의무였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도 제국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장군으로서 공주를 얻었고 이 칼리굴라의 부친도 이런 의무를 승계한 것이었다.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사랑스런 자손이었고 후계자였다. 그러나 이런 혈통에서 순리대로 나온 후계자는 그리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을 바로 증명해 주었고 제국은 혼란에 빠져 결국 이 젊은 황제는 근위병의 군인에게 암살당한다.
칼리굴라의 죽음 후 근위대는 변변치 못한 승계자를 세우는데 칼리굴라의 숙부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은 전혀 섞히지 않은 클라우디우스 1세(Claudius I, BC 10.8.1~AD 54.10.13, 본명은 Tiberius Claudius Nero Germanicus)를 세운다. 그는 육체적 장애 때문에 무척 내성적이고 소심했다. 그러나 첫 황제의 자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혈통상의 결혼을 해야 했고, 칼리굴라의 누이이자 아그리파의 외손녀이며 자신의 친형 딸이기도 한 소(小)아그리피나와의 결혼을 통해 제위의 정당성을 확보해야했다.
그러나 이 조카딸은 이미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가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라는 유명한 귀족가문인 도미티우스 가문의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네로(이 사람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네로, 본명은 루시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Lucius Domitius Ahenobarbus)로 그녀는 혈통상 자신의 아들이 유일한 아우구스투스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워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로 세워 이름을 네로(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 37.12.15~68.6.9)로 변경하면서 황제의 유일한 딸인 옥타비아와 결혼시킨다.
혈통상의 후계자는 당시 네로뿐이었다. 한마디로 아우구스투스가 줄기차게 노력해온 자신의 후손들만의 제위계승 즉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Julius-Claudius)왕조의 마지막을 네로가 마감해준다. 다들 아시다시피 네로는 기독교도를 박해하고 로마를 불태우다 원로원과 근위병에 의해 암살되면서 첫 로마의 세습왕조는 멸망하고 만다.
자기 후손들만의 세습왕조를 꿈꾸던 아우구스투스는 양부인 카이사르와는 달리 시골출신이라 무척 혈통에의 집착이 강했던 같다고 역사가들은 평하는데 유능한 양자를 세우기 보다는 자신의 혈통을 고집하는 한 황제의 욕심에 로마 제정은 엄청난 교훈을 지니면서 막을 내리고 힘 있는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게 되는데, 후일 나타나는 오현제(五賢帝)시대에는 이러한 첫 세습왕조의 교훈을 참조하여, 유능한 누구라도 양자(養子)로 삼아 제위를 물려줌으로서 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아그리파의 자손들은 이러한 오현제 시대를 열어줄 재미나는 본보기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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