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 4. 29. 주일 오전. 필그림교회
그랄 땅에 내려간 아브라함
[본문] 창세기 20:1-7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하늘에서 유황불이 비같이 쏟아져서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짐승들이 다 죽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지금 아마도 사해 바다 밑에 잠겨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롯과 그의 가족은 천사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지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과 그의 두 딸은 작은 성 소알에 들어가서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불안했습니다. 유황불 심판의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롯의 아내가 죽어서 소금기둥이 되는 것을 보고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 산으로 도망하여 동굴 안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롯의 이야기는 끝이 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 후에 아브라함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 1절에 보니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전에 헤브론 북쪽 마므레 수풀에서 양과 소를 키우며 살았습니다. 롯이 떠나간 후에 아브라함은 장막을 옮겨 마므레 수풀에 와서 살았습니다. 그때가 아브라함의 나이 약 80세 전후였는데, 지금 아브라함의 나이는 99세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1년 전입니다. 그러니 약 20년 정도 헤브론 마므레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은 일어나서 온 가족과 종들을 거느리고 또 소와 양들과 나귀들을 몰고 그랄로 옮겼다고 합니다. 큰 이사입니다.
여러분, 그랄은 어디에 있습니까? 남방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남방’은 ‘네게브’입니다. 유대의 브엘세바 남쪽에 있는 광야 지대를 말합니다. 브엘세바는 유대 땅 중에서 사람이 정상적으로 집 짓고 살 수 있는 제일 남쪽 지역입니다. 그 아래로는 광야입니다.
아브라함은 남방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였다고 합니다. 가데스 곧 가데스 바네아는 어디에 있을까요? 브엘세바에서 남쪽으로 약 80 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이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애굽을 나온 후 시내산에 한 1년 정도 머물렀고, 그 다음엔 가데스 바네아에 와서 38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러면 술(수르)는 어디에 있을까요? 가나안 땅과 애굽 땅 사이의 경계 지역에 있습니다. 술 광야를 지나면 애굽입니다. 가데스와 술 사이에 그랄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확한 위치는 모릅니다만 상당히 남쪽입니다. 이집트 국경 가까이에 있습니다. (대개 성경 지도에 나와 있는 ‘그랄’의 위치는 브엘세바 북서쪽으로 성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위치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위치는 ‘그랄 성’이 있던 곳이며 아브라함이 이사했던 ‘광야 그랄’은 ‘그랄 성’에서 남쪽으로 제법 떨어져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광야 그랄은 물론 그랄 성에 있던 아비멜렉의 관할 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잘 살지 않는 버려진 땅, 황량한 땅으로 이사한 것입니다. 왜냐고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는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성 안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기는 주인이 있고 텃세를 부립니다. 또 아브라함은 유목민이기 때문에 성 밖에서 양과 소를 쳐야 합니다. 풀을 따라 이리저리 이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마므레에서 그랄 지방으로 옮겼을까요? 여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해가 돌아오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가지면 몸조심해야 합니다. 먼 거리를 여행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때 사라는 아직 아기를 가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세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하고, 이어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이 행해지고 나서 바로 이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 이사했을까요? 알 수 없습니다만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이건 순전히 추측입니다만, 아브라함이 동맹을 맺고 있던 아모리 사람들 곧 마므레에 살던 아모리 세 형제들인 마므레와 에스골과 아넬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떠나주기를 요청했을 수 있습니다. 왜냐고요? 소돔과 고모라와 인근 성들의 멸망은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다 알려졌을 것입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아브라함과 롯을 찾아왔었다는 사실도 알려졌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들을 통해, 또 롯과 그의 두 딸을 통해 알려졌을 것입니다. 또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소알 성 사람들을 통해 금방 온 가나안 땅에 알려졌을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므레의 형제들은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의로운 아브라함이 우리 가운데 살면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지도 몰라. 우리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지 몰라.” 사람들은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기보다는 의로운 사람이 떠나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없으면 괜찮을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부랴부랴 보따리를 싸서 양과 소들을 몰고 떠나지 않았을까요? (결과론적으로 보면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 넓은 무대를 주시기 위해 더 넓은 땅으로 이사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막상 가려니 갈 곳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 텃세가 없는 땅을 찾다보니 저 남방 광야, 그 중에서도 광야 깊숙한 곳인 애굽 국경 가까이 그랄 지방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전세 살다가 쫓겨났습니다. 주인이 방 빼라고 해서 이사했는데, 갈 데는 없고 ... 그래서 저 멀리 한적한 시골, 아니 시골보다 더 못한 광야에 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랄 땅에도 띄엄띄엄 양치는 유목민들이 있습니다. 베두인들입니다. 이 베두인들을 통해 소문이 납니다. 무슨 소문이 났을까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더라, 인품이 훌륭하더라.” 하는 소문이 나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이 있는 여자가 엄청 예쁘더라. 완전 얼짱에다가 몸짱이더라.” 하는 소문이 납니다. “세상에 태어나고 나서 그런 미인은 처음 본다.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어.” 이런 소문이 순식간에 쫙 퍼졌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내 여동생”이라고 했습니다.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오빠’라고 불렀어요. 왜냐하면 사라를 자기 아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예쁜 여자가 있으면 그 남편을 죽이고 빼앗아갑니다. 광야에서 사람을 죽이고 모래 속에 파묻어버리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과 사라는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오빠, 동생”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딴 것은 다 용감하게 잘 하는데, 아내를 빼앗기고 자기가 죽을 것을 생각하니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합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꼭 거짓말이라 하기 어려운 것은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였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배다른 동생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같은데 어머니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한 30년쯤 전에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사람들이 네게 물으면, 당신은 내 여동생이라고 말하라. 그래야 내가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이렇게 서로 굳게 약속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까 아름다운 아내를 데리고 사는 사람은 참 걱정이 많겠다 싶습니다. 예쁜 아내를 데리고 살면 늘 불안합니다. 혹 사람들이 내 아내를 빼앗아가지나 않을까 하고 불안합니다. 그래서 그런 남편은 일을 제대로 못할 것 같아요. 직장에 가도 불안합니다. 또 집을 비우고 출장은 아예 못 갈 것 같아요.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는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진짜였습니다. 목숨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아내 사라가 늙었지만 여전히 예뻤습니다. 지금 나이가 90인데 예뻤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것도 성형미인이 아니라 타고난 자연미인입니다.
그러자 이 소문이 그랄 왕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랄 왕의 이름은 ‘아비멜렉’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왕의 본명이라기보다도 왕을 가리키는 ‘칭호’로 생각됩니다. 애굽의 ‘바로(파라오)’처럼 대대로 ‘아비멜렉’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도 나중에는 황제를 가리키는 칭호가 된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나라 고조선의 ‘단군’(檀君)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박달 임금’ 곧 ‘밝은 땅의 임금’이라고 풀이합니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단군이 세웠다는 ‘신시’(神市)는 사실 ‘밝은 땅’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거기서 동해 바다까지는 한참을 가야 합니다. 압록강 주변의 땅이 밝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입니다만, 수메르어에서 ‘단’(DAN)은 ‘강하다’(strong, mighty)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의 ‘단단하다’의 어원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수메르어 ‘군’(GUN)은 다르게는 ‘긴’, ‘간’, ‘칸’, ‘쿤’ 등으로 발음되는데 ‘임금, 왕’이란 뜻입니다. 영어의 ‘킹’, 독일어의 ‘쾨니히’, 화란어의 ‘꼬닝’, 몽골어의 ‘칸’이 다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중국어의 ‘쥔’(君)도 여기서 나왔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단군’은 ‘강한 임금’(mighty king) 곧 ‘대왕’이란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단군은 한 왕의 이름이 아니라 옛날 고조선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칭호’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좀 더 연구해야 할 분야이니 그냥 놔둡시다.
어쨌든 ‘아비멜렉’은 그랄 왕인데 아마 왕의 칭호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그 아들도 ‘아비멜렉’, 그 손자도 ‘아비멜렉’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본명은 따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랄 왕은 아마도 성읍 안에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그랄 땅 광야와는 제법 떨어져 있지 않았을까요? 넓은 광야가 다 그랄 왕의 관할 하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랄 왕은 사람들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고 하니까 자기 첩으로 삼으려고 데려간 것입니다. 자기 나라 안에 있는 여자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면 아무든지 데려가서 첩으로 삼는 것은 왕의 권한입니다. 어떤 왕은 첩을 수십 명 두기도 합니다. 그랄 왕은 사라를 데려가서 첩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또 다시 자기 아내를 빼앗기려는 위기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참 불쌍하다 싶어요. 전에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도 바로에게 사라를 빼앗겼다가 겨우 도로 찾았습니다. 이번에도 자기 아내를 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이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꿈에 나타났습니다. 3절에 “현몽하셨다”는 것은 꿈에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꿈에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고 하셨습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 결혼한 여자, 유부녀라는 말입니다. 남편 있는 여자를 데려왔으니 네가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4절) 아비멜렉은 사라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사라를 데려와서 한 번 만나고 나서는 왕궁의 어디엔가 머물게 했겠지요. 그런데 “주께서 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십니까?”라고 항변합니다. 아비멜렉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또 말합니다.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나에게 이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5절) 아비멜렉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네 옆에 있는 여자가 누구냐?” 아브라함은 “내 여동생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물었습니다. “네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누구냐?” 사라가 능청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내 오빠입니다.” 아비멜렉이 또 묻습니다. “진짜냐?” 사라가 대답합니다 “네. 진짜입니다.” 이렇게 확인하고서 사라를 데려왔습니다. “임자 없는 물건이라서 가져왔지, 남의 물건을 빼앗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저는 죄가 없습니다. 억울합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6절) 아비멜렉이 온전한 마음으로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죄 짓는 것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사라를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막으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들에게 병을 내리셨다는 말입니다(17-18절).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비멜렉 집의 모든 태(胎)를 닫으셨다고 합니다. 무언가 병이 생겨서 아기를 가지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도 뭔가 몸에 병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를 가까이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사라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것입니다.
이번에도 사라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사라를 보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라의 몸에서 날 이삭도 보호하시고, 또 아브라함도 보호하셨습니다. 애굽의 바로에게서도 지켜주시고, 그랄 땅의 아비멜렉에게서도 지켜주셨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사라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기 직전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지켜주시고 건져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지켜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멍청하게 지켜보고만 있었어요. 자기 입으로 스스로 “사라는 내 아내가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자기 손으로 사라를 건네주었습니다. 참 바보 같은 남편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를 지켜준 게 아니라, 말하자면 도리어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남편을 믿으면 안 됩니다. 남편은 여러분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아브라함도 못 지켜줬는데 어찌 여러분의 남편이 지켜주겠습니까? 결혼할 때 “내가 당신을 지켜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줄게!”라고 한 것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지 참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남편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남편은 사랑하고 순종해야지 믿으면 안 됩니다. 사라도 남편 말을 잘 듣고 하라는 대로 다 순종했지만, 남편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전서 3:5에 보니, 사라를 비롯한 거룩한 부녀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고 합니다. 사라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사라를 건지시고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남편은 자기를 두 번이나 팔아넘겼지만, 하나님은 두 번이나 사라를 건져주셨습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그래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사랑하시고 선지자로 대접해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자,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란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할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비멜렉의 병을 고치시고 그에게 속한 사람들이 다 죽지 않고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도 못 지키고, 자기 목숨을 위해서라면 자기 아내도 팔아먹는 졸장부이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귀하게 보시고 선지자로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에는 그냥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한국을 복 주시고 싶은데, 그냥 슬쩍 복 주시는 게 아니고 누군가가 하나님께 청을 넣어야 합니다. “하나님, 대한민국에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그래야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 사업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고 “그래, 옳다. 네 청을 허락하노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한 줄로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하는 꼴을 보면 복을 못 받을 것 같은데, 결과를 보면 이상하게도 복을 받습니다. xx그룹 형제들이 싸우는 꼴을 보면 다 망할 것 같은데,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 휴대폰이 세계 1등을 했다고 합니다. 노키아를 제치고, 애플도 제치고 세계 1등을 했습니다. 반도체도 세계 1등, TV도 세계 1등을 했습니다. 수출도 잘 되고 무역수지도 흑자이고 경상수지도 흑자이고, 또 이번 주간에는 일본과 중국에서 관광객들이 엄청 몰려올 것입니다.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도 많이 팔아서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고 합니다. 세계경제 불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 경제는 달리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사람들은 기업이 잘 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제가 볼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복 주셔서 그런 줄로 믿습니다. 왜 복을 주시는 걸까요? 비록 우리가 못났고 국회의원들은 회의도 할 줄 모르는 졸장부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도하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를 파송하라고 우리나라에 복 주신 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북한이 우리를 위협하고,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이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는 아브라함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우리나라에 복을 주셔서 크게 발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린이 여러분들과 학생들도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어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나라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왕 같은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지키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2012년 4월 29일 주일 오전 필그림교회 설교. 변종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