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보급율 100%를 넘어선지 이미 오래전이지만 집없는 서민들은 국민의 50%가 넘는다. 정부의 주택 및 주거정책의 일환으로 100만호 임대아파트 건설을 완료하고 다시 참여정부에서 100만호 임대아파트를 짓는다고 삽질을 시작한지 또 몇년이 지났다. 하지만 임대주택 공급량의 확대에만 힘을 집중하다보니 임대아파트에서는 주민과 임대사업자, 그리고 정부와 끊이지 않는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오늘은 기자가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 주민의 수기를 통하여 임대아파트의 법적, 제도적 분쟁 이외에 실생활에서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격고 있는 정신적, 심리적 상황을 담담하게 전하고자 한다.
임돌이, 임순이의 비애 나는 전라북도 군산시 미룡동에 산다. 정확히 미룡1주공 아파트에 산다. 미룡동은 그동안 군산에서 시내의 변두리로서 예전 옥구군과 접한 논농사를 짓던 동네이고 군산대학교가 들어선 것 말고는 모두가 단독주택뿐이었다. 처음으로 미룡동에 주공아파트 2단지가 들어섰고 차차로 3단지와 1단지가 들어섰다. 2단지와 3단지는 5년 공공임대아파트이고 1단지는 30년 국민임대아파트이다. 고층건물이라고는 군산대학교내의 4층 건물이 전부인 시골에 이렇게 모두 3000세대의 임대아파트가 들어서 1개의 면단위가 세워진 것이었다. 내가 이곳 미룡주공2단지로 이사를 온 것은 2001년 4월이었다. 당시 미룡주공아파트는 이전 10년 내 군산 서민들에게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당시 입주를 하지 못한 서민들이 수백명에 달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97년 불어닥친 IMF 사태로 말미암아 군산지역 임대아파트가 단 1개 단지도 남지 않고 전체가 부도가 나서 갑자기 27만여명에 불과한 군산시에서 5만여명이 일거에 쫒겨날 처지에 놓이게 되어 군산시민 전체가 정신적 공황상태로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001년 3월에 미룡주공2단지가 입주가 시작되었을 때 입주민들은 기쁨에 겨웠고 입주하지 못하고 탈락한 주민들은 허탈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입주민이 입주가 끝나고 계약후 입주를 포기한 세대에 대한 재신청을 받는다고 하는 날 “나 같은 사람들이 무슨 운이 있어 들어갈 수 있겠어” 안 될 거라며 포기한 상태에서 혹시 가느다란 희망을 걸고 추첨에 응했는데 막상 현장에 도착해보니 이날도 수백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룬 속에서 느닷없이 당첨되는 행운을 얻어 입주하게 되었다. 가능하면 좋은 주거환경에서 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당연한 바램이다. 더욱이 나는 막 딸 쌍둥이를 어렵게 낳아 나와 쌍둥이의 건강이 모두 좋지 않은터라 새로 지은 주공아파트 입주에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아니 그보다도 결혼과 더불어 얻었던 신혼집이 집주인의 부도로 보증금 한 푼 받지 못하고 경매에 넘어가 20년 가까이 된 낡은 아파트에서 드나들때마다 가슴 아팠던 기억들을 지울 수 있어서 너무도 기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입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피부가 이상해지더니 짓무르고 딱지가 온 몸을 뒤덮을 정도로 잠을 못자고 긁어대며 밤마다 울어대는 것이었다. 아토피가 날이 갈수록 심해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토피 샴프로, 바쓰, 오일, 로션으로 바꾸고 먹는 것도 아토피에 좋다는 것만 먹이고 매일 병원에 다니며 잠을 못자고 긁어대고 울어대면 잠들 때까지 긁지 못하게 업고 재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를 업고 달래다 보면 어느새 날이 하얗게 밝아오고 아이는 날이 환해지기 시작하면 그 때서야 잠이 들기 시작했었다. 그 때 날이면 날마다 어떻게 아이들을 업고 날을 새가며 달랬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엄두도 나지 않고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버텨 보았지만 도저히 아토피가 낫지 않고 심각해져 뽀송뽀송 예뻐야 할 아이들이 날이 가도 좋아지질 않아 마음 아파하던 차에 친정의 어머니께서 아이들을 돌보아 주시겠다고 하여 남편과 상의한 끝에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과 별거 아닌 별거를 하기로 하고 여수 친정으로 내려가 2년 정도를 돌보면서 겨우 아토피를 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3년차부터 남편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걱정이 앞서 왔다. 미룡주공아파트 2단지는 분양을 앞에 두고 있고 분양을 받을 처지는 안 되고 이래저래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있었는데 다시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2단지 바로 뒤에 30년 국민임대아파인 1단지가 곧 입주를 한다는 것이었다. 2단지 많은 동네 사람들 입에서도 분양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1단지로 이사를 갈 것인지 이야기하며 1단지 입주를 기대하고 있었다. 1단지는 2단지보다 평수도 넓어 보이고 집의 구조도 훨씬 나았고 더 좋은 것은 베란다 샤시가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2단지에서 평수에 따라 달랐지만 개인적으로 150만원에서 350만원을 들여 설치하고 이사를 갈 때는 항상 분쟁의 씨앗이 되어 다툼이 일상화되었기에 주위에서 보기에도 민망하고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이 싸여 이사를 오고 가는 형편이었다. 어찌되었건 아토피 걱정에 일직부터 1단지 입주를 위하여 사전에 청소하고 환기화고 보일러를 가동하여 습기를 제거하고 입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입주하고 나서 1단지에서의 1년 반은 아무 일 없는 듯이 다른 신경 쓸 일 없이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주공아파트 단지에는 용문초등학교와 금강중학교가 문을 열어 교육 여건도 갖춰가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문제가 생겼다. 올해 초 해가 바뀌고 2, 3단지가 분양을 준비하고 있는데 미룡주공아파트 1, 2, 3단지 앞 20미터 도로 건너편이며 은파유원지를 앞에 둔 곳에 전라북도에서 제일 좋고 비싼 아파트가 들어선다며 공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동네에서는 어수선하게 여러 가지 말이 오고가며 불안해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미룡주공아파트 1, 2, 3단지는 3000세대를 이루고 있지만 20평, 24평, 34평이 전부인데 바로 옆에 들어서는 650세대 2개 단지는 제일 작은 아파트가 34평이고 큰 아파트는 내가 살고 있는 20평보다 3배가 넘는 72평이고 보니 아주머니들 속에 서로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넘을 수 없는 선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미룡주공 주민들이야 약간의 평수의 차이는 있지만 가까이 붙어 있어 서로 차이를 인정하며 살아왔는데 20미터 도로 이웃에 성채와 같은 어마어마한 아파트가 들어선다니 왠지 모를 불안과 다가갈 수 없는 벽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벌써부터 동네 아주머니들 속에는 임돌이, 임순이의 비애를 이야기하며 슬퍼하고 이사를 가야겠다고 말하시는 분들이 많다. 우리 주공아파트 단지는 아무라도 차를 가지고 단지 안으로 들어오고 가정에 방문을 할 수 있지만 이웃의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는 단지 입구에서부터 동네주민이 아니면 들어갈 수조차 없고 설령 들어갔다고 해도 방문하고자 하는 집에서 각 동 현관에서 열어주던지 아니면 비밀번호를 모르면 아파트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고 한다. 동네에 사는 아이들 교육과 교유관계도 걱정이다. 우리 아이들이야 친구들과 어울리면 통닭 몇 마리와 음료수, 그리고 과일이면 너무도 행복해하고 감사해하지만 나운동 부자동네의 초등학교 아이들의 모습을 익히 보고 들어서 알고 있듯이 부모들이 외제차나 고급차 아니면 상대하지 않고 아파트 브랜드에 따라 어울리고 브랜드가 없는 아파트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나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20미터 도로를 사이에 두고 군산의 제일 부자들과 제일 가난한 서민들이 맞대고 살게 되었으니 평범한 가정주부이며 아줌마들로서는 가슴이 답답하고 막히는 심정을 어찌 말로 해야만 알 수 있으랴? 초등학교는 별도로 신설한다고 하지만 중학교는 같이 다녀야 하는데, 하나의 도로로 출퇴근길을 같이 하는데 삶의 양식과 질은 천지차이이고, 동네에서 소곤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지역에서 부자동네와 가난한 동네 출신 이야기가 나운동처럼 놀러대면 그 편견과 모욕은 우리 부부야 어떻게 참아낸다고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 지 벌써부터 답답하기 그지없다. 나운동 이야기를 남의 얘기려니 생각하고 뭘 그렇게까지 확대해서 이야기하나 했는데 막상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20미터 도로를 사이에 두고 현실이 되고 보니 앞날이 캄캄하다. 그래도 나는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30년 동안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아파트에 들어왔다고 너무도 행복해했는데 2년을 못가서 다시 걱정 앞에 놓였다. 그렇다고 대책도 없이 남들처럼 떠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부딪혀 볼 수밖에 없다. 내년에 쌍둥이 아이들 학교에 보내보고 키우면서 열심히 살다보면 잊혀지든지 아니면 한 동네 사람들처럼 서로 어울리든지 할 것이다. 그래도 세상은 많이 바뀌고 또 이해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운동의 임돌이, 임순이의 비애를 되풀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미룡1주공 아파트에서 쌍둥이 엄마 영희 군산미룡1주공 101동 802호 박영희 씀. |
출처: 비내리는 날 창밖 풍경 원문보기 글쓴이: 최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