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변화
2006.08.25 이화정 기자
홍상수 감독과 고현정의 만남으로 화제가 된 영화 <해변의 여인>. 홍상수는 고현정의 특성을 십분 살려 여주인공의 심리를 파고드는 시도를 한다.
작가주의적 작품으로 일관해온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가장 대척점에 있을 것 같은 배우 고현정. 이 두 사람이 불러일으키는 화학작용은 어떤 모양새일까. 촬영 당일 시나리오를 건네주기로 유명한 홍상수 감독의 작품인 만큼 궁금증은 더더욱 증폭돼왔다. 그간 톱스타를 기용하는 것보단 개성 있는 배우들과의 작업을 통해 자기세계를 일궈온 홍상수. 그렇다면 이 영화로 스크린에 데뷔한 고현정은 홍상수의 작품세계 안에서 어떤 인물로 관객 앞에 다가설까.
<해변의 여인>은 영화감독 중래(김승우)의 갑작스런 여행에서 시작된다. 중래는 차기작 시나리오가 잘 풀리지 않자 후배 미술감독 창욱(김태우)에게 여행을 가자고 조른다. 창욱은 이 짧은 여행에 애인 문숙(고현정)을 데려 가겠다 제안한다. 그리하여 서해안 신두리 해수욕장으로 향한 세 사람의 여행길. 그런데 셋의 관계에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중래는 창욱의 애인인 문숙에게 관심을 보이고, 문숙 역시 중래의 야릇한 시선에 동조한다. 급기야 중래와 문숙은 창욱 몰래 밀애를 즐긴다. 서울로 돌아온 뒤 이틀 후, 다시 혼자 신두리에 간 중래는 그곳에서 문숙을 연상시키는 선희(송선미)를 만난다. 인터뷰를 핑계로 선희에게 접근한 중래는 선희와 하룻밤을 보낸다. 때마침 다시 중래를 찾으러 신두리에 내려온 문숙은 중래와 선희의 관계를 의심한다. 이제 문숙과 선희는 중래를 사이에 두고 또 다시 미묘한 관계에 빠져든다.
낯선 여행길에 오른 남녀의 일탈적 사랑이야기라는 점에서 <해변의 여인>은 홍상수 감독의 전작과 같은 궤도에 위치한다. 그러나 영화는 전작들과 다른 방식으로 인물들의 심리를 파고든다. 가장 큰 변화는 시점의 변화다. <생활의 발견>이나 <극장전> 등 과거 홍상수 감독의 작품이 남자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고 또 그것으로 매듭지어진 반면, <해변의 여인>은 중래의 시선에서 시작, 문숙의 시선으로 매듭을 짓는다. 중래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에 문숙의 자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뭇 일관된 톤을 보여줬던 전작의 여인들과 달리 <해변의 여인>의 문숙은 그래서 가끔 위태롭고 변덕스럽기까지 하다. 중래와 문숙의 시선 위에 감독은 일상에서 비집고 나온 특유의 웃음을 능청스럽게 배치한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재미는 코믹한 설정 사이 언뜻언뜻 비치는 ‘이미지’에 대한 감독의 관심이다. 중래와 문숙, 선희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이미지의 차이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해변의 여인>이 관객에게 안겨준 '발견'은 김승우다. 홍상수의 페르소나 김상경이 홍상수 영화의 출연을 통해 점차 가꾸어져 나갔다면, 중래를 연기하는 김승우의 연기는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김승우 자신의 것처럼 자연스럽고, 또 그래서 매우 특징적인 면모를 보인다. 고현정의 연기도 무리가 없다. 고현정은 기존의 단아한 이미지를 벗고 욕설도 스스럼없이 하고 자기표현에도 능숙한 문숙 역을 훌륭히 소화해 영화 신고식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홍상수 감독 영화 중 처음으로 15세 관람가를 받았지만, 노출 신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걸 제외하곤 소재, 사고방식, 인물들의 대화 수위 면에서 전작들의 재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