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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분이 계시다면, 더러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부분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전체적이고 역
사적인 맥락에서 이해되었으면 합니다. 민족이라는 이름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이 거대서사
를 수용하던 거부하던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과제인 것 같아서 썼습니다, [제국]이라는 담
론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고 그 미래의 징후가 어떻게 우리에게 파장을 선사할지 두렵고
궁금하므로--.
제국(Empire)과 민족문학
김승환(듀크대학 Visiting Scholar)
1.제국주의 저 너머 '제국'
복도를 지나는 순간 '마이클 하트다'라는 직관의 더듬이가 작동했다. 헝크러진 머리
에 번쩍이는 눈빛의 마이클이 내게 '제국'이란 단어를 남기고 바람처럼 복도 저편으로 사라
진 것은 2002년의 2월이 저물어 가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그러니까 듀크 이스트 캠퍼스의
어둑한 복도에서의 스침은 우연이었다. 그날 밤 다시 밀쳐두었던 '제국(Empire)'을 탄명스런
내 사유의 전선에 배치했음은 알량한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학문적 자존
심은 애시당초 아니고 민족적 자존심이라고 해야 옳다. 저편으로 그는 갔지만, 복도 어둠 넘
어서, 나는 사유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교교한 수은등 밑에서. 바로 그 괴란쩍은 제국 때
문에. 제국, 제국 저 수상쩍은 제국은 심란하게 나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이 곤란한 물음, 새
체제의 징후 '제국'의 담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두 번째 문제다. 과연 제국의 시대가
도래한다면 스스로 민족민중의 세계관을 가졌다고 간주하는 나 자신은 무슨 삶의 형식을 준
비해야 하는가가 첫 번째 문제였다. 그는 나에게 바람처럼 '너희는 21세기의 세계사라는 무
대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느냐?'라는 물음을 던졌으니 제국이라는 그 책의 논리나 대
서사적 의미와는 별도로 나는 그에게 감사해야 하리라.
한 이론이 생산되면 일단 주목을 받게 되지만 곧이어 비판과 비난이 쏟아진다. 경
탄은 경멸로 바뀌고 찬사를 거두어 가면서 하잘 것 없는 글이라는 혐의를 덮어씌운다. 이
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허황한 이론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면서 한탄하는 학
자들과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이름만 바꾸어 포장했다고 비난하는 교수들이 생각보다 많
다. 하지만 저 이태리의 어두운 감옥에서 나와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지적 모험을 계속하고
있는 안토니오 네그리와 한국인들이 제국주의 나라라고 지목하는 미국에서 숨쉬고 사는 마
이클 하트의 공저 '제국'은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를 뒤흔들었음은 아는 바와 같다. 부분 부
분을 보면 비난자들의 비난이 맞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이 저
서가 휘황한 찬사로 왜자겼던 것일까? 인문학적 갈증과 지식의 상품화 전략이 적중했다고
폄하할 수만은 없는 이 대서사는 무엇보다도 인류사의 운명이라는 주제를 잘 포착하여 설득
력 있게 서술하고 있다. 인간이 왜 살아야하는가 하는 문제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를
세계사 속에서 설명했다는 공로가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세계사적 전망을 정교
하게 구조화해서 분석적으로 설명하려 한 노고에 대한 예의도 생략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인류의 운명에 대한 초거대서사 이론인 것이다. 시시한 담론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적어도 나에게는 이 거대서사가 인류사의 예언적 전조(前兆)를 개념화했다는 점에 대해서
놀라웠다. 나 역시 이처럼 체계적이지는 못하지만 막연하게 미래에 대한 비슷한 생각을 했
기 때문에 동의까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의 이해는 가능했다. 그러나 이 거대이론이 난해
해서라기보다 오히려 너무나도 선명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종의 지적 망설임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러니 갈림길도 잃어 버린 가시덤불 숲 속에서 비칠대는 것은 당연한 것. 선뜻 동의
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조선 낫 한 자루를 그들은 나에게 쥐어준 셈이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서 마이클 하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는 갔지만 사유는 남는다.
내가 '제국' 원전을 읽어 볼 때까지 꺼칠하게 받아들인 '제국'은 이렇다. 제국은 보
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들의 집합체다. 모더니즘과 제국주의의 시대를 넘어서 현실로 드러난
제국에서는 중심과 주변이 없고 안과 바깥이 없다. 전 지구적으로 동일한 보편성의 원리가
통용되는 미증유의 공간이다. 이 제국에서는 미국조차 중심이 아니며 부르조아 국민국가 미
국정부도 제국을 통제하지 못한다. 이쯤 되면 민족을 절대적으로 간직했던 우리에게 이 역
작(力作) '제국' 앞에서 분개가 용솟음치는 것을 어쩌지 못할 것이다. 내 분기와 탱천의 십자
포화를 맞은 것은 미국이라는 부르조아 국민국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미국의 기능과 미국의
본질을 왜곡한 것 같은 대목, 즉 제국에서 미국은 힘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미국도 제국의
한 영역일 뿐 제국을 지배하거나 통제하지는 못한다는 대목이었다. <9·11>이라는 사건 이
후에 미국은 협박과 공포로 다른 국가들을 제압해 나가는 것이 눈에 보이고 그것이 바로 미
국의 세계 지배 전략이라고 믿고 있는 나에게 어떻게 미국의 기능과 본질을 달리 이해하라
고 권한단 말인가. 절대 그럴 수 없다. 미국인이며 세계시민으로 이 글을 쓴 두 저자와 매지
구름 아래 시난고난한 역사를 살았고 또 초극해야 하는 우리의 인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지금 중세에 조공을 바치고 머리를 조아리듯이 미국에 복속되어 가는 국
가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힘들의 집합체가 세상의 자본과 권력을 지배한다고
말하면 비웃음밖에 더 돌아올 것이 없다. 이런 생각은 결코 나만의 것은 아니리라. 황당의
말은 무한질주를 감행해서 당황의 강을 건넌 다음 분개의 정상에 나를 내려두고 떠나 버렸
다. 미국과 서양을 타자로 삼아서 지난 200여 년간의 역사적 모순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남
한 출신 서생(書生)에게 들떼린 충격은 실로 컸다. 정말이지 이 문제는 고약하다. 미국 중심
의 패권주의가 초국가로 군림하면서 한국 같은 나라를 신식민지로 통치하려할 때의 민족적
전략과 제국이라는 미증유의 보이지 않는 힘의 집합체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할 때의 민족적
전략은 달라야 한다. 그러니 제국에서는 미국조차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데 이르러, 이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용암처럼 솟는 분개를 잠재울 묘
약은 베르디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인가!
하지만 이 거대서사는 하나의 반성적 거울로 기능한다. 이 충격을 생산할 수 있다
는 자체가 이미 이 텍스트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이어서 팽팽한 긴장은 증폭되어 갔던 것이
다. 마침 내가 청강을 하고 있는 듀크대학 문학학과 박사과정 강의실에서 몇 주 후 '제국'을
읽을 것이며 이 책은 인류사의 지적 이정표라고까지 하는 말을 더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
다. 후레데릭 제임슨 교수의 상찬(賞讚)이 아니라도 나는 이 이데올로기 비판 한 조각을 씹
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희부연 안개가 채플(chapel)을 덥고 있던 날, 나
는 곧 잔디밭을 가로질러 서점에 가서 19달러의 이 책을 사들고 무슨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항용 지적 탐색의 순간, 팽팽한 긴장과 약간의 적의까지 품고 책을 읽게 마련이
다. 설령 그 이론이나 내용이 나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그 지적 정밀성과 감성적 자극이 있
는 한, 그것을 읽고 사유한다는 것은 팽팽한 시위에 번쩍이는 분석의 화살을 매겨서 쏘아보
는 것일지니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읽었고, 그렇게 나는 감옥 바깥에 있는 마이클
하트를 만났던 것이다. 감사한다, 마이클. 그대는 내 선생. 목마를 타고 사라진 울프처럼 그
대는 사라졌지만, 내 사유를 뒤흔들어 놓았으니 존경한다, 마이클.
'제국'은 무엇인가? 나는 이에 대한 명쾌한 답을 할만한 능력이 없다. 제국을 읽은
후에도 제국의 의미를 정학하게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나는 세계
시민인가 미완의 민족국가의 민중인가? 그도저도 아니면 청주 고속터미널 앞에서 호객행위
하는 백치 관식이처럼 문학을 취미나 장사로 해야 하는 것인가? 사유는 끝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제국은 로마 시대의 제국이나 레닌이 비판하는 근대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역사의
행정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도 좀 더 부연하라면, 제국
은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뜻하며, 국민국가의 쇠퇴와 더불어 권력을 거머쥔 지구 전체를 통
치영역으로 간주하는 초국가의 대권(super power)을 뜻한다고 요약하겠다. 제국의 원리에서
국민국가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제국의 중간관리자일 뿐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의 집합
인 제국에 봉사하는 관리영역일 뿐이다.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제국을 움직이는 실체는 자
본과 정보와 권력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와는 다르게 제국은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
전세계를 자신의 무대로 삼아 종횡무진하며 엄정한 질서를 감시와 관리로써 유지하는 총체
성의 체제다. 기본적으로 제국은 탈영토적이고 탈민족적인 세계권력의 국가적 형태를 뜻한
다. 이 제국은 자본의 자기실현이 아니라 전세계 대중(민중)의 투쟁의 결과라고 그들은 썼
다.
민족이나 민족문학과 같은 신념의 용어는 제국의 사전에 등재되지 못한다. 왜냐하
면 보편성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성이라는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희귀
한 민속학적 관찰의 대상일지언정 문화인류학의 분석대상에도 못 미친다. 그러니 우리가 자
본의 무자비한 수탈과 이윤추구의 결과가 세계화라고 믿고 싶고 현 단계를 고도로 위장된
근대 제국주의의 역사단계라고 믿고 있는데 그 결과를 거꾸로 뒤집어서 제국이 자본에 저항
하는 대중의 투쟁 결과라고 한다면 참으로 곤란하지 않겠는가? 민중이나 피압박 인민이 아
니고 대중(multitude)라는 이 포괄적인 개념으로 역사를 전망하려는 이 거대담론을 우리는
말 그대로 믿어도 좋은가? 괴덕스러운 문명충돌론의 헌팅턴에게 지적 사기를 당했다고 믿는
이론가들이 많은데 말이다. 이 또한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을 가려버리는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바늘처럼 콕콕 내 머리를 찔러온다. 그것은 미국과 기독교 문명과
근대의 법에 자기도 모르게 봉사하는 결과로 생산된 담론은 아닌가 해서였다. 그렇다. 지식
은 종종, 자기의 원리와는 다르게 권력에 봉사하는 경우가 생긴다. 니이체가 그랬고 하이덱
거가 그랬듯이 말이다. 하여간 나는 '제국'에 대한 막연한 인식의 바다를 가르기 위해서 '제
국'을 마주해 보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시커먼 표지의 500여 페이지가 되는 역작이 이래서
내 책상에 놓이게 되었으니, 사연이랄 것도 없다.
2.탈식민과 제국과 민족문학
사실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얼마나 '제국'을 이해했겠는가. 혼자 중얼거리는
불안 섞인 상념 - '수박의 겉면은 매끈하지만 내 인식의 혀끝은 속살 붉은 진실을 먹지 못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이것은 불안 겸 모험이다. '제국'을 읽으면서 불안이라는 선험적 방패
하나를 마련해 놓고 탐색을 하면서 모험의 긴장은 증폭되었다. 이런 치기 서린 독법이 부끄
럽지만, '제국'으로부터의 지적 충격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대서사가
이데올로기 상품으로 억지로 포장된 것은 아니라는 직관의 사유가 나를 때린다. 인류의 지
성사가 오래도록 숙성하여 하나의 징후적 담론을 생산했을 것이므로 이 거대서사는 저자만
의 것은 아니다. 제국의 늪 가장자리에서 서성거리기를 몇 날, 몇 일, 그 어느 순간 나는 실
로 난처한 물음에 빠지게 되었으매 그것은 '탈식민주의자의 행복한 시절'이라는 표찰이다.
그 곁에 엉뚱하게 '하정일 선생은 행복하다'와 같은 문장의 무지개 은유가 떠 있다. 사유의
길을 가로막은 이 문장은 탈식민이라는 지극히 선명한 담론의 화두를 붙들고 선승(禪僧)처
럼 묵묵히 정진하는 그가 한층 찬란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반식민이나 탈식민의 이론과 실
천이 쉽다는 뜻이 아니니 부디 오해는 하지 마시라. 나 역시 탈식민주의나 반식민주의야말
로 21세기 벽두의 남한 민중들이 가져야할 대항 이데올로기라고 믿어왔으니까 말이다. 따라
서 이 말은 묵묵한 하정일 선생에 대한 경외이면서 가리사니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자기경멸
인 셈이다. 제국과 같은 하나의 서사를 만나서 자신의 믿음을 회의하는 가려한 지식인의 사
유는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나는 나에 대한 자기경멸의 채찍을 휘몰아치면서 사유의
배를 조금씩 전진시켜 나갔다.
자, 마이클처럼 명쾌한 문법으로 말해보자. 그들의 보편성(universality)의 제국 속
에서 한국문학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반성적 물음을 제기해보자. 한국인은
민족이라는 어휘에 감정과 역사와 사상을 처절하게 묻어 두었다. 한국인에게 민족은 거의
절대적이다. 이 특수한 개념을 우리는 절대적인 개념으로 인식하고 삶을 투사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한의 작가들이 보수적 위험성을 무릅쓰고 '민족문학'이라는 이
름을 선포하고 투쟁하듯이 사용하고 있다. 한국문학이라는 보편적 용어를 쓰지 않고 민족문
학이라는 이름을 내세운 것은 그러므로 정신사적 의지에 해당한다. 그러니 그들의 제국에
우리의 민족문학은 보편이라는 용광로나 블랙홀의 세례를 받아 한국문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인지, 원리주의자처럼 민족문학이라는 이름과 내용을 고수해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
선고를 해야할 판이다. 이 상대성이 없는 절대적 개념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설명해야 한다
는 자체가 우리 시대의 불행을 증거한다. 민족문학은 국어(國語)라는 용어가 가진 위험천만
한 모호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시시때때로 제국주의라고 장치해두고 필요하면 불러다
가 민족의 대타로 사용하는 일본제국주의의 근대화 과정에서 파생한 기형적 이름 국어(國
語). 국어란 어휘는 요술 상자와 같다. 국어란 대만에서는 중국어이며 한국에서는 한국어다.
일본의 근대가 남긴 일본제국주의의 절대성이 고스란히 언어체계에 전이(轉移)된 기형적인
단어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국어'라는 이 기형적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 제
국주의와는 상관없이 언어적 아비투스(abitus)로 정착되었으므로, 국어라는 어휘에 민족적
의미를 가미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족문학이라는 개념을 직역해서 아일랜드에
서 쓰면 아일랜드 문학이 된다. 터키에서 쓰면 이슬람 문학이라는 보편성과는 다른 터키 민
족문학이라는 특수성으로 바뀐다. 상대성의 원리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이 보편성이라는
당찬 용어에 얼마나 많은 한숨과 눈물이 찌들어 있는지 알만한 사람은 죄 안다. 그래도 우
리는 민족이나 민족문학과 같은 절대적 개념을 용감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뒤
란에 파 묻어둔 애환이 적지 않아 함부로 버릴 수가 없음은 우리 비극의 한 자락.
사실 진보주의자 또는 민족문학진영이라고 일컫는 문인들의 세계관은 역사적 전망
의 진보의식을 원천적으로 깔고 있다. 그런데 이 민족이라는 개념의 중세성과 근대성은 새
로운 문학환경인 제국에서 보면 보수주의에 해당될 수 있다. 세계화의 패러다임에서 보더라
도 민족주의는 자기 민족중심주의라는 보수성이 짙다. 근대사의 굴절로 말미암아 한국의 민
족주의는 진보라는 권위를 누려왔지만, 이제 자유주의에게도 추월당해 버리는 이 현실은 아
이러니다. 이런 때 민족을 절대적으로 내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서는 지난
백년의 세계사가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조건인 민족의 문학이라는
이 개념은 그에 상응하는 상대개념이 없음으로 해서 입는 손실은 계산하지 못했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은 달라졌다. 적어도 저 [옥중수고]를 쓴 그람시의 제자 안토
니오 네그리의 말에 의하면 말이다. 세계화는 자본의 자기확산의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반
대로 민중을 포함한 대중(multitude)의 투쟁의 산물이다. 이 제국체제에서는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는 국민국가는 한국인이라는 민족을 실체로 하고, 한반도라는 영토를 기반으로 하는
통치의 국가권력은 과거보다 큰 의미가 없다. 그런데 한국은, 아니 조선은 민족국가 건설이
라는 오랜 숙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것을 먼저 해결해야 하는데 이제 그런 것은 덜 중요
하니 세계시민으로 살 채비를 차리라는 제국의 협박은 아무래도 받아들일 수가 없지 않겠는
가? 국민국가 건설의 시기에 민족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선이며 지상 최
대의 목적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분단체제를 넘어서 통일시대로 들어선 지금, 여전한 과제
는 진정한 국민국가(nation state)를 이룩하는 것인데 그것은 분단체제의 극복과 아울러서
근대성을 가진 국가체제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름찬 과제를 수행하기도 벅찬 판
에 난곳 없는 '제국'이라는 경천동지(驚天動地)한 단어가 등장했으니 놀라야 하는 것은 자연
스럽지 않은가, 문학의 동지들이여?
오늘날 제국주의의 그늘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지식의 귀족으로 상품을 팔아
명예를 사는 이론가들이 적지 않다. 한국의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특히 현학적인 용어를 즐
겨 차용하는데 그들의 논법은 현란한 수사법으로 가득 차 있다. 지식사회에는 물론이고 문
학의 영역에도 이런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그러면서 자신도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라는
사실을 은폐해 버린다. 이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열심히 아름다운 미학으로 글을 쓰면
된다는 백치들이 더 많은 것은 물론이다. 이런 문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할
경조차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그래도 의식도 있고 생각도 있다는 작가들
이다. 그런 작가들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사상은 문학의 영역을 포함한 전 분야에서 절
대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제 민족적 특수성 같은 것은 없고 세계적 보편성만 있으니
빨리 민족 체제를 그러한 보편성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기본적 감성이
다. 한국어로 쓰이지만 그 내용은 세계어라고 자부하는 영어식 원리로 채워져 있다. 제국의
제자들은 이미 한국에서 활발하게 암약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사람들은 수탈과 억압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능을 은폐하고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나 혼종(hybridity)의 현상
또는 다변화한 미세한 삶의 현상 자체를 작품 속에 담아낸다. 그리고 비평가들은 철저한 비
평의 종속상태에서 문학작품 속에서 그러한 현상을 해석한다.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본말
을 전도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그런 분들에게 단재를 다시 읽히자. 다산을 읽히자. 자, 어
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민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다. 그러니 물음을 통곡의 벽에 물어보
자. 이 시대의 단재가 탈식민이라면 이 시대의 도산은 누구여야 하는가?
시대의 변화와는 관계없이 조선의 강역(彊域)에 반제반봉건의 과제가 여전하건만
근대의 신화를 믿고 자유와 신자유를 신봉하는 역사의 둔재들이 의외로 많다는 한탄이 무척
이나 통절하다. 탈식민으로 이어지는 이 반제반봉건의 오랜 과정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설
명이 필요 없으며 따라서 논리나 보편으로부터 일탈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그 과정을
생략하기로 하되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야만과 법은 같다>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피압박 민중과 억눌리는 사람의 언행 대부분은 정당하다'라는 체 게바라식 항
전을 선택하겠다는 뜻이다. <야만과 법은 같다>라는 이 문장을 어떻게 담론화 할 수 있을
까를 궁구(窮究)하던 그 밤에, 볼리바르와 체 게바라가 홀연히 나타났던 것이다. 적어도 내
생각에 야만과 법은 같다. 근대와 문명의 제도는 법으로 요약되고 근대와 자본에 억눌린 사
람들은 법에 상응하는 기제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근대는 근대법을 만들어서 자신 스스로
근대가 정당하며 근대는 지켜져야 할 지상 최대의 원리임을 강변하지만, 그걸 그대로 믿는
사람은 관식이 밖에 없다. 달리 말해볼까, 관식이여! 근대 제국주의와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
은 법이라는 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 반대편 주변부 민중들은 그 모순을 전복시킬 아무런
방법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주인과 노예의 모순 관계와 지배와 피지배의 비인간적 관계는
역전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바뀐다. 피압박 민중들은 이 역전과 재역전의 합법적인 기제를
가지고 있지 못함으로 법과는 다른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가장 극단적으로 법에
반대되는 기제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하여 법의 자리에 야만이 놓이는 것이다. 여기서 법과
야만은 같다라는 초논리적 문장이 성립된다. 윤리적으로는 법과 야만은 상치되지만 가치론
에서는 같은 자리에 놓인다. 나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나 탈식민의 신념은 바로 이 일관된
흐름에 놓여 있어서 현실적 고통과는 다르게 정신적으로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다. 아, 이런 엉망의 사유를 한갓 책상물림의 헛소리라고 하겠지? 두렵지는 않다. 그러나 그
역사의 교착점에서 일목요연한 자기, 아니 민족적 정체성과 지향점을 설정할 수 있었으니
그 얼마나 행복했던 것인가.
한 번만 더 은유의 상투성을 묵인하기로 한다면, '밤하늘에 별이 있고 가야할 길이
있는 우리는 행복하다'라는 헝가리 평원의 철학자가 토한 이 말과 위의 문장은 동렬항에 놓
여 있다. 우리의 문제가 어디 있으며 극복해야할 사안을 무엇이고, 주적(主賊)이 누구인가라
는 근원적 물음을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는 분명히 답을 하고 있기에 행복할 수 있었
다. 그 실천의 가시밭길은 험난하겠지만 모호한 세계사의 여정에 선명성이야말로 행복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것은 NL이 PD보다 선명했던 것과 같다. 또한 민족해방이라는 일편의
단심보다 민중민주라는 결코 간단치 않은 과제가 덜 선연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
간은 제각각 환시(幻視)와 착시를 가지고 있으므로 선명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
서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자본을 반인간주의의 화신으로, 정보생명과학 찬미자를 진보라
는 종교를 믿는 광신자라고 규정하고, 이 선명한 적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신념이어야 하므
로 논리의 칼날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않아야 한다.
세계화를 쉼 없이 반대하고 싶고 세계화를 미국의 음모라고 가열차게 공격하는 신
념은 신명을 동반해야 했다. 이 주적을 제국주의라고 해도 좋고, 신자유주의라고 해도 좋고,
두리뭉실하게 포스트모던이라고 해도 무방하며, 금융자본주의나 정보의 통제력이라고 해도
좋다. 이 교활하고 음흉하며 무자비한 자본과 권력을 비판하는 우리는 얼마나 신났던가. 해
야할 일이 있고 가야할 길이 있었다. 아주 선명한 적이 보였고 해체해야할 대상이 존재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미국 역시 제국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실체가 아니라고
하는 제국의 이론에서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묻지마, 다쳐"라는 불가지론이라면 기가 탁 막
힐 것은 뻔한 이치. 지금까지 남한의 비판적 지식인이나 운동가들은 세계화를 철저하게 반
대해 왔다. 세계화야말로 인간을 수탈하는 원흉이므로 이에 반대하는 유토피아 지향성의 그
림을 그리면서 그 이데올로기의 주권체제로서 민족국가를 수호하자는 일매진 주장을 펼쳐왔
다. 그러므로 민족이나 민중을 선연한 깃발에 써두고, 그 깃발을 들고 역사적 전망을 헤쳐
나가는 혁명의 전사였다. 나 역시 미미하지만 그랬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큰 변함이 없다.
그런 우리에게 세계화나 제국의 개념을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세계화나 자본의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인식과는 별개로 어려웠던 것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세계화의 현상
을 정직하게 인정하자고 하는 현실인식을 민족해방운동의 변절자로 낙인을 찍는 경우도 있
었다. 하지만 반세계화와 반제국주의는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한 틀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
다. 민족모순의 해체라는 역사적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일 이유가 있겠는가, 동지여.
바로 이 고통의 인식 속에 '제국'이 있다. 반세계화나 탈식민과는 다른 복합적인 제
국체제가 도래했다는 풍문을 이론으로 체계화한 것은 세계체제(world system)를 주장한 윌
러스타인이나 제국의 저자들만이 아니다. 많이 있었다. 남한에도 있고 일본이나 페루에도 있
었다. 우리가 그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의 역사 단계가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
하는 일보다 민족적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우선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
러므로 제국은 남한과 북한이 미완의 국민국가 체제에 놓여있으므로 그 과제를 먼저 실천해
야 한다고 믿는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믿고 싶지 않은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책의 논조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
만 우리에게 놓인 과제는, 아니 선택의 기점은 단 두 개뿐이다. 제국의 이론을 인식하고 수
용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다. 적어도 미국의 세계패권에서 있어서 제국주의와 제국
이론은 같다. 그 패권주의의 해법은 다르지만, 미국이 세계를 어떻게 지배하고 이끌어 가고
있는가 하는 부분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비록 제국의 저자들이 미국조차 제국을 통치하지
못한다고 말 하지만, 그것은 세계적인 문제일 뿐 미국에 종속상태에 놓여 있는 한국의 처지
는 달라지지 않는다. 제국주의 세계화이론은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지만 거대담론의 지적
폭력은 미스터 부시와 같은 그런 서투른 직설법으로 표현되지 않고 은밀하게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보시라. 부시라는 사람은 '미국의 정의 바깥에 있는 자는 미국의 적이다'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세계체제의 대권을 거머쥐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것을 제국주의의 속
성이라고 증오한다. 눈에 보이지 않게 철저하게, 무엇에게 통치 당하는지 모르게 하면서 철
저하게 통치하고, 제국의 체제에 일탈 부분이 생긴다면 완벽하게 무력으로 제압하는 거대한
초국가적 범지구적 질서가 바로 제국주의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거대서사의 담론의 핵심은 간단하다. <세계화의 바깥은 없다>라는 현상인식이
다. 어디서 많이 듣던 문장 아닌가. 회상도 필요하지 않다. 비난과 오해를 받으면서 지난 수
년간, 아니 그보다 더 전에 지식의 전사(戰士) 최원식 선생께서 해오던 말과 거의 다름이 없
지 않은가. 이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다고 본다. 세상을 읽는 더듬이는 꼭 영어로 표현되라
는 법은 없으니까. 이 말은 그러니까 안토니오 네그리나 마이클 하트가 독점적으로 발명한
개념이 아니라, 이미 지성사에서는 새로울 것도 없는 보편화된 문장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
서 이들 저자들의 공적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다. 이 거대담론의 전조(前兆)를 거대담론으로
체계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들은 인류사의 미래라는 전 세계인의 운명을
걸고 사유의 도박장에서 논증을 하는 것이니까 논리적 면책이 주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
다. 그리고 이 불안한 세계사의 미래를 예측하여 우주사 속에서 지구인이라는 대타의 존재
를 입증한 것으로도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다 아는 사실을 개념화하여 설득력 있게 논증해
나가는 그것이 인문학의 방법일진대 최원식 선생님이나 마이클 하트나 우리에게 실천적 난
처함을 선사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현상인식이 협박으로 들리고, 정치(精緻)
한 논리가 공포스러운 것은 우리의 고난이 규정한 인식의 한계일 수 있다. 그래서 세계화와
지구화가 사실임을 인지하면서도 완강하게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시대 자본과 신자유
주의를 주적(主賊)으로, 미국을 자본과 권력의 주인으로, 그에 신음하는 제3세계 민중으로
우리, 아니 나 자신을 설정해 두고 싶은 것은 패배의식이었다기보다 자기정체성의 대타의식
이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 주적이 없는 다원화한 사회에서 민족해방의 방략이나 책략이 혼
란스러워질 것이니 그 어찌 황당하지 않을까. 결국 우리의 문제로 환원한다.
그렇다면 이 제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양인들이 소수민족(ethnic)이라고 아무렇게
나 부르는 (우리)민족의 운명은 대체 어찌되는 셈인가. 제국에서 응당 바깥은 없으므로, 신
자유주의 우등생 남한은 또 제국의 모범생일 것이다. 완악스런 신자유주의의 명령에 충실했
던 것처럼 제국의 규준에 철저할 것이다. 그래서 남한은 21세기라는 미래의 인큐베이터에서
양육된 정형화한 모델로 세계사의 박물관에 화석으로 진열될 것이다. 이 자본과 제국의 하
수인이자 중간관리자인 국가가 있고 국가의 언어인 국가어가 있으며 국가를 구성하는 민족
이 있다. 그렇다면 국가어이면서 민족어인 한국어를 매체로 하는 문학의 운명은 과연 몽롱
한 감성의 성에서 화사한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관식이가 아니다. 그런 물음은
문학개론 시간에도 묻거나 답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민족문학은 세계사의 운명
바깥에 있지 않다!' 가령 우리가 국가어나 민족어를 사용하지 않고 세계어라고 자만하는 영
어를 사용하여 문학활동을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민족어이자 국가어인 한국어로 민족적
감성과 민족적 삶의 내용을 표현한다는 점에서는 자부심이 있어도 좋겠다. 그러나 그 민족
과 국가를 감싸고 있는 더 큰 제국은 이제, 국가라는 제도 자체의 틀을 허물어 버리고 있다.
민족문학의 전제인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이 흔들리므로 실체인 문학 역시 무사하지 못한 것
이다. 따라서 제국이라는 새로운 문학환경을 점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이
런 거대담론은 필요 없고 열심히 창작을 하고 비평을 하며, 분석을 하면 그 뿐 더 무엇이
필요하랴!'라고 말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는 필시 역전 앞 백치 관식이 친구일 것이다. 관식
이도 사람이니까 그 인격을 존중해서 인간주의적 평등을 선사하자. 너그럽게.
3.민족문학의 운명
또 다시 잊을 수 없는 물음, 21세기의 제국에서 민족문학은 무엇인가? 결국 모든
이데올로기는 자기의 문제로 환원한다. 제국이라는 거대 담론을 거부하던 이해하던 이론으
로만 존재해서는 안되고 제국 체제에서 우리와 나는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으로 환원
해야만 한다. 그리고 문학의 사업을 벌이고 있는 우리로서야 제국 체제가 한국의 문학과 무
슨 관계가 있는가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 역시 당연한 것. 문학을 산업으로 간주하는 자유
주의자들의 유연성을 마음껏 비웃으면서 문학을 사업으로 믿고 있는 신념의 진실은 여전히
찬란하다고 외쳐본다, 하늘 높이. 이런 사유 속에는 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이 개입하고 있
다. 즉, 언어예술로서의 보편성과 어떤 민족적 특수성이 교차하는 금색 비단옷을 떠올려 보
자. 야밤에 비단옷을 입고 제국의 성벽 아래를 서성거리는 방랑자, 반항아, 시드러운 한국의
문학도.
먼저 세계체제 또는 제국의 제일 원칙은 보편성이라는 점에 혐의를 두어보자. 이
블랙홀의 마력적 원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론은 없다. 공간과 영역을 초월하는 이 제국에
서 국경이라는 것은 허물어져야 할 성벽이다. 이런 제국에서 민족문학은 세계문학의 하위영
역이고, 세계문학은 대타인식 없이 제 스스로 자기정체성을 정립하여 보편영역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 제국에서 민족문학이 무슨 지위를 가지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귀납법을 써 보기
로 하자. ①세계문학은 존재한다. ②세계문학은 세계 모든 곳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언어예
술이다. ③각 국가의 문학과 각 민족의 문학과 각 지역의 문학은 세계문학의 한 부분이다.
자, 이렇게 하면 세계문학이 존재하는 것인가. 괴테가 1800년대에 이미 세계문학을 상정하고
그 개념을 정립하고자 애를 썼지만, 세계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세계문학은
불가능했다. 아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인류인 대중(multitude)은 제국이라는 새 체
제를 창출했으므로 세계라는 실체가 생긴 셈이다. 제국은 민족적 특수성을 말살한다고 공언
한 적이 없다. 반대로 각 민족적 특수성과 문화적 개별성이야말로 제국을 구성하는 요소라
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서그럽게 이 말을 믿을 수는 없다. 문학이나 문화예술에서 각 민족
적 특수성은 언제 어디서나 고귀한 가치다. 그러므로 항상 찬미를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국
민국가가 그렇듯, 문학이나 예술 역시 그 진실과 권위를 보편문학이나 보편예술과 공유해야
만 한다. 공유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세계화되었고 진보되었다는 신화를 해체하지 않는 한,
민족문학은 무사할 수 없다. 그래도 좋은가?
지난 시절에 아니 아직까지는, 우리에게 국가문학이나 민족문학이 최상의 개념이었
다. 다른 문학은 국가나 민족에 대등한 감정 체계로서 동렬항의 언어예술이었을 뿐이다. 다
른 모든 문학을 다 합쳐도 민족문학이라는 절대공간 속에서는 한갓 문학일 뿐, 절대성을 훼
손하지는 못했다. 민족이 있다는 것을 문학으로 증명해야 하던 시난고난한 시절도 있었으니
까, 이것은 식민지를 겪은 민족의 일반적인 현상이리라. 그래서 우리는 국가문학이나 민족문
학의 총합을 잠정적으로 문학이라고 하면서 문학 앞의 전제를 생략함으로써, 보편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세계화의 시대에 보편성은 그처럼 은밀하게 표시될 필요가 없고, 당연
한 세계법으로 지켜야할 전범(典範)이므로 보편문학으로서의 세계문학이 있어야 한다. 그 보
편문학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권력 안에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 새로운 제국이라면 앞
에서 내가 설정한 논증법은 바뀌어야 한다, 다음과 같이. ①세계문학은 보편적으로 존재한
다. ②세계문학은 제국의 모든 곳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언어예술이다. ③각 국가나 지역은
제국의 중간관리 영역으로써 제국의 영토에 속한다. 이렇게 되면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음
악이나 미술처럼 전세계적으로 유사한 매체를 사용하는 보편예술로 전향하는 셈이다. 원래
문학은 그 민족의 역사와 사상 감정의 총체로써 보편성 이전에 특수성을 원리로 하는 유별
난 예술형식이다. 유별난 만큼 민족단위 생존체제에서는 그 구성원의 자기정체성을 확인시
켜주고, 감정을 교육하며, 삶을 사육하고, 집단의식을 가지게 해주는 카리스마로 기능했다.
그런데 보편예술의 영역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게 되면 그 진공의 영역에서는 영역별 특수성
이 허물어지므로 지금까지 민족문학이 지키고 있던 고유한 부분이 상당히 훼손될 수밖에 없
다.
따라서 민족문학이라는 권위는, 그리고 동시에 고난은 이제 제국의 세계문학이라는
영역과 귄위를 공유해야 한다. 이 때 제기되는 필살적 물음, <한국어로 표기된 문학의 운명
은 무엇인가?>다. 만약 세계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실용주의자들은 한국어를 포기하고 세
계어를 습득해서 그 언어로 한국인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자고 유혹할 것이다. 맞는 것 같
다. 이 기능주의자들에게 호메이니의 원리를 가르치자. 아무리 제국이라도 기능만이 작동하
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기능이면서 동시에 정신이다. 그리고 역사이며 자기정체성의 지주
(支柱)다. 민족문학이라는 것은 한국어와 한국인과 한국이라는 구체적, 그러나 제국의 언덕
에서 보면, 반봉건적(半封建的)인 것 같은 개념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이제, 한국문학의
미시적 분석이나 진단이 아니라 쓸데없는 것처럼 보였던 거시적 담론으로 흘러들어 와 버렸
다. 그러니까 마의 산에서 유리 바위를 굴리고 있는 나에게 돌아오는 끊임없는 되물음은 단
하나, '21세기의 저 광포한 제국의 바다에서 민족문학은 살아남을 것인가'로 환원한다. 그리
고 '한국문학이라는 보편적 간판으로 바꾸어서 아슬아슬한 항해를 계속할 것인가?'로 재환원
한다. 답은 하나다. 조국이 하나인 것처럼 답도 하나다. 어찌 우리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을
포기할 수 있으련가. 아, 그람시의 나라에서 한 줄기 빛으로 글을 쓰는 안토니오 네그리여,
당신은 왜 우리에게 사유의 고통을 선물로 주고 사라지려는가, 정녕,
민족문학은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신의 문제다. 한국문학이라고
하지 않고 민족문학이라고 쓰는 순간, 이미 피할 수 없는 의지와 정신의 영역에 들어서 있
다. 만약 우리가 한국문학이라고 바꾸고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한 부분으로써 소수민족의
문학(한 민족국가의 문학)이라고 인정한다면 문제는 풀린다. 거대한 제국의 그늘에서, 한국
인의 문학이라는 고유영역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이 또한 생각해 보아야 할 과
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문학이 국가문학이라는 개념을 내포한다면 미완의 국민국가
체제를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한국문학이라고 쓸 수는 없다. 미국문학 칠레문학 아일
랜드문학 이집트문학 뉴질랜드 문학과 같은 보편성을 그대로 대입하여 한국문학이라고 하기
에 우리는 아직 할 일이 많다. 그러므로 수 천 번을 되뇌어도 사립문 바깥 에정지 뒤란의
헛간에 내다버릴 수 없는 말, <민족문학>. 학문의 세계나 지식의 세계에서 무엇을 지켜야
한다라는 철없는 욕망은 약삭빠른 사람들의 가가대소(呵呵大笑)를 자아낼지라도 우리의 완
강한 고집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과학과 기술에서는 규준이 다르면 안되고 어디서나 통용되
는 원리가 있어야 한다. 그걸 과학이라고 하고 논리를 보태면 학문이라고 한다. 자, 채찍을
더하자. '민족문학'이 학문인가. 학문일 수 있다. 그러나 문학 자체의 예술성과 민족이라는
역사성은 '민족문학'이 학문과 논리만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선험적으로 규정해 두었다. 바
로 문학이다.
적어도 우리가 하는 것은 학문이거나 연구를 초월한 신념인 것이다.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니다. 시시하다거나 엉성하다거나 세련되지 못했다거나 하는 비난이 힘을 쓰지 못하
는 신념의 영역이다. 물론 신념의 요소도 있고 논리의 부분도 있겠지만, 신념이 개입하고 있
으니 형이하학적이라고 욕을 먹을 수는 있지만, 그에 정비례하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다. 비
난을 감수하고 민족문학에 머물 것인가, 과학의 우산 아래 한국문학으로 전향할 것인가? 전
향자는 나오시라. 민족문학에 조종(弔鐘)을 울리고 한국문학에 과학의 복음을 전하라. 아직
우리는 전향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적 과제 국민국가와 세계체제라는 숙제를 풀지 못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문학이라는 개념이 틀려서가 아니라 역사적 단계의 문제다. 역사
가 개입하고 발전인지 혼돈인지 모르는 역사의 길을 걸어가노라면 어느 단계의 역사적 진실
이 있게 마련인데, 그 현 단계는 우리에게 아직은 신념이 필요함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다
시 한 마디, 우리 아직 전향할 수 없다! 수 십 년을 옥에서 보냈던 혁명 전사들의 눈빛이
아직 번쩍이며 제국의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신념을 지키고 있듯이 우리는 아직 전향할
수 없다!
4.새로운 조국, 새로운 문학
우리의 조국은 어디인가? <조국은 하나다>의 그 하나 뿐인 조국은 어디 있는가?
국가권력이 우리를 지켜주고, 때로는 수탈하던 그 고전적 조국은 죽어 버렸는가? 제국에서
휘돌아 민족문학으로 갔던 사유의 길머리는 마침내 전혀 새로운 화두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
으니 그것은 '우리 조국은 어디인가?'라는 다소 비장한 주제였다. 이것은 단정하건대 내 탓
이 아니다. 우리 문학의 조국이 민족이라면 우리 생물학적 존재의 조국은 그리고 정치경제
적 존재의 조국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할 것이기에 이 순환적 선회는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
다. '조국은 하나다'라고 시인 김남주가 절규한 것은 통일된 민족국가를 뜻했다. 그에게 제국
주의에 능욕 당하고 자본주의에 찢겨버린 상상의 조국은 아주 처연할 정도로 선명했다. 그
시대에는 비록 미완이지만 찾아야 할 조국이 있었고 건설해야할 국가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김남주라는 혁명전사를 통하여 자본이라는 잔인하면서 냉갈령스런 주인과 근대라는
허황한 신화를 해체하고 음모까지 드러낸 세계사의 나신(裸身)을 시를 통해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비장한 지점에서 <아와 비아의 투쟁>과 <조국은 하나다>라는 민족사의
정수(精髓)가 추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헝클머리 마이클 하트에 따르면 그런 조국은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이런 황당할데가--. 우리는 민족국가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자궁 속의 영아는
제국이라는 더 큰 조국에 흡수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세금을 걷고, 영토를 근거지
로 하는 조국 대신 상상의 권력들이 모여 실체를 형성하는 제국에서는 인간 모두가 제국의
신민(臣民)이라는 것이 아닌가? 아니 새로운 인식의 대중(大衆)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다. 이 두 저자들은 낙관적인 전망으로 미래사를 예고하면서 그 대중의 정치적 각성을 촉구
했다. 대중은 제국의 압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인식하여야 하며, 세계시민(globalcitizen)으
로 연대하면서 제국의 신경망을 교란하거나 붕괴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분명히 좋은 말이다.
때로는 제국의 황궁을 향하여 궁성요배를 하고 제국의 법에 따라야 하는 신민(臣民)이면서
때로는 이 제국의 부당한 인간주의에 항거하는 깨어 있는 대중이어야 한다는 이 말은 맞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민족적 과제라고 믿었던 분단체제의 극복이나 내재적 갈등 해결의 과정
자체가 세계시민으로 대중이 가져야할 과제와 상치된다. 맞는가, 문학의 동지여?
민족의 거대서사와 세계의 거대서사는 다르다. 달라야 한다. 그런데 민족의 서사를
팽개쳐두고 겨트로이 제국의 서사만 추종한다면, 지난 시절 마칼마람 맞으면 이루고자 했던
그 선연한 민족해방, 반제반봉건의 과제는 필요 없어졌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반제반봉건
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과제는 전혀 변한 것이 없다. 그런데 세계는 변해서 한 국가의 민중
이면서 제국의 시민이어야 하는 역사의 무대가 펼쳐졌다. 이제 인간은 변신도 능수능란해야
하게 생겼으니, 희극 배우의 가면 하나를 더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시민
이면서 한국의 국민이라는 이중의 역할을 해야하는 피에로임을 괴롭게 생각하자. 바야흐로
눈에 보이는 실체의 조국인 민족국가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권력인 제국이라는 두 개
의 조국이 생긴 것이다. 이 제국의 조국은 숙성하기도 전에 작동하는 신기한 마력이 있어서
이제 우리를 올가미에 얽어 넣어 옥죄고 있다. 과거의 노동자가 잉여가치를 수탈 당하던 것
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악력(握力)으로 삶 전체를 완전히 제압하는 초법적인 대권을 행사하는
무서운 조국이 하나 더 생겼다. 기뻐해야 할까?
나는 종종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을 마이크로소트프사의 빌게이츠가 장악하
고 있다고 말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실이 그러니까. 미국이라는
한 국민국가가 마이크로소트프사를 통제하고 있는가? 아니다. 미국이라는 고도로 발달한 국
민국가는 세금이나 노동법 또는 반독점법으로 마이크로소트프사를 통제한다. 하지만, 그 초
국적 회사가 어떤 프로세서(processor)를 개발해서 세계에 공급하는가를 통제하지는 못한다.
인텔이 프로세서를 만들어 어떤 방식으로 정보가 소통되어야 하는가의 규준을 정해주고 마
이크로소프트가 보편화하면, 세계가 따라간다. 세계의 대중들은 이제 국가의 명령보다 빌게
이츠의 명령에 충실하다. 그러면서 자기가 누구의 관리와 통제를 받고 있는가를 까맣게 잊
고 있다.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것이 현실이다. 국가단위로 자본과 정보가 움직이지 않
고 거대한 체제와 제도로 움직이는 것, 이것이 세계체제의 본질 또는 제국의 실체다. 이 권
력의 중심은 공간적으로 미국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 전 지구에 걸쳐 존재한
다. 이 새로운 세계체제는 국가의 영역을 간단히 허물어 버린다. 이 공간에 고전적 개념의
영토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과 주변의 상호관계에서 중심 자체가 주변이고 주변이 중심의
기능을 하는 경우도 생긴다. 한편 중심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어 탈중심적인 것처럼 연출하
기 때문에 영토와 같은 공간의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21세기의 인간들은 자기가
속한 국가의 통제를 받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 세계(제국이라고 해도 좋겠다)의 통제를 받으
면서 살아간다. 이것은 사실이다. 제국은 아니라도 새로운 거대한 권력이 숙성되고 있음을
우리는 감지하고 있다. 두 개의 조국이 생긴 셈이다. 다시 묻는다, 심연의 내 자신에게. 어떤
조국에 봉사할 것인가? 우리의 조국은 어디 있는가?
이 물음은 아주 어리석다. 21세기의 인류에게 봉사해야할 조국은 없으니까. 단지 생
존할 뿐, 자기가 속한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은 감정에서
뿐인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세계화라는 신을 믿는 철없는 군중들과 아무런 생각 없이 현실
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거듭 말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자기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 국가이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 세계라
는 더 큰 체제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또한 자기를 고용한 것이 한국의 민족자본이 아
니라 세계의 초국적 자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점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이
자본과 고용의 본질적 관계는 구조적으로 전 세계에 동일한 현상으로 관철되니까. 조국이
가뭇없이 사라졌다고 말하면서 이제는 제국이나 세계체제에 봉사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피
에로, 연극의 단역으로 출연하여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사라지는 피에로
의 희비극에 해당한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 거대한 서사는 이제 수사법으로만 존재한
다. 그리고 정치가들의 권모와 술수에 등장하는 속담일 뿐이다. 누가 조국을 사라지게 만들
었단 말인가. 자 명치 끝에 칼을 들이댄다. 이 사라져가는 조국의 개념을 잉걸불로 만들어
활활 타오르게 해야할 책무가 작가들에게 있다. 다시 말해서 없어져버린 조국과 세계시민의
다문화적인 환경과 다원화한 사회나 인간을 그리는 것 이전에 민족적 의무를 방기해서는 안
된다. 21세기의 한국인이 그렇듯 작가는 대중이면서 세계시민이고 또 민중이면서 민족의 구
성원이다. 무엇을 우선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민족민중 아닌가.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민
족과 민중이면서 대중이어야 하는 이 인식과 실천의 과제는 결코 간단치 않다.
민족과 민중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제국에서 말하는 대
중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대중(multitude)은 제국을 낳았
다'라고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말했다. 이 대중 개념을 내세우는 그들은 근대의
권력에 대항하는 대중의 해방운동이 제국이라는 예정된 길을 준비했다고 진단했다. 이렇게
되면 세계화는 자본의 전 지구적 지배의 결과가 아니라, 정반대로 계급투쟁의 산물이 된다.
그런 면이 있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1900년대 초의 슬로건은 이미 생존이
국가단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 투쟁의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하
여간 '대중은 제국을 잉태했고 대중은 제국의 모순을 허문다'라는 이 상생(相生)의 원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달리 말해서 이 제국의 이론을 바라보는 각도가 국가와
민족마다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명석한 저자들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대중
의 대안세력으로, 또 한국의 민중을 대안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로 상정했다. 그러매 그들의
거대서사의 안목이 대단한 것인가, 남한 사회의 좁은 세계관을 가진 서생의 눈이 부정확한
것인가?
사실 나는 어리둥절했다. 한국의 반자본, 반신자유주의 자닝한 노동운동과 민중투쟁
이 세계사의 새로운 움과 싹이라는 그들의 진단을 앞에 놓고, 그랬던가라는 자문을 던져야
하는 판세이므로 혼란은 더해간다. 세계사적 과정에서 보면 대중의 자본과 제국에 대한 저
항일 수 있지만 막판에 몰린 주변부의 민중들이 수탈을 참다 못해서 벌인 생존투쟁이 제국
해체의 대안세력이라는 점에 이르러서는 아연할 뿐이다. 나는 그들의 진단이 세계사라는 무
대에서는 옳다고 보지만 한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후와 본말을 전도시킬 위험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우리가 지금 현 단계 우리의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제국에서 제시한 것처럼 19세기와 20세기에 걸린 노동자와 민중들의 각다
분한 투쟁의 결과가 세계화라는 점에서 우리는 난감하다. 그리고 세계화의 문제점에도 불구
하고 거부할 수 없다는 이 현실 역시 처량하다. 그 대안을 제출해서 세계화라는 무시무시한
제국의 힘을 정의와 진실로 바꿀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혼돈 그 자체
일 것이다. 세계화는 상품이나 문화의 세계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세계체제가 작동하는
또는 제국이 작동하는 표현방식과 소통형식이 필연적이다. 이 필연성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
다면 제국의 지식경찰은 이것을 제거하려고 할 것은 당연하다.
자본은 이제 금융산업에서 정보산업으로 옮겨가면서 언어체계를 통제하는 고도의
지적인 경찰력을 행사한다. 정보와 언어는 권력이며 주권이다. 그래서 언어는 중요한 것.
자본의 이동과 폭발의 과정에서 아레기(Ahreggi)가 말한 것처럼 공간단위로 이동하는 속성
도 있지만, 영역 단위로 이동하기도 한다. 즉 토지자본이나 상업자본에서 금융자본으로 거기
서 다시 정보자본으로 확산되었고 이 정보는 노동과 자본이 새롭게 만나는 형식이기에 우리
는 주목해야 한다. 자본이 정보와 통신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이 열쇠를 언어가 쥐고 있으므
로 이것은 우리처럼 민족어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문제다. 결국 우리의 문제다.
어떤 언어를 선택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이것은 논리의 비약으로 보이지만 논리
의 환원일 뿐이니 의심의 눈총을 거두시라. 어떤 담론과 서사는 그 자체로 중요해서 연구나
분석을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로 환원하게 마련이다. 이 역시 그랬다. '제국'이 인류사의 대서사를 예고
한다는 찬사나, 제국이라는 명명밖에는 새로울 것이 없는 지식의 통조림이라는 비난과는 전
혀 다른 곳에 우리 자신의 문제가 놓여 있다. 이 저서는 사유의 타자일 뿐이다. 우리 민족사
의 진실과 미래를 위해서 타자로 설정하여 우리 사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중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늑대의 눈빛이 달빛에 번뜩이면서, 엄습하는 생각, 우리
자신은 무엇인가?
민족문학의 사유는 마침내 언어라는 너무나도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지점으로 되돌
아 왔다. 문학은 결코 역사나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문학과 세계가 단 하나의
대원리 속에서 용해되고 있다는 일원론이야말로 우리가 왜 한국문학이라고 하지 않고 민족
문학이라고 하는가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다. 반제, 반봉건, 탈식민, 탈중심, 분단체제 극복
의 통일민족국가의 완성이라는 해묵은 숙제에 마침내 반제국이라는 또 다른 과제가 덧붙여
지는 21세기다. 민족과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을 거두지 않는 한 이러한 민족적 서사는 강산
이 변해도 바뀔 수 없는 주제임을 잊어서는 못쓴다. 나는 이 거대서사를 직접 응전할 구체
적인 방식은 민족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고 믿는다. 작가들은 민족의 생존이 상징적으
로 드러나는 언어라는 프리즘으로 세상을 읽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언어, 그렇다. 언어의
문제, 현명한 임금 세종의 고민이 곧 우리의 사유인 것이며 정약용의 반정이 곧 탈식민의
저항운동일 것이매 한국어라는 역사의 제단에 우리 운명의 신탁을 놓아보자. 언어의 문제는
이 글에 이어서 생각하고 쓸 것이므로 여기서 접어 두기로 하고, 새로운 조국의 출현이라는
깊은 사유의 늪에 가득한 안개를 걷어내면서 글을 마친다. 몽골리안 원주민의 숨결이 들리
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채플힐. 매일같이 15-501 도로를 달리면서 내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의
물음에 답할 길이 없어 답답했던 지음 '제국'이라는 담론을 만났고 그 저자 마이클 하트의
거대한 서사가 답답함을 잠시 멈추게 했으니 감사한다, '제국'이여. 그리고 혼란을 선사했으
니 미워한다, '제국'이여.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는 깊어 가는데 희부연 새벽 숲 속에 안개가
피어오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