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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키스패너
어둠의 한구석에 못 박힌 듯 숨을 죽이고, 십자가를 움켜잡듯 한 자루의 멍키스패너를 움켜쥐고 서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 철새들은 계절이 바뀌면 왔던 곳으로 날개를 파닥거리고, 연어들도 때가 되면 본능의 시침을 따라 처음 떠났던 천으로 비늘을 반짝이며 뛰어오른다. 어둠 속에서 연어의 비늘처럼 빛을 뿜는 멍키스패너 한 자루를 움켜쥐고 서서 당신은 생각한다. 공구함 속에 들어있어야 할 이 13인치 짜리 멍키스패너가 왜 여기 있느냐고. 그리고 당신은 생각해보는 것이다. 한 마리의 연어처럼 이 멍키스패너도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이 낯선 공간의 컴컴한 입자 속에 방부 처리된 한 마리의 쓸쓸한 짐승처럼 고정된 당신. 당신은 방금 청소를 끝낸 리놀륨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암모니아성 표면제의 냄새를 들이킨다. 두피를 수만 개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알싸함을 느끼면, 무엇이 이곳까지 자신을 내밀어 버렸을까, 냉정하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내 후각은 쉬이 지치고 이성은 어둠에 길을 내준다.
가죽 장갑을 낀 손에 힘을 넣으면 뭉개지듯 떠오르는 과거. 아내와 보이지 않는 조그만 균열이 시작된 것은 정확히 언제부터였을까. 더 오래된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 당신에겐 손의 아귀에 넣을 힘이 모자라다. 몇 달 전으로만 거슬러올라가기 위해 아귀의 힘을 받는 멍키스패너. 거슬러올라가면 만나는 강아지를 대하는 듯한 아들의 눈, 자신을 피하려는 듯 방문을 걸어 잠근 딸의 뒷모습. 그것들이 밤 한가운데를 관통해 가는 버스의 차창처럼 스쳐지나간다. 그들이 쓰던 워크맨을 버리듯 당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생각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당신이 예정 없이 일찍 집에 들어왔던 날이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지만 인기척이 없어 우연히 딸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대학 4학년인 딸은 핑크빛 헤드셋을 쓰고 음악을 들으며 발가벗은 채 춤을 추고 있었다. 화상 채팅을 하고 있던 딸은 모니터에 등장한 낯선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딸이 전원이 끊긴 사이보그처럼 뚝 춤을 멈추었다. 당신은 딸을 밀치고 모니터 위의 카메라를 집어 던졌다.
아빠가 뭔데?
딸이 대들었고 실랑이 끝에 당신은 딸을 할퀴고 말았다.
으응. 엄마한테 하려던 짓을 나한테 하겠다는 거지?
딸은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긴지 아는 듯했다. 당신은 딸을 거실로 내몰았다. 딸은 여전히 헤드셋을 낀 상태에서 거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딸의 얼굴에는 당신에게 할퀸 핏자국이 선연했다. 분함을 참지 못한 딸이 하도 악을 쓰는 바람에 당신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딸이 외박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그 날 이후부터였다. 며칠 뒤 딸이 깊게 캡을 눌러 쓰고 돌아왔을 때는 아내와의 균열이 더욱 커져 가는 것을 당신은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학원 가겠다는 애, 겨우 달래 취직 준비시켰더니 이게 뭐예요? 이래 가지고 어디 취직이나 되겠어요?
아내는 당신을 책망하며 핸드볼 공을 잡듯 딸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당신에게 보여주었다. 딸의 얼굴은 생각보다 깊게 패여 있었다. 그 날부터 딸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당신에게 수술비를 내놓으라며 말없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딸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당신을 보려하지 않았다. 당신이 5년 전 연장벨트를 어깨에 들쳐 매고 현장을 나서던 시간과 한치의 차이도 없는 시간에 집을 나서면 그제야 딸은 방에서 나왔다. 밥을 챙겨먹고 학교 친구들과 전화로 수다를 떨거나 AFN방송을 따라 혀를 굴리다보면 당신이 돌아올 시간이 된다. 딸은 잽싸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다시 도어락을 톡 잠갔다.
너 정말 학교에 안 갈 거야?
더 이상은 아내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딸에게 말했다.
얼굴이 이래 가지고 어디 밖에 나가겠어?
딸이 대꾸하자 당신은 당신이 아끼던 그 빨간 공구함을 들고 딸의 방문 앞에 섰다. 당신은 그러지 말아야 했다. 그게 딸의 기를 제압하는 것도, 아내 편을 드는 것도, 아내 앞에서 당신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당신은 의식할 수 없었겠지만, 나는 그것이 아내에 대한 간접적인 시위라는 것을 눈치챘다.
너 엄마 말 안들을 거야?
당신이 소리쳤다. 이렇게 하면 당신과 아내의 보이지 않는 균열을 일시적으로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때론 공동의 적이 나타나 적막한 안개가 끼인 듯한 두 사람 사이를 잠시나마 가까운 한 팀이 되게 만들 때도 있다. 그러나 아빠가 지금 엄마를 위하는 척 하고 있는 것은 엄마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것임을 딸도 알고 있었지. 늦가을 바람에 맴을 도는 땅바닥의 나뭇잎들처럼 엄마에겐 변화가 일고 있다. 그것을 아빠도 감지하기 시작했다. 단지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아빠가 갑자기 전에 없이 난폭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엄마 속의 나뭇잎들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점점 부양하고 있는 모습을 눈치채게 된 이후부터가 아니었을까.
주말이면 온 가족이 충북 할머니 집에 갔다. 당신의 아내는 시어머니의 집터에 새로 전원 주택을 지어주었고 주위에 텃밭을 일구었다. 네 식구는 채소를 가꾸거나 당신 가족의 별장이 되다싶은 그 집에서 주말을 보내곤 했다. 구청 사회복지관 상담사 일을 끝내고 퇴근한 아내가 어느 날부터 폐유 수거를 하기 시작했다. 달달달달, 아내는 카트를 끌고 어두운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당신은 그저 아내의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내는 밤마다 생맥주집, 튀김집, 양념통닭집, 빵집, 패스트푸드 점 등에서 내놓은 두 세 개의 폐유통을 주워 왔다. 한꺼번에 가져오기 무거워서 하나를 집에 가져다 놓고 또 다른 하나를 처음 장소에서 싣고 왔다. 제비가 짚을 물어 나르듯 모은 폐유통은 마당에, 그리고 지하실에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일정하게 쌓이면 무공해비누 제조업자가 그것들을 한꺼번에 가져갔다. 한 통에 4천 원 씩, 상태가 좋은 것은 5천 원이었다.
폐유를 줍다보면 사람 양심을 알 수 있더라구요. 어떤 집은 3일 마다 한번씩 내놓는 집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이 지나도 안 내놓는 집이 있어요, 참. 패스트푸드 점 같은 대형업소일수록 더 안 내 놔요. 비누도 만들기 힘든 폐유죠. 잘 사는 사람들이 더 지독하다는 사실을 실감하겠더라구요.
폐유로 인생의 이면을 말할 줄 아는 아내를 2층 남자는 존경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집 2층 독채에 전세를 사는 남자는 아내와 가끔 2층 현관 앞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혼자 사는 30대 초반의 남자는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다. 남자답지 않게 깐깐하고 알뜰했다. 보통은 공과금이나 집 관리 차원의 사소한 것 때문에 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당신은 가게문을 닫고 돌아오는 길에 자주 목격했다. 그러다 웰빙이나 행정 수도 이전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며칠 전 저녁에도 아내는 2층에서 남자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당신이 대문에 들어서자, 어머! 얘네 아빠 왔네, 하며 아내가 황급히 내려오던 것을 목격했다.
투 잡스 시대인데요, 좋죠. 부녀자를 찌르는 흉악범이 설쳐대 저도 혼자 다니기 무서운데 든든하구요.
어느 날 2층 남자가 자신도 퇴근 후에 폐유 수거를 해보겠다고 하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차가 없는 2층 남자는 카트를 끌고 아내와 함께 밤 10시쯤부터 폐유 수거를 떠나는 때가 많았다. 가게들이 문을 닫는 시간에 다 쓴 기름을 내놓기 때문에 새벽 2시가 넘어 돌아오기도 했다. 폐유가 많아 카트가 더 필요할 때는 아내는 당신을 부르지 않고 공중전화로 딸을 불렀다. 아들은 고3이라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은 상가와 이어져 있다. 상가 주인들은 밤늦게 아내와 2층 남자가 폐유를 수거해 오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상가 사람들이 수근대는 듯한 소리가 한밤중 당신의 귀에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몇 푼 안 되는 폐유를 주우려고 잠도 자지 않고 저 청승이라고. 아내를 저 지경으로 만드는 게 당신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자격지심. 그러나 당신은 아내를 말릴 수 없었다.
당신 가게만으로는 당신 쓰기도 힘들잖아요.
그러나 폐유를 주우러 다녀야 할 만큼 아내는 가난하지는 않았다. 단지 부지런하고 수완이 당신보다 나을 뿐이었다.
아내는 어느 날 좌골신경통을 호소하게 된다. 2층 남자는 자신이 다니던 모래내에 있는 카이로프랙틱 치료원을 한군데 소개해준다. 아내는 멀지만 근무시간을 쪼개 그 치료원을 다니기 시작한다.
통증이 거짓말처럼 가셨어요.
아내가 말한다.
네. 그런데 저…… 특수치료라는 것을 받으신 거예요?
2층 남자가 묻자 당신의 아내는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던데…… 원장이 직접 해주셨어요?
아니. 거기 직원이 있던데요.
2층 남자도 원장이 치료기 특허 일로 공장에 가고 없을 때 부득이 하게 그 젊은 직원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치료원은 한낮에는 사람들이 뜸했다. 2층 남자는 회사 점심 시간을 이용해 신촌 역에서 버스를 타고 모래내에 가서 치료를 받곤 했다. 한낮에는 원장도 자리를 비우는 때가 빈번해졌다. 2층 남자는 젊은 치료사와 단 둘이 있을 때가 많았다.
허리나 골반을 교정해도 좌골신경통이 낫지 않은 경우가 있어요. 그럴 경우는 미골을 교정하는 특수치료를 실시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치료사는 주방에서 쓰는 비닐장갑을 오른손에 끼었다. 그리고 바셀린로션을 장갑에 듬뿍 발랐다. 입을 아- 하고 벌리세요. 바지와 속옷이 둔부의 굴곡이 끝나는 곳까지 내려간 항문 사이로 가운뎃손가락이 들어왔다. 치료사는 호흡을 조절시키며 약 5분간 미골을 들어올리듯 압박시켰다.
기분이 약간 이상하실 거예요. 그런데도 특수치료만 받으러 오는 아줌마들도 있다니깐요.
비닐 장갑을 뒤집어 휴지통에 버리며 치료사가 말했다. 2층 남자는 미골 교정만 받으러 온다는 그 아줌마들 속에 당신의 아내가 끼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골 교정을 받는 사람들 중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식욕이 돋고 성욕이 갑자기 왕성해졌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교정 후에 건강해졌다는 증거죠.
치료사는 다시 한번 미골교정의 장점을 말하고 남자에게 10회분의 특수치료 티켓을 건넸다. 2층 남자와 아내의 대화 중 당신은 이 치료원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 토요일 밤에 폐유가 가장 많이 나온다며 아내가 가족 모두가 떠났던 주말 나들이를 가지 않기 시작한 때도 그 즈음이었다. 당신도 목재와 합판을 취급하는 가게의 문을 닫고 낮에 그 치료원에 가보았다. 당신이 갔던 한낮에도 그 치료원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 젊은 치료사만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그 시각에 아내가 치료사에게 미골 교정을 받고 있는 생각을 하자 다른 수컷에 대한 불분명한 야성의 감각 하나가 당신의 척추를 타고 흘렀을 것이다. 카이로프랙틱은 힘이 많이 들어가죠. 그래서 헬스클럽을 다녀요. 당신을 안아 드롭교정대 위에 힘껏 떨어뜨리며 미혼인 30대 중반의 치료사가 말했다. 환자와 친밀감이 치료의 관건이라고 말하며 치료 도중 최대한 편안하게 대하는 치료사. 그러나 치료사는 원장과의 치료방식을 놓고 보이지 않는 불화가 있는 것 같았다. 치료사는 지나가는 말로 곧 독립을 하게 된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개업한 곳으로 치료를 받으러 오라고 당신에게 말했다. 그러자 당신은 어디로 가게 되느냐고 물었다. 아직은 자금이 딸려 강남의 길목 좋은 곳을 물색만 하고 있는 중이죠.
아내가 현재 거주 중인 신사동 집말고 아내 명의의 총신대 근방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열흘 뒤였다. 그것은 당신이 상관할 바가 못되었다. 그 집은 바지런하고 수완 좋은 아내가 구입한 것이었으니까. 아내는 당신보다 앞서서 무슨 일이든 벌리곤 했으니까. 바지런하던 아내가 더욱 바지런해졌다고 느껴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당신이 더 이상 고층 건물의 철골조 위에 올라가지 못했던 무렵부터였지 않을까. 당신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체조선수가 평형대 위를 걷듯 아무렇지도 않게 보 위를 걸었었다. 당신도 더 이상은 일을 못 하잖아요. 저라도 이렇게 않으면 어떡하겠어요. 딸애도 내년이면 대학을 가는데…… 아내는 복지관 일을 시작하며 말했다.
아내가 총신대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을 때. 당신은 그저 또 아내가 무슨 일을 벌리는 모양이다, 아내에게는 늘 운이 좋았으니까 눈덩이 굴리듯 또 한몫을 불리겠지, 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이 모래내에 갔을 때, 그 치료사가 그만 두었다고 원장이 말했다. 젊은 친구들은 제가 고안한 드롭식 교정 방법을 구닥다리라고 말해요. 카이로프랙틱이라면 최신 수입 기기를 이용해 겉멋을 들여야 하는 미국에서 건너온 의술이라고만 생각하는데, 동양에서도 일찍이 있었죠. 일본의 균정술, 중국의 추나요법. 그것들도 제가 20여 년 간 개발한 드롭식 요법에 비하면 솜방망이 같은 것이죠. 그렇게 말하며 원장은 호랑이 새끼를 기른 꼴이라며 그 친구가 개원한 곳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때 당신 휴대폰으로 화살이 꽂히듯 문자 메시지가 하나 날아와 박혔다. 모래내 미스터 민입니다. 압구정역에서 신사초등학교 방향에 새 단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용 바랍니다. 치료사가 자신을 찾았던 고객들을 신장 개업한 곳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고객관리 차원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날린 문자 메시지였다. 그 순간 당신은 아내가 대출을 받은 것은 신장 개업한 이 치료원 때문이라고 넘겨짚게 되었다. 젊지만 강남에 치료원을 낼 자금이 부족한 치료사와 굴릴 수 있는 돈은 있지만 당신과 감정적 육체적인 면에서 오랫동안 소원해진 아내. 궁합이 잘 맞아떨어지는 상상이었다. 이번 건은 투자일까, 기증일까. 그것은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은 주말에 시골에 가지 않았다.
치료원은 압구정역과 신사초등학교 중간에 위치한 네거리에 있었다. 초등학교 앞 주택가의 당신 집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평생 네 번 정도 밖에 걸치지 않았을 그 검은 정장을 꺼냈다. 흰 셔츠에 타이를 메고 선글라스를 끼고 전철역에서 가까운 그 카페테리아에 앉아 있었다. 창가의 스툴에 걸터앉아 당신이 이름도 외우기 힘든 외국어로 된 테이크아웃 용기에 빨대를 꽂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너편 건물 2층에서 착 달라붙은 청바지를 입은 아내가 화판을 하나 들고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것을 어디에 걸까 머리를 갸우뚱해보고 있는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새로 들인 척추견인기를 풀고 어질러진 종이 상자들을 정리하다 아내 뒤에 나타난 치료사가 보였다.
당신의 상상은 맞았다. 그것을 확인하자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얼마 전부터 아내는 2층 남자와 함께 다니지 않았다. 아내는 깜찍한 스쿠터를 샀다. 축구공을 반으로 잘라놓은 듯한 감청색 헬멧을 쓰고 스쿠터에 오른 아내는 폐유를 수거하러 밤 속으로 미끄러져 갔다. 아내가 한밤 중 돌아오면 발판에는 폐유통이 하나씩 올려져 있었다. 아내는 밤새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했다. 골목 구석구석에 있는 것까지 다 쓸어왔어요. 차보다 훨씬 나아요. 하나 사길 잘했죠. 밤바람을 맞은 얼굴에 발그레 핏기가 도는 아내가 헬멧을 벗고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그러나 당신은 스쿠터의 기동성을 의심했다. 그 치료사를 제 때에 만나기 위한 편의라고. 아내의 발그레한 얼굴을 보자 용혈성빈혈로 누렇게 뜬 당신의 얼굴을 표백제에 담그고 싶었다. 아내가 카트를 달달달 끌 때보다 당신이 추레해진 듯한 느낌. 자신이 더 이상 20층 이상의 철골조 위에 오르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5년 전처럼, 상판 밑으로 추락하고 있는 느낌. 그것을 구체적으로 느끼게 된 것은 아내가 당신의 연장컬렉션을 모아둔 지하실을 치우고 거기에 무공해 비누 ‘공장’을 짓겠다며 지하실을 개조하기 시작했을 때다. 아내는 인부들을 부르고 작업지시를 하고 지하실 한쪽 벽을 뚫어 환풍구를 내게 했다. 당신이 아끼던 연장컬렉션이 궁금해 당신이 지하실로 내려가자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가만히 계세요. 열쇠구멍도 제대로 못 찾으시면서. 아내는 당신의 급격히 나빠진 혼란시를 걱정했지만, 당신은 아내의 말에 다른 뉘앙스가 묻어 있는 것만 같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인부들이 지하실 한 구석에 치워둔 연장컬렉션 중에서 당신이 가장 아끼던 빨간 공구함 만을 들고 황급히 나와버렸다. 당신 등뒤로 고막을 찢어 대는 대형 전동드릴 소리. 지하실을 가득 메우며 튀는 돌가루들. 시멘트를 파헤치는 강렬한 쇠 비트가 닳는 냄새. 기억 속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듯한 쇠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라인더로 쇠를 사상할 때, 물보라처럼 튀어 오르던 불꽃…… 기억의 실을 끊듯 지하실에서 빠져나온 당신은 공구함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것을 어디에 놓을까 망설이던 당신은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과 지면 사이에 공간을 발견했다. 그 계단 밑에 그것을 밀어 넣었다. 비가 오면 공구함은 젖었다. 2층 남자가 그 공구함에서 버펄로 사의 13인치 짜리 멍키스패너를 빌려간 것은 얼마 전이었다. 운동기구가 헐거워졌다며 그것을 조이기 위해 가져갔지만 남자는 되돌려놓은 것을 잊어버렸다. 2층 남자는 그 멍키스패너가 당신이 아끼는 멍키스패너 컬렉션 가운데 여덟 번째 것이란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크기순서대로 나란히 멍키스패너를 꽂아두는 자리의 여덟 번째 칸은 무덤에서 송장이 뛰쳐나간 자리처럼 비어 있게 되었다.
아내는 비누제조기를 사들이고 그것을 지하실에 설치했다. 아내는 직접 주우러 다니는 외에, 폐유가 나오는 인근 가게들에도 미리 손을 썼다. 다른 폐유업자들이 손을 대기 전에 계약을 하고 그것을 집까지 가져오게 했다. 기계는 밤이면 잘 돌아갔고, 양잿물과 폐유와 물만 배합한 먹고싶을 정도로 따끈따끈한 무공해 비누가 찍혀 나왔다. 재활용 비누에다 비누가루나 공업용 양잿물을 넣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것은 먹어도 되는, 말 그대로 순수 무공해라고 말해야 되요. 아내는 앞집의 장애인과 노파에게 판매책을 맡겨 하나에 600원씩을 받고 팔게 했다. 장애인과 노파는 보기에도 처량해 비누를 받지 않고도 사람들은 돈을 집어 주었다. 비누는 만든 족족 팔려나갔다. 수완 좋은 아내는 아예 이 집을 담보로 기름 체인점을 내버릴까, 고민 중이었다. 당신은 구체적으로 아내가 어떻게 기름 체인점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폐유 수거에 활용하려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아내의 비누공장엔 아침이면 맛깔 좋은 비누들이 찍혀 나왔다. 당신은 두부 장수 벨이라도 울리며 그것들을 팔고 싶었다. 이제 폐유를 직접 주우러 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아내가 폐유 한 통을 싣고 새벽 2시에야 들어온 날이었다.
엄마는 새벽까지 몇 푼 안 되는 폐유를 주우려고 야밤을 쏘다니는데 넌 코빼기도 비추지 않니? 여태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거야?
아내가 샤워를 끝내고 딸의 방문 앞을 지나며 하는 소리였다. 당신은 반사적으로 다시 공구함을 들고 딸의 방문 앞에 섰다. 그 날은 위협이 아니라 정말로 공구함을 열었다. 고3인 아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당신은 공구함에서 드릴을 꺼내 비트를 끼우고 도어락을 부수기 시작했다. 한밤 중 날카로운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개들이 짖고 여기저기서 불이 켜졌다.
한밤 중 이게 무슨 짓이야? 미쳤어? 불만 있으면 말로 해!
딸이 안에서 짖었다.
왜 엄마한테 할 화풀이를 내게 하는 거야! 왜?
문고리를 잡고 딸이 우짖었다.
얘는. 아빠가 내게 무슨 화풀이 할 게 있다고 그래? 응? 문 열어 봐 어서.
그러나 딸은 문고리를 잡고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안에서 딸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고 당신은 태연하게 드릴을 돌렸다.
엄마가 너무 나대니까 아빠가 기가 죽어서 저런다구!
입 터졌다고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집에 들어앉아 있게 생겼어?
당신은 더욱 사납게 뚫었다. 그리고 어깨로 문을 세게 밀었다.
그러지 말아요, 여보.
아내가 말했다. 안은 갑자기 조용했다. 당신이 손잡이를 부수고 딸의 방에 들어섰을 때, 딸은 마술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커튼이 애꿎게 밤바람에 한가하게 날리고 있었다. 암고양이처럼 딸은 담을 타고 신발을 신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한 밤 중에 무슨 공사할 일 있어요? 공사판 같은 곳에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죠. 이래 가지고 어디 대학이나 가겠어요?
잠을 깨고 거실로 나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얼굴을 붉혔다. 당신이 단 한번도 손 지검을 해 본 적 없는 아들을 그 날 최초로 한 대 갈기기라도 할 태세로 한 손을 들어올리려 하자, 아들은 당신의 두 팔을 움켜쥐고 드릴까지 빼앗으려 했다. 당신도 그것을 놓지 않으려다 결국 당신은 거실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드릴은 아들 손에 가 있었다.
고시원 끊어 줘.
무슨 집 놔두고 고시원이니?
그러자 아들은 드릴을 거실 바닥에 툭 내던지고 가방을 챙겨 나가버렸다.
아빠가 애들 좀 휘어잡아야지, 제 말은 통 안 듣는다니깐요.
그렇게 말하며 아내는 쪼그리고 앉아 어질러진 집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일 이후 아들은 고시원에서 묵는지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50보단 조금 벗어진 나이. 자고 나면 한 움큼씩 빠지는 베개 맡의 당신 머리카락. 짧은 가죽치마를 입은 딸의 또래들이 움직이는 거리. 자신들을 반사한 거울처럼 마네킹이 서 있는 쇼윈도. 젊은 아이들이 이곳저곳을 탐하며 기웃거리는 거리의 카페테리아 2층에 당신은 왜 앉아 있는가. 스무 살 남짓한 1층 여자아이가 방긋 웃으며 건네는 쿠폰을 받고 올라와 대낮 카페테리아 2층에 이렇게 앉아 있기도 뭐한 나이. 혼자서 생맥주 집 창가에 앉아 건너편 옥상 위에 심어진 댓잎을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이기도 뭐한 나이. 며칠 전 당신이 생맥주 집에 혼자 갔을 때, 직원은 이상하게 당신을 훑어보며 메뉴판을 가지고 왔다. 일행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당신은 직원에게 잠시 뒤에 친구가 올 거라며 거짓말을 했다. 생맥주를 한 잔 시키고 그 직원이 당신 옆을 지나가면, 기다리는 친구가 여태 오지 않은 것처럼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뒤에 앉은 네 명의 여자들이 혼자 온 당신을 안주 삼아 수군댔다. 등을 돌리고 있던 여자 둘이 살짝 뒤를 돌아보며 당신의 눈치를 살폈다. 이젠 남자 혼자서 맥주집에 가는 것을 낯선 남녀가 모텔에 들어가는 것보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주위의 풍경. 당신은 씁쓸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이틀 후 다시 그 맥주집에 가서 당신은 다시 그 창가에 앉았다. 그 웨이터가 당신이란 것을 알고 메뉴판도 없이 테이블로 걸어왔다. 그리고 대뜸 말했다. 한잔씩은 안 팔거든요. 당신은 그만 일어나 그곳을 나와버렸다.
요즘 애인 없는 사람이 어딨니? 우리 친구들 중에 너만 없다 얘.
당신 등뒤의 쟁반 만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앉은 아줌마들. 선글라스에 가죽 점퍼, 터질 것처럼 달라붙은 청바지에 비취색 매니큐어를 칠한 여자들. 잔처럼 서로 액세서리를 부딪치며 절그락거리는 다섯 명. 머리를 맞대고 당신처럼 원두커피에 꽂은 빨대를 빨며 애인이 없는 한 여자를 왕따시키고 있다. 커다란 죄라도 지은 것처럼, 바보 취급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어줍은 표정의 한 여자. 여자들은 당신보다 아홉 살 적은 아내와 비슷한 나이들이다. 신사역 6번 출구의 카바레 앞에서 가끔 마주치는 여자들보다는 나이가 어린 여자들이라고 당신은 생각한다.
아내는 건너편 개업직전의 치료원 2층에서 아직 그림을 걸 위치를 찾지 못하고 왔다갔다하고 있다. 드디어 장소를 발견한 아내가 의자를 끌어다 놓고 신발을 벗고 올라간다. 그림을 못에 걸기 위해 몸을 쭉 편다. 고등학교 때 체조선수였던 아내는 완전히 다른 여자처럼 보인다. 평행봉에서 뛰어내리며 착지를 하는 순간처럼 상반신과 엉덩이를 S자형으로 쭉 빼고 발끝을 들고 있는 상태. 티셔츠가 올라가고 배꼽이 보일락말락한다. 치료사가 다가가 아내를 올려다본다. 한 마리의 잘빠진 암말처럼 다른 가죽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아내는 치료사를 내려다보며 당신에겐 낯선 미소를 던진다. 치료사는 조각상을 대하듯 아내를 올려다보고 있다. 아내가 수줍은 듯 그림에서 손을 떼고 티셔츠를 내린다. 치료사가 창가로 다가와 급히 블라인드를 내린다. 당신은 그 다음 장면을 상상하며 빨대를 빤다. 머릿속에 비디오가 돌아간다. 삑삑삑! 어디선가 문자메시지 도착 알림 신호가 들린다. 당신의 휴대폰이다. 오빠! 혜미 외롭게 혼자 기다리고 있어요! 응큼한 오빠만 와!! 수신거부 0*08364515. 당신은 머릿속의 비디오를 돌리며 천천히 휴대폰을 귀에 가져간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길게 누른다. 걸리지 않는다. 국제전화가 제한되었습니다. 휴대폰 창에 나타난 메시지이다. 당신은 머릿속의 비디오를 일시정지시켜 놓고 2층 남녀공용 화장실로 들어간다. 국제전화설정을 풀고 통화버튼을 다시 꼭 누른다. 당신이 저 편의 여자와 접속된다. 당신은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 일부러 과장된 음성을 이사이로 내지르며 바지 속에 손을 집어넣고 노력을 해보지만 잘될지는 의문이다. 선글라스가 벗어진다. 당신이 노력을 해보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린다.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귀를 잡고 있는 것은 집나간 당신의 딸이다. 머리에 감색 머플러를 동여매고 당신이 할퀸 상처자국을 가리기 위해 화장을 짙게 한 딸. 공포에 질린 딸이 후다닥 화장실을 뛰쳐나간다. 당신은 서둘러 선글라스를 다시 끼고 대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양복 깃 속에 파묻고 카페테리아를 빠져 나온다. 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국제 전화를 하려면 이 번호로 해요. 이 번호가 더 싸요.
아내가 해외전화 상품을 안내한 카탈로그를 들고 와 당신에게 말한다. 휴대폰 전화비가 아까워 수신 전용으로만 해놓는 아내가 국제전화를 쓴 남편에게 이렇게 부드러워진 이유는 무얼까. 당신에게 방긋 웃어 보이는 아내. 지금 아내는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 미소를 짓고 있다. 여자가 너무 행복해서 이 행복이 곧 끝나버릴 것 같은 불안감마저 느끼는 가운데 내짓는 것 같은 미소. 이 세상을 모두 얻어 베푸는 것이 아깝지 않다는 듯한 미소. 여자가 스스로를 인생의 주연배우라고 느끼는 때의 미소. 당신은 여태 아내와 단 한번도 이런 웃음을 마주한 적이 없다. 자신은 단 한번도 이 여자에게 저런 웃음을 안겨 줘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당신은 분명치 않는 적의가 몸의 저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당신 몸 속의 곳곳에 산재한 모든 나사들을 천천히 조여주는 듯했다. 아직 분명치 않는 대상을 향한 적의가 우두둑 온 몸의 기관들을 볼트와 너트로 체결시키자 당신은 오래 전 망각 속에 묻어 놓은 쇠의 비린내를 맡기 시작했다.
아내는 당신에게 등을 보이고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아내의 목덜미에서는 두피의 숨구멍을 싸하게 열어젖히는 향수 냄새가 남아 있었다. 아내가 향수를 쓴다. 당신은 침대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아내의 핸드백을 뒤졌다. 핸드백 속에서 낯선 열쇠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일반 열쇠와 달리 조금 복잡해 보였다. 납작한 표면에 화산 분화구처럼 구멍이 송송송 뚫려 있는 듯한 형태. 당신은 그것을 쥐고 지하실로 들어갔다. 비누틀에 폐유와 양잿물 그리고 물을 약간 붓고 기계를 작동시켰다. 한참을 저은 다음 열쇠를 비누틀에 떨어뜨렸다. 그런 방법을 통해 당신은 치밀하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열쇠를 복제했다.
당신은 이미지가 출력되지 않는 미디어플레이어를 열어놓은 검은 화면을 마주하고 있다. 두 남녀의 입과 코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드는 것을 들으며 당신은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불을 끈 딸의 방 컴퓨터에는 3시간 이상 녹음 기능을 갖춘 디지털카메라가 USB포트에 연결돼 있다. 당신이 딸의 디지털카메라를 치료원의 테이블 밑에 청테이프를 붙여 숨겨둔 것은 어제였다. 몸 속의 모든 나사들이 우두두둑 조여오는 듯한 강한 직립감을 당신이 포착했을 때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던 적의의 향방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 적의는 아내가 아니라 치료사를 향한 것이었다. 치료사가 비틀어진 척추를 우두둑 곧게 세우듯, 그때 당신도 당신 안의 철골조에 박힌 볼트와 너트가 극한강도에 다다르며 당신을 긴장시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일 또 올 거지?
안 돼. 만들어 놓은 비누가 모자라. 만든 족족이야.
행복한 고민이네. 토요일 밤은 괜찮아?
얘네 아빠 형편 봐서. 근데 내 머리 괜찮아? 아줌마 같지 않아?
괜찮은데.
잘라버릴까?
아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당신은 슬라이드를 정지시킨다. 아내의 스쿠터 소리가 골목 안으로 빠르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주말에 시골에 갔다 내려와야겠어.
당신이 아내에게 말한다.
그래요. 바람을 좀 쐬고 오면 한결 나아질 거예요. 요즘 당신 너무 얼굴이 안 좋아 보여요. 가게에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차를 가져가려고 해. 괜찮겠어?
토요일 밤에는 아내가 차를 몰고 나가기도 했다. 먼 동네까지 가 대로의 폐유를 트렁크에 채우고 오는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물었다.
그럼요. 토요일도 요즘은 폐유를 수거하기 힘들어요. 불경기라 그런지 토요일에 기름이 나오는 집이 줄었어요.
금요일 오후. 당신은 가게문을 열지만 자리를 비운다. 단열공법에 있어서 조립식 공법의 우수성과 편리성을 극대화시켜주는 클립공법의 재료들을 구입한다. 단열재와 석고보드, 방습필름 그리고 당신 가게의 합판과 목재 등을 마련해 집 안에 숨겨둔다. 수평과 수직 조절이 용이한 공법은 시간의 절약뿐만 아니라 단열재의 절단이나 시공 후 자재의 손실 및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시켜 줄 것이다. 그리고 거실에 발라져 있는 벽지와 똑같은 벽지를 집 안에서 찾아낸다. 알뜰한 아내는 도배를 하고 남은 것을 진열장 위에 꼭꼭 말아서 올려두었다. 그것은 오래돼 색깔이 바래 있다.
토요일 오후. 당신은 가게문을 열지만 자리를 비운다. 집으로 돌아온 당신은 현관 계단 아래서 공구함을 확인한다. 다행히 13인치 짜리 멍키스패너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다. 2층 남자는 아직도 멍키스패너를 돌려놓는 것을 잊고 있다. 당신은 공구함을 원래 자리에 밀어 넣고 2층을 살핀다. 2층 현관의 디지털 자물쇠는 어제처럼 굳게 잠겨져 있다. 당신은 거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당신은 거실 구석의 진열장 앞으로 다가간다. 당신은 이 집으로 이사를 온 첫 날, 2층에 세를 줄 목적으로 아내와 함께 2층으로 통하는 계단 입구를 가리기 위해 진열장을 그곳에 놓았다. 당신과 아내 외에는 그곳에 뚫린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이들은 벽 자체가 폐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계단 끝에서 2층 거실로 통하는 도어의 열쇠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아내는 꼼꼼했다. 신발장에 올려진 깡통 안, 보조 열쇠를 넣어두는 곳에 다행히 녹슨 그 열쇠가 있다. 진열장을 조심스럽게 들어내자 갑자기 빙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찬바람이 얼굴에 확 달려든다. 은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밀의 통로처럼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인다. 장갑을 낀 당신은 녹슨 열쇠를 들고 2층 거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집안을 뒤져 그 멍키스패너를 찾아낸다. 멍키스패너는 주방 찬장에 올려져 있다. 그것을 가죽장갑, 야구모자, 운동화와 옷 한 벌을 넣은 나이키 스포츠백에 넣고 고속도로를 탄다. 고속도로 감시카메라에 번호판이 잡히도록 비교적 느린 속도로 충북으로 차를 몬다. 어머니가 파랗게 티브이만을 켜두고 잠든 틈을 이용해 한밤중 일어난 당신은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쏜살 같이 국도를 탔을 것이다. 당신이 치료원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골목 앞에 당도했을 시각은 11시가 약간 넘은 시각이었다. 당신은 차를 근방에 세워두고 나이키 백에서 꺼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운동화를 신었다. 치료원으로 다가갔을 때 입구에 스쿠터가 보였다. 감청색 헬멧이 스쿠터의 핸들에 걸려 있었다. 당신은 경비실에 경비가 있는 것을 확인했고 블라인드가 내려진 202호의 창에도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당신은 건너편 건물의 입구로 재빠르게 삼켜지며 계단을 올랐다. 건너편 건물에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그때의 당신 심리상태? 암컷 앞에서 경쟁자를 물리치려는 수컷의 본능. 당신은 당신의 혈관에서 펌프질해대는 짐승의 뜨거운 피를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경비가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을 틈타 일단 당신은 건너편 건물로 잠입했다.
당신은 2층과 3층 계단 사이의 어둠에 박혀 건너편 건물에 비친 202호의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당신의 눈에는 창 밖의 밤하늘 공중에 걸린 앙상한 20층 짜리 H빔 철골조가 들어왔다. 그러나 모텔들이 밀집한 밤하늘은 부식방지를 위해 입히는 H빔 표면제보다 더욱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건너편 건물에 비친 202호의 불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당신은 가슴속에서 멍키스패너를 꺼내 두 손에 꼭 쥐었다. 타락한 천사가 이교도의 십자가를 가슴에 품듯. 당신은 계단을 내려섰다. 청소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끈적이는 리놀륨 바닥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다른 수컷의 피 냄새처럼 들이키며 복도를 지나 천천히 도어로 향하고 있었다. 문 앞에 우뚝 멈춘 당신. 저 밑 땅 속에 박힌 배관 속에서 시작돼 올라오는 것처럼 길고 희미한 여운을 남기는 숨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당신은 열쇠를 꺼냈다. 손잡이에 조용히 밀어 넣고 앰프의 다이얼을 돌리는 것보다 고요하게 손잡이를 틀었다. 관상식물을 스치며 입구의 좁은 곳을 지났다. 척추 견인기와 육중한 교정기들이 마주보고 늘어선 방의 한가운데를 통과했다. 커튼을 젖히면 딱딱한 침대가 나오는 안쪽의 특수 치료실 문을 향해 당신은 다가가고 있었다. 안이 비치는 유리를 달아놓은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유리에는 건너편 건물 앞 가로등에서 쏘는 빛 때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당신이 그 문을 살며시 열었을 때는 어둠 속에 두 남녀가 엉켜 있는 게 언뜻 비쳤고 당신은 연장에 힘을 넣었다. 등을 보이고 45도 각도로 당신 아내의 위에 올라타 있는 치료사의 뒤통수를 향해 당신은 멍키스패너를 휘둘렀다. 어둠 속에서 은빛을 뿜음과 동시에 퍽 소리가 났고 치료사가 힘없이 당신 아내 위에 쓰러졌다. 당신은 당신의 아내가 영문을 몰라했을 사이 밤 고양이처럼 문을 빠져 나와 복도 끝의 밖여닫이 유리창을 밀치고 그 밑으로 뛰었다. 폐품을 모아둔 박스 위로 떨어진 당신은 당신의 차를 내버려두고 집까지 질주했다. 당신은 미리 가볍게 해놓은 진열장을 치우고 계단을 올라가, 2층 남자의 찬장에 피가 튀긴 멍키스패너를 올려놓고, 미리 준비해 놓은 재료들로 클립공법으로 깜짝 공사를 마무리하고 당신 차로 달려갔다. 당신이 골목을 빠져 전철역 쪽 도로로 진입하고 있을 때, 밤늦게 들어오는 2층 사내가 보였다. 당신은 다시 국도를 탔을 것이다. 그리고 남한강을 지나며 그 밤에 썼던 모든 것과 함께 벽돌이 들어 있는 나이키 백을 강물 속에 던지고 국도를 타고 당신 어머니 집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당신이 불안스럽게 뒤척이는 동안 새벽이 지나고 이내 당신 휴대폰이 울렸을 것이다. 경찰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당신은 일부러 잠에서 깬 음성을 가장하여 짜증이 섞인 투로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정유미 씨 남편 되시는 분입니까?
뜻밖에도 그곳은 병원이었다. 당신은 고속도로를 타고 강남의 한 병원에 도착했다. 중환자실 앞에 제복을 입은 파출소 순경과 경사와 함께 서 있는 것은 뜻밖에도 치료사였다. 당신은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죠?
당신이 치료사 옆에 있는 경사에게 황급히 물었다.
사고예요.
당신이 바라지 않는 뭔가를 눈치 챈 당신이 중환자실로 몸을 들이밀려 했다. 그러자 거기서 곧 나오던 간호사가 당신을 붙잡았다.
면회시간이 아니에요. 내일 아침 면회 시간을 이용해 주세요.
당신이 가격한 것은 분명 치료사였다. 당신의 아내 위에 올라 있던 조금 긴 머리의 저 녀석. 치료사는 본능적으로 당신을 피하는 것 같았다. 경사가 당신에게 다가왔다.
유감입니다. 아내가 중태에 빠졌어요. 누군가에게 둔기로 얻어맞았거든요.
당신은 털썩 의자에 앉고 말았다.
잠시 로비에서 두 분을 함께 뵈어야겠는데.
경사가 말했다.
이 사람 누굽니까?
사고가 있을 때 아내와 같이 있던 남자입니다.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었습니까?
당신의 귀가 앵앵거렸다. 달아나는 모기소리처럼 경찰의 말이 들려왔다.
오전 면회시간에 중환자실에서 아내를 맞이했을 때 아내의 상황은 예상보다 절망적이었다. <나쁜 피>의 줄리엣 비노쉬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아내. 아내는 산소마스크를 입에 밀착시키고 온 몸에 튜브를 꽂고 수리중인 로봇처럼 누워 있었다. 아니 커다란 비누 인형이랄까. 은빛의 나노기술로도 아내는 재생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내는 의식 불명이었다.
2층집 남자가 몇 번 경찰서에 불려가고 딸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단 한번 관상용 식물을 구경하듯 제 엄마를 보러왔다. 수능이 끝날 때까지는 죽지 않겠죠? 아들이 의사에게 물었다. 아들은 그 사이 엄마가 죽어버려 상을 치르게 되면 시험 공부 시간을 놓칠까 봐, 심전계가 잘 작동되는지 눈길을 한번 주고 급히 떠났다.
깊은 잠에 들어 있는 아내는 거꾸로 시간을 먹는 듯했다. 보톡스 주사를 맞은 것처럼 피부가 더욱 팽팽해지고 얼굴엔 폐유를 바른 것처럼 엷은 기름기가 흘렀다. 아내는 자신이 평생 벌어온 것을 이제 자신의 육체의 미용을 위해 쏟아 붓기라도 하듯 몸 속에 서서히 링거액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몸 속에 맑은 식용유를 채워주면 머리카락도 함께 자라는 커다란 비누인형처럼. 먹고 싶을 정도로 예쁜 무공해 비누인형처럼. 그리고 밤에도 불을 켜지 않는 어두운 집안에 틀어박힌 당신. 당신은 딸의 방 컴퓨터 앞에 앉아 커다란 시궁쥐가 되어 가고 있었다.
2층 남자가 마지막으로 불려 갔던 날, 김형사가 집에 왔다. 생쥐처럼 생긴 김형사는 거실로 들어오더니 진열장 앞에 멈추었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김형사가 물었다.
내부에서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을 텐데요. 이 오래된 집은 2층에 세를 주기 위한 목적으로 집을 짓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이 진열장 뒤엔 뭐가 있습니까?
생쥐가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죽은 바퀴벌레가 있겠죠.
당신이 대답했다. 김형사는 최근에 바닥이 긁힌 자국이 있는지 유심히 살피는 것 같았다.
한번 진열장을 치워봐도 될까요?
김형사가 잔뜩 기대하며 진열장을 치웠다. 그러자 거실과 같은 색의 벽지로 마감한 벽이 나타났다. 당신이 잡아 던져놓은 죽은 바퀴벌레와 동전, 그리고 일부러 채 워 넣은 먼지들이 진열장과 벽 사이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김형사는 난감한 듯, 고갤 갸우뚱하며 벽지의 색깔을 살피다 벽을 톡톡 두드려보았다. 안의 깊은 곳까지 울림이 전해졌다.
계단이 있군요.
그런가 본데요.
몰랐나요?
짐작은 했죠. 이사를 왔을 때부터 막혀 있어서 그냥 두었어요. 어차피 2층에 세를 줄 셈으로 이 집을 산 것이었으니까요.
그로부터 며칠 간 밤마다 파출소의 순찰차가 집 앞 골목을 오갔다. 경광등이 천천히 돌아갈 때마다 빨간 불빛이 커튼을 내린 당신의 창에 어른거렸다. 그러나 그 빨간 불빛도 컴퓨터에 눈을 박고 있는 당신의 눈빛보다 빨갛지는 않았다. 먹고 움직이지 않아 점점 뱃살이 불어나는 당신은 살진 시궁쥐처럼 체형이 변해가고 있다.
평상시처럼 순찰을 돌기 위한 파출소 차량이 오늘도 당신 창 앞을 빨간 경광등으로 어루만지며 지나치고 있다. 당신은 순찰차 안의 뒷좌석에 13인치 멍키스패너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머리를 굴리고 있는 김형사가 뒷좌석에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쥐덫을 살피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서나 쥐를 유인할 먹이를 찾지 못해 쥐덫 주위를 빙빙 돌고만 있다. 그러나 아내는 이 집에 링거를 꽂고 통째로 삼켜버릴 것이다. 당신에게 복수를 가하듯, 영영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머리카락이 얼굴을 수 차례 뒤덮도록 아내는 이 집을 산소와 링거액으로 바꾸고 당신 가게도 잘게 부수어 자신의 몸 속에 흘려 보낼 것이다. 당신은 이제 아내를 애증하지 않는다. 당신은 아내가 그리울 때면 클릭해도 된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윈도우미디어플레이어의 슬라이더를 마우스로 죽 끌어와 놓는다.
만들어 놓은 비누가 모자라. 만든 족족이야.
행복한 고민이네. 토요일 밤은 괜찮아?
얘네 아빠 형편 봐서. 근데 내 머리 괜찮아? 아줌마 같지 않아?
괜찮은데.
잘라버릴까?
그렇게 하던지.
우리 그이가 싫어할 텐데……
슬라이더가 끝에와 멈추고 당신의 아내는 정지된다. 당신의 아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다시 반복해서 들으며 당신은 씨익 웃는다. 우리 그이― 당신은 발음해본다. 설치류의 이빨 같은 흰 이가 씨익 드러난다. 당신이 언제 웃었던가, 기억할 수도 없는 과거. 그 이후 당신이 처음 웃었다.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서 멀어져간다. 당신의 아내처럼 답답한 비닐 봉투 속의 밀폐된 공간 속으로. 김형사가 나를 비닐 지퍼로 감금시킨다. 당신은 우리에게 좋았던 시절이 기억나는가. 당신이 나를 날개를 잃은 천사처럼 지상으로 끌고 내려와 이교도의 십자가처럼 움켜쥐고 밤의 어둠 속에 숨을 죽이고 있던 때가 아닌. 고공에서 당신의 연장 벨트에 매달려 내가 찰칵거리던 때가 기억날까. 당신은 20층 이상의 고공에서 지상의 힘줄인 철근을 나르고 그라인더로 지상의 뼈를 깎았다. 당신은 목재가 아닌 쇠의 냄새를 들이켰다. 지상에 박힌 철재 기둥들 사이 철의 보 위에서 거닐었다. 타락한 붉은 저녁의 하늘이 아닌 여명의 빛 속에 깨어난 도시의 공중에서 빛나는 나를 움켜쥐었다. 저 아래 인간들과 강물을 굽어보며 철기둥에서 브라게트를 뽑고 강재에 구멍을 뚫고 고장력 볼트를 삽입하여 너트를 단단히 조이던 때를 당신은 기억할까. 어느 날 갑자기 가로 보가 두 개로 보이고 태어나자마자 곧 죽어버리는 당신의 적혈구들이 껍질이 벗겨진 채 당신의 비장 속으로 눈발처럼 급격히 쓸려갈 때, 그때부터 우리의 추락은 시작되었다. 당신과 나의 타락은 시작되었다. 당신이 기우뚱 보 위에서 떨어져 그 아래 빈 상판의 보 위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부터……
그렇게 당신은 멀어져 간다. 나의 의식의 밖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