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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 2013. 10. 10(수) ~ 12(금)
2. 장소 : 망상 해변도로 - 옥계 해변도로 - 금진항 해변도로 - 심곡 항(15km)
3. 경상남도 삼랑진역에서 전라남도 송정리역까지 중고등학교시절의 옛 추억을 생각하면서 경전선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다.
철길을 따라 중간 중간에 만발한 코스모스 꽃 봉우리는 한들한들 흔들리고 있었고 하얀 칼라가 있었던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쓴 남한 학생이 코스모스가 만발한 꽃길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후 한 여학생이 하얀 칼라가 있는 교복을 입고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늘어뜨린 채 단정한 모습으로 코스모스 꽃길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사이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경이 경전선 기차 차창넘어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바짝 긴장하여 차창 넘어 코스모스 꽃길을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방금 지나갔던 남학생과 여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코스모스 꽃들 사이에 벌들만 채밀을 하느라 잉잉거리고 있었다.
시간은 점심시간이 이미 넘어가고 있었으나 철길을 달리는 기차바퀴의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객실에 앉아 있는 승객들이라고는 고작 대여섯 명이 좌석에 앉아 있는 듯 보였다.
북적거리는 서울과는 너무 대조적이어서 고등학교 학생시절 어느 시골 통근 열차를 타고 가는 기분이었다.
열차라고는 하나 전체 차량이 4개였고 실내 공간이 고즈넉하고 고요한 것이 주변 전경과도 너무 닮아 있었다.
진주역이 점점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저멀리 산아래 보이는 수목원이 아주 아름답게 보였다.
알고보니 경남 수목원이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어 이번 간이 역에서 하차하여 경남 수목원을 들르기로 하였다.
간이역하면 지금은 거의 사라져가서 볼 수 없거나 문화공간으로 부활하고 있었다.
기차에서 하차하여 역사를 빠져나왔는데 음식점이라고는 딱 한군데 밖에 없었다.
아주 허술한 음시점이었는데 라면과 김밥박외에는 먹을만한 것이 없었다.
주인아주머니는 투박하고 설렁설렁하였으나 겉모습과는 달리 아주 순수하고 음식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시골 사람들이 주로 고객이었기 때문에 이윤을 추구한다기 보다는 시골의 인심과 따뜻한 정을 전하고 싶어 식당을 운영하는 듯 보였다.
삶의 굴곡은 어느 시골사람들과도 비슷하리라 생각이 들었으나 여유있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생을 누리리라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후덕하고 소박하게 느껴졌다.
따뜻하고 정이 듬뿍 담긴 간이역에서의 넉넉한 김밥 한 줄이 마치 과거의 어느 한 시점으로 회귀한 듯 나의 가슴을 송두리째 뒤 흔들고 말았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있는 것 만큼 소비하고 생활하려는 시골의 인심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찾으려하였던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이 넉넉하여지기 시작하였다.
경전선 기차 여행이 나에게 많은 소득이 되었음을 비로서 느낄 수 있었다.
기차여행에서의 행복하였던 마음의 공부를 연장하기 위하여 방법을 생각하던 중에 태백선을 타고 강원도 정선의 민둥산 산행을 구상하였다.
동해안 해안도로를 찾아 도보를 하면서 마음을 비워보기도 하고 아름답고 끝없는 동해 바다의 평행선과 하늘이 맞닿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무작정 걸어보기로 하였다.
신이 창조하신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를 마음껏 즐기면서 끝없는 바다 위를 여유 있게 누비는 갈매기들과 친구가 되어보기로 하였다.
친구인 최무송선생님과 기차여행의 마무리를 위하여 2013. 10. 10(수) ~ 10. 12(금)까지 2박 3일 동안의 여행 일정을 구상하여 영등포고등학교에 근무하셨던 백영길교장선생님과 백교장의 대학 동기였던 오동춘생님에게 이번 여행의 목적을 설명하며 낭만적인 추억의 아름다운 기차여행에 동참의 의사를 타진하였는데 매우 즐거워하면서 환영의 뜻을 전해왔다.
그러나 여행 일자가 다가오면서 오동춘선생님께서 갑자기 가정의 행사와 여행 일정이 중첩되어 참석이 어렵겠다는 불가피한 사정 연락을 받고 백영길 전 영등포고등학교 교장선생님과 최무송선생님 셋이서 예정대로 여행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당일 일기예보는 서울 및 중부지방에 한 때 소나기 또는 지나가는 비가 내릴 뿐 강원도나 동해안 및 전국이 화창한 날씨가 지속되고겠다는 예보를 믿고 청량리역에서 09:10분 청량리출발 민둥산행 무구화호에 승차하였다.
날씨는 맑고 쾌청하여 잡담을 하면서 차창을 바라보며 주변의 경치에 도취한 우리는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현실을 잊는 사이에 열차는 남양주의 도농역을 경유하여 양수리의 남한강위 철교를 지나가고 있었다.
엷은 박무속에 숨은 두물머리의 경관은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 놓은 것처럼 신선의 세계로 보였다
어느덧 시간은 12시에 가까워졌고 기차는 산과 계곡사이의 비탈을 지나 높은 고도에 이르느라 숨이 가파른지 허덕이면서 느린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조금 지나자 영월과 고안, 정선지방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높은 고도위의 산비탈에서 내려다보이는 주변 산천의 아름다움은 신들만이 유희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계곡사이에서 가끔 보이는 평지에서는 인간들이 아옹다옹하며 사는 시골의 전경이 그림처럼 스쳐지가고 있었다.
얼마동안 지나갔을까 자연의 원시적인 모습은 서서히 사라지고 공장에서 나오는 매연과 폐수로 자연이 오염되어 가고 있었다.
이곳이 과연 대한민국에서 청정지역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인가 생각을하니 안타깝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강산과 수려한 자연을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어야 할 의무를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여 아쉽기는 하였으나 이곳 사람들도 삶을 추구하여야 한다는데 하여는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점점 민둥산이 시야에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몇 년 전에 민둥산 산행을 하였던 기억을 되살리며 민둥산 주변과 지리를 생각해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전혀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민둥산 산행 시 승용차를 타고 친구들과 산행을 하기위하여 등산로 입구에 있었던 주차장에 주차를 하였기 때문에 그 기억을 되살리면 쉽게 등산로 입구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때와는 전혀 달라진 도로를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속에서는 쪼르륵 소리도 나고 허기진 느낌이 들어 역 앞에 있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정심식사를 마친 후 식당 아주머니의 자세한 안내를 받아 등산로 입구를 걸어서 찾아가기로 하였다.
민둥산 역이라 등산로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지만 시내에서 어느 쪽 방향으로 꺽어야 할지 쉽지 않았다.
초보자 등산객들을 위한 이정표를 시내 요소요소에도 설치하여 두었으면 우리 일행이 쉽게 등산 입구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둥산은 100대 명산으로 많은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억새는 장관을 이루어서 전남 장흥에 있는 천관산과 경기도의 유명산, 그리고 경남 창녕의 화왕산과 함께 많은 전문 등산객과 초보자들이 자주 찾을 정도로 인기도가 높은 곳으로 알고 있었다.
우리는 오후 2시부터 등산을 시작하였다.
나는 땀을 조금 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평소 등산할 때처럼 페이스를 조절하여 쉬지 않고 정상을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민둥산 정상은 해발 1119m 였지만 민둥산 역 주변이 고도가 높은 관계로 실제 산행 시간은 1시간 30분이면 누구나 오를 수 있었고 왕복 3시간이면 여유 있게 다녀 올 수 있는 산이었다.
산 정상에 가까워지자 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먹구름이 휘감고 있었다.
또한 기온이 급강하하고 늦가을의 추위로 땀이 식으면서 몸은 수축되어 한기가 들었다.
정상에서 5분 정도를 머물러 있다가 하산하기로 하였다.
200m 가량 하산하여 내려가고 있는데 그 때 백교장과 최무송선생님이 오르고 있어 식힌 몸을 달래기 위하여 다시 셋이서 정상까지 올랐다.
본래 정선읍에서 1박을 하고 동해시로 가서 2박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일정을 바꾸어 오후 5시 10분 강릉행 막차인 무궁화호를 승차하여 묵호시로 가서 1박을 하기로 하였다.
오후 5시 10분 강릉행 열차를 승차하려면 시간이 촉박하였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산행은 민둥산 정상을 오른 뒤 4시 50분 무렵에야 하산하여 강릉행 무궁화호를 탈 수 있을 런지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강릉행 무궁화호열차를 포기해야할 것인지 기로에서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앞을 지나가는 트럭기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여 겨우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강릉행 무궁화호를 민둥산역에서 승차하여 묵호역에 도착하니 오후 7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몸이 피곤하기는 하였으나 부영장 모텔에 여장을 푼 다음 다시 택시를 타고 선창가 횟집으로 갔다.
멀리 바라보이는 바다를 벗 삼아 회 한 접시와 맥주를 시켜 놓고 지난 세월의 어려웠던 인생담을 넋두리하면서 맥주 한잔에 여행의 진미를 늒고 있었다.
깊은 밤 다하도록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아름다운 밤을 보내면서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줄이고 간단한 복장을 한 채 시내버스 승강장올 갔다.
망상 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잠간 멈춰선 버스기사에게 망상해변으로 가는 버스를 물어보았니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는지 신경질적이고 무성의 극치를 보이고 있었다.
버스 앞문을 닫아버리는 기사의 불손한 태도에 식상한 우리 일행은 하루 종일 기분이 언짢았다.
기사 한사람은 여행자들을 끌어들이는 최 첨병이며 지역을 대표하는 얼굴이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는데 동해시 기사 한 사람 때문에 여행은 잡치고 말았다.
언짢은 기분에 빗방울까지 강해지면서 하루의 여행 일정이 차질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기로 하였다.
택시를 타고 망상 해변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더욱 굵어지면서 걱정이 앞섰다.
백교장과 최선생님은 다행이 우산을 가지고 와서 비를 피하면서 여행을 강행할 수 있었지만 나는 일기 예보만 믿고 우산을 지참하지 않았던 것이 큰 낭패가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망상해수욕장 마트에서 일회용 우의를 사이보 여행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아침 출발 무렵 시내버스 기사의 무성의하고 불성실한 태도에 식상하고 바람과 강렬한 비로하여 여행은 꼬여만 갔더,
그러나 이러한 언짢은 기분은 망상해수욕장 안내실 두 여자 해설사의 따뜻하고 성의 있는 태도에 감복하여 우중의 여행을 지속할 수 있었다.
망상해수욕장에서 걷기를 시작하여 옥계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차들은 우중임에도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였고 편도 1차선인 도로 옆 인도는 빗물이 고여 걸을 수 없었다.
도로 폭이 좁은 인도에서도 빗물이 고이지 않는 곳을 이리저리 찾아 걸어야 하였기 때문에 걷기가 아주 불편하였다.
비는 계속 강렬하게 쏟아지고 있었고 옷은 점점 속까지 젖어들어 갔다.
신발에 빗물이 젖어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때문에 보행은 조점점 심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질주하는 차들때문에 위험성이 가중되어 갔다.
한참 걷다보니 마트가 나왔다.
마트에서 잠간 동안 비를 피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하기로 하였다.
의논하는 동안 나는 우의를 입고 비를 피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어 대형 우산을 사기로 하였다.
이제 우산을 들고 우의를 입으니 비가 와도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우중임에도 보행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강릉국도를 따라 계속 걸어가다가 옥계해변에 도착하였다.
옥계해변에 도착하여 해수욕장의 모래를 밟으며 동해바다의 넘실거리는 파도의 힘찬 소리를 들으니 자연의 위대한 능력에 경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해수욕장을 나와 여성수련원의 뒤쪽으로 진입하여 소나무의 아름다운 숲을 지나 다시 금진 항으로 향하였다.
바다열차를 타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여행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고 고의로 비를 맞으며 도보를 고집하였다.
바람과 비를 맞는 소나무는 몸부림을 치다가 지쳐있는 듯 보였으며 소나무 잎들이 마치 고슴도치의 바늘처럼 빳빳하게 곤두서 있는 모양으로 보아 화가 나서 폭발하기 직전의 모습과도 흡사하였다
비온 뒤에 죽순이 많이 나듯이 고행 후의 추억이 오래 지속될 것 같아 우리는 고집스런 도보를 지속하였다.
비는 점점 그치고 날씨가 개기 시작하였다.
금진 항에서 심곡 항까지는 환상적인 해안도로가 전개되어 넘치는 파도와 함께 그림처럼 펼쳐지는 경치는 아름다움의 극치로 보여주고 있었다.
문득 신라시대 연오랑과 세오녀가 생각났다.
해가 보이지 않는 것은 연오랑과 세오녀 때문일까?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랑이 미역을 따러 나섰다가 바위위에 올라섰다.
바위가 갑자기 움직이더니 연오랑을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연오랑을 본 일본 사람들은 그를 신이 보냈다 생각하여 왕으로 섬겼다고 하였다.
세오녀도 남편을 찾다가 마찬가지로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건너가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어갔고 해와 달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말에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다시 신라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며 돌아 갈 수 없다 하여 세오녀가 짠 고운 비단을 주며 이것으로 제사를 지내라 하였다.
그의 말대로 제사를 지내니 다시 해와 달은 빛을 되찾았다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은덕이 우리들에게 내려져 해가 나타나고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여졌다.
지금까지 내가 돌아보았던 해안도로 가운데 가장 멋있었고 아름다음이 강렬하여 추억으로 가슴 속 깊이 남아 있을 것이라 확신이 들었다.
나는 심곡 항에서 40분 남짓 거리에 있는 정동진 항으로 걸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시간이 저물어 정동진 항에서의 일정을 예측할 수 없었고 백교장의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고 항행할 수 없어 아쉬움을 남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