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摩 訶 般 若 波 羅 蜜 多 心 經
(마 하 반 야 바 라 밀 다 심 경) 意譯 講說
일 러 두 기
먼저 반야심경을 원문대로 한자와 한글로 넣고 한글 반야심경을 실어 독경에 편리를 도왔으며,
강설에는 대목을 나누어 놓고 필요한 부분은 떼어 쉽게 설명한 뒤
큰 [ ]를 만들어 그안에 비유, 격외(格外) (최상승선으로 일상 생활의 말이로되 격식을 벗어나 말이나 문자의 뜻을 초월한 향상일구, 곧 말 밖의 소식) 등 방편으로 법을 들어 설명 하고자 했으며
마지막으로 본문에 착어(着語) 즉 위의 말에 대한 뜻을요약한 말로 붙이는 짧은 게송을 넣었으니
큰 [ ] 이하는 오히려 말이 어렵게 들리게 될 수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잘 살피고 깊이 참구(參究) (참고하여 진리를 연구하는 것이나 선에 있어서는 사량분별을 떠나 의심)하면 공부(선-깨달음)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 강설은 의역(뜻으로 고침)하고 법리(法理 : 내재된 원리인 이치 곧 진리에 대한 이치)로 설명한 것임을 참고하기 바란다.
또 한 가지 부언할 것은 명상(名相)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을 이름 붙이고 설명하자니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을 일컬어 여러 가지로 명사들과 형용사를 불조들이 써 왔으니 이를테면 성(性)과 체(體)와 정(定), 색(色)과 용(用)과 혜(慧)등 같은 뜻의 명사들을 그때에 따라 달리 쓴 것에 대한 용어를 먼저 이해해야 할 줄 안다.
장군죽비 합장
講 說(강 설)
摩 訶 般 若 波 羅 蜜 多 心 經
마 하 반 야 바 라 밀 다 심 경
크고 밝은 지혜로 절대진리의 깨달음에 이르는 마음을 설하노라
마하(摩詞)는 범어(싼스크리트어)의 maha를 음역한 크다, 많다는 무한대의 크고 밝다는 뜻이다.
[크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큰 것이 아니라 절대 큼으로 무한대(無限大) 즉 허공처럼 끝없이 큼이다.
마하는 마음이 절대평등(絶對平等 다른 것이 없는)
곧 둘 없는(不二) 보편하여 고르고 한결 같은 만법의 진리인 실상의 세계인 무한대의 법계평등(法界平等: 만유일체가 둘 아닌 것으로 차별 상대가 없이 보편평등한 것)한 것이므로
하나 그대로가 전체이고 하나 속에 전체를 구족(머금어)하며 우주 전체의 모든 개체마다 전체를 머금고 있어
공간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한 생각이 무한한 시간이며 무한한 시간 가운데 시간 시간을 머금고 있으니
마치 허공이 넓고 넓어 우주 삼라만상을 머금고 있으나 머금은 줄 모르는 것과 같다.
갓이 없이 크므로 동·서·남·북·상·하 우주에 가득하여 삼라만상 무변 허공과 같아 일체를 포함함이요,
홀로 높이 커서 천상천하에 홀로 존귀하여 대등할 것이 없이 큼이요,
사량할 수 없이 커서 삼세 제불 역대 조사등 모든 성현과 유루·무루 일체를 갖춘 큼이요,
석가 세존의 일대 시교와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철학, 문학, 과학과 문명 등을 포함한 일체를 건립하는 큼이요,
걸림이 없어 일체 사량 분별 논리를 초월한 큼인 것이다]
허공이라면 뼈가 있고
무심에도 한 관문이 있으니
대도는 문이 없음을 그대여 똑똑히 알라
동서남북이 모두 문이니라
반야(般若)는 범어 pranja의 음역으로 본성의 지혜를 뜻한다.
[지혜(智慧)는 절대지(絶對智)인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깨달아서 지혜를 증득하여 발현하게 되면(본래 갖춘 반야지혜로 얻을 것 없는 얻음)
차안(此岸: 이 언덕인 생사가 있어 윤회고를 받는 중생세계)에서 피안(彼岸: 저 세상 즉 바라밀다)으로 건너게 되는 것으로
이상 세계에 이르러 6도 윤회를 면하고 이생에서나 육신을 벗은 뒤 내생에서나 영원 불변한 열반낙을 즐기게 된다.
지혜와 지식(知識)은 다른 것이다.
지혜는 부동의 절대 진리를 깨달아(원각) 밝게 알고 쓰는 것이고
지식은 알음아리이므로 무상(無常)한 것으로 상대적인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누가 깨달아 얻을손가?
깨닫고 얻은 것 본래 없으니,
깨달아 지혜를 얻게되면,
깨달아 얻은 것이 없는 것이 반야니라.
바라밀다는 범어 paramita의 음역으로 생사가 있어 윤회의 苦를 받는 세계인 중생세계 차안에서 열반경계인 깨달음의 세계 즉 피안인 저 언덕으로 건넌다는 뜻이다.
[바라는 도피안이라 하여 건넌다는 뜻으로 이상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수행을 칭한다
밀다는 근본인 본체(본성체인 마음)를 뜻하며 일체만유의 근본체로서 만물(일체)을 머금고 있다(구족)는 뜻이며
일체가 원융(圓融: 모자람이 없이 원만하고 구별 없이 한가지로 통하는)한 극치를 이름한다.
도피안이라 해서 이곳(차안)에서 저곳(피안)에 이른다 하여 따로 그런 곳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깨닫지 못하여 미혹한 자아(가아)가 이곳이요,
깨달아(悟道)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범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위없는 깨달음 곧 열반을 이룸이 저곳이다.
그러나 깊이 알아야 할 것은 깨달아 밝고 즐겁게 사는 이 삶이 곧 불국정토라는 말에만 쫓아 이생만이 전부요,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비 지옥이 없고 이 육신의 삶이 끝난 뒤 내가 가야 할 곳이 다시없고,
무(無)로 멸해 버리는 것으로만 알아서 이생만 잘 살면 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단견)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혼동하거나 오도(誤導: 잘못되게 그릇 지도하여 이끌어 가면)하면 지옥 가기를 화살 같으리니
이런 변견(邊見) 즉 있다 없다 등 한편에 치우쳐 사로 잡혀 갖는 잘못된 소견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는 지식만 가르치려고들 한다.
지식은 상대적인 것을 필요로 하므로 많이 알고 이해할 수록 더욱 자아에 애착하게 되어,
더 풍요롭고 편하게 내 잘 사는 데에만 급급하게 되게 되어,
상대를 만들고 세상을 복잡하고 이기적으로 살게 되는 경쟁의 무대로 만들어 가는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그러나 참 지혜를 알려는 이는 드물고 절대지(智慧)를 지도하는 이는 귀하니 안타깝다.
절대지를 요달(了達: 理: 체: 정, 事: 차별상: 용을 의심할 것 없이 깨달아 통달)하여 계합하면 일체가 둘 아니며 모두가 참 나로 부터 임을 깨달아 너와 나를 분별하지 않는 보살도를 행하게 되므로 세상이 변화하여 다툼 없는 정토가 자연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한 생각 어리석어 어두운 것이 미혹한 중생이요,
밝아서 슬기로우면 깨달은 부처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앞생각이 미하면 중생이요,
뒷생각이 밝으면 佛이라 하는 것이다.
자! 그럼 근원에 이르렀을 때는 어떠한가?]
흙이 산을 받치고 있어도
그 산의 높이 모르고
물이 쉼없이 흘러도
스스로 그 흐름을 알지 못하니라
심(心)은 이름 붙여 부를 뿐 모양이 없어, 없이 있는 우주 근본 체이다.
[불가사의(不可思議: 마음으로 생각하고 헤아려 알 수 없는)한 묘하고 희유(불가사량)한 일체의 근본인 것으로 친히 계합(契合: 빈틈없이 꼭 들어맞아 합일)하지 않고는 이르를 수 없는 것이다.
늘 나와 함께 있어도 나(我)만 알 뿐,
나의 본성인 근원(본래 면목)을 모르고, 피상적으로만 알아서 거짓 내 마음을 마음, 마음하고 있으니
이 진여본성(眞如本性: 평등 보편하여 본래 상주불변하는 만유일체의 본 성품)인 법성인 즉 마음을 요달하려면 실천, 실수하여야만 한다. 즉 직접 몸소 닦아 체인(體認: 몸소 직접 이르러 인식하고 인증)하고 체달(體達: 사물의 진상을 직접 이르러)해서 통달(확철히 깨달아 아는)하는 길 밖에 없다.
이 마음을 마음이라는 명사(이름하여, 말하자면, 이를테면)로 쓰는 것은 실상이 아닌 것이므로 여러가지 또 다른 명칭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다.
경(經)은 즉 범어 sutra의 번역이며 진리를 설(말씀)한 글이므로, 길(徑)이니 가르침이다.
[진리를 설했다 하는 것은 꾸미거나 조작하고 만들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닌 천연의 진리를 깨달은 바 있는 그대로를 삼켰다 토한 것과 같이 말씀하므로 "설해도 설함이 없다" 하는 것이며
진리를 설하여 근원(체)으로부터 나투고 작용한 일체의 참 이치를 가르침이니
즉 진리(理: 무위: 진제)를 사(事: 유위: 속제)인 차별문으로 설한 것이며,
또한 본체(자성)는 설하고 작용해도 동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성(法性: 변하지 않는 모든 일체 만유의 실상체)이요
본체(진여, 실상, 본래면목, 당체 등)인 법신불로 우주근본체이고,
삼세제불이 경마다 이 경 가운데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삼세제불이 나왔다고 하는 그 나온 곳은 경 가운데 어디인고?]
눈을 감고 뜨고 눈썹 치키고 내리는 것
모두가 참 부처의 출현이니
둥근 것은 둥근 것을 낳고
모난 것은 모난 것을 낳느니라
觀 自 在 菩 薩 行 深
관 자 재 보 살 행 심
관자재 보살이 깊이 행하여
관자재보살은 범어 avalokitesvara이며 지혜로 관조하여 자재하며 묘과를 얻은 관세음보살을 가리킨다.
보살은
① 성불하기 위하여 인욕수행을 하여 51위의 수양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52위)를 이루기 직전에 오른 이
② 지장보살님과 같이 대원력 보살로 부처님 되는 것을 유보하고 중생제도에 진력하는 보살
③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부처(법신)의 응신보살
④ 대승법의 수행으로 6바라밀다를 행하여 좋은 말과 행동으로 중생과 함께 하며 베푸는 현세의 보살행을 하는 이의 총칭임.
이 경의 경우는 ① 의 예로 봄이 옳다.
그러한 관음보살이 본원을 관조(觀照: 회광반조廻光返照: 스스로 돌이켜 본원의 자리를 비춰 보는 것이니 보는 나와 보이는 본체가 둘 아니게 되는 것)해서 깊이 행하여(行深) 이르러 둘 아니게 될 때의 경지이다.
[행심은 깊이 행한다는 말이니 즉 모든 의식과 사량 분별을 여의고 본래면목과 둘 아닌 데에 이르름이다.
따라서 깊은 참선 수행으로 내외명철한 정에 들어 온몸으로(육신이 아닌) 체험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이때의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여러가지 이름 가운데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임의자재하게 관하는 보살).
보살은 여기에서는 성불하기 위해 인욕 수행을 하여 51위의 수양계단을 지나 드디어 불과를 이루기 직전에 오른 이니 여래의 체험으로 봄이 옳다.
그러나 진여문에서 보면 나의 참면목의 행이기도 한 것이다]
明星出處親踏着 명청출처친답착 하면
始知佛覺不由星 시지불각불유성 이리라
샛별 뜨는 곳을 몸소 이르러 보면
부처님의 깨달음이 별을 봄이 아님을 비로소 알리라.
般 若 波 羅 密 多 時
반 야 바 라 밀 다 시
밝은 지혜로 구경에 이르렀을 때
반야바라밀다시는 지혜(반야)로 한없는 구경의 경지(밀다)에 깊이 이르러(바라) 체달할 때(시)이다.
[반야바라밀다시는 거짓 내가 참나(절대 근원체인 나)를 깨달음(不二)으로 확철하게 되는 때이다.
따라서 자아의 의심(초발심, 因)으로 참 나를 깨닫게(변정각, 果)되는 것이다.
공부는 사량분별, 지식(알음아리)이나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것이니
실답게 깊고, 칼날같이 깨어 있어 물에 빠진 자가 살아 나오려는 듯이, 잊은 물건 찾듯, 어려운 일 당했듯이, 은산철벽을 뚫고 나가듯이 해야 성취되는 것이다.
상근기는 말 없이도 알고, 중근기는 말을 듣고 알며, 하근기는 칠일 내에 깨친다고 했는데 이렇게 듣고도 깨치지 못한다면 너무도 가련한 일이 아니겠는가?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뒤의 색신(有餘涅槃)의 나는 변함이 없으되
깨닫기 전에는 업신의 노예로 욕망 속에 살고,
정각(부처님) 후에는 깨달은 자의 행으로
걸림 없는 보살행과 참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름 붙이기 전 부처(법성)와 온 몸으로 깨달아(體得: 몸소 체험하여 얻음 곧 증득) 인격 혁명을 한 부처님(정각인)과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허공을 잘라 과거 현재 미래라 하니
본래 시공은 없는 것에서 나눈 것이라
시공(時空)은 없이 있음이요
또한 없는 줄 밝게 알지니라.
照 見 五 蘊 皆 空
조 견 오 온 개 공
비춰 보니,
몸과 마음의 근본 다섯 가지가 모두 비었음을 깨닫고
조견(照見)은 비춰본다는 것(觀)이다.
[상대적인 자아가 절대아를 비춰(觀) 자아가 절대아(자성, 진성, 진여)와 둘 아닌 때이니 따라서 상대지를 집착하고는 절대(본원)를 깨달(견성)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 이르러 보지 않고는 지식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견성{보는 나(見)와 보이는 나(性)가 있는}이라는 말도 어쩔 수 없이 쓰는 용어일 뿐 맞는 말이 아니다]
오온은 오중(五衆), 오음(五陰), 오취(五聚)라고도 하며 色 . 受 . 想 . 行 . 識으로 인식케 하는 근본 뿌리가 모여 있는 것을 일컫는 명칭인 것이다.
[색온(또는 색근)은 몸을 포함한 물질의 유형의 현상이며,
수상행식의 오근과 오경을 모두 포함한 말로 쓰이기도 한다.
수온은 느낌을 받아들이는 감각이며,
상온은 소리 빛을 포함한 지각에 의한 표상이며,
행온은 생각 움직이는 공간이며,
식온은 알고 분별하는 것으로 이 네가지 모두 무형(상이 없는 것들)이다.
마음(본체인 자성) 가운데는 비어 공적하여 오온이 실체가 없건만 일체를 갖추어 쓰니 오묘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묘유(妙有)하고 묘용(妙用)한 것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좀더 설명하면 6근(인식기관인 주체)인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이 대경(對境)인 6경(대상인 객체)
즉 색경, 성경, 향경, 미경, 촉경, 법경에 응하여 6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인 인식작용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6 × 3(근, 경, 식) = 18(계)이라 하는데 뒤에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으므로 줄인다.
여기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의심이 눈, 귀, 코, 혀, 몸 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눈 등의 물체는 6근에 경계를 인식 작용케 되는 기계적(색) 존재임으로 6근, 6경, 6식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色의 실상은 空이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본성의 형상은 비어 없으니 그 가운데 있는 형상없는 육근 또한 없이 존재함(진공묘유)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개공은 따라서 일체가 비어 없다는 뜻이다]
古來無生有 고래무생유 하나
有而無有有 유이무유유 하니
眼不自見眼 안불자견안 하고
團團不知團 단단부지단 하니라
옛부터 남이 없이 있으나
있어도 있다는 있음이 없으니
눈은 눈을 스스로 보지 못하고
둥글고 둥근 것은 둥근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度 一 切 苦 厄
도 일 체 고 액
일체의 고통과 재앙을 여의었노라.
본래 일체 모두가 비어 없음을 요달하였으므로 괴로움을 여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오온이 비어 본래 없는 것임을 비춰 보아(觀) 나라는 것을 포함하여 일체가 공적함을 깨닫게 되면
도무지 모든 있는 것으로 집착했던 내라는 것이 허상일 뿐 실체가 아니었음을 체인하게 되어,
거짓을 참으로 알고 실재하지 않는 것에 집착하여 생사에 끄달려 왔음을 깨달아 참나(眞性)의 실다움을 깨달아를 알게 되면,
일체가 공한 가운데 액(厄)이니, 괴로운 것이니 하는 것이 없을 수밖에!
마치 꿈속에서 허둥대며 죽음을 겁내다가 꿈을 깨고 나면 허상인 헛깨비(환) 같은 장난이었음을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괴로움에 집착하고 끄달리지 않게 되어 그것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고통을 여의었다고 했으니,
육신을 가진 나(정각인)로서는 육신의 고통을 마저 없어야 하지 않겠나 라고 의심 할 수 있으나,
육신마저 고(苦)가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나
다만 그것이 실체가 공하여 없음을 알아 고에 침잠(沈潛: 마음이 그것에 빠져 들지)하지 않는 것(有餘涅槃)이다.
내가 괴롭다 하는 것이 있음은 없는 나(자아)를 있음으로 망각(妄覺: 잘못 알아)해서 내라고 하는 그 생각 때문이다.
여의었다 하나 실은 여읠 것도 또한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보화가 가득히 쌓여 있어도 모르고 있다가
찾고 보니 본래 그것이 내 것이었네
호랑이 머리와 꼬리를 거두니
손오공이 여의봉을 얻음이로다
舍 利 子
사 리 자
사리자여!
눈 밝은 자, 지혜의 눈이 밝은 자라는 뜻이다.
[밝은 눈이라 해서 말과 상(相)에 쫓아 사람이 시력이 좋아 잘 볼 줄 안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혜가 밝은 사리자라는 석가세존의 제자의 이름을 불렀음이다.
이 지혜의 눈이 밝은 자를 일척안(一隻眼)을 갖추었다,
또는 청명안(淸明眼) 또는 제3의 눈을 갖추었다 또는 외눈박이라고도 하니, 혜안이 트인 사람(明眼宗師)을 일컫는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물질의 현상이 빈 것과 다르지 않고, 빈 것이 물질의 현상과 다르지 않아, 물질의 현상이 곧 빈 것이고, 빈 것이 곧 물질의 현상이니
색불이공은 일체 사물의 현상(色)을 볼 때 그것이 무상(無常)하여 본질적으로 空(빔)하고,
볼 줄 아는 마음의 실상이 본질적으로 공하니 색이 곧 공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몸과 마음이 또한 둘이 아니다.
공불이색은 마음이라는 공한 본체(眞性)가 본질(본성)이 공한 색
곧 의식하는 형상, 소리, 냄새, 맛 등 물질적 현상을 나투므로
물질이 곧 마음과 같아 어머니는 아들과 다르지 않아 어머니(空)가 곧 아들(色)인 것이다.
따라서 색(空)도 또한 공이 아니요 비어 없음 또한 아예 없음이 아닌 것이다.
색과 공이라는 것이 실다움이 없는 이름이요, 환이니,
환은 항상하지 않으므로 멸하여 사라지는 것이므로 필경은 빈 것(공)이다.
따라서 색과 공이 모두 실이 아닌 명사이니, 실은 색이다 공이다 하는 것도 환과 같은 이름일 뿐인 것이다.
색과 공이 필경에는 진공으로 돌아가나 다만 환 아닌 것은 멸하지 않으니 멸하지 않는 것은 공적한 진여 자성뿐이므로 眞空妙有라 한다. 따라서 공(진성인 공)은 공이요,
색(항상하지 않으며 있다고 하는 것들은 모두가 자체의 자성이 없으며 필경 공으로 돌아감)도 공이라,
내라는 내가 공(我空)하고 모든 색이 공(法空)하니 둘 다(아공, 법공=2공) 공한 것이어서 일체가 공하므로 둘 아님(不二의 眞性空)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색즉시공은 (따라서) 물질의 현상이 빈 것과 다르지 않고
공즉시색은 (따라서) 빈 것이 곧 물질의 현상이니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이 경의 대의라 쉬우면서도 쉽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기에 자세히 또 자세히 거듭 비유해서 설명을 하겠다.
먼저 공(빔)에 대한 도(道)의 이치(理)를 계합해야 한다.
공의 원리로 볼 때 불성은 공(빔)이기에 일체의 상이 없이 공적하므로 걸림이 없고 갓(끝, 변)이 없어 일체에 두루 없이 있어서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이며,
모든 있다고 생각하는 상(相)은 항상함이 없어 생했다 멸하는 덧없는 것이건만 범부는 일체의 현상법을 차별적인 성격으로 고정하여 있다고(有相) 생각하여 있음으로 잘못 아는 것이다.
체(體)의 원리로 보면 불성(佛性)은 공하기 때문에 생멸을 받지 않고,
옳고 그르고 길고 짧은 능소{能所: 능은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부리는 것(주), 소는 동작 지시를 받는 것(객)}인 상대적인 相을 초월(超越: 모든 가능을 뛰어 넘어)하여 항상(有常)하고,
현상계의 일체 제법은 일시적으로 인연 결합에 의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으로 환과 같으므로 필경 멸하는 것이라 멸하면 공(空)하고,
생멸변화를 잠시도 쉬지 않고 변전하므로 덧없어 무상(無常)하다 하는 것이다.
눈은 색(相)이니 능히 보지 못하고(시체의 예) 비어 있으나 유무를 초월한 묘한 있음(眞空妙有)으로 비어 없으되(空) 두루 갖추고 쓸 줄 아는(妙用) 것이 능히 보니 눈 아닌 것이 보는 것이며, 귀 . 코 . 혀 . 몸 또한 이와 같다.
온 몸이 공하고 일체가 모두 이러한 것이다.
일체가 이 공으로 돌아 가니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보면 본래 두 가지가 없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몸과 마음 즉 색과 공을 있다, 없다는 한쪽으로 치우쳐 고집하여 변견에 떨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니 몸과 마음이 평등하여 둘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알 줄 알면 공도 색도 보지 않게 되고 사물의 끄달림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색이 여러 인연이 모여 생긴 것으로 실체도 자성의 형상도 필경 없고 이름만 있는 것이므로 이것을 幻化라 하니 환화인 몸(色身)이 멸하여 빈 것이 되므로 곧 법신인 빈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색이 곧 공인 줄 알면 공이 곧 색이라,
색과 공이 다르지 않으니 서로 여의지 않는 참공의 묘한 도리를 알게 될 것이다.
다시 이르면 한 생각 일으킬 줄 아는 변하지 않는 것(본체 자성공)과 인연 따르는 것인 모든 현상인 색과 성품인 체와 용이 본래 한 때이므로 곧 그것도 아니며, 아닌 것도 아니며 또는 그것도 되며, 아닌 것도 되는 것이다.
眞如門으로 살피면 만법이 둘 아니어서 이것을 곧 그것이라 하며
差別門으로 보면 삼라만상이 완연히 벌어져 이것을 비(非), 아니다, 다르다고 하는 것으로 상대를(相) 세우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날 때는 삼라만상이 나고 생각이 끊어지면 바탕인 무(공)로 돌아가니,
알려는 생각(색)이 끊어져 정(定)에 들어 일체가 공적해서 둘 아니게 합일할 때 체를 알게(證悟: 見性) 되는 것이요,
마음(진성인 마음)에서 일체를 알게 되는 것은 공에서 일체가 남을 혜로써 알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성상이 모두 한생각 가운데 있으므로 공한 자성과 일체의 색이 자체성품이 공함을 깨달으면 보리도 열반도 세우지 않고, 따라서 차별 경계도 세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불심이며 보리열반이며 이것을 깨달으면 해탈지견(解脫知見) 즉 일체의 번뇌로부터 벗어나 자유자재함을 아는 지혜가 발현되는 것이다.
세우거나 안 세워도 되며 가고 옴이 자유로워 막힘도 걸림도 없으며,
경우에 따라 작용하고, 말에 응해 대답하며 널리 화신으로 나투되 자성을 떠나지 않으며,
곧 자재신통(自在神通) 즉 스스로 갖추어 구속과 방해 없이 마음대로 쓰고 유희삼매(遊戱三昧: 고요한 가운데서 누리는 즐거움을 얻을 것이 없이 얻어 가지는 것)이나,
묘한 작용은 인연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환과 같은 것을 범부들은 생멸(생사)이 있는 듯이 잘못 생각하여 눈에 보이는 함이 있는 차별상인 것(유루: 유위: 無常)은 믿으려 하나 오히려 실상인 볼 수 없는 함이 없는 것(무루: 무위: 眞性)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움직임이란 마음(공) 가운데 움직임이요, 움직임이 곧 작용이니,
마음은 작용하지 않는 마음(자성의 성품)이 없으며 작용하는 마음 바탕(자성)은 움직임이 없다.
참 마음인 본체의 작용은 여여적적하고 부동인 가운데 그 성품이 인연따라 만가지 형상에 응하여 나투고 사라지거늘,
망녕되게도 허망한 형상을 집착해서 덧없는 형상을 항상 하는 듯 여기는 것은
공과 색을 미혹한 자들이 잘못 알아 형상 없다 있다라고 하여 그에 의지하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작용(色)은 본체로부터 일어나는지라 작용이 본체(空)를 여의지 않았고,
본체(空)가 능히 작용을 일으키는 지라 본체가 작용(色)을 여의지 않으니, 둘 아님으로 즉, 곧, 이것이다, 같다, 둘 아니다라고 하는 것으로, 곧 파도는 물을 여의지 못하고 물은 파도를 여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좀더 공에 대해 이해를 돕기 위해 중도상(中道床)원리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중도상이라는 것은 중간에 상주한다는 것이니
있음과 없음인 색과 공에 치우치지 않고 시공을 초월하여 머무는 것으로
이 중도에 항상 머문다 하는 것은 끝이 없는 무한대의 가운데 머묾이니 처소가 없고
가운데 아닌 가운데 즉 머무는 곳이 없이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곳이 모두가 가운데가 되어 안과 밖이 없는 그 가운데 머무는 것이어서
나고 듦에 두 끝인 양변을 여의게 되어 일체처에 두루한 공한 머묾을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하나를 세우면 반드시 상대가 되는 대대(對對)가 있게 되어 차별상이 성립된다.
이때 쌍방이 나를 내세워 고집하고 집착하게 되므로 서로가 너는 없고 나만 있다 하여,
있음이 아니요(너), 없음이 아니다(나)라는 부정이 성립되어 부정과 부정 쌍방의 동시 부정으로 서로를 버리게 되어서 동시에 쌍방이 멸하게 된다.
이때 쌍방 동시에 긍정이 또한 성립된다.
왜냐하면 부정할 상대가 쌍방부정으로 없애졌으니,
서로 동시에 비춰도 방해 받지 않아 서로 걸림이 없게 되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융합회통(融合會通: 하나로 어우러져 서로 통함)하게 되어,
진공묘유가 현전(現前: 눈앞에 당장 분명하게 드러남)하게 되어,
있다 없다를 초월하여 없는 것도 되고 있는 것도 되는 있음인 것이니,
따라서 텅 비어 갓 없는 중간이 없는 중간에 두루 머물면서 움직임 없이 움직이고,
작용하고, 말함에 있어 밖으로 색에 있으나 상을 여의고 안으로 공에 있으나 공을 여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에도 색에도 집착할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공이란 것은 상을 세우면 막힘(遮)으로써 쌍방 부정이 성립되고 따라서 동시에 양단이 같음은(공) 걸림 없이 비침(照)으로써 긍정이 성립된다.
양단을 버리게 되므로 하나의 빈(공)것이 되니 이것은 양쪽을 부정함(쌍차)과 동시에 긍정(쌍조)하는 것이 되는 까닭인 것이다.
이 까닭을 다시 이르면
그 하나가 둘 이므로 하나의 공이 둘(공, 색)과 같아 원융무애하므로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어 둘(색)이면서 하나요(공) 하나이면서 둘이라
그 하나 가운데 일체 삼라만상이 건립되고(雙遮) 구족되어 있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遮照가 동시에 성립되는 것이다.
부정과 부정은 쌍방부정이므로 쌍방이 멸하고 긍정과 긍정은 쌍방긍정이 되는 것은 서로 걸림이 없이 투과하도록 없이된 상태의 걸림 없음인 공적한 것이므로 중도에 머묾(중도상)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도상(진공)은 두 가지 상이 없고 모든 번뇌의 마음조차 없는 것이며
한생각 일어나기 전과 한생각 나툰 차별적인 것에 치우치지 않고
그러한 차별상을 구족하고 또한 여읜 것으로,
생각은 진여본성을 상대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진여는 곧 생각의 體요, 생각은 곧 이 진여의 作用이다.
그러므로 有가 곧 공이요 유가 곧 색이니 그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인 것이다.
차별상으로 보면 그 하나와 둘이라는 것을 세워(상) 걸리는 듯 하나 서로 뚜렷하여
평등문에서는 하나의 공이 색과 둘 아니어서 원융무애(圓融無碍: 모자람이 없이 한가지로 걸림이 없음)한 상이 없는 것이므로 양단을 버린 공은 공이라는 말도 없는 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둘(색, 공)이면서 하나(빈공)요, 하나면서 둘이니
하나 가운데 삼라만상 일체가 건립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시공을 초월한 절대평등(空: 진제: 理)과 차별작용(相: 속제: 事)도 깨닫게 되어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임을 확철히 알게 되는 선지(禪旨: 참 이치에 밝아 도의 이치가 밝은 보리지혜)가 발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해야 할 것은
상에 집착하면 사견(邪見) 즉 바르지 않는 삿된 소견(현상으로 있다는 것이 항상함으로 생각) 특히 인과의 도리를 무시하는 소견을 기르게 되고
공에 집착하면 단멸공(斷滅空) 즉 멸하여 아주 없다고 고집하고 생각(인과를 무시)하는 삿된 소견에 떨어져 무지(無智) 즉 理와 事에 어둡고 명료하지 못한 미혹한 어두움(無明)에 쌓이게 되는 것이니,
삿된 것에 사로잡혀 진리에 어두워 나라는 것에 집착하여 생기는 번뇌망상의 근본이 되며 윤회의 因을 기르게 된다.
이것을 변견 즉 한쪽에 치우쳐 고집하고 집착하는 소견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이치는 이러하나 도는 문자나 말에 있지 않으므로 직접 자신과 우주 본체인 마음(본원)을 꿰뚫어 깨달아 알지 못하면 아는 지식에 머물 뿐이다.
양개선사가 깨치고 난 뒤 스승 운암선사를 회고하며
"스승의 도의 높음을 장하게 여김이 아니라, 가르쳐 주지 않았음을 감사한다"고
한 것도 스스로 의심하게 의문을 심어 줬음을 감사한다는 것이니
바로 체득을 하기 위해서는 깊이 참구, 정진하여 미세망념(微細妄念: 최소로 남은 작은 번뇌, 망상)인 객진번뇌[客塵煩惱: 근본체(主)를 벗어난 티끌처럼 작은 번뇌망상(客)까지]마저 모조리 떨어져 나가 내외가 명철[內外明徹: 안으로 육근이 없으므로 나라는 것이 따로 없고(空) 밖으로 육진(경계)이 없으므로(空) 안팎으로 걸림이 없어 내외라 하나 안과 밖이 없이 밝고 환한 경계에 이르게 되는 것]하게 되어
이 공적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곧 체인, 체달로 증득하여야 만이 일체 종지를 깨닫게 되는 것은 근본에 계합하여 이로써 일체가 나퉈지고 작용하는 바른 이치 곧 진리를 역추(逆推)하게되어(되 거슬러 알지 못하던 것을 밝게 알게 되는, 거슬러 추리) 보게 됨으로써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도리를 확철[確撤: 확실하게 꿰뚫어 모든 것(일체종지)을 깨달아 알게 됨]하게 될 것이며,
깨달은 이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고 부처님의 설함이요, 불경이라고 하였음을 알 것이고,
남의 말에 속지 않고 깨달은 진리의 내말(?)을 설하게 될 것이다.
미혹 할 때는 지식이나 깨치고 나면 지혜라 하나니 그러므로 지식과 지혜는 호리의 차이면서 천지현격인 것이다.
허환한 몸(색)이 멸(없어짐)하면 허환한 마음도 멸하고,
마음이 멸하므로 허환한 경계도 멸하고, 경계가 멸하니 환도 멸도 멸해 빈 것(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다만 환 아닌 것은 멸하지 않으니 그것이 우리의 둘 아닌 법신체인 것으로 소소령령하고 공적영지한 공한 것임을 깨쳐 알아야 한다.
공적 영지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나와 우주의 본래면목이며 空한 것으로 이 공적한 것이 體요 定이며 묘공, 묘유인 것이고,
영지한 것이 작용이며 지혜이니, 이 혜가 묘용인 것으로 색을 나투는 것이다.
따라서 정은 체요, 혜는 곧 용이며, 정인 체는 혜인 용의 근본바탕이니, 정이 곧 혜며, 체가 곧 혜로써, 용이 되므로 체 용, 정 혜가 곧 둘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공이 곧 색이요 색이 곧 공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색은 색이라 하면 참 색이 아니요
공도 또한 공이라 하명 참공이 아니니
한 생각 곧 움직이면 참다움이 아니요
다만 있는 그대로가 곧 옳은 것이니라.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느낌, 생각, 지어감, 의식 또한 그러하도다.
앞에서 오온(색, 수, 상, 행, 식) 가운데 색 하나를 들어 설명하였으나 색과 같이 수상행식이 또한 이와같이 공하여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것이다.
좀더 설명하자면 6근이 있어 6진 경계가 있으니 따라서 6근이 6식으로 동시에 6경이 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6근 자체가 공적하여 있음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그러한 뿌리가 되는 6근도 본원을 환하게 비춰 보면(보는 것과 본원에 합일하여 不二일 때) 사대 오온이 텅비어 나라는 것이 없어 그 자리에서 공적함을 깨닫게 된다.
오직 공적한 면목을 보게 되면 일체가 공하여 나라는 것도 경계도, 공하여 공해도 공한 바가 없고 나(주)와 경계(객) 두 가지가 본래 공적하여 같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수상행식이 없으니 나라는 것이 또한 없어 일체가 진여본체인 진공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공한 것이 차별경계요 차별경계가 공한 가운데 구족되어 있어,
공과 색이 그러한 것 같이 수상행식이 無수상행식으로 당연히 비어 같고,
절대 평등과 상대적인 차별이 다르면서 서로 여읠 수 없고 같음도 알면 곧 하나이고 곧 둘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일체 차별경계는 무상하므로 인연이 다하면 멸하는 것이어서 본질이 공이요,
또 의식한계 밖에서는 없다는 생각도 없음이니 즉 생각하지 않으면 있고도 없음이다.
따라서 공과 색이 본질적으로는 빈 것이다.
不二, 空, 無, 非 자는 하나라고 세워서 말할 수 없는 절대존재인 근원(본래면목)을 어떻게도 가리킬 수가 없으므로 차별상대를 부정하는 말로 인용하여 부득이 쓰는 용어임을 알아둠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