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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오늘 설교의 제목을 ‘믿음’하고, 강조를 하기 위해, 강한 느낌을 주기 위해, 느낌표를 했습니다.
다소 엉뚱한 일이 계기가 되어 이런 색다른 제목을 달게 되었습니다.
어떤 엉뚱한 일일까요?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순복음, 루터교, 성공회, 이런 교회들을 흔히 ‘기독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확하게는 ‘개신교’, 영어로는 ‘프로테스탄트’입니다.
기독교에는 크게 세 가지 종파가 있습니다.
먼저는 천주교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가톨릭’이라고 합니다.
흔히 ‘카톨릭’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가톨릭’입니다.
바로 옆에 천주교 성당이 있지요.
그 다음에는 정교회가 있습니다.
동방정교회라고도 합니다.
1054년에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정교회가 몇 없습니다.
따라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이 저희가 믿고 있는 개신교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개신교입니다.
종교개혁이 1517년 10월에 일어났기 때문에, 10월을 ‘종교개혁의 달’이라고 합니다..
나흘 뒤, 이번 주 목요일부터 10월이 시작되는데, ‘시월은 종교개혁의 달이다. 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달이다’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시월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 기독교의 이 세 종파가 반경 300m쯤 되는 거리 안에 모두 함께 있는 곳이 있습니다.
이런 곳은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에서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한 군데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일까요?
엄재호 장로님은 아실 것 같은 데요, 바로 여깁니다!
우선 천주교, 바로 옆에 있어서 우리가 늘 봅니다.
그런데 몇 달 전에 엄재호 장로님이 ‘우리 식당 앞에 러시아정교회가 있어서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드나듭니다.’ 하시더군요.
저는 처음에는 ‘아니겠지, 뭔지 잘못 알고 계시는 것이겠지’ 했습니다.
왜냐하면 정교회는 그리스정교회, 러사이정교회, 루마니아정교회, 이렇게 나라별, 지역별로 갈라져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리스정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저기 마포경찰서 앞 언덕에 그리스정교회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마포에 큰 건물들이 별로 없을 때는 둥그런 지붕을 한 그 성당이 사방에서 잘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러시아정교회가 어떻게 세워져?’ 했습니다.
확인을 하기 위해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더니 이런, 길안내에, ‘러시아정교회 서울사목구,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 62길 45-11’, 잘 나와 있습니다.
소개글도 몇 올라와 있습니다.
작년 초에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작년 부활절 예배 사진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정교회의 부활절이나 성탄절은 개신교나 천주교와 날짜가 다릅니다.
조금 늦습니다.
서울 러시아정교회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니까, 한국에 러시아정교회가 시작된 것에 대해 그리스정교회가 약간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엄재호 장로님의 안내를 받아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크지 않은 빌딩의 2층에 ‘러시아정교회 모스크바 총대교구 서울시 그리스도 부활사목구’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습니다.
‘사목구’라고 한 것을 보니까 정식 성당은 아니고 예배처소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런 것을 ‘공소’라고 합니다.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코로나 사태 속에서는 삼가야 할 일이라 그냥 돌아왔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우선, ‘이 서울 러시아정교회는 혹시 평양 러시아정교회와 교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북한에도 나라가 세워서 운영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장충성당이 있고, 개신교는 봉수교회와 칠골교회가 있고, 러시아정교회에 속한 정백사원이 있습니다.
조금 깊이 들어가는 이야기이지만, 저는 여러 이유로 북한의 러시아정교회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그 다음 생각이, ‘어, 용산교회는 천주교, 정교회와 한 지역에 있네!’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다는 사실은 알고 계셔야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런 곳은 별로, 어쩌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 용산교회는 천주교, 정교회와 한 지역에 있네!’ 이 생각은 ‘아, 그렇다면, 용산교회는 개신교회 다운 개신교회, 개신교를 대표하는 교회, 개신교회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구나!’하는 생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청년 시절에 용산교회 다닐 때, 언제 어떤 자리에서 그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용산감리교회는 이름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용산을 대표하는 감리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 일이 있습니다.
용산구에 지역 이름을 딴 감리교회들이 여럿 있는데요, 한남동교회는 한남동을 대표하는 교회, 이태원교회는 이태원을 대표하는 교회, 청파교회는 청파동을 대표하는 교회, 효창교회는 효창동을 대표하는 교회, 그렇다면 용산교회는 용산을 대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름값을 하는 교회입니다!‘ 했습니다.
좀 억지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또 틀리는 이야기도 아니지요.
그런데 용산교회가 기독교의 세 종파인 천주교, 정교회와 같은 지역에 아주 가깝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용산교회는 개신교를 대표하는 교회, 개신교다운 개신교회, 개신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교회가 되어야하겠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좀 비약적인 논리이지만 이것도 틀리는 이야기는 아니지요.
또 그래서 잘못된 것 없고, 그래서 나쁜 것 없는 이야기이지요.
용산교회는 ‘개신교회는 이런 교회입니다;라고 보여주는, 개신교회의 모델하우스가 되어야합니다.
여러분, 그런 교회를 이루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천주교, 정교회와 비교가 되는 개신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믿음입니다.
천주교는 전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 마리아도 중요하게 여기고, 교황도 중요하게 여기고, 행위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천주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아니에요, 우리 천주교는 성경도 중요하게 여겨요!’ 하지만, 이것저것 살펴보면 전통을 비롯해서 지금 말씀드린 것들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교회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또 이콘(Icon)이라고 해서 성상, 벽화, 모자이크, 이런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거기에 비해 개신교는 믿음을 제일 중요하게 여깁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개신교 신학의 등뼈와 같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로마서 1장 17절 한 절은 남겨두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을 네 글자로 줄여서 ‘이신득의’(以信得義)‘라고 합니다.
이(以), ‘써 이’자 입니다, 이신(以信), 믿음으로써,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만,
득(得), 얻는다,
의(義), 성경에서 ‘의’는 구원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신득의’,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다’를 ‘이신득구(以信得救)’,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로 말하기도 합니다.
개신교의 교리를 네 글자로 압축해서 말하면 바로 이신득의가 됩니다.
잠깐 옆으로 빗나갑니다만, 한자의 ‘옳을 의(義’)자가 참 신기합니다.
여러분, 옳을 의자를 머리에 그려보세요, 두 글자가 위, 아래로 합해진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양(羊)’자 밑에 나 아(我)자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 믿에 와야 구원을 받는다, 참 신기하지요?
한자에 이렇게 성경적 뜻을 가진 글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만 더 들어보면 사내 남(男)자, 역시 두 글 자가 합해졌는데요, 밭 전(田)자와 힘 력(力)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다음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창세기 1장 18절과 19절,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그런데 사내 남 자가 밭 전과 힘 력이 합해 만들어졌어? 남자는 힘들여 밭을 갈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 신기하네!’
그래서 ‘중국은 하나님과’ 관계가 깊은 나라이다’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1517년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는 원래 천주교의 신부였습니다.
그때 천주교가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습니다.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그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로마를 순례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순례는 그때 모든 천주교인들의 꿈이었습니다.
부푼 가슴으로 로마를 갔는데, 너무 실망스러웠습니다.
로마에 스칼라상타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룩한 계단’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을 때 올라가셨다고 하는 계단입니다.
이것을 로마로 옮겨 놓았습니다.
저도 로마 성지순례를 할 때 가 보았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스칼라상타를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면서 기도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루터도 그에 따라 스칼라상타를 무릎으로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 계단 오르고 기도하고, 또 한 계단 올라서 기도하고, 그렇게 하는데 ‘이런 행위가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나?’ 하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런 의문은 점점 더 커졌습니다.
중간쯤 해서 ‘아니다, 믿음이다!’ 하는 생각이 쾅,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서, 일어나서 걸어내려 왔다고 합니다.
그 뒤에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종교개혁의 3대 구호, 따라서 개신교의 3대 구호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총으로!’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최근에, ‘너무 오직, 오직, 오직, 해 가면서 믿음, 말씀, 은총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지만, 일단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총으로!’ 솔라 피데(Sola Fide)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개신교인들은, 이를 머리에,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저는 오늘 우리 가까이에 있는 천주교, 정교회와 구별이 되는 개신교 특징을 말하기 위해 믿음을 주제로 설교하고 있지만, 그런 계기가 없더라도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신자인데, 신자는, 믿을 신(信)놈 자(者)입니다.
나는 ‘믿는 놈’입니다.
거북하면 ‘믿는 사람’이라고 바꿔도 좋습니다.
우리는 신도입니다.
믿을 신 무리 도(徒), 우리는 믿는 무리입니다.
우리를 ‘신앙인’이라고도 하는데, 거기에도 믿을 신 자가 들어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정체성이고, 주체성이고,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고 하는데, 거기 1절과 2절에 믿음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공봉번역 성서」에 좀 더 알기 쉽게 풀이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옛 사람들도 이 믿음으로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요, 믿음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애매하지요.
‘이것이요’ 하면서 꺼내 보여줄 수 없지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여기며 소중하게 간직하고, 따르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선조들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모세의 부모, 모세, 라합, 그밖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히브리서 11장을 읽어보면 이들의 공통점은, 바라는 것, 장래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앞으로 나갔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통일을 바라고 있습니다.
설과 추석은 고향 가는 날인데 올해 추석은 코로나 때문에 그것이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추석이나 설에 고향 가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실향민들, 혹 이 가운데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탈북민들도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라도 통일이 빨리 되어야 하겠습니다.
통일이 언제 쯤 될 것 같습니까?
그렇게 물어보면, ‘통일이요?, 안 될 것 같아요, 어려워요, 되더라도 한참 지나서야, 우리 다 죽은 다음에야 될 것 같아요.’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부정적 통일론’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통일이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며, 남과 북이 가까워지고, 교류가 많아지고, 연방제, 1국가 2체제, 이런 단계들을 밟아서 이뤄지겠지요.’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 정부의 통일정책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것입니다.
‘합리적 통일론’ 또는 ‘단계적 통일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답니까?
아닙니다,
‘초월적인 힘,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머잖아 통일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통일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초월적 통일론’ 또는 ‘신앙적 통일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초월적 통일론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했는데, 우리가 바라는 통일이 그렇게 될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통일을 주실 것을 믿고 통일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는데 통일 이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북한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의 토요일, 10월 3일은 개천절입니다.
하나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는 데요, 뭘까요?
올해 10월 3일은 서독과 동독이 통일된지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에 통일 이야기를 넣었는데요, ‘하나님, 독일에만 통일을 주시지 말고, 우리에게도 통일을 주십시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통일이 되면 실향민들, 고향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북한에 있는 조상의 묘 성묘도 할 수 있습니다.
또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준 ‘어업지도선 공무원 피살 사건’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영생의 전제조건입니다.
성경 가운데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씀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은 달라졌지만, 탈북민들이 한국에 오면 제일 먼저 대성공사라는 기관에 머물면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히는 분들 가운데 믿음 좋은 분들이 그 안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 정기적으로 들어가서 설교를 했는데요, ‘어떻게 설교해야 하나?’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 분들, 예수가 누군지 전혀 모릅니다.
오히려 ‘종교는 아편이다’ ‘기독교는 미제의 앞잡이이다’ 반종교교육을 강하게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남한에서 어떻게 살지?’ 굉장히 불안한 가운데 있습니다.
무슨 소라를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뭐라고 하지?’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노래로도 되어 있고, 또 손짓을 같이 할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외우기 쉽습니다.
저는 그런 데는 재주가 없어서 전도사님 한 분과 같이 들어가서, 그 전도사님이 노래, 손짓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을 다 외우게 한 다음에 제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사회로 나온 그 탈북민들을 만나보면, 정신이 없을 때라 그 때 들은 이야기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것은 참 재미 있었고, 유익했다고 많이들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 다음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이는 그를 아는 자마다’가 아닙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입니다.
‘’이는 그에 대해 듣는 자마다‘가 아닙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입니다
‘그에 대해 관심이 있는 자마다’가 아닙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은 무엇입니까?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얼마나 좋습니까?
믿으면, 믿음이 있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음에 대해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서양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선교를 하러 갔습니다.
선교사가 어느 곳에 가면 먼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성경을 그 나라, 또는 그 부족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지요.
이 선교사도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큰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 부족의 언어에는 ‘믿음’에 해당되는 말이 없습니다
번역을 하다보면 그런 일을 종종 만나지요.
퍽 오래 전의 일인데, 감리교 선교사 한 분이 보르네오인가 하는 곳에 선교사로 가서 성경을 번역하는데 그 부족의 언어에는 ‘회개’가 없답니다.
어떻게 할까?‘ 여러모로 생각했는데, 그 부족이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빨래를 자주 하는 것을 보고 회개를 ’마음의 빨래‘라고 번역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 간 이 서양 선교사도 ‘믿음’이라는 말 때문에 한참 고민하다가, 하루는 지친 머리를 쉴 겸해서 사냥을 나갔습니다.
원주민 한 사람과 같이 나갔는데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서 그 원주민이 ‘아, 피곤하다, 나무밑에 가서 드러누워 쉬워야하겠다’ 하면서 나무 밑으로 가더랍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가서 드러누워 쉬워야 하겠다’, 이 말이 ‘믿음’과 비슷한 느낌을 주더랍니다.
이 선교사는 얼른 서재로 가서 덮어두었던 성경 범역 원고를 다시 열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하나님 밑에 드러누워 쉬는 것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OK,,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 밑에 드러누워 쉬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OK,
그래서 성경을 잘 번역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밑에 드러누워 편히 쉬세요.
교회의 전통 밑에 드러눕지 마시고요, 형식 밑에 드러눕지 마시고요, 하나님 밑에 드러누워 쉬세요.
천주교가 강조하는 전통도 중요하고, 정교회가 강조하는 형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돕기 위한 전통이고, 형식이 되어야 하지, 믿음을 대신하는 전통, 형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의 교회, 용산감리교회는 천주교와 정교회와 한 지역에 있습니다.
우리나라 일간지들 가운데 「국민일보」가 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인데, 기독교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며 보도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전체 면수의 1/4쯤을 ‘미션 라이프’라고 해서 독립을 시켜서, 교회와 관련된 기사들을 싣고 있습니다.
「국민일보」 기자 한 분이 제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유 목사님을 만나고 싶어 월요일(내일입니다)에 찾아가겠습니다.’
뭐 취재할 것이 있나 봅니다;
제가 답메일을 보냈습니다.
‘환영합니다. 저만 만나지 마시고, 제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천애인사 사적 안내판도 있고, 천주교·정교회·개신교가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그것도 취재하세요.’
다시 메일이 오기를,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은 기사를 어떻게 쓸지 감이 잡힌다는 뜻이지요.
취재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모양입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의 이런 특징을 생각하면서, 또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하기 위해 ‘믿음’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달 10월이 시작되는 주간에 ‘오직 믿음으로!’ 다시 한 번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히 12:2)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이곳에 용산감리교회를 세우고 75년을 인도해 오심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용산감리교회, 믿음 위에 더욱 튼튼하게 서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들이 보면서 ‘아, 저것이 개신교회로구나!, 저 교회는 개신교회의 모범을 보이는 교회로구나!’ 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으로 살아, 흔들림없이 믿음의 행진을 하여, 하늘나라에서 계속해서 기록되고 있을 히브리서 11장에 우리의 이름이 올라가게 하옵소서.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