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l)
서 론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l)은 1895년 화란에서 출생했다. 1905년에 그의 식구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移民)해 가서 인디아나주 하이란드(Highland)에 거주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밴틸은 미시간주 구랜드래핏즈시(市)에 있는 칼빈대학교와 칼빈신학교에서 수학(修學)했고 졸업 후에는 프린스톤신학교호 가서 연구하고 신학 석사(Th.M)를 취득했으며 그후 프린스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철학박사(Ph.D)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밴틸은 1년동안 미시간주에 있는 스프링 레이크교회(Spring Lake Church of Classis, Muskegon in Michigan)의 목사로 시무한 후 프린스톤 신학교로 돌아가서 1년 동안(1928-1929) 변증학 전임 강사로 있다가 자유주의화(自由主義化)의 바람으로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진이 개편(改編)될 때 머물러있기를 요청받았으나 거절하고 필라델피아에 신설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로 가서 변증학(辨證學) 교수로 취임하고 거기서 기독교 변증학을 교수하면서 오늘에 이르렸다. 밴틸은 신학적으로 화란의 신학자 아브람 카이퍼(Abraham Kuyper)의 사상(思想)과 프린스토 신학교의 3대 핫지(the three Hodges) 교수들과 월필드(B.B. Warfield)의 사상을 종합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프린스톤의 핫지의 신학적 전통보다 화란의 카이퍼의 신학적 전통을 표본으로 삼고 그의 신학을 수립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우리가 밴틸의 학력과 전공 과목과 주요 저서들을 검토해 볼 때 그는 조직신학자가 아니고 변증적(辨證的) 신학자(神學者)인 것을 용이 하게 알 수 있다. 밴틸은 주로 기독교 변증학과 현대철학 특히 현대(現代)유심론(唯心論)철학(哲學)을 신학교와 신학교 대학원에서 전공과목으로 삼고 연구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基督敎)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을 교수해 왔으며 그의 주요 저서들(The New Modernism, 1947, Common Grace, 1954, The Defense of Faith, 1955, The Theology of James Deane, 1959, Christianity and Barthianism, 1962, The Case for Calvinism, 1964)도 기독교 변증학적 성격의 것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밴틸(CV. Van Til)은 과거 40년(1970년에 계산됨) 의 교수(敎授), 집필(執筆), 강연(講演)등의 학구적 생활을 통해서 오늘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개혁주의(改革主義) 신학자(神學者)들 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밴틸에 대한 두 가지 평(評)을 흔히 듣는다.
첫째로 우리는 밴틸의 저서들이 철학적 언어로 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을 듣는다. 그리고 둘째로는 밴틸의 기독교 철학은 그 성격이 편협해서 포용성이 없으며 그 결과 비기도교인과의 복음적 접촉을 불가능하게 한다는 평을 듣는다. 그리고 이 두 평 중에서 전자(前者)에 대해서는 밴틸의 저서들을 읽어 본 사람이면 아무라도 동감할 수 있는 중 안다. 그러나 우리는 밴틸이 변증적 신학자라는 사실과 오늘날 기독교의 변증을 현대인간의 지적(知的) 수준(水準)에서 하기 위해서는 현대인간의 언어, 즉, 철학적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줄 안다. 그리고 후자(後者)에 대해서는 물론 그것이 기독교 변증학의 방법론(Methodology)의 문제이겠지만 밴틸의 기독교 철학이 편협하다고 하면 할 수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그것은 밴틸이 어떤 철학적(哲學的) 편견(偏見)이나 독단론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적 칼빈주의에 철저하기 위해서 현대인간이 가진 비 기독교 철학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기독교 철학을 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상으로서 코넬리우스 밴틸에 관한 서론적인 고찰을 끝내기로 하고, 이제부터 그의 변증적 신학 혹은 기독교 철학에 관한 본격적인 고찰과 검토로 들어가기로 하자.
본 론
밴틸(C.Van. Til)의 변증적 신학 혹은 기독교 철학을 고찰하고 검토함에 있어서 아래와 같은 세 가지 제목하에 논하려고 한다. 즉, (1) 탕자와 같은 현대인간(Modern men as Prodigal Son) (2)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 철학의 대결(The Christian Philosophy of Life against the Non-Christian Philosophy of Lufe) (3) 신지식(神知識)에 호소(An appeal to Sensus Deitatus)인 것이다.
(1) 탕자와 같은 인간
밴틸(C.Van Til)은 현대인간이 탕자와 같다는 사실을 그의 저서들 중에서 거듭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아버지로부터 상속한 재산을 먼 나라로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탕진하고 돼지 치는 일을 하다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는 탕자의 이야기가 있다. 밴틸에 의하면 현대인간은 신(神)을 떠나서 먼 나라로 갔고 거기서 <자율적 이성>(autonomous reason)이라는 우상을 섬기면서 신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꾼 결과 <진리의 가난>속에 살면서 <죄의 쥐엄열매>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로부터의 자유를 원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버리고 먼 나라로 가서 방종한 죄의 생활을 했다. 그와 같이 오늘날 현대인간은 그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신의 계시적 말씀인 성경을 부인하고 그가 신의 피조물인 것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며 자기 자신을 <문화와 진보>의 창조자로 생각하고 있다.
현대인간은 사도 바울의 복음을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논리적이 못된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옛날 아덴 사람들에게 말한 것과 같이 현대인간에게 그가 <신>의 피조물 인 것을 말하지만 현대인간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개념은 인간의 자유의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인간은 창조의 교리는 비논리적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비합리주의자(非合理主義者)이기 때문에 그의 <자유>의 우연성을 주장하지만 어떤 때는 그는 합리주의자이기 때문에 그의 자유의 개념만이 참이며 기독교의 창조의 교리는 그것을 무너뜨리는 고로 거짓이라고 한다.
현대인은 창조의 교리를 부인할 뿐 아니라 섭리와 이적 등에 관해서도 꼭 마찬가지로 부인하는 것이다. 비합리주의자가 된 그는 역사적 기독교의 제교리(諸敎理)의 진리로서의 가능성을 인정하는데 그것은 정말로 가능성을 인정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현대인간은 그가 모든 것을 다 알수는 없기 때문에 가능성 정도는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 한편에 있어서 합리주의자가 된 현대인간은 역사적 기독교의 제교리(諸敎理)와 사실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고 그의 이성적(理性的) 해석(解釋)을 통해서 합리화시킨 후에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현대인은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현실화하기 위해서 창조, 섭리, 이적과 같은 역사적 기독교의 제교리를 (신의 계시적 말씀인 성경을 버리고)그의 자율적 이성의 빛에 비추어서 재해석하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 윤리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에 대한 반란은 맨 처음에 칸트(Immanuel Kant)의 위대한 자율적(自律的)이념(理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라고 하는 <신에게 솔직히>의 저자 로빈손)John.A.T. Robinson)의 말은 옳은 말이다. 현대인간은 탕자와 같이 그의 자족성(self-sufficiency)을 믿는다. 싸르트르(Jean Paul Sartre)의 말을 빌린다면,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간이 소원하는 자유는 <신>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현대인이 소우너하는 자유, <신>으로부터의 절대적 자유는 기독교의 <신>의 존재를 부인하며 인간의 이성을 신의 자리에 앉게 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현대인간은 그의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유일의 법칙>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대인의 <신>에 대한 배신(apostasy)은 최초의 인간이 타락했을 때 벌써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인간은 신외(神外)의 어떤 곳(자기 자신 안에서 혹은 우주 안에서)에서 진, 선, 미의 이념을 추구했으며 <신>을 떠나서 독자적(獨自的)으로 우주를 인식하려고 한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간은 최초의 인간보다 훨씬 더 고상한 철학과 세련된 이론을 갖고 있지만 <신>으로부터의 자유와 인간의 이성의 자율성(自律性)을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 최초의 인간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현대인간은 <신>의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지혜를 진리로 삼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가난>속에 살고 있다. 현대인간은 그의 벗은 몸을 진리 아닌 철학적(哲學的) 허구(虛構)로 가리려고 하지만 <신>의 불꽃 같은 눈 앞에서는 그의 벗은 몸이 벗은 몸으로 들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인은 탕자와 같이 <죄의 주엄열매>를 먹는다. 밴틸(C. Van Till)은 특히 현대인간이 <신>을 버림으로써 죄인이 되었지만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치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그는 <죄의 쥐엄열매>를 먹고 있지만 그가 하는 고생은 그의 <죄>때문이 아니라 그의 <유한성>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은 죄를 <신에 대한 배신>으로 보는 윤리적(倫理的) 죄관(罪觀)을 버리고 죄는 존재론적으로 불가피하다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죄관(罪觀)을 주장한다.
밴틸은 이렇게 기독교의 <신>을 멀리 떠나서 자율적 이성을 <신>으로 섬기며 죄인인 것을 알면서도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현대인간에게 기독교의 복음적 진리를 증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왜 밴틸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변증적 신학인가 하는 그것에 대한 답을 얻은 줄 안다.
(2)기독교 철하과 비기독교 철학의 대결
밴틸은 말하기를 우리가 기독교의 복음적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탕자와 같은 현대인들에게 접근할 때 우리의 철학과 그들의 철학의 다른 점을 잘 알고 있어야만 우리가 기독교의 변증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으며 그들에게 끌려가지 않고 그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 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밴틸은 우리가 갖고 있는 기독교 철학과 현대인간이 가진 비기독교 철학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이제 우리는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 철학과의 차이점에 관 밴틸(C.Van Til)의 견해를 살펴보기로 하자. 밴틸은 말하기를, 기도교 철학이 비기독교 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전자는 <신>을 <궁극적 존재>로 생각하고 후자는 인간을 <궁극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칸트철학의 ㅅ;ㄴ봉장;ㄴ 현대인간은 그의 자율적(自律的) 이성(理性) 외에 어떤 궁극적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신>을 궁극적 존재로 생각하고 인간을 생각할 때 <신>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2차적으로 그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밴틸은 이 서로 위배되는 두 철학 주에서 하나를 택하는 길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칸트(Immanuel Kant)를 택하느냐 그리스도를 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밴틸은 또한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 철학의 근본적 차이점에 관해서 아래와 같이 말하기도 했다. <기독교인의 인생관과 비기독교인의 인생관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전자는 창조주 <신>을 경배하고 섬기며 후자는 피조물 인간을 경배하고 섬긴다는 사실에 있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우상숭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속(救贖)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은 원칙적으로 피조물보다 조물주를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밴틸에 의하면 우리가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 철학의 차이점을 자세하게 알려면 철학의 삼분야(三分野)가 되는 존재론과 지식론과 윤리론에 있어서 그 차이점을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① 존재론
밴틸은 말하기를 기독교 철학은 <2층으로 된 존재론>(a two layer theory of reality)을 갖는다고 한다. 기독교 철학은 존재는 차원적(次元的)으로 생각해서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과 <신>의 존재는 궁극적(ultimate)이지만 인간의 존재는 파생적(derivative)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비기독교 철학은 존재를 하나로 생각하고 그 한 존재 안에 신(神)과 (만일 <신>이 있다면) 인간을 다 포함시켜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비기독교 철학은 존재론에 있어서 <신>이 궁극적(窮極的) 존재(存在)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은 <하나와 여럿의 문제(the one-and-many problem)에 관해서 말할 때 <영원한 하나와 여럿>(the eternal one-and-many)과 <시공적(時空的)인 하나와 여럿>(the temporal one-and-many)을 구별해서 말 한다.
<영원한 하나와 여럿>은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신>의 내적(內的) 통일성(統一性)과 다양성(多樣性)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영원한 하나와 여럿>을 구체적인 전칭(全稱)명제(命題)(a concrete universal)라고 부를 수 있겠다.
<신> 안에서는 전체에 관련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으며 부분 속에 나타나지 않는 전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공적인 하나와 여럿>은 <창조된 하나와 여럿>(the created one-and-many)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피조물들 중에 존재하는 주종(主從)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 인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며 <신>으로부터 따을 정복할 사명을 받았다. 그러나 <창조된 하나와 여럿>은 <영원한 하나와 여럿>에 예속(隸屬)해야 한다. 즉, 인간은 <신>의 통치하에서 만물을 통치할 것이며 <신>의 영광을 위해서 땅을 정복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을 <궁극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비기독교 철학은 <영원한 하나와 여럿>과 <창조된 하나와 여럿>을 구별 하지 않는다.
비기독교 철학은 <구체적(具體的)전칭명제(全稱命題)>가 되는 삼위일체의 <신>을 부인하는 결과로 이 <하나와 여럿>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추상적 개체(abstact particulars)를 말하지 않으면 추상적 전체(abstract universals)를 말하는데 그치는 것이다.
기독교 철학은 <영원>과 <시공>과 관계가 어떤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답하기를, 영원은 어떤 원리나 원칙이 아니라 한 <절대적 인격>을 의미하며, 여원한 <신>은 또한 시공적(時空的) 우주(宇宙)의 창조자가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비기독교 철학은 <영원을 절대적 인격>으로 생각지 않고, 우주적인 어떤 원리 혹은 세력으로 생각하며 <신>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창조주가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영원한 하나와 여럿>과 <창조된 하나와 여럿>사이에 있는 주종적(主從(的)관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② 지식론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 철학과의 차이점은 지식론에서도 존재론에서와 마찬가지로ㅓ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밴틸(C. Van Til)에 의하면 현대철학(現代哲學)은 인간의 지식의 문제에 관해서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 철학을 비교할 때 지식론에 관한 검토를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 것이다.
기독교 철학은 이층으로 된 존재론(存在論)을 말하는 것과 같이 이층으로 된 지식론(a two layer theory of knowledge)을 말한다. 지식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신>의 지식인데 그것은 절대적 지식이요, 도 하나는 인간의 지식인데 그것은 상대적이며 파생된 지식이다. 뿐만 아니라 사실들에 관한 해석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신>의 해석인데 그것은 절대적이며 독창적인 해석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해석인데 그것은 <신>의 해석을 따라서 해석하는 <의존적(依存的)해석(解釋)>인 것이다. 그러나 비기독교 철학은 절대적 지식과 파생적(派生的) 지식의 구별을 하지 않는다.
물론 <신>의 지식은 인간의 지식보다 더 포괄적이겠지만 인간의 지식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신>의 지식이 완전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신>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의 질적인 차이를 인정치 않는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그 사건에서 우리는 인간이 지식의 유추적(類推的) 체계(體系)(an analogical system of know ledge)를 찾는 대신에 지식의 독창적 체계(an original system of knowledge)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선악과의 나무에 관한 <신>의 지식과 해석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간은 사단의 꾀임 수에 넘어가서 <신>의 지식과 해석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하고 자기의 지식을 모든 존재(存在)를 아는 <교과서>로 삼았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비합리주의자>가 되는 동시에 합리주의자가 된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그가 <신>역시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신>과 <인간>이 다같이 궁극적 신비(ultimate mystery)에 둘러싸여 있다는 생각을 했으니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비합리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또 한 편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신>의 말씀을 좇지 않고 그의 심중에 있는 이성(理性)의 법칙을 좇음으로써 그가 존재의 성격과 발전 과정에 관해서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또한 타락한 인간의 합리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간은 기독교인을 어떤 때는 비합리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어떤 때는 합리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신>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이 근본적으로 같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은 기독교인이 지식론(知識論)에서 <신>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의 불연속성(discontinuity)을 말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을 가리켜서 비합리주의자라고 하고 인간의 자유와 인격성(人格性)을 구호와 같이 부르짖는 현대인은 또 한편 성경을 자증적(自證的)인 <신>의 계시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생각 속에는 전지전능자, 절대자로서의 <신>의 개념이 있다고 해서 기독교인을 보고 합리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③ 윤리론
밴틸(c. van Til)은 말하기를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 철학이 윤리학에있어서 다른 점은 전자는 인간의 도덕적 생활을 수동적으로 재건적(receptively reconstructive)이라고 생각하고 후자는 인간의 도덕생활을 독창적으로 건설적(creatively constructive)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비기독교(非基督敎) 철학(哲學)은 인간에게 선을 계시(啓示)하고 그의 행위의 선악을 심판하는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치 않으나 기독교 철학은 무한 완전한 도덕적 인격으로서의 <신>의 존재와 <신>이 인간에게 진정한 윤리를 계시해 주셨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기독교 철학은 죄가 인간의 이성을 어둡게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의지를 부패시켰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기독교 철학은 범죄해서 타락한 인간은 자신 안에서 선(善)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없으며 그 상태대로는 선을 행할 능력도 그에게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기독교 철학은 인간의 도덕의식(道德意識)을 세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한다. 첫째는 타락 전에 인간이 가졌던 완전한 도덕의식인데 그것은 <신>의 말씀의 계시를 보조해서 인간의 생활을 지도했던 것이다. 그리고 타락 후의 인간은 두 종류의 도덕의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비중생적 도덕의식(the non-regenerate consciousness of man)과 중생적(重生的) 도덕의식(the regenerate consciousness of man)인 것이다.
인간의 중생적(重生的) 도덕의식(道德意識)은 타락전의 인간이 가졌던 완전한 도덕의식에로의 <원칙상의 복귀>를 의미할 뿐이며 윤리와 도덕의 궁극적 출처가 될 수는 없으며 <신>의 말씀의 계시에 항상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비기독교 철학은 기독교 철학이 말하는 3종의 도덕의식 구별을 부인하고 인간의 도덕의식은 보다 완전한 상태로 진화되어 가고 있으며 테이러(A.E.Taylor)의 말과 같이 인간의 도덕의식이 부패했다면 그것은 인간이 영원과 시간의 틈바구니 속에서 갈등(葛藤)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끝으로 인간의 최고선(summum bonum)에 관해서도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철학은 의견을 완전히 달리 하고 있다. 비기독교 철학은 인간의 최고선(最高善)은 자아실현(self-realization)인데 그것은 합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우주의 법칙에 순응해서 그의 내적 가능성을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개인과 세상안에 있는 모든 죄악을 완전히 소멸해야 한다는 것과 그러므로 <악한자>의 사역이 계속하는 한 절대적 최고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과 기독교의 윤리는 <소망의 윤리>(an ethics of hope)라는 것을 말한다.
(3) 신 지식에 호소
우리는 앞에서 현대인은 탕자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서 <자율적(自律的) 이성(理性)>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자라는 것과 우리 기독교인이 가진 기독교 철학과 현대인간이 가진 비기독교 철학은 존재론, 지식론, 윤리론에 있어서 정반대의 입장에서 대결하고 있다는 밴틸(C. Van Til)의 주장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기독교 철학의 소유자인 우리 기독교인과 비기독교 철학의 소유자인 현대인간 사이에 공동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철학(哲學)과 인생관(人生觀)과 전혀 다른 철학과 인생관을 가진 현대인간에게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와 접촉할 수 있으며 그를 설득시켜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문제로 삼지 않을 수 없다. 밴틸은 이 기독교 변증학의 방법론의 문제에 관해서 이렇게 말한다. 로마 카톨릭 신학이나 알미니안 신학은 <이성>이라는 <중립지대>를 설치하고 거기서 우리가 비기독교 철학을 가진 현대인간에게 기독교를 합리적으로 변론하면 된다고 말하지만, 우리 개혁(改革)신학(神學)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우리가 현대인간과의 접촉점(the point of contact)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신>을 아는 지식, 신지식(the sense of Deity in man)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밴틸은 우리가 비기독교 철학의 소유자인 현대인간을 기독교로 개종(改宗)시킬 수 있는 유일의 길은 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신지식에 호소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인간은 모두가 다 <신>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진리를 알 수 있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은 모두가 다 그의 마음 속 깊이 그가 <신>의 피조물인 것과 그가 또한 <신>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로마 카톨릭 신학과 알미니안 신학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죄로 인해서 억압을 당하고 있는 신지식((神知識)에 호소하지 않고 기독교를 변증함에 있어서 이성의 자율성(自律性)을 인정함으로써 현대인간이 가진 비기독교 철학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에 오염이 되어서 현대인간을 기독교로 개종 시키기는 커녕 현대인간이 가진 비기독교 철학을 따라갈 염려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은 현대인간의 비기도교 철학을 화염방사기(火焰放射器)로 태우고 지져서 타고 남은 부스러기조차 없게 하는 것이다.
현대인간과의 접촉점은 오직 그의 마음속에 새겨진 신지식에 있음을 확신하면서... 그런데 밴틸(C.Van Til)에 의하면 현대인간이 가진 비기독교 철학을 근본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화염방사기와 같은 무기는 <전제에 의한 이론(the reasoning by presuppositon)>인 것이다. <전제에 의한 이론>은 직접적이라기보다는 간접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독교를 변증할 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다 같이 인정하는 어떤 <사실>이나 <법칙>이 되게 하는 궁극적 표준이 무엇인가를 따져 변론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비기독교인(非基督敎人)에게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을 잠시 취할 것을 요청하고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사실>이나 <법칙>이 진정으로 <사실>과 <법칙>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변론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전제에 의한 이론>에 관해서 우리는 흔히 그와 같은 이론은 순화적 이론(circular reasoning)이라고 하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그런 평에 대해서는 모든 이론이 다 출발점과 방법과 결론에 있어서 연관성을 서로 맺고 있다는 점에서 순환적 이론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 될 중 안다. 그리고 <전제에 의한 이론>은 이론이 아니라는 평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만이 이론을 벌리기에 앞서 전제를 하고 이론을 벌리는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인도 그렇게 하는 것이며, 전제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뿐임 을 말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신 삼위일체의 <신>의 존재와 그의 우주적 섭리와 작정을 전제하고 이론을 벌리는 것이며 비기독교인은 우연의 존재와 인간의 이성이 규정지을 수 있는 한도 내의 <존재의 합리성>을 전제하고 이론을 벌리는 점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밴틸(C. Van TiL)은 기독교를 변증함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 안에 억압되어 있는 신지식(神知識)에 호소하는 <전제에 의한 이론>을 하지 않고 비기독교인과의 접촉점을 인간의 이성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이유로 모든 카톨릭 신학자들과 알미니안 신학자들을 규탄할 뿐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에서 구 프린스톤의 신학자 월필드(B.B. Warfield)와 화란의 신학자 카이퍼와 바빙크(Abraham Kuyper, and Herman Bavinck)등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밴틸은 비기독교인도 그의 <올바른 이성>을 갖고 자연계시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과 인간의 이성은 기독교의 진리성(眞理性)을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 월필드보다는 인간은 죄인인 고로 그의 생각은 약해서 진리를 파괴하는 것을 일삼으며 그의 자연 원리(natural principle)에 의거해서 기회만 있으면 특수원리(special principle)로 인간에게 속죄주(贖罪主)가 되어서 오신 신을 훼방하려고 한다고 한 카이퍼를 더 높이 평가한다.
밴틸은 그가 두 신학자의 신학 중에서 카이퍼의 신학을 원칙적으로 그의 입장을 삼는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나 밴틸은 카이퍼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기도교의 신의 전제 없이 신학적 혹은 노리적인 문제들을 같이 검토하고 연구할 수 있는 공동지역이 존재 한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의 근본적 입자을 약화시켰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이퍼의 신학에서 자연신학적(自然神學的) 경향이 제거되고 그의 근본적 입장이 관철될 때 개혁신학은 장족(長足)의 발전을 할 것이라고 밴틸은 내다 보았다.
그러면 바빙크는 어떠한가? 밴틸에 의하면 바빙크의 잘못은 성경은 자증적(自證的)인 진리이며 인간과 세계를 해석하는 제일원리가 된다는 것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그는 자증적인 진리이며 제일원리가 되는 성경없이 인간이 그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옳게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밴틸(C. Van Til)은 카넬, 크라크, 버스웰(E,J. Carnel, G. Clark, and J. O. Buswell)과 같은 개혁신학자들도 비기독교인의 자율적(自律的) 이성관(理性觀)을 규탄하지 않고 비기독교인과 합리적인 변론을 할 것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특히 카넬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찌르는 말을 많이 했다. 밴틸은 말하기를 카넬은 진(眞), 선(善), 미(美)를 신과 인간의 공동지역으로 생각했는데 그와 같은 카넬의 생각은 <신>자체를 진, 선, 미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내부(이성)에서 진, 선, 미의 표준을 찾으려고 하는 생각이므로 <신>이 인간의 창조주(創造主)되심을 부인하는 생각이라고 했다.
카넬은 그의 <변증학(An Introduction to Christian Apologetics)>에서는 <모순율(矛盾律) law of contradiction)>에 호소했고 그의 ,기독교인의 공약(公約)(Christian Commitment)>에서는 <지각(知覺) 있는 의견(judicious sentiment)>에 그리고 그의 <사랑의 왕국과 생의교만>에서는 <지각 있는 의견(judicious sentiment)>에 그리고 그의 <사랑의 왕국과 생의 교만>에서는 <사랑의 번칙(the law of love)>에 각각 있는 의견> 혹은 <사랑의 법칙>을 <신>위에 놓고 그런 개념이나 원리에 의거해서 신과 <인간>을 똑같이 판단하는 점에 있어서 인간의 창조주가 되는 삼위일체의 <신>을 무시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밴틸은 이렇게 카이퍼, 핫지, 월필드, 바빙크, 카넬, 크라크, 버스웰과 같은 개혁 신학자들과 의견을 달리하면서까지 우리가 비기독교 철학을 가진 현대인에게 기독교의 복음적 진리(福音的眞理)를 증거할 때 오직 그의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는 신지식(神知識)에 호소하는 <전제에 의한 이론>만을 해야할 것이며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칼빈주의적인 변증의 방법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결 론
러쉬두니(Rousas John Rushdoony)의 말에 의하면 밴틸(C. Van Til)은 철저한 칼빈주의(Calvinism)에 기초한 기독교 철학을 제창하는 카이퍼학파(the Kuyperian School)의 중요한 멤버로서 화란의 보렌호벤과 도이벨트(D.H. Th. Vollenhoven, and Herman Dooyeweerd)가 구주(歐洲)대륙(大陸)에서의 이 학파의 대표자들이라고 한다면 밴틸은 미국에서의 이 학파의 대표자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밴틸은 일찍이 그리스도의 진리가 현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진리를 훼손하고 기독교 자체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드는 비기독교적 철학과 정면으로 싸워서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기독교 철학을 수립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와 같은 일을 하는데 그의 생애를 바쳐 온 것이다. <밴틸에게서 우리는 기독교의 대전제(大前提)들에 기초하며 인간의 경험의 통일성과 다양성(多樣性)을 충분히 고려하는 진정한 기독교 철학을 발견한다>.
밴틸은 그의 <기독교 철학>을 수립하는 과정에 있어서 모든 현대철학자들과 현대자유주의자들을 <인본주의자>로 호칭하고 <우상숭배>라는 죄명하(罪名下)에 일괄해서 정죄함으로써 그의 <기독교 철학>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ㅜ철학이라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밴틸 자신의 말대로 만일 그가 기독교 변증학 교수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철학을 가르쳤다면마땅히 책망을 받아야 하겠지만 기독교의 진리를 철저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현대철학과 현대철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신학사상을 총괄해서 비진리라고 비평했다면, 그것은 <부정(否定)을 위한 부정(否定)>이 아니라 <긍정(肯定)위한 부정> 이며 또 한 기독교 변증학 교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밴틸(C. Van Til)은 오늘날 칼.빠르트(Karl Barth)의 신학의 평론가(評論家)로서 화란의 벨카워(G.C. Berkouwer)교수와 함께 세계적으로ㅗ 이름이 났다. 그러나 그는 벨카워 교수보다 더 철저하게 역사적인 칼빈주의의 입장에서 칼.바르트의 신학의 비기독교적 성격을 폭로시켰다는 것이 신학자들간의 정평(定評)인 것이다.
필자는 1955년 가을에서부터 1956년 12월까지 밴틸이 교수하는 교단 앞에서 기독교 변증학과 험증학과 현대신학에 관한 과목들을 배웠다. 그 때 그는 교실에 있는 흑판에 크고 작은 두 개의 원으로 된 도표를 그렸는데 그것은 창조주 신과 피조물 인간의 구별이 없이는 진정한 기독교 철학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학생들의 머리속에 새겨주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은사(恩師)되는 밴틸(C. Van Til)박사를 생각할 때 마다 <서부활극>에 나오는 <정의의 사나이>역(役)을 하는 카우보이를 생각하게 도니다. 밴텔은 육척이 훨씬 넘는 후리후리한 키에 <정의 사나이>다운 풍모를 하고 백절불굴(百折不屈)의 기독교 신앙을 마음에 간직한 채 가슴에는 크고 작은 원으로 된 도표를 달고 그의 손에 쥐여진 <기독교 철학>이라는 권총으로 <서부의 무법자>들과 같은 현대인간들과 그들의 사상적 지도자가 되는 현대 철학자들과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마구쏘아 쓰러뜨렸다.
밴틸의 기독교 철학의 총탄에 맞아서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부상을 당했고 빠르트와 뿌른너와 틸리히와 니버(K. Brunner, P. Tillich. and R. Niebuhr)도 쓰러졌다. 그런데 밴틸으 기독교 철학의 총탄은 때때로 기독교를 변증함에 있어서 신의식(神意識)에 철저히 호소하기를 거부하는 개혁신학자들의 주변에 떨어졌다. 구(舊)프린스톤의 핫지, 월필드(C.Hodge, and B.B. Warfield)화란의 카이퍼와 바빙크(A. Kuyper, and H. Bavinck).
그리고 현대 미국의 카넬, 크라크, 칼.핸리, 월버.스미스(E.J. Carnell, G. Clark, C.H.Henry, and W. Smith)등이 총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진리에 철저하기 위해서는 개혁신학자들까지도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정의의 사나이> 밴틸의 <기독교 철학>에 대해서 오늘날 개혁신학자들 중에서도 비평과 비난이 많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사실이다.
여기 밴틸(C. Van Til)에 대해 몇몇 개혁신학자들의 비평을 소개하기로 하자. 보올(Jesse de Boer)은 말하기를, <밴틸은 초대와 중세와 현대의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들의 저ㅓ들을 숙독하고 충분히 검토 한ㄴ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독교 변증학은 그가 학생시절에 애독한 유심론(唯心論)철학자(哲學者)들의 영향을 받아 왜곡(歪曲) 되었다>고 했으며 할세마(Van Halsema)는 말하기를, <밴틸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의 해석이 사실이라는 생각에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는 똑 같은 사실이 있을 수 없다고 했으니 그것은 그의 철학적 유심론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단(James Daane)은 말하기를, <밴틸의 철학은 헤겔적 합리주의와 현대 실존주의 철학의 합성물(合成物)이며 밴틸은 변증법적 사고방식에 의거해서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만 생각하고 그의 최초의 인간으로서의 역사성을 부인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밴틸에 대한 여러 비평은 밴틸의 신학의 기독교 철학적 성격을 곡해(曲解)한 결과라고 보아야 하겠으므로 밴틸에 대한 진정한 비평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밴틸은 그의 기독교 철학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합리주의, 비합리주의, 연속성, 불연속성, 구체적인 전칭(全稱)명제(命題)등의 어려운 철학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는 그런 언어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그의<기독교 철학>은 결코 밴틸의 비평가들이 비평하는 대로 유심론 철학 혹은 실존주의 철학에 기초한 철학이 아니라 역사적 칼빈주의(historical Calvinsm)에 기초해서 기독교의 진리를 현대인에게 아필 하도록 철학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함이 옳은 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밴틸 박사에게 그는 탕자와 같은 현대인의 개종을 안중(眼中)에 두는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기수(旗手)라고 하는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필자가 심중에 바라는 바를 말한다면 밴틸 박사가 그리스도의 진리의 승리를 위해서 앞으로 노쇠의 현상을 보이지 않고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시간까지 <정의의 사나이>의 역을 담당하며 그의 <기독교 철학>의 총구(銃口)에서 불을 뿜어 오늘날 빠르트(K. Barth)외에 급진적으로 좌경(左傾)하는 많은 젊은 신학자들을 쓰러뜨렸으면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