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를 키우며
박찬란
계절은 가을과 겨울을 넘나들며 사람들의 마음을 분주하게 만들고 있다. 울긋불긋한 낙엽들이 나무주위에 멍석을 깔아 놓은 듯 수북하다. 뿌리로 돌아가고 싶은 순리의 본능이리라. 동물이나 식물, 인간들은 환경의 지배를 많이 받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아도 참을 수 없던 광란의 더위를 피해 여름이면, 그늘을 찾아 공원이나 산과 바다로 사람들은 떠난다. 모래알보다 많던 인파는 모두 실내로 달팽이처럼 웅크리는 계절이 돌아왔다. 집 앞 놀이터에는 참새들이 떼를 지어 즐거운 한 시절을 보내더니 요즘은 한산하다. 따뜻한 고장을 찾아 이사를 한 것인지 산사처럼 고적하기 이를 데 없다. 끓어오르는 에너지를 감당 못해 뒹굴고 뜀박질하던 아이들도 방안으로 숨은 듯 세상이 조용하다. 모두가 따스한 곳을 찾아 겨울맞이를 떠난 것이다. 지구가 물레방아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가듯 세상 만물은 해바라기로 삶의 장막을 열고 닫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시선집중이 집안으로 모인다. 동적인 시선이 정적인 시선으로 칩거(蟄居)에 들어간다. 창 밖의 낙엽을 보면서 잠시 명상에 잠긴다. 동병상련 같은 감성이 울컥한다. 지금의 내 나이가 가을의 문턱에 이른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끓어오르는 정열의 불가마도 지난 듯, 이제는 서서히 사물을 사색적으로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식물화원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들어가서 화분 하나라도 사서 나온다. 그래서인지 집안에는 사금파리 놀이하듯 화초가 가득하다. 화초를 키우는 과정에서 이치(理致)를 발견하는 즐거움 또한 말할 수 없이 크고 깊다.
각양각색의 화초는 그들만의 모양과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집안에 들이면 돈이 들어 온다하여 이름 붙여진 금전수는 월 1회로 물을 주어야 한다. 공기정화 식물이라 하여 요즘 크게 각광 받고 있는 산세베리아는 다른 것보다 수량이 많다. 키우기도 쉽고 게으른 사람도 잘 키울 수 있어 많이 샀다. 실내를 푸르게 하는 데는 파키라 만큼 운치 있는 식물도 없다. 이 식물은 월 2회로 물을 충분히 주면 잘산다. 바이올렛이나 줄무늬 페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면 된다. 극락조는 잎이 크고 마치 토란잎처럼 생겨 열흘에 한 번씩 물을 주면 쑥쑥 자라나 성장의 기쁨을 눈으로 느낄 수 있어 아주 좋다. 이처럼 식물의 종류에 따라 물을 주는 시기가 다르고 성장 속도도 모두 다르다. 식물을 키우면서 내 아이들의 본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내 품속에 학이 되어 날아온 오 남매는 삶의 기쁨이자 살아가야 할 의미이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될까? 자식들의 본성에 맞는 둥지를 찾아 올바르게 비상하는 방법을 알려 줄 수 있을까? 물가에 소를 몰고 갈 수 있지만 물을 먹는 것은 소의 마음이듯이 방법만 제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론은 다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가 자식이기에 참으로 어렵다. 부모는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냉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를 가장 많이 하는 것 같다. 또한 사람은 식물과 달라 감정과 인격이 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미묘하고 복잡하기만 하다. 훌륭한 군자들도 자식으로 인해 고뇌하던 흔적을 고전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만큼 자식은 부모를 시험에 들게 하는 영원한 과제로 남을 수밖에 존재들인 것이다.
인간의 삶 자체가 욕심이고 애착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이 생을 살아가는 가장 큰 본능일는지도 모른다. 본능을 이성으로 제어하기가 살다보면 어려울 때가 참으로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대한다면, 자식도 부모의 진실한 마음을 스펀지처럼 본받으리라 강하게 믿으며 살고 있다. 믿음은 곧 신뢰로 이어질 것이다. 내 둥지에서 자식의 둥지로 떠나보낼 때까지 반드시 알고 가야 할 기본을 알려주어야 부모는 안심이 된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 잔소리만 늘어만 가는 것이다.
지독지애(舐犢之愛)의 마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이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는 것 같으리라. 사랑하는 그 마음이 애정표현의 바탕이다. 쓸모 있는 인간의 삶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한 세상 미물 같은 삶은 부모로서 절대 바라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의 안위를 늘 걱정하는 것은 어쩌면 인생의 조미료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자식이 하루라도 마음에 머물지 않을 때가 없으니 삶에서 가장 끈끈하고 강력한 동아줄이 아닌가 싶다. 세월도 녹일 수 없는 사랑의 힘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만큼 어머니란 둥지가 내 삶의 계란 노른자가 되었다.
다섯 손가락 크기가 모두 다르게 한 손을 차지한 아이들, 다른 한 손으로 물 컵을 받치듯 조심스럽게 키우지만, 늘 어려움은 날씨처럼 색다르게 다가온다. 다섯 손가락 깨물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없지만, 유독 마음이 곱으로 쓰이는 아이가 분명 있는 듯하다. 둘째 딸이 내겐 미운 오리새끼다. 그래서 편벽에 가깝도록 감싸고 돌본 것이 사실이다.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사랑도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집착은 모든 것을 고사(枯死)하게 만드는 것 같다. 둘째 딸이 반란을 일으켰다. “부모님의 관심이 너무 부담스러우니, 이젠 제발 저를 그만 놓아 주세요?”소리친다. 황당하고 괘씸했다. “어찌, 네가 이럴 수 있니?”아픔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지나갔으며 지나온 시간들로 인해 내 행동들을 반추해 보았다.
모든 탓은 내게 있었다. 부모의 환상 같은 욕심이 지금의 사태를 안겨 준 것 같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사랑이나 관심도 지나치면 상대를 망치는 지름길인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예전에 화분을 키우고 싶어 사와서는 빨리 크라고 자주 물을 주었더니, 나중에는 뿌리가 썩어 죽고 말았다. 아이들도 스스로 자립할 기회를 주어야지, 부모의 생각과 바람을 지나치게 주입하면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려 생기가 사라짐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이런 이치를 깨닫고 그 아이의 본성대로 하도록 맡겨 두었더니, 염려와 달리 아주 제 길을 잘 찾아가고 있었다. 그랬다. 마음의 폭풍이 덮칠 때는 피하지 않고 자성(自省)을 통해 마음의 길을 찾았다. 무엇이 아이를 위하는 길이며 부모를 위하는 일인지를 객관적인 눈으로 보게 되었다. 길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내 마음 안에 우주가 있고 그 길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니 사물의 이치를 느낄 수 있었다. 화초나 자식이나 본성에 맞게 애정을 주어야지 과유불급(過猶不及)하면, 모든 일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깊은 체험으로 알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겨울 햇살이 거실 통유리를 통해 거침없이 들어온다. 그 햇살을 기다리며 고대하던 화초들은 가슴을 활짝 열고 마음껏 호흡할 것이다. 태양이 주는 은혜는 한정된 기회의 시간이기 때문에, 이순간의 햇살이 가장 고마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태양과 같다. 일정한 거리에서 골고루 빛을 나누어 주면 그뿐이다. 스스로 일어나 걸어가야 한다. 끌고 갈 수 없는 것이 자식의 길이다. 부모보다 더 큰 그릇이 자식 중에는 분명 있다. 그렇기에 부모는 자식의 길에 장애가 되서는 절대로 안 된다. 어느 정도 걷는 방법을 익혔으면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게 신뢰를 보내면서 불안하지만 참고 기다려야 한다. 자식이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이 가장우선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판단이 잘 서지 않아 부모에게 지혜를 구할 때에는 자문이나 충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 판단은 본인 의지대로 내려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스스로 지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자생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자식을 큰 인물로 키우는 가장 현명한 방법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얼마나 어리석은 어미냐 말이다.
식물이 잘 자라려면 햇빛과 물 그리고 영양분이듯이, 사람도 사랑과 건강 그리고 자유일 것이다. 모든 것은 시기적절하게 기회를 주어 자립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행동만이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삶의 자세일 것이다.
화초를 키우면서 내 마음의 크기도 함께 자라고 있다. 거실에 마련된 겨울 화원은 하루가 다르게 작은 숲을 이루어 간다. 마음속의 작은 새는 오늘도 연약한 숨소리 하나에도 발길을 멈춘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생명탄생의 숭고한 작은 떨림만이 사랑의 노래가 되어, 상대 마음을 적시는 마음의 꽃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한국수필 발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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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찬란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반영호 선생님 제일 먼저 축하를 주시니 그 기쁨 말로 다할 수 없네요. 아직도 마음수양이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노력은 멈추지 않고 하고 있습니다만, 멀고 요원한 부모의 길 입니다. 항상 댓글로써 용기를 주시니 작은 채찍으로 삼겠습니다. 쉬지 않고 정진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좋은 날 되세요.
박찬란 선생님, 인터넷 문학상에 선정되심을 축하드립니다. 화초를 가꾸면서 번져가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 식물도 잘 자랄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갑니다. 제 블로그로 진작 옮겨놓았었죠? 다시 한번 축하드리며 5월에는 장미를 더욱 사랑해 주세요.
반기룡 선생님, 많이 부끄럽습니다. 그냥 회원들간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카페활성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참여했는데 송구스런 마음입니다. 더욱 노력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건필을 기원드립니다. 반기룡선생님 참으로 감사합니다.행복한 나날이시길 빕니다.
처음엔 저도 작품 품평을 하는 줄 모르고 홈의 활성화에 조금이나마 일익을 하려고 글을 두편 그것도 수필이 아닌 남의 저서 읽고 생각을 쓰는 글을 올렸습니다. 올리고나서 얼마후 품평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삭제도 못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홈에 놔두고보니 괜스레 송구스러워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진즉 그러셨으면 아마도 전 그 품평 코너엔 글을 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여 향후 자유 글터를 신설해 달라고 감히 요청 그곳에 부족한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것마저도 활성화 조짐이 보이면 더이상 올리지 않으려 생각 중입니다만, 아무튼 좋은 성적 얻으신 박선생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김혜식 선생님 여러모로 저를 위해 배려하는 그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충북문인협회 카페에서 글을 통해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소득 입니다. 앞으로도 심금을 울리는 메시지글로 문우지정을 확인하고 소통하며 삶의 또 다른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는 참글쟁이가 되어 봅시다. 늘 건강하시고 문운이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축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언젠가 어느사석에서 어느 분께서 우리 충북문단이 점점 고령화 되어 가는게 심각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귀동냥으로 들었습니다. 패기있고 창작 의욕이 넘치는 젊은분들이 속속 문단에 등단하셔서 그분들의 아름다운 작품을 대할 수 있다면 우리처럼 중견 작가들도 그 젊은 기(?)를 받아 더욱 생동감이 넘칠 텐데 하는 욕심마저 갖게되는군요. 헌데 박선생님처럼 아직 사십대의 젊은분이 이렇듯 훌륭한 작품을 쓰시니 충북문단이 더욱 활성화 될듯해 기쁩니다.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이렇듯 아껴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늘 훌륭한 작품, 참다운 작가가 되시도록 노력하시는 박선생님이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