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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달의 우리 이름
벌써 12월이다. 음력으로 치자면, 올해는 윤달이 끼어있어 아직은 시월이지만. 달력의 맨 마지막 한 장만 달랑 남아 있는 달이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반성하면서 새 해 맏이의 준비를 할 겸 이번 호 칼럼에서는 일 년 열 두 달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더불어 ‘꽃 그림 놀이’라 하여 온 국민이 즐겨하는 오락인 화투의 열 두 패도 그 해당 달과 함께 둘러볼까 한다. 그 근원을 따지자면 19세기에 일본에서 건너온 놀이라 이곳에 소개하는 것조차 불쾌하게 여길 독자분도 있겠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우리나라에 정착되면서 온 국민의 사교 수단이 된 화투이므로 구태여 민족감정까지 개입시켜 외면할 필요 또한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서설이 길었다. 그럼 음력 첫 달부터 시작해보자.
해오름달(1월) - 새해 아침의 둥근 해가 멋지게 뜨는 달이란 뜻에서 ‘해오름’이란 우리말 이름이 붙여진 달이다. 이 달에 우리 선조들은 친지끼리 ‘덕담’을 나누며 새해를 무탈하게 보내기를 서로서로 기원해 주었다. 요즈음에야 핵가족 중심으로 새해부터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예전에는 설날을 맞아 온가족이 큰집에 모여 아이들과 어른이 한데 어울려 윷놀이를 하거나 젊은 여자들은 널뛰기를, 젊은 남자들은 연날리기를 하면서 새해를 맞이했다. 설날 이른 아침이면 ‘복조리’를 벽에 걸고 그 해의 신수를 보기 위해 ‘토정비결’을 보던 풍경, 첫 쥐의 날(上子日)에는 ‘쥐불’이라고 밭이나 논두렁에 짚을 흩어 놓고 불을 놓고 잡초를 태워 들판의 쥐와 논밭의 잡충을 제거하곤 했었다. 그러나 전 국토가 거의 도시화된 요즈음에는 논두렁 가득 타오르는 붉은 불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1월 화투 패에는 소나무와 학이 등장한다. 주지하다시피 둘 다 무병장수를 상징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1월 패에는 한 해의 복과 건강을 비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 아닐까?
시샘달(2월) - 2월 초하루는 정월 보름 전날 세워둔 볏가릿대의 곡식을 풀어 솔떡을 해먹고 1년 대청소를 하는 날로서 다가올 봄날의 분주해질 농번기를 준비하는 달이었다. 2월 화투 패의 매화는 겨울이 끝자락에서 이른 봄 사이에 개화하는 꽃인데 화투패에서는 그 가지에 꾀꼬리가 앉아 봄의 도래를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물오름달(3월) - 산과 들에 물이 오르는 달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연록의 푸릇한 우리네 강산 모습을 잘 표현한 이름이다. 이 달의 대표적 행사로는 삼짇날의 화전(花煎)놀이와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는 한식을 꼽을 수 있다. 음력 삼월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낭만적인 달이다. 청춘 남녀는 봄밤의 정취를 찾아 벚꽃 가로수 길을 찾고 초로의 노인들은 벚꽃처럼 덧없이 떨어진 옛 시절을 찾아 벚꽃 동산을 찾아 가는 달이다. 그래서일까? 화투 패에도 벚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잎 새 달(4월) - 이미 오를 대로 물이 오른 나무들이 잎을 돋우는 사 월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일인 초파일(부처님 오신 날)이 있고, 이 날 절에서는 큰 제(齊)를 올리며 전각에 불을 밝힌다. 보통 ‘흑사리’라고 부르는 등나무 줄기와 잎을 그려 넣은 사 월의 화투패는 등나무가 많은 일본의 초여름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한 함께 등장하는 비둘기는 늘 자신의 부모보다 낮은 가지에 앉는 예절바른 새로 평가된다고 하니, 가문의 문장(紋章)과 더불어 부모 공경의 의미를 새롭게 다져보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푸른 달(5월) - 어버이날, 어린이날, 스승의 날 등등의 행사가 넘치는 5월에는 단오(端午)라는 전통 세시풍습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이 날을 맞은 부녀자들이 창포 삶은 물에 머리와 얼굴을 씻고 창포뿌리를 깎아 비녀를 만들어 꽂고 그네를 탔다고 한다. 역시 화투 패에도 5월의 풍취를 상징하는 창포가 등장하는데 화투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창포를 난초로 잘 못 알고 계신 분이 많은데 이 기회에 창포임을 알아두면 좋겠다.
누리 달(6월) - 온 누리에 생명의 소리가 그득하다는 유월에는 유두(流頭)날이 있다. 이 날은 폭포를 찾아가 몸을 씻고 서늘하게 하루를 보내는데 가정에서는 유두면이라는 국수를 만들어 먹거나 계삼탕(鷄蔘湯)이라 이름 붙여진 고사리와 묵은 나물을 넣은 개장을 끓어 먹으며 곧 다가올 한여름의 땡볕 아래 쓰러지지 않도록 체력을 키웠다고 한다. 화투 패를 보면 활짝 핀 모란꽃이 등장한다. 모란꽃하면 따듯한 남도 강진 출신의 김영랑 시인이 생각나고, 내가 나온 중학교의 교화도 떠오른다. 지금 불현듯 떠오르는 시인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은 5월에 피고 지는 꽃으로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화투 패의 유 월 꽃 모란은 계절이 달리 흐르는 두 나라 사이의 거리감을 알려주는 것일까?
견우직녀 달(7월) - 칠석(七夕)날에는 견우와 직녀가 까마귀가 놓은 다리를 건너 일 년에 한 번 만난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 날 옛 처녀들은 견우와 직녀성을 보며 자신들의 바느질 솜씨가 늘기를 빌었다고 한다. 또한 15일 백중(百中)은 중요한 불교행사가 있는 날로 100가지 과일과 나물을 갖춰놓고 부처님께 공양을 하였다. 한편 농가에서는 ‘호미씻이’라 하여 음식을 장만해 산기슭과 들판에 나가 농악을 울리며 하루를 흥겹게 지냈다고 하니, 7월은 제법 먹거리가 풍족한 달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싸리나무와 멧돼지가 7월의 화투 패에 등장하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그 내막을 제대로 밝히고 있는 자료를 아직 찾지 못했다.
타오름 달(8월) - 정말 딱 맞게 지어 붙인 이름 같지만 속지 말자. 해가 지글지글 소리 내며 타는 달, 이글이글 대지를 녹여 낼 기세로 뜨거운 달 8월은 양력에 따른 것이다. 실제 음력 팔월은 가을이란 절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추석(秋夕)이 이 달 보름이니 한 낮의 무더위는 벌써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 느껴지는 가을이다. 우리 모두가 둥근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때가 추석임을 돌이켜 볼 때 타오름 달이란 이름에서 타오르는 주체는 한 낮의 태양이 아니라 가을 산 위로 둥실 떠오른 둥근 달이다. 이 달의 화투 패에도 낮은 산의 실루엣 위로 두둥실 떠오른 보름달이 보인다. 이런 풍광을 두고 ‘팔공산(八空山)’이라 하였던가?
열매 달(9월) - 가지마다 열매가 달린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옛 선조들은 9월 9일을 중양절(中陽節)이라 하여 화채를 만들어 먹고 국화전도 부쳐 먹었다고 한다. 또한 먹거리를 마련해 가까운 들과 산으로 소풍을 가는 풍국(楓?)놀이도 있었다고 하니 우리 선조들은 시절에 걸 맞는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멋과 여유로움을 지닌 백성들이 맞다. 역시 9월의 화투 패에도 국화가 그려져 있는데 일본에서도 우리네와 같은 날 중양절 풍습이 있는데 그네들은 이 날 술에 국화꽃을 넣어 마시며 무병장수를 빈다 한다.
하늘연 달(10일) - 밝달 뫼에 아침의 나라가 열린 달이다. 개천절(開天節)이 있는 달임을 떠올리면 ‘하늘을 열었다’는 의미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이 달에는 선조의 무덤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 시제(時祭)를 모시며, 추위가 좀 더 일찍 시작되는 북쪽 지방에서는 겨울나기를 준비하며 김장을 한다. 음력 시월, 즉 양력으로 십일월에는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데 이 달의 화투 패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미틈 달(11월) - 가을과 겨울의 사이에 놓여 있다 해서 붙어진 이름인가 보다. 이 달은 또한 동짓달이라 하는데 특별히 동짓날에는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기 위해 대문에 뿌리는 무속적인 행사도 있다. 나야 뭐 팥죽을 좋아하니까 상관없지만, 미신적인 것에 지독한 금기를 드러내는 어떤 분들은 귀신 쫓는 팥죽이라 해서 아예 먹지도 않던데,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각하고 살 필요가 있나? 화투 패 중에서 가장 멋진 패인 오동(梧桐)은 속칭 ‘똥’이라고도 불린다. 본래 일본의 화투에서는 12월 패였는데 우리나라에 와서 11월 패로 순서가 바뀌었다고 한다. 하여튼 똥이 주는 막역한 느낌 때문인지 나는 이 11월 패인 똥이 참 좋다. (솔직히 말하자면 쌍피에 광피가 있기 때문이지만!)
매듭 달(12월) - 모름지기 일이나 사람 관계도 끝마무리를 멋지게 잘 해야만 뒤탈이 없다. 끄트머리의 매듭을 제대로 묶지 못하며 언젠가 탈이 나도 꼭 나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멋들어진 이름이라 아닐 수 없다. 섣달에는 세찬(歲饌)이라 하여 마른 생선과 육포, 곶감 등의 마른 음식을 가까운 친척 및 친지들과 주고받는 세시풍습이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마지막 날인 그믐에는 한 해 동안 있었던 모든 거래를 마감하고 다가올 새해를 준비하다. 이 날 밤에 잠을 자면 하얗게 눈썹이 희어져버린다 하여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어떤 지방에서는 대문 앞에 채를 걸어두고 도깨비들이 얼씬 거리지 못하게 한다고도 하는데, 재미있는 우리네 풍습은 많기도 하다. 그런데 왜 12월의 화투 패에는 비가 등장 할까? 비광(雨光) 패에 등장하는 유명한 옛 일본의 서예가가 그 답의 힌트가 되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득도했다는 그 서예가의 자세로부터 새 해에는 더욱 분발하란 의미로 나름 해석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십이월의 친구들
슬로바키아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림책 작가인 두산 칼라이(Dusan Kallay, 1952년~)는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에 있는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화가와 그래픽 아티스트로 활약하면서 동시에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을 20여권 창작했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분리되면서 슬로바키아로 독립하게 된 슬로바키아는 지리상 동유럽에 속하는 국가이다.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한 때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가가 정책적으로 그림책을 보호 육성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많은 그림책이 양산되었으면서도 사회주의적 작가 양성 및 그림책 제작 시스템으로 인해 어딘지 개성이 통제된 그림책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두산 칼라이와 같은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가 등장할 수 있는 것은 예술가의 재능이란 억압한다고 결코 억눌러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입증한 셈이다.(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지난 2006년 9월 16일에 있었던 한국어린이문학교육학회 주최의 <누가 그림책을 만드는가?>세미나에서 폴란드 편 쪽지를 담당한 이지원 선생의 발표문을 참고 하면 좋을 것이다.)
두산 칼라이는 글작가와는 다른 시각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신념을 갖고 있는 그림책 작가로서 그림책을 감상하는 독자들에게도 지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월간 일러스트>의 칼럼에 따르면 그는 매 작품의 변화를 추구하며, 사소한 선 하나, 채색된 점 하나, 그래픽 작품 속의 아주 미미한 흑백대비에 이르기까지 조화를 따지는 까다로운 작가라고 한다. 시각 예술의 한 부분인 그림책을 만드는 그림 작가는 표현양식에 통달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자신 역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증거를 다양한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그는 1973년과 1975년에 BIB '황금사과상‘을 받은 바 있고, 1988년에는 세계아동도서협의회가 주는 ’한스 크리스찬 안데르센 상‘을 수상하였다.
자, 이제 그가 그려낸 열두 달의 모습은 어떨지 <십이월의 친구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나눠보자. 그는 일 년의 마지막 달인 십이월의 정령을 화자로 내세워 십이월 정령이 만난 삼 월, 유 월, 시 월을 소개하는데, 참고로 이 책의 이야기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작가인 미샤 담얀이 풀어나가고 있다. 추운 북쪽 나라에서 외로이 살아가고 있는 십이월은 나머지 십일 개월 동안은 깊은 잠을 자고 한 해의 마지막 달에 깨어나 바삐 움직인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잎들을 마저 떨어뜨리고 들판으로 눈보라를 보내 흰 눈으로 덮어야 하다. 바쁜 일상에 별다른 생각없이 지내던 십이월 정령에게 어느 날 찾아온 북풍이 십이월의 정령에게 한 해의 다른 달 이야기를 해주자 십이월은 다른 달을 관장하는 친구들을 만나보고 싶어진다. 북풍은 십이월을 위한 새 해 선물로 그를 봄, 여름, 가을을 대표할 수 있는 다른 달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십이월이 눈을 떠 보니 파란 하늘 밑 언덕이었다. 변덕스러운 삼월에는 눈보라가 치더니 어느덧 종달새의 즐거운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따듯한 햇볕이 점점 스며들었다. 남쪽에서도 어느새 제비가 날아오고 황새와 두루미도 찾아 왔다. 삼월의 정령은 십이월을 마을 축제에 데리고 갔다. 지금껏 다른 달을 구경하지 못한 십이월에게 삼월의 풍경은 너무나도 멋졌지만, 마지막 날 자정이 가까워지자 이제 두 달의 정령도 작별 인사를 나눠야만 했다. 삼월은 십이월의 정령에게 자신의 변덕스러운 바람과 지저귀는 새들을 기억해 달라고 인사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고 십이월은 다시 잠에 빠져든다.
십이월은 활짝 핀 밤꽃이 보이는 유월의 밤나무 밑에서 눈을 떴다. 온통 푸른 하늘과 풀밭, 꽃과 나비, 지저귀는 새들로 가득한 유월의 언덕에서 양치기의 피리 소리에 맞춰 춤도 추고 해가 질 때까지 아기 양들과 뛰어 놀다보니 시나브로 저녁이 다가왔다. 가까이서 들리는 뻐꾸기의 소리, 밤이 내린 풀 숲 사이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의 소리, 연못에서 소란스럽게 노래하는 개구리의 소리는 모두 십이월의 정령에게는 새로운 것들이었다. 시간이 흘러 유월이 마지막 밤을 맞이한 십이월은 유월과도 헤어질 시간을 맞게 된다. 유월의 정령은 초록빛과 황금빛 나날들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며 사라진다. 홀로 남은 십이월은 또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다.
십이월은 화창한 가을날 눈을 떴다. 그러나 들판의 풀들은 말라 있고 그림자는 한결 길어져 있었다. 그 때 노랑 옷을 입고 사과 모양의 모자를 쓴 시월의 정령이 나타나 그를 과수원으로 데리고 간다. 가을바람이 불자 제비들은 남쪽 나라로 돌아가고 황새와 뻐꾸기도 가버렸지만, 시월은 비가 거의 오지 않고 저녁노을이 여전히 아름다운 때이다. 둘은 연을 만들어 바람에 날리고 시월의 풍요로움을 만끽한다. 그러나 시월의 낮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날은 점점 추워졌다. 양치기 소년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시월이 끝나는 날, 시월의 정령도 다른 달의 정령들이 당부했던 것처럼 십이월에게 시월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다. 반짝이는 시월의 별 밑에 누워 잠이 든 십이월의 정령은 이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인 십이월로 돌아갈 시간을 맞게 된다.
십이월의 언덕은 회색빛으로 텅 비어 있고 공기는 매섭게 차갑다. 헤어진 친구들을 생각하니 한없이 외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십이월은 기운을 차리고 눈이 오기 시작하면 찾아올 동물들을 위해 여울통과 새 모이통을 준비하다. 이웃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크리스마스에 먹을 빵과 과자를 굽는다고 여념이 없다. 십이월은 한 동 동안 날마다 새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났고,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드디어 크리스마스가 되자 온 세상은 하얀 눈에 덮였다. 북풍이 다시 찾아와 자신을 또 다시 다른 달의 친구들에게 데려다 주지 않았지만 십이월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이제 열한달 동안 긴긴 잠을 자면서 다른 달의 정령들을 만나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니까.
이 그림책의 그림들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조심스럽다. 전반적인 붉은 톤은 따듯한 느낌을 전해주고, 섬세한 스케치 위에 채색된 그림들은 양식적으로 아르누보풍에 가깝다고나 할까? 체코에서 보았던 무하의 그림이 이랬던가 싶기도 하면서도 그보다는 좀 더 환상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가 더 스며있는 그림들이기에 그림 속의 정령들이 진짜 생명을 갖고 움직일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음악이 이야기하는 열두 달
<The Seasons>, Op. 37b
흔히들 클래식 음악에 있어 <사계>하며 비발디를 먼저 떠올린다. 나 역시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 1893)의 <사계>를 접하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사계>는 1월부터 12월까지의 총 12곡으로, 각각의 달의 분위기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사계>는 당시 페테르부르크에서 창간된 음악잡지 <누벨리스트>의 발행인이 1876년 1월호부터 12월호까지 그 달에 어울리는 시를 하나씩 택해 이것에 피아노 음악을 부쳐달라고 차이코프스키에게 청탁함으로서 작곡되었다. 병적일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예민했던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민요에서 느껴지는 민족적인 색체를 선율적으로 아름답고 화성적으로 우아하게 잘 버무려서, 열 두 달의 러시아 풍광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당시의 러시아력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월별 분위기와는 다른 느낌을 갖고 있는 곡들이지만, 그 제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월 - 화롯가에서 2월 - 사육제 3월 - 종달새의 노래
4월 - 달맞이꽃 5월 - 백야 6월 - 뱃노래
7월 - 수확의 노래 8월 - 추수 9월 - 사냥꾼
10월 - 가을의 노래 11월 - 트로이카 12월 - 크리스마스
이 곡들은 러시아의 대문호 프쉬킨(Alexander Pushkin), 톨스토이(Alexei Tolstoi), 마이코프(Apollon Maikov) 등의 주옥같은 시에 붙여진 곡이다. 그래서일까? 어쩐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 곡들이 작곡된 당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적 창조력은 극에 달해있었다는데, 세 곡의 심포니와 그의 교향곡적 시 “로미오와 줄리엣”, “템피스트” 및 두 개의 현악사중주 등은 이미 완성된 시기였고 <사계>를 작곡하는 동안에도 발레곡 “백조의 호수”와 세 번째 “현악사중주”를 작곡하였다. 차이코프스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동성애로 고민하다 파혼을 한 상태였지만, 극악의 상황에서도 그 고통을 음악으로 전환하여 창조적 원천으로 삼을 수 있었던 그야말로 인간적인 예술가가 아닌가 싶다.
<사계>에서는 그 어떤 차이코프스키의 곡에서 느낄 수 있는 민족적 정서보다 더 깊이 있는 러시아 특유의 분위기를 쉽게 느낄 수 있는데, 물론 러시아의 대문호들의 시를 바탕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차이코프스키가 직접 경험했던 러시아의 일상사와 대자연의 감상이 음악으로 구체화된 것이라고 본다. <사계>중에서도 ‘7월, 수확의 노래’와 ‘11월, 트로이카’에서는 러시아 민요와 로망스와 선율적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곡에서는 종달새의 노래, 파도의 물살, 사냥꾼의 나팔, 트로이카 벨소리 등등의 인상적인 장치를 차용함으로서 전체적으로 곡들의 낭만성을 한층 끌어올려주고 있다. 본래는 피아노곡으로 작곡된 것을 1942년 러시아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알렉산더 가욱(Alexander Gauk)이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편곡을 했다. 여기서 소개하고 있는 콘스탄틴 오베리안(Constantine Orbelian)지휘의 <사계>역시 가욱의 편곡에 기초한 오케스트라 곡이다. 오베리안은 러시아로 건너가 러시아 악단을 지휘한 최초의 미국인 지휘자이다. 그는 1991년 모스크바 챔버 오케스트라(Moscow Chamber Orchestra)의 음악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모스크바 챔버 오케스트라는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가 그의 열네 번째 교향곡의 초연을 의뢰한 악단으로 1956년에 창단되었는데 오늘날에는 한 해에도 120회 이상의 연주회를 전 세계를 돌며 진행하는 실력있는 러시아 악단이다. 1999년에 녹음된 이 음반에서 그들은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의 민족적 서정을 녹아낸 <사계>를 제대로 해석하여 연주해 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십이월, 이 음반을 틀어놓고 올 해를 마무리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 음반에 <사계>와 함께 수록된 <현을 위한 세레나데, Serenade for strings, Op.48) 또한 그지없이 아름다워 겨울철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에 앉아 명상을 하는 동안의 배경음악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첫댓글 재미있게 이틀에 걸쳐 읽었답니다..ㅎㅎ 메리 메리 크리스마스~~
하하,,,이틀에 걸쳐서 읽으셨다는 말씀이 참 맛깔스럽게 들립니다. 지났지만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