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대구는 머리, 양복, 구두를 전국에서 제일 잘하는 곳이었다. 대구는 또한 전국 도시 중 막걸리를 가장 많이 마시는 곳이기도 했다. '서민의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약한 경제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전통을 중시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증언
이병주 옹(1920년 8월20일생)
해방 후 47년, 대구 오리엔트레코드사 설립자. '이별의 탱고(현인)' '신라제 길손(백년설)'
'쌍가락지 논개(남성봉)' 그리고 '아마다미야(이남순)'의 작, 편곡자
대구음반사 계보
오리엔트-유니온-서라벌-아카데미
'대구의 가요'
한국의 3대 도시지만 서울, 부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구 출신 가요인이나 노래는 적다.
현재 대구에 세워진 노래비도 '비 나리는 고모령(현인)' 정도. 그러나 해방 후 47년, 작곡가 이병주 선생에 의해 설립된 오리엔트레코드사가 이 곳에 자리해 가요 산실의 역할은 물론 한때는 한국 가요의 맥을 잇는 교두보 역할까지 담당했다.
해방 후 46년 우리나라에 최초로 고려레코드가 설립되었고 이어 조선, 서울, 아세아, 부산의 코로나 등과 함께 대구의 오리엔트가 그 뒤를 이었다.
고려레코드는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을 시작으로 소프라노 김천애의 목소리로 취입된 '애국가'가 나왔고 아세아에서는 이봉룡 작곡의 '우러라(울어라) 은방울'과 '달도 하나 해도 하나',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럭키레코드는 '신라의 달밤'을 제1호로 출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대구의 부유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이병주 선생은 6세 때 교회음악을 하게 된 것이 동기가 되어 47년 '남선악기점(이후 '화정악기점'으로 개명)'과 '오리엔트레코드사'를 설립, 이재호 작곡의 '귀국선'을 비롯해 가수 신세영의 데뷔곡 '로맨스 항로' 등, 음반을 본격적으로 출시하기 시작했다.
이 오리엔트레코드사를 통해 신세영, 남성봉, 강남달, 고화성, 방초향 그리고 주기적으로 개최된 신인 콩쿨대회를 통해 도미, 방운아(방태원) 등이 배출되었고 끝 무렵에 남일해가 등장, 이를테면 오리엔트 출신가수들이 대구가요 인맥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아울러 이 무렵 평양에서 조선 최대규모의 악기점인 '상신악기점'을 경영하던 김철준, 영준 형제가 대구로 내려와 유니온레코드사를 설립, 송민도의 '애수' 등의 음반을 출시하기도 했다.
오리엔트가 가수 고화성의 '38선 야화' '꽃 피는 진주 땅'을 취입,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중 6.25가 발발한다.
지방, 즉 대구를 거점으로 출발한 오리엔트가 50년대 초, 우리 가요를 대표하는 음반사로 탈바꿈하는 데는 한국전쟁이 한몫했다. 전쟁 중에 대구에 위치해 있어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관계로 우리 음반 산업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기도 했던 오리엔트는 부산의 코로나와 더불어 50년대 초 가요의 맥을 이어오고 지켜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이러한 추세는 SP시대의 끝 무렵인 58년까지 이어졌다.
오리엔트는 6·25 피난 시절, 한국 가요의 산실이자 피난 연예인들의 사랑방이었다.
당시 이병주 선생은 문예부 일을 보던 작곡가 박시춘 그리고 강사랑, 이재호 등과 의기투합, 신보를 제작했다.
'굳세어라 금순아' '전우야 잘자라'가 모두 이 무렵, 대구에서 탄생되었다.
이어 작사가 손로원, 청진 출신의 이인권 또한 오리엔트에 가세했다.
50년대는 우리 음반시장의 최악의 침체기였지만 오리엔트, 그리고 대구가요계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물자부족이라는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도 '아내의 노래(심연옥)' '전선야곡(신세영)' '님 계신 전선(금사향)' 등 당시 한국가요를 대표하는 노래들이 오리엔트를 통해 발표되기 시작되었고 이병주 역시 '이별의 탱고(현인)' '촉석루의 밤(남인수)' '쌍가락지 논개(남성봉)' 등 창작에 몰두, 정열을 불태웠다.
열악한 녹음시설로 인해 군용 담요를 두, 세겹 얼기설기 엮어 방음장치 대용으로 사용해야 하는 등 어려움이 그 어느 때보다 컸고 전기사정마저 나빠 수시로 정전이 돼 NG가 나는 일은 다반사였다. 이 때 녹음장소는 오리엔트 사무실 2층에 위치한 '오리엔트다방', 당시 30여 평 남짓한 이 다방은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부인 김예비 여사가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금사향, 신세영, 이남순, 도미, 남성봉, 나애심 등이 대구에서 첫 취입, 50년대 가요의 맥을 잇는, 이른바 50년대 가요의 메카로 부상했다.
또 이 무렵인 53년, 대구 유니온레코드사의 공동운영자이던 김영준씨의 자본으로 백년설, 진방남, 이재호 선생, 이른바 40년대 '태평레코드 3인방'에 의해 서라벌레코드사가 설립된다.
서라벌은 '서라벌공연단'을 구성, 신인가수 발굴을 겸해 마산, 진해, 진주 등지로 콩쿨대회 개최와 함께 순회 공연길에 나서기도 했다.
이 때 서라벌을 통해 발표된 음반들은 '방랑의 처녀(진방남)' '다방아가씨(허민)' '해인사 나그네(백년설)' 등. 서라벌은 자금난으로 설립 1년 여만에 문을 닫았다.
그 후 SP 음반만을 제작하던 오리엔트 역시 LP시대로 전환되면서 문을 닫고 60년대 들어 아카데미레코드사가 등장, 잠시나마 대구 음반계의 계보를 이어갔다. 작곡가 이병주, 추월성, 작사가 호심, 그리고 가수 윤일로, 김광남, 강남달 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음반 취입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구기독교방송국 스튜디오를 빌려 음반을 레코딩했던 소규모 레코드사인 아카데미 역시 20여장의 음반만을 출시한 뒤 문을 닫았다.
일제 하 '만경관'을 시작으로 대구극장 그리고 키네마, 대도, 시민, 자유, 송죽극장. 이 무대들이 곧 대구가수들의 주 활동무대이자 대구 공연문화의 꽃을 피웠던 곳이다.
51년 대구극장의 콩쿨대회에서 가수 도미, 그리고 방운아(방태원)가 탄생했고 54년에는 대도극장에서 열린 콩쿨대회 무대를 통해 당시 대건고 3년생인 남일해가 1등을 차지, 이병주 곡인 '추억의 오동도'와 '애상의 블루스'를 취입하며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 드문 저음의 넓은 음역을 가진 가수였지만 역시 경상도 억양의 발음은 어쩔 수 없어(?) 한동안 노래 취입 시, 장애가 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대구 출생, 혹은 대구를 배경으로 출발한 가수들을 살펴보자면 '검은 장갑'의 손시향을 비롯, '남과 북'의 곽순옥, '사랑의 백서'의 라운 그리고 70년대 들어 등장한 맹인가수 이용복, '내 곁에만'의 박미성, 그리고 서울대 출신 포크듀엣 '현경과 영애'의 이현경. 아울러 80년대에 등장한 손무현, '한마음'의 강영철, '015B'의 장호일, 그리고 요절한 포크가수 김광석도 대구 대봉동 출신이다. 비교적 최근가수들로는 김태욱, 양파, 쏘냐, 그룹 '비쥬'의 최다비, 이재영, 정석원, 최재훈 등이 있다.
대구 출신 작가군(群)을 보면 앞서 거론한 이병주, 추월성(본명 한덕민), 성주 출신의 호심(본명 박대림)을 비롯해 강영철, 곽치근, 김상직, 남석현, 박해수, 신상호, 이길언, 장영철, 조경제, 허기춘, 허현 선생 등이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작곡가 배상태의 경우는 경북 성주 출신으로 56년, 대구 KBS 전속가수로 활동하기도 해 대구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대구를 배경으로 한 노래 역시 상대적으로 타 지역에 비해 적다.
'비 나리는 고모령(유호/박시춘/현인)', 그리고 이어 나온 '잘 있거라 고모령(현인)'을 비롯해 '달뜨는 팔공산(김영춘)' '대구역 밤11시(오기택)' '대구역 이별(남일해)' '그리운 대구역(유성진)' 등이 있고 또한 대구의 사투리인 '언지예'의 묘한 말뜻의 뉘앙스를 살린 노래 '언지예(김상희)', 그리고 가수 박재란이 노래한 '대구아가씨(남국인/백영호/박재란)'도 대구를 소재로 한 노래 중 하나다.
한편 '비 나리는 고모령'의 작사가 유호 선생은 본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 노래 발표 당시까지, 정작 '고모령'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우연히 지도상에서 '고모령(顧母領)'이란 지명을 본 뒤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을 모티브로 노랫말을 지었다 한다. 결국 이 '고모(顧母)'라는 단어를 소재로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를 훌륭하게 담아낸 이 노래로 인해 대구의 작은 고개, 고모령은 일약 전국적인 명소로 거듭났다.
69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비 나리는 고모령'이 영화화되었을 때 새로 만들어진 영화주제가 '고모령을 넘을 때'는 가수 박건에 의해 취입되었다.
그런가하면 최근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가수 정연찬은 '황혼의 대구공항'이란 곡을 발표, 노랫말 속에 신천대로나 동성로, 팔공산 등 대구의 지명을 대거 등장시켰다. 지역마다 특정노래들이 많은데 유독 대구만 없는 것 같아 대구 소재의 노래를 만들어 보았다는 것이 그의 변(辯).
한편 대구의 번화가 '동성로' 이름을 빌려 '동성로시스터즈'라는 특이한 이름의 이색 여성트리오가 등장, 활동을 시작한 점도 이채롭다.
아울러 작곡가이자 MBC 대학가요제 심사위원이기도 한 이상래는 대구에서 통기타 가수로 출발, 현재까지도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고 민중가수 박창근 또한 93년 듀엣 포크 그룹 '우리 여기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대구에서 활동 중이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2005 대학가요제'에서 '잘 부탁드립니다'로 대상을 수상한 대구의 5인조 혼성그룹 Ex. 경북대, 대구대, 영남대 학생들로 구성된 Ex의 리드 보컬 이상미는 등장하자마자 개인 홈피 방문 10만명을 돌파했을 정도로 단숨에 신데렐라로 뛰어 오른 유망주다.
아울러 80년부터 시작된 '달구벌 대학가요제'격인 '복현가요제'를 통해 등장, 맹활약하고 있는 '소리타래'는 대구의 '노찾사'로 불리우며 대구가요의 명맥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