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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은 병, 모르는 것은 약 김 학
*어깨너머 공부와 요즘의 수필공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이를 바꾸어 말한다면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과 같다. 수필쓰기 초년병 시절 나 역시 다를 바 없었다. 4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수필 이론서가 거의 없었고, 수필을 가르치는 교육기관도 지방은 물론 서울에도 없었다. 그러니 어깨너머로 수필공부를 할 수밖에. 선배들이 발표한 수필작품을 읽으면서 스스로 수필 쓰는 요령을 터득해야 했다. 제목붙이기, 서두쓰기, 내용전개, 결미쓰기를 눈여겨보면서 하나하나 익혀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익히는 속도가 더딘 것은 당연했다. 수필쓰기에 대한 이론도 갖추지 못했었다.
그때에 비하면 요즈음은 전국 방방곡곡 어느 곳에나 수필을 배울 곳이 많다. 대학교 평생교육원을 비롯하여 문예지, 신문사, 백화점, 자치센터, 문화원, 노인복지회관 등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필공부방들이 있다. 배우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수필을 배울 수 있고, 그 연줄로 인하여 수필가로 등단할 수도 있다. 참으로 지금은 수필공부를 하기에 아주 좋은 세상이다.
*수필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자세
대개 수필에 관심을 갖고 있던 분들이 수필공부방을 찾기 마련이다. 직업 일선에서 물러나 이모작 인생을 시작하며 소년소녀시절의 꿈인 문학을 찾아 나선 분들이 대다수다.
그들 중에는 처음부터 열심히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작품이 서툴지만 꾸준히 노력하니 발전 속도가 빠르다. 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수필이론을 모르니까 그냥 버릇대로 수필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점점 수필이론을 알게 되면서 주눅이 들고 두려워져서 수필쓰기 속도가 느려진다. 이들은 아는 것이 병이라면서 쉽사리 다시 붓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필은 쓰지 않지만 열심히 강의실에 나와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도 있다. 언젠가는 대박을 터뜨릴 듯 진지한 자세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처럼 귀 명창으로 한두 학기를 보내고서도 결국 수필을 한 편도 쓰지 못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잘 쓰든 못 쓰든 열심히 수필을 쓰는 수강생이 예쁘다. 어떤 분은 어김없이 매주 한두 편의 수필을 쓰는 이들도 있다. 70대 중반의 어르신도 그처럼 진지하게 수필에 접근하더니 드디어 1년 만에 등단의 관문을 통과하고 바로 처녀수필집을 펴낼 준비를 서두르기도 한다.
운동경기에서도 열성적인 연습벌레가 훌륭한 선수로 성장하듯 글쓰기 공부 역시 마찬가지다. 자꾸 글을 쓰면서 스스로 문리를 터득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려니 싶다.
*수필의 길이
수필의 길이가 200자 원고지 몇 장이어야 한다는 명문규정은 없다. 원래 수필의 길이는 신문이나 잡지 편집자들이 수필에 배려하는 지면이 얼마냐에 따라 그 지면에 맞추려고 원고지 5매, 10매, 15매, 20매라고 정했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어 수필 한 편이라고 하면 원고지 10매 내외로 굳어지다시피 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수필문학의 선구자 윤오영, 피천득 등이 쓴 대부분의 수필이 원고지 5~7매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짧은 수필인데도 얼마든지 깊이와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 주지 않았던가. 수필쓰기 초심자들은 처음엔 원고지 5매를 채우는데도 힘들어 한다.
그러나 습작기간이 길어지고 창작능력이 향상되면 자꾸 원고길이가 길어진다. 원고지 20매를 훌쩍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다. 글을 다듬으면서 잘라내라고 권하지만 아까워서 스스로 싹둑 가위질을 하지 못한다.
그럴수록 과감하게 잘라낼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독자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군더더기를 꼭 잘라 주어야 한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긴 수필보다는 짧은 수필을 좋아한다.
컴퓨터 화면 하나에서 읽을 수 있으려면 원고지 5매 정도가 알맞다. 그걸 장편수필(掌篇隨筆)이라고 한다. 요즘엔 인터넷에서도 원고지 5매 소설이 나온다. 그것을 일컬어 미니픽션(Mini Fiction)이라고 한다.
소설도 그렇게 짧아지는데 수필이 어찌 옛날처럼 길어야 할 것인가. 또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시나 소설은 그 범주가 넓고 큰데도 그 길이의 길고 짧음에 따라 가르지 내용의 무겁고(重) 가벼움(輕)이나 부드럽고(軟) 딱딱한(硬) 것으로 나누지 않는다.
소설은 내용과는 상관없이 길이에 따라 콩트, 단편, 장편, 대하소설 등으로 나누지 않던가? 수필도 이제는 내용에 따라 분류하지 말고 길이에 따라 분류하면 어떨까 싶다.
*수필의 구성
수필의 길이가 짧던 길던 상관없이 제목과 서두, 내용, 결미가 있기 마련이다. 그 네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그걸 수필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 네 가지 가운데 독자가 맨 처음 만나는 것이 제목이다.
제목은 독자의 궁금증이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좋다. 문예지나 동인지를 받으면 먼저 목차를 펼쳐 본다. 그 목차에서 내 작품이 없다면 아는 분들의 작품을 찾고, 그 다음에는 좋은 제목을 골라 읽게 된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책을 펼치면 그 작품의 서두와 만난다. 그 서두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 책을 덮거나 다른 작품으로 건너뛰게 된다. 수필의 서두 몇 줄이 그 작품의 성패를 결정짓는다는 말에 귀를 기울일 일이다.
수필가는 독자가 한 눈을 팔지 못하고 끝까지 읽도록 자기 수필에 문학적 장치를 해야 한다. 텔레비전 일일드라마가 어떻게 시청자로 하여금 다음날 또 보고 싶도록 유도하는지 음미해 보고 배울 일이다. 내용 전개 역시 독자가 지루한 느낌을 받지 않고 그 작품에 빠져들도록 유도해야 한다. 독자가 이 정도까지 따라왔다면 이는 성공적이다.
그러나 또 알아 둘 게 있다. 내용이 너무 평범하다 보면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없고, 감동을 주지 못하면 그 작품을 문학으로 대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범한 내용은 금물인 것이다. 결미는 서두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한다. 결미를 쓸 때는 감동적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서 쓰면 좋을 것이다.
어떤 라스트 신이 오래 기억에 남던가? 수필의 결미는 바로 그렇게 끝나야 한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좋은 영화를 자주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수필의 문장
수필의 성패는 그 문장에 달려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수필은 문장으로 꾸며지는 문학인 까닭이다. 일찍이 허세욱 교수는 수필의 문장은 원고지 위에 설지언정 누워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말은 서서 달릴 수 있는 자세라야지 누워서 잠을 청하는 자세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사나 형용사 등 묘사를 위한 서술어가 많을수록 문장이 서서 달리지만, 명사나 부사 등 개념을 집합한 논리체가 많을수록 문장은 동맥경화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필의 문장은 서술인데 이를 두고 형상(形象)이라 했다. 어떤 수필가는 수필문장에서 지름길을 두고 빙 에둘러 가는 표현을 사용하는 수가 있다. 그것은 바른 수필의 길이 아니다. 한 글자라도 더 줄일 수 있으면 줄여야 하는 게 수필의 문장이다. 나는 그걸 언어의 경제학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또 수필의 문장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 수필의 문장은 작가가 어휘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맛이 다르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활용하는 게 가장 좋다.
그러려면 한자말은 가능한 한 모두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꾸어야 하고, 외래어 역시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것은 문학의 사대주의에 다름 아니다. 문장을 엮을 때 번역문 투인지 아닌지 잘 살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번역문인지 아닌지 분간을 못할 정도로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문장을 엮어 갈 때 토씨[助辭]를 잘 활용해야 한다. 문장의 리듬을 살리려면 토씨를 넣어야 할지 빼야 할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토씨를 넣어야 할 곳에서 빼고, 빼야할 곳에서 넣는다면 마치 학교 앞 도로의 턱을 만들어야 할 곳에 턱을 만들지 않고, 없애야 할 곳에 턱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토씨에는 주격 토씨와 목적격 토씨가 있다. 주격 토씨에는 ‘이’와 ‘은(는)’이 있고 목적격 토씨에는 ‘을’과 ‘를’이 있다. 어떤 글자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문장의 흐름이 달라진다.
우리글은 그렇게 섬세하다. 외래어가 어떻게 감히 우리 한글을 따라올 것인가?
*수필가의 바른 자세
수필가는 모름지기 시인이나 소설가, 희곡작가, 평론가 등 다른 어느 문인보다도 더 철저한 한글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세종대왕께서 창제한 한글을 제대로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게 바로 수필가들의 임무라는 이야기다. 이 세상에는 6,500개 언어가 있고 그 언어 가운데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400개라고 한다. 유네스코가 이들 400개 문자 가운데 문자가 없는 6,100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문자를 가르치면 좋을지 연구한 결과 우리 한글이 1위로 뽑혔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한글을 우리 수필가들이 갈고 닦고 지키지 않으면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수필은 서른여섯 살이 넘은 중년이 쓰는 글이라는 피천득 수필가의 이야기는 이제 바뀌었으면 좋겠다.
소년소녀나 청년들도 자기가 살아 온 역사가 있는 만큼 그 나름의 체험을 바탕으로 수필을 쓸 수 있고 또 써야 할 것이다. 수필을 쓰는 데 나이제한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수필문단이 결코 늦깎이들만의 문학경로당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필은 문학의 용광로다. 수필이란 용광로에 시를 넣으면 서정수필이 되고, 소설을 넣으면 서사수필이, 평론을 넣으면 비평수필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이런 수필이 푸대접을 받아서는 안 될 일이다. 21세기에는 수필이 모든 문학 장르를 아우를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헛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김 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 등단/<자가용은 본처 택시는 애첩> 등 수필집 10권,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펜문학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한국수필상, 전주시예술상, 동포문학상 본상, 연암문학상 대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등 다수 수상/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임실문인협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등 역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전담교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이사장/ |
첫댓글 유익한 수필쓰기의 길잡이를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