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조직경영이 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력
배 경 식 교수(한일장신대학교)
들어가는 말 필자는 칼빈학회의 학회지인 칼빈연구 제3집에서 ‘칼빈의 법과 제도안에서의 경건’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칼빈의 경건실천을 개인경건이라기 보다는 교회와 국가라는 공적 기관을 통한 제도적 경건임을 부각시킨바 있다. 그 논문에서 칼빈이 제네바라는 도시에서 종교개혁을 이끌어 갈때 ‘교회의 정치화와 정치의 교회화’를 시도하였다고 규정한바 있다. 본 논문을 통해서는 칼빈의 경건실천을 조직경영으로 보면서 그의 주저서인 기독교강요가 한국 교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를 경영적인 관점에서 진단과 점검을 해보려 한다. 이 논문이 갖는 한계와 문제 제기는 칼빈의 사상과 개혁의도를 한국 교회 안에서 재조명하면서 칼빈의 개혁사상을 부각시키자는 데 있다.
1. 기도하는 신앙의 공동체 농어촌 교회의 현실은 처참하다. 곳곳에 폐교와 헌집들이 흉물스럽게 자리 잡고 있으며 텅빈 거리에는 가끔씩 지나가는 자가용차들에 의해 먼지만 날릴 뿐 가게와 음식점 등에는 손님들도 없다. 장사가 되지 않으니 그곳의 사람들은 사는 것이 흥겹지 않다. 그래도 과거에는 면단위의 일들이 소재지를 중심으로 일어났었는데 우회도로가 생겨 버려 모두 다 비켜 지나가 버리고 그곳은 일부러 찾아오는 일가친척이나 손님들 뿐 이다. 이러하다 보니 농촌교회의 대부분은 20-30명 정도가 모이고 10명 이하의 교회들도 수두룩하다. 이런 교회들은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인들의 평균연령이 60세에서 이제는 70세로 올라가고 있다. 이농현상에 의해 자연스럽게 젊은이들은 대도시로 빠져 나가버렸고 할머니들만 쓰러져가는 빈 집을 지키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농촌의 공동화 현상이 조금만 더 진행되면 통폐합될 교회들이 많이 있다. 농촌에 교인들이 없으니 지역의 교회들이 통폐합을 해서 공동으로 예배를 드리며 행사를 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있겠는가? 이미 주일학교는 각 교회에 남은 두, 세 명의 아이들이 읍내 큰 교회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여름성경학교와 성탄절 행사를 연합으로 치루고 있다. 최근에 직접 들은 어느 기장 목사님의 간증이야기로부터 논문을 시작하려 한다. 이 목사님은 30여명 모이는 농촌교회에 자원하여 들어가 지난 3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밤마다 시간을 정하여 특별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말씀을 전하고 찬양과 기도를 드리면서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다. 그 교회에 속한 신앙심이 깊은 젊은 30대 중반을 넘긴 어느 청년이 아버지가 특수작물 영농사업을 한다고 하기에 경기도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귀농을 했다고 한다. 은행에서 돈을 대부받아 시작을 했는데 그만 그 사업이 망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 빚을 청산 하려했으나 턱도 없이 부족하고 하루아침에 자신과 아버지가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렸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청년은 열심히 교회에 나오면서 낙망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이 청년이 목사님께 상담을 요청하기를 ‘신학을 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고 목사님은 그 일을 위해 함께 계속 기도했다고 한다. 예정대로 신학대학에 합격을 했 으나 그 청년의 집안 형편이 딸들이 보내주는 용돈에 의해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인데 등록금은 엄두도 못내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은 전혀 교인들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인들이 자신들의 생활비로 써야 될 돈들을 내어 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100만원 다른 한사람은 50만원, 또 다른 사람들은 10만원, 5만원 씩 동참을 하여 등록금을 내고 남았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그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으면서 신학을 하고 있으며 자신이 보기에 훌륭한 목회자가 될 것이라는 말까지 곁들였다. 그러면서 그분이 제시한 성경구절은 행 4:14-42이었다. 그중에서도 칼빈이 강조한 ‘말씀과 기도와 성찬 참여’이었는데 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님 가운데에도 칼빈의 보수적인 전통을 따르는 목회자들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목사님이 열정적으로 말씀 전하는 것을 노회석상에서 들으면서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기장에도 신령한 것을 체험한 젊은 목사님이 계시는 구나’라고 할 정도로 사도행전을 말씀을 중심으로 한국 교회가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는 것에 필자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아멘’으로 화답을 하였다. 그 목사님은 지금까지 고등학교 시절과 목사 안수 시에 가졌던 두 번의 신앙 체험 후 방언을 계속하고 있으며 자신이 속한 교회에서 매일 새벽기도회 때는 병자들을 위한 안수기도를 하고 있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도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그분이 기장의 노회석상에서 강조하신 말씀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들,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언은즉 나으니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분의 이러한 체험적인 목회활동을 접하면서 교회는 초대교회를 표본으로 하는 신앙의 공동체로써 예배와 교육과 선교와 봉사는 물론 구제와 치유 그리고 신유와 은사까지 총망라하는 하나님 중심의 종합 경영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목사의 비전제시와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 의지이다.
2. 교회경영의 삼 요소 칼빈에게서 보여지는 교회 경영의 삼 요소는 ‘말씀과 기도와 성찬에의 참여’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행 2:42를 드는데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는 것이다. 그는 이 구절을 “교회가 모일 때는 반드시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를 드리며 성찬에 참여하며 구제하는 것이 불변의 원칙”이라고 까지 강조한다. 이것은 초대교회 당시에 확립된 질서였으며 바울서신뿐 아니라 그 후 여러 세기동안 이 질서가 계속되었고 지금도 이 전통은 장로교 안에서 유지되고 있다. 1) 말씀의 경영 개신교 신앙생활에서 기본이 되는 ‘말씀과 기도와 성찬에의 참여’에서 말씀이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자신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참된 지식’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께 가까이 하려함이요 자신을 아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죄악 된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구원의 역사와 새로운 생명의 태어남이 있게 되는 것이다. ① 신인식의 안내자 신 인식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과 계시의 말씀인 성경에 의해서이다. 전자의 자연을 통한 신 인식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이 죄악으로 인해 부패해졌기 때문에 신인식의 원천으로 부적합하다. 후자인 성경을 통한 신 인식은 성령의 내적조명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지혜를 갖게 된다. 개혁자들에게 성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였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외적인 말씀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한 활동과 임재인 내적인 말씀을 첨가하여 루터는 성경을 해석한다. 이들은 모두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와 전통의 권위에 반하여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를 개혁의 원리로 삼았다. 이는 바울이 말한 '본문의 전적 영감'(verbal plenary inspiration)을 받아들여 하나님이 성경의 직접 저자라는 전통적 영감관을 가졌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칼빈보다 자유스럽고 비판적이다. 루터는 ‘성경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유일한 근거이며 성령이 성경의 저자’라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로마서나 요한복음이 가치 있는 책이었으며 야고보서나 요한계시록은 제2차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전도서를 솔로몬의 저작이라고 보는 견해를 거부했으며 에스더는 유대인의 민족주의 감정이 너무 지나치게 나타나있기 때문에 구약성경에서 제외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함으로써 성경해석에 관한 자유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칼빈은 문서로서의 성경을 중시한다. ‘천상의 교리를 인간의 망각과 오류와 타락된 판단으로부터 보호하기위하여 말씀을 문서화 시켰다’는 것이다. 문서화 된 것들은 율법 서판과 두루마리 그리고 성경 등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빗나간다면 이는 마치 트랙을 벗어나 결승점을 향해 질주하는 것과도 같다. 비록 목표점을 향해 천천히 가는 것이지만 옳은 길에 들어서서 절름거리며 가는 것이 낫다. 성경이 기록됨으로써 제한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기억이 흐려지고 생각이 바뀌어 가치관이 달라질지라도 성경의 본문만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천상의 교리이기 때문에 그 진의가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이다. 그래서 그는 성경 모든 책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대하였다. ② 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갖게 하는 것은 교회의 결정이 아니다. 로마교회는 교회의 판단아래 성경을 교회에 종속시키고 교회가 편리한대로 성경해석을 한다. 교회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임을 수호하고, 성경 내용의 무오성을 보존하고 성경을 기반으로 교리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에’ 교회의 책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이에 대해서 교회는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성경은 성령의 책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인쳐 지기 전에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충실히 선포했다는 것을 우리가 납득 할 수 있으려면 선지자들이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 같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야 한다.”(사 59:21) 이를 통해 칼빈은 하나님 자신만이 그의 말씀에 있어서 유일한 증거가 되고 성령의 내적 증거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는 성경의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교회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성경의 기반위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엡 2:20) 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바로 성경의 저자이며 성경의 최고 증거는 하나님이 친히 그 속에서 말씀 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성경의 가르침은 하늘로부터 온 것임이 명백해 진다. 우리가 순수한 눈과 의식을 가지고 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존엄이 우리 앞에 보여 순종하게 된다. 성령의 내적 증거는 논리보다 우월하다. 그는 이를 통해 교회를 무오의 성경 해석자로 여기는 가톨릭교회의 성경관을 거부했다. ③ 성경 해석 칼빈의 성경에 관한 ‘신적인 교리에의 순종, 문서화의 중요성 그리고 성령의 내적인 증거’라는 입장은 그의 신학적 규범이 되어 일생동안 성경강해를 하게 하였다. 그는 1539년 슈트라스부르크 체재 시부터 로마서 강해를 시작으로 죽는 해인 1563년 까지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성경을 강해하여 그의 사후에는 베자(T. Beza)를 통해 그의 강해서가 출판되었다. 그는 성경해석을 할 때 성령의 내적 증거를 간구하는 기도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다양성도 인정한다. 이는 인간이 완전하고 충분한 지식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인간이 성경적 진리를 찾기 위해 서로 돕고 보충하기를 권고 한다. 성령 안에서 주는 해석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2) 기도의 경영 교회의 사역자는 자신의 성스러운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도에 전념했고 지혜와 총명, 모략과 재능의 영을 구했다(사 11:2). 그는 ‘교리를 믿으며 생활이 거룩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손상시키거나 그들의 사역에 수치가 될 만한 결함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딤전 3:2-3, 딛 1:7-8). 교회의 사역자들인 감독이나 집사 그리고 장로를 세울 때는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한다(행 14:23). ① 소명감 사도직은 특별한 직분이기 때문에 친히 주의 입으로 부르셔서 임명하셔야만 했다. 사도들이 유다의 후임을 구했을 때도 두 사람을 세워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결정 하게했다(행 1:23-26). 바울이 자신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자”(갈 1:1, 12)라고 말한 것은 사도의 직을 올바로 수행하기 위해 소명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의 서신들 서두에는 먼저 자신의 소명을 자랑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소명은 사람들을 통한 투표와 임명의 절차를 거쳐 합법화 하였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 선교를 위해 특별히 지명하셨음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의해 그가 임명되도록 함으로써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였다(행 13:2). 교회의 질서유지는 투표에 의한 것이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행 14:23)라는 말은 당시 헬라 사람들의 풍습에 의해 공동체 전체가 거수로 그 소원을 표명한 것이다. 투표를 통해 교회 전체의 권리와 자유를 손상시키자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맛디아의 사도 지명이나(행 1:15), 초대교회 일곱 집사의 선정(행 6:2-7)도 교회 공동체의 합의와 승인 절차를 거쳐 임명되었으며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합법적인 것이다. 소명에서 중요한 것은 안수의례이다. 이 의식은 직분의 위엄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표징으로서 유용하며 임명받는 사람에게도 이후로는 자신이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소명감을 가지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곱 집사들과 바울 그리고 바나바에게서 보여지는 것처럼(행 6:6; 13:3) 이들은 안수를 통해 구별되어 자신들의 직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안수를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공적으로 사용하는 인증을 받는 것이다. ② 금식기도 성경에는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백성을 모으고 기도와 금식을 할 것이 규정되어 있다. 인간의 육이 방종하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육을 약화시키며 복종케 하기위해 기도와 말씀의 명상을 하는 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자신을 낮추는 증거가 되게 하기위해 금식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쟁이나 기근, 전염병 그리고 다른 재앙을 통해 벌을 주시려고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손을 들어 치실 때에는 단독으로나 또는 가족이나 국가적으로 금식을 선포하고 죄를 고백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금식은 자기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표징이므로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이 더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는 유대 민족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에스더가 ‘금식을 선포하고 규례를 어기고 죽으며 죽으리라’(에 4:16)는 일념을 가지고 왕 앞에 나아가는 장면이다. 어떠한 중대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때 기도와 함께 금식하는 것이 유익하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안수할 때 금식하며 기도했으며(행 13:3) 안나가 금식과 기도로써 주를 섬겼다(눅 2:37). 느헤미야가 동족의 해방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것도 금식이었다(느 1:4). 칼빈은 “어떤 재앙이 한 지방이나 개인에게 닥쳐 올 때에 주의 진노를 피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목회자는 교회에 금식을 권고할 의무가 있다”라고 말한다. 주께서 벌을 내리실 때는 위험신호와 경고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식은 하나님의 징벌이 내릴 때 겸허한 자세로 주의 엄한 벌을 면하는 방책 이었으며 관습으로 되어있었다. 백성들을 향해 ‘굵은 베와 재를 쓰고 울며 금식하라’(욜 2:12)는 것은 여호와 앞에 엎드려 외적 증거를 보이라는 말과도 같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태도를 나타내기 위한 거룩한 훈련이다. 요나의 전도를 들었던 니느웨 사람들도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욘 3:6). 금식은 일평생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면에서 참된 금식은 “옷을 찢지말고 마음을 찢으라”(욜 2:13)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자기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겸손이 없다면 하나님을 향하는 금식 자체는 무의미하다. ③ 리더십과 소명 칼빈의 리더십은 신적인 것으로 표현된다(출 22:8, 시 82:1,6). 이것은 집권자들이 하나님의 위임과 권위를 부여 받았으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대표자, 대리자의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지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기셨다. 모세와 여호사밧이 유대의 각 도시에 임명한 재판관들에게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 즉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재판하라’(신 1:16-17; 대하 19:6)는 말이 이를 반증해 준다. 리더십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의 낯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신 1:17)이다. 지상의 모든 권위와 리더십이 권력자들이 수중에 있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거룩한 명령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사이다. 은사는 은혜의 다양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배되며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이 은사를 잘 사용해야 한다(고전 12:4). 권세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롬 13:1-2). 주권자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써 선을 행한 사람들을 칭찬하며 악을 행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행사한다. 이들 가운데에는 다윗이나 요시야, 히스기야와 같은 왕들이 있었고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외국에서의 고관도 있었으며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사사들과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주께서 이들의 지위를 시인하시고 공언하셨다. 정권은 하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당한 인간생활에 그 어떤 소명보다도 신성하고 영예스러운 위임 명령이다. 집권자들의 리더십은 위임사항이기 때문에 대리자로서의 충성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자신의 재판석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라는 말을 들으려면 어찌 감히 불공정한 재판을 하겠는가? 각기 다른 두 여인의 친권을 주장하는 재판에서 솔로몬의 ‘한 어린 아이의 생명을 살리는 지혜로운 재판’(왕상 3:16-28)이 좋은 예이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봉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리더십은 빛이 나며 거룩한 직책을 올바르게 행사한다고 생각할 때에 보람을 느끼며 큰 위로를 받을 수 있다. 3) 성례전의 참여 경영 칼빈의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그대로 수용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림으로 그리듯이 나타내며 사실적인 형상으로 묘사해서 우리 눈앞에 보여 주는 것이다. 성례는 믿음의 기둥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성령을 통한 표징이요 인장이기도 하다. 이는 공식적인 문서에 인장을 찍는 것과도 같으며 바울 자신도 할례를 ‘인’(롬 4:11)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에 대한 그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말씀을 통한 것보다 더 명백하게 확인 시키신다. 성례를 통해 신자들은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경건한 명상에 의해 성례안에 감추인 숭고한 신비에까지 올라간다. ① 성령의 조명 성령의 내적인 증거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칼빈의 신학적 입장은 성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이 임재함으로써 성찬은 ‘하나님이 말씀 하셨다’(Deus dixit)라는 은총의 사건이 된다. 루터는 성찬 그 자체가 ‘말씀하시는 하나님’(Deus loquerens)이라고 함으로써 성찬을 구체화된 은혜로 규정하였다.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내적인 교사인 성령이 오셔야한다. 성령의 힘에 의해서만 성례안으로 들어가도록 우리의 마음이 침투되고 감정이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이 열려진다. 성령이 없다면 어두운 눈에 비치는 태양의 빛이나 막힌 귀에 울리는 음성과 같이 성례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귀에 들리는 말씀과 눈에 보이는 성례가 헛되지 않도록 알려주시며 말씀에 순종하도록 준비시키시며 영혼에 전달하신다. ② 성례가 주는 의미 성례를 의미하는 sacramentum 이라는 말은 군인이 입대할 때 사령관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선서를 말한다. 신병들이 군대의 선서로 사령관에 대한 충성을 약속하며 군대 복무를 공헌한 것 같이 우리는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를 성례의 표징으로써 고백하며 그의 군기 아래에서 복무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성례에 의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고후 6:16; 겔 37:27) 성례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신실성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어느 때는 자연물과 기적을 통해 나타내 보여 주시기도 하신다.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의 보증으로 생명나무를 주시고 그 열매를 먹는 동안 영생을 확신하게 하셨으며(창 2:9; 3:22) 노아와 후손들을 위해 무지개를 두시고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표징으로 삼으셨다(창 9:13-16).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신 ‘연기나는 풀무 속에 타는 횃불’(창 15:17)이나 기드온의 ‘양털과 땅에 각기 내린 이슬’(삿 6:37-40) 그리고 히스기야의 ‘해 그림자가 10도 물러간 것’(왕하 20:9-11, 사 38:8)등 역시 그들의 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며 강화하시기 위해 되어 진 것이므로 성례로 본다. 주께서 사도들에게 성찬을 제도로 주시면서 “기념하여 이것을 행하라”(눅 22:19)고 하셨으며 바울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고전 11:26)이라고 하였다. 생명과 구원에 대한 확신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존한다는 것을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며 선포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성찬을 ‘사랑의 띠’라고도 하였다.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신앙의 공동체가 주님의 몸과 피를 영적으로 함께 나눈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을 자주 받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주 회상하고 믿음을 유지 강화하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감사하며 상호간의 사랑을 증진시키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사랑의 띠를 분별하도록 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라고 하였는데 초대교회가 모일 때는 반드시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를 드리며 성찬에 참여하며 구제하는 것이 관례였다. 마태 6장에 의하면 기도와 금식, 구제와 물질 관리는 초대교회 교인들의 신앙의 덕목들이었다. 로마의 식민치하에서 이스라엘의 일상생활은 빈곤 그 자체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제는 금식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가능했으며 그것이 바로 물질을 하늘에 쌓아두는 신앙적 물질 관리이었을 것이다.
3. 인성중심 경영 우리가 속해있는 교회나 기관, 단체 등에서 인사, 재정, 행정 등 제반 분야에서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흔히들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라고 이야기 한다. 이 말은 사실이다.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고 어찌 하나님의 일을 그분의 뜻에 맞도록 할 수 있으랴? 그런데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이 말에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를 먹칠하고 교회자체를 심심치 않게 어지럽히는 사건들 예컨대 목회자의 정년 규정을 어긴 장기집권, 친인척의 세습, 목회자의 전횡과 법규정 무시, 당회원 으로서의 권리남용, 분파조성과 배반 등을 잘 분석하여 보면 그 속에 주체적으로 들어있는 분들은 거의 모두가 기도하는 분들이라는 말들을 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결국 하나 된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을 서너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고린도 교회처럼 파당으로 나누어져 결국 당사자들이 죽을 때까지 아니 자손대대로 마치 과거 이조 500년 사적이 당파와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망했던 것처럼 오늘의 한국교회를 위기상황으로 내 몰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한국교회의 경영을 저해하는 요소들이다. “경영이란 물적 자원, 인적 자원, 재무자원, 정보자원 등 여러 가지 자원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객이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고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연속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젊은 사람들이 입에서 한동안 대형교회 목사님을 ‘기업의 회장이나 이사장’으로 빗대어 표현한 적이 있었다. 만약 그렇게 표현할 수 있다면 목회자는 경영적으로 볼 때 ‘교회 운영을 일임 받은 기업의 운영이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개신교적이다. 재화나 서비스를 창출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자원이 필요하다. 산업사회 초기에는 경영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한 자원으로 물적자원(토지나 기계 등), 노동(사람), 자본을 들었다. 그러나 정보화와 창의성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인적 자원에 대한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커지게 되어 지식과 기술 등 정보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신앙의 삼대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지성, 영성, 인성을 경영활동의 삼대요소와 비교하여 보면 지성은 물적 자원에, 영성은 자본에 해당되며 인성은 사람 그 자체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영성에 치우친 나머지 중 지성과 인성을 소홀히 한 면이 없지 않다. 지성과 인성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는 영성은 가슴만 뜨거울 뿐 판단력도 흐리고 실천의지가 없는 무책임한 신앙을 말한다. 그래서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최근에 지성과 영성보다 먼저 인성을 강조하는 그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선순위로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는 인성, 지성, 영성의 순이다. 이것을 실천적으로 경건운동에 접목시킨 사람은 독일 할레의 경건운동가 프랑케(A. H. Francke)이다. 그는 할레라는 도시에서 교육과 자선활동 그리고 수출입 사업과 외국 선교를 어우르는 목회활동을 할 때 ‘인간변화를 통한 세계의 개혁’(Weltverwandlung durch Menschenverwandlung)을 구현하려 진력하였다. 그가 프랑케 학원에서 거듭남을 강조했던 부분도 인성을 그 무엇보다 중시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기업경영에서도 과거의 종업원들은 경영자들의 지시나 감독에 의해 작업을 행하는 단순한 생산요소 정도로 간주되었으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조직구성원 개개인의 창의성과 자발적 협력이 중요하기 때문에 인적자원의 역할비중이 점점 커가고 있다. 인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신이다. 통합측 교단의 보수 신학을 지켜온 한철하 박사에 의하면 최권능목사의 전도 문구이었던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 죄 사함이라는 말을 첨부해야 한다는 말은 매우 의미 있는 지적이다. ‘인간이 죄 사함에서 돌이켜 새사람으로 변화를 받는 그곳에 오늘의 행복과 영원한 행복이 있다’는 희망적인 말을 하면서 그는 이것이 한국교회가 나갈 유일한 길임을 제시한다. 그의 목회자상에 관한 견해는 ‘교회에서 주는 눈물의 밥을 먹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목회자를 존중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눈물의 밥이란 죄로 얼룩진 인간관계에서 나오는 사죄와 용서, 상처와 치유, 배반과 화합 등등이 주는 좌절과 실망과 그리고 위로와 감격일 것이다. 목회를 어찌 기업에 비할 수 있겠는가? 기업은 대부분이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지지만 목회는 영적인 싸움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4. 법 준수와 영성 필자는 최근에 ‘자신은 교회 정치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혀 모른다’는 어느 목회자를 여러 번 접한 적이 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소문이 났으며 그저 목회에 전념하기 때문에 그의 교회는 부흥발전하고 있고 여기 저기 교회의 일들에 참여하게 되어 자신의 역량을 키워 나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 그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훌륭한 남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목회자이다. 그런데 그분이 목회자가 비어있는 어느 교회의 임시 당회장으로써 후임목회자를 인선할 때의 과정을 보면서 ‘그분이 과연 기도하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한국의 장로교가 정한 임시목사 청원에 관한 헌법규정을 무시하고 당회장 권한을 행사했으며 둘째로는 자신이 당회장으로 속해있는 교인들의 소리들을 제대로 듣지 못한 점이다. 이러다 보니깐 인간적인 모습이 들어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열의 교회정치 라인이 아니기 때문에 특정인의 임시목사 청원을 반대해야 하는 의도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회에 제안한 것이 임시목사 청원에 ‘공동의회 회원 3/2이상 획득 투표’ 이었다. 이것은 교회의 법 규정에 없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임시당회장의 계획아래 진행되어 갈 때 평신도들인 일부 장로와 집사그룹들은 헌법 책과 조례 집을 뒤적이며 여기 저기 자문을 구하게 되었다. 임시 당회장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임시목사 청원에 공동의회 회원 3/2이상 획득 투표’를 강행하게 되었으니 그 동안 목회자 청원에 대한 피 말리는 교인들의 소모정쟁은 얼마나 컸을 까라고 가히 짐작이 간다. 법을 어기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것을 모르는 교회 지도자들이 우리 주위에 있다. 그 교회 청빙위원회의 말에 의하면 교회의 목회자를 모실 때 위원들이 얼마나 민주적인 방법과 절차를 거쳐 심사숙고 했는지가 역력히 보여 졌다. 신문광고와 추천에 의해 30여분의 지원자들의 접수를 받았고 위원들이 그중에서 5명을 선발하고 테이프 설교를 들어 평가해본 후 그가 속한 교회들을 방문해서 직접 설교를 들어보고 교회에 초청하여 설교를 듣고 그중에서 인선위원들이 다시 2명으로 압축한 후 복수로 추천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간이 최소 3개월이 걸렸다고 했다. 그런데 청빙위원들과 교인들의 입장이 특정인으로 좁혀지자 그때부터 임시 당회장의 권한 행사가 의도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것은 한결같이 ‘이번에도 목회자 인선에 좌절을 하게 되면 우리교회는 어떻게 될까?’라는 염려스러운 말이었다. 듣기에 그 교회는 이미 당회원 한분의 주장에 의해 목회자를 선정했다가 교회의 법 규정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 임시목사 청원이 무산된 상황에 처해있었다. 선임된 분이 담임목회자로써 아직은 나이도 어리고 목회경력도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였다. 임시당회장의 주장에 의해 임시목사 청원에 관한 공동의회에서 3/2이상 획득 투표가 치루어지고 결과는 임시당회장의 계획과는 정반대가 되어버린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선위원들이 기도하고 바랐던 대로 절대적인 지지를 받긴 했으나 그동안 떠돌던 교회 주변의 부정적인 소문들을 어떻게 잠재울 런지 염려가 된다. 임시당회장인 목사의 권위가 이일을 통해 땅 바닥에 추락해 버린 것이다. 필자는 서울에 있는 모교회의 ‘전임교역자의 전횡과 후임교역자의 배반’ 그리고 급기야 그 교회의 분열을 지켜보면서 매우 큰 실망과 우려감을 가진바있다. 어찌 그뿐이랴? 자신의 아들이나 친인척을 후임자로 정하는 전임목회자의 전횡이나, 정년을 연장하면서까지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대형 교회의 특정 목회자 정년연장은 모두 교회가 정한 헌법과 규례를 어기는 것일 뿐 아니라 사회적인 통념을 깨어 버리는 잘못 된 악습이지 결코 기도하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판단이 든다. 교회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어찌 개인이 하는 것일까? 물론 우리주위에 자신의 정년 주변정리를 말끔하게 하신 목회자들도 여러분 계신다. 얼마 전 서울에서 교수 생활을 여러 해 동안 하신 연노하신 여자 교수를 모셔다가 특강을 듣는데 그분이 강의를 하시면서 ‘목사 장로 사기꾼들’이라는 말을 여러 번 하시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처음에는 그런 말들을 듣기가 매우 거북하였으며 심지어 강의 책임자로써 강의가 끝나면 주의를 주던지 강의를 취소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그분의 강의를 들을수록 왜 그분이 그런 원색적인 말을 사용하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한 적이 있다. 오죽이나 하면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 윤리가 필수과목이 되어야 한다’라고 규정을 정했을까? 그러한 비윤리적인 장소에서 속고 속으며 일을 했던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그런 선입관을 가지고 일을 하기 때문에 역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일에만 집착한 나머지 공동체를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문제를 일으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는 심각한 중병에 들어있다. 필자는 칼빈의 일생과 기독교 강요 그리고 그에 관한 여러 해설집들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지금도 하고 있다. 칼빈이 어떻게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정치 조직기구의 조직적인 탄압과 열광주의자들의 항변 그리고 무신론자들의 저항에 맞서서 제네바라는 세속 도시를 신앙의 개혁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이러한 칼빈의 개혁이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회에서 다시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들이다.
5. 윤리경영의 장으로서의 교회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88올림픽 이후 축구와 야구, 골프 그리고 경제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심지어 특정 부문에서는 신화를 이루어 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앞서가고 있는 것은 각 분야에서 조직화된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역량과 조직경영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2년부터 히딩크 경영 신드롬에 빠져있다. 그는 한국축구 대표팀을 일종의 경영 주체로 파악하고 선수들의 개인적인 능력은 물론 조직력을 극대화시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도록 함으로써 위기에 처한 기업을 회생시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CEO의 경영자와 같은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한국축구팀에 제시한 전략, 비전, 교육, 정보 등은 현대 기업의 CEO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다. 2006년 세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낸 이후에는 김인식 감독의 유연한 경영방식을 도입하려는 사람도 있으며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구어 낸 이병철과 이건희 리더십을 부러워하며 동조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다. 한국의 기업 가운데 삼성에만 유독 강력한 노조가 없으며 노사 협력체가 존재함으로써 파업이나 극한 대립이 없다는 것은 노사 대립이 첨예화 되어 매년 수조원의 결손을 내는 상황에서 삼성의 노사협력체는 기업을 이끌어 가는데 효율적이다. 이처럼 조직의 성공은 경영윤리가 확립되어 회사가 유지되어가는 데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동력이 된다. 교회 역시 목회자의 역량과 경영철학에 따라 성장하며 부흥한다. 교회의 부흥과 발전은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도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해당 교회의 목회자와 조직구성원간의 상호작용인 그들의 행동과 내면적 세계 그리고 활발한 교류현상에 의해 이루어진다. 한국교회는 미국선교사들에 의한 선교 120여 년 동안에 급성장하였다. 1980년대 이후에 한국의 개신교회 숫자가 감소했다고 하지만 통계에 의하면 규모로 볼 때 세계에서 10위권에 드는 교회가 한국에만 절반이 넘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있다고 하면 한국교회의 경영이 주는 의미는 새롭게 부각시켜 볼만하다. 최근에는 외국의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한국교회를 모범적인 경영사례로 정하고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사례들이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장로교회만 하더라도 서울을 비롯하여 각 지방에 대형교회들이 들어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지역사회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라는 경영학적인 진단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고 보여 진다. 교회의 부흥은 신앙적으로는 말씀 선포와 교육, 전도 그리고 찬양 등 교회가 갖는 특이한 예배의 형식과 특성화에 의해 되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만든 프로그램들이 사랑의 동산이나 셀 목회, 빈야드 운동 등등 특성화된 조직을 교회에 도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경건의 책으로 규정되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근거하여 교회를 경영하고 있다. 칼빈의 경건은 협의의 의미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 경외심, 순종과 연관이 있다’고 보며 넓은 의미에서의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인간을 향한 의와 사랑’으로 도식되면서 이들은 각각 수직적 경건과 수평적 경건으로 이해된다. 칼빈은 이를 경건과 믿음의 생활로 구분지어 말하고 있는데 믿음은 율법의 첫째 서판인 하나님과 율법을, 그리고 둘째 서판인 인간의 문제를 포함하는 것으로써 전자는 경건을 후자는 의와 사랑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믿음의 생활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 본질이 드러난다. 이 말은 곧 믿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경건은 믿음의 행위에서 참된 경건이 이루어진다는 말과 같다.
6. 하나님 지식과 관계경영 칼빈의 신학을 이해하는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선천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무지를 가장하여 이러한 지식에서 도피할 수가 없다. 이러한 보편적인 지식을 '종교의 씨앗'(The seed of religion)이라고 말하는 데 종교의 씨앗에 의해 천지창조이후 인간의 역사에서는 종교 없이 산 지역이나 도시 가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아덴에서 온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3)는 말씀과도 일치 한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은 타고난 본능에 의해 하나님에 관한 자각이 있기 때문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한 분이신 하나님이 계시며 그가 그들의 창조자임을 깨닫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지 않으면 그들 스스로의 증거에 의해 정죄를 받는다. 매슬로우(A. Maslow)의 인간의 욕구 5단계 이론에 의하면 생리적 욕구에서부터 시작하여 안전 욕구, 소속욕구, 자존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로 발전되어 가는 데 그중 자신의 잠재적 역량을 발휘하여 최고가 되고 싶은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가 최고차원의 욕구임을 말하고 있다. 어느 부문에서 최고가 되고 싶은 자아실현의 욕구는 종교적으로는 ‘궁극적 관심’이라고 표현된다. 인간의 삶은 의식주에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보다 높은 차원의 안전과 소속, 자존감과 자아실현에 까지 나아가는데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종교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관계성을 가진 존재로서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부모로부터 시작되는 관계는 친구와 이웃, 국가와 사회, 세계적인 차원을 갖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계에서는 가상현실을 통한 유비쿼터스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기존의 국가와 민족, 나이와 성별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에 의한 인간 삶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서 보여 지는 조직경영의 장은 교회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의 참된 표지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이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이 제대로 선포되고 주께서 세우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는 가라는 것이다.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은 성경 말씀에 근거를 두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교회관은 ‘말씀의, 말씀에 의한, 말씀을 위한 경건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교회의 기초를 바울을 인용하여 ‘사도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에 두었으며 모퉁이의 머릿돌은 그리스도’(엡2:20)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가톨릭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맹목과 불 경건 그리고 우상 숭배 등에 대해 예언자들로부터 책망을 받았던 것처럼 가톨릭교회의 성전중심 예전과 의식 그리고 사제들의 역할 강조는 예언자 칼빈에 의해 비판되어 진다. 교회의 외적인 자랑은 참된 교회와는 거리가 멀며 에레미야가 말한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는 거짓말’(렘 7:4)일 뿐이다. 주께서 인정하시는 거룩한 성전인 교회는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교직 기구’가 아니라 ‘주의 말씀이 들려지고 그 말씀이 양심적으로 준수되는 곳’이다. 이런 면에서 교회(έκκκλησία)는 원래 세속 정치적 개념으로써 사람들을 통해 구성되는 회중(Volksversammlung)이며 하나님에 의해 모여진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렇게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조직체인 교회가 윤리적으로 경영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7. 칼빈의 리더십 칼빈이 경건 실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핍박’(딤후 3:12)으로 규정되어진다. 제네바에서 23년간(1536-1564) 파렐(W. Farel)의 간청과 도움에 의해 비레(Viret)와 셋이서 함께 종교개혁의 일을 단행할 때 처음 13년간은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으나 나머지 10년간은 승리의 시기를 맞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제네바 도시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성시(聖市)로 만들기 위해 매일 설교를 했고 1559년에는 제네바 학원을 설립하여 강의 하는 등 방대한 저술에 매달렸다. 그는 매순간 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를 완전한 준비를 갖춘 채로 저술활동에 전념하였으며 명상과 경건의 상태를 유지하였다. 1546년부터 일곱 또는 여덟 가지의 중병을 앓았으며 설교 도중에 친구들의 부축을 받거나 의자에 앉기도 하였다. 특히 통풍과 신장 결석으로 인해 칼빈이 죽을 때의 모습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병이 들었다’라고 까지 전해진다. 실제로 그는 위가 약해 하루에 한끼만 취했다고 한다. 종교개혁자요, 신학자, 성경주석가, 교회조직가, 설교자, 목회자인 칼빈에게 있어서 종교개혁의 일은 힘들고 고독하고 어려운 길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종교개혁의 일을 해 낼 수 있었던 근본 힘은 어데서 왔을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경건성과 신앙이라고 답한다. 우리는 이 물음에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칼빈의 사상을 체계화 시킨 개신교의 변증서이자 교리서라고 알려진 「기독교 강요」를 제네바 개혁을 구현하기위한 경영지침서라고 전제하면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교리서인가 변증서인가라는 것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들이 있으나 필자는 변증서라는 쪽에 무게를 더 두고 있다. 내용자체는 사도행전에 근거한 기독교신앙의 교리이지만 그 내용을 체계화 시켜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원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서문에 해당되는 프랜시스 I세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자신이 저술한 책 「기독교 강요」는 경건한 사람의 기본지침이라는 것을 여러 번 밝히면서 복음주의자 들을 핍박하는 가톨릭교회는 성서적 전통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신앙 생활에 있어서 신자들이 지켜야 할 규례와 법칙의 권위가 성서에서 나오는가 아니면 교회에서 나오는 가라는 것이 개신교와 가톨릭을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자가 되는 것이다. 개신교는 전자에 비중을 둔다.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관한 가장 정확한 표준이므로 그것에 관련된 모든 것은 성경에 의해 판단 받아야 한다”는 것이 장로교의 입장이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운동을 활발하게 전개 하여 나갈 때 그의 사역을 통해 한 가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볼 것은 ‘1542년부터 1546년까지 법에 저촉되어 사형에 처한 사람들이 58명, 추방된 사람이 76명’이라고 하는 기록이 나오는데 춤을 추었다는 이유로, 설교를 듣고 웃었다는 것으로 인해 처벌을 했다. 그의 개혁동안 제네바시에서는 자신들의 자제를 교회학교에 보내기를 꺼려하는 부모는 시민권을 박탈하였으며, 도박장은 폐쇄되고, 사교무도회는 엄금되고 그것을 위반하면 골패를 그 목에 걸고 거리로 다니면서 시민들의 구경거리로 삼았고 가장무도회에 갔던 사람은 성베드로 교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받았다. 사치한 화장을 시킨 미용사는 이틀 동안 감금당하고 간음한 자는 남녀 함께 형리에게 끌려 거리를 돌게 한 다음 시외로 추방을 시켰다. 칼빈의 이 준엄한 정치를 어떻게 경건과 연관을 지어 생각할 수 있으며 과연 이러한 정치행위가 종교개혁이라는 이름하에 진전 될 때 그 속에 들어있는 경건의 모습을 조직 경영적으로 어떻게 해석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반대파들로부터 많은 저항과 도전 그리고 심지어 죽음의 고비와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종교적으로는 신령파들(Spiritueles),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들 이었으나 더 심각한 적은 교리상의 반대자들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이들을 단호하게 법적용을 시켜 처단하였으며 국외로 추방을 시켜 버렸다. 칼빈의 개혁에 교리적으로 맞서 반대하던 대표적인 사람들은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Sebastian Castellio, 1515-1563), 제롬 볼제크(Jerome Bolsec) 그리고 미카엘 세르베토(Michael Serveto, 1519-1553) 등이었다. 이들은 각각 성경의 정경성을 부분적으로 부정하거나 칼빈의 예정설에 반대 하다가 직분을 빼앗기고 추방당했으며 세르베토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함으로써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죄에 저촉되어 1553년 화형에 처하게 되었다. 칼빈이 이렇게 법적용을 시키면서까지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든 것은 그의 교육적인 배경과 회심 그리고 그 당시의 상황이 그를 과도한 경영으로 내몰았다. 리더십은 집단의 활동을 공유된 하나의 목표로 집중시키려는 개인의 행동을 말하는데 칼빈의 리더십은 Blake와 Mouton의 관리격자(Managerial Grid) 프로그램에 의해 평가해보면 정해진 법규와 규약에 의해 개혁을 주도했기 때문에 과업중심적이며 인간에 대한 관심은 개신교 신앙으로 이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관심은 개인의 체벌이나 개인적 신앙고백을 통해 어느 정도 배려를 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생산과 인간관계의 함수 최대치를 9.9 로 정할 때 칼빈의 리더십은 9.5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생산과 인간관계에 모두 관심을 두는 형이 아니라 과업형이며 인간에 배려를 하는 수준이다. 칼빈의 리더십이 그가 속한 제네바 시민 공동체의 근본적인 명화를 축했기 때문에 변화주도적인 것은 사실이다. 1920년대 Max Weber에 의해 제시된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대비시켜 보면 카리스마(Χάρισμα)란 신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진지한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은사이므로 이러한 천부적 리더십을 소유했다고 본다. 오늘 한국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남이 가지지 못하는 타고난 은사들을 가지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1%정도의 사람들이 이러한 은사를 갖고 있다고 보는 데 최근 독일에서는 지능이나 학식, 개인의 노력이외에도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에 의해 성공이나 출세가 결정된다는 인식이 파급되면서 카리스마 교육이 성행한다는 사례보고도 있다. 칼빈의 제네바 개혁이 남들이 가지지 못한 카리스마적이었기 때문에 가톨릭과 무신론자들의 거센 저항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성공할 수 있었다.
8. 교회와 정치 칼빈의 교회 경영에 관한 제도적인 직제를 알면 그가 정치와 사회, 경제면에서 선구적임을 알게 된다. 칼빈의 교회는 세 가지 가르침을 갖는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 그리고 지침들(discipline)이다. 처음 두 가지는 교회가 하나님의 신성한 제도임을 보여 주며 마지막 것은 교회가 사람들의 단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신앙고백에 의해 운영되며 자신의 신앙고백에 어긋나거나 위배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억제하고 정도가 심할 경우에는 출교로써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한다는 면에서 정치적인 경영이 등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칼빈은 국가와 종교가 함께 맞물리는 인습적인 국가교회를 만들기 보다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교회”를 만들었다. 이것을 우리는 교회차원에서 보면 ‘교회의 정치화’, 정치 차원에서 보면 ‘정치의 교회화’라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의 종교개혁운동은 경건운동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개혁의 기본서이자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에 분명히 자신의 경건을 추구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거론한 바대로 왜 단호한 정치 물리적인 힘으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이자 경건운동을 해 나갔는가라는 문제이다. 이에는 법과 제도적인 근거가 있다. 칼빈의 정치사상은 개신교가 일찍 뿌리를 내린 스코트랜드나 네델란드 그리고 유럽의 근대국가들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이 잘 알려진 견해이다. 칼빈이 선호하던 정치 체제는 귀족정치와 민주정치가 결합한 제도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치 형태에 대한 묘사이었으며 민주 정치에 가까운 귀족정치를 말한다. 집권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봉사하고 있기 때문에 온 노력을 경주하여 자유가 감소되는 것을 막고 자유가 침해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유의 수호자로 임명된 것이다. 칼빈이 제네바 개혁운동을 통해 이루고 싶었던 것은 정교일치의 도시건설이었다. 교회의 정치화(Politisierung der Kirche) 내지는 정치의 기독교화(Christianisierung der Politik)라고 할 수 있다. 이일을 이루기 위해 제일먼저 한 것은 교회와 정치의 조직화와 합리적인 경영이었다. 칼빈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조직들은 소의회와 200인회 그리고 총회 등이다. 소의회는 25인회라고도 불리는 데 구성원은 4인의 참의와 재무관 그리고 20인의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이부서는 실행위원회의 성격을 가지며 최고의 회의이다. 이들은 200인 회의에서 선출된다. 반대로 200인 회의는 소회의에서 선출된다. 소의회와 200인 회의의 중간 단계로 60인의회가 있는 데 여기에서는 예비적인 논의를 담당한다. 아주 중대한 사안은 총회에서 결정했다. 이 회의는 각 가정의 호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4인의 참의를 선정한다. 이들의 임기는 2년이며 이들이 소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게 되면 다른 두 의회에서도 지지를 받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 소의회를 통해 교회법(Ordonnances)을 기초하여 2백인 회의의 의결을 거쳐 법률로 정하였다. 이 법률에 의한 교회정치는 거의 사도시대의 것과 같았다. 감독이 없었으며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순수한 교회조직 그 자체이었다. 교회의 직원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4종류로서 설교를 맡은 목사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목사는 목사회의에서 선정하고 시의회의 의결을 거쳐 교회의 동의를 얻어 확정하였다. 장로는 정치를 맡고 집사는 회계와 자선사업을 관장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장로교회의 정치 규범이 되고 있는 제도이다. 제네바에서는 시민전부가 교회회원이 되며 신앙고백에 동의 할 것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어린아이를 위해서는 간단한 신앙 문답서를 외우고 배우게 하였으며 이를 통해 제네바시는 그 자체가 교회가 되도록 하였다. 시의 풍습과 도덕을 개신교 신앙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평의회를 조직 하였는데 이 회의는 목사 5인과 장로 12인으로 구성하였다. 이 회의는 매주 1회 회집하여 교회의 규율과 시민의 도덕을 관리하였다. 칼빈은 이 평의회의 일원이었으나 설교자와 성경해석자로서 특별한 권위를 가져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당시 제네바의 풍습은 극도의 피폐상황에 이르렀다. 평의회는 규율을 정하고 시행하는 데 매우 준엄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음주, 무도, 사치, 외설, 비속한 노래 등이 모두 금기 사항이었다. 평의회는 이러한 범죄 행위를 행하는 자들을 교회로부터 추방하고 일반법정에서 그 밖의 형벌을 관장하였으나 실제로는 평의회의 정하는 바를 그대로 준수하였다. 칼빈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설교가, 주석가, 신학자, 문필가, 법률가 정도로 말하고 있으나 그의 개혁의 전 과정을 보면 교회와 사회의 정치가로서 제네바시를 23년 동안 전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것을 보게 된다. 칼빈은 제네바의 개혁을 위해 1537년 1월 제네바시의 소의회와 2백인 회의를 통해 교회의 정치기구를 채택한 후 신앙요리문답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에 모든 시민들이 참여하여 배우기로 서약하고 아이들까지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하였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물론 거기에는 반대파들이 있어서 심지어 칼빈을 아리우스파로 정죄하기도 하였다. 시정부와의 충돌은 교직자들이 성경만 전하지 왜 정치에 관여하는 가라는 비판이었다. 이에 대한 표현으로 과격파들은 습격을 한다든지 투석하고 협박까지 하였다. 이러한 일로 인해 결국 시의회는 가결에 의해 칼빈과 파렐을 제네바로부터 추방을 시켜 버렸다. 개혁을 시도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로 온 칼빈은 부처(M. Bucer)의 도움을 받으며 프랑스 이민교회를 섬기면서 저술과 신학연구에 전념하였다 1539년 기독교강요 제 2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도 출판하였다. 칼빈이 떠난후 3년 반 동안 제네바의 사정은 날로 날로 부패하여 갔다. 정부의 조직에 순응하는 자들의 설교는 무력하였으며 사회는 다시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 속에 빠지게 되었다. 반대파 세력의 약화로 인해 시의회에서 개혁자들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다시 칼빈이 돌아오기를 간청하는 초청장을 발부하다. 그 내용은 간절한 것이었다. “오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존경하는 아버지, 당신은 우리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손수 당신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모든 시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이 편지를 보름스(Worms) 여행 중 받으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만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오기를 권고하는 일들은 다각적으로 이루어 졌다. 거듭되는 시의회의 초청, 취리히의 교직자들의 권고, 슈트라스부르크 의회의 승인 등 이었다. 칼빈은 이러한 재 초청과 주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전율의 제네바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웁직인 결정적인 계기는 파렐의 강력한 권고에 의해서이다. 그는 파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하였다. “나의 찢겨진 심장을 주님 앞에 바치나이다.” 칼빈은 자신과 파렐이 추방 받았던 제네바에 다시 정부와 시민들의 절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1541년 9월 입성하였다. 이때의 칼빈은 파렐을 도와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책임적 개혁자로서 그의 행보를 내딛었다.
9. 교회경영과 두 개의 정부 칼빈이 제네바에 재입성한 후 우선적으로 시도한 것은 제네바시의 시민전부가 개신교 교인이 되어 신앙고백에 동의하게 하였으며 어린아이들은 교리 문답서를 배우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도시 전체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적 교회가 된 것이다. 도시의 교회화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교회 내에 목사 5인과 장로 12인으로 구성된 별도의 평의회를 조직하여 교회의 규율과 시민의 도덕을 관리하였다. 평의회는 규율을 정하여 제네바 시민으로 하여금 음주와 무도, 사치, 외설, 저속한 노래 등을 금하였다. 칼빈은 이 회의에서 성경해석자와 설교가로 절대적인 권위를 갖게 되었다. 칼빈이 주님의 몸된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 시행한 것은 권징이다. 이 권징은 주로 견책과 출교에 의해 이루어 졌는데 가정이나 사회도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기위해 통제가 필요한 것처럼 교회는 더욱 권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구원의 교리를 생명으로 권징을 근육으로 비유했으며 이 근육을 통해 몸의 지체들이 서로 결합하고 각각 자신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권징은 교회의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목사에 의해 설교와 가정방문을 통한 가르침과 경고, 충고 등에 의해 시작되며 경고가 무시 될 경우에는 교회의 법정인 장로회 앞에서 공적으로 엄히 경고하도록 하였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신자의 공동체에서 내 쫓아 버리는 출교의 단계가 있다. 권징의 목적은 세 가지가 이다. 첫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거룩성 유지이다. 추악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의 성찬 참여를 금지시키는 교회의 재판권행사이다. 둘째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과 교제함으로써 생기는 타락과 부작용을 차단시킴으로써 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셋째 악한 자들이 징벌을 받아 각성하며 유익을 얻도록 함이었다. 한국의 교회는 칼빈의 권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칼빈의 사상과 교회경영에서 특이한 점은 교회를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인 가시적 교회로 본 점이며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그 품속에서 연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교부 사이프리안의 전통적 교회관을 이어 받은 표현이다. “교회 밖에는 결코 구원이 없다. 교회를 어머니로 갖고 있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인도하시며 그 안에 있게 하시려는 외적인 은혜의 수단”이다. 외적인 은혜의 수단인 교회를 칼빈은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로 구분한다. 기독교적 삶이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청지기직을 강조한 것이다. 그가 저술한 기독교강요의 내용은 서론 부분이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헌정의 말씀으로서 기독교 변증서라는 점과 그가 다룬 내용들은 거의 모두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청지기직을 행할 것인가를 사도신경에 비추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과 그리고 교회를 각 권에서 서술했기 때문이다. 칼빈의 교회 경영은 종교개혁 이후 국가와 종교의 영역이 구분됨으로써 교회의 역할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어 병약자, 빈민자 구제 등의 사회복지 사업이 주된 것이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자기 자신을 부인함’으로 규정하면서 이웃사랑의 실천은 행위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사랑의 마음에서 행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바로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의 불행을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안타깝게 여길 때에 마치 자기에게 하 듯 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이중적 통치인 두개의 정부가 있다(duplex in homine regimen). 영적인 정부와 시민정부이다. 영적인 통치와 국가의 통치라고도 번역이 된다. 전자는 “경건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에서 양심이 훈련을 받는 곳이며, 후자는 정치적인 것으로서 사람들 사이에 유지되는 인간성과 시민 됨의 의무를 위해 교육을 받는 곳이다.” 이 두 가지의 측면을 영적 및 세속적인 통치권이라 부른다. 영적인 통치와 국가의 통치는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전자는 이 땅에 있는 우리 속에서 하늘나라를 시작하였고 영원토록 썩지 않을 미래의 복락을 예고하고 있으며 후자는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경건의 도리와 교회의 지위를 변호하고 사회에 적응시키며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다. 칼빈이 양심(conscience)을 영적 정부에서 인간의 표준으로 삼은 것은 양심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이며 바울이나 베드로도 양심을 그렇게 이해했다고 주장한다(양심의 증거, 롬 2:15-16, 선한 양심, 벧전 3:21). 그는 딤전 1:5의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을 예로 들면서 양심이란 지성(intellect)과는 전혀 다르다고 한다. 칼빈에 있어서 양심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살아있는 성향이며 경건함과 거룩함으로 살기를 바라는 순전한 열심이기에 양심의 자유를 말한다. 우상의 제물을 취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심의 자유가 있기에 그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청결케 하는 것, 정욕을 제하는 것 그리고 모든 음란과 더러운 말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세우는 것은 물론 양심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 의미상으로 볼 때 영적인 통치는 영적인 생활에 관한 것이요, 세속적 통치는 현실생활에 관한 것인데 먹고 입는 것 뿐 아니라 거룩하고 고결하고 절제 있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에 관한 통치를 인간의 양심이 대변한다는 것이다. 두 세계에는 각기 다른 왕과 법률이 권위를 행사한다. 그러나 이 둘이 철저히 구별되어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양심의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외적인 통치인 인간사회의 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며 영적으로 자유스럽다고 해서 모든 육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두 개의 정부 이론은 사상적으로 세네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의 공화국은 법과 정치적인 시민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적 존재들로 구성된 사회로서 도덕적, 종교적 사회라고 보았다. 깔뱅은 이 두개의 정부가 궁극적으로는 왕의 왕인 하나님께 속한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 두개의 정부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칼빈이 배격하는 시민정부 형태에 관한 두 가지의 다른 입장은 재세례파와 마키아벨리적 입장이다. 전자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절대시하며 자신들의 양심을 속박하는 어떠한 법적인 제도나 규정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를 전복하려 하는 이상적인 세계관을 갖던 그룹이었으며 후자는 제후들에게 아첨하며 절대 권력을 만들어 감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와 대립시키려는 것을 말한다. 칼빈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국가 사회와 공동체를 저해시키는 해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영적 통치와 국가 통치는 모두 하나님께 속하며 서로 다른 사명이 있음을 말한다. 영적 통치는 지상에 있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시작하게 하며, 죽을 수밖에 없고 허무한 이 생명 속에서 영원히 썩지 않을 축복을 예지하도록 한다. 국가 통치의 우선적인 직무는 정의의 실현이다(롬 13:1-4). 정부의 공무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로 인도되어야 한다. 국가통치의 목적은 하나님께 향한 외적인 예배를 보호하며 교회의 경건한 교리와 지위를 보호하며 우리의 생활을 사회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행위를 사회정의와 일치하도록 하며 우리가 서로 화해하여 전체적인 평화와 평온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칼빈에게서 남는 하나의 물음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신정정치(theocracy)를 했느냐 라는 것이다. 이 말이 성직자 통치(hierocracy)나 성서적 통치(Bibliocracy)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칼빈의 신정정치는 불가능했다. 그 이유로는 칼빈이 제네바에서 관리와 성직자를 구분했으며 그가 말한 것은 각 민족에게 그 민족에게 유익되는 법률을 만들 자유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1535년 독일 뮨스터를 장악하고 구약의 제도를 모방한 신정사회를 건설하려던 재세레파의 참사를 경험한 칼빈은 구약의 사법적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려던 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칼빈의 통치는 그리스도 통치(Christocracy)이다. 육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육체 밖에 있는 그리스도는 온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활동과 창조활동을 말한다. 칼빈의 정치적 이상은 성직자가 직접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설교와 교육을 통해 훌륭한 정치가를 길러 내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따른 훌륭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사회는 성서의 사법적 규정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반은총에 속하는 지성과 양심에 의한 사회였다.
10. 경영의 주체들 칼빈은 1541년 11월에 ‘교회에 관한 칙령’(Ecclesiastical Ordinances)을 목회적 기능의 견지에서 작성하여 법으로 통과하였다. 교회는 목사와 교사, 장로와 집사의 4가지 직분을 가진다. 교회의 임무는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성도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며 고통당하는 자를 보살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다른 도움이나 도구, 예를 들면 천사들을 이용하시지 않고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은 사람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응답하시기를 원하시며 그것이 겸손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연약한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에 그 사람이 우리보다 나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받는 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늘의 지혜의 보화를 연약한 질 그릇 속에 감추어 두신 것과 같다(고후 4:7). 더 나아가서 한 사람이 가르치고 다른 사람이 가르침을 받는 이러한 사랑의 끈으로 사랑을 증진시킨다면 연합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며 이것을 끈으로 삼아 구원과 영생의 교리를 사람들에게 위탁하셔서 교회 안에서 가르치도록 했다고 한다. 칼빈은 엡 4:11과 롬 12:7-8을 근거로 하여 교회 안에 여러 가지의 직분이 있음을 말한다.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이다. 이 가운데 끝의 둘만이 교회 내의 정상적인 직분이고 처음 셋은 필요에 따라 부활시키신 특별 직이다. 신약성서는 장로와 집사를 언급한다. 결국 목사와 교사, 장로와 집사의 4직제가 있는데 제네바에서 칼빈은 교사인 박사의 직을 두지 않았다. 제네바에서 자신이 성경교사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목사가 박사의 기능을 포함했다고 보여 진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볼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여 주교와 집사 부집사를 두어 상하 질서를 두었는데 칼빈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주님을 봉사하는 기능적 관계로 이해 한 점이다. 이는 초대교회의 은사 중심적 교회의 건립이라고 볼 수 있다. ① 목사 목사는 사도로써 이들의 직무는 복음이 순수하게 전파되도록 신도들을 건전한 교리로 교육하는 것이다. 제네바에서는 신학적 교과를 매우 중시하였으며 이 교과를 효과적으로 하기위해 기초적 어학과 과학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이 같은 노력이 교양 있는 목회자와 건전한 시민을 육성하는 지름길이라고 보았다. 오늘의 목사에 해당하는 사도들은 교회의 창설자로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온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이다. 선지자는 어떤 특별한 계시의 은사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복음전도자는 사도들보다는 직분이 낮으나 그들 다음으로 활동한 사람들이다. 누가, 디모데, 디도 등과 같은 전도자들로서 70인의 제자들도 전도인들 이었다(눅 10:1). 이들은 오늘의 평신도 직업 전도자라 할 수 있다. 목사의 주된 기능은 복음을 전하며 권징(치리)과 성례를 담당하는 것이었는데 초대교회의 계승자이다. 감독이나 장로의 칭호를 갖기도 하였다. 주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 복음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라고 하셨다(마 28:19). 바울은 목사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일꾼,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라고 한다. 감독에 대하여는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리는 자를 책망한다(딛 1:9)라고 하고 있다. 목사의 직은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특수한 기능이 있다. 교회를 다스리고 돌보는 일을 위해 목사가 세워지며 목사는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부름을 받는다. 목사는 가르치는 자질도 있어야 하며 권징의 실시에도 관여하고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돌보기도 해야 한다. 그의 본질적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권징의 실행을 돕는 것이다. 목사는 의회에서 성직 취임 면허증(certificate)을 받으며 자신이 하나님을 충실히 섬길 것과 교회에 관한 칙령을 지키고 충성할 것과 정부와 시의 명예를 드높일 것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제네바의 법을 준수할 것을 맹세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에게, 교회는 어머니라고 까지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의 품속으로 자녀들을 모으시기를 기뻐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유아와 어린아이 시절에 교회의 도움과 봉사로 양육되도록 하기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이 성숙하여 신앙의 목표에 이를 때까지 어머니와 같은 사랑에 의해 인도함을 받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교회의 품을 떠나서는 죄 사함의 용서와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정적인 제도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로서 피차에 도움을 주는 신앙 공동체이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숨겨진 선택에 있으며 이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말하려 하고 있다. 교회란 결코 이상적인 공동체를 추구하여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이나 경건한 공동체라고만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며 또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들이 올바르게 시행되는 것에 있다. 말씀과 성례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교회의 특색을 나타내 보이는 표지이다. 이러한 표지가 있는 교회는 아무리 불완전하고 허물이 있다 하다 하더라도 버려서는 안된다. 참된 교회와 거짓교회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에 의해 구분된다. 이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교제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세우신 그리스도의 대리직이 사도들과 목사들이다. 목사의 직은 친히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독특한 사역이나 사도들의 사역에 필적하는 직분으로 교회에 부여하신 것이다. 목사가 신자들을 가르치고 목사의 입에서 나오는 공통된 교리를 받아들일 때는 목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통해 신자들이 연합하여 서로 사랑을 베풀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간주 할 수 있다. 목사는 백성에게 순수한 교훈을 가르치며 성례전을 집행하는 것 외에 또한 성결한 삶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의 훈련과 질서를 멸시하는 자들은 이단자와 같으며 교회는 목사 없이 존립할 수 없고 교회를 통한 경건훈련이 신앙에 필수임을 인식하였다. 그리스도에 의해 파송된 목사에 대한 복종은 곧 그를 파송한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대언자이다. 목사에 포함 할 수 있는 교사의 임무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해석하는 일과 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일을 하였다. 참된 교리를 가르치고 오류를 몰아내는 것이다. 교사의 임무는 언제나 성경의 율법에 따라 목사의 설교를 평가하고 목사 후보생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구약을 주해하고 신학을 주해하는 2명의 교사가 있어야 했다. 신학의 보조 학문인 언어학과 인문학을 가르치기 위한 남학교와 별도의 여학교에 교사와 보조 교사가 임명되어야 했다. ② 장로 신자 개인의 생활을 감시하며 허물있는 무절제한 생활을 하는 자들을 훈계하며 그 행실을 책임 있는 단체에 보고하는 역할을 한다. 소의회는 생활에 흠없는 경건한 사람 12인을 제네바시의 네구역에서 각각 적당히 선출하여 2명은 소의회 의원, 4인은 60인회, 6인은 200인회의 인준을 받아 활동하게 하였다. 인허과정에서는 목사의 경우와 같이 회중앞에서 서약과 선서를 하게 하였다. 매년말 장로들은 정부당국에 나와 보고하고 충실히 직무를 이행했는지를 심사를 받고 계속 시무를 허락 받았다. 장로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생활을 가르치며 다스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장로(πρεσβυτέριον)는 감독, 장로, 목사, 사역자라고 불리 우기도 한다. 칼빈은 딛1:5와 1:7, 행 20:17과 20:28을 근거로 하여 감독과 장로는 같은 직책임을 주장한다. 다스리는 사람들은 신자들 사이에서 선택된 장로들이었으며(고전 12:2) 각 도시에서 장로들이 자기들 가운데 한 사람을 뽑아 감독이라 불렀다. 이는 계급이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화를 막기 위함이었다. 장로들은 감독들과 함께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행하는 일들을 맡았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롬 12:8)을 말한다. 처음부터 각 교회에는 경건하고 위엄 있고 성결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선택된 장로회가 있어서 과오를 시정하는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직분은 한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필요하다. 감독과 장로들은 말씀 선포와 성례전 집행에 전력을 다했다. 장로가 설교를 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된 것은 아리우스의 논쟁이 있은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을 먹이고 건전한 교리로 교회를 세우는 것은 감독의 일차적인 의무라고 하는 것이 교회에서 오래 지속된 원칙이다. ③ 집사 장로와 동일한 절차에 의해 선출에 의해 임명되는 집사들은 가난한 자와 병자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일이 맡겨졌다. 구제하는 일과 긍휼을 베푸는 일을 했다(롬 12:8). 시 병원을 책임지고 운영하는 일과 약자들인 무직자나 고아, 과부, 노인들을 돌보아 주고 치료하는 일을 맡게 하였다. 교회 문앞에서 구걸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시켰으며 집사는 이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는 일을 하였다. 집사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딤전 5:9-10). 교회의 구제 사업을 관리(administrative)하고 조직하며 봉사하는 집사들과 직접 환자와 빈민을 돌보는 실행(executive)집사들이다. 전자는 관리인(guardians) 즉 소위 구호 감독관 의 역할을 하였으며 후자는 실제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병원에 환자들을 위문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집사라는 말에서 나온 기독교사회봉사(διακονία)는 더 넓은 뜻을 가지지만 성경에서 집사라고 명명되는 사람들은 구제 물자를 분배하며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빈민 구제금을 관리하는 일을 교회로부터 맡은 사람들이다. 누가가 이들의 기원과 임명 그리고 직분에 대하여 사도행전에 기록하였다(행 6:3).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서 제외된다는 소식을 듣고 사도들은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기위해 정직한 사람 일곱 명을 택하여 이일을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부탁을 하였다. 칼빈은 이런 종류의 집사들이 사도들의 교회에 있었고 우리도 본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칼빈이 일하던 제네바는 두 종류의 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구제품을 분배하는 집사와 병자들을 돌보는 집사들이었다. 칼빈 자신이 제네바에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시도한 것은 항구적으로 보다 나은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개혁되어진 교회는 개혁하는 교회’(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것이 칼빈 신학전통의 입장이다. 칼빈은 교회 뿐 아니라 세계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좋게 변화되기를 원했다. 사회윤리로서 칼빈의 윤리는 개인의 도덕에 근거하여 인간적이며 세계적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즉, 개인이나 교회 뿐 아니라 피조물의 세계전체가 변화되어 보다 나은 세계로 개혁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④ 교사 교사는 성경 해석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오늘날의 기독교학교의 교목이나 성경교사 그리고 신학교 교수가 이에 해당한다. 교사가 없이는 목사가 교회를 유지할 수 없다. 교사는 목사가 하는 제자 훈련이나 성례집행이나 경고와 권면을 돕는 일을 하였다. 전도자와 사도를 함께 보면 서로 상응하는 두 쌍을 보게 된다. 목사는 사도에, 교사들은 선지자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생명이며 지혜의 근원인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교회에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사역을 교회에 부여 하셨다. 이 말씀 사역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교회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중요한 직무이므로 자신의 사역을 감당할 목사에게 소명감과 능력을 주신다. 목사는 성경과 일심동체가 되어야 하며 최대의 경외심을 가지고 성경을 다루어야 한다. 선지자의 직분은 그 탁월한 계시의 은사 때문에 두드러졌으며 교사의 직분도 성격이나 목적에 있어서 비슷하다. 사도들은 특별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로서 이들의 사명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였다. 목사들은 맡겨진 교회를 다스린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도들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하여 교회에 직제를 두셨다. 이 권위는 오직 그의 말씀에 의해 행사되어져야 한다. 그들의 입을 통하여 자신의 사역을 이루시려하신다. 이는 마치 노동자가 연장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무의 도움이 없이 친히 일하실 수도 있고 천사들을 시켜서 일하실 수 도 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신다. 바울은 인간의 사역은 신자들을 묶어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힘줄과 같다고 한다. 인간의 사역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중요한 힘이 된다. 교회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안전하게 유지하기만 하면 교회가 온전히 지켜질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구원과 영원한 축복의 참여자가 되는 것은 복음을 믿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게으른 우리들에게 이러한 믿음이 생기게 하고 증대시키고 그 목표에 이르도록 하기위한 외적인 장치가 교회이다. 교회 속에 있는 이 보물을 “그들의 입술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려고 목사와 교사들을 임명하셨고(엡 4:11) 그들에게 권위를 주셨으며 신앙의 거룩한 일치와 올바른 질서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셨다.”
나오는 말 지금까지 ‘칼빈의 조직경영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이라는 주제하에 한국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경험적인 실례를 들면서 살펴보았다. 이렇게 한 것은 칼빈의 개혁사상과 의도가 과연 우리가 속해있는 장로교회에 스며들어있는가 라는 진단과 점검을 하기 위해서 이다. 한국의 농어촌교회가 취약한 현실은 아이들과 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데 있다. 교회의 통폐합이 부분적으로 이미 이루어 져서 주일학교나 청소년집회는 지역의 큰교회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어려운여건 속에서도 교회의 활력 있는 모습을 되찾기 위해 교회를 특성화 시키며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젊은 교역자들이 있다. 칼빈에게서 보여지는 교회경영의 삼요소는 ‘말씀과 기도와 성례전’이다. 초대교회 역시 신앙의 공동체는 이것들을 통해 기본으로 하여 부흥 성장하였다. 말씀을 통해 죄악된 인간이 구원의 역사와 새 생명의 탄생을 경험하며 알게 된다. 성령의 내적증거를 통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을 확신하게 된다. 교회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간구하는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 교회에서 사역자인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을 선정 할 때는 금식기도를 하였으며 이들은 소명을 받은 자들이었다. 성례가 주는 의미는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징표이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영성과 지성 그리고 인성을 이야기 할 때 인성의 중요성이 요구되는 시점에 이르렀다. 교회는 법과 질서를 준수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추구해야 한다. 교회는 윤리 경영의 장이다. 참된 신앙이 경건한 믿음의 생활로 규정되어지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그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칼빈의 관계경영은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의 집행에서 구체화된다. 그는 경건을 실천할 때 개혁적인 조직경영을 도입하였다. 그의 경영제도는 정치, 사회, 경제면에서 선구적이다.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기위해 정치적 경영을 도입하였다. 이것을 교회의 정치화, 정치의 교회화라고 한다. 그가 만든 조직들은 소의회와 200인회 그리고 총회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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