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읍 김정희 유배지를 떠나 대정향교로 향했다. 조선 숙종 때 제주 목사를 지낸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는 대정향교와 함께 파군산과 산방산이 보인다. 파군산이라… 파군산은 오늘날의 단산을 말한다.
파군산이라는 이름은 단산을 일컫는 '바굼지오름'을 한자음을 빌어 표기한 것이다. 안덕면 사계리와 대정읍 인성리에 걸친 185m의 바위산인 단산은 날개를 편 거대한 박쥐같다는 데서 '바굼지오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혹은 커다란 대바구니처럼 생겼다 하여 '바고니', '바굼지'라 했다는 설도 있다. 과거 이곳은 삼별초의 격전지로 여몽연합군이 삼별초군을 격파한 곳이라 하여 '파군산'이라고도 불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산방산과 단산을 바라보며 대정향교로 가는 길은 제주의 여느 지역과는 달리 너른 들판의 풋풋함이 묻어나는 길이다. 중산간의 황량함도, 제주 바다의 눈부심도, 한라산의 빼어남도 아닌, 제주에도 이런 농촌의 서정성이 깊이 배인 곳이 있음을 절로 알게 되는 길이다.
대정읍을 나와 인성마을에 이르자 온통 마늘밭이다. 파릇파릇 갓 싹을 틔운 마늘이 온통 초록빛을 내는 들판에는 늦가을이지만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이라는 관념만 없었다면 따스한 봄날인 줄 착각이 생길 정도다. 마늘밭에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도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제주만의 액막이 풍습, 방사탑을 아세요?
|
▲ 인성리 방사탑, 석상은 최근에 올렸다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
▲ 여행자에게 인성리 방사탑을 설명한 이인배(91) 할아버지와 단산 그리고 방사탑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단산이 점점 가까이 모습을 드러낸다. 맑은 얼굴빛을 한 초로의 노인 한 분이 저쪽에서 이리로 걸어왔다. 길옆에 방사탑이 있어 걸음을 멈추자 할아버지도 걸음을 멈췄다.
"내가 이 동네에서 나이가 가장 많아. 예전에 농업학교를 나와서 읍사무소에서 일도 했지. 방사탑이 원래 3개가 있었는데 여기 두 개가 있고 저 너머 모슬포 방향으로 한 개가 더 있어. 원래 이쪽 땅이 기운이 없어 '답'을 세운 거야. 저 위에 있는 돌은 최근에 다시 올린 거고."동네에서 가장 연세가 많다는 이인배(91) 할아버지는 농업학교를 나온 인텔리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제주 사투리가 심하지 않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만 귀가 약간 어두우신 탓에 소리를 조금 높여서야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체육복을 입었는데도 자세는 말쑥하고 꼿꼿했다. 얼굴은 으레 장수하는 분들이 그렇듯 맑은 빛이 흘렀고 기운이 넘쳤다. 사진 한 장을 부탁드렸더니 신사의 중절모를 닮은 산방산과 멋진 스카프 같은 단산을 배경으로 할아버지가 자세를 잡았다.
할아버지의 기억과는 달리 인성리에는 4기의 방사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두 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알뱅뒤'라고 불리는 이곳이 허하여 마을에 불이 자주 나고 가축이 병들어 죽자 4기의 방사탑을 세웠더니 그러한 현상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곳에 서 보면 풍수를 잘 모르는 이라 할지라도 들판이 왠지 휑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
▲ 인성리 방사탑 1호, 밭에 물을 대는 스프링클러가 계속 물을 뿌리는 통에 사진 찍느라 애를 먹었다.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방사탑은 원래 마을의 경계나 허한 곳에 원통형의 돌탑을 쌓아 부정과 악을 막고 마을을 평안하게 하는 제주의 오랜 액막이 풍습이다. 육지의 솟대나 장승에 비유되기도 하는데, 원래는 '답', '거욱대', '가왁', '극대', '방시탑', '방사탑' 등으로 불렀다. 이러한 형태의 '답'은 약 50년 전만 해도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제대로 된 원형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최근 민속연구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명칭의 이것을 '방사탑'으로 총괄해서 부른다. 방사탑은 우선 큰 돌로 밑단을 둥글게 한 뒤 그 안에 잔돌을 채우고 다시 가장자리에 돌을 쌓아 원통형으로 만든다. 맨 위에는 돌하르방이나 동자석 같은 석상, 까마귀나 매를 닮은 돌 등을 올려놓는다. 동자석이 있으면 '거욱대', 까마귀는 '까마귀', 매를 세우면 '매자재기'라고 부른다. 까마귀나 매의 경우 돌이 아닌 비자나무나 참나무 같은 잘 썩지 않는 단단한 나무로 만들기도 했다. 흔히 흉조로 알려진 까마귀를 세우는 것은 궂은 것을 모조리 쪼아 먹게 하기 위해서란다.
탑 속에는 밥주걱이나 솥을 묻어두는데, 솥의 밥을 주걱으로 긁어 담듯 재물을 마을로 담아 들이고, 무서운 불을 솥이 이겨내듯 마을의 재난을 없애달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현재 제주도에 39기의 방사탑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중 17기가 제주도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다. 인성마을의 방사탑은 높이 2.3m, 지름 2.3m 내외이다.
몸을 낮추고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는 대정향교
|
▲ 단산과 산방산. 대정향교는 단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방사탑이 있는 인성리 들판에서 단산 자락의 완만한 고갯길을 넘으면 너른 들이 펼쳐지고 산 아래 다소곳이 자리한 대정향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대정향교는 태종 16년(1416)에 대정성 안에 처음 지어진 후 여러 차례 옮겼다가 효종 4년(1653)에 현 위치에 옮겨 지어졌다. 주자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현마다 향교를 설치하고 공자를 모신 사당 역할과 지방교육을 맡게 했다.
|
▲ 대정문,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낮추어야 들어설 수 있다.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대성문을 통해 향교에 들어섰다. 문이 낮아 절로 허리를 수그리고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는데 이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마음자리를 추스르게 한다. 맞은편의 동정문도, 대성전 뜰의 전향문과 퇴출문도 모두 몸을 낮춰 굽혀야 드나들 수 있다.
이곳 대정향교도 여느 향교와 같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기본 구조를 갖추고 있다. 남쪽에 배움의 공간인 명륜당이 북향하여 자리 잡고 그 북쪽에는 사당인 대성전이 있다. 명륜당 좌우에는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대성전으로 가는 삼문은 세 개의 돌층계 위에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남쪽을 향하여 서 있다. 헌종 원년(1835)에 중건된 대성전은 정면 5칸에 전퇴가 있어 제법 장한 기운이 뻗친다.
|
▲ 삼문을 오르면 대성전이 있다.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육지와는 다른 제주만의 독특한 한옥 모습향교의 건물들은 모두 낮고 지붕은 제주도의 다른 건축물처럼 합각이며 수키와가 이어지는 곳엔 회를 단단히 발랐다. 이는 전체적으로 밝은 빛을 띠게 하기도 하지만 바람이 강한 제주에 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육지와는 다른 제주만의 독특한 한옥의 모습이다.
명륜당은 영조 48년(1772)에 중건된 정면 5칸의 건물로 장식이 간결하고 단청을 하지 않아서 전체적으로 강건한 느낌을 준다. '명륜당(明倫堂)'이라는 현판은 순조 때 변경붕 현감이 주자의 필치를 본받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성전 뜰에는 거대한 소나무와 팽나무가 있어 눈길을 끈다. 예전 이곳의 훈장이었던 강사공이라는 분이 삼강오륜을 상징해 소나무 세 그루와 팽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는데, 지금은 이 세 그루만 남아 있다. 추사의 <세한도>에 나오는 것과 비슷해 추사가 이 나무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
▲ 대성전 앞뜰의 팽나무와 소나무는 추사의 <세한도>를 연상하게 한다.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
▲ 대정향교는 제주의 세 향교 중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동재에는 제주에서 추사가 남긴 현판인 '의문당(疑問堂)'이 있다. 제주 지역 유생들과 추사와의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현판으로 의문당은 추사의 스승인 완원의 호다. 헌종 12년(1846) 대정향교 훈장 강사공의 요청으로 추사는 '의문당(疑問堂)'을 써주었고 오재복이 글자를 새겨 향교의 동재에 걸었다.
추사는 공부라는 것이 우리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식적인 것들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던지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자 했다. 현재 이 현판의 원본은 제주 추사관에 옮겨 전시되어 있다.
|
▲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동재와 추사가 썼다는 의문당 현판, 제주 추사관의 의문당 현판 원본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
▲ 명륜당은 북향하고 있다. 낮은 지붕에 회를 단단히 발라 강한 바람에 견디도록 하였다.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추사가 무척이나 사랑했던 세미물향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몇 걸음 가면 산자락에 '세미물'이라는 커다란 표지석이 눈길을 끈다. 이곳은 예전 '돌세미'라고도 불리던 샘물로 인성리와 사계리의 수원지로 사용되던 샘물이다.
추사가 대정에 유배생활을 할 때 세미물이 멀리 있어 물을 길어오기가 어렵다고 호소한 적이 있는데 아마 이 물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미물은 단산에서 나는 물로 다인(茶人)들이 최고로 치는 물 중의 하나로 차를 좋아했던 추사가 무척이나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추사는 물에 대해 일가견이 있어서 제주도의 물맛을 가려가며 차를 시음했던 것으로 전한다.
|
▲ 대정향교 옆의 세미물은 추사가 무척이나 아꼈던 샘물이다.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
▲ 대정향교 앞 길의 추사 전각들 |
ⓒ 김종길 |
관련사진보기 |
향교에서 나와 들판을 따라 걸었다. 얼핏 공사자재로 보일 정도로 울퉁불퉁 제멋대로인 바윗돌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다. '전각'이었다. 예전 문인묵객들이 글씨와 그림에 도장을 찍기 위해 나무나 돌, 금옥 등에 인장을 새기는 것을 말하는데 '낙관'이라고도 했다.
추사는 호가 100과가 넘어 인장 또한 많았다. 오죽했으면 추사의 제주도 제자 박혜백은 스승의 인장들을 모아 <완당인보>라는 책을 만들었을까. 여기에 추사의 인장이 180과나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추사는 제주도 사람들이 손재주가 좋다 하여 전각하는 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길을 따라 쭉 늘어선 추사의 인장들을 감상하면서 전각을 하나의 예술로 승화시킨 추사의 고독과 집념을 쫓아본다.
|
▲ 들판에서 본 단산과 대정향교 |
ⓒ 김종길 |
첫댓글 추사 김정희의 서필사상은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추사는 거상 임상옥, 초의 스님과 함께 조선의 국운을 빌며 담담한 마음으로 이 곳 제주에서 서필사상의 깨끗한 마음을 정립하였습니다. 우리 시대 추사와 같은 진정한 학자가 출현하지 않는 것은 또 하나의 비극이죠....그저 자본주의에 찌든 학자들만이 설치고 다니는 이 세상이 부끄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