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 ②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아주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2)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① 전도몽상(顚倒夢想)
원리(遠離)란 멀리 여읜다는 뜻입니다. 멀리 여읜다는 것은 아주 깨끗이 떠난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에서 깨끗이 떠나냐면 전도몽상(顚倒夢想)에서 떠난다는 말입니다. 전도몽상(顚倒夢想)이란 뒤바뀐 꿈 같은 헛된 생각을 말합니다. 이는 바로 어리석은 중생들의 중생견(衆生見)을 말합니다. 중생견(衆生見)이란 중생들은 늘 실상(實相)을 알지 못하여 제법(諸法)이 공함을 알지 못하고, 착각 속에서 망념을 일으켜 제법(諸法)에 대하여 아(我)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집하여 집착하는 어리석은 견해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잘못된 견해를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합니다. 이는 진실한 실상을 바로 알지 못하고 거꾸로 잘못 파악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② 사전도(四顚倒)
ㄱ. 유위사전도(有爲四顚倒)
중생들의 잘못된 견해인 전도견(顚倒見)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이를 사전도(四顚倒)라 합니다. 이 사전도에는 무엇이 있나 알아보겠습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밝힌 사전도(四顚倒)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깨끗하지 않은 것[不淨] 가운데서 깨끗하다[淨] 하는 뒤바뀜이 있고, 괴로운 것[苦] 가운데서 즐겁다[樂] 하는 뒤바뀜이 있고, 항상함이 없는 것[無常] 가운데서 항상함이 있다[常]하는 뒤바뀜이 있고, '나'라는 것이 없는 것[無我] 가운데서 '나'라는 것이 있다[我]는 뒤바뀜이 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뒤바뀐 견해로 인하여 잘못 보아 전도된 모습을 진실인양 생각하기에 괴로움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가지가지 망상을 일으키어 바라보는 것이 모두 염상(染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대지도론의 말씀에서 보듯 이런 전도(顚倒)된 망상을 원리(遠離)하는 수행이 사념처(四念處) 수행입니다. 사념처에 대해서는 지난 번 사성제(四聖諦)를 설명하면서 나온 팔정도(八正道)를 공부하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복습하는 의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신념처(身念處)로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을 보고 우리가 깨끗하다고 여기지만 이 몸이 실은 부정(不淨)하다고 관(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관신부정(觀身不淨)이라 합니다.
둘째는 수념처(受念處)로 우리의 마음에 낙(樂)이라고 하는 음행(淫行), 자녀(子女), 재물(財物) 등을 보고 낙(樂)이라고 하는 것은 참 낙(樂)이 아니고, 모두 고통이라고 관(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관수시고(觀受是苦)라 합니다.
셋째는 심념처(心念處)로 우리의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늘 변화생멸(變化生滅)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관(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관심무상(觀心無常)이라 합니다.
넷째는 법념처(法念處)로 위의 셋을 제하고 모든 현상에 대하여 실로 자아인 실체가 없으며 또 나에게 속한 모든 물건을 나의 소유물이라고 하는데 대해서도 모두 일정한 소유자가 없다고 무아관(無我觀)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관법무아(觀法無我)라 합니다.
이와 같이 부정(不淨)ㆍ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 등을 거꾸로 정(淨)ㆍ상(常)ㆍ낙(樂)ㆍ아(我)로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이것이 중생견(衆生見)인데 이를 유위사전도(有爲四顚倒)라고 부릅니다. 유위(有爲)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분별하는 마음으로 번뇌망상이 연기(緣起)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유위사전도(有爲四顚倒)는 범부 중생들이 잘못 보고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ㄴ. 무위사전도(無爲四顚倒)
그런데 이 유위사전도 외에 무위사전도(無爲四顚倒)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아직 무상정각(無上正覺)에 이르지 못한 소승의 성문(聲聞), 연각(緣覺)들이 갖는 네 가지 잘못된 견해를 말합니다. 이들은 유위사전도에 대하여선 명백한 견해를 가졌지만 깨달음이란 모두가 없어진 경계라고 착각하여 실상의 세계인 바라밀(波羅蜜)의 본지(本地)인 열반의 세계도 상ㆍ락ㆍ아ㆍ정(常樂我淨)이 아닌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ㆍ부정(不淨)으로 망녕되이 알고 집착하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유위사전도(有爲四顚倒)와 무위사전도(無爲四顚倒)는 모두 잘못된 견해이므로 이를 합해 팔전도(八顚倒)라 합니다. 이와 같은 팔전도를 모두 멀리 떠나야 열반(涅槃)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보살은 이와 같은 팔전도를 아주 남김없이 멀리 떠났기에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③ 구경열반(究竟涅槃)
구경열반(究竟涅槃). 마침내 열반(涅槃)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구경(究竟)이란 범어로 Uttara의 역어로 절대의 구극(究極)을 나타내며 최상(最上)을 형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경열반(究竟涅槃)이란 불교의 최대 목적이자 최종의 목적인 완전한 열반을 뜻하는 것입니다.
ㄱ. 열반의 뜻
열반(涅槃)이란 범어로 Nirvāna입니다. 이는 '불어 끄다'의 의미를 지닌 Nir-vā에서 왔다고 합니다. 이는 탐ㆍ진ㆍ치(貪瞋癡) 삼독(三毒)의 불을 불어 끈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뜻을 번역하여 멸(滅)ㆍ적멸(寂滅)ㆍ멸도(滅度)ㆍ원적(圓寂)이라 하며 해탈(解脫)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는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이 꺼져 없어져서 깨달음의 지혜인 반야(般若)로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합니다. 번뇌의 불이 꺼져 없어진 상태는 참으로 고요하기에 적멸(寂滅)이라 하고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 표현합니다. 그리고 열반의 세계는 고요하면서 밝으므로 적조(寂照)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자(佛子)가 이루려는 궁극의 목표입니다.
ㄴ. 열반의 사덕(四德)
그런데 열반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소승은 단지 탐ㆍ진ㆍ치(貪瞋癡) 삼독이 소멸한 상태로 파악하지만 대승은 이에 더하여 열반을 증득(證得)한 분은 네 가지 덕이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는 상덕(常德)으로 무상(無常)을 벗어나 항상하다는 것입니다. 일체 생멸(生滅)을 떠나 있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락덕(樂德)입니다. 열반(涅槃)은 괴로움을 벗어난 경지입니다. 적멸위락(寂滅爲樂)이라는 말이 있듯이 열반은 고요하고 즐거움으로 충만되어 있다고 합니다.
셋째는 아덕(我德)입니다. 여기서 아(我)는 소아적(小我的) 아(我)가 아니라 우주와 하나 된 대아(大我)를 말합니다. 이는 법신(法身)을 이룬 진아(眞我)를 말합니다.
넷째는 정덕(淨德)입니다. 열반은 불구부정(不垢不淨)의 세계로 염상(染相)이 없는 청정(淸淨)한 세계입니다. 이상이 열반이 가지는 네 가지 덕(德)입니다. 이러한 열반의 덕을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ㆍ부정(不淨)으로 보면 전도(顚倒)된 견해입니다.
ㄷ.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
그리고 이러한 열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이 그것입니다. 보통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 하면 번뇌를 끊어서 열반을 성취했지만 육체가 아직 있어 의지할 것이 있다는 뜻에서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고 하고 줄여서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 합니다. 그리고 무여열반(無餘涅槃)이란 그 몸마저 버렸을 때,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에서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하고 약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육신을 버렸을 때를 완전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드셨다고 하고 대열반(大涅槃)에 드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종종 죽음을 열반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흔히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입적(入寂)하셨다' 혹은 '원적(圓寂)에 드셨다' 또는 '열반(涅槃)하셨다'는 표현을 씁니다. 입적(入寂)ㆍ원적(圓寂)이니 열반(涅槃)ㆍ입멸(入滅)이니 하는 말은 다 같은 말입니다. 열반의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열반이라 하면 죽음을 연상하고 죽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 이러한 표현을 쓰는 것은 스님의 수행정진력을 일반적으로 칭송하는 의미이지 진정한 열반을 성취해서 그런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이란 진정한 뜻을 생각해 보면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됩니다. 열반이란 뜻은 앞서도 밝힌 바와 같이 번뇌(煩惱)의 불꽃이 완전히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분별이 사라진 고요한 상태, 그 자리가 열반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번뇌를 추호도 남김없이 제거하여 열반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적정의 상태에서 45년간 중생들을 위하여 밤이나 낮이나 쉬임없이 설법을 하시며 전법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언제나 평온하여 동요가 없습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가지가지 모습을 나타내며 보인 열반의 경지를 굳이 표현하자면 유여열반(有餘涅槃)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노병사(老病死)를 염리(厭離)하고 욕심을 버리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잘 해탈하면 이것은 이르되 현재의 법에서 반열반(般涅槃)을 얻었다 한다." <잡아함경 권15>
반열반((般涅槃)이란 완전한 열반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현재의 법에서 완전한 열반에 이르셨습니다. 부처님은 법신(法身)을 이루신 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와 하나가 되신 분입니다.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 사라쌍수에서 열반에 드셨다는 것은 육체를 버렸다는 의미보다는 진리와 하나인 법신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여열반의 진정한 뜻이라 할 것입니다.
④ 보살(菩薩)의 공능(功能)
이상과 같이 열반에 대하여 대강을 살펴 보았습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닦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어떠한 두려움도 없고 전도몽상을 완전히 떠나서 마침내 궁극의 목적인 열반에 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반야바리밀다에 의지하는 공능입니다.
이와 같은 보살의 공능이 있음을 알고 우리도 반야바라밀다의 깊은 뜻을 헤아려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의 풍요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생사해탈에 있음을 알고, 열반의 즐거움이야 말로 제일 가는 즐거움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부처님의 공능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백우 _()_ _(())_ |
첫댓글 감사합니다. _()_
유위세계는 無常, 苦, 無我, 不淨이요, 무위세계는 常, 樂, 我, 淨입니다. 이것이 정견입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구경열반을 위하여 나아갑시다. _()_
우리는 자기 존재인 자아를 버리거나 포기하는것은 불가능 하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자아를 버리고 욕심과 탐욕을 소멸할수 잇는 길을 가르쳐 주신것이 바로 사성제법 중 마지막길인 도성제 이지요, 이것은 바로 반야의 생명(진리)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모든 탐욕의 불이 꺼지고 마음이 맑고 평온한 상태가 되면 바로 열반인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실천 못하는 바보들 이지요. 좋은 공부 하고 갑니다....나무묘법연화경()()()
백 개 천 개를 알아도 실천하지 않으면 헛일, 단 한 개를 알더라도 실천하는 자세가 불자가 아닐까 합니다. 다 실천하지는 못해도 반하는 행동은 안 하는 것이 또한 불자의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_()_
반야심경은 부처님의 말씀이 집약되어 있다고 하더니, 공부할수록 심오함을 느낍니다. _()_
그래서 심경아니겠습니까 한 번 읽어서는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기 힘듭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빠른 속도로 독송할 때도 전광석화처럼 반야심경의 뜻을 헤아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_()_
승가 대학 에서도 반야심경 260자 가지고 2년 공부 한다 하지요....나무묘법연화경()()()
승가대학에서 반야심경을 가지고 2년 공부할 시간적 여유가 있는지는 몰라도 반야심경에 담긴 뜻을 다 헤아린다면 2년도 부족할지 모르겠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늘 여여하세요. _()_
삼독의 불을 불어 끈 상태~ 열반, 멸, 적멸, 멸도, 원적, 해탈, 적조.... 많이 배우게 됩니다. 나무석가모니불 ()()()
감사합니다. 보살의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공능은 결국 구경열반에 이르게 합니다. _()_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