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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경 강의
(2007. 9.21 용학스님)
〔우리들의 이야기〕(1)
문수행님: 지금 생각의 뿌리는 앞생각이며 다음 생각은 또 지금 생각을 뿌리로 해서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용학스님: 그렇습니다. 원래는 뿌리가 없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이어갑니다.
방편주님: 스님 그렇다면 우리들이 잠자는 동안에도 생각은 일어나는데 우리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잠자는 동안에는 생각이 쉬는 것입니까?
용학스님: 중요한 질문입니다. 밤낮이 다르다고 해서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한 몸입니다. 의식은 밤낮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루를 통째로 보는 것이 도인의 시각이고 깨달은 분의 시각인데, 생각이 막힌 사람들은 밤과 낮을 구분하지만 마음에는 밤과 낮의 구분이 없습니다.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면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편하게 생각해서 망상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눈을 감고 움직이는 망상을 꿈이라고 합시다. 의식이 상속부단해서 계속 이어져 가기 때문에 잠잘 때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콘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지금 눈 뜨고 있는 있을 때는 약간의 의지를 동반해서 자기가 이끌어 가는 것처럼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꿈속에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자기의 업식이 뿌리가 되어 밤낮 없이 흘러 이어져 가는 것을 상속식이라 합니다.
그러나 낮도 밤도 없이 무심을 견지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그것을 오매일여(寤寐一如)라고 합니다. 저는 성철스님과 해석을 달리합니다. 꿈속에서 잠을 자고 있던지 눈을 뜨고 있던지 마음이 집착으로 흐르지 않고 무심을 견지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오매일여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오매일여가 되느냐하면 낮의 의식을 조절할 수 있을 때 자기를 사마타로 굳건하게 지킨 사람은 잠잘 때도 그렇게 갑니다. 낮에 자신을 굳건히 지키면 밤에 꿈도 또한 그렇게 가고 낮에 생활이 거칠면 밤에도 여지없이 거칠게 되는 것입니다. 낮에 오매불망 짝사 랑하던 사람을 오매불망 잊지 않고 생각하면 꿈속에도 나타나게 됩니다.
의식을 구분해보면 만질 수 있는 마음과 만질 수 없는 마음 즉, 볼 수 있는 마음과 보이지 않는 마음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 마음을 체크할 수 있는 상태를 견성이라 합니다. 그러한 경지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만져지고 뭉쳐지고 흩어버릴 수 있는 마음을 육의식(六意識)이라 하는데 이것에 사로잡혀서 일생을 살다가 그 이전 소식은 뚫어보지도 못하고 가는 것이지요. 그 이전 소식을 계속 뚫고나가는 상태를 수행이라 하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쇠주물로 만든 소머리를 모기가 연약한 침으로 뚫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연약한 침으로 뚫어지지 않으면 몸으로라도 뚫고 들어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수행정진력입니다. 망상을 피우고 아무리 사마타를 견지하고 화두를 들어보고 본성을 보려고 하니까 쇠주물로 만든 소머리처럼 번뇌가 우리를 꽉 막고 있어서 연약한 우리의 수행정진력으로는 뚫고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심으로 무심으로 뚫으면 가능합니다. 포항제철 뜨거운 용광로에 바늘 하나 던져 넣고, 눈 한송이 던져 넣듯이 쉽게 뚫리게 됩니다.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망상이 일시에 사라지면 그 인생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욕심이나 취착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요. 뿌리 본체를 아는 순간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욕심과 취착에서 벗어나는 수행방법이 비파사나로서 마음을 다섯 가지로 나눕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본래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서 아만과 아집입니다. 이것을 건드릴 수 있는 순간에 깨쳤다고 합니다. 이것을 건드리면 책을 보지 않아도 수월합니다. 책이 사람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간파하는 순간부터 아! 이것이 그 뿌리구나하고 느낌이 옵니다. 뿌리의 본체를 뽑아보고 뿌리를 파악하게 되는데 그 전에 뿌리에서 가지로 나온 것들을 육의식이라고 합니다. 육의식은 제가 용학인 줄 알고, 여러분이 문수원까지 찾아오기도 하고 흰떡인지 붉은 떡인지 판단하고 적절히 대응하면서 이와 혀를 써서 떡을 먹을 수 있는 상태를 명료의식(明瞭意識)이라고 합니다. 분명하고 또렷하게 보는 것입니다. 입으로 와서는 맛을 보게 되고, 코로 와서는 냄새를 맡게 되고, 귀로 와서는 소리를 듣게 되고, 눈으로 와서는 사물을 보게 되고 이렇게 각각 다섯으로 흩어지고 의식으로 가서는 혼자 상상하고 망상을 피웁니다. 참선한다고 오래 앉아 있으면 훤하게 앞뒤가 뚫려서 보일 때가 있지요. 이것은 의식이 보는 것입니다.
명료의식이 한군데로 작동하게 되면 휴대폰을 듣는 것에 몰입해 있으면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영화를 몰입해서 볼 때 누가 옆에서 불러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산위독두의식(散位獨頭意識)이라 합니다. 意根의 뿌리와 의식이 작동이 잘 안되면 뒤섞여서 치매현상이 일어납니다. 그 이전의 전생부터 금생까지 쌓아온 업식인 팔식(아뢰야식)으로부터에서 육식으로 나올 때 연결되는 코드가 맞지 않는 것이 치매고, 정신병도 의식이 육식 바깥으로 나올 때 혼탁 되는 것이지 기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치매에 걸리거나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해서 그 사람의 기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고막이 없다고 듣는 힘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보청기 같은 보조장치만 있으면 고막이 없어도 다 들을 수 있습니다. 눈이 없어도 카메라의 조리개와 같은 장치를 신경조직으로 연결만 하면 다 볼 수 있습니다. 눈은 보는 것이 아니고 보게하는 보조적인 장치인 것입니다.
우담화님: 스님, 육식이 다 망가지면 어떻게 됩니까?
용학스님: 육식은 망가지지 않습니다. 육식, 칠식, 팔식은 망가질 수 없고 병이 생긴 것은 팔식과 칠식의 중간 신경조직 루트를 통하여 그 기억을 잡아 와서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게 육식으로 나와야 하는데, 그 핀트가 맞지 않은 것이지요. 칠식이 팔식에서 아들로 잡아왔는데 육식으로 나갈 때 다른 잡것이 섞여서 아버지로 되는 것이 치매입니다. 자성청정에서는 본식이 오염되든지 병들지 않습니다. 정신병은 의식이 밖으로 나와 혼탁하게 섞인 것입니다.
의식 전체를 내 마음이 쫓아가는 군상도 있지만 마음 안으로 고요히 밀고 나가는 의식도 있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을 정중독두의식(靜中獨頭意識)이라 합니다. 이것이 사마타로 가고 화두를 챙겨서 자기를 몰입해 가는 의식입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온갖 망상을 뻥튀기하듯 하는 사람이 있지요. 이런 사람은 산란한 사람이며 심하게 되면 착란이 일어납니다. 이런 것을 산란독두의식(散亂獨頭意識)이라 합니다. 여기와 있는 사람들도 하루 종일 90%이상을 산란독두의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나는 안 그렇다’는 아집이 있는 사람은 더욱 심하다고 봐야합니다. 내가 없다는 無我 쪽으로 생각을 몰아가야 편합니다. 밖에서 생활하시는 분들은 태만하고 게으름피우지 말고 열심히 일해야 하고 스님들은 재물을 모으려 해서는 안 되고…. 이런 것들이 적재적소에 제대로 되어야 하는데 안 되니까 스님이 되어도 산란스럽습니다. 스님이 공부하지 않는 것도 번뇌이고 밖의 생활에서 태만하고 게으른 것도 큰 번뇌로 가는 길입니다.
번뇌 중에서 제일 큰 것은 잠 많이 자는 것입니다. 미인이 잠을 많이 자는 것이 아니라 미혹한 사람이 잠을 많이 자지요.(일동 웃음)
자 여러분 저를 보세요.(모두 스님을 쳐다 봄) 자 이제는 저를 보고 있으면서 보지 마세요. (모두 어리둥절해 함) 가능합니까? 이것이 되는 사람은 도인이지요. 그것은 안 됩니다. 보고 있으면서 안 볼 재주가 있나요? 의식이 콘트롤되지 않지요? 칠식에서 막 밀고 나오기 때문에 無色聲香味觸法 無眼耳鼻舌身意가 쉽게 안 되지요. 안보고 싶어도 무조건 보게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안 듣고 싶은 분은 안 들어도 된다고 하잖아요. 하지만 듣기 좋던지 싫던지 무조건 들어야 하는 필연적인 것이 있지요. 몸과 마음이 피곤해서 쉬고 싶을 땐 자 기도 모르게 잠을 잡니다. 간밤에 다 주무셨지요? 혹시 자고나서 내 마음 잃어버리면 어쩌나라고 생각 안 해 보셨지요?(일동 웃음) 걱정 마십시오. 육식을 잃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자면서도 본식인 팔식은 잃을 수가 없습니다. 뇌를 다 들어낸다고 해도 그동안 쌓아놓은 업은 그대로 있지요. 뇌는 보조장치에 불과합니다. 꿈속에 나타나는 의식을 몽중독두의식(夢中獨頭意識)이라합니다. 독두란 의식이 눈, 코, 귀, 입을 빌리지 않고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말합니다.
100일 묵언정진을 해보면 내면의 소리가 아주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육성의 옥타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 올라가서 고함을 지르면 탑이 무너질 것 같지요. 내면의 소리가 익어져서 여물게 되면 밖의 것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무심을 견지한다는 것인데 바깥의 것을 보는 것을 떨치기 전에 사마타로 안쪽으로 보는 힘을 충분히 기르는 것입니다. 내면의 힘 사마타의 힘을 충분히 기르면 바깥의 것이 안으로 침범할 수가 없지요. 이것이 소리로써 소리를 그치게 하는 이성지성(以聲至聲)이고, 열은 열로써 다스리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인 것입니다. 큰 열이 있는데, 작은 열이 어쩌겠습니까? 물매암이 물에 빠지지 않고 물 위를 가는 것처럼 같이 살면서도 그것에 젖어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의식이지요. 이것을 한번만 알면 세상사는 것 자체가 편안합니다. 고민하지 말고 사부작사부작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처럼 명절 앞이라 공부하는 인원이 적어진 것을 보고, 아 명절이라서 그렇구나 하고 당연하게 넘어 가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다음 수업에는 이 공부방이 꽉 차지않으면 안 할랍니다. (일동 웃음)
비록 망상이지만 우리가 화두를 잡을 때도 그렇습니다. 무(無)라는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앞생각을 지우고 뒷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무심한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계속해서 '이 뭐꼬!’하라고 가르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아주 고민되고 힘들 때에는 그냥 無~! 라고 던져서 無心으로 가야합니다. 무심해지는 순간부터 솜씨가 좋아집니다. 음식 솜씨, 책보는 솜씨가 모두 좋아집니다. 그러기 전에는 강의를 준비해도 여러 시간 걸리고, 프린트를 준비한다, 강의록을 준비한다, 등등으로 번잡하기만 했습니다. 그런 강의는 단지 책을 먼저 본 것을 일러주는 것일 뿐 이해한 것을 강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각경은 특히 사마타수행으로 본체는 비어서 안팎이 하나도 없는 진여를 깨닫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음회에 계속)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_()()()_
그냥 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