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깊은 가을, 안개가 걷힌 후
젊은 여자가 비틀거리며 인도를 걷고 있다.
길을 건너다 도로 위에서 걸음을 멈춘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 피멍 든 얼굴.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왔던 길을 미친듯이 달려 되돌아 간다.
애나(탕웨이 분)는 남편을 죽였다.
그녀는 거실 바닥에 널려 있는 편지들을 찢어 한 조각씩 입에 넣고 삼킨다.
무엇을 감추고 싶어하는 걸까.
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7년 후.
모범수 애나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사흘간의 외출을 나온다.
수인번호 2537번.
주황색 수의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교도소를 나와 정류장에 서 있던 애나는 시애틀 행 버스가 도착하자 들고 있던 과자를 서둘러 먹다가 괜찮다는 버스 기사의 말에 비로소 안도한다.
사소한 자유도 마음껏 누리지 못할 만큼 7년의 세월은 길고도 가혹했던 걸까.
집으로 가는 길, 한 정류장에서 젊은 남자가 급히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탄다.
"저기 혹시..."
다짜고짜 애나에게 부족한 버스비 30불을 빌려 달라는 남자.
(그는 처음엔 한국어로, 나중엔 영어로 말한다)
망설이던 애나는 지폐를 꺼내 건네준다.
(그녀의 선량한 본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그녀에게 남자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풀어 손에 쥐어주며 말한다.
"이 시계요, 저한텐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요. 돈 갚을 때까지 그쪽이 가지고 있어요. 잃어버리면 안 돼요"
(7년 전 시간이 멈추어 버린 애나에게 하필 시계를 주는 남자, 의미심장하다)
훈(현빈 분)은 남창이다.
미국에 온지 2년, 고객 옥자(김서라 분) 남편(제임스 C.번스 분)의 부하들에게 쫒겨 급히 시애틀 행 버스에 올랐다가 우연히 중국인 애나를 만나 그녀를 유혹하기로 맘 먹는다.
그들이 도착한 시애틀은 가을비에 젖어 있다.
자욱한 안개 속에 선 애나는 잠시 길을 잃은 듯 보인다.
7년 만에 돌아온 어머니의 집은 낯설다.
가족들은 어색한 다정함으로 그녀를 반기지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집도 곧 팔릴 참이다.
그녀는 그 곳에서 어쩌면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일지도 모를 옛 애인, 왕징(김준성 분)과 조우한다.
애나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그는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됐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는 왕징에게 애나는 말한다.
"나한텐 많은 일들이 없었어요"
거리에서 새 드레스를 사 입은 애나가 교도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공중화장실에서 원래의 옷으로 갈아 입는 장면은 잠시 꿈을 꾸던 그녀가 '72시간'이라는 시한부의 자유를 새삼 실감하는 가슴 아픈 신이다.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애나는 매표소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포기하고 만다.
거리에서 우연히 재회한 훈에게 그녀는 말한다.
"나랑 잘래요?"
하지만 애나는 아직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긁지 말아요, 그럼 더 나빠져요"
귀걸이 알러지 때문에 자꾸 귀를 긁는 그녀에게 훈이 말한다.
그의 말대로 애나의 아픔도 언젠가는 그렇게 자연치유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애나는 훈의 직업에 대해 알게 되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말하게 된다.
늘 안개와 비에 젖어있던 도시가 눈부신 햇빛으로 찬란하게 빛난다.
애나 앞에 놓인 찰나의 자유처럼.
시애틀을 잘 안다는 훈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놀이공원은 공사중이다.
범퍼카를 타고 놀던 그들 앞에 펼쳐지는 두 연인의 일화는 처음에는 훈의 상상을 통해, 그리고 애나의 입을 통해 구체화 되다가 이윽고 몽환적인 사랑의 춤으로 마무리 된다.
한국인 훈과 중국인 애나가 영어로 대화하는 불완전한 소통이 무언의 몸짓으로 완전한 소통에 이르게 되는 중요한 시퀀스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내러티브.
애나는 내일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면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중국어로 담담하게 그녀의 아픈 과거를 털어놓는다.
중국어를 모르는 훈은 애나의 표정을 살피며 '하오'(좋다)와 '화이'(나쁘다)로 번갈아 대답한다.
그의 엉뚱한 대답은 이상하게 애나의 마음을 위로한다.
그녀가 원했던 건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잠자코 자신의 말을 들어줄 그 누군가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 안으로 한 발짝 다가서게 되지만 생각지도 않은 사건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엇갈리고 만다.
훈의 시계를 침대 위에 올려두고 애나는 호텔을 떠난다.
다음날 훈은 수소문 끝에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장을 찾아간다.
왕징은 훈의 정체를 의심하며 묻는다.
"당신 누구야?"
감정이 격해진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인다.
"이 사람이 내 포크를 썼다구요!"
훈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은 애나는 당황한 왕징에게 따져 묻는다.
오래 담아 두었던 왕징에 대한 애증이 훈으로 인해 폭발한 것이다.
"왕징, 왜 이 사람 포크를 썼어요? 사과했어야죠. 설사 모르고 그랬더라도, 안 그래요?"
애나는 울부짖으며 묻는다.
"왜요? 왜요?"
"미안해"
왕징은 그제서야 애나의 속뜻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또다시 비가 내린다.
애나는 돈을, 훈은 그녀가 돌려줬던 시계를 다시 선물한다.
"기념으로 가져요"
(훈은 '나 이런 거 많아요' 라고 말한다)
"잘가요"
훈의 마음을 거절하고 돌아서는 애나.
하지만 훈은 교도소 행 버스에 올라타 다시 애나의 옆자리에 앉는다.
훈의 농담에 그녀가 웃는다.
그들은 마치 처음인 것처럼 인사를 나눈다.
뭉클하다.
짙은 안개에 발이 묶인 고요한 바닷가 휴게소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뜨거운 포옹과 입맞춤을 나눈다.
(김태용 감독은 불행한 연인들의 절절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롱 테이크로 표현하고 있다)
분노한 옥자의 남편은 옥자를 죽이고 훈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다.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회색빛 안개는 외로운 애나를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훈의 절박한 심경을 드러내는 슬픈 은유다.
"여기서 다시 만날까요, 나오는 날에"
잠든 애나의 손목에 시계를 채워주고 떠난 훈.
사라진 훈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애나의 공허한 눈빛.
안개가 걷히고 버스는 떠난다.
다시 혼자가 된 슬픈 애나를 싣고.
2년 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애나는 훈과 이별했던 바닷가 휴게소로 간다.
문이 열릴 때마다 그녀의 시선은 문 쪽으로 향한다.
"안녕, 오랜만이에요"
오지 않는 훈에게 그는 나지막이 인사한다.
쓸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이 영화의 원작은 이만희 감독의 1966년 작 <만추>이다.
후에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년)과 김수용 감독의 <만추>(1982년)로 리메이크 되었다.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 달라짐에 따라 인물의 성격도 변하기 때문에 원작과의 비교가 굳이 필요할까 싶지만 일단 떠오르는 김태용의 <만추>는 이전 작품에 비해 덜 '육'적이다.
'시애틀'이라는 공간의 특수성으로 인해 '안개'라는 소재가 주인공들의 심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만추>는 슬프고 아름다운 멜로드라마다.
멜로의 미덕은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깊은 부분인 사랑, 그 감정이 바닥을 치는 걸 간접 경험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충격적인 이미지로 각인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문득 눈물이 나는 영화.
훈과 애나의 '그 후'가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글/배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