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 변호사 웹진ㅣ2006.2월호 [이 사람의 삶과 꿈ㅣ 아픈 사람없는 세상을 위해 인술을 펼치는 침구사 남수침술원 김남수옹]
“침술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무어라 할 수 있을까요?” “침술은 보물입니다.” “보물이요?” “제 아무리 값진 청자 백자니 하는 것도 일정한 감정가가 있잖아요. 하지만 침술은 액수로 가늠할 수 없어요.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두고두고 사용될 것이니까요. 수억 년이 가도 바꿀 수 없으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물 중에 보물인 거죠. 허허허.” 그랬다. 정통침뜸의 맥을 고스란히 이어온 구당(灸堂) 김남수(92) 옹에게 침술은 소중한 보물단지요, 대대손손 물려줄 가보였다.
60년 넘게 사랑의 인술 펼쳐
연일 강추위가 계속되던 어느 날, 김남수 옹을 만나기 위해 홍릉 사거리에 위치한 남수침술원을 찾았다. 1층에는 김남수 옹이 운영하는 침술원이, 2층엔 침뜸을 연구 보급하고, 침뜸무료 진료활동을 하는 뜸사랑봉사단 사무실이 있었다. 진료실로 들어서자 김 옹은 구순(九旬)을 넘겼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활기찬 모습으로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었다.
자신의 건강도 모두 침뜸으로 유지해 올 수 있었다고 말하는 김옹은 손끝의 흩어짐 없이 가늘디가는 침을 정확히 놓는가 하면 휴대전화의 부재중 전화까지 체크할 정도로 눈도 밝았다. “시력이 좋으신가보다”는 말을 건넸다가 ‘ 눈이 나쁜 것이 비정상이고 잘 보이는 것이 정상인 것이지, 눈이 좋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핀잔만 받았다.
김옹의 하루 평균 수면은 4시간도 채 안 되지만 전혀 체력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단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진료와 강의, 그리고 연구 집필로 자정이 넘어서야 잠이 들고 새벽 4시면 일어나 진료받는 환자들이 한기를 느끼지 않도록 진료실 난방부터 살핀다. 진료가 이른 아침 5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누가 진료를 오겠나 싶지만 그나마도 서두르지 않으면 그 날 진료 순번을 받지 못한다. ‘침 한번 집’으로도 유명한 그의 침술원에는 연일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1943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침술원을 연지 어언 60년이 지났다. 의원이었던 부친도 침을 놓았고, 형님도 침구사였다. 김옹 역시 열한 살때 침을 잡기 시작해 자연스럽게 침구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슬하의 1남3녀 중 딸은 미국 침구대학원에 유학중이고 아들은 남수침술원에서 함께 인술을 펼치고 있다.
그는 환자를 진찰할 때 바라보는 망진(望診), 듣고 냄새 맡는 문진(聞診) 물어보는 문진(問診), 그리고 만져보는 절진(切診) 등 사진(四診)만으로 환자의 질병을 알아낸다. 몸에 나있는 잔털 하나, 흘리는 땀방울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병이란 균형이 무너져서 오는 것이므로 균형이 무너지려는 징조나 혹은 무너진 흔적은 어딘가에서 분명 나타나기 마련이란다. 10년 동안 아이가 없어 고민하던 부부, 칠년 동안 신경통으로 시달리던 할머니, 디스크 수술을 세번이나 받았다 뒤늦게 찾아온 중년 남성, 중풍, 당뇨, 부인과 질환을 가지고 찾아왔다. 침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환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또 쥐도 새도 모르게 불려가 침을 놓아준 거물급 인사도 한둘이 아니었다. 김옹은 또 화상침법을 개발하여 침으로 화상(火傷)을 완전히 치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가 침의 화상치료를 처음 확인한 것은 지난 1986년 겨울. 그가 왕진을 다녀온 틈에 부인이 얼굴과 가슴에 온통 화상을 입었다. 아궁이에 불을 살피러 가다 미끄러져 물솥의 뜨거운 물에 데었던 것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평소 침으로 화상을 치료하면 잘 낫는다고 했던 김옹의 말이 떠올라 부인은 급한 대로 데인 자리에 침을 놓았다. 그렇게까지 심한 화상환자를 치료해본 적이 없었던 김옹에게 부인이 첫 화상 환자가 된 셈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화상치료를 받기 시작하던 날 부인은 화기(火氣)가 가라앉고, 사흘째 날엔 보기 흉측할 정도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고 진물도 그쳤다. 그리고 여드레째 날 드디어 딱지가 벗겨지고 매끈매끈한 새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옹은 그 뒤 4년간 화상 치료 사례를 기록하고 연구해 1994년 세계침구학회연합회 국제침구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 김옹은 의사들에게 침을 가르칠 때 늘 화상침법을 강조했다. 병원을 찾은 화상환자에게 침술을 시도한 의사들도 그 효과를 직접 체험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침 하나 뜸 하나에 혼을 담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업적으로는 세종대왕의 한글, 해시계 등을 듭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갚진 것이 침(鍼)입니다. 침은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동양의학의 경전이라 불리는 중국의 황제내경(黃帝內徑)에도 침뜸은 동방과 북방지역(한반도와 만주일대)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침구(鍼灸)는 침과 뜸의 자극으로 인간의 자연치유력을 끌어내는 치료법으로 세계보건기구(WHO)는 1998년에 “300여종의 질병을 침뜸술로 치료할 수 있다”고 공식 발표한바 있다. 특히 미국·영국·프랑스·일본 등 각국의 의과대학에서 침뜸의학을 연구하는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정작 종주국인 국내에서는 침뜸의학이 홀대를 받고 있는 것을 김옹은 매우 통탄해 했다. 1962년 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침구사제도가 사라져버려 그 후 더 이상 침구사 면허증이 발급되지 않았다. 이제 침술원은 김옹처럼 제도가 없어지기 전 면허를 획득한 침구사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을 뿐이다. 1980년 어느 날, 침구사제도 부활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던 그에게 실낱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보사부장관이 침구사제도를 부활시킨다는 발표였다. 김옹은 너무 기쁜 나머지 쇼크를 받고 쓰러지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어찌 된 일인지 아무 해명 없이 그 발언은 공언(空言)이 되어 버린 것이다.
김옹은 다시 침을 잡지 않겠다는 결심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억울한 심정에 눌렸던 침뜸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애정이 마구 솟구쳐 올라왔다. 그 때 늘 마음에 숙원처럼 남아있던 의료봉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평소에도 시간만 나면 가족과 함께 낙도나 오지, 무의촌으로 봉사활동을 다녔지만 아예 요일을 정해 몸이 불편한 독거노인과 장애아를 무료로 치료해 주기로 했다. 일주일에 하루만 진료를 하고 나머지 5~6일은 정부과천청사와 국회, 감사원, 종로의 무료진료소를 비롯 전국을 누비며 봉사활동을 다니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창단된 것이 바로 ‘뜸사랑봉사단’이다. “수술후유증이 없는 침뜸으로 사시를 정상으로 회복시키고, 마비가 되어 손가락이 펴지지 않는 뇌성마비 장애아가 침을 통해 손가락을 펴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 기분은 아마 벼슬아치도 모를 거예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기쁘답니다.” 그에게 치료를 받고 완쾌된 이들이 감사인사를 할 때마다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침이 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봉사도 불법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와 경찰청을 수도 없이 불려 다녔다. 그러나 늘 결과는 ‘혐의없음’,‘무죄’라는 판결이었다.
중국에서는 신체 및 정신장애아를 침으로 고쳐 큰 효과를 보고 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우리나라 장애아의 부모들이 앞다투어 중국으로 향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 제도적인 장치가 막혀 있는 국내 현실에 김옹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고 판단한 김옹은 여생을 침구사양성제도 부활에 바치기로 했다. 서둘러 정통침뜸교육원을 세워 누구나 쉽게 침뜸을 배울 수 있는 교육과정을 만들었다. 침뜸을 배우러 오는 교육생 중에는 김옹을 인터뷰 하러 왔다 침뜸의 매력에 푹 빠진 방송국 기자, 침으로 갑상선암을 치료한 뒤 본격적으로 침뜸을 배우게 된 여성 등 사연도 모두 제각각이다. 교육원의 까다로운 교육과정과 임상실험, 그리고 자체 시험을 통과한 정예부대는 뜸사랑봉사단에서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현재 전국 30여 지부에서 연간 16만명에게 무료진료를 실시하고 있는 뜸사랑봉사단은 이제 해외로도 뻗어나가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프리카 잠비아에 진출, 정식의료면허를 발급받아 AIDS(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 치료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은 1만여명이 침구면허를 가지고 있고, 가까운 일본만 해도 매년 5천명의 침구사를 배출하고 있지만, 의사가 침구를 활용할 수 없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뿐입니다. 이제 의료시장이 개방되면 역으로 해외에서 침구사들이 몰려 올 텐데 그럴 때를 대비해 의사, 한의사를 대상으로 제대로 된 침구교육이 시급합니다.” 이를 위해 김옹은 벌써 침구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침뜸의학개론, 경락경혈학, 장상학, 침뜸술 등 전문서적 9권을 발간한 상태다.
김옹이 말하는 침뜸의 신비는 이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프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아파도 가볍게 앓고 빨리 회복할 수 있는 인체의 치유능력을 높이는 것이 바로 침뜸이라는 것. 김남수 옹은 지금까지 한평생 외길만을 묵묵히 걸어왔다. 그의 발은 늘 환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의 손에는 언제나 침구가 들려있었다. 그는 오늘도 변함없이 침 하나, 뜸 하나에 사랑과 혼을 담아서 나눔과 희생의 참된 인술(仁術)을 펼치고 있다.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픈 사람 없는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정통침뜸 교육 및 후원문의 02-964-7994 http://www.chimtm.net)
구당 김남수 옹 1915년 광산군 하남면 출생. 부친으로부터 한학 및 침구학 전수, 연구 1943년 남수침술원 개원 서울맹학교 교과서 제정위원 및 심의위원 중국 북경침구골상학원(현 북경중의약대학) 객좌교수 세계침구학회연합회(WFAS) 침구의사 고시위원 및 교육위원 사단법인 대한침구사협회 입법추진위원장 사단법인 대한침구사협회 봉사단장 현직 : 남수침술원 원장/뜸사랑회장/뜸사랑 봉사단 단장/정통침뜸교육원 원장/정통침뜸연구소 이사장/녹색대학 석좌교수/맹학교 교재심의위원 <저서> 침의 이론과 실제 나는 침과 뜸으로 승부한다 침뜸이야기 외 다수
공지애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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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보고 감동 받았슴다~~~
해랑님하고 침하고는 잘맞는듯~~~
그래서 지금 침의술로 한 번 고려중에 있어용...^^